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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쉴만한 물가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by 은총가득 2021. 1. 7.

출생사망국적대표작

1452년 04월 15일
1519년 05월 02일
이탈리아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모자〉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적인 미술가, 과학자, 사상가이자 과학적 탐구정신을 바탕으로 회화 양식에 변혁을 일으킨 위대한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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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조각, 건축, 토목, 수학, 과학, 음악 등 전 분야에 걸쳐 천재성을 발휘하며 ‘르네상스적 천재’라는 하나의 개념이 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 미술이 그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평해지는 이 위대한 예술가는 과학적 탐구정신을 토대로 한 정밀한 관찰과 체계적인 연구로 회화 양식에 변혁을 일으켰음은 물론, 공학 분야의 기기들, 건축 설계,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 원근법, 기체역학 등 각종 발명품과 기법, 이론을 창안했다.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공증인 세르 피에로와 농민 여성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집에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는데, 특히 수학, 음악, 그림에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출생의 한계로 아버지와 같은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1462년경(혹은 1460년) 피렌체로 가서 아버지의 친구인 안드레아 베로키오에게 도제 수업을 받았다.

 

〈자화상〉

토리노 왕립도서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베로키오의 공방에서는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등 쟁쟁한 인물들이 도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다 빈치는 1472년경 화가 길드에 등록된 독립장인 자격을 얻었으나 1476년경까지 베로키오의 그림 속 인물이나 풍경의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맡는 한편, 공방에서 사용하는 기계 장비 등을 설계했다. 〈수태고지〉,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카네이션을 든 성모〉 등이 이 시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수태고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482년, 다 빈치는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초청으로 밀라노로 향했다. 그 바람에 산 도나토 아 스코페토 수도원에 그리던 제단화 〈동방박사의 경배〉는 미완으로 남았다.

다 빈치는 18년간 밀라노에 머물면서 화가, 조각가, 건축가, 군사 기술자, 도시 계획, 공식 행사 기획, 축제 무대 설계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그가 도착했던 당시 밀라노는 베네치아와 전쟁 중이었고, 그는 스포르차 궁의 군사 기술 담당이자 건축가로 임명되어 석궁, 방화화살, 대포 등 다양한 무기를 설계하는 한편, 요새 건축 및 도시 계획 설계를 하는 등 기술자로서 최대의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궁정 화가로서 루도비코의 아버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청동 기마상을 제작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1483년에는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성당 신자회의 의뢰로 〈암굴의 성모〉를 그렸다.

1485년경 밀라노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그는 스포르차 궁 사람들과 함께 몇 달간 파비아로 피신했는데, 이때 파치오 카르다노를 알게 되어 수학, 기하학, 생리학 등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또한 시계 장치, 기중기, 활차(滑車) 같은 기계를 고안하는 등 토목공학에 있어서도 진일보한 성취를 이루었다.

1480년대 말부터 다 빈치는 인체 해부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는 베로키오의 도제 시절부터 신체와 두개골 구조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신체 구조를 파악하여 인간의 인식과 행동, 상상, 기억 등의 정신 활동, 궁극적으로 영혼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그의 기록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회화론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의 비례를 정밀하게 따지고, 꼼꼼히 관찰하여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예술-과학’ 이론을 정립했으며, 인체 비례, 눈동자, 태아 등에 관련된 수많은 드로잉과 글을 남겼다.

 

 

〈비트루비우스 인체 비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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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 빈치는 일평생 비행 기구를 만드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는데, 소년 시절부터 갖가지 날개를 만들어 달고 비행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는 궁의 축제나 연극 도구로 날개 달린 기계 장치들을 설계했으며, 이를 군사용으로 활용할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1494년에는 공기역학과 기계 장치에 대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정교한 글라이더 모형을 제작하여 시험 비행을 시도했다.

1495년경부터 다 빈치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 빈치의 최고작이자 서양 미술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구성, 빛, 원근법에 대한 그의 통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통적인 프레스코화 방식이 아닌 마른 회반죽 위에 템페라로 그리는 실험적인 방식을 택했고, 모든 인물의 배치와 동작, 크기는 고도의 계산 아래 이루어져 있다. 예수와 열두 제자가 식사를 하는 동안 제자들이 예수에게 누가 배신할 것인지 묻는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다 빈치는 상징물을 사용하여 각 인물을 드러내는 대신 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게 했다.

 

〈최후의 만찬〉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499년, 프랑스군의 밀라노 점령으로 루도비코 일 모로가 몰락하자 다 빈치는 밀라노를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다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0년경부터 그는 산투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의 주문으로 〈성 안나와 성모자〉에 착수했다. 새끼 양을 안고 있는 아기 예수와 몸을 굽혀 예수를 안으려는 성모 마리아, 그들 뒤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를 묘사한 이 그림은 피라미드형 구도와 스푸마토 기법, 공기 원근법과 부드러운 빛의 사용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한편, 극도의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 그림이 걸리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무리지어 이 그림을 보러 왔다. 이런 모습은 이틀 동안 이어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경의를 표했다.”라고 기록했다.

 

〈성 안나와 성모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503년, 다 빈치는 피렌체 공화정부로부터 〈앙기아리 전투〉를 의뢰받았는데, 이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카시나의 전투〉와 한 쌍을 이루어 베키오 궁전을 장식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러 이유로 두 사람이 피렌체를 떠나면서 르네상스 최고 천재들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습작만이 전한다(다만 〈앙기아리 전투〉는 2012년 베키오 궁의 벽화 뒤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 다 빈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될 〈모나리자〉에 착수했다.

1506년, 다 빈치는 샤를 당부아즈의 초청으로 밀라노에 갔다. 이 시기에 〈암굴의 성모〉 두 번째 버전을 제작하고,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의 기마상〉 구상 소묘 등을 그렸으며, 해부학과 식물학, 공학, 물리학 등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했다. 인체 각 부위에 대한 정교한 해부 연구에 착수한 다 빈치는 심장 혈류의 이동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유리관 끝에 인공심장 판막을 씌우고 실험했으며, 사체를 부검하여 인체 각 부위의 근육 계통 및 심장과 폐 해부도 등을 정밀하게 그림으로 남겼다. 그런 한편 미완성이었던 〈성 안나와 성모자〉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

다 빈치는 1513년에 잠시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줄리아노 메디치의 후원을 받아 로마로 떠났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는 걸출한 천재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로마에서 다 빈치는 예술가보다는 과학자로 대우받았고, 이곳에서 과학과 기술 연구에 전념했다.

1516년, 줄리아노 메디치가 세상을 뜨자 다 빈치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가 앙부아즈의 클루 성에 머물렀다. 이때 그의 짐 속에는 〈모나리자〉, 〈성 안나와 성모자〉, 〈세례 요한〉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회화, 건축, 조각, 기계공학 등 전 분야에 있어 위대한 장인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라고 일컬으며 특히 아꼈다. 다 빈치는 이곳에서 무대용 기계 장치 제작, 운하 설계, 궁궐 정원 조경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또한 미완성이었던 〈세례 요한〉을 완성했다.

 

〈모나리자〉

파리 루브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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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다 빈치는 뇌졸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수족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해 5월 2일 클루 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생사망국적대표작

1452년
1519년
이탈리아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Supper)〉, 〈성 모자와 성 안나(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실타래를 든 성모(Madonna with the Yarn-Winder)〉 등

회화, 건축, 기술, 해부학, 천문학, 과학 등 다방면에 뛰어난 전인적 인간으로 여겨진다. 1495년부터 1497년까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당대의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달리 긴장감에 찬식사 장면을 그리고 있으며 예수의 각 제자들을 하나하나 개성적으로 묘사하여 찬사를 받았다. 그의 《회화론》은 제자 멜치가 엮었으며, 회화와 소묘뿐만 아니라 그가 깨닫고 체험한 모든 것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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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전인적 인간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그 자체가 르네상스 시대를 대변하며,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창조적인 인간으로 여겨지는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리고 각각의 분야에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역사가 헬렌 가드너는 그에 대해 "그의 정신과 개성은 우리들에게 진정한 초월적 천재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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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는 1452년 엠폴리 근교의 빈치 마을에서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부터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도제가 되어 회화와 조각을 배웠고, 이때 이웃해 있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공방에서 처음으로 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뛰어난 회화적 기량을 자랑했는데, 미술평론가 조르조 바사리는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가 다 빈치와 보티첼리와 함께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다 빈치가 그린 천사의 얼굴을 보고 베로키오가 붓을 던졌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제자만큼 성스러운 얼굴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 빈치는 초기에 밀라노의 루도비코 일 모로 대공의 후원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프랑수아 1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1482년 밀라노로 간 그는 그곳에서 17년간 루도비코 대공의 전속 화가이자 조각가, 토목 기사 등으로 일하면서 수력과 기계 관련 공학자로도 일했다. 이 시기 그는 〈모나리자〉와 함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Supper)〉을 그렸다.

특히 이 시기에는 수많은 건축 설계 스케치와 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스포르차 가문을 세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청동 기마상 설계와 헬리콥터, 계산기, 탱크 등 각종 기계공학적 장치들에 관한 스케치와 메모를 했는데 이 노트가 20세기 중엽에 마드리드에서 발견되었다.

1490년부터 1495년까지 연구 결과를 담은 노트에는 회화, 건축, 기계학, 인체 해부에 관한 내용이 주로 담겨 있으며 지구물리학, 식물학, 수리학, 기상학에 관한 연구들도 기록되어 있어 그의 방대한 관심을 알려준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을 통해 터득한 실제 사실들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그에게 있어 인체 소묘를 하기 위해 인체를 해부하여 보다 정확히 연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태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는 인체의 뼈와 각 부분, 근육, 심장, 혈관계, 생식기관 등을 모두 연구하여 스케치로 남겼다. 과학자로서의 이런 태도뿐만 아니라 화가로서 인간의 연령과 감정, 특히 분노의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해 수많은 얼굴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육체에 대한 관심은 인간만이 아니었다. 소, 새, 원숭이, 곰, 개구리 등 수많은 동물을 해부해 각 신체의 해부학 구조도를 남겼고, 특히 말의 근육과 움직임에 대한 스케치를 많이 남겼다.

다 빈치의 노트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거울에 비치는 상(像)처럼 글씨를 뒤집어 쓴 것이다. 평소 제3자에게 건네줄 편지나 메모, 논평들이 정상적인 필법으로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자신의 연구 결과를 외부에 알리지 않기 위해 암호 형식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그의 습관으로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글로 쓴 독백'이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트의 또 한 가지 특색은 도해와 본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 빈치는 표현이 풍부하고 묘사를 잘했지만 글보다 도해를 통한 교수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실물교수(dimo-strazione)'라 부른 실물묘사법에서 현대 과학적 도해의 선구자였다.

 

 

다 빈치가 그린 인체비례도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궁 속의 태아를 그린 다 빈치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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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 프랑스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왔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권좌에서 내려왔고, 1500년이 되기 전 다 빈치는 친구인 루카스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나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1500년에 그는 세르비테 수도회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산타아눈치아타 수도원에서 〈성 모자와 성 안나(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의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고, 1501년에는 〈실타래를 든 성모(Madonna with the Yarn-Winder)〉를 그렸다. 이 작품들은 미완성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모작만이 남아 있다.

 

피렌체의 메디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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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여름 그는 피렌체를 떠나 체사레 보르자에게 간다. 당시 쉰 살 가까이 된 다 빈치는 스물여섯 살 체사레의 카리스마와 개성에 끌렸다고 한다.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 건축, 기술 고문으로 일하게 된 그는 성채를 설계하고, 도시계획도와 지형도를 그렸다. 이는 현대 지도 작성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당시 피렌체의 정치 고문으로 잠시 그곳에 체류하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와도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나 1503년 체사레는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앓아눕게 되면서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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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년 봄에 다 빈치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과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인체를 해부하여 신체기관의 구조와 기능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당시 다 빈치는 비행 현상에 몰두해 있었다. 새의 비행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1505년 헬리콥터에서 행글라이더 등 몇 가지 비행기구를 고안했다. 대부분이 비현실적이었고 헬리콥터는 비행에 실패했지만, 행글라이더는 비행에 성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물의 물리적인 성질과 기류법칙, 수류법칙 등을 연구하면서 물 위를 걷는 기구 등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 후 밀라노에 가서 샤를 당부아즈의 후원을 받으며 6년을 지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모두 미완성으로 남았고, 대신 열정적으로 과학 연구를 했다. 그리고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테레와 함께 해부학에 있어서 진일보한 성과를 이룩했다. 또한 그 밖에도 수학, 광학, 기계학, 지리학, 식물학 연구를 진행했다.

1513년 다 빈치는 로마로 갔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라는 걸출한 젊은 두 천재가 활약하고 있었다. 다 빈치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노년의 거장을 환대했지만 큰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낙담한 그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충실한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가 있었다. 다 빈치는 프랑수아 1세의 궁정에서 '왕의 수석 화가 겸 건축 고문'의 대우를 받으면서 죽는 날까지 프랑스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년을 자신의 과학 연구들을 분류하고 편집하면서 보내다 1519년 5월 2일 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과 유산은 프란체스코 멜치가 물려받았다.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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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린 회화의 수는 많지 않고 또한 완성된 작품보다는 미완성 작품, 소묘 스케치가 많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당대 어떤 화가보다도 독특한 그림을 남겼다.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은 당시 배반자 유다를 중심적으로 묘사하던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하는 중의 그 긴장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모나리자〉에서는 안개와 같이 미묘하게 색을 변화시켜 선 사이의 경계를 없앤 스푸마토 기법을 완성하여 그림에 신비로움을 부여하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이었던 미켈란젤로도 직접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다 빈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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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는 그의 시대에도 명망이 있는 화가였으며, 그에 대한 관심이 식은 적은 단 한 시대도 없다. 그만큼 많이 연구되고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도 드물지만, 이와 동시에 그만큼 신화와 전설, 추측이 난무하는 사람도 드물다. 조르조 바사리는 그에 대해 역사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나지만 천상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지상의 모든 것을 탐구한 천재 중의 천재라고 묘사했다.

과학과 예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던 르네상스 시대에 다 빈치는 회화 작품들만큼이나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도 수많은 연구를 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훗날 그의 제자 멜치가 말했듯이 그는 "어느 한 분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전인적 인간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출처: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