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묵시를 기다림 (하박국 2:1-4)
여기서 우리가 살필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예언자가 겸손히 하나님을 주목한다(1절).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포위된 도성의 성벽 위에, 또는 침략받은 나라의 변경에 파수꾼으로 서서 정보를 얻으려고 크게 고심할 것이다. 나는 위를 바라보고, 돌아보고, 안을 바라보고,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주의깊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그의 섭리와 발자취를 살펴 조그마한 교훈이나 지시의 암시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내 속에 하실 말씀을 기다리고 바라보리니(이렇게 읽을 수 있다), 내 속의 예언의 영이 내 불평에 대한 응답으로써 나에게 받아 새기게 할 것을 보리라." 일상적인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양심에 의해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며 속삭이시기를, "이것이 길이니 그리로 걸으라" 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양자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언자가 그의 "성루," 또는 높은 처소에 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에 관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는 그의 명철을 암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으려고 기대하는 자는 세상에서 물러나와 그것 위에 서서, 그들의 주의를 고조시키며, 생각을 고정시키고 경을 연구하고, 경험과 경험자를 자문하고, 기도의 예를 계속하여 "성루 위에" 서야 한다.
그가 파수하는 곳에 섰다는 것은, 그의 인내, 지속성, 그리고 확신을 암시한다. 그는 시간을 기다리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파수꾼처럼 할 것이니, 그는 대답을 얻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실" 말씀을 알 것이니, 그것은 그 자신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그가 비방을 받거나 논쟁에 직면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그들의 예외에 응답해 줄 예언자가 되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1. 우리가 섭리의 방법에 관해 의심으로 흔들리고 당황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현명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운명이나 숙명이며 교회는 버려졌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은 연기되고 포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 우리는 고심하여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에 적합한 사려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유혹에 대해 파수를 서서 그 시험이 우리를 침노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스스로 성루에 올라서서 시험을 잠잠케 하고 반대하는 곤란을 해결할 길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알아 보며, 시편 기자처럼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여 궁구해야" 하며(시 77:6),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거기서 이 일들의 종말을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한다(시 73:17). 우리는 의심을 그대로 놔두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우리가 기도 중에 불평과 소원을 하나님에게 쏟아놓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천한 말에 주시는 말씀, 영, 그리고 그의 섭리에 대한 응답이 무엇인지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다윗이 "내가 주께 기도하기를" 화살이 표적을 향하듯이 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가 바라리이다." 즉 사람이 그가 쏜 화살 뒤를 바라보듯이, 내 기도의 결과를 바라보리라고 덧붙였다(시 5:3).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시 85:8).
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읽으려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 "우리에게 말씀하시어" 우리의 탄원을 들으시며, 확신, 주의, 충고, 위로의 말을 우리 영혼에게 주신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영접하고 그의 권능에 복종하며, 그것에 의해 훈계될 것이며,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할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응답을 할까를 숙고해야 한다.
4. 우리가 본문의 예언자처럼, 성루에서 하나님과 섭리에 대한 수많은 반대자에 의해 둘러싸이고 포위되어,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교훈을 얻으며, 우리를 만족케 해 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책망받을 때" 남들에게 들려 줄 말을 준비해야 한다. 또 "우리 속에 있는 희망에 관한 이유"를 "질문받을 때는" (벧전 3:15), 하나님께 "입과 지혜"를 간구하여,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답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그에게 만남을 허락하신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주실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다리는 그의 백성의 기대를 실망시키시지 않고, "평화를 말하며, 그들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실" 것이다(슥 1:13). 예언자는 갈대아인의 흥성에 대해 불평하였다. 하나님께서 미리 그것을 그에게 알려 주셨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에 대해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앞서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기를 예언했을 때 또한 바벨론의 멸망도 예언한 것처럼, 그들의 타락과 파멸에 관한 미래의 전망을 보여 주신다. 그래서 이제는, 이 크고 중요한 사건이 환상에 의해 그에게 알려진 후, 그 환상을 공포하고 그 성취를 목도할 세대에 주의가 기울여진다.
1. 예언자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야 한다" (2절). 이처럼 성 요한도 새 예루살렘의 묵시를 보았을 때, "기록하라" 는 지시를 받았다(계 21:5). 그는 그것을 기록하여 자신의 마음에 새기고, 스스로에게 좀더 확실하게 하며, 특히 멀리 있는 자들에게 통고하고 장래의 세대에게 전달해야 했다. 전승으로 전수되는 것은 쉽게 오해되고 부패되기 쉽다. 그러나 기록된 것은 확실하게 남아 안전하고 순수하게 보전된다.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뿐만 아니라 그의 예언서를 통해 우리에게 위대하신 일들을 기록으로 남겨 준 기록된 묵시를 찬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박국은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겨야" 하며, 큰 글자로 잘 읽을 수 있게 써서,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 그것을 신중히 읽을 짬을 낼 수 없는 자도 "황급히" 읽는 것만은 피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아마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 중에 가장 현저한 것 얼마를 판에 기록하여 성전에 걸어두는 관례가 있었던 것 같다(사 8:1). 이제 예언자는 "이를 명백히 새기라" 는 말을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기용된 자들은 가장 비천한 무리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평이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영속적 평화에 관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써 주신 것인데 명백하게 하되, "이는 다 총명있는 자의 밝히 아는 바며" (잠 8:9), 권위있게 공포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의 "출판 인가장" 을 그 앞에 붙이셨다. 그는 "그들을 명백히 새기라" 고 말씀하셨다.
2. 백성은 그 "묵시" 의 성취를 기다려야 한다(3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 너는 지금 갈대아인의 권세를 깨뜨려 너를 구원하겠다는 것과, 그것의 때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정하여져 있다는 말을 듣는다. 정한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는 가깝지 않다. 그것은 아직도 오랫동안 지연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묵시를 써야 했더니 이유로서 여기 나와 있다. 후에 다시 살펴져서 이것과 사건이 비교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역사에 정하신 때를 가지시며, 때가 오면 그 역사를 확실히 실행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것은 우리가 그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참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큰 격려이어서, 비록 약속된 은혜가 오래 지체되어도 마침내 이루어져서 우리의 기다림에 풍족한 보상이 될 것이다.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실망하지 말아야 하리니, 그것이 정해진 때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그 속에서 절망하지 말아야 하리니, 우리의 믿음에 의한 기대에 충분히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은 오랫동안 잠잠한 것 같으나 종말에 그것을 말하리라. 그러므로 "비록"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딜지라도" 우리는 계속 "그것을 기다리며" 반드시 올 것을 확신하고 올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하시고 그와 그들의 원수들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신 날은,
(1) 마침내 꼭 올 날이다. 그것은 Sine die-즉 어느 정해진 날이 없이 결코 연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과 가장 적당한 시간에 올 것이다.
(2) 그것은 "지체되지 않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벧후 3:9). 비록 우리의 시간을 지나 "지체되지만," 결코 최선의 시간인 하나님의 시간을 지나기까지 "지체되지는 않는다."
3. 오랫동안 그 성취가 기다려졌던 이 묵시는 인간의 있는 그대로를 발견해 주는 신앙과 인내의 작용이 될 것이다(4절).
(1) 어떤 이들은 교만스럽게 이 묵시를 멸시하고, 그 마음을 교만하게 하여 그것을 주목하는 일을 비웃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즉시 그들을 위해 일하신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교만하여 허영에로 향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단념하셨으므로 자기 힘으로 이럭저럭 지내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손이 그들에게 충분하다" 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교만하게 들려진" 저 인간의 영혼은 "그 자신에게도 정직하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바르지 못하고, 마땅히 되어야 할 위치에서 탈선한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충분하심을 불신하거나 멸시하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지 않을 것이다(창 17:1). 그러나,
(2) 진실로 선하며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정직한 자는 그 약속을 가치있게 여기며, 자기들의 전부를 거기에 용감히 맡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아무리 어려운 시험 기간 중에도 하나님과 의무를 유념할 것이며, 그리하여 평안히 하나님과 영교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를 기대하면서 살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포로 기간 중 선한 자들은, 약속의 이행이 지연되어도 이 귀중한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유지하고 편하게 살 것이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니,"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리라. 이는 신약에서 인용되는 바(롬 1:17; 갈 3:11; 히 10:38), 오직 믿음으로 의로와진다는 위대한 교리와 믿음의 은총이 기독교 생활에 끼친 영향에 의해 증명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살 것이며" 이 세상에서와 또 영원토록 행복할 것이다. 그들이 이생에 있는 동안에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들이 하늘에 갈 때는, 믿음이 묵시 속에 삼켜질 것이다(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에게 임할 심판 (하박국 2:5-14)
예언자는 "묵시를 기록하라" 는 명령을, 백성은 그 "묵시의 성취를 기다리라" 는 명령을 받은 후, 묵시는 다시 계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정한 다른 여러 종류의 예언처럼, 바벨론과 바벨론의 왕에 대한 중한 경고이다. 즉 그가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1:11)는 예언과 같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느부갓네살 왕 또는 그의 나라 갈대아 왕국, 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퍅하게 대한 그 교만하고 압제적인 모든 권세자들의 파멸을 읽는다.
Ⅰ. 이 원수에 대해 내려진 책망을 보자. 그것은 선고의 기초가 되고 있다(5절).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들은 인간, 특히 지위 높은 인간들을 얽어매는 올가미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자가 이런 것에 사로잡히게 됨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1. 그는 음탕하여 육욕에 빠지며, 그 자신의 쾌락에 탐닉한다. "그는 술을 즐긴다." 술취함은 그 자체가 죄악이며, 수많은 허물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는" (사 28:7) 자들에 관해 읽는다. 벨사살(특히 이 사람에게서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은, 분벽에 손 글씨가 그의 즉각적 집행에 대한 보증을 서명하고 이 판결을 수행했을 때 포도주에 취하여 그의 범죄가 극에 달해 있었다(단 5:1).
2. 그는 교만하고 건방지다. "그는 교만한 사람이며," 그의 교만은 다가 올 그의 파멸의 확실한 조짐이 된다. 만일 지위 높은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라면, 크게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보다 위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그가 포도주로 범죄한 것은 그의 무례와 오만의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교만한 사람이다." 사람이 술취하면, 비록 자신은 짐승처럼 비천하게 되지만 왕처럼 위대하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수치스럽게 한 일을 오히려 자랑한다. 우리는 "교만의 면류관" 이 "취한 자 에브라임" 의 머리 위에 있어 둘 다에게 "화가 된다" 는 것을 발견한다(사 28:1).
3. 그는 탐욕스러우며 부를 탐한다. 이것이 그의 교만의 결과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즐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다. 갈대아 군주국은 세계적 제국이 되려고 꾀했다. 그는 "가만히 있지 아니하며," 그 자신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 자신의 것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 없이 소유를 분명히 하나, 그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그것으로 만족하거나 그 자신의 궁전과 자신의 영토에서 위로를 얻지 못한다. 그의 죄는 그의 심판이 되며, 그의 야망은 그의 끝없는 불안이다. 비록 궁정이라도, 불만족한 마음에게는 그것이 감옥이 된다. 그는 "그 욕심을 음부처럼, 또는 무덤처럼 넓히니," 그것은 매일 죽은 시체를 받으나 계속 "달라, 달라" 고 부르짖는 무덤과 같다. 그는 계속 삼키며 "만족될 수 없는 사망과 같다." 만족하게 가지는 때를 모르며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큰 재물을 소유한 많은 사람의 죄요, 어리석음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족되지 않은 욕망을 계속 만족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은 정당한 처사이다. 그것은 "은을 사랑하며," "그것으로 만족할 줄을" 도무지 모르는 자들에게 내려진 운명이다(전 5:10). 자기 몫에 만족하지 않을 자들은 자기들의 성과의 위로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 교만한 방백은 아직도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소유를 탈취한다. 그들은 그의 것이 되지 아니하거나 그의 명령 아래 있지 않으려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 다른 나라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한 나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다른 또 하나를, 그리고는 모든 나라를 소유해야 한다. 이는 낮은 지위에 놓여 있는 자가 똑같이 지나친 욕심을 만족시키려고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것과 같다(사 5:8). 그리고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지배권을 넓히는 데서 영예를 찾으려는 야망에 찬 방백들의 바보짓이나, 그들에 의해 습격을 받아 깨어져 버린 저 열국들의 불행 중 어떤 것을 더 동정해야 할지는 말하기 어렵다.
Ⅱ. 그에게 내려진 판결이 있다(6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지 않겠는가?" 그의 운명은 이렇다.
1. 교만이 그의 죄였으므로 불명예와 굴욕이 그의 징벌이 될 것이며, 그는 비난을 당하며 조소를 받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으리다.
2. 그가 이웃들에게 잘못 대해 왔으므로, 그가 학대한 자들이 바로 그의 굴욕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 무리가 다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모욕하는 데서 쾌락을 누릴 것이며, 그는 그들에 의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 큰 폭군의 멸망을 기뻐할 자들은, 본문에 보면, 그를 대적하여 "속담" 과 "조롱하는 시" 를 준비한다. "오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아하! "이제 그는 어떻게 될까?" 하고 말할 것이다(모욕하는 노래를 작성하는 자가 이처럼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조롱하는 방식으로 읽힐 것이다.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의인," 즉 묵시가 기록되어 명확하게 보여졌고 그것의 도움을 받는 자는 말하리라. 그 원수는 자기가 번영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때에도 그 원수의 멸망을 예언할 것이며, 그가 "뿌리를 깊이 박는 때에도" (욥 5:3) "갑작스런 저주가 그 집" 에 임할 것을 예언하리라. 그는 진실로 그 원수에게 화를 공포하리라.
(1) 여기서는 이웃의 권리를 침범하여 자신의 소유를 늘이는 자에게 화있으리라고 한다(6-8절). 그는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며" 다른 사람의 소유를 취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정직하게 획득한 것 이외에는 우리의 것으로 여길 수 없으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또 그런 것은 오래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허영으로 획득된 재물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흥성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찬양하지 말게 하라.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합법적으로 부자가 되지 않았다면 화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이 부유한 방백이 무엇을 행하는가? 그는 "불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 이다. 부(富)는 진흙, 곧 탁한 진흙에 불과하다. 금과 은이란 백토와 황토 외에 무엇인가? 탁한 진흙으로 여행하는 자는 그 여행이 지체되고 자신들은 더럽게 된다. 세상의 부요를 충만히 누리고 세상을 살아 나가는 자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 쓰레기가 무슨 보화라도 되는 듯 생각하여, "그것으로 짐진" 자들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그들은 언젠가는 포기해야 할 것 때문에 끊임없는 걱정의 짐을 지고, 그로 인해 많은 죄를 짓는다. 그들이 이 탁한 진흙을 그들의 배에 과하게 싣는 고로, 배와 자신들을 "멸망과 파멸"로 침몰시킨다.
[2] 이처럼 그가 재물을 늘이는 동안,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보라. 그들은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그가 충분히 소유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겠느냐?" 고 하느님께 부르짖는다. 또는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그것이 얼마나 계속될는지, 그가 이처럼 부정직하게 축재한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지 보라" 고 말한다. 그들은 감히 내놓고는 말 못하나, 그들이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고 말할 때,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
[3] 이 일의 종말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주목하라.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탈취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도로 그에게서 강제로 탈취할 것이다. 메대인과 바사인이 갈대아인을 노략하리니, 그들이 다른 열국에게 행한대로 당할 것이다(7,8절). "너를 물고 괴롭게 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네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았던 자들 즉 잠든 것처럼 보였던 자들이 일어나 깨어 너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그들은 홀연히 일어나 네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가장 큰 충격을 당하여 타격을 피할 준비가 덜 되어 있을 때 덮칠 것이다. 그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의심할 바없이 그럴 것이며, 너 자신은 그것을 각오해야 하니, 네가 남을 취급한 것처럼 취급되어, 남들이 너에게 그랬듯이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리니, 보응의 법칙에 따라 네가 열국을 탈취했듯이 너 자신도 탈취되리라(8절).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라."
바벨론의 왕은 주위의 모든 열방을 낮추었으므로, 그들 중 아무도 자기에게 보복을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단지 민족의 남은 자에 불과했으나, 즉 매우 소수가 남았으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론하실 때는, 이들이 그를 노략하기에 충분하리니
첫째,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그의 야망과 복수에 희생된 수천의 목숨, 특히 특수한 조건에서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인 이스라엘의 피를 흘렸음이라.
둘째, "땅에 강포를 행했음이라." 즉 그가 수많은 나라를 황무하게 하고 땅의 소산, 특히 이스라엘 땅의 소산을 망쳤음이라.
셋째, "성읍에 강포를 행하였음이니," 그가 황폐한 무더기로 화하게 한 많은 성읍들, 특히 거룩한 성 예루살렘과 그에 의해 파멸된 "그 안의 모든 거민" 에게 행하였음이다. 교만한 자에 의해 스스로를 높이고 배불리려고 행해진 강포는 다른 날에 다시 "복수가 그에게 속한" 자에 의해 소환될 것이다(또한 설명되어야만 한다).
(2) 여기에 아직 더 탐욕하며, 아직 더 높아지려고 하는 자에 대한 화가 있다(9-11절). 이 화가 공포되는 범죄는 앞에 나온 조항-부와 명예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에 있는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것이다." 즉 자기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포촉하는 일이다. 탐욕은 가족에 대해서도 매우 악한 것이다. 그것은 가족에게 동요와 불안을 가져오며(" 이를 탐하는 자는 그 자신의 집안을 혼란시킨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사사건건 하나님의 저주를 부른다는 점이다.
" 불의의 이를 탐하는 자에게 화 있을지어다" (난외는 이렇게 읽었다). 합법적인 이득은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가정에 평안이 될 수 있으나(" 선인은 그의 자손의 자손에게 유산을 물려 준다"), 사기와 불의로 얻은 것은 부정한 것이니 다시 가난해지며 한 가족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빈궁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이제 다음을 살펴보자.
[1] 이 탐욕스런, 불쌍한 자가 무엇을 목표하는가? "높은 데 깃들이며," 그의 가족을 이전보다 조금 더 큰 위엄으로 들어올리거나, 그가 예감한 위험이 닿는 곳 밖에 두어 "재앙을 피하며," 또 그에게 재앙을 행할 원수의 가장 악한 권세가 덮치지 못하게 하고 그의 평정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만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무사하게 하려고 목표하면서 그것을 그들의 탐욕과 야심의 핑계로 가장하는 일이 흔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더구나 그들은 "자기들의 재물" 이 "견고한 성이며 높은 성벽" 이어서 "자기들의 자랑거리" 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잠 18:11).
[2] 그가 그것으로 무엇을 획득할 것인가? "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안전이 아니라, "욕을 불렀다" (10절). 범죄로 세운 영지는 한 가족에게 추문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다른 사람들을 멸하되 스스로를 위한 자리를 내려고 해치며, 스스로를 배불리려고 남을 노략하는 자는 그들의 집에 욕을 부르며 파렴치한 표적을 자기들에게 붙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사태는 아니다. "너는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니, 그로 죄와 진노 아래 놓이게 하며 위험에 처하게 하였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자는 그들 자신의 영혼에게 더 큰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나 만일 그 죄인이 죄가 없다고 변명하며, 많은 재간과 간계로 그의 사기와 강포를 행하여 그로 인해 그가 아무 증거도 입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또 만일 그를 고발할 어떤 다른 증인이 없다면 "돌이 그 담에서 부르짖고," 천장 위의 "들보가 집에서 응답할 것이라" 는 사실을 알게 하라. 그들은 그것에 동의하고 증언하여, 그가 집을 지은 재물과 물자가 불의로 취해진 것이라는 점을 공언할 것이다. 돌과 대들보는 복수를 해달라고 하늘에 부르짖기를, 마치 "온 피조물이" 인간의 죄 "아래서 신음하며," "그 타락의 굴레" 로부터 구원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한다.
(3) 여기에 그가 피와 착취로 마을과 성읍을 건축했기 때문에 화가 예언된다(12절). 그는 "읍을 건설하여" 자신이 그 주인이 되고, "성을 건축하여" 그것을 자기 보좌로 삼는다. 바로 그렇게 느부갓네살이 행하였다(단 4:30).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은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것은 그가 학대한 그 자신의 백성의 피로 건설되며, 그가 불의로 침노한 이웃의 피로 건설되었다. 그것은 "불의로 건축되었으며," 그것을 안보하기 위해 제정된 불의한 법에 의해 세워졌다. 이렇게 행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는 이처럼 세워진 읍과 성은 결코 확실히 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락되고 그들의 건립자는 그 파멸 속에 장사될 것이다. 피와 불의로 세워진 바벨론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의 날은 곧 파멸로 향했다.
하나의 역사처럼 표현되어 있는 이 예언(사 21:9)이 진정 역사임이 입증되었고, 그때 이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벨론은 망했도다. 망했도다!"
그리고 그 성읍의 멸망은,
[1] 크게 수고하여, 견고케 하려고 막대한 경비를 드렸던 갈대아인의 수치였다(13절). 그 성읍을 방비하려고 그렇게 수고하던 "민족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 그 힘을 믿었던 외루(外壘)가 불붙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노력이 헛되리라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또는 세속적 부와 명예를 추구하여, 마치 "불 속에서 수고하는" 자들처럼, 스스로 곧 곤비케 하며, 큰 위험을 불사했던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은 "그들은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뎠다" 는 말이다(마 20:12). 그러나 세속적인 추구에 광분하는 자들은 "불타버릴 것으로 수고하며," 자기들의 정욕에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의 탐욕에 매여 있는 자보다 더 큰 고역을 치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얻으랴? 비록 그들이 수고하는 세계를 취택하나, 그것에 대하여 받는 보수는 보잘 것 없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은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헛되다는 말을 듣고, 그것에 실망하며, 그 곳에 실망을 발견할 때, 그것이 허영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 임을 인정할 것이다.
[2] 그것은 공정한 정의와 불가항력적 권능이신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갈대아 군주국의 파멸에 의해(이는 온 세계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14절). "여호와는 그가 수행하시는 이 심판에 의해서 알려지며, 특히 그가 기꺼이 "교만한 자를 찾아 낮출" 때에 그러하다. 이것은 그런 일을 통해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 으로 입증하시기 때문이다(욥 40:11, 21). 하나님께서 땅의 영광의 오점과 쇠퇴를 통해 어떤 선을 이루시는가를 보라.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자신을 위엄있게 하시고, "바다같이" 그를 아는 자식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신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이며(고후 4:6), 그것은 바벨론의 놀라운 파멸에 의한 그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심판(말씀)에 의해 그의 존귀성을 아는 지식을 배우지 못하는 자는 그의 손에서 나오는 심판에 의해 그것을 알고 시인하게 될 것이다.
예언된 심판 (하박국 2:15-20)
앞에 나온 세가지 항목들은 여기에 나타나는 화의 근거인데, 서로가 매우 비슷하다. 고소된 범인들은 강탈과 불의로 소유지를 늘리는 압제자들과 착취자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언급되는 것은(17절) 8절에서 언급된 것과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가장 중요하게 강조된 범죄이다. 곧 "사람의 피 때문이니," 무죄한 피, 야만스럽고도 불의하게 흘려진 피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다. 그것은 "땅과 성읍에, 그 모든 거민에게 행한 강포(폭력) 때문이니,"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공의의 주창자요 악의 보복자로서 분명히 그리하시리라.
그러나 여기에 다른 성격의 두 항목이 더 나와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속한 모든 자들에게 "화" 를 가져오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만든 바벨론 군주들에게 그리한다.
Ⅰ. 술취함의 조장자가 고발되어 정죄받는다. 벨사살이 그 중 하나이다. 그의 생애 중에 이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즉 그가 그 귀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며" (단 5:1), 건배를 시작하고, 그들로 하여금 축배하도록 강요했던 바로 그날 밤이었다. 아마 이 사건이, 바사의 후대 군주들이 "술마심에 있어서는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각 사람으로 마음대로 하라" 는 것을(에 1:8 에서 보듯이) 그들의 나라의 법률로 제정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은 바벨론의 열왕에서 축배를 강요하고 백성들로 술취하게 하는 일의 불행한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누구든지,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웅장한 궁전(그런 궁전이 있었다)과 보잘 것 없는 술집에 이르기까지, 이 일에 범죄한 모두에게 화가 확고하게, 그리고 매우 공포스럽게 선포되고 있다.
1. 그 본문의 조항이 고발하는 죄인은 누구인가? 그는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는" 자이다(15절). 빈핍하고 목말라 가난한 이웃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 비록 제자의 이름으로 제자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주는 것, 또한 피곤한 여행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심지어는 죽이려하는 자에게 독주를 주는 것,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포도주를 주는 것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선의 일부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보상될 것이다. "내가 목말랐을 때, 네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도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마실 것이 있는 이웃에게 그를 취하게 하려고 정상이 넘치게 주어 스스로를 노출시켜 어리석은 말을 하게 하고, 자신을 모욕에 던지고, 비밀을 폭로케 하거나, 나쁜 계약을 맺도록 합의시키는 것-이것은 가증한 사악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범하고, 그것을 실행하며, 그것을 자랑하고 기쁘게 여기는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반역자이며, 지옥의 마귀와 그의 저주받을 권세를 위한 대리인이며, 이 땅 위의 인간에게는 원수요, 그 원수들에게 명예와 복을 주는 자가 된다. 이들은 스스로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했던" 느밧의 아들과 같다. 남을 꾀어 술취하게 하고,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것의 매력으로 "포도주가 붉을 때에 바라보고 그 색채를 잔에 담아" 그로 유혹받게 하거나, 모임의 법식에 의하여(참으로 그런 모임의 규례가 있었다) 많은 잔을 채워 마시도록 강요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 양자를 죽이는 것이요,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자는 크나큰 보응을 받게 된다.
2. 그에게 내려진 선고는 무엇인가? 그에게 화가 있으며(15절), 그 죄에 대해 징벌이 있다(16절).
(1) 그가 술잔을 이웃의 손에 올려놓는가? 그러나 광포의 잔, 떨림의 잔, "여호와의 오른 손의 잔" 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를 치려고 무장할 것이다. 열방을 돌아 "황폐와 경이와 책망" 을 주었고, 그들을 걸려서 "넘어지게" 하여,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던" 그 잔이 결국에는, 예언된 대로, 바벨론 왕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렘 25:15, 16, 18, 26, 27). 이와 같이 음행의 잔으로 열국을 술취하게 했던 신약 성서의 바벨론은 "그녀가 받을 바, 마셔야 할 피의 잔을 받으리라" (계 8:3, 6).
(2) 그는 그의 이웃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가? 그러나 그 자신이 멸시를 당할 것이다.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이제 네가 처했던 영광보다 더 심한 치욕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네게 가득했던 영광이 단지 네 수치를 더 중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더 굴욕적이도록 하는데 종사할 것이다. 너는 또한 떨림의 잔을 마실 것이며 너의 공포와 비겁에 의해 스스로를 드러내리니, 이는 네 그 하체를 드러내는 것 같으리라. 그리고 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네게 굴욕을 줄 것이니, 네가 가장 자랑해 왔던 네 영광을 더러운 치욕이 가리울 것이니, 네 위엄, 부, 지배권에 침을 뱉으리라. 네가 술취하게 했던 자들이 그 위에 토하리라. 이는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이 네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17절). 너는 레바논의 맹수 이상으로 강포에 사냥되고 잡힐 것이며, 그들처럼 노략되며, 너의 쓸어짐이 사냥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네가 두렵게 한 짐승들 중의 하나 같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너를 정복하고 승전가를 외친다."
또는 "하나님이 지금 너를 심판하는 것은, 네가 레바논, 곧 이스라엘 땅(신 3:25)과 성전(슥 11:1)에게 행한 강포 때문이니라. 이것이 지금 너를 덮고 있는 죄이니라."
Ⅱ. 다음으로는 우상 숭배의 조장자들이 고발되고 정죄된다. 이것은 바벨론이 악명높게 범죄했던 죄목이기도 하다. 바벨론은 "창기의 어미" 였다. 벨사살은, 반역적으로, "그의 우상을 찬양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화가 선포되고 있다. 또 그들 중에서 그와 비슷하게 행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 특히 신약 성서의 바벨론에게 화가 있다. 이제 여기서 살필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우상 숭배를 장려하기 위해 무엇을 행했는가? 그들은 "우상에 미쳤다" 고 했다. 갈대아인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렘 50:38). 왜냐하면,
(1) 그들은 여러 가지 우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 이다. 또 이런 것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여 선택할 만한 것들이었다.
(2) 그들은 우상들을 만드는 데 능숙하고 거기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 우상을 만든 자" 는 그의 기능을 놀랍도록 잘 수행했으며, "그의 형태를 만드는 자" (난외에 의하면)는 가장 의미깊은 방도로 그 모형을 고안했다.
(3) 그들이 우상을 미화하고 장식하는 데 재산을 크게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과 은으로 그들(신상들)을 덮는다." 이것들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편애를 받는 것들이므로, 그들은 우상들을 잘 옷입혀서 더 효과적으로 이 세상 자녀들의 찬양을 얻으려고 했다.
(4) 그들이 우상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만든 자는 우상을 자기 신으로 의지하며," 거기에 신뢰를 두고, 신으로서의 명예를 돌린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그에게 기도를 드리고, 그로부터 교훈과 지도를 받으려고 기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영예를 그들의 우상 신에게 돌린다.
[1] 그들은 신상에게 기도한다. "그들은 나무더러" 우리를 구원하러 "깨어나라고 말하며,"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 일어나라" 고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라" 고 한다. 마치 교회가 그의 하나님께 "주여 깨소서, 일어나소서!" (시 44:23)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기도를 함으로써 그것들을 신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사 44:17). Deos qui rogat ille facit-즉 그 사람이 기도하는 대상이 그의 신이다.
[2] 그들은 우상들에게서 신탁을 바라고, 그들의 지시를 받으려 기대한다. "그들은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말한다." 비록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가르칠 것이라" 고 생각한다. 악한 마귀와 또 그에 못지 않은 악한 사제가 그 신상으로부터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그들은 지극한 존경심을 가지고, 신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그것에 따르려 한다. 이리하여 우상 숭배는 종교와 헌신의 허울 좋은 겉치레 아래 이식되고 증식된다.
2. 이 극단적인 우행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그의 백성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을 예언했을 때 그를 통해서 우상 숭배자의 수치스러운 어리석음과 바보같은 꼴을 대부분 보이셨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그와 유사한 기회에, 이 예언자를 통해 다시 그렇게 행하신다.
(1) 그들의 우상들은 만들어질 때부터 단순한 물건이었으니, 피조물 중 가장 천하고 열등한 계열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부여한 온갖 경비도 그 물질들을 한 단계 더 높게 할 수 없다. 그것들은 감각과 이성 양자에 있어서 전적으로 헛되고, 생명없고 말못하는 것이어서(우상은 "말하지 못하는 신상" 이며 "말하지 못하는 돌" 이니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다"), 가장 미세한 동물, 즉 단지 생기와 운동력만 지닌 동물도 그들보다는 더 우수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짐승의 영조차 가지지 못했다.
(2) 그 경배자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은 그것들의 능력 밖의 일이다(18절). "새긴 우상이 무엇에 유익하겠느냐?" 비록 그것이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지만, 만일 다른 어떤 형태로 주조된다면 인간 생활의 어떤 목적에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전혀 쓸 데가 없으며, 그 경배자에게 아무런 친절을 베풀 수가 없다. 아니 오히려,
(3) 그것은 결코 그들에게 유익을 줄 수 없으니, 그들을 속이고, 그들을 심한 망상에다 묶어 놓는다. 그들은 "그것이 교훈을 베풀 것이다" 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몸을 가졌으나 유한하고, 볼 수 있고, 의존적인 자로 체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상 영이시니, 무한하고 보이지 않으며 비의존적인 분이다. 그리고 우상은,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에 빠져, 하나님께 관해서는 아무렇게 생각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긍정해 주며,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켜 준다. "우리 손으로 만든 것에게 너는 우리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고안으로 만들어낸 사진기와 같은 터무니없는 피조물에게도 그처럼 말할 수 있으리라. 우상은 "헛된 도" 요, "거짓된 것이며 망령되이 만든 것" 이다(렘 10:8, 14).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의 정체, 그들의 목표, 거짓 스승들을 평신도의 교과서로 권장하는 자를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다. 거짓 교사들은 남들이 모르는 용어로 경전을 기록하여 아무도 모르게 해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연구하고 거기에 얽매인다.
3. 하나님의 백성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승전가를 외치며, 우상 숭배자들이 수치를 당할 때 무엇으로 자기들을 보호하는가를 보자(20절). "그러나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도다."
(1) "대적의 반석은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다" (신 32:31). 그들의 것은 말 못하는 우상이지만, 우리의 반석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 그들의 반석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늘에 있는 그의 성전, 곧 그의 영광의 거처에 있다. 우리는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그 길은 우리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그분 스스로가 세우신 길이다. 시편 115편 3절과 비교하라.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도다" (시 11:4 참고).
(2) 그들이 세워 수고하며 보존한, 수많은 신들은 우리의 하나님을 몰아내지 못한다. 그는 성전에서 잠잠히 그 거룩함 속에 영광을 드러내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성전을 황무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의 분노와 악의가 미치지 못하며, 그의 백성의 믿음과 기도가 이르는 범위 내에 하늘 성전을 가지고 계시다.
(3)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자기 앞에다 잠잠케 하실 것이며, 우상 숭배자를 쳐서 그들을 우상처럼 말못하게 하시며 그들로 스스로의 우행을 인정하게 하며, 수치로 가득하게 하시리라. 그는 압제자들의 격분을 잠잠케 하며, 자기 백성에 대한 그들의 폭력을 통어할 것이다.
(4) 조용한 찬양으로 그를 맞음이 백성의 의무이며(시 65:1),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 자신의 방법과 시간에 따라서 자기들을 구하시려고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는 것이 또한 의무이다. "잠잠하여, 그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라" (슥 2:13).
하박국 2장 주석
성 경: [합2:1]
ꃨ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 '내 파수하는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쉐마르티'는 파수하는 행위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파수하는 장소인 '파수대'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성루'가 암시하는 대로 파수꾼의 직무를 수행하던 성벽의 파수대를 가리킨다 실제로 하박국이 파수꾼이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하박국이 파수꾼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며 하나님과 교통하겠다는 태도를 가졌음은 분명하다(시 5:3; 미 7:7).
ꃨ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 하박국이 파수대에 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박국의 태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이다. 또한 '내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를 직역하면 '내 안에'라는 의미로 스가랴 선지자도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였다(슥 1:9,13,14; 2:2; 4:1,4,5; 5:4,10; 6:4). 이는 하박국 선지자가 파수대에 서 있는 외적인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잠잠히 내적인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보여준다.
성 경: [합2:2]
여기서부터는 본장 전체에 걸쳐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응답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조치하시고 나서, 악인과 의인의 차이점이라든가 침략자 갈대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갈대아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더라도 그들의 탐심과 잔인성, 허탄한 삶의 태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ꃨ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 '묵시'의 히브리어 '하존'은 이미 1:1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본서 전체를 개관한 1:1을 반영할 뿐 아니라, 하박국이 성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 결과 받게 된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랬던 것처럼(출 17:14) 특별히 판(板)에 기록하여 미래의 정한 때까지 보존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조치하신 이유는 많은 거짓 예언으로부터 참된 예언을 보호하고 전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판(tablets)은 돌이나 점토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IDB). 서판에 쓰여진 메시지는 통보자에 의해 전달되었고, 통보하는 방식이 그것을 가지고 '달리는'것이었다(삼상 4:12;삼하 18:19-27;에 3:13,15; 8:10,14;렘 51:31). 여기서는 특별히 하박국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렘 23:21).
성 경: [합2:3]
ꃨ 이 묵시는...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 '종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츠'는 어떤 목적, 행위 또는 사기의 끝을 의미한다(애 4:18; 겔 7:2,3; 21:25,29). 본절에서 '묵시'의 직접적인 내용은 바벨론 압제의 종식을 가리킨다(4-20절). 기록된 묵시는 현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시간의 최종적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성 경: [합2:4]
ꃨ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 '그의 마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영', '생명'(KJV,RSV)이라 번역할 수 있고, '욕망','욕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접미사 '그의'는 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펠라'는 '아팔'의 푸알형으로 본래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민 14:44). 이는 교만한 자의 심중이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런 심적 상태를 소유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이다.
ꃨ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믿음'의 히브리어 '에무나토'는 '공평', '견고', '확실', '영원'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한다. 본 구절에서 믿음의 속성은 '그의'라는 소유격앞에 위치한 '의로운'에 의해 잘 설명된다. 믿음은 의를 실천하려는 그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하는 바, '믿음'은 의의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되곤 한다(삼상 26:23; 시 33:4,5; 40:10; 96:13; 119:75,138; 143:1). 바울은 이를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청의의 교리를 가르친다.
성 경: [합2:5]
본절은 만족할 줄 모르는 정치적인 정복욕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벨론인인이 자만과 탐욕, 노골적인 침략으로 말미암아 도덕적인 파탄을 입게 될 것을 보여준다.
ꃨ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 '술'은 바벨론인처럼 기만적이고 미덥지 못한 특성을 지닌다. 술이 삶을 흥겹게 하기도 하지만, 그 중독성으로 인해 가난과 혼돈과 파괴를 초래한다(잠 20:1;23:20,21,29-35; 사 28:7). 특별히 본 구절에서는 사회적인 불의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그것은 곧 궤휼과 교만과 한없는 욕심 등이다.
ꃨ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 '그 욕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프쇼'는 '욕망','목구멍','욕구'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KJV,NEB,TWOT).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들은 욕망의 정도를 좀더 확실하고 자세하게 알려준다. 다시 말하면 1:5-17에서 이미 증명되었듯이 그 욕망이 만족할 줄 모르고 지속된다는 것이다(잠 27:20;30:15,16;사 5:14). 한편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은 먹이를 삼키는 곳으로 일관되게 언급되며(민 16:30-34;잠 1:12; 27:20; 사 5:14) '지하 세계', '지옥'(KJV,RSV)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만큼 갈대아 사람들은 자신의 과다한 욕심과 파괴적이며 모든 것을 삼켜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가지고 왕성하게 이웃 나라들을 독식하였다.
성 경: [합2:6]
본절에서부터 갈대아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의 집행이 단호하고도 최후 통첩적인 어조로 기술된다. 이는 앞에서(1:5-2:5) 심판의 집행을 암시적으로만 보여준 것과는 대조된다.
ꃨ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 '속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솰'과 '평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멜리차'와 '조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도트'는 잠 1:6에서도 함께 나오는데, 주로 교훈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비웃는 듯한 어투로 사용되어 앞으로 전개될 내용(6-20절)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ꃨ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무겁게 짐진 자여-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일반적으로 심판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예언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사 5:8,11,18,20-22; 렘 22:13; 23:1; 암 5:18; 6:1). 여기서도 앞으로 계속될 선포가 저주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저주를 듣는 자들을 향해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라고 표현하여 그들이 당하게 될 화는 그들이 자행했던 강탈과 노략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한다.
성 경: [합2:7,8]
ꃨ 너는 물 자들이...너를 노략하리니...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 앞에서 언급된 사실을 반복하는 단락으로 심판의 시행이 자기 죄에 해당되는 보응임을 보여준다.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과 명확한 대조를 보인다. 즉 악인은 자기의 행위대로 징계를 받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여기서 선포된 재앙이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들에 의해 집행되었다(사 13:17-22; 21:2-10; 렘 25:25; 49:34-39; 51:11,12; 겔 32:24,25; 단 5:28).
성 경: [합2:9]
본절은 히브리어 원문과 반대로 앞 구절과 뒷 구절의 순서가 바뀌어 번역되었다.
ꃨ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 이는 에돔과 마찬가지로(옵 1:3)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높은 곳에 위치해 있거나 성을 높이 쌓은 상태를 가리킨다.
ꃨ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본 구절이 심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더라도 반드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임을 명백히 한다. 실제로 바벨론은 난공 불락의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상황과 거짓된 교만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해 갔다(단 5:1-30).
성 경: [합2:10,11]
ꃨ 네 집에 욕을 부르며...들보가 응답하리라 - 앞 구절의 내용을 보다 강화하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욕을 부르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아체타'는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그들이 생명을 파괴한 것에 대한 보응으로 생명을 상실하고, 자기 집을 안전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도리어 그 만행의 보응으로 분열되고 조화가 깨어지게 될 것을 보여준다.
성 경: [합2:12]
ꃨ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 본장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는 '화 있을진저'의 히브리어 '호이'도 앞의 경우(9절)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본절의 내용은 바벨론의 수도 건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전에 예루살렘을 향해 적용되기도 하였다(미 3:10).이스라엘의 여호야김은 재위 기간 동안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국가 기금으로 사치스런 왕궁을 지은 적이 있다(렘 22:13,14). 바벨론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세워진 성읍이었다. 이처럼 국민의 복지와 안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만 관심을 쏟는 통치자는 결국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성 경: [합2:13]
ꃨ 민족들이...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 본 구절은 앞서 언급된 바벨론의 성읍건축을 염두에 둔 말로 민족들과 열국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헛된 이상을 묘사한다.
ꃨ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 히브리어 원문에는 본 구절이 문장 첫머리에 나온다. 이로써 바벨론이 당하게 될 심판이 필연적이며 노동 착취로 건립된 문명은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을 강조한다. 이것으로 봐서 인류 역사의 주된 원동력은 역사적인 사건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계시적 목적에 기초한다.
성 경: [합2:14]
본절은 앞의 내용(12,13절)의 강조점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결론적으로 언급된다. 즉, 세상 끝날에 모든 세상 열방이 여호와의 위력과 위엄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되리라는 것을 언급하여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소망을 나타낸다(민 23:21).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여호와의 집에 가득한 것처럼 온 땅에 가득해야 한다는 영원한 목적에 기초한다(출 40:34,35; 민 14:21; 왕상 8:11; 시 57:5,11; 72:19).
성 경: [합2:15]
ꃨ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 네 번째로 사용된 '화 있을진저'(호이)도 앞에서 사용된 것(9,12절)과 마찬가지로 문장 첫머리에 등장한다. 이로서 여호와의 심판 예고는 그 절정에 이른다. 본 구절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음란한 행위를 조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실제로 이방 민족을 침략했을 때, 그곳의 여인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우고 추행하였다(나 3:5).
성 경: [합2:16,17]
ꃨ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네게로 돌아오리라 - 그들이 취한 수치스럽고 음란한 행위은 필연적으로 파괴적인 강포로 이어진다. 여기서 '레바논'은 여호와께로부터 할당받은 땅(신 1:7,8; 수 1:4), 혹은 이스라엘로 상징되기도 했으며, 특별히 바벨론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로 상징되었다(왕상 9:19; 렘 22:6,23). 본절은 다름 아닌 바벨론의 이스라엘 침공을 가리킨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이기심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 데다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닥칠 심판은 13,14절에서 언급된 대로 다른 사람에게 가했던 방식으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예언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 갈대아 사람들의 성읍 바벨론은 약 25.8m 두께의 성곽으로 그 둘레가 17.7Km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다. 이처럼 난공 불락의 견고한 성읍도 B.C.539년 바사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단 11:2).
성 경: [합2:18,19]
ꃨ 새긴 우상은...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 본 단락은 6-17절에 이어지는 결론으로 앞에서와는 달리 심판의 선언이 없고 주로 우상들이 가진 거짓되고 헛된 특성을 지적한다. 우상은 무생물인 돌, 나무, 금속 등으로 만든것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생명력도 없다(시 135:17). 더욱이 그것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도 없고 교훈을 베풀 수도 없다. 이는 그것들이 인격체도 아니고, 생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우상들을 부르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어리석은 짓이다(왕상 18:2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인간들의 허탄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롬 2:21-25).
성 경: [합2:20]
ꃨ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 우상의 무익성에 대해 피력하고 나서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언급한다. 이는 장차 이루어질 현상을 염두에두는 표현이기도 하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의인은 믿음을 고수하는 의인과 악인의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이는 하나의 전쟁으로 악의 세력과 의인의 믿음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계속되겠으나 하나님은 크신 권능으로 악인의 노력을 방해하고 의인에게는 악에 대항하고 그 도전을 견딜 수 있도록 하신다(Gowan).그러므로 본절의 여호와의 임재는 모든 강탈자들에게는 심판의 선언과 같은것이다(C.E.Armerding)
cafe.daum.net/correcttheology
'구약의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박국의 질문/ 대답/ 기도 (0) | 2021.01.21 |
---|---|
하박국 3장 (0) | 2021.01.21 |
하박국(Habakkuk) 서론 및 1장 (0) | 2021.01.21 |
이사야/ 에스겔/창세기 (0) | 2021.01.21 |
신바빌로니아 - 하박국서의 이해를 위해 (0) | 2021.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