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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북이스라엘 멸망 - 바벨론 멸망- 페르시아- 알렉산더 -마카비 혁명

by 은총가득 2021. 1. 21.

1.[북이스라엘 멸망부터 앗수르 바벨론까지]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 이 후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1.[북이스라엘의 멸망]...부터 살펴 보자면
북이스라엘은 bc931년 여로보암 1세를 시작으로 bc722년 아시리아 제국에게 멸망되기까지 209년간
계속되다가 19대 호세아왕까지 이어졌지만 대부분의 왕들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부도덕과 악정을 되풀이하듯 합니다
bc74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앗수르]제국은 대군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이때 19대 호세아 왕은 순종하며 공물을 바쳐 나라의 멸망을 겨우 면하지만 아시리아에 배반하여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를 알게 된 아시리아 제국의 왕(살만에셀 5세)은 호세아를 잡고 이스라엘을 포위했으나 이스라엘 인들은 3년간 완강하게 저항합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bc722년 아시리아[앗수르]제국은 다시 쳐들어와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켰고 이때 대부분의 이스라엘인은 포로가 되어 아시리아 제국으로 끌려갑니다.

하지만 이 이후에 살만에셀 왕에 대한 기록은 없고 사르곤2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사야서에 그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유대사람들의 충성심도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과 결혼하여 우상들을 받아들이고
[사실 아시리아가 강압적으로 각지의 전통종교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될 상황이 오게 되더라도
아내는 돌아오고 싶어도 남편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와 같은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민족 주체성을 조금씩 잃게 되고맙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신약에 배경에서 사마리이안들이유대인들한테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되는 가장 큰 계기가 되는데 이방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유대인으로 여기지도 않게 됬던 것 입니다 그들은 제국 곳곳으로 흩어졌고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어 결국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참고로 아시리아[앗수르]는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회개를 외치게 했던 니느웨를 수도로 삼은 나라이기도 했고 요나가 갔을 당시에는 살만에셀5세 보다 3번째 전 왕인 아수르단3세가 왕이었을 때이고 앗시리아 에포임에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bc763년 6월 15일 일식현상]


앗수르의 왕들
살만에셀4세/bc783-773-아수르단3세/bc773-755-아수르나라리/bc755-745-다글랏빌레셀3세/bc745-722-
살만에셀5세/bc727-722-사르곤3세/bc722-705-산헤립/bc705-681-에실핫돈/bc681-669-아술바니팔/bc669-633-아술에틸릴라니/bc633-629/신시리스군/bc629-612
진정한 앗수르[앗시리아]의 창시자는 다글랏빌레셀3세(딜갓-빌레셀,티글라스 필레세르)이다 이때 앗수르가
바빌로니아와 시리아를 정벌했으며 이스라엘을 공략한 것입니다

위와 관련된 성경의 기록
[왕하17:3]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이 그를 치러 올라오자 호세아가 그의 종이 되고 그에게 예물을 바쳤더라.
[왕하18:9]히스키야왕 제 사년, 곧 이스라엘 엘라왕의 아들 호세아 제 칠년에 앗시리아의 살만에셀왕이 사마리아를 치러 올라가서 포위하고
[사20:1]앗시리아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신약 성경을 볼때의 포인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었고
그때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앗수르제국 사람들과 결혼해서 혼혈인이라 생각하고
이방인 취급을 하며 유대인 취급을 해주지 않았다

이 이후 앗수르왕 산헤립은 남유다를 점령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랍사게에게 라기스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게 하여
남유다 왕 히스기야에게로 가게 합니다
랍사게는 지금으로 따지면 영어와 같이 세계 공용어 같은 아람어를 말 할 수 있었으면서 유다 방언으로도 히스기야의 대신들에게 말을 할 수 있었는데
랍사게가 히스기야의 대신들만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 위에있는 남유다 백성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유다 방언으로 큰 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그때 남유다의 대신들[엘리야 김과 셉나와 요나]이 랍사게에게 아람어로 이야기 하자라고 제안하지만
랍사게가 왕하
18:26 그러자 힐키야의 아들 엘리아킴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케에게 말하기를 "내가 청하오니 시리아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그것을 알아듣나이다. 성벽 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들리도록 유대인의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18:27~30 랍사케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 주인이 네 주인과 너에게만 이런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셨느냐? 그가 나를 성벽에 앉은 자들에게도 보내시어, 그들로 너희와 더불어 자기 똥을 먹고 자기 오줌을 마시도록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일어나서 유대인의 말로 큰 소리로 부르짖어 전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위대한 왕, 앗시리아 왕의 말을 들으라.
'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히스키야에게 속지 말라. 이는 그가 너희를 나의 손에서 구해 내지 못할 것임이라. 0 또 히스키야가 말하기를,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해 내시리니, 이 성읍이 앗시리아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여 너희로 주를 신뢰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라.

이 이야기를 대신들을 통해 들은 히스기야는 참담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이 사태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사야
37:6 이사야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주인에게 이렇게 말할지니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들은 바 앗시리아 왕의 신하들이 나를 모독한 말들을 너는 무서워하지 말라.
37:7 보라, 내가 그에게 한 바람을 보내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본토로 돌아갈 것이요, 또 내가 그를 그의 본토에서 칼에 쓰러지게 하리라." 하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응답해주셨습니다

37:21 그러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키야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앗시리아 왕 산헤립에 대하여 내게 기도하였으니
37:22 주가 그에 관하여 말한 말씀이니라. 처녀, 시온의 딸이 너를 멸시하였고 너를 조롱하여 웃었도다. 예루살렘의 딸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도다.
37:23 네가 누구를 비방하고 모독하였으며, 네가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높이 치켜 뜬 것이 누구에 대해서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에 대해서니라.
37:33 그러므로 주가 앗시리아 왕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이 성읍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거기서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 앞에 오지도 못하겠고, 성읍을 치러 방벽을 쌓지도 못할 것이라.
37:34 그가 왔던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읍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37:35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읍을 지켜 그것을 구하리라." 하더라.
37:36 그때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보라,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더라.
37:37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라.
왕하
19:32 그러므로 앗시리아 왕에 대하여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거기서 화살을 쏘지도 못할 것이요, 방패를 가지고 성읍 앞에 오지도 못할 것이며, 성을 향하여 토성을 쌓지도 못할 것이라.19:33 그가 왔던 길로 돌아갈 것이요, 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주가 말하노라.19:34 내가 이 성읍을 방어하여 구하리니, 나 자신을 위하고 내 종 다윗을 위하여 하리라." 하더라.19:35 그 날 밤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니, 보라, 모두가 시체가 되었더라.19:36 그리하여 앗시리아의 산헤립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였는데

산헤립[앗수르의 왕] 프리즘[점토판]에 의하면
강대국 앗수르가 조그만 유대를 만만하게 보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산헤림은 유대를 보며“나에게 있어 유대는 새장에 새같다”고 할정도로 무시했다]
공격해보기도 전에 그들은 돌아가야 했다 산헤림 군대내에 큰 전염병이 돌아서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토스의 역사 제2권에서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었는데
하룻 밤에 수많은 쥐 떼가 나타나 앗수르 군의 활과 그 밖에 무기를 갈기갈기 쪼아 놓았다 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폴존슨과 요세프스 역시 그 죽음의 원인은 쥐들이 옮긴 전염병이었다 라고 이야기 한다


나라의 흥망성쇄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계기였다.
성경에 나와있는 이 점토판 내용에 대한 기록


간단 요약-
1.하나의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는데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다
2.이때 신약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받는 계기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앗수르가 사마리아[북이스라엘의 수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제로 앗수르인들과 결혼시키고
그들이 믿는 종교도 파괴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했었습니다
이것을 본 남유대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민족들과 피가 섞였다며 이방인 취급을 한 것 입니다
3.앗수르가 강대국이던 때 남유다를 침공하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니
초강대국이던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아 가고 맙니다
그 계기는 앗수르가 남유다를 치려고 할때 성경에서 송장이 되었다고 하셨듯
큰 전염병이 앗수르군대에 돌아서 고통스러워 하며 돌아갔다고
산헤립 프리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립[=그때 당시 앗수르 왕]프리즘[=점토판]


2 [남유다와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이미지들]

 


우선 신바빌로니아(바벨론)에 설명을 먼저 하자면
bc621년 아시리아의 바벨론 총독이었던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에 반란을 일으켜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을 세웁니다
신바빌로니아 왕국이 메디아(메데) 왕국과 연합하여 수도 니네베[니느웨]를 bc612년에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앗수르]를 멸망시킵니다
이때 이집트는 오리엔트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신바빌로니아와 bc609년 대립하게 되는데
이때 나보폴라사르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2세(느부갓네살)은 bc605년에 카르케미시(갈그미스)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 세력을 추방합니다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던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도 이때 함락됩니다

이때 남유다는 bc722년 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항복합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통치는 17대 여호아하스 왕까지 이어졌으나 bc612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아시리아 제국을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bc605년 제1차 포로가 시작되는데 18대 왕 여호야김 시대에 이집트 군을 격퇴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오게 되어 여호야김은 인질(이때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갑니다)과 재물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바치고 순종의 뜻을 표시해 겨우 멸망을 면합니다(제1차포로) 그 후 남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이집트와 연합해 신바빌로니아에 반역하자 bc597년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김을 응징하러 유다 지역으로 오게 되는데 신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기 직전에 여호야김은 죽게 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유대 왕국 사람들이 신바빌로니아의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건을
바벨론 유수라고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오는 신바빌로니아 군대를 맞은 남유다의 왕은 즉위 3개월째를 맞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었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의 왕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주민과 용사 그리고 기술자들을 포로(에스겔을 비롯한 1만여 명)로 사로잡고(제2차포로) 야훼의 성전 안에 있는 보물과 왕궁 안에 있는 보물들을 약탈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유다를 통치할 사람으로 요시아의 아들인 시드기야(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웁니다 시드기야는 취임 9년 차에 예언자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 바빌로니아에 반역을 감행합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bc586년에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자식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파냈으며 청동으로 만든 무거운 족쇄를 채워 바벨론으로 데려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또한 신바빌로니아군은 예루살렘에 들어가 성전과 궁전, 그리고 모든 집을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매우 가난한 백성들만 예루살렘에 남기고 832명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끌고갑니다.(제3차 포로)이렇게 하여 남유다 왕국은 완전히 소멸 되었고 그 결과 유다 왕국은 멸망하고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속주가 됩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된 bc960년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경고한 일이 347년 후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1차 포로/bc605 왕하24:2]

24:1 여호야킴 시대에 바빌론 왕 느부캇넷살이 올라왔으니, 여호야킴이 삼 년 간 그의 종이 되었고, 그 후 그가 돌이켜 그에게 반역하였더라.
24:2 그때 주께서 그를 치시려고 칼데아 부대와, 시리아 부대와, 모압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보내시어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셨으니, 주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주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유다 제18대 여호야김 왕 4년(혹은3년)에 이집트를 격퇴시킨 신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이 진격해왔고
이때 다니엘 등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제2차 포로/bc597 왕하24:8~16]
24:8 여호야킨이 치리하기 시작할 때 십팔 세였으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삼 개월을 치리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느후스타로, 예루살렘 엘나단의 딸이더라.
24:9 그가 그의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을 따라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더라.
24:10 그때에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의 신하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갔으니, 성읍이 포위되었더라.
24:11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이 성읍을 치러 갔으니, 그의 신하들이 그 성읍을 포위하였더라.
24:12 그리하여 유다 왕 여호야킨이 그의 어머니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고관들과 그의 관원들과 함께 바빌론 왕에게 나아가니, 그의 치리 제 팔년에 바빌론 왕이 그를 붙잡았더라.


24:13 그가 주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끌어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주의 성전에 만든 모든 금 기명들을 산산조각 내었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었더라.
24:14 또 그가 모든 예루살렘 거민과 모든 관료들과 모든 용사 일만 명을 사로잡아 갔으며, 또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사로잡아 갔으니, 그 땅의 백성 중 극빈층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더라.
24:15 그가 여호야킨을 바빌론으로 잡아갔고, 또 왕의 어머니와 왕의 아내들과 그의 관료들과 그 땅의 권세 있는 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더라.
24:16 또 바빌론 왕이 모든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일천 명, 곧 모두 건장하고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바빌론으로 사로잡아 갔더라.

[여호야김 왕의 아들인 제19대 여호야긴(여고냐)왕이 이집트와 연합해 대항하자 느브갓네살왕이 쳐들어온다
여호야긴 왕이 100일 천하로 끝을 맺고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유다의 중산층 1만명 지도급 인사 군인 7000명 기능공 1000명 등이 끌려가고 이때 에스겔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다 느부갓네살 왕은 시드기야를 유다 제 20대 마지막 왕으로 삼는다]


[제3차 포로/bc586 렘52:9-11]
52:9 그리하여 그들이 왕을 잡아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빌론 왕에게로 끌고 오니 거기서 바빌론 왕이 그에게 판결을 내리더라.
52:10 바빌론 왕이 시드키야의 목전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들도 죽이더라.
52:11 그리고 나서 바빌론 왕이 시드키야의 두 눈을 빼고 그를 사슬에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두었더라.

[유다 20대 시드기야 왕 때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시드기야왕 9년 10월10일~11년4월9일까지 항전)
시드기야 왕은 눈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보고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느브갓네살 왕 19년 5월 7일에 예루살렘 성과 솔모몬 정전이 파괴된다 유다의 하층만을 제외한 나머지 유다인들이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bc560년12월 25일(또는 27일)경 끌려간 지 37년 만에 여호야긴 왕이 풀려난다]

- 이때 다나엘의 꿈해석과 예언이 나온다!! -
1.첫 번째 꿈해몽은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에 대한 해석이고

2:1 느부캇넷살의 치리 제 이년에 느부캇넷살이 꿈을 꾸었는데 그의 영이 그것으로 인하여 번민하였고, 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였더라.
2:38 또 사람의 자손들과 들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살고 있는 모든 곳들을 하나님께서 왕의 손에 주셔서 왕으로 그들 모두를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셨나니, 왕은 곧 이 금 머리니이다.
2:39 왕 이후에 왕보다 못한 다른 왕국이 일어날 것이요, 또 다른 셋째 왕국이 놋으로 일어나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되리이다.
2:40 넷째 왕국은 철같이 강한 왕국이 될 것이니 철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며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같이 그 왕국이 산산조각을 내고 깨뜨릴 것이니이다.

2.두 번째 벨사살왕때 바벨론의 수명이 다하고 페르시아가 온다는 것을 예언하였다

5:1 벨사살왕이 그의 귀족들 일천 명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5:3 그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집의 성전에서 취해 왔던 금 기명들을 가져오니, 왕과 그의 고관들과 왕의 아내들과 후궁들이 그것들로 술을 마셨더라.
5:4 그들이 술을 마시고 금으로 만든 신들과 은으로 만든 신들과 놋으로 만든 신들과 철로 만든 신들과 나무로 만든 신들과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더라.
5:5 바로 그 시각에 한 사람의 손의 손가락들이 나와서 촛대 맞은편 궁전 회벽에 글을 쓰니, 왕이 글을 쓰는 그 손가락을 보니라.
5:17 그러자 다니엘이 대답하여 왕 앞에 말하기를 "왕의 선물들은 왕께서 가지시고 왕의 상들도 다른 사람에게 주소서. 그래도 내가 그 글을 왕께 읽어 드리고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5:24 그 분께서 손가락을 보내어 이 글이 기록되었나이다.
5:25 기록된 글은 이것이니,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
5:26 그것의 해석은 이러하니,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함이요,
5:27 테켈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5:28 페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대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하더라.

3.바벨론 이후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통치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7:1 바빌론의 벨사살왕 원년에 다니엘이 자기 침상에서 한 꿈을 꾸고 머리 속에 환상들을 받고서 그가 그 꿈을 기록하고 그 일들의 실상을 말하니라.
7:2 다니엘이 고하여 말하였더라.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보라,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불어 닥치더니
7:3 큰 짐승들 넷이 그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그 짐승들이 서로 다르더라.
7:4 첫째는 사자 같고 독수리의 날개가 있는데, 내가 보니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발로 서 있게 되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7:5 또 다른 짐승을 보니 둘째는 곰과 같고 그것이 몸 한쪽 편을 들어올렸는데, 그 입의 잇사이에 갈비뼈 세 대가 물려 있으며, 그들이 그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7:6 이 일 후에 내가 보았더니, 보라, 또 하나는 표범과 같은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은 머리도 네 개가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7:7 이 일 후에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고, 넷째 짐승을 보았는데 무섭고 무시무시하며, 힘이 매우 세고, 또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졌더라. 그 짐승이 먹고 산산이 부수며 그 나머지는 발로 밟더라. 그 짐승은 먼저 있었던 모든 짐승들과 다르며, 또 그 짐승은 열 뿔을 가졌더라


8:4 내가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이는 숫양을 보았는데, 그 앞에 설 짐승들이 없으며 그 손에서 구해 낼 어떠한 것도 없으나 그 숫양은 자기 뜻대로 행하고 크게 되더라.

8:4 내가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이는 숫양을 보았는데, 그 앞에 설 짐승들이 없으며 그 손에서 구해 낼 어떠한 것도 없으나 그 숫양은 자기 뜻대로 행하고 크게 되더라.
8:20 네가 본 두 뿔을 가진 그 숫양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들이요,
8:21 그 거친 숫염소는 그리스의 왕이며, 그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그 첫째 왕이라.
8:22 이제 그 뿔이 꺾이고 그대신 그 자리에 네 뿔이 났으니, 네 왕국이 그 민족에서 일어날 것이나 그의 권세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다니엘서를 다니엘이 기록하지 않았다는 망언이 돌지만 예수님께서 마24장에 다니엘이 쓴것을 확인시켜주셨다]


-간단요약-
1.앗수르가 강대국이던 그때 앗수르나라에 바벨론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앗수르를 점령합니다
2.그 바벨론은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남유다를 향해 들어오는데
남유다의 왕이 순종의 뜻으로 뇌물?과 인질을 바치는데 이걸 1차 포로기라 하고 이때 다니엘이 끌려갑니다
그 뒤에 남유다가 이집트랑 합해서 바벨론에 발란을 꾀하는데 이때 다시 바벨론이 와서 남유다에게 압박하고
인질들 [기술자 주민 등등]들을 끌고 가는데 이때 에스겔이 끌려가고 이걸 2차포로기라고 합니다
3.그뒤에 남유다의 왕이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바벨론에 반대하려 하자
바벨론이 남유다를 멸절시켜 버립니다
4.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간 다니엘은 그 나라가 멸망할 것과 바벨론 뒤에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통치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출처]
엘리야백

 

 

잠깐 바벨론의 왕들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느브갓네살의 아들 마르둑이 2년간 다스렸지만 마르둑을 살해한 마르둑의 매부 네리글리살과 네리 글리살의 아들 라바시 마르둑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신하들에게 암살당하는데
그때 느부갓네살의 집안이 아닌 나보니두스가 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나보니두스=하란 출신 귀족의 아들이자 느부갓네살 이후 가장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음]

하지만 여기서 신관[종교]이 문제가 되는데
느브갓네살과 그의 집안 그리고 바벨론 백성은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기지만
나보니두스는 ‘신(sin)’이라는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느브갓네살이 섬긴 신 = 마르둑[태양신] 나보니두스가 섬긴 신= sin[달의 신]

바벨론의 멸망

느브갓네살집안과 바벨론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보다 오히려 페르시아의 고레스 쪽으로 마음을 돌립니다 이 당시 벨사살은 이미 바벨론 국민들에게 부적당한 통치자로 낙인이 찍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외의 바벨론 통치 하에 있던 나라들에게도 실망을 안겨주었었는데
바벨론은 포로를 자기 나라로 잡아가서 나라를 건설하는 노동을 시켰고
정복지에 남겨둔 사람들로부터는 세금을 받아 바벨론 성 건축에 충당했는데
바벨론 정부에 실망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페르시아인들을 환영했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벨론을 흡수 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2세)는 바벨론을 침략해 오면서 티그리스 강의 오피스에서 이미 승기를 잡고 바벨론 성으로 전투도 없이 무혈입성 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바벨론의 백성은 벨사살을 미워하고 오히려 고레스에게 희망을 두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설명했던 손가락환상이 보였던 날 다니엘이 해석을 해 준 그 날 저녁 벨사살이 죽음으로 인해 바벨론은 끝
이 납니다
단 5:30 그날 밤 칼데아인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5:31 메디아인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니 약 육십이 세였더라.

참고로 ‘유대인’이란 말은 바벨론이 여러 나라에서 끌어온 각 나라 사람들을 구분하며 남유다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시작된 말입니다 아브라함때는 히브리인 야곱때부터 이스라엘 유대인은 바벨론의 끌려온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유대인이라 명칭이 불려지게 됬습니다

3 [다니엘의 예언데로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멸망]......하게 되는데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이 멸망했을때 4개의 나라가 공존하게 되는데 오리엔트에 이집트 소아시아의 리디아 이란 고원의 메디아(메데) 메소포타미아의 신바빌로니아(바벨론)이 있었습니다
[오리엔트=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 ·소아시아 및 아라비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지방을 가리킨다]
유럽계의 메데와 인도계의 바사(페르시아)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2세(고레스)왕에 의해 bc550년 하나의 페르시아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이 밤에 바벨론에 쳐들어 가는데
바벨론은 포로를 자기 나라로 잡아가서 나라를 건설하는 노동을 시켰고
정복지에 남겨둔 사람들로부터는 세금을 받아 바벨론 성 건축에 충당했는데
바벨론 정부에 실망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페르시아인들을 환영했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벨론을 흡수 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바벨론 멸망과 같은 이야기]
다니엘서 7장에서 곰이 갈빗대 3개를 문다는 것과 그 3개의 갈빗뼈가 페르시아의 서쪽과 북쪽과 남쪽이라는 다니엘서8장에 말씀처럼 페르시아는 북bc546/리디아 서bc539년/바벨론 남bc525년/이집트를 정복하면서 bc525년 오리엔트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2세는 바빌로니아의 포로였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솔로몬성전을 재건축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고레스 칙령’입니다

에스라에 설명되어 있는 고레스 칙령
1:2 "페르시아의 코레스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있는 전을 그를 위하여 건축하라 하셨도다.
1:3 그의 모든 백성 중에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기를 바라노니,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예루살렘에 계신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지니라. (그는 하나님이시니라.)

1:4 그가 기거하는 어느 곳에라도 남아 있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고장의 사람들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자원하는 예물 외에도 은과 금과 물건들과 짐승들로 그를 돕게 할지니라." 하였더라.이미 자신이 통치하기 100년도 훨씬 전인 bc756년에 쓰여진 이사야서에서에 먼저 이 일이 예언되었었습니다.
이사야
44:28 코레스에게 말하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내가 나의 모든 기쁨을 이행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게도 말하기를 "너는 재건되리라." 하고 성전에게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이라.
45:1 주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코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잡았으니, 민족들로 그 앞에 항복케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겠으며 두 짝 성문들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고레스 왕은 자신을 세워준 하나님[고레스는 하나님의 참지식은 없었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하늘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란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 지식은 없더라도 아래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고 이야기를 하였다는 견해들이다]

에스라1:2 "페르시아의 코레스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하늘의 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있는 전을 그를 위하여 건축하라 하셨도다.

고레스의 명령에도 유대인들은 불모지와 같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그랬던 것처럼 귀환도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크게 세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제1차 예루살렘 귀환은 bc538년 스룹바벨을 선두로 4만명이 4개월에 걸쳐 유대로 돌아오게 되어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물을 올렸으며 성전을 재건하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적대감 때문에 성전 재건공사가 중단됩니다 [스룹바벨은 고레스 왕때 1차로 갔었고 성전짓는 것이 중단되었다가 결국 그 성전은 다리오에 왕때 완성된다 스룹바벨은 다리오의 호위직을 맡았으며 어릴 때부터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1차 포로 귀환자들[스룹바벨 포함]이 안타깝게도 성전의 기초 공사를 시작하다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 귀환 공동체가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짓는다는 거짓 보고를 페르시아 왕에게로 보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후 중단된 성전 건축은 다리오(다레이오스)가 페르시아의 왕이 되고 나서야 재건되고 성전의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경비까지 페르시아 왕궁에서 감당한다고도 합니다
이유는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키루스2세) 왕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약속이 담긴 문서까지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오의 명령이 내려지자 그토록 성전 방해하던 자들이 달려와 오히려 성전 건축을 도왔으며
마침내 불타 없어졌던 예루살렘 성전이 솔로몬 때와 비교해서는 초라하지만 그래도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예루살렘성전이고 헤롯이 지은건 이 성전의 증축입니다
어쨌든 고레스왕의 뜻을 이어받은 새로운 왕 다리오 덕분에 정책과 자금 원조를 계속해서 bc515년에 성전을 완공할 수 있게 해주어 성전에서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 후 다리오는 그리스를 점령하러 갔다가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고 돌아오게 되고
그가 통치하던 말년에 캄비세스[고레스와 다리오 중간에 있던 왕]에 의해 정복당한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키가 다리오는 이집트에 대한 응징을 준비했던 중에 bc486년 36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그 뒤를 이어 다리오의 아들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영화 300에 나오는 왕) 왕이 페르시아의 4번째 왕이 됩니다

 


이때 300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는 가장 강력했던 나라이고 페르시아의 전성기때입니다
우리는 이때 에스더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하수에로왕이 [에1:10절-12절]에서 왕후 와스디를 불러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자랑하려 했었는데
갈대아 주석가들에 의하면 이때 아하수에로는 왕후의 나체를 보여주려 했다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에스더왕비가 출현하게 되는데 하만이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고 했다가 왕비 에스더에 의해서 역전당하는 일인데 이걸 지금도 기념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 부림절입니다 [7절기는 아니지만 10절기에 속합니다]
부림절은 12월 14일과 15일이고 이틀에 걸쳐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날로 기념합니다


말씀을 낭독하고 기뻐하며 부림전 절에는 에스더가 금식한 것을 생각하며 금식하고 부림절때는 에스더서를 읽고 기뻐하는데

제2차 예루살렘 귀환은 bc458년 율법에 통달한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인 에스라가 성전에 제물을 바치고 재판을 하라는 왕의 아닥사스다 왕(bc465-423)의 위임장을 가지고 여러 가족을 이끌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신약의 포인트= 산헤드린 공회[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기 전 심문했던 공회]가 갖는 권한 가운데 하나가 ‘재판권’인데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이 유대 출신 페르시아 총독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권은 아마도 에스라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된다
산헤드린 공회의 주체는 유대출신 페르시아 총독들[스룹바벨총독과 느혜미야총독] 과 제사장 가문과 제사장 가문은 아니지만 평민 귀족들이 동맹을 맺음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고
그들은 페르시아에서 유대로 귀환한 후에 공식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를 출범했는데 7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대제사장을 통해 주도권을 행사하며 유대의 지도부로 존속했다


산헤드린 공회는 ad6년 유대의 하스몬 왕조가 끝나고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부터 유대의 최고 댚기구로 인정받았다
더 나아가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의 최고 재판국으로까지 승격되었고
이러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의 최고 재판국으로까지 승격되었고 중요성이 강화되면서 전 세계의 모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모두 산헤드린과 관계를 맺었다 유대 내에서는 산헤드린과 직무상 연결이 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마26:59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그에 대한 거짓 증거를 찾았으나
재판권은 산헤드린 공회에 있었고 예수님께 유죄 및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를 처형하기 위해 빌라도에게 끌고갑니다

그리고 bc445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술맡은 관원장이자 총독이였던[굉장한 고위급] 유대인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벽을 재건하러 가도 좋다는 허락을 얻게 됩니다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혜미야는 우선 실태 조사를 하고 백성들에게 성벽 재건을 명령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 지방의 지도자들은 성벽 재건에 반대하고,비웃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무력을 동원해 성벽 재건을 방해합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실 것이다”라고 격려하며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냈고 성벽 재건 공사와 방위 모든 면에서 빈틈이 없도록 백성을 조직하여 모든 방해공작에 대처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벽은 52일 만에 완성됩니다 그러나 황폐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 없자 유대의 각 지역에 사는 가족들은 제비를 뽑아 열 가족 당 한 가족이 예루살렘에 와서 살기로 결정해 예루살렘은 다시 사람 사는 도시와 같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예루살렘 재건과 함께 종교의 부흥이 이루어지는데
그들이 포로기 동안 많은 학대와 무시를 받으면서 우리가 율법을 버려서 그렇게 되었다며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 움직임에 부흥을 준 인물이 바로 에스라와 느혜미야이고
또다시 이방인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고 모세 5경에 대한 지식을 다시 살려내 삶에 적용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에스라는 연단 위에 서서 해뜰 때부터 해가 중천에 이르기까지 백성들 앞에서 엄숙하게 토라를 읽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느8:1 온 백성이 물 문 앞에 있는 거리로 한 사람처럼 모여 서기관 에스라에게 주께서 전에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니
8:2 제사장 에스라가 일곱째 달 일일에 율법책을 남녀 회중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 앞으로 가져가서
8:3 물 문 앞에 있는 거리에서 아침부터 정오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 앞에서 읽으니, 모든 백성의 귀가 율법책을 경청하더라.

그리고 이 시기에 회당이 생겨나게 되는데 회당은 성전처럼 제사를 드리는 곳은 아니지만
학교에 기능과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였습니다


신약 성경을 볼때의 포인트=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페르시아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함께 율법의 중요성을 깨닿게 되어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페르시아 풍경

간편요약
1.바벨론의 부정부패와 다른 종교로 인해 분열이 생기고
이때 메데의 다리오가 바벨론을 멸망시킴
2.메데와 바사[페르시아]를 고레스왕이
하나의 페르시아로 합침
3.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자신이 통치하기
200년전인 이사야서의 예언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세우신 것을 알게 됨
4.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인
고레스 칙령을 내림
5.고레스 왕때 제1차 귀환이 이루어지는데
스룹바벨이 선발로 나서지만
사마리아인들의 거짓말로 성전 재건이 중단됨
6.다리오 왕때 다시 고레스 왕이 한 말을 보여주면서 성전재건이 재게되고 성전이 재건이 됨
7.다리오 다음왕인 아하수에로때 에스라 사건이 발생하고 거기서 부림절이 유례된다
8.아하수에로 왕 다음왕이 아닥사스다 왕이며 이때 2차 귀환이 이루어지는데
에스라가 ‘재판권’에 권한을 갖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이때 큰 말씀의 회복이 이루어지며 또 ‘재판권’을 갖는 ‘공회’가 생기고 이것이 예수님을
심문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유레가 되며 또 말씀을 전하는 ‘회당’이 생기게 된다
9.같은 왕인 아닥사스다 왕때 술따르는 관원장 느혜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을 오게 되어 52일만에
성벽을 짓는다

 


3.페르시아 멸망부터 그리스의 정복까지

 

3 [다니엘의 예언데로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멸망]......하게 되는데 과정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페르시아의 멸망 간략설명]
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서쪽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 반란국을 그리스가 도우며 개입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할 좋은 구실이 되었다며 좋아하지만
결과는 뜻 밖에 결과가 납니다
페르시아를 막고자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연합하여 동맹을 맺습니다 그 동맹을 '델로스 동맹'이라 하는데
이로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델로스동맹 안에서의 최강국인 아테네에 부패로인하여
그 안에 있던 나라들이 다시 반 아테네의 뜻을 가지고 동맹을 맺게 되는데 그걸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고 합니다
이 동맹 안에는 스파르타가 있습니다
아테네를 그대로 지지하고 있는 델로스 동맹과
반 안테네 정책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이 전쟁을 하게되고
이 싸움때문에 양쪽에 힘이 약해지자 마케도니아의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렌산더가 그리스를 하나로 통일됩니다

[상세설명]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은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bc499~bc494)이 발단되어
시작된다 . 이 반란에 그리스가 개입하였고 이것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다리우스)1세에게 그리스 본토를 침공할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다

다리오1세는 라데에서 이오니아 인들을 괴멸시키고 bc493년에 밀레투스를 진입합니다
그리고 bc492년에는 그리스 본토에 함대를 파견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실패하고 bc490년에는 닉소스와 에레트레아를 점령하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이 끝납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은 bc480년 다리오(다리우스)의 후계제인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가 일으킵니다
이때 헬레스폰트(터기 서부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넜으며 테르모필라이에서 영화 '300'의 배경이 되는 전투가 벌어져 그 길로 아테네를 점령합니다 결과는 페르시아군의 승리였지만
그 후 그리스 연합 함대(2000척)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 함대(1000척)와 최후의 결전을 벌여[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거두고 다음해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BC479)에서 육지에 남아 있는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지역에 있는 페르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페르시아는 여전히 강대국이였습니다
잠시 그리스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제2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의 폴리스[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다시 페르시아가 침공해 올 것을 대비하여
200여 폴리스가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을 조직합니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를 압박하여 본래의 취지를 살렸으나 군사적 우위를 무기로 지배권을 강화한 아테네가 델로스의 금고를  자국으로 옮기고(bc454) 분담금 납부를 강요하는 등 고압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런 아테네를 반대하는 폴리스들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고
델로스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 두 세력은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bc404)으로 30년 가까이 싸우게 됩니다. 이 전쟁은 그리스 전체의 내전양상을 띠었고결국 아테네에 페스트가 창궐해[페스트=흑사병,갑작스런 발열 및 정신증상, 창궐=퍼짐]
페리클레스[아테네 정치가이자 군인,민주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델로스동맹의 높은 지위를 가진자]를 비롯한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 결국 bc404년 아테네는 전명 항복하고 전승국인 스파르타 역시 여러 면에서 지도력이 부족해
양쪽다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리스 인들이 야만인이라 무시했던 신흥 세력인
마케도니아의 필립[필리포스,빌립보,]2세가 bc338년 카이로네이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테베들로 구성된 그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코린토스[고린도,고린트] 동맹을 조직함으로 그리스를 통일합니다
[참고=필립포스2세는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엄청난 재력까지 확보하게 됬는데 그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라 필립포스(신약성경에 빌립보)라고 바꿉니다]

 



필립[필립포스,빌립보]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전쟁을 위한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고 페르시아를 보복하기 위해 마케도니아 중심으로 그리스가 힘을 한데 모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명분은 바로 150년 전의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략에 대해 보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포인트 = 사도바울이 전도여행 했던 빌립보는 필립이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엄청난 부를 얻게 되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바뀐 것이며
필립이 그리스를 통일하고 맺은 동맹의 이름이 고린도[고린토스] 동맹인데
이 지역이 고린도 교회가 있던 지역이다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와서 아하수에로 왕 뒤에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왕일 때
그의 부하 중 천인 대장이었던 환관 바고아스가 아닥사스다 왕과 그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서 위기로 치닫게 됩니다. 그 후 아닥사스다의 40대 아들 아르타샤타가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이후 몇 명의 왕을 거쳐 다리오3세때도 페르시아는 통솔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대제국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와 벌인 첫 전투인 그라니코스강 전투(bc334)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각 도시를 공격해 복속시킨 다음 이 여세를 몰아 곡창지대인 이집트를 점령해 세력을 강화합니다


그라니코스강 전투[그라니쿰 전투](bc334)

.
그 이 후 이수스 전투(BC333)에서 알렉산더는 다리오3세의 대군을 격파합니다
이때 알렉산더는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페르시아의 대군을 크게 격파하였는데
다리오3세 왕은 전차를 버리고 말에 올라타 왕의 표식까지 제거한 상태에서 야음을 틈타 도망 할 정도 였습니다

 

 

[좌 말을 탄 사람 알렉산더왕, 우 다리오왕]

이때 다니엘의 예언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라니쿰과 이수스 전투의 중간의 시간]


다리우스 왕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 길리기아의 산인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길리기아의 잇수스에서 전투 준비를 갖추고 적을 기다렸다. 한편 산발랏(다리오가 사마리아에 파견한 관료)은 다리우스가 내려온 것에 매우 기뻐하면서 마낫세(유대 제사장)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약속한 것을 곧 들어줄 수 있을 걸세, 다리우스 왕이 적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대로 즉시 소원을 이루어 주겠네, 나뿐 아니라 온 아시아인들이 마게도냐인들은 페르시아[바사]군의 숫자에 겁을 먹고 감히 싸우려고 들지도 못할 것임을 곧 알게 될 걸세”


산발랏은 자신의 딸과 결혼한 마낫세가 유대 지도자 회의에서 이방인과 결혼한 사유로 제사장직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몰렸었는데 결혼을 유지하면 대제사장직까지 주겠다고 위와 같이 약속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페르시아군은 마게도냐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우스의 모친과 처자식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왕은 페르시아로 도망을 쳤다. 이에 알렉산더는 수리아를 침공하여 다메섹을 점령하였고, 시돈을 장악한 후에는 두로를 포위하였다. 알렉산더는 이 때 유대의 대제사장에게 서신을 띄워 원군과 물자를 보내 달라고 하였다. 전에 다리우스에게 충성을 보였던 것처럼 자기에게 충성을 보이고 마게도냐와 친선 관계를 맺으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다리우스에게 반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께 맹세했었기 때문에 다리우스가 살아 있는 한 이 맹세를 깨뜨릴 수 없다고 답신을 보냈다. 이 답신을 본 알렉산더는 몹시 화를 냈다. 알렉산더는 이제 거의 두로를 함락시킬 직전에 있었기에 즉시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두로를 함락시키는 즉시 유대 대제사장을 공격하여 만인의 본보기로 삼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알렉산더는 힘들여서 두로를 함락시키고 일을 마무리한 후에가사시를 공격하였다. 그 당시 가사 시의 수비대의 총독은 바베메세스였다. 참고로 두로는 원래 섬이었으나 알렉산더는 두로까지 바다를 메워 섬을 육지와 이어서 두로를 함락시켰다.


한편 산발랏은 자기의 뜻을 펼 호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다리우스를 배반하고 부하 7000명을 거느리고 알렉산더에게로 갔다. 산발랏은 두로 공략을 시작하고 있던 알렉산더에게 나가서 자기가 다리우스 대신 그를 주인으로 섬길 터이니 자기 부하 7000명을 받아 달라고 했다. 이에 알렉산더가 쾌히 승락하자 산발랏은 용기를 얻고 자기가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겐 야두아 대제사장의 동생인 마낫세라는 사위가 있습니다. 게다가 성전을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저의 백성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의 힘을 둘로 분산시켜 놓으면 왕께도 유익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국가가 한 마음으로 연합이 되어 있으면 반역을 꾀할 것 아닙니까?” 전에도 이 때문에 앗수르 왕들은 곤욕을 치르곤 했습니다 “이에 알렉산더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했다. 산발랏은 온갖 심혈을 기울여서 성전을 지었으며 마낫세를 제사장으로 임명했다. 산발랏은 자기 외손자들이 제사장의 영예를 얻게 될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웠다.


그러나 두로 공략 7개월이 끝나고 가사 공략을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난 후에 산발랏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 알렉산더는 가사를 함락시킨 후 즉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대제사장 야두아는 전에 알렉산더의 명을 거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으며 공포로 떨면서 괴로워할 뿐이었다. 대제사장은 마침내 백성들에게 자기와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간구의 기도를 드리라고 지시했다. 즉 하나님께 위험에서 건져 주시고 이 나라를 보살펴 달라고 간청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같이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라. 예루살렘을 치장하고 성문을 열라. 백성들은 흰 옷을 입고 너와 제사장들은 제사장 옷을 입고 왕을 영접하라. 내가 너희들을 섭리로 보호할 것이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 이에 그는 잠에서 깨어나 몹사 기뻐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에 그는 꿈에서 지시한 대로 준비를 갖추고 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야두아는 알렉산더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을 알고 제사장들과 주민들을 거느리고 행렬을 지어 나갔다. 이 행렬은 장엄했으며 이 행렬은 사파라는 곳까지 다다랐다. 사파는 헬라어로 전망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서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내려다보면 전망이 좋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뒤를 따르는 베니게인들과 갈대아인들은 왕이 화가 났으므로 도시를 약탈하고 대제사장을 찢어 죽이도록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흰 옷을 입은 백성들과 자주색과 주홍색의 옷에다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패가 달린 모자를 쓴 대제사장의 모습을 보고는 손수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먼저 대제사장에게 안부를 물었다. 유대인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알렉산더왕을 문안하고 그를 빙 둘러쌌다. 수리아의 왕들과 나머지 병사들은 알렉산더 왕이 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때 파르메니오가 왕에게 나아가더니 모든 사람이 왕을 찬양하는데 왕은 어째서 유대인의 대제사장을 찬양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대제사장에게 경배한 것이 아니라 그를 대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경배한 것이네. 내가 마게도냐의 디오스에 있을 때 꿈에 이 사람이 이런 복장을 한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일세. 그때 내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하고 있을 대 이 사람이 나타나더니 자기가 군대를 인도해서 바사를 정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지체하지 말고 즉시 바다를 건너가라고 나를 격려했었네. 그 후로 나는 그런 복장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네. 그런데. 이제 그 복장을 한 이 사람을 보고 내가 꾸었던 꿈을 회상해 보니 내가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일세, 따라서 나는 앞으로 다리우스를 격퇴하고 바사국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의 소원은 무엇이나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네.” 알렉산더는 파르메니오에게 이같이 대답한 후에 대제사장에게 자기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에 대제사장은 알렉산더와 나란히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알렉산더는 성전에 올라가 대제사장의 지시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을 매우 존중하였다. 한 헬라인이 바사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이 적혀 있는 다니엘서를 접하게된 알렉산더는 그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마음이 흡족한 알렉산더는 백성들을 해산시킨 후 그 다음날 다시 불러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기들은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며 매 7년마다. 내는 조공은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원하는 대로 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에 백성은 또다시 바벨론과 메대에 사는 유대인들도 그들 고유의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자 알렉산더는 들어주겠다고 쾌히 승락했다. 이에 많은 이들이 그의 군대에 들어가 전투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예루살렘 성전에 알렉산더 대왕]
그 이 후 가우가멜라 전투[bc331]에서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코끼리= 페르시아, 말= 알렉산더]
6?70만의 군대로 알렉산더 4만에 군대에게 멸망하여 페르시아 제국도 260년(bc539-bc333)만에 다리오 3세를 마지막 왕으로 깃발을 내리게 됩니다

다리오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4대수도 중 하나인 에크바타나에 있었는데 도망하던 다리오는 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는 막을 내렸고 페르시아 제국은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계승하고 바벨론을 수도로 하는 신제국을 건설하려는 생각에 자신도 페르시아 왕의 딸인 스타테일라와 결혼했을 뿐 아니라 80명의 고관과 1만여명의 장병을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하게합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

필립포스[빌립보,필립]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알렉산더를 위해 좋은 스승을 찾아주려
했었고 그 당시 부터 이미 유명한 철학자들 중[아리스토텔리스,플라톤,소크라테스]에 한명인
아리스토텔리스를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맞이합니다

스승으로 맞이할때의 모습은
필립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기라 시를 모두 초토화시켰었는데
그 마을이 아리스토텔리스의 고향 마을인 것을 알게되어
그 마을을 모두 복원시켜주고 아리스토텔리스를 정중히 모셔와서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게 하였습니다
필립포스는 알렉산더가 아리스토텔리스에게 학문을 배우는 곳을 '선녀의 성역'으로 정해주었는데
그곳에서는 아리스토텔리스가 걸었던 그늘진 산책로와 앉았던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리스로부터 도덕이나 교리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그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교리들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가 뒷날 정복전쟁을 위해 아시아에 있을때
아리스토텔리스가 그런 교리들을 책으로 펴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런 것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한 것에 대한 불만어린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장이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크 영웅전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아리스토텔리스 선생님께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친히 구전으로 가르치셔야 할 이론들을
책으로 발표한 것은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운 지식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해버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권력이나 영토로써가 아니라
지식으로 뛰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입니다
안녕히계십시오"


[아리스토텔리스]
"그 지식들은 발표되었다고 말할 수 없소
왜냐하면 형이상학에 대한 이 책은
내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오"< 풀루타크 영웅전>


아리스토텔리스에게 철학을 배운 알렉산더는 이후 헬라[그리스] 제국을 통치하면서
그 전 제국들의 통치자들에 비해 철학적인 통치자의 면모를 많이 보여줍니다

이때 당시에 '헬레니즘'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이 발달했는데 헬레니즘이란건
그리스와 오리엔트지역 다시 말해 동서간의 융합된 문화이지만
결국은 그리스 문화라고도 말 할 수 있는 문화이다
이 사상은 지금 우리시대와도 많이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도 이때부터 나온것이고 과학이란 것이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기도하다

여기서 자세하게 다루진 않겠지만 이때 당시에 발달된 문화들이
교회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바울 역시 헬레니즘의 두 학파와 논쟁을 했는데
바로 헬레니즘의 가장 큰 인기를 얻은 두 학파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이건 지금 교회 형성 과정과도 연관 되어 있지만 그걸 떠나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행 17:16-18)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에피쿠로스 학파 의 정의: 에피쿠로스 학파의 윤리학적 견해는 그들의 원자론적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원자론은 세상 만물이 동질적인 물질적 특성만을 지닌 매우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 마저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인간이 죽는다면 원자들의 구성체인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개별적인 원자들로 분해됨으로써 소멸한다. 즉 인간의 사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후세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즉 산 자는 살고, 죽은 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죽은 자가 없다면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날 일만이 문제로 남게 된다. 따라서, 사후의 보상을 기대할 필요 없이, 살아있는 동안 가능한 한 즐겁게 사는 것이 행복을 얻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에피큐로스학파 철학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으므로 오직 이 세상 생활에서만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두개인들과 같은 이들에게 주어진 모욕적 언사가 되었다


왜 논쟁을 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는지 이해가 될텐데
이들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들어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들이 신들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 현세의 삶에서의 쾌락만이 전부라고 생각했으며(우리가 생각하는 성적쾌락이나 사치의 쾌락이 아님. 이들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겼고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것이나 좋아하는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등)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이나 신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단지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었습니다. 다만 단기적인 쾌락이 더 긴 고통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전체나 우주보다 개인의 삶이나 행복을 중시하는데 결국 사회,국가,법,제도 등도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오로지 관심갖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사후세계의 걱정을 할 필요는 없으며 신의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육체든 정신이든 그저 원자단위의(지금은 쿼크등 더 작은 입자도 발견했지만 당시는 원자가 물질을 이루는 공통의 가장 작은 입자라고 생각 했습니다) 입자로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죠.

스토아학파는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현자는 외적인 소유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전재산, 부요함 또는 가족을 소유하고자 하지 않으며 질병이나 고난에 직면해서도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당하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정해진 (범신론적이며 비인격적인) 신의 뜻으로 감수하였다,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인간은 신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로고스라 불리는 신적 이성이 인도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로고스로서의 신은 사랑이라는 인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신적 이성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러한 후기 스토아는 윤리철학을 넘어서서 하나의 종교가 되고 있던 것이다.


이러한 후기 스토아철학은 교육받은 지식층에 한정되어 로마 제국 안에서 퍼져나갔으며 로마 제국은 제국에 부여된 사명을 스토아적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스토아 철학이 지니고 있는 자연론은 로마인들의 법률적 사고와 그 실천에 결합될 수 있었으며 로마인들에게 사상적인 기초를 주어 더욱 발전되었다.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조금씩 다르다.


퍼거슨은 스토아학파에서 널리 사용된 용어들인 영, 양심, 로고스, 덕이 성경에 사용되었으며,
사회구성단위 관련 성경적인 권면들은 사회 내의 지위와 관련된 형식과 내용에서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인류 악의 지속성, 자기반성의 필요, 인류와 신의 유사성, 세상적인 가치의 부인,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내적 자유에 대한 강조, 스토아 자연신학 등은 헬라 유대주의를 경유하여 기독교에 전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스토아학파와 기독교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세계관 차원에서 보이는 근본적인 차이에 기인한다. 이러한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신관의 차이이다. 기독교 신관은 세상의 창조자이나 스토아적 신관은 범신론적 신이다. 기독교적 역사관에 따르면 우주는 시간과 목적 그리고 끝을 지니고 있으나 스토아 철학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는 성육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나 스토아의 로고스는 그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스토아학파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 불멸 개념 역시 없다. 사람이 죽으면 신적 부분은 전체로 돌아갈 뿐이다. 스토아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의무에 대하여서도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희생과 능동적 사랑이라고 기술하는 한편 스토아철학에서는 자기 존중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자주보이고 교회에서 자주 듣던 단어 로고스가 왜 나온지 이해하려면 교회의 신학이 어떻게 퍼졌는지 알아야 하는데 짧게 설명하자면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연속성을 긍정하는 입장에는 초대 변증가들과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 비교 종교사학파 등이 있다.
특히 아돌프 하르낙은 기독교가 헬레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적인 신앙과 관습들을 당대의 이방종교와 철학체계로부터 빌려왔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정통주의 노선의 학자들은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속성을 부정하였다.
반면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학자들은 앞의 두 입장과는 달리, 복음이 지니고 있는 본질에서는 기독교와 헬라철학은 연속성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방법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 학자들, 어거스틴, 칼빈 등은 헬라철학인 신플라톤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주장하였다. 크리스토퍼 도슨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는 역사적으로는 히브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철학 방법에서는 헬라이즘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 설명하는데 우리 한국교회가 복음주의 노선에 있기 때문이고 복은주의라는건 헬레니즘의 최후의 사상이 된
신 플라톤주의를 수단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신플라톤주의라는 건 결국 플라톤 철학에 중심을 두지만 거기에 스토아 사상,
필론을 비롯한 그리스의 모든 사상이 종합 집대성 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스토아+플라톤+필론 등등의 사상]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중세기독교(교부철학, 스콜라 철학)->대륙 합리론(칸트, 헤겔, 데카르트)

자역철학자(탈레스, 데모크리토스) => 소피스트 => 에피쿠로스 학파, 키레네 학파 => 경험론, 공리주의(흄, 베이컨) => 귀납적 사고관(뉴턴) => 실용주의(듀이)

하지만 제사와 절기를 배우게 되면 알겠지만 예수님은 히브리즘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게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노선에 영향 아래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던 건
결국 제사와 절기를 통해서 나타내는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그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이 4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에 담겨있기때문에
우리가 이 노선이여도 역사하심에 대해선 크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헬라 제국~수리아 셀루커스 왕조의 통치

팔레스틴 점령을 위한 투쟁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수리아의 셀루커스 왕조에 각각 등극한 양쪽의 젊은 통치자에 의해 BC 223-222년에 시작되었다.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Ⅲ)는 BC 221년 레바논 골짜기에 침입하였고 BC 219년에는 실루기아를, 1년 뒤에는 시돈, 두로, 프톨레마이스(Ptolemais, 악고)의 항복을 받았고 다볼산도 점령하였다. 그후 안티오쿠스 3세는 동맹국인 나바테아의 빌라델피아(랍바 암몬)의 공격을 도와주고 다시 프톨레마이스로 돌아와 이집트 대군과 접전을 앞두고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마리사, 예루살렘, 프톨레마이스, 두로 등 팔레스틴을 톨레미 3세에게 내주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안티오쿠스 3세는 빼앗긴 팔레스틴을 재차 공격해서 BC201년에는 가사까지 진격하였고 톨레미에게 끝까지 충성하며 버티는 가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스코파스(Scopas)가 이끄는 이집트(톨레미)군대에게 패퇴하여 또다시 퇴각하였다(단11:11-16). 스코파스는 내륙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파니아스(가이사랴 빌립보)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안티오쿠스 3세는 미리 퇴각하여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이집트의 스코파스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결국 스코파스의 잔존병들은 시돈으로 도망했으나 그곳까지 공격을 받았고 안티오쿠스는 바타네아(Batanea)와 아빌라와 가다라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으로 내려왔다. 이때 유다인들은 안티오쿠스 군대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한 대가로 안티오쿠스에게 유다의 종교 자유권을 허락받았으며 이후의 유다는 31년간 셀루커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평정을 유지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알렉산더의 그리스는 표범으로 표현되었던 것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광대한 지역을 차지 하였습니다 단 10년만에 제국을 만든 엄청난 나라였으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알렉산더는 bc33년 다이시우스달 30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말라리아인지 열병에 의한 죽음인지 미지수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에 예언 그대로 첫번째왕이 죽고 4개의 왕이 나오게 되는데

알렉산더가 죽을때 부하 장군들이 물어봤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장군이 죽인뒤엔 누가 이 그리스를 움직이느냐고 하자
알렉산더는 "가장 강한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7명 장수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다가 권력싸움에 의해 3명은 도태디고 4명의 장수가 분할 통치를 하게 됩니다
카산더[카산드로스]장군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본토를 [서]
리시마커스[리시마쿠스]장군은 소아시아를[북]
안티고누스 장군은 지중해에서 중앙 아시아를[동]
프톨레미장군은 이집트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 입니다.[남]

 


헬라제국이 분할 통치되는 가운데 애굽을 다스렸던 프톨레미 왕조에는 셀류커스라는 군총사령관이 있었는데
셀류커스는 군 총사령관에 만족하지 않고 알렉산더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안티고누스 장군을 저지하려고 유대 위쪽
유프라데스 강과 티그리스 강쪽으로 진군하여 결국 셀류커스 왕조를 열게 됩니다 이때부터 유대를 사이에 두고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 왕조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게 된다

bc301년 이집트를 점령한 프톨레미에 의해 유대는 합병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에 이어 알렉산더의 직접 통치 그리고 헬라 제국의 프톨레미의 통치를 받게 된다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에게 통치보다는 오히려 유대의 종교적 전통에 대해 존중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당시 프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의 수도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서[알렉산드리아=알렉산더가 세운 도시중 자기 이름으로 명칭을 바꾼곳이고 한곳이 아니라 70여개가 넘을 정도로 여러군데였다] 70여 개의 알렉산드리아 중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다
프톨레미 1세는 스스로 소테르[그리스어로 구원자]라 칭했다
프톨레미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을 세우고서 작가와 시안,과학자,학자들이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무세이온[박물관의 어원이 됨]도 건설합니다 이 모임의 회원들은 급여와 숙소 식사를 제공받았으며 프톨레미 소테르는 친히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권위 있는 역사서를 쓰기도 합니다
[무세이온=bc3세기 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설치한 왕실부속연구소로 원래는 학예의 여신 뮤즈를 모신 장소를 뜻합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 연구의 중심지였으며 각지에서 초청된 학자 100여 명이 자연과학과 문헌학을 연구 강의 했던 곳]
프톨레미1세가 세운 이 무세이온을 프톨레미2세 역시 지속적으로 후원하는데

유대 민간 전승에 의하면
프톨레미 2세[프톨레미 필라델푸스]는 그의 도서관에 유대인의 율법책을 비치해 두기를 원해 히브리어로 쓰인 토라[모세5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72명의 학자를 뽑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보내
토라를 번역하게 했고 그 후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쓴 다른 성문서들도 그리스어로 번역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어로 된 성경이 만들어 졌는데 토라뿐 아니라 그리스어로 된 성경 전체를 일컬어 72명의 번역자가 번역에 참가했기 때문에 70인역 성서[LXX]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놀라운 작업이 이루어진 것 입니다



[70인역 성서 LXX]

하지만 이때도 역시 프톨레미왕조와 셀류커스 왕조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 진행중입니다

유대의 신앙을 존중해주며 지배하고 있었던 프톨레미 왕조는 셀류커스 왕조에게 패하게 되는데
bc198년 파네아스 전투에서 이집트에게 승리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는 유대지역을 이집트에서 시리아의 영토로 합병합니다
처음엔 안티오쿠스3세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성전도 재건하고 다시 사람이 사는 도시로 개발해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토 확장을 꾀하는 안티오쿠스 3세는 bc189년 당시 부상하던 로마에게 패하여 아파메아 조약(bc188)을 맺고 로마에게
조공을 과중하게 바칩니다

이때 당시 유대의 경제상황은 매우 빈곤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해 옵니다
예루 살렘 성전은 전세계에 퍼져있는 수많은 유대 디아스포라의 순례로 이어졌고
이들이 바치는 예물로 예루살렘성전만은 종교 산업으로 부를 축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 안티오쿠스3세는 자기가 속국으로 두고 있는 모든 나라들의 신전들의 재산을 압류하기 시작했는데 예루사렘성전도 예외 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이에 대한 백성의 반대가 일어 났고 그는 결국 암살당하고 맙니다

이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셀류커스4세가 왕이 되지만 많은 조공을 바치라는 로마의 압력은 여전히 변하질 않습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마카베오하[외경이지만 역사적인 측면으로 지금 이야기 하는 부분이 담긴 내용이다]에 의하면
셀류커스 4세가 헬리오도로스라는 총독을 시켜
예루살렘성전을 탈환하라고 시킵니다 하지만 성전을 탈환하려고 왔던 헬리오도로스는 오히려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돌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셀류커스4세는 재무관 헬리오도로스에게 독살되어 싸움도 없이 망하였습니다.
그의 동생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가 반란을 제압하고 왕이되는데
[적그리스도 후보이자 예표 한명이 등장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안티오쿠스가 왕이 되었어도 로마에게 조공을 바치느라 재정이 궁핍한건 여전한 상황이였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유대교를 보편화하려는 유대의 개혁운동 세력과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을 개혁 성향의 야손으로 교체한 후 대제사장이 공공기금을 관장하면서 성전의 기금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bc175년 제사장 혈통의 예루살렘 사람 야손은 새롭게 권좌에 오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4세에게
뇌물을 제공해서 대제사장으로 임명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bc172년에는
더욱 더 친그리스적인 성향의 라이벌이었던 제사장 메넬라우스가 안티오쿠스 4세에게 더 많은 돈을 제시해 대제사장으로 임명 받아 대제사장이 교체됩니다.
메넬라우스는 지배자에게 자신의 재정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성전의 재정을 유용해야 했는데
라이벌이였던 야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메넬레우스는 성전의 희생제의까지 금지시켜려했는데 그러자 경건한 유대인[하시딤]들은 메넬라우스와 바알종교가 다른 것이 없다고 여기며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대제사장 메넬라우스에 반대하여 매를 맞아 죽는 사람들까지 생겨나자 이때부터 '순교자'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손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백성들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켰고

이런 상황속에서 시리아와 대립해있던 프톨레미가 예루살렘을 점령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티오쿠스에피파네스4세가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하지만 야손과 메넬리우스 사이의 긴장은 해결되지 않고계속 남아 있어 다시 폭동이 일어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집트까지 점령하러 갔다가 로마에 의해 물러나게 되어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원정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 것에 분노했습니다
유대가 그의 헬라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야손이 일이킨 폭동을 제압하며 그 뒤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bc167년 12월에 칙령을 발표하여 강한 개화정책[헬라화]을 시행합니다
이 정책은 종교적인 행동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율법에 금지된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게했고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그리스 신인 제우스를 경배하는데 사용하여
유대인들의 역사상 비교할 것도 없을 정도로 모욕을 안겨줍니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는 스스로 에피파네스 [신의 현현]라 불렀으나
유대인들은 에피마네스[미친놈]라 고쳐 부르며 저항했고
그리고 이때 유대가 '다윗 왕조'가 아닌 맛다디아 가문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그것을 마카비 혁명이라 합니다
이 저항 세력이 하시딤입니다
[하스몬 하스몬 왕족들이 헬라 왕처럼 헬라화되자 그들은 실망합니다 하시딤의 후예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입니다]


 

헬라 제국> 막카비 반란

팔레스틴의 유다인은 수리아의 셀루커스 치하에서 30여년 동안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의 로마 원정을 위한 그리스 전쟁에서의 패배로 BC 191년 막중한 배상금과 함께 소아시아를 포기해야 했고 이때부터 셀루커스 왕조는 기초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레스틴의 유다인은 안티오쿠스 3세의 아들 안티오쿠스 4세(별명은 에피파네스)의 제우스(Zeus)신에 대한 종교적인 통일정책으로 안티오쿠스 3세때 누리던 종교적인 자유는 깨지고 말았다.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은 헬레니즘의 신봉자였다.


BC 171년 안터오쿠스 4세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라는 뜻의 '에피파네스'라고 별명이 붙은)는 대제사장직을 최고액의 입찰자에게 경매함으로써 정통 유대인들을 경악케했다. 그 구매자는 메넬라우스라 불리는 자였는데 그는 유대종교를 파괴하고 그것을 그리이스의 생활방식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안티오쿠스의 계획에 찬동했다.


BC 169년에 유다의 독특한 신앙을 유지하려는 유다주의자(ex.바리새파)들은 안티오쿠스 4세가 애굽의 원정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안티오쿠스 4세의 정책에 협조적이었던 헬라주의자들 다수를 죽였다. 그러나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안티오쿠스 4세는 유다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모든 종교행사를 금하는 종교박해도 감행했는데 그는 이를 위해 BC 168년 2만명의 군대를 예루살렘에 배치하였다.


BC 167년에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종교를 불법화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유대 율법을 지키려고 하거나. 성경의 사본을 소지하고 있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 성전에 그리이스의 주신인 제우스의 제단을 세웠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마카비 반란을 일으켰다.
예루살렘의 희랍화는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때 절정에 달했으며 당시 성전의 세속화 및 유대인들의 종교적 일체성을 말살하려는 정책은 결국 유대인 반란만 초래했다.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일련의 반란을 유발시켰는데 처음은 룻다 지역의 모디인(Modin)이란 작은 촌에서 한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아들이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라는 왕명을 거절한 데서 시작되었다. 맛다디아는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는 왕의 대리자인 유다인들을 죽이고 제단을 파괴한 후 고프나 산지로 자기 아들과 함께 도망하였다(막카비전서2:15-28). 거기서 그는 뜻을 같이하는 경건한 유다인의 모임인 하시딤(Hasidim)과 합류하여 이방신들을 뒤엎고 유다 마을을 선동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다인들과 싸우도록 했다. 이에 사마리아 주둔군의 사령관이며 고프나와 그 일대 지역의 총독인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는 이 반란의 진압을 위해 고프나 산지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맛다디아는 죽고 그 아들 유다 막카비(Judas Maccabius)가 지휘권을 인계 받았는데 그는 르보나 비탈길에서 아폴로니우스를 살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막카비전서3:1-12). 이후로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그들의 '하누카 (성전의 재봉헌) 축제에서 기념했다.(BC 164년)

 

 

 

마카비혁명은 안티오쿠스에 종교적 박해로 예루살렘에서 약 10km 떨어진 모디인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이 반란은 맛다디아스라는 제사장과 그의 다섯 아들인 유대 마카비,시몬,요하난,엘르아살,요나단에 의해 조직되고 지휘를 받게 됩니다
24년간 계속된 이 반란을 마카비혁명(166~142)이라 합니다

마타디아스[마따디아.맛다디아]가 우상숭배를 요구하던 시리아의 관리와 우상숭배에 참여하려 한 유대인들을 살해했습니다.  이를 기호로 그 후 유대 마카비가 4명의 형제들을 이끌고 셀류커스 왕조의 주둔군과 유대 지지자들에 대한 게릴라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주변에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게 된 것입니다

마타디아스 하스몬은 우상에게 절하라고 유대를 압박한 안티오쿠스 4세의 명령에 도전한 연로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이어 마카비 혁명을 주도했는데 처음에는 마타디아스의 셋째 아들 유대마카비가 이어서는
막내아들 요나단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줄째 아들 시몬이 이일을 맡았습니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은 혁명을 주도하면서 개혁파 인물들을 구금하고 셀류커스 왕조의 인물들을 감금했으며 그 후
성전을 정화하여 bc164년 12월에 마침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다시 거행하게 됩니다
그러자 bc 162년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5세는 유대의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를 처형하고 하스몬 가문은 오히려
bc161년 로마와 동맹을 맺어 독립국가의 지배 가문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bc152년 셀류커스는 유대를 그리스화 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당시 하스몬 가문의 지도자였던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로써 하스몬 가문은 그 직책을 115년 동안이나 고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유대는 bc142년 셀류커스 왕조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유대를 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고
이로 인해 형에 이어 대제사장에 오른 시몬 마카비는 명실공히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왕조가 아닌 하스모니아 가문의 왕들이 다스리는 하스몬 왕조를 세웁니다

이때가 바로 유대가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에서 440년 만에 독립을 이룬 때 입니다
이때가 바로 수전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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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절[하누카]은 하나님이 주신 7절기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의 10대 절기에는
포함되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수전절을 지켰는가 물어볼 수 있다
대답은 그렇다 이다

요한복음
10:22 그때 예루살렘에는 수전절이었고, 때는 겨울이더라.
10: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
10:24 유대인들이 와서 주를 에워싸고 말하기를 "언제까지 네가 우리를 의심하게 하려느냐? 네가 그리스도이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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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처음 종교적인 박해로 시리아에 반란이 일어났을 당시 하시딤[하시드인=경건한 자들]이라 하는 사람들이 이 반란에 지지를 보내 시리아와 반란에 참여했고 유대가 독립하자 이들은 '바리사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의 정치 및 종교 세력으로 떠오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헬라 문화로 개종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율법을금지하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했을때 끝까지 정절을 지킨 사람들을 '하시딤'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때 당시 유대인들은 개종은 절대적으로 반대하면서도 그리스의 선진 문명에 대해서는 배우려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 사상을 흡수하기도 했고 바리새인들이 '구전 율법'을 만들게 된 경위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이 기록된 율법만을 엄격하게 고수한 점과는 이에 차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몇몇 부유한 가문 지도적 제사장 가문으로 이루어진 반면 바리새파는 도시 상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집단으로 사회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나 사도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바리새파의 신학은 모세오경뿐 아니라 구전되었던 그 밖에 성서[현대 성서의 예언서 등]도 권위 있고 영감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영적존재와 육체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예수 시대에는 바리새파가 주도적 종파였으며
이들은 높은 율법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규례들을 만들어 내어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게 했고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두개파와 적대적관계였습니다

사두개파
다윗왕과 솔로몬 왕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을 따른 종파로
에스겔 40:46 ,13:19:44:10-15를 보면 그의 가계가 제사장직을 득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뜻으로 생각하는 지금과 달리 사두개파는 인간 사회의 어떤 것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독가계는 bc175년부터 야손,메넬리우스,하스모니아 가문에 의한 대제사장직 강탈과 정치적으로는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 그리고 하스몬 왕조의 성립등과 같은 역사적 흐름의 영향으로 3집단으로 나뉘는데
첫번째는 bc150년경에 사독의 후예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을 겸임한 하스몬 가문에 반발하여 당시 이집트 레온토폴리스에 성전을 건립하여 그곳에서 절기와 제사를 지킵니다

두번째 집단은 이런 혼란스런 종교적 상황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유대 광야로 도망갔는데
이들은 스스로 제사장 전승의 유일한 합법적 계승자로 여겨 세속적인 방법을 단념하고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에 대한 신비주의에 열망하여 에세네파의 형성에 중추적 역활을 담당합니다

마지막 세번째 집단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스몬 왕조와 결탁한 사두개인입니다
그들의 권력의 근거는 제사장적 지위에 대한 주장에 있었고
이런 면에서 그들은 백성의 종교적 권위자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토라 전승의 수호자로인십됩니다
이들은 대체로 상당한 부와 정치적 명성을 구가하는 제사장적 귀족 당파를 형성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후손들 가운데 헬라 사상의 일부를 받아들여
종교 권력을 유지했던 자들의 후손으로서 한마디로 최고 권력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들이라 하여 사두개파로 불렸고 그들은
성전 관리 일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한쪽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세상 권력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현세적이었으며 율법을 어기면서 까지도
당시 정치적 힘을 행사하는 로마 총독이나 헤롯왕과 타협했습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달리 전통을 거절하고 기록된 율법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누가 돌에 맞아야 하며 누가 화형에 처해져야 하며
누가 참수를 당해야 하고 누가 교수형에 처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처벌 체계를 만들어 문서로 보관하기도 앴습니다
사두개파는 구두상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바리새파의 견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는 또한 육체의 부활이나 죽음 후의 심판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특히 바리새파가 모세오경과 함께 묵시문학을 권위 있는 문서로 받아들인데 반해 사두개파는 오직 모세오경만의 권위를
받아들이려 했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것 입니다

막 12장1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그래서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 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후에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잡혀
공회에 서게됐을때 이처럼 부활에 대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다른 입장을 이용하여
그 자리를 빠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행 23장 6~11

'사두개파'는 확실히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율법이나 생활 전반에 있어서 융통성이 었었는데
이는 사실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태도였습니다


'에세네'라는 이름은 침묵 경건을 의미합니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부터 자극을 받아 생겨난 새로운 종파같은 것인데
율법에 대해서는 바리새파와 비슷하게 엄격한 입장이었으나
현실 도피적이고 은둔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단 광야로 후퇴하여 열심을 되찾은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일단 후퇴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은 그렇게 용이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그들은 물도 나무도 거의 없는 사해의 북쪽 지역에 모여 살았고
ad1947년 이후에 그들의 거주지 근처에 동굴에서는 사해사본이라고 부르는
성경 사본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농업 같은 종류의 일에 종사하고 성경해석을 포함하여
도덕적 종교적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모든 재산을 공유하고 노예를 두지 않았으며 정결 예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살았습니다
이들은 성전 예배는 타락했다고 하여 거부하며 토라의 정결법을 더욱 강하게 지켰고 성전에서는 아니지만
거룩한 날에만 거룩한 절기에만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우 엄격한 금욕주의 생활을 했으며 자기네들만이 과거 선지자들을 통해서 내려온 약속의 계승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메대사람 다리오의 정체[다니엘서 5장끝, 6장, 9장]

 

 

다니엘 5: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6: 1 다리오가 자기의 뜻대로 고관 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메대 제국의 다리오 왕은 페르샤 제국의 고레스 대왕과 함께 6장의 배경을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다니엘의 경험과 연관짓기 전에, 메대와 다리오 왕, 그리고 이들과 불가분한 페르샤의 초기 역사와 고레스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가.메대 제국과 페르샤의 초기 역사

메대(the Medes)는 민족 이름이고, 메디아(Media)는 그들이 세운 나라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메대는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야벳의 아들 마대(Madai)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로(창 10:2, 대상 1:5), 페르샤와 함께 인도-유럽족(Indo-European)에 속한다.

 

이들은 페르샤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와 인도 사이에 놓인 이란 고원(高原) 지대에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아누"(Arianu) 즉 "귀족들"(nobles)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나라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아리아나"(Ariana) 혹은 지금의 이란(Iran)으로 1935년부터 불려지고 있다.

 

이들 메대 족속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주전 9세기 중엽인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III세(859-824 BC) 때부터인데, 그후로는 계속 역사에 등장한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여러 왕들에 의해 거듭 정복되어 조공을 바쳤고, 북방 이스라엘이 망한 후 포로된 백성들이 앗시리아에 의해 메대의 여러 도시들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왕하 17:6, 18:11).

 

헤로도터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후 기원전 7세기 초에 데이코스(Deikos·혹은 c. 700 - c. 647 BC)가 일어나 메대 족속들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고, 엑바타나(Ecbatana)를 수도로 정하였다.

 

데이코스 다음에는 그의 아들 파라오르테스(Pharaortes)가 22 년간(c.647 - 625)다스렸는데, 이때 그들 남쪽에 있던 페르샤족을 복종시켰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르테스의 아들인 시악사레스(Cyaxares I)가 즉위하여 약 40년간(c. 625 - c.585) 다스렸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넘어뜨리기 위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인 바벨론의 나보포랏살과 동맹을 맺어, 기원전 612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정복한 앗시리아의 영토는 양분하여 티그리스강 동쪽과 북쪽은 메대가 차지하고, 바벨론은 이 자연적인 경계선의 서쪽과 남쪽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실(王室)혼인이 이루어져, 시악사레스(1세)의 아들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딸 아미티스(Amytis)가 나보포랏살의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그 후 시악사레스는 소아시아의 스키디아(Scythians)족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병합하였으며, 기원전 585년에는 리디아와도 접전했으나, 그해 5월 28일 일식(日飾)이 일어나자 서로 전투를 중지하고 강화(講和)하였다.

 

시악사레스 1세 다음에는 그의 아들 아스티아게스(Astyages)가 즉위하여 약 35년간(c. 585 - c. 550) 다스렸는데, 그가 바로 고레스의 외조부라고 전한다.

 

역사가 헤로도터스에 의하면, 아스티아게스는 꿈에 자기의 딸 만다네(Mandane)에게서 강물이 흘러나와 아시아 전역에 넘치는 것을 보고, 이를 경계하여 딸을 메대의 귀족에게 시집 보내지 않고, 안산(Anshan)에 있는 그의 페르샤의 봉신왕(封臣王)인 캄비세스 I세(Cambyses I c.600 - 559)에게 멀찍이 시집 보냈다.

이렇게 이루어진 결혼 관계를 통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페르샤의 국부(國父)인 고레스 대왕(Cyrus II 558-530 BC)인 것이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가 12세 되었을 때,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는 딸과 외손자를 불러들였는데, 어머니가 페르시아로 귀국한 뒤에도 고레스는 메대에 남아서 외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고레스의 비범한 재간과 통솔력은 그가 장차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한 때 외조부에 의해 고레스를 죽이려는 시도까지 착수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고레스에 의하여 도전받게 되었다.

 

기원전 553년 고레스는 종주국(宗主國)인 메대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외조부 아스티아게스에 도전했다. 처음 두번은 패했지만, 세번째 싸움에서 메대의 주장(主將) 하르파구스(Harpagus)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550년 고레스는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해서 외조부 아스티아게스도 사로잡았으나, 선대(善待)하여 저 멀리 카스피해 남쪽의 히르카니아(Hyrcania)의 지방 장관으로 보낸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본래 메대와 페르샤는 종족도 같고, 두 왕가가 왕실 결혼으로 긴밀히 관련되어 한 나라 같았기 때문에, 급격한 정변(政變)이 없이 한 왕가에서 다른 왕가로 정권이 교체된데 불과했다.

 

단지 페르샤의 귀족들이 정부 요직(要職)에 대거 진출한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역시 유능한 메대 사람들은 여전히 기용되었다.

고레스는 메대 사람들에게 유화(宥和)정책을 써서,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를 즉위시켜, 메대의 상징적인 왕으로 남아 있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대와 페르샤의 연합군은 바벨론을 침공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루(Gubaru), 혹은 희랍어로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벨론에 진입(進入)했고, 고레스는

10월 29일에 입성했다.

 

나.다리오의 신원

그렇다면 바벨론이 함락된 후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62세"라 하였고(단 5:31), "자기의 심원(心願)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다니엘을 총리로 기용한 그 다리오는 누구인가(단 6:1)?

 

다리오의 신원에 관하여, 그 동안 여러 가지 추론이 있어 왔다.

 

다음과 같은 윤곽을 기초로 그의 신분을 확인해 보자.


a. 성경상의 진술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단 9:1).
벨사살이 죽던 밤에 나라를 "얻었"으며(단 5:31),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었"다(단 9:1).

가계(家系)는 메대족이었다(단 5:31, 9:1, 11:1).

바벨론이 멸망하던 기원전 539년에 그의 나이는 약 62세였다(단 5:31).

그의 통치 첫 해에 관해서만 언급되어 있다(단 9:1, 2, 11:1).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다니엘을 세 총리 중 수석총리로 임명했다.

 

b. 고대 역사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아래와 같이 썼다.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희랍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기록에 의하면, 메대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은 후 시악사레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고레스의 어머니 만다네와 남매 관계이기 때문에, 고레스에게는 외숙부가 된다.

 

고레스는 어린 시절 외조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의 궁전에서 자랐기 때문에,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와는 친숙하였다.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한 뒤, 그는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의 딸 카산다네(Kasandane)와 결혼하였으며, 장인은 결혼선물(dowry)로 나라(메대)를 사위에게 주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고레스는 자신이 메대를 정복하였을지라도, 메대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명목상 외숙부인 시악사레스(2세)를 메대 왕으로 세웠다.

 

바벨론을 함락한 다음에는, 그를 장인으로 삼아 당시 나이가 약 40세 안팎[BC 585년 출생으로 보았을 때 46세]인 자기에 비해, 이미 노년에 접어든 62세의 장인을 잠시 바벨론의 명예 왕으로 앉힐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5장 31절과 6장의 다리오는, 시악사레스 2세 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을 다리오(Darius)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다리오(Darius)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인 이름이 아니라, 여러 왕들에 의해 채택된 통칭(通稱)인 보통 명사로 "정복자"(Subduer)를 뜻하는 말이요, 보좌 명칭(Throne name)이라고 한다.

 

또한 다리오를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이라고 했는데(9:1), 이 곳의 아들은 손자나 더 먼 자손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고레스의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가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음이 밝혀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 때, 6장의 다리오는 고레스의 외숙부요, 장인인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일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 메대 사람 다리오 왕의 신원에 관한 견해들

 

다니엘서 5장 31절, 9장 1절, 11장 1절에 나오는 "메대 사람 다리오"가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그 동안 많은 견해들이 있어 왔다.

 

물론 잘 알려진 페르샤의 세번 째 왕인 다리우스 1세(Darius I, 522-486 BC)와는 다른 사람이다.

 

언급된 이름들로는 고레스가 정복한 메대의 왕이요 외조부인 아스티아게스(Astyages),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이요 고레스의 외숙부이며 장인이기도 한 시악사레스 2세(Cyaxares II), 고레스(Cyrus) 자신,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Cambyses II), 고레스의 장군으로 그보다 두 주일 반 앞서 바벨론에 입성한 구바라(Gubara, 혹은 Ugbaru, 헬라어 표기로 Gobryas로도 부름-ㅅ톰슨성경 지지) 등이다.

 

이 여러 후보 가운데, 성경의 기사를 모두 충족시키는 역사적 인물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시악사레스 2세와 구바라로 압축되어 왔었다.

 

실제로 기원전 539년 10월 바벨론을 함락시킨 고레스의 장군인 구바라가 유망하여, 윌리암 쉐이(William H. Shea)나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그 가능성을 택했다. 그러나 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가 출판된 이후, 다시 연구된 대영 박물관의 쐐기문자 본문에 의하면, 당시 고레스와 그의 아들 캄비세스의 섭정 연대 해석에 차질이 있음과 함께, 구바라의 사망 날짜도 잘못 이해되었음이 발견되어, 윌리암 쉐이 자신이 자신의 견해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몇 가지 새로운 이해를 곁들여, 그는 다니엘서의 "메대 사람 다리오"를 다름 아닌 고레스 자신이라 하고, "다리오"는 물려진 "보좌 명"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변동 가운데서, 본서는 이 문제에 관한 크세노폰의 기술에 몇 가지 미흡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악사레스 2세가 다리오의 신원에 보다 적합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리오가 이들 가운데 누구인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신빙성이나 중요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계속하여 더 확실한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기대이다.

 

다리우스: 의문에 둘러쌓인 왕

 

역사속의 어디에서도 그사람의 이름이 언급된적이 없으며, 오직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만 언급되었을 뿐, 어디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다리우스이다.

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던 날 밤,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였던 바벨론을 포위하던 일단의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각 바벨론의 젖줄이자 해자노릇을 하던 유프라테스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각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연합군중에 공병대들이, 바벨론성으로부터 30Km지점 상류에 있던 인공호수(바빌로니아 1대 왕이었던 나보폴리사르가 바벨론성을 구축하기위해 만들었다.)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페르시아 연합군은 바벨론성에 진입하였으나, 그들을 막는 바빌로니아 병사는 소수에 불과할뿐,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행진이었다.

그날밤 바벨론의 차기 왕이자 당시 바벨론의 왕, 나보니두스의 장남이자 대리섭정자였던 벨사살이 페르시아의 군인에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6일에서 11일까지 반란세력을 진압하게된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11일 페르시아군의 총사령관이자 페르시아의 왕인 키루스 2세가 바벨론성에 입성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싸웠던 다리우스를 바벨론의 왕으로 임명한다.

다리우스는 그후 120여명의 관료를 임명한다. 성경과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 언급된 내용은 이러하다.

 

 

하지만, 세속역사에서는 그 이름에 대한 언급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다만 밝견할수 있는 것은, 몇몇 자료에서의 그의 일생에 관련된 부분적인 것들이 보여지고있다.

하지만 바벨론 정복과 관련되어 중요한 금석문이 발견되면서, 다리우스를 지칭하는 인물을 찾을수가 있다.

'나보니두스연대기'라는 점토판이 밝견되면서, 다리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금 전해지는데, 과거 어디에서 밝견할수 없었던 인물을 만나게 된것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였을 때인 타슈리투[티시리(9~10월)]월 14일에, 시파르는 전투없이 함락되었다. 나보니두스는 도망하였다.

 

같은 달 16일[기원전 539년 10월 5일]에 구티움을 총괄하던 총독 고브리아스(구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없이 바벨론에 진입하였다. 그의 앞에는 푸른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술무(평화)의 상태가 그 성에 임한 것이다.

키루스는 바벨론 전역에 인사말을 보냈다. 그의 총독인 고브리아스는 바벨론에 부총독들을 임명하였다.'

일단의 역사학자들은 이 '고브리아스(구바루)'를 다리우스라고 말한다.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들이, 우리가 알려고 하던 다리우스와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이며, 나보니두스 연대기 이후 그의 이름에 대한 언급이 다른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다는데 중점을 두고 보고있다.

특히 나보니두스의 장자였던 '벨사살(벨사쟈르)'에 대한 오보적인 기록(다니엘서에서 나왔던 벨사살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다고 말한것)때문이었을까?

 

사학자들은 구바루에 대해, 보다 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결과, '그가 다리우스 였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란 사람이 왜 역사속으로 사라졌으며, 그의 일생에 걸친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파해쳐보아야 할것이다.

'짐은 바빌론(바벨론)의 영토 동편에, 튼튼한 성벽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해자를 팠으며... 역청과 벽돌로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거대한 성벽을 쌓았다.'

앗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신바빌로니아의 2대 군주로 활약하던 왕 네부카네자르 2세(느부갓네살)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자신의 역대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이 건축한 바벨론성을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처럼 그가 지은 바벨론성은 어느 누구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견고하게 지었다고 그는 자부했다. 하지만 그 성은 그가 생각했던것 만큼 난공불락은 아니었다.

때는 기원전 539년 10월 5일 밤,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 2세는 대군을 이끌고 바벨론 성을 함락시킨다. 그에게는 훌륭한 다른 왕이 옆에 있었다. 그가 바로 다리우스이다. 다리우스라면, 흔히들 다리우스 대왕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인 별개의 사람이었다. 키루스는 이 사람을 어떻게 얻었을까?

 

그점은 '로버트 콜린스' 라는 사람의 저서에서 살펴볼수 있겠다.

 

그의 저서「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The Medes and Persians)에서 이렇게 말한다.

'메디아 사람들은 평화로운 가운데, 페르시아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메디아 사람들은 종종 행정부의 고위직이나 페르시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인들은 메디아 사람들과 페르시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피정복자와 정복자 간의 구분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메디아는 페르시아에 합병되어, 페르시아 제국과 급속도로 친화적으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메디아 사람들이 페르시아의 주요 관직에 앉았다는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리우스는 어떠할까?

 

다리우스에 대한 기록은 "메디아의 왕이었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는것, 그리고 "페르시아의 메디아 정복 과정 중에 아하수에로는 페르시아와 동맹에 가까운 합병"에 이르게 되었다는것이다.

 

이 당시 그의 아들이었던 다리우스는 왕자로 있었으며, 페르시아와 메디아간의 평화를 주장한 사람이었다. 선왕 아하수에로의 평화적인 합병에 대한 유지를 이어,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도울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페르시아와 연합한 메디아 사람들은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메디아 병사들)의 지도자가 바로 다리우스였던것을 비추어 볼 때, 메디아의 군사들이 얼마나 페르시아에게 협조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겠다.

키루스가 바벨론성을 함락시키고, 얼마후에 "바벨론왕"의 호칭을 당시 "메디아의 왕"이었던 다리우스에게 넘긴다. 당시 바벨론은 상업적으로 절대 필요한곳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신임하는 왕이 필요했을 것이었고, 페르시아의 왕으로서의 정무 때문에 스스로가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키루스가 바벨론 왕의 자리에 오른것은, 바벨론성의 함락후 7년후인 B.C. 530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와 공동통치자로써 등장했을 때였다. 그것은 결국 7년이란 시간동안 바벨론을 통치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다리우스는 키루스대왕의 이러한 신임을 받고, 바벨론의 왕으로 오르게 된다. 그에 대해 성경에서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메대(메디아)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다리우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다리우스)는 육십 이세였더라..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방백 일백 이십명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하고 또 그들위에 총리 셋을 두었으니 다니엘이 그 중에 하나였다.'

다리우스는 어지러운 정부를 개편할 필요에 의해, 과감한 정치개편을 단행하여, 페르시아식의 법규를 제정하게된다. 키루스대왕의 군사참모로서, 메디아의 왕으로써, 그의 능력은 이를데 없이 화려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존 기록은 미미하기만 할 밖에 없다..

왜 그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일까?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위는 적다고 볼수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와 '성경 다니엘서'에서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리우스가 바벨론의 총독이 된 후 그는 120명의 관리를 임명하게된다. 이들중에 3명을 더욱 비중있는 지위를 맡기게 되었는데, 그들중의 한명이 바로 다니엘이었고, 나머지는 바벨론에 있던 관리들이었다.

다니엘 이외의 나머지 관리들은, 당시 바벨론에 있던 관행(어느정도의 부패가 있던것으로 추정됨)대로 일처리를 하였고, 다니엘만큼은 정도에 맞게 정치를 하려고 하였던것 같다. 그러자 다니엘의 행정 스타일을 보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관리들은, 그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게된다.

그것이 '30일간 왕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것과, 타 종교에 대한 믿음을 단절한다. 법을 어기는 사람은 사자굴에 넣는다'는 내용을 담고있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허락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사 기록에서는 고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숭배하게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다리우스의 칙령에 나오는 “청원”에 대한 제재 규정은 순전히 종교적인 성격의 청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일반적인 종류의 간청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또한 바빌론에 “사자 굴”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리엔트 지역 통치자들에게는 흔히 야생 동물원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고대 비문들의 증거와 일맥상통하는데, "손시노 성서 책들"라는 책에서는 말하기를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동물원에서 키우는 관습을, 아시리아의 왕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는 그 포고령에 서명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그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그 결과를 통해 ,이 칙령을 만든 숨은 의도를 깨달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 법에 저촉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법을 고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것으로 보여지지만, 당시 페르시아의 법은 왕의 권력으로도 법을 함부로 고치지못한다는 법령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다리우스는 그만큼 다니엘을 신임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니엘은 사자굴속에서 살아남게된후 다리우스의 개혁이 보여지는데, 당시 바벨론의 신을 물리치고 유대의 신인 '여호와'를 주신으로 할 것을 공표한 것이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당시의 바벨론 신관계급들은 상당한 반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하였던 사람들, 즉 서기관들 또한 신관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왜곡된 기록이나 기록을 제거하였을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는 자신 혹은 자국의 이익에 대한 부분만 끌어 올려주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지워서 소멸시키던가, 아니면 과장되게 기록하는 일이 있었다.

힉소스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마네토'라는 역사가 역시, 신관계급이란 점을, 또한 이스라엘인을 그 누구보다 증오하고 싫어했다는것, 신관으로서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결코 기록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 등을 통해, 그는 결국 "힉소스"라는 가상의 민족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있다.

 

바빌론 신관들의 관련문서 삭제를 통해, 결국 그의 모든 기록들은 소멸되었다. 기록이 완료된 모든 문서들 또한 소멸시켜버렸다.

특히 다리우스의 바벨론 통치가 그리 길지가 않았던 것은, 신관들의 영향력이 줄지 않았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되겠는데, B.C.530년에 그는 바벨론의 왕이라는 칭호가 사라진 것이다.

 

 

그의 후임자로 키루스의 맏아들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바빌론과 페르시아의 왕으로서, 키루스와 공동 섭정자로 앉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그가 죽었는 지 혹은 좌천되었는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다만 그의 바벨론통치는 7년간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기간동안 기록된 모든 기록물들은, 소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참모이자, 한 나라의 왕, 그리고 함락된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화려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의 일대기는, 어느사이 이기적인 욕심을 품었던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blog.naver.com/jacal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