요한계시록1장
서론
요한계시록은 편지입니다. 계시록을 읽을 때는 항상 이 부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요한계시록은 이상하고 신비로운 묵시로만 이해하려고 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위안과 소망을 주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위로의 편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조는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1-8절까지는 요한계시록 전체 서론에 해당됩니다. 1:9-3:22까지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되어 있고, 4:1-8:1까지는 천상에서 경배 받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 받은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시는 어린양이 등장합니다. 8:2-11:19은 일곱 나팔, 12:1-14:20까지는 일곱 표적, 15:1-16:21까지는 일곱 대접이 등장합니다. 여기까지가 전반부에 대항됩니다. 17장부터는 후반부에 속하는데 바벨론 음녀로 대변되는 악의 무리들이 심판을 받고 새로운 신천지가 도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나누었습니다.
1:1-8 서론
1:9-3:22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4:1-8:1 일곱인
8:2-11:19 일곱 나팔
12:1-14:20 일곱표적
15:1-16:21 일곱 대접
17:1-18 음녀의 심판
18:1-바벨론의 패망
19:1-20:15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천 년 왕국
21:1-22:21 새하늘와 새 땅의 도래와 마무리
요한계시록 1장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3절은 서론에 해당되고, 4-8절은 예수님에 대한 소개, 9-20절은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입니다.
1-3절 서론
4-8절 예수님에 대한 소개
9-20절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
1. 1-3절 서론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시작합니다. 이 서신은 ‘묵시(Ἀποκάλυψις)’ 즉 계시입니다. 계시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시는 어떻게 해서 오는가? 앞으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전해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표현은 모세의 위엄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실제로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각이나 사유를 통해 이해되고, 통제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에 대해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히 2: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2. 4-8절 예수님에 대한 소개
요한은 먼저 일곱교회에 편지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있기를 간구함으로 인사합니다. 이제부터 요한 예수님을 소개하는 소개들을 유의하여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4절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입니다.
또한
5절에서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로 소개됩니다. 이 부분은 시편 2편에서 언급된 하나님께서 시온에 ‘나의 왕’을 세우신다고 표현한 것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위엄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위를 해당’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6절에서는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예언합니다.
더 놀라운 고백은 8절에 있습니다. 화자는 ‘주 하나님’인데, 알파와 오메가로 소개하여, 4절에서 소개된 ‘이제도, 전에도, 장차 올’ 자로 소개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그러니까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등한 존재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 속에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비슷한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사]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두 구절의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의 주관자요 통치자로 소개하는 방법입니다. 그레고리 비일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상극법들은 모든 역사, 특히 구원과 심판으로써 역사를 마지막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배권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해 계시며,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편지를 받는 고난 받는 교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현재 교회는 거대한 권력집단인 로마황제를 중심으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의 말 한 마디가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풍전등화와 같아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로마황제가 신처럼 군림하는 것 같지만 역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역사의 주관자로서 예수님은 5장부터 등장하는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인을 떼실 때 위력을 나타냅니다. 인을 하나 뗄 때마다 지상에는 엄청난 사건과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계시받는 요한
3. 9-20절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
9-11절에서는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요한 현재 밧모라는 섬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요한에게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 명합니다. 일곱 교회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왜 일곱 교회인지 알 수 없으나 일곱은 완전수로 계시를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수로 보입니다. 요한은 음성을 들리는 곳을 향하여 몸을 돌립니다. 12절부터 유의해 봅시다.
일곱 금 촛대가 등장합니다. 일곱 금 촛대는 20절에 보면, 일곱 교회입니다. 13-16절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 같은 이를 봅니다.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일곱 별은 일곱 교회에 보내지는 일곱 사자입니다. 13-14절의 인자 같은 이의 표현은 다니엘서 7:9에서 가져온 표현이고, 15절의 표현은 에스겔서 43:2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구약의 하나님이 예수님이심을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역시 다니엘서 8:18에 등장하는 표현과 흡사합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전에 죽었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사 22:22) 1장에 소개된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썼던 표현들을 예수님께 사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시며 통치자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표현들은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하나씩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 별을 붙잡고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는 표현은 에베소교회에 사용하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표현은 서머나 교회에 사용합니다.
결론을 내려 봅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흠없는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졌고, 죽었다가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다시 살아나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모든 악의 무리를 대적하실 힘이 있으시고, 실제로 그들을 이기실 것입니다. 짐승과 음녀로 대표되는 로마와 로마황제를 절대 어린양의 보호를 받는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그 어떤 권세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일곱 촛대(λυχνία)
일곱 촛대는 일곱교회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며, 촛대는 성막 안에서 불을 밝힌 그 촛대를 연상시킨다. 스가랴 4:2-6 글곱 등불을 가진 촛대는 성전 전체를 가르키는 제유법이다. 촛대가 확장되어 신실한 이스라엘을 가르키기도 한다.(슥 4:6-9) 여기서 촛대는 λυχνία인데 램프이다. 엄밀하게 촛대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등불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성마과 성전 안에서 촛대는 하나님의 임재, 즉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 계명 말씀을 뜻한다. 성막 안에서 빛은 없다. 동물가죽과 천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성막 안은 한 치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이다. 하나님은 성소에 촛대를 세우게 하여 성소를 밝혔다. 불빛은 어둠과 싸우는 존재이다. 빛 자체는 어둠과 존재론적으로 적의적이다. 어둠과 맞서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빛이란 의미는 세상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고, 악에 저항하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빛은 종종 증언,을 뜻한다.
계시록 안에서 교회를 촛대로 묘사하는 이유는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과 싸워야하고, 진리의 빛을 비추는 존재이어야 한다.
* 일곱 별의 비밀( μυστήριον)
요한계시록2장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지방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두 일곱 교횝니다. 순서는 에베소 교회(2:1-7), 서머나 교회(2:8-11), 버가모 교회(2:12-17), 두아디라 교회(2:18-29), 사데 교회(3:1-6), 빌라델비아 교회(3:7-13), 라오디게아 교회(3:14-22)입니다. 오늘은 2장에 소개되는 에베소교회와 서머나 교회, 그리고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를 간략하게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구조
에베소 교회(2:1-7)
서머나 교회(2:8-11)
버가모 교회(2:12-17)
두아디라 교회(2:18-29)
교회에 대한 메시를 전할 때 일정한 패턴을 반복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가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각 교회마다 드러내는 예수님의 이미지가 다릅니다. 에베소 교회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소개됩니다. 그 다음은 교회에 칭찬과 책망을 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귀 있는 자는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말하면서 마지막 권면을 함으로 마무리합니다.
에베소 교회(2:1-7)
에베소 교회를 향해 예수님은 자신을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일곱 별은 교회에 보내는 일곱 사자들입니다. 사자는 대체로 천사로 번역하나 예수님의 메시지는 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의 목회자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의인을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1:16과 1:20를 연이어 생각해 본다면 ‘일곱 별’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붙들고 있는 존재는 분명해 보입니다. 2:1에서도 예수님은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금 촛대가 교회를 뜻하기 때문에 일곱 별과 촛대는 교회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칭찬
먼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잘한 일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먼저 행위와 수고가 있습니다. 삶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삶과 신학적인 측면에서 있어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책망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뭘까요? 4절에 보면 ‘처음 사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 또는 처음 행위는 뭘 말하는 걸까요? 종말에 때에 일어난 현상 중의 하나는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마 24:12) 5절의 ‘떨어지다’는 표현은 ‘약함, 패배, 비겁함의 숨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촛대는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촛대를 옮긴다는 말이 교회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심판이라면, 촛대는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약 속에서 빛은 진리의 말씀과 동시에 성도들의 말씀에 합당한 삶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른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이 식어진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겁을 먹고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전통도 있고, 바른 교리도 있는 것에 만족해 버리는 것입니다. 굳이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을 믿었는데 또 다른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교리를 알고 믿기 때문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놀랍게 처음 행위를 가져야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5)고 경고하십니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다른 지역으로 교회를 이동 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답지 못한 교회로 만들어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어떤 교회를 보면 설교도 좋고, 도덕적으로 바르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차갑고, 냉랭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냥 서로 대면대면할 뿐입니다. 주님은 그런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라고 책망하십니다. 책망할 뿐 아니라 계속하여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회복할까요? 6절을 보면 니골라 다이 나옵니다. 니골라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의 한 명이었지만 후에 타락합니다. 그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구원을 받으면 더 이상 바른 삶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헬라적 사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육신의 정욕을 위해 사용하는 존재들입니다. 니골라 당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에베소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성도간에 사랑과 헌신이 결여 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ㄱ. 생각하라(5절 상)
5절에서 먼저 ‘생각하라’라고 권면합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과거로 되돌아가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잘못된 길을 선택했고, 그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보니 조금씩 조금씩 잘못된 길로 빠져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언제 왜 그렇게 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ㄴ. 회개하라(5절 중)
생각하고, 그 다음 ‘회개하라’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문자적으로 되돌아 온 길로 다시 거꾸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회개를 울고 불고 하는 것으로 회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삶을 말합니다. 삶의 태도를 고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언행을 고치고, 우리의 행동을 고치고, 우리의 삶의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ㄷ.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중)
‘가지라( ποιέω)’라는 뜻은 ‘만들다’(히12:27)는 뜻입니다. 삶을 차곡차곡 만들어 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
요한계시록 3장은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편지입니다.
사데 교회(1-6절)
사데 교회에 소개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입니다.
여기서 주의해 볼 것은 ‘일곱 영’입니다.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인 것은 알겠는데 갑자기 일곱 영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요? 먼저 요한 계시록에 소개되는 일곱 영에 대한 구절들입니다. 3장 외 두 번 더 등장합니다. 한 번은 4:5이고, 다른 한 번은 5:6입니다.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4:5에서 일곱 영은 하나님 보좌 앞에 켠 일곱 등불로 소개됩니다. 5:6에서는 어린 양이 있는데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데, 일곱 눈이 곧 일곱 영입니다. 그러니까 일곱 영은 하나님 보좌 앞에 있으며, 어린 양이 소유하고 있고, 일곱 눈입니다. 눈은 하나님의 전지성을 말합니다. 성경 속에서 천사들은 종종 하나님의 눈을 대신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일곱 영은 일곱 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메신저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에 소개되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알고 계시는 전지한 하나님이십니다. 왜 사데교회에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전지성이 강조될까요?
먼저 사데 교회는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다고 말합니다.(1절 후) 즉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3:2)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 그리스도와 기독교 공동체 대한 온전한 헌신’없음입니다. 이상웅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안에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으며, 그들 가운데 예배의 감격을 잃어 버린지 오래되었으며, 그들 마음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화려한 제사는 있으나 믿음은 없었던 가인의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함과 분주함에 속습니다. 마치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열정을 회복하라.(2-3절)
ㄱ. 깨어나라
사데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먼저 깨어나야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깨어’라고 말합니다. 영어 성경은 좀더 분명하게 “Wakr up!”이라고 말합니다. 왜 일어나야 합니까? 3절에서 주님은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심판하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ㄴ.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요? 3절 초반을 보시며,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처음 받을 때로 돌아가야 할 것을 명합니다. 출처: [Pensées]
▣ 요한계시록 2-3장 7교회 비교
/교회 | 에베소교회(계2:1-7) | 서머나교회(2:8-11) | 버가모교회(2:12-17) | 두아디라(2:18-29) | 사데교회(3:1-6) | 빌라델비아(3:7-13) | 라오디게아(3:14-22) |
예수의이름 | 7별과 7등대를 주장하는 이(2:1) |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2:8)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2:12) | 눈이 불꽂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이(2:18) | 7신과 7별을 가지신 이(3:1) |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 | 진실하신 이(3:14) |
칭찬 | 환난과 궁핍을당함(2:9) | 굳게 잡고 배반치 않음(2:15) | 선행이 전진하였다 함(2:19) | 옷을 더럽게 아니함(3:4) | 굳센 힘으로 말씀을 지킴(3:8) | ||
책망 | 처음 사랑을 버림(2:4) | 니골라 무리의 교훈을 지킴(2:15) | 음행함(2:20) | 유명무실타 함(3:1) |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음(3:15) | ||
권고 | 회개하라 함(2:5) | 죽도록 충성하라 함(2:10) | 회개하라 함(2:16) | 굳게 잡으라 함(2:25) | 늘 깨어 지키라 함(3:2-3) | 굳게 잡고 면류관을 빼앗기지말라(3:11) | 금과 흰옷과 안약을 사라함(3:18) |
생명나무 열매를 줌(2:7) | 생명의 면류관을 얻고 둘째 사망을 면함(2:10-11) | 만나와 흰 돌을 줌(2:17) | 새벽별을 줌(2:28) | 생명책에서 이름을 흐리지않음(3:5) | 성전의 기둥재목이 되게함(3:12) | 보좌에 함께 않겠다 함(3:21) |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의 배경, 구조, 개요 (0) | 2021.03.10 |
---|---|
요한계시록 13장, 14장, 18장 (0) | 2021.03.10 |
마태복음의 지시성과 수사학 (0) | 2021.03.08 |
성경시대의 생활풍습- 베드로가 잡아 성전세를 낸 ‘베드로고기’는 어떤 생선일까? / 외 (0) | 2021.03.06 |
성서 시대 생활 풍습 - 옷에 대한 이야기 (0) | 2021.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