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양장본 HardCover)
책소개
20여 년간 《타임》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CNN의 CEO를 역임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이 15세기를 살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장 혁신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창의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7200페이지 분량의 노트를 연구해 그의 작품과 삶을 아우르는 새로운 전기를 펴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각 작품에 관한 다양한 뒷이야기와 함께 그의 진품을 가려내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까지 모두 담아냈다. 타고난 천재이기보다는 끊임없는 호기심을 상상력과 노력으로 해결하며 스스로 천재가 된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작성한 방대한 양의 수첩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데, 이런 이유로 저자는 그의 노트에 집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가장 인간적이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평가한 저자는 노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왼손잡이였고, 쉽게 산만해졌으며, 때때로 이단적이었지만 다름을 포용하는 문화와 끈질긴 호기심, 실험 정신으로 혁신을 이뤄낸 그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는 문화, 어느 분야에서든 배울 것이 있다는 자세, 그리고 이질적인 것을 융합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용인하는 분위기 속에서 천재가 만들어지고 우리의 혁신은 매일 새롭게 이어질 것이란 깨달음을 전한다.
저자
월터 아이작슨 작가, 기업인
1952년 5월 20일 미국 출생. 아스펜 연구소 소장. CNN의 CEO와 '타임'지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키신저 전기 Kissinger: A Biography>, <현자: 여섯 명의 친구들과 그들이 만든 세계 The Wise Men: Six Friends and the World They Made> 등이 있다.
목차
감사의 글
주요 등장인물
연대표
머리말
_ 저는 그림도 그릴 수 있습니다.
1 유년기
2 도제
3 홀로서기
4 밀라도
5 레오나르도의 노트
6 궁정의 예능인
7 개인적인 삶
8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9 기마상
10 과학자
11 새와 비행
12 기계학
13 수학
14 인간의 본성
15 「암굴의 성모」
16 밀라노 초상화
17 예술의 과학
18 「최후의 만찬」
19 개인적인 역경
20 다시 피렌체로
21 성 안나
22 사라지거나 발견된 그림들
23 체사레 보르자
24 수학공력자
25 미켈란젤로와 사라진 전투 그림들
26 밀라노로 돌아가다
27 해부학, 두 번째 라운드
28 세계와 그곳의 물
29 로마
30 길을 가리키다
31 「모나리자」
32 프랑스
33 결론
꼬리말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
자주 인용된 문헌의 약어
주석
사진 출처
찾아보기
책 속으로
◆ 그는 유쾌하면서도 강박적인 열정을 품고 해부학, 화석, 조류, 심장, 비행 기기, 광학, 식물학, 지질학, 수류水流, 무기 등 여러 획기적인 분야를 탐구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인의 전형이 되었고, 그의 말마따나 “자연의 무한한 조화들”이 서로 조화롭게 엮여서 경이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과학과 예술을 결합하는 그의 능력은, 정사각형과 원 안에 팔다리를 활짝 뻗은 완벽한 비율의 남자를 그린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Vitruvian Man」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그는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천재가 되었다.
- 머리말 pp.17~18
◆ 우리는 레오나르도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예술, 과학, 기술, 상상력을 결합하는 그의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창의성을 위한 공식으로 알려져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느긋함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왼손잡이였고 쉽게 산만해졌으며 때때로 이단적이었다. 15세기 피렌체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건 이런 사람들을 기꺼이 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레오나르도의 끈질긴 호기심과 실험 정신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에게 기존 지식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켜야 한다. 또한,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법과, 어느 시대에나 있는 창조적인 사회 부적응자와 반항아처럼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머리말 p.27
◆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해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의 스승에서 동업자가 되었다. 그는 레오나르도에게 입체화 기법을 비롯한 회화에서의 조각적 요소를 가르쳤고, 움직일 때 몸이 어떤 식으로 뒤틀리는지 익히도록 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유화물감을 얇게 덧칠해 완성한 반투명하고도 탁월한 묘사, 남다른 관찰력과 상상력을 통해 예술을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저 멀리 지평선의 옅은 안개부터 천사의 턱 아래 그림자, 예수의 발에 닿는 물에 이르기까지 레오나르도는 화가가 관찰 대상을 변형하고 전달하는 방식을 새롭게 정의했다.
- 〈2장 도제〉 p.88
◆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다른 이유,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그는 구상을 현실화하는 것보다는 구상 자체를 좋아했다. 이 작품을 맡기며 엄격한 계약서를 작성했던 그의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은 진작 알고 있었겠지만, 스물아홉 살의 레오나르도는 현재에 집중하기보단 미래에 의해 쉽게 산만해졌다. 그는 근면함을 훈련받지 못한 천재였다.
- 〈3장 홀로서기〉 p.120
◆ 그는 소우주인 인체와 대우주인 지구를 같은 선상에 놓는 고전적 비유를 사용했다. 도시는 순환하는 체액과 배출해야 할 노폐물을 가진, 숨을 쉬는 유기체였다. 그는 최근 인체의 혈액과 체액 순환을 연구하기 시작한 터였다. 비유적 사고를 통해 그는 유통부터 폐기물 처리에 이르기까지 도...시에 필요한 최고의 순환 체계가 무엇인지 고심했다. (…) 레오나르도의 다른 공상적 설계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대를 너무 앞선 이 구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의 도시 비전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이 경우 레오나르도의 제안은 기발할 뿐 아니라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계획 중 일부만이라도 실행되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속성을 완전히 바꾸고 역병 발생을 억제하고 역사를 바꿨을지도 모른다.
- 〈4장 밀라노〉 pp.146~147
◆ 현존하는 7200페이지 이상의 노트는 레오나르도가 기록한 전체 분량의 4분의 1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5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기록은 스티브 잡스와 내가 회수할 수 있었던 1990년대 잡스의 이메일과 전자 문서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창조력 응용의 기록을 낱낱이 제공하는, 그야말로 놀라운 뜻밖의 횡재라 할 수 있다. (…) 좋은 종이는 비쌌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대부분 페이지의 가장자리까지 꽉 채워 사용하려 했다. 각 페이지마다 최대한 많은 내용을 담았고 언뜻 무관해 보이는 다양한 분야의 내용을 뒤죽박죽 섞어놓았다. 그는 몇 달 전, 혹은 몇 년 전 작성한 페이지로 되돌아가 자신이 진화하고 성숙한 만큼 그 내용을 다듬기도 했다.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나중에 다시 채색하고 이후 그리게 될 작품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었던 것처럼.
- 〈5장 레오나르도의 노트〉 pp.150~151
◆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재능뿐 아니라 멋진 외모, 근육질 몸매, 다정한 성격으로 유명해졌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에 대해 “그는 눈에 띄는 아름다움과 무한한 우아함의 소유자였으며 빼어난 미남이었고 그의 남다른 존재감은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위안을 선사했다”라고 표현했다. (…)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과 나누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너무 너그러워서 부자든 빈자든 간에 모든 친구를 먹이고 재웠다”라고 바사리는 전한다. 그는 부나 물질적 소유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노트에 “물질적 풍요만 추구할 뿐 인간에게 자양분이 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재산인 지식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불어나는 식솔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의 돈을 벌려고 애쓰기보다는 지식 추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일을 거의 안 했지만 늘 하인들과 말들을 거느렸다”라고 바사리는 전한다.
- 〈7장 개인적인 삶〉 pp.178~179
◆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의 눈빛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강렬하다. 어쩌면 이것은 실제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이리라. 이 그림에 관한 책을 저술한 토비 레스터Toby Les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레오나르도의 이상화된 자화상이다. 그는 자신의 정수만 남긴 채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치수를 측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인간의 희망을 구현했다. 그것은 세상 만물의 거대한 섭리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낼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이 그림을 사변의 행위라고, 레오나르도가 ?예술가이자 자연철학자이자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본질에 관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미간을 찌푸린 채 스스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그린 형이상학적 자화상이라고 생각해보자.”
레오나르도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은 예술과 과학을 결합하여 유한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지, 거대한 우주 섭리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와 같은 영원한 질문을 고찰하는 한 순간을 구현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 개개인이 지닌 존엄, 가치, 이성을 높이 평가하는 인문주의적 이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는 정사각형과 원 속에서 지구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의 교차점에 나체로 서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정수를, 그리고 우리 자신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다.
- 〈8장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pp.213~214
◆ 레오나르도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그렸을 때, 그의 머릿속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다양한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그것은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 작도,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지구라는 대우주의 유사성, 교회 건축에서 정사각형과 원의 기하학, 기하학적 형태의 변화, ‘황금분할’ 혹은 ‘신성 비례’라 불리는 수학과 예술이 결합된 개념 등이었다.
그는 이런 주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순전히 자기 경험과 독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친구 및 동료와의 대화를 통해 생각을 키워나갔다. 여러 학문 분야에 발을 담갔던 많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에게 사고의 발전이란 협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처럼 늘 고뇌에 차 있던 예술가들과 달리, 레오나르도는 친구, 동료, 제자, 조수, 궁정 일꾼, 사상가 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의 노트를 통해 그가 생각을 나누고 싶어 했던 수십 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는 지식인들이었다.
이렇듯 서로 생각을 나누고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밀라노 궁정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을 드나듦으로써 더 촉진되었다. 스포르차 궁정에서 급여를 받던 사람 중에는 악사와 공연자뿐 아니라 건축가, 의학 연구자,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도 있었다. 이들은 레오나르도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끝없는 호기심을 채우게끔 도왔다. 뛰어난 시작詩作보다는 아첨으로 유명했던 궁정 시인 베르나르도 벨린치오니는 루도비코가 보살피던 다양한 인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루도비코의 궁정은 예술가로 가득하다. 꿀 냄새를 맡은 벌처럼 모든 박식한 학자들이 그에게 모여든다.” 그는 레오나르도를 가장 위대한 고대 그리스 화가에 비유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아펠레스Apelles를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 〈8장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pp.214~215
◆ 레오나르도가 그저 경험의 제자로만 남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노트에서 그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490년대부터 책에서 지식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경험적 증거뿐 아니라 이론적 체계의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이 두 가지가 긴밀하고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20세기의 물리학자 레오폴트 인펠트Leopold Infeld는 “우리는 레오나르도에게서 이론과 실험의 상호 관계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극적인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라고 썼다.
- 〈10장 과학자〉 pp.233~234
출판사서평
“다빈치는 스티브 잡스의 심장이었다!”
혁신가들의 영원한 교과서, 다빈치의 상상력을 파헤치다
2011년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출간해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끈 월터 아이작슨이 이번에는 스티브 잡스의 영웅,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7200페이지 분량의 노트를 연구한 끝에 그의 작품과 삶을 아우르는 새로운 전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내놓았다. 20여 년간 『타임』 지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CNN의 CEO를 역임한 저널리스트이자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은 이 시대의 핵심이 의심할 것 없이 ‘창의성’이며 그것은 다양한 분야 사이의 접점을 찾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가장 큰 재능을 보인 이가 바로 15세기를 살다 간 인물,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증명해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기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작품에 대한 안내서이자, 우리가 창의성을 논할 때마다 어김없이 호출되는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천재의 일대기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1세기의 빛나는 인물―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들에 의해 자주, 다시금 호명되는 이유는 15세기를 산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장 혁신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가장 혁신적인 인물이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21세기를 빛낸 인물들의 롤모델
“7200페이지 다빈치 노트에 담긴 창의력 비밀!”
『스티브 잡스』의 저자 월터 아이작슨 신작!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신의 영웅으로 꼽았던 ‘스티브 잡스’,
349억 원에 다빈치 노트를 구입한 ‘빌 게이츠’
2019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타계한 지 500주기가 되는 해이다. 1452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519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그의 삶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스티브 잡스는 레오나르도가 “예술과 공학 양쪽에서 모두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그 둘을 하나로 묶는 능력이 그를 천재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잘 알려져 있듯 잡스는 새로운 기술에 트렌디한 디자인을 접목해 IT업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기술은 상상력 없이 발전할 수 없다. 상상력이 결여된 기술은 그 누구의 이목도 끌지 못한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를 세운 빌 게이츠는 72쪽 분량의 레오나르도 노트(‘코덱스 레스터’)를 구입하는 데 3080만 달러(약 349억 원)를 썼으며, “레오나르도는 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 창의력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가?
월터 아이작슨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각 작품에 관한 다양한 뒷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놓았고 레오나르도의 진품을 가려내는 과정에 생긴 에피소드 또한 모자람 없이 소개한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생을 기록한 수많은 전기 중...에서도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가 단연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인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코덱스 레스터’라고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소장할 만큼 그에게 큰 관심을 가진 빌 게이츠는 “수년간 레오나르도에 관한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러나 한번도 그의 삶과 작품의 다른 면모에 대해 만족스러울 만큼 잘 살핀 책은 찾지 못했다”라며 아이작슨의 전기가 “독자들에게 레오나르도가 얼마나 인간적인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알려줄 것”이라는 말로 책을 추천했다. 또 『뉴욕타임스』는 전기가 흔히 빠지는 함정이 그 대상을 지나치게 독보적인 인간으로 정의하는 것인데 아이작슨은 오히려 “레오나르도를 가장 인간적이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라고 평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재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천재이기보다는 끊임없는 호기심을 상상력과 노력으로 해결하며 스스로 천재가 된 인물이다. 호기심과 상상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용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퇴화되어버리는 근육과도 같은 것이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 그 기능을 잃고 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그가 작성한 방대한 양의 수첩에 그대로 드러난다. 바로 월터 아이작슨이 그의 노트에 집중한 이유다.
그는 천재였다. 걷잡을 수 없는 상상력, 뜨거운 호기심,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창의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표현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레오나르도에게 ‘천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를 벼락 맞은 특별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그의 가치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 레오나르도의 천재성은 인간적 성격을 띠었고 개인의 의지와 야심을 통해 완성되었다. 그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처럼 한낱 평범한 인간이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두뇌를 타고난 게 아니었다. 레오나르도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다시피 했고, 라틴어를 읽거나 복잡한 나눗셈을 할 줄 몰랐다. 그의 천재성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종류, 심지어 한번 배워볼 수 있는 종류에 해당한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 이를테면 호기심이나 치열한 관찰력을 기반으로 한다. 레오나르도의 걷잡을 수 없는 상상력은 공상과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였는데, 이러한 상상력 역시 우리가 스스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키워줄 수 있는 부분이다. ―머리말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가 남긴 유명한 두 작품,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로 몇 세기에 걸쳐 전 세계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기는 천재성, 즉 노력 없이 주어지는 능력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걸작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지치지 않는 관찰과 연구, 그리고 경계 없는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미 잘 알려졌듯, 레오나르도는 많은 미완성작을 남겼는데 그것을 다만 그가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선입견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진리는 늘 새로이 발견되는 것이었기에, 작품은 늘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고,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이성적인 판단을 했으며, 종교적 사유도 거침없이 뒤집었다.
“상상력이 결여된 기술은 척박하다.”
그리고 상상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레오나르도는 몇 세기를 앞당겨 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의학, 치과학, 해부학, 생물학, 지질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혁신을 이룰 단초를 스스로 알아내 연구했고 또 기록했다. 그는 갈릴레이보다 1세기 앞서 과학혁명의 단초를 찾았고, 오늘날 사용되는 인체 해부도의 형식을 개척했다. 어쩌면 치과학의 선구자로도 기억될 수 있었을 만큼 인간 치아의 모든 요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고, 그의 노트에는 동맥경화증을 설명한 첫 사례로 볼 수 있을 만한 기록 또한 남아 있다. 또 레오나르도는 혈액계의 중심이 간이 아니라 심장임을 깨닫고 심장의 기능에 대해 알아냈는데 해부학자들은 450년 뒤에 가서야 그가 옳았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은 바다 생물의 화석이 고도가 높은 지역에 있는 것을 본 후 고심한 끝에 지각이 융기하면서 산맥이 형성되었음을 알아챘는데, 생흔학은 300년이 흐른 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 그는 당시 상식에 반하여 배아는 어머니의 손이나 발처럼 여전히 모체의 일부라는 주장을 펼쳤고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 빛을 반사한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했다. 이런 그의 업적은 공식적으로 발표되거나 출간되지 않았기에 이후 세기의 혁신가들이 다시 발견할 때까지 짧게는 100년 길게는 400여 년까지도 기다려야만 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이 많은 분야를 파고들었다. 원근법을 연구한 덕에 인체를 해부한 후 각 신체 부위를 2차원 평면에 3차원으로 그려냈고, 해부를 통해 이미 한참 전에 자신이 그린 그림 속 인물의 근육 묘사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수정한다. 미소를 만들어내는 근육을 알아내기 위해 안면과 입술 근육을 집요하게 해부·관찰했는데, 아마 이것은 「모나리자」의 아름답고 미스터리한 미소를 그려내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걸작은 천재의 붓 끝에서 완성되었지만, 화가가 경이롭게 바라본 그의 일상에 이미 그 싹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것, 바로 그 자세가 그를 천재로 만든 것이다.
“다빈치는 사생아, 동성애자, 채식주의자, 왼손잡이였다.”
다름을 포용하는 문화가 천재를 만든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주 요구되는 핵심적인 자질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그저 개인의 역량인 것처럼 자주 착각한다. 하지만 창의성은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할 때 더욱 크게 발휘되며, 혁신은 바로 그 현장에서 시작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자 작업하기보다는 늘 동료와 제자,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그 분야에 더 박식한 사람을 찾아 질문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우연히 마주치는 물리적인 회합 장소에서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가 태어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건물에 중앙 아트리움을 만들었고, 젊은 시절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들이 금요일마다 모이는 클럽을 열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서 레오나르도는 서로 다양한 열정을 공유하며 새로운 생각을 싹 틔울 친구들을 얻었다.” ―8장「비트루비우스적 인간」215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시대에는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 가까이 일했고, 여유 시간에는 광장으로 몰려가 어떤 주제로든 토론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 이질적인 분야의 아이디어를 융합하고 창의력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구텐베르크를, 콜럼버스를 있게 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재능뿐 아니라 멋진 외모, 근육질 몸매, 다정한 성격으로 유명”했고 “동시대를 살았던 저명한 지식인 수십 명의 편지와 그에서 레오나르도는 소중하고 사랑받는 친구로 언급된다”. 그렇지만 그가 가진 생의 조건이 그다지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생아이자 동성애자였고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또 이성적인 사고를 중시하다 보니 종교적인 시선에서는 가끔 이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는 두루 사랑받고 존경받았으며 권력자들은 그를 후원했다. 현대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르네상스의 문화를 제대로 배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는 문화, 어느 분야에서든 배울 것이 있다는 자세, 그리고 이질적인 것을 융합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용인하는 분위기. 그런 문화 속에서 천재가 만들어지고 우리의 혁신은 매일 새롭게 이어질 것이다.
[책 속으로 이어서]
◆ 다양한 분야의 패턴을 알아보는 본능과 더불어, 레오나르도는 과학 연구에 유용한 두 가지 능력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광적이라 할 만큼 잡다한 호기심과 무섭도록 극성맞고 날카로운 관찰력이었다. 레오나르도의 다른 부분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두 가지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할 일 목록에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라는 말을 적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누구든 호기심과 예리함을 지나치게 많이 타고났다고 할 수 있겠다.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의 호기심은 보통 사람이라면 열 살을 넘긴 시점부터 궁금해하지 않는 현상을 주목했다. 하늘은 왜 푸른가?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왜 우리의 눈은 직선으로밖에 보지 못하는가? 하품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일상의 시시한 현상을 놀라워하게 된 이유는 어릴 적 말을 늦게 배운 탓이라 했다. 레오나르도의 경우, 이러한 재능은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란 동시에 기존 지식을 지나치게 주입받지 않은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가 호기심을 가지고 노트에 적어둔 다른 주제들은 더 야심 찼고 탐구 관찰력을 필요로 했다. “눈을 움직이게 하는 건, 그래서 한쪽 눈의 움직임이 반대쪽까지 움직이게 하는 건 어떤 신경인가” “자궁 속에 있는 인간의 시작을 묘사하라.” 딱따구리와 더불어, 그는 “악어의 턱”과 “소의 태반” 같은 것도 살펴보고자 했다. 이런 일들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만 가능했다.
그의 호기심은 날카로운 눈썰미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우리가 대부분 놓치는 것들을 알아차렸다. 어느 날 밤 건물들 뒤편으로 번개가 번쩍 내리치는 것을 목격했는데, 바로 그 순간 건물들이 평소보다 작아 보였다. 그는 일련의 실험과 통제된 관찰을 통해 물체는 밝은 곳에서 작아 보이고 안개나 어둠에 싸여 있을 때 커 보인다는 것을 밝혀냈다. 한쪽 눈을 감고 있으면 두 눈을 다 뜨고 있을 때보다 사물들이 덜 입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했다.
- 〈10장 과학자〉 pp.238~239
◆ 기계를 연구함으로써 레오나르도는 뉴턴보다 앞서 기계론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우주의 모든 운동이 ?인간의 팔다리, 기계의 톱니, 인간의 혈액, 강물 등 ?동일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법칙 간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한 영역의 운동은 다른 영역의 운동과 비교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패턴이 드러난다. “인간은 기계, 새는 기계, 온 우주는 기계다.” 레오나르도의 장치들을 분석한 마르코 치안키의 말이다.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인물들이 유럽을 새로운 과학 시대로 인도하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점성술사, 연금술사처럼 원인과 결과의 비기계적 해석을 믿는 이들을 조롱했고 종교적 기적을 사제의 영역으로 강등시켰다.
- 〈12장 기계학〉 p.263
◆ 레오나르도는 역사상 가장 잘 훈련받은 자연 관찰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의 관찰력은 상상력과 충돌하기보다는 긴밀히 협조했다. 예술과 과학에 대한 그의 사랑처럼, 관찰력과 상상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가 가진 천재성을 구성하는 씨실과 날실이 되었다. 그는 통합적인 창의성의 소유자였다. 진짜 도마뱀에 다양한 동물의 신체 부위를 덧붙여 용을 닮은 괴물을 만들어내듯, 그는 사교장에서의 속임수든 상상화든 간에 자연의 세부 사항과 패턴을 파악한 다음 그것을 상상력의 산물과 버무릴 수 있었다.
놀랍지도 않지만, 레오나르도는 이 능력과 관련된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 했다. 해부학 연구를 하면서 인간의 두뇌 지도를 제작할 당시, 그는 이성적 사고 능력과의 밀접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상상 능력이 뇌실 속에 함께 존재한다고 봤다.
- 〈17장 예술의 과학〉 p.341
◆ 「성모와 실패」 그림들은 타블로이드 신문 크기에 불과하지만 그 그림들에는, 특히 랜스던 버전에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천재성이 반영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머리카락은 모두 윤기 있고 단단하게 말려 있다. 신비롭고 안개 자욱한 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는 강물은 마치 지구라는 대우주를 두 인간의 몸속 핏줄과 연결해주는 동맥 같다. 레오나르도는 성모의 얇은 베일 위에 비친 햇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는데, 성모의 피부보다 베일을 더 엷게 표현하되 햇빛이 그녀의 이마 꼭대기에 닿아 반사되도록 했다. 햇빛은 성모의 무릎 옆에 그려진 가장 가까운 나무의 잎들을 선명하게 비추지만, 레오나르도가 선명도 원근법에 관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무들은 멀어질수록 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예수가 기대고 있는 암석의 퇴적층은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정확성을 잘 반영한다.
- 〈20장 다시 피렌체로〉 pp.399~400
◆ 레오나르도의 지도들은 그가 이룩한 위대하지만 과소평가된 혁신의 또 다른 사례다. 그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했다. 레오나르도는 파치올리의 기하학 관련 저서에 삽화를 그려주면서 완벽한 명암으로 인해 삼차원처럼 보이는 다양한 다면체 모형을 완성했다. 공학과 기계학에 관한 노트 기록에서는 절묘함과 정확성을 갖춘 기계장치를 그림으로 그리고, 다양한 부품을 따로 떼어낸 장면까지 추가했다. 그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분해해 각 부분을 따로 그린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해부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근육과 신경과 뼈와 장기와 혈관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렸고 이 모든 것을 여러 겹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개척했다. 이것은 몇 세기 뒤의 백과사전에서 등장하는 인체의 여러 층을 나타낸 투시도와 비슷하다.
- 〈23장 체사레 보르자〉 pp.441~442
◆ 그의 열정과 호기심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로서, 말들이 스케치된 페이지의 뒷면을 보면 그가 당시 이외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도 활기 넘치는 말 머리가 그려져 있지만, 바로 그 위에는 지구와 태양과 달이 표시된 태양계의 섬세한 도해와 우리가 달의 여러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투영선들이 있다. 그는 달이 공중에 떠 있을 때보다 지평선에 걸려 있을 때 더 커 보이는 착시를 분석했다. 그는 오목렌즈를 통해 보면 물체가 더 커 보인다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대기를 정확히 모방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 페이지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정사각형과 잘린 원 같은 기하학 도형이 그려져 있다. 레오나르도는 기하학 도형을 같은 면적의 다른 형태로 바꾸고 원과 동일한 면적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끝없이 애썼다. 심지어 거기 그려진 말도 경외심과 존경심을 품은 표정이다, 레오나르도가 그 대단한 정신의 증거들을 자기 주변에 흩뿌려놓은 것이 새삼 놀랍다는 듯이.
- 〈25장 미켈란젤로와 사라진 전투 그림들〉 p.466
◆ 레오나르도의 모습으로 짐작되는 모든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하고 눈부신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붉은색 초크를 사용해 왼손 해칭으로 직접 그린 인상적인 그림이다. 이탈리아 토리노에 보관되어 있어 ‘토리노 초상화’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너무 많이 재생산되어,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실제 자화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레오나르도의 이미지를 규정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턱수염이 길고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눈썹이 덥수룩한 노인이 그려져 있다. 머리카락의 날카로운 선은 부드러운 스푸마토 기법으로 묘사된 뺨과 대비를 이룬다. 부드러운 그림자와 직선 및 곡선의 해칭을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된 코는 약간 휘어 있지만, 레오나르도의 노인 낙서에서처럼 심한 매부리코는 아니다. 레오나르도의 많은 작품에서처럼, 이 얼굴에는 강인함과 연약함, 체념과 조급함, 운명론과 단호한 결의 등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지친 눈은 사색에 잠긴 듯하고 아래로 내려간 입꼬리는 침울하다.
- 〈29장 로마〉 p.573
◆ 「모나리자」를 거의 제일 마지막에 그려진 작품으로 보고, 예술과 자연의 교차점에 서는 능력을 키우는 데 한 평생을 바친 인생의 정점으로서 탐구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듯하다. 포플러 패널 위에 수년에 걸쳐 여러 겹의 글레이즈를 얇게 덧입혀 완성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가진 천재성의 여러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크 상인의 젊은 아내의 초상화로 시작한 그림은, 옅은 미소의 미스터리를 통해 전달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고 우리의 본성과 우주의 본성의 연관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다.
- 〈31장 「모나리자」〉 pp.601~602
◆ 리자의 얼굴에 빛이 닿는 방식과 관련해 다른 작은 특이점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광학 관련 글에서 환한 빛에 노출되었을 때 동공이 작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연구했다. 「음악가의 초상」의 경우, 크기가 다르게 표현된 양쪽 눈의 동공은 그 그림에 움직임의 감각을 부여했고, 레오나르도가 그림에 사용한 밝은 빛과도 잘 어울렸다. 「모나리자」의 경우, 리자의 오른쪽 동공이 약간 더 크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오른쪽에서 들어오는 빛을 더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고(고개를 돌리기 전에도 광원을 향해 있었다), 그러므로 오른쪽 동공은 더 작아야 한다. 「살바토르 문디」에서 수정 구체의 굴절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것처럼, 이것도 단순히 실수일까? 아니면 교묘한 속임수일까? 레오나르도는 20퍼센트의 인구에게 발생하는, 좌우 동공의 크기가 다른 동공부등 증상을 알아챌 만큼 관찰력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그는 쾌락 역시 동공 확장을 유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리자의 한쪽 동공을 반대쪽보다 더 빨리 확장시킴으로써 리자가 우리를 보게 되어 느끼는 기쁨을 표현한 걸까?
어쩌면 이건 너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을 ‘레오나르도 효과’라고 해두자. 그의 관찰력은 너무도 예리해서 좌우 크기가 다른 동공 같은 모호한 이상異狀조차 우리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발견했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쩌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의 주변에 머묾으로써 우리는 동공 확장의 원인 같은 자연의 세세한 사항을 더 유심히 관찰하고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모든 세세한 것까지 인식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 자극받아, 우리는 그와 똑같이 행동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 〈31장 「모나리자」〉 pp.611~612
◆ 레오나르도는 광학 연구를 통해 빛이 눈의 한 지점에 모이지 않고 망막 전체로 들어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심와’라고 알려진 망막 중심부는 색과 미세한 부분을 잘 파악하고, 중심와의 주변부는 그림자와 흑백의 음영을 잘 파악한다. 우리가 어떤 물체를 똑바로 쳐다보면 그것은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주변 시야를 이용해 곁눈질하면 물체는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약간 흐릿하게 보인다.
이런 지식을 이용해 레오나르도는 손에 잡히지 않는 웃음, 너무 열심히 보려 하면 오히려 안 보이는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리자의 입꼬리에 그려진 아주 가느다란 선은, 해부도 페이지의 꼭대기에 그려진 입술에서처럼 약간 아래로 처져 있다. 그 입을 똑바로 쳐다보면 우리의 망막은 이 미세한 부분과 선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리자는 웃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눈길을 돌려 눈이나 뺨이나 그림의 다른 부분을 쳐다보면, 우리는 리자의 입을 주변 시야로만 보게 된다. 입꼬리의 작은 선은 흐릿해지지만 여전히 그곳의 그림자는 보인다. 이러한 입가의 그림자와 부드러운 스푸마토 기법 때문에 리자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미묘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 결과, 굳이 보려고 애쓰지 않을수록 더 환하게 빛나는 미소가 완성된다.
- 〈31장 「모나리자」〉 pp.618~619
◆ 레오나르도와 관계된 일이 늘 그렇듯, 그의 예술과 인생, 그의 출생지부터 이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신비로운 베일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딱 떨어지는 선으로 그를 묘사할 수 없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레오나르도 역시 「모나리자」를 그런 식으로 그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약간은 우리의 상상에 맡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도 알고 있었다시피, 현실 속의 윤곽선은 필연적으로 흐릴 수밖에 없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약간의 불확실성을 남겨둔다. 그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이 세상에 접근하며 사용했던 방법과 똑같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 세상의 무한한 경이에 감탄하며.
- 〈32장 프랑스〉 p.652
◆ 왕성한 지식욕을 가진 박식가들은 물론 많았고, 르네상스 시대에도 많은 르네상스인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그중에 「모나리자」를 그린 사람은 없었다. 동시에 수차례의 해부를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부도를 그리고, 수로 변경 계획을 구상하고, 지구에서 달까지의 빛의 반사를 설명하고, 심실의 작동 원리를 알아내려고 막 도살한 돼지의 뛰는 심장을 열어보고, 악기를 디자인하고, 야외극을 기획하고, 화석을 통해 성서 속 대홍수 이야기에 반론을 제기하고, 그런 다음 대홍수 그림까지 그린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천재이면서 그 이상이었다. 그는 모든 창조물과 우리가 그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이해하고자 했던 보편적인 지성인의 전형이었다.
- 〈33장 결론〉 pp.655~656
◆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대부분 일상적인 현상들을 골똘히 생각하지 않게 된다. 파란 하늘의 아름다움에 잠깐 감탄할지는 몰라도, 왜 하늘이 그런 색인지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궁금해했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또 다른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네와 나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의 놀라운 수수께끼 앞에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서 있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되네.” 우리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던 어린 시절 모습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33장 결론〉 p.657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Leonardo di ser Pietro DA VINCI
known as Leonardo da Vinci (Vinci, 1452 - Amboise,1519)
▲ Self-portrait of Leonardo da Vinci, 1512-1515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4.15 - 1519.5.2)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인상 깊은 사물, 관찰한 것, 착상 등을 즉시 스케치하였다고 한다.
다 빈치의 뜻은 '빈치'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며
풀 네임은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빈치에서 ser Piero의 아들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나라로 치면 그냥 충주댁 이런 이름 정도(..-_-?)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삐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466년 14세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한다.
15세부터 20대 초반까지 당시 유명했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 빈치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다 빈치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 인정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그의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1481년(또는 1482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약 12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 〉(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이른바 환상적인 색감을 살리는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다. 1516년 프랑소와 1세(François I)가 있는 프랑스의 끌로 뤼세로, 그의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이주한다. 그는 3점의 그림(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간다.
1519년 5월 2일 67세로 사망했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소와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랑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나왔다.
Old Man with Water Studies (c. 1513) is a drawing by Leonardo da Vinci. Some think it may be a selfportrait.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3 - 1574.6.27)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하던 예술가들의 전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11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으며 1524년 피렌체로 가서 안드레아델 사르토(피렌체파 화가. 초상화에 뛰어나다)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 젤로의 제자로서, 메디치가(피렌체의 지배자)의 원조를 받으면서 회화, 조각, 건축에 종사한 예술가이다. 역사상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543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 200여 명의 삶과 작품에 대한 기록 <미술가 열전>의 출판이다. 바사리는 그의 책에서 당시의 시대를 규정짓기 위해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사리는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며, 미켈란젤로의 제자이기도 했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직간접적으로 널리 교류했다. 그 덕택에 바사리는 좀 더 생생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展> 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본의 중역으로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Leonardo's childhood home in Anchiano.
전성기 르네상스의 최초의 대가라는 영예를 차지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은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사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다빈치는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 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선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완성하였고 더욱이 그것의 정신적인 깊이를 마련하여 가면서 주관적인 순화를 꾀하여 고전 예술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 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사실상 15세기 초 이래의 르네상스 화가들이 한 걸음씩 더듬어 노력하여 온 사실 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을 성공한 것이 다빈치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세기의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다음에 오는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이미 15세기 말엽에 완성하였습니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활동 시기의 반이상이 15세기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르네상스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Leonardo's earliest known drawing, the Arno Valley, (1473) - Uffizi
다빈치에 대하여 더보기
다빈치 예술의 특징 - 공기원근법, 명암법, 색채에 대한 연구, 단색화법
그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의 연구에 힘썼고, 직접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근육의 조직을 알아보는 해부학을 처음으로 미술에서 쓰기도 하였습니다. 또 유채 기법을 개량하여, 이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고 어두움의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모나리자」를 보면 육체의 정확한 묘사 위에 정신의 깊이나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수수께끼의 미소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여 낸 독특한 명암법 때문입니다. 즉, 색칠을 할 때에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고 흐리게 하여, 머리나 팔의 은은한 입체감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예술에 있어서 다빈치의 중요한 과제는 '조화'에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간, 예술 세계과 인간...그들의 대립이 아닌 한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회화에 있어서의 다른 거장들의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회화의 공간을 꽉 메우고 있지만 다빈치의 인물들은 화면에서 구성 요소입니다. 회화의 주역이 아니라 바위, 꽃, 하늘과 같은 회화의 통일된 주제를 이루는 부분입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단연 풀도, 물도 자세하게 묘사되어집니다. 또한 그는 당대의 화가들보다 해부학과 기하학의 조회가 훨씬 깊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떠한 선도, 어떠한 운동성도 그의 과학적인 지식을 강력하게 반영하지 않습니다. 회화 속에서 한 흐름으로 녹아 있습니다.
Sfumato(스푸마토-공기원근법)
다빈치는 기하학적 원근법이 표현하고 있는 견고성, 입체성이 오히려 화면 전체의 조화를 해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선을 분명히 표시하는 것보다는 인물이나 기타 소제들의 윤곽선을 없애주거나 아주 연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스푸마토'입니다. 이는 화면의 원거리감이나 공간감과 더불어 화면 전체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는 효과를 주며 회화의 소제들이 화면에서 튀는 것이 아닌 전체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Chiaroscuri(명암법)
프란체스카나, 보티첼리 등은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밝은 색이 화면을 지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반대로 어두운 부분이 증대되어 신체나 특히 윤곽선이 강조되어 인물을 회화의 분위기에 특히 몰입되도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화면의 조화에 기여하도록 합니다.
Monochrome(단색화)
다빈치는 색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대 다른 거장의 그림들과 비교해볼 때 그의 그림의 색조들은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색'의 뜻이 아닙니다. 그는 회화적인 통일과 조화를 위하여 색조조차도 화면 속에 녹여 조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색채를 혼합함으로써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여러 가지 색의 혼합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색을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중간색으로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것이 자연과 인간을 따로 때어놓고 보는 오만한 생각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써 인간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진정 인간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술가, 건축가, 발명가, 기계공학자, 해부학자...Leonardo
예술사가들은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를 가리켜 르네상스의 절정기라 부릅니다. 이 무렵 로마, 밀라노, 베니스, 플로렌스(피렌체) 등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했습니다. 16세기의 여명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거장들 중 Leonardo da Vinci, Michelangelo, Raffaelo(Rapheal) 세 사람을 꼽습니다. 이들은 이제껏 발현해내지 못했던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약 1495년에서 1520년까지만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전성기를 일구어낸 위대한 사람들이 1520년대에 이르러 작고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나이가 가장 많으며 르네상스를 고전으로 이끌어간 인물입니다. 조각, 건축, 토목, 수학, 과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재능을 보인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입니다.
과학자 다빈치
다 빈치는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 발명가였습니다. 위대한 상상력으로 자동차, 비행기, 헬리콥터, 비행선, 대포, 전차 등 현대인이 사용하는 각종 장비들을 그는 벌써 생각해내고 자세하게 스케치 해두었습니다. 또한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합니다.
사람의 몸에 혈액이 흐른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유럽인입니다. 그의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습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있습니다. 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식물학, 지질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비롯된 것입니다.
다 빈치가 죽은 후에 그의 방대한 수기는 애제자인 Francesco Melzi의 소장이 되었고, 후에는 점차로 흩어져 지금은 밀라노의 암브로지아나 도서관, 투리브루치오 백작가, 파리의 앙스티튜드 드 프랑스, 영국의 윈저궁, 대영 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미술관에 산재되어 있으며, 남아 있는 것만도 4쳔 페이지가 넘습니다. 현재는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있습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에 있어서 그 선구적 의의가 큽니다. 전 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할만 합니다.
대표작품
〈그리스도의 세례〉(1472–1475)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베로키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쪽의 천사를, 보티첼리는 오른쪽의 천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짐.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렸다.)
〈수태고지〉(1475–1480)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예수를 잉태한 성모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왔다는 루가복음서의 탄생설화를 소재로 함
〈동굴의 성모〉(1483–86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예수가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갔다는 루가 복음서의 전승 내용을 소재로 함
〈흰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1488–90) – 차르토리스키 박물관, 크라코우 (Krakow), 폴란드. 모델은 세실리아 가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뤼도빅 르 모르(Ludociv le More)의 정부(情婦)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의 흰 족제비는 다양한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순결함 혹은 순수함 그리고 모로 집안에 대한 상징으로 주로 해석된다.
〈음악가의 초상〉(1490년경) – 암브로시니아 미술관, 밀라노, 다 빈치의 유일한, 남성을 그린 초상화로 알려졌다. 모델은 프란치노 가퓌리오(Franchino Gaffurio)
〈리타의 성모〉(1490–91년) – 에르미타지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후의 만찬〉(1498년)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밀라노
〈모나리자(라 조콘다)〉(1503-1505/1507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암굴의 성모〉(1508년) – 런던 국립 미술관
〈성 안나와 성 모자〉 (1510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프로이드가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본 그림.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즉, 예수의 외할머니이다.
〈세례자 요한〉(1514년경) – 루브르 박물관, 파리, 다 빈치의 손으로 완성된 마지막 작품으로 남성과 여성성 사이의 모호한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업적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919)는 르네상스(Renaissance, 14C~16C)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 과학, 기술, 기계적 인물로서 만능의 천재라고 일컬어진다. 그의 업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 12개의 그림을 그린 대화가 5,000매의 노트와 1967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발견된 700매의 노트(과학,건축,토목,병기 등의 기술에 능통한 과학자요 기술자임이 확인됨)를 작성하여 남김
- 공성용 도구와 가장 효율적인 투석기를 고안함.
- 소리를 내지 않고 터널을 뚫는 법과 전차, 기관총, 여러 대포 등의 제작법을 개발하였고, 관개 수리와 운하공사의 준설기의 제작기술과 회화와 조각에도 능통하였음.
- 다빈치의 예술과 과학: 자연을 상대로 관찰, 조사하였고, 원근법과 조화의 감각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달성. 새나 물고기와 곤충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면밀히 조사 연구하여 비행기의 모형을 설계함.
- 다빈치의 해부학: 예술상의 필요로 시작한 인체 해부가 연구에따라 예술해부학의 경지를 넘어 과학적 해부학에 도달함. 남녀 사체 30체 이상 해부함. 그리하여 이로써 근대적인 경험적 과학과 실험적 과학의 눈을 뜨게 하였음. 그는 실제적으로 인체의 해부를 통해서 그리고 새의 비행 관찰을 통해서 그곳에 법칙이 있음을 인식함. 그는 “자연은 자기의 법칙을 깨뜨리지 않는다”고 주장. 역학적, 기계적 법칙을 개발함.
- 다빈치의 스케치: 직물공장, 밀라노의 철공소, 대포 제작소, 사원의 세계.
- 그 외, 방직기의 개량, 동력 전달을 위한 조인트(Joint), 기어(Gear) 등의 전달장치, 비탈면 등의 기계적, 역학적 연구의 달성.
그는 회화는 물론 문학, 음악, 의학, 특히 해부학, 식물학, 물리학, 광학, 역학, 수학, 지리학, 지진학, 천문학, 기상학, 건축학, 토목학, 수리학, 병기학, 화석학, 기계학 등에 능통하여, 이른바 그는 만능학을 정열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따라서 그는 만능(万能)의 천재이며,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능(全能)의 천재라 할 수는 없는 것은 전능자(全能者)는 '전능의 하나님(Almighty God)' 뿐이기 때문이다.
The Baptism of Christ (그리스도의 세례)
1469년 14살때 다빈치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화가이자 금세공사, 조각가였던 안드레아 델 베르키오(Andrea del Verrocchio)에게
다빈치를 제자로 들일것을 부탁했다. 보티첼리, 로렌쪼 등과 함께 화법에서 주조, 목공까지 다양하게 배우게 된다.
작품의뢰가 많이 들어왔던 베로키오는 작품의 마무리를 제자들에게 맡기곤했다.
베로키오의 제자가 된지 3년째에 다빈치는 스승의 그림을 완성하는 일을 맡았다.
다빈치가 처음 맡은 그림은 성 살비 교회에서 주문한 ' 그리스도의 세례 '였다.
The Baptism of Christ. 1472–1475. Oil on wood. 177 × 151cm. Uffizi Florence
스승이던 베로키오는 스케치만을 하고 대부분을 다빈치에게 맡겼던 이 작품으로 다빈치는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천사는 동료이던 보티첼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있는 천사를 직접 칠했다.
< 좌 : 레오나르도 다빈치 / 우 : 보티첼리 채색 >
일설에 의하면 베로키오가 다빈치가 그린 천사를 보고는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한다.
이 천사로 인해 다빈치의 이름은 당시 피렌체의 유력가문이던 메디치가에도 알려졌다. 다빈치의 천재성을 알아본 로렌초 메디치는 즉시 그를 고용하였다. 이 당시 다빈치의 초기작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 수태고지 '를 그렸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이 그림은 현존하는 레오나르도의 가장 초기작 중의 하나로서 이 작품의 주문자는 성 사르빅 성당으로 전하며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3장 13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그리스도 세례의 장면이다.
여기 천사의 모습에서 등을 보이며 머리를 옆으로 묘사하는 수법은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자성을 보여준다.
또한 천사의 손에 들려진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와 천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몸의 움직임과 더불어
가운데 세례장면을 강조하고 있다. 풍경은 요단강의 연장이며 물 또한 정화의 상징이고...
The Annunciation 성모희보(聖母喜報),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by Leonardo da Vinci (1472-1475) Uffizi Gallery. (4,096x1,874 pixs)
하늘에서 사뿐 내려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에 의해 아기를 배었음을 알려주는
천사의 모습을 나타낸 수태고지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자주 표현되는 주제이다.
천사의 모습은 오른 팔에 맨 리번의 움직임으로 동적인 반면 마리아의 모습은 딱딱한 느낌이다.
배경의 나무는 늘 푸른 향나무이다. 녹색이 가진 뜻은 희망과 더불어 긴 생명을 가진 나무이므로 영원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성모영보(聖母領報, 라틴어: Annunciation)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에 쓰여 있는 일화 가운데 하나로,
성모 마리아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성령에 의해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고하고,
또 마리아가 그것에 순응하고 받아들인 사건을 말한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모희보(聖母喜報)라고 하며, 성공회에서는 수태고지(受胎告知)라고 한다.
성모 공경 사상을 배경으로 삼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예술 작품 중에서 반복적으로 이용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의식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중세 즈음에 서방 교회에 전해졌다.
오늘날에도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 등에서는 3월 25일을 이 사건의 축일로 지정하여 기념한다.
부분도와 수태고지를 위한 습작
이 장면에서 성모 마리아가 독서 중인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을 뽑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옆에는 순결의 상징인 하얀 백합이 놓여 있지만, 대천사 가브리엘이 손에 드는 경우도 있다.
두 사람 위에는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이나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그려지는 것이 많아,
성령에 의하여 잉태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Cestello Annunciation by Botticelli, 1490. (좌)
The Annunciation and Two Saints (1333), Simone Martini. Tempera on wood, 184 x 210 cm (우)
중세의 작품으로서는, 랭스 대성당의 조상이나 시모네 마티니의 제단화가 유명하다.
르네상스기에는 과연 천상과 지상의 해후라는 르네상스적인 성격이 선호되어 가장 인기가 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벽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회화 등이 걸작으로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산드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 여러 명의 화가가 이 주제의 그림을 그렸다.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에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가 그린 벽화 (좌)
One of several versions of The Annunciation is located in St Mark's Convent. (우)
다빈치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1475년~1480년까지 있으며 자유롭게 기술을 연마하고 그림을 그릴수 있었다
20살에는 길드에서 예술과 의약에 대해 마스터로 인정받고, 아버지로부터 공방을 받았다고 한다.
자기 공방을 가진 다음에도 델 베로키오와 공동 작업을 했다고 하니,
'그리스도의 세례' 이후 델 베로키오가 다 빈치의 재능을 시샘하거나 하진 않았을 것 같다.
Portrait of Ginevra de Benci
Porträt einer Edeldame (Ginevra Benci). 1474-1476. 42 × 37 cm. National Gallery of Art. USA
이 그림은 1474년경 그려진 것으로 당시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이었던
지네브라 벤치(Ginevra Benci)가 1474년 1월 15일 17세 나이로 니콜리니와 결혼하였을 때 그 기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뛰어난 미모와 직접 시를 쓸 정도로 교양이 풍부하여 로마 교황청에 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소문이 났었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 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으나,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필치에 의해서 대상 인물에 깊은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도가 가슴부터 윗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약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그림의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는 글씨가 작품 뒤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네브라가 덕을 갖추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Benois Madonna
베누아의 마돈나(성모)
Benois Madonna. 1478, 49.5 × 31.8 cm. Oil on canvas (originally panel).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소유자 이름을 붙여 <베누아의 성모>로 불리며 현존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많지 않는 확실한 진품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초 한 상인이 이탈리아인 유랑 음악가에게서 사들인 후 지금의 에르미타지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레오나르도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이 그림에는 15세기 이탈리아 회화가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주제 이외의 부차적 요소를 많이 도입하던 경향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이미 보여 주고 있다.
성모의 모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표현된 것은 그만두더라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위대한 화가가 이탈리아 회화에서 처음으로 모자(母子)의 심리적 일체감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이 작품으로 레오나르도는 15세기 리얼리즘의 성과를 마무리짓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통로를 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꽃이나 고양이와 같은 매개물을 그려서 서로간의 애정 교류를 이룩하고, 회화적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흰 꽃도 그와 같은 애정의 교류물로서 소녀와 같은 성모와,
그의 동생과 같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기 예수의 얼굴은 이상하리만큼 커서
성모의 얼굴과 별로 다를 바 없을 정도이다. 두 사람은 모자 이기보다는 남매와 같은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나, 배경의 공허한 느낌이나 색채의 변화가 없는 것이 눈에 띈다.
Madonna of the Carnation
카네이션의 성모
Madonna of the Carnation. 1478–1480. Oil on panel. 62 × 47.5 cm. Alte Pinakothek Munich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가 베로키오의 공방에 있을 때 제작되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그 무렵 보티첼리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성모의 얼굴이나, 색채에 그의 영향이 엿보인다.
구도가 장식적이고 만년의 깊이는 느낄 수 없으나, 대상을 레오나르도적인 방법으로 처리한 기술은 이미 싹트고 있다.
성모가 한 송이 빨간 카네이션을 가지고 있고 아기 예수가 이것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다.
오른쪽에는 목이 가는 유리 꽃병이 놓여져 있고 화려한 백합꽃이 꽂혀 있다.
이 카네이션은 그리스도교적인 순애의 상징이라고 생각된다.
하느님, 즉 신이 있는 세계를 나타낸 배경의 산은 나중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나오는 산의 선구(先驅)를 보이고 있다.
위의 두 성모 그림은 베로키오공방에 있을 당시 다빈치가 그린 작품이다. 인물간의 신체적 가까움은 심리적 유대감과 똑같다.
두 그림에서 다빈치가 색의 조화에 대한 연구와 명암을 변화 시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 방법을 이용한것을 알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그림에 깊이를 더한다.
다빈치는 28살이 되자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다.
St. Jerome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성(聖) 히에로니무스(성 제롤라모)
St. Jerome in the Wilderness. 1480. Tempera and oil on panel. 103 × 75 cm, Unfinished. Vatican Museums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는 미완성의 상태로서 아직 밑그림의 단계이지만,
모든 이가 이견 없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작품 의뢰인도,
누구를 위해 그린 것인지도 모르는 예술사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그림 가운데 하나다.
우피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의 양식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초창기인 148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이름은 제롬 성인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최초의 사람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옷도 입지 않고, 추기경 모자는 땅에 내팽개쳐 놓았는데, 이는 세상 명예를 버렸음을 상징한다.
이 성인 곁에는 자주 사자가 등장하는데, 히에로니무스가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빼주었더니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늘 따라다녔다는 사자는 복종의 의미를 나타낸다.
광야 한가운데, 참회를 위해 돌로 가슴을 내리치기 직전의 순간을 잡아내어,
성직자의 근엄한 모습보다는 인간적인 고뇌를 표현하고 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처럼 극적인 순간을 가장 잘 포착해내는 순간 포착의 대가로,
이 작품은 그러한 다 빈치의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이 그림은 아직 스케치 한 상태로 성인의 머리, 오른쪽 다리, 왼쪽의 바위만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고, 다른 부분들은 밑그림이거나 명암법에 따라 그린 다음 얇은 덧칠만 되어 있다.
배경에 사용된 선을 흐리게 해서 안개처럼 표현한 스푸마토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선과 뚜렷한 명암의 대비로 어떤 작품보다 더 완성도 있는 느낌을 주는
다 빈치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티칸 박물관전)
19세기 초반 스위스 화가 안젤리카 코프만의 유언장에 의해 처음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코프만이 죽은 후 그 추적이 불가능해지다가 우연히 나폴레옹의 삼촌인 추기경 조셉 페쉬가 이 그림을 구매하게 된다.
이 그림은 2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밑에 부분은 박스 커버로 사용되고 있었고 성자의 머릿부분은 딜러의 신발 제작자가
그의 작업 의자 커버로 만들었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림을 보면 5부분으로 나뉜 자국이 있다고 하네요.
추기경이 죽은 이후, 경매를 통해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1856년 교황으로 지낸 비우스 9세에 의해 현재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카에 오게 되었습니다.
뭔가.. 그림 내용도 굉장히 고행을 하는거 같은데 그림 자체도 많은 고난을 겪었네요... (베지풋)
Adoration of the Magi
마기의 기도
Adoration of the Magi. 1481. Underpainting on panel. 240 × 250 cm, Unfinished. Uffizi Gallery, Florence
자신의 공방을 가진 후 1478년까지 작품 활동도 하지 않다가, 성 버나드 채플에서
'세 현자의 순례'를 소재로 한 종교화의 의뢰를 받고 '마기의 기도'의 작업을 시작한다.
이 그림은 그가 처음으로 그린 대작이지만 제작중에 1482년에 밀라노로 이사를 가면서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그림의 소재는 탄생한 예수를 3명의 박사가 예배하러 방문한 정경이다.
마기의 예배 이후 다 빈치는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의뢰를 받아 '암굴의 성모'를 그리기 시작한다.
동방박사의 경배 (1481 ~ 1482)
1418년, 성 도나토 수도원에서 다빈치에게 전통적 기독교 주제를 다룬 그림을 주문했다.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다빈치는 중심의 마리아와 아기예수, 그리고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강조점만 밝게 처리했다.
반원형으로 배치한 인물들의 얼굴 생김새를 보면 다빈치가 염세주의를 표현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빈치는 밀라노로 가야했기 때문에 동방박사의 경배를 완성할수가 없었다.
다빈치의 작품중에 유독 미완성이 많은 이유는 인기가 많은 화가인것도 있지만 평소 그의 그림작업 방식에도 있다.
다빈치는 하던 작품을 그만뒀다가 나중에 다시 흥미가 생기면 다시 그리곤했다.
Virgin of the Rocks
암굴의 성모, 암굴의 마돈나
Virgin of the Rocks 1483-86, Oil on panel, 199 x 122 cm, Musee du Louvre, Paris (원본 그림)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의뢰를 받아 그린 그림으로
스푸마토 기법이 처음 제대로 쓰인 작품이라고 미술사적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물기를 머금고 있는 암굴 속에서 청록색의 옷을 입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풀 위에 앉아 있는 아기예수에게 요한을 인사시키고 있다.
좌측의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아기가 예수이다. 무성한 식물들에 담겨진 물의 존재는 청정(淸淨)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요한에 의한 세례를 암시하고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 있던 것이
1506년 이전에 팔려 1842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작품중 빛을 가장 잘 조절한 작품이라고 한다
성당에서 구체적으로 구도, 등장인물 등에 대한 지침을 받고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어쩃든 요구사항에 맞게는 그렸지만, 세부사항에 약간의 장난을 쳐놓았다고 평가된다.
1. 예수가 세례 요한을 축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나리오 인데, 여기서는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
2.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머리 위에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손을 올려놓고 있다.
매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듯 하다.
3. 천사 우리엘이 마리아가 움켜쥔 머리를 자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이런 이단적인 성격 때문에 '암굴의 마돈나'라고도 불린다.
이 그림은 밀라노에 있는 성당의 의뢰를 받아 그려진 그림이지만 보수에서 서로 맞지 않아
이 오리지날은 건네지지 않았다고 한다. 보수가 맞지 않아 이 그림을 넘기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결국 복제화를 그린 것은 공동작업을 한 프레디스 형제가 보수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다빈치는 스포르차에 의해 후원도 받고 있었고, 자기 공방이 있을 정도의 재력도 있었기에...
그리고 일설에는 위의 이단적인 내용 때문에 성당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설도 있는데,
복제작에서 수정된 것을 보면 이 이야기도 신빙성이 없지 않다.
원 그림은 프랑스 왕실로 갔고,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차린 성당의 누군가가 반환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복제화는 스케치만 다 빈치가 하고, 채색은 프레디스 형제가 거의 다 했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된 그림이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이 물탄 그림(-_-;) 이라고 표현한 '암굴의 성모' 이다.
Virgin of the Rocks, National Gallery (London), 1495-1508, 189.5 cm × 120 cm (다시 그린 그림)
이 그림의 이단적인 내용때문에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다빈치가 <암굴의 성모>를 두번 그린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암굴의 성모>를 두번 그린 이유는?
'암굴의 성모'는 똑같은 주제의 다빈치 작품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있고, 다른 하나는 파리의 루브로 박물관에 있죠.
제목도 같고 주제도 같아 보이는 이 두 그림은 사실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암굴의 성모>를 그린 다 빈치의 원래 보수는
'순결한 관념의 협회(the Milanese Confraternity of the Immaculate Conception)'라는 단체에서 지불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협회는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에 있는 제단의 세 폭짜리 그림 중 중앙에 들어갈 그림이 필요 했다.
수녀들은 레오나르도에게 구체적인 치수와 그림에 들어갈 주제도 미리 알려주었다.
성모 마리아, 아기 세례 요한, 우리엘, 아기 예수가 동굴에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었죠.
먼저 그려진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습니다. 소설 "다빈치코드"에 나와서 더 유명해졌지요.
이 암굴의 성모는 다빈치가 1483∼1486년에 그린 작품으로, 중앙에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왼편에 두손을 모은 아기 예수가, 오른쪽에 아기 요한과 천사 우리엘이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의뢰한 성 프란체스코 교회의 수녀들은 다빈치가 그린 이 작품을 보고,
세례를 내려야 할 예수가 오히려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듯이 묘사되어 퇴짜를 놓았다고 하네요.
이 첫번째 그림에서 더욱 심란한 것은 마리아가 아기 요한의 머리 위에 한 손을 높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손가락들은 보이지않는 머리를 쥐고 있는 것처럼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굽은 손가락들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엘이 자기 손으로 뭔가를 자르는 모습입니다.
마치 마리아의 손 같은 발톱에 잡힌 보이지 않는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말이죠.
당연히 이 그림을 본 수녀들은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다 빈치가 결국 두 번째 그림을 새로 그려서 협회를 달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게 된 그림이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이 "암굴의 성모"는
다빈치보다 그의 제자인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De Predis brothers)의 손이 더 많이 간 작품입니다.
처음 암굴의 성모와 두번째 그림의 다른점은 마리아와, 예수, 요한의 머리에 후광을 추가하고,
천사 우리엘의 손가락이 사라졌고 마리아의 손가락 모양이 너그러운 모양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기예수와 요한의 신분을 명확히 표현하였으니, 더이상 수녀들이 퇴짜 놓을 일이 없었겠죠.
그리고 이 그림에서 동굴 틈으로 쏟아져내린 빛은 '신의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다빈치가 사용하였는데
아기 예수의 몸에 드리워져 축복의 기운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미묘한 빛과 그림자로써 대상의 형태를 잡았습니다.
동굴의 어슴푸레한 빛은 대상을 가리는 동시에 대상을 드러내면서 형태감을 살려냈는데,
이 모호한 음영은 더 나아가 인물들의 감정 상태까지도 표현하고 있지요.
이러한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농담과 분위기로 인하여 그림이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지네요.
"암굴의 성모"처럼 성모와 아기 예수, 요한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서 오래도록 그려진 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들이 이 무렵 이렇게 함께 자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성경적 사실과는 무관한 화가들의 창작인 것이죠.
그럼에도 이 주제가 교회에서 중요하게 취급돼 온 것은 귀여운 아기가 둘씩이나 등장해 보는 이에게 애틋하고
감상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데다가 그로 인해 성모의 자애로움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미술은 대체로 지고한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장르지만,
이렇듯 푸근하고 따뜻한 정서 또한 종교적 감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지요.
이 두 번째 버전은 <암굴의 성모>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런던 국립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도발적인 원래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두번째 작품(런던 국립박물관 소장품, 우측 그림)에 등장하는 두 아기 가운데 누가 예수 그리스도일까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모가 감싸고 있는 아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아기는 예수가 아니고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는 오른편에 앉아 있는 아기지요. 무슨 근거로?? 근거는 그림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서양 고전 회화에서 예수는 결코 십자가를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커다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고통스러워하거나 매달려 죽어가는 모습이 십자가와 관련된 예수의 주된 이미지입니다.
반면, 갈대나 나무로 만든 가느다란 십자가를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는 이는 어떤 그림에서든 세례자 요한인데,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전하는 메신저임을 뜻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요한은 거친 털옷이나 마치 원시인이나 입을 듯한 좀 야한 옷을 입고 다닙니다.
내셔널 갤러리의 "암굴의 성모"에서 아기 요한이 타잔의 옷 같은 것을 입고 있음을 볼 수 있어요.
세례자 요한으로 표현된 아기가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것은 지금 맞은편의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맞은편의 아기 예수는 이 경배를 받으며 오른손을 들어 응답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손가락 세 개만 펴 무언가를 짚을 듯한 모습인데, 이는 '너를 축복한다'는 뜻을 담은 제스처이지요.
이 제스처는 예수나 교황, 혹은 가브리엘 천사와 같이 교회 위계상 최상위에 있는 인물이나
신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고위급 사자만이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축복의 뜻 외에 '신이 지금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말씀을 주시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Angel side panel, executed by the De Predis brothers.
Center's is Virgin of the Rocks, The Louvre.
출처
http://kr.blog.yahoo.com/orioribebe/279
http://blog.naver.com/helmut_lang?Redirect=Log&logNo=150037391194
http://en.wikipedia.org/wiki/Virgin_of_the_Rocks
Lady with an Ermine
흰 족제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 by Leonardo da Vinci, 1489-1490, oil on board, 40 x 55 cm.
The Czartoryscy's Collection, National Museum in Kraków, Poland
이 그림의 모델은 체칠리아 갈레라니(Cecilia Gallerani)로 "로도비코 일 모로"라는 별명을 지닌 밀라노 공작
로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의 애인이었는데, 젊고 아름다운 17세의 그녀는 음악을 연주했고 시를 썼다.
당시 레오나르도는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성채인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1488년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만났다. 그녀는 재능과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회화에서의 인간 형태의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체칠리아의 쭉 뻗은 손은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다빈치는 각각의 손톱의 윤곽선, 손가락 관절 각각의 주름,
또한 구부러진 손가락 힘줄의 수축까지 그려내었다. 다빈치는 자기가 그리는 초상화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일기장에 사람과 동물의 초상 드로잉을 연습했다.
얼굴의 부분과 껴안고 있는 동물의 상반신과 손 부분 등에서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이 농후하다.
그러나 다른 부분은 거의 나중에 덧칠을 하고 배경도 뭉개 버렸다.
그것은 보존 상태가 나빠서 수리하면서 이렇듯 평범한 톤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인물의 윤곽이 수정되고, 얼굴의 왼쪽이 다시 그려지고, 두발도 다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오직 네 점의 여성 초상화 중 하나이다.
(다른 세 점은 모나리자,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과 라 벨 페로니에르(La Belle Ferronière)이다.)
18세기 말 폴란드의 아담 찰르레스키 황태자가 사들여 그의 처 이사벨라의 콜렉션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녀의 초상화에서 흰 족제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애완용 흰족제비는 귀족정치와 연관되었고 흰족제비는 본래 갖고 있던 털가죽을
흙으로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순수성의 상징이었다.
또한 흰족제비는 1488년 흰족제비 기사단을 만든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개인적인 문장이었다.
그래서 체칠리아와 흰족제비의 관계는 다양하게 의도되었다.
다르게는 체칠리아의 이름의 말장난이었다.(그리스어로 흰족제비는 "galay"이다.)
엄밀히 보면, 이 그림에 있는 동물은 흰족제비라기보다는
통통하고 덜 자란 흰 동물을 보는 것을 즐긴 중세 사람들이 좋아했던 페럿으로 보인다.
Madonna Litta
리타의 성모
Madonna Litta(Madonna and the Child). 1490-1491, 42 × 33 cm, Hermitage Museum in Saint Petersburg
구도가 단순, 명쾌해서 보는 사람의 주의가 자연히 주제인 모자상에 집중되게 되는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모성(母性)의 이상적 형태의 창조에 집착하고 있다.
1543년 무렵 베네치아의 피에트로 칸타리니 컬렉션 속에 성모 그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것이 이 작품이었던 것 같다.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것이 레오나르도의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1784년에 이르러 어느 공작(公爵)이 이 그림을 사들인 사실이 알려졌고,
1813년에는 다시 리타공(公)에게로 넘어갔다. <리타의 성모>라는 명제는 리타공의 소유라는 데에서 붙여진 것이다.
현재는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 않다.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굳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그의 목록에 첨가한 것은
이 그림과 같은 레오나르도 자신의 작품의 존재가 다른 데생을 통해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제작 연대는 1490년경으로서 <암굴의 성모>와 같은 시대 작품일 것이다.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의 주제는 12세기말부터 되풀이하여 그려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아기 예수가 왼손에 갖고 있는 작은 새로서, 그것은 '영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Portrait of a Musician
음악가의 초상
Portrait of a Musician. 1490. Oil on wood panel. 45 × 32 cm. Disputed. Pinacoteca Ambrosiana in Milan
The man in the painting was at one time thought to be Franchino Gaffurio, who was the maestro di cappella of the Milanese Cathedral. Although some believe it to be a portrait of Gaffurio, others think the man is anonymous.
The piece of paper he holds is at least one part of a musical score; it has notes written on it.
The painting was greatly restored and repainted, and Leonardo probably left the portrait unfinished but close to completion.
La belle ferronnière
밀라노 왕궁 여인의 초상
La belle ferronnière, 1490-1496. Louvre Paris, Paris. 62×44cm. Disputed
레오나르도가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을 제자들이 그림으로 팔기 위해서 손쉽게 정리하였던 경향이 있었지만,
이 그림은 그와 같은 경향이 한층 짙다. 얼굴이나 어깨등에 레오나르도적인 감각은 남아 있으나,
그곳에 다시 칠한 흔적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가라 앉은 인상을 준다.
특히 앞 쪽 난간의 부분에는 아름다운 손이 그려졌어야 할텐데 난잡하게 잘리어져 있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90년대 밀라노 궁정 시대에 공방에서 제작한 초상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1642년 컨템플로 궁에 작품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름다운 머리띠를 한 여인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였던 루크레치아의 초상화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강인함과 신중함이 엿보인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명암의 대비가 훨씬 자연스럽고 묘사 방법이 더욱 세련되진 것을 알려준다.
다빈치는 화가로써의 능력뿐만아니라 과학과 기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요새 설계안, 투석기, 포탄에 대한 성벽의 방어방법 또한 연구하고 노트에 기록했다. 다빈치는 젊은 시절 피렌체에서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을 연구했으며 50세가 되던해 친구였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한테서 기하학을 배웠다. [출처] 삼색냥이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
루브르판 '암굴의 성모' 이후 여러 작품을 그리다 1495년부터 후원귀족 스포르차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한다.
요한복음의 예수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한 그림은 무수한 소문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1999년에 복원되었지만 다빈치가 그린 것은 20% 정도만 남아서 원본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The Last Supper. 1495~1498 . 460 x 880 cm.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1498)
신약성서 요한복음 제13장 22절부터 30절 내용을 조형화한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열두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를 그리고 있다.
'너희들에게 고하노니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게 될것이다'
당시 이스카리옷 유다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 만찬 장소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예수의 말을 전해듣는다.
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부인하였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찬미를 기원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들어서 각각 이를 ‘자신의 몸’과 ‘자신의 피’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 예식을 영원히 기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적혀있다.
성체성사 즉, 성찬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를 한가운데 그리고 제자들은 식탁 양쪽에, 예수를 판 가롯 유다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화가)의 '최후의 만찬'에서 처럼 따로 식탁 건너편에 외롭게 앉혀서 표현 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유다를 다른제자와 같이 앉히는 관용을 베풀었고, 돈주머니를 움켜쥐고있는 가룟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분시켜 표현하고 있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는 전혀 다르다.
레오나르도는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선언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배신감과 자책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극적인 순간을 택했다. 예수가 빵을 들어 축도하는 종래의 평범한 장면을 택하지 않았고,
또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제자들을 세 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고,
또 좌우 여섯 명에 연대시키고 12사도 전체를 연관시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그림에 도입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갖는 모든 표정, 동작, 제스처(Gesture)가
이러한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의 위치도
실은 레오나르도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다. 괴테가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람 몸 전체가 생동감있게 표현되고 정서와 열정과 생각이 신체의 동작에 예민하게 나타나,
손의 제스처는 이탈리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 동작이며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 위치도 그가 치밀하게 계획해 배치한 것이다.
예수 뒤로 또 다른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원근법을 강조했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를 그릴때 따로 모델을 찾지 않았다.
최후의 만찬 스케치
1449년, 프랑스의 국왕이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공작을 몰아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다빈치는 만토바로 도망쳤다 다시 베니스로 향했다. 그리고 1500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명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1503년, 수천명의 군중들이 다빈치의 새로운 작품을 보기위해 피렌체 산티시마 아눈치아타 성당으로 몰려들었다.
1975년에 촬영한 복구 전의 모습
이탈리아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벽화는
다 빈치가 그림을 완성한 뒤 그림은 계속 망가지기 시작했고, 500년이 흐르는 동안 원래 그림이 많이 훼손되어
이탈리아 정부는 그림을 복원하기로 결정, 1978년부터 시작된 21년간의 복원작업 후 1999년 5월 28일 복원된 그림이 공개된다.
진짜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20%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나머지는 수십명의 다른 화가가 그려 넣은 것이다.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등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록 복원되었긴 했지만 원래 그림은 거의 사라져있는 상태이다.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지 겨우 20년이 지났을때 원래의 색감이 거의 다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이렇게 금방 훼손된 원인은 다빈치가 새로운 채색 기법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기존의 방식은 젖은 회벽위에 안료로 채색한 다음 건조시키는 방법이었는데 다빈치는 밑그림을 이중으로 그린후 템페라와 유화물감을 섞어 썼다. 훨씬 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했지만 지속성은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약했다.
1999년 복원된 그림 (5381 X 2926)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onvent of Santa Maria delle Grazie)
1943년 8월 15일 밤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이 교회와 수도원을 폭격하였고,
이로 인해 식당의 많은 부분들이 부셔졌으나 다행히도 이 최후의 만찬은 살아남았다.
1943년 폭격후의 사진과 살아남은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물을 설치한 모습이다.
“다빈치 ‘최후의 만찬’, 4006년 ‘인류 종말’ 예언” ... [서울신문] 2010년 03월 16일(화)
Sala delle Asse ceiling frescoes
아쎄의 방
the ceiling of the Sala delle Asse, Castello Sforzesco, Milan. Painted by Leonardo da Vinci, c. 1498-99
'아쎄의 방' 벽이나 천장에 회반죽 위에 물감으로 장식한 것으로 식물의 줄기와 나뭇잎 등이 얽히고 설켜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 내고 있다. 1498 년경의 작품으로 밀라노의 카스텔로 스포르 체스코 (Castello Sforzesco) 성에 있다.
스포르체스꼬 성은 두오모의 성모마리아상과 비스콘티 가문 문장의 뱀과 함께 밀라노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이 성의 많은 방들 중 꼬르떼 두깔레(Corte Ducale)방의 프레스코 화들은 볼만하며 까스텔로 디 로까비안까(Castello di Roccabianca)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성 안쪽에 위치한 그리젤라의 방(Camera di Griselda)이나 아쎄 디 레오나르도의 방(Sala delle Asse di Leonardo)도 볼 가치가 있다.
Little remains today of the Leonardo’s decorative paintings in a suite of rooms in the north-east tower of the Castello Sforzesco. Although nothing survives of the paintings of the Sala Negra, in the Sala delle Asse (“Room of the wooden panels”) fragments of trees are visibly portrayed on the upper sections of the lateral walls.
Leonardo worked on this mural with his assistants.
The branches of the trees are interwoven with golden braids to form a dense canopy that stretches across the ceiling and around the arms of Ludovico Sforza and Beatrice d’Este positioned in the centre. Other tablets on the ceiling with inscriptions refer to the marriage of Ludovico’s niece to the Emperor Maximilian in 1493, and to the Sforza’s claim to the Dukedom of Milan after the death of Filippo Maria Visconti, as proclaimed by Maximilian in 1495. A third tablet proclaims Ludovico’s victory over the French at the Battle of Fornovo, and his journey to Germany to cement an anti-French alliance with Maximilian in 1496.
The trees appear to be mulberry trees and as such are a reference to Ludovico Sforza, who was known as “il Moro”.
Surviving documents thought to relate to the decoration of the rooms imply a completion date of 1498 for the work.
the Sala delle Asse Detailes
One of less known, yet possibly among the most imaginative works of Leonardo da Vinci are his paintings in Salle Delle Asse in Sforza castle in Milan. Leonardo has very skillfully used the geometry of the hall so to achive impression that the observer stands in the middle of some dense forest (this work of Leonardo could probably be categorized as Trompe-l'œil, that was quite common later, in the baroque era). But the pattern Leonardo creates is a complex "knottiness" of leaves, branches and ropes that tie together in hundreds of different and very mathematical ways.
위의 마디에서 착안하여 그린 그래픽들 Leonardo's knottiness
출처 : http://asiber.ifs.hr/leonardo_uzorak_en.html
Young Girl in Profile in Renaissance Dress
Profile of a Young Fiancée
Profile of a Young Fiancée. late 15th century. 33 x 22cm. Chalk, pen, ink and wash tint on vellum, Private collection in Swiss
이 작품은 사랑스러운 초상화이지만 그 묘사의 안이함이 날카로운 레오나르도의 맛을 없애고 있다.
1490년경의 작품으로서 일설에는 앙브로지오 디 프래디스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나,
프래디스의 화풍이 일정하지 않아서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주제가 된 여성이 누구인지 오늘날에는 알 길이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음악가의 초상이 밀라노 공의 초상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의 짝으로서 밀라노 공 부인 베아트리 체 데스테의 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상들이 짝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모델의 문제는 여러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
19세기 작품인 줄 알고 ‘헐값’에 넘긴 그림이 알고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었다고?
19세기 독일의 무명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던 그림이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문제는 12년 전 크리스티 경매회사가 2만2000 달러(약 2500만원)에 이 그림을 팔았다는 사실. 만약 이 그림이 다빈치의 작품이라면 적어도 1억 달러(1100억)는 나갈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6일 이 그림의 원 소유주였던 진 마칭(Jeanne Marching)이 크리스티를 상대로 엉터리 감정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이 그림은 1998년 경매에 나올 당시 ‘19세기 독일파(派)’라는 카탈로그에 분류된 작품이었다. 2만2000 달러를 주고 이 그림을 산 것은 뉴욕의 한 미술품 거래상. 그는 2007년 이 그림을 캐나타의 미술 애호가인 피터 실버맨에게 다시 팔았다.
이후 이 작품이 다빈치의 지문이 찍힌 희귀한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전문가들이 탄소 연대측정과 적외선 분석까지 동원한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는 19세기가 아니라 1440~165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나타났다. 다빈치가 활동한 시대다. 그림 상단에 찍힌 지문은 로마 바티칸 성당의 ‘성 예로니모’에 찍힌 다빈치의 지문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옥스퍼드 대학 예술사 전문가인 마틴 켐프 교수는 이 작품이 당시 이탈리아의 세도가였던 스포르자 집안의 비앙카 스포르자를 모델로 한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켐프 교수는 이 그림의 제목을 ‘아름다운 왕녀(La Bella Principessa)’로 붙였다.
이에 진 마칭은 크리스티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크리스티가 감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최소 1억 달러는 하는 그림을 헐값에 넘겨 손해를 보았다는 것. 그는 크리스티에 상당 금액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크리스티는 “이 그림이 다빈치의 그림이라는 주장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며 “경매 당시 감정 절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입장을 밝혔다. 전문가들도 이 그림이 진짜 다빈치의 작품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은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데 다빈치는 양피지에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한 전문가는 심지어 “20세기에 그려진 가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Lisa or La Gioconda (French: La Joconde)
Portrait of Lisa Gherardini, wife of Francesco del Giocondo
다빈치 최고의 작품이라는 '모나리제2차 피렌체시대(1500~1506)의 작품이라고 하나 완성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피렌체의 상류 시민 프란체스코 지오콘다의 3번째 처의 초상이라고 전해진다.
눈썹, 코, 입, 의복 등 모든 것이 가장 델리케이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모사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묘사력 때문에 후대 모든 화가들의 놀라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모나리자가 띠고 있는 신비스런 미소는 일설에 의하면 레오나르도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모델의 주위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유쾌한 담소를 하게 하여
모델이 항상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해 주고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Between 1503 and 1506 / Oil on poplar wood / 77 cm × 53 cm. Louvre Museum, Paris
Purchased by Francois I in 1518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초상화로,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이다. 즉, 한국어로 하면 "리자 여사"라는 뜻이 된다. 모나리자의 다른 명칭인 "라 조콘다"는 한국어로 "조콘도(Giocondo)의 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작품은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으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을 사용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조 바사리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에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회화란 정신적인 것이라고 늘 말해왔고 모나리자에는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
150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작품의 의뢰를 수락한 것은 돈이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몇 달 뒤 베키오 궁을 장식할 프레스코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고 레오나르도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초상화를 완성을 했고 사람이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태곳적 풍경은 훨씬 뒤에 천천히 구상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등받이 없는 1인용 안락의자에 독특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나리자와 이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
모나리자 그림에는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다.
이것에 대해서는 그 당시 눈썹을 추하게 여겨 눈썹을 뽑는 것이 우아한 품위를 가진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 당시 시대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는 설과 (루브르박물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나리자 작품이 눈썹을 그리지 않은 미완성작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조르지오 바사리에 의하면 그림의 모델은 1479년 피렌체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의류 상인인
프란체스코 디 바르토로메오 델 지오콘도(Francesco di Bartolomeo del Giocondo)와 결혼한
리사 마리아 게라르디니(Lisa Maria Gherardini 1479-1542)이다.
이런 연유로 모나리자(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로도 불리운다.
다빈치는 몇년간 이 그림에 매달려 인물을 남성적인 동시에 여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특성과 명암을 연구했다.
이 그림은 부드러운 색조와 명암대조법을 사용해서 잔잔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또한 인물과 배경간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녹아들어있다.
다빈치가 남긴 최고의 유산은 바로 모나리자일것이다.
현재까지도 모나리자의 미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며 연구대상이 되고있다.
그리고 모나리자는 무성한 추측을 낳은 신비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사막을 건너는 방법)
An emblematic smile
The Mona Lisa's famous smile represents the sitter in the same way that the juniper branches represent Ginevra Benci
and the ermine represents Cecilia Gallerani in their portraits, in Washington and Krakow respectively. It is a visual representation of the idea of happiness suggested by the word "gioconda" in Italian. Leonardo made this notion of happiness the central motif of the portrait: it is this notion which makes the work such an ideal.
The nature of the landscape also plays a role. The middle distance, on the same level as the sitter's chest, is in warm colors.
Men live in this space: there is a winding road and a bridge. This space represents the transition between the space of
the sitter and the far distance, where the landscape becomes a wild and uninhabited space of rocks and water
which stretches to the horizon, which Leonardo has cleverly drawn at the level of the sitter's eyes.
오른쪽 사진을 보면 오른손을 왼손에 포개고 있는데 이모습이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것 보다
더 도덕적인 부인의 모습을, 더욱 신뢰성있는 아내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고 레오나르도는 이 모양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림에서 후경을 잘 관찰해보면 비논리적인 점이 보인다 관람자의 시점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높은 산과 거울처럼 평평한 수평선이 왼쪽에 비해 다소 올라와있는 호수가 보인다 반면에 왼쪽 풍경은 오른쪽보다 낮다 다시 말해 두 부분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상 거기에 인물 자체와 모나리자의 미소에 의해 감춰지고 변형된 간격인 단절이 있다 모나리자의 입술은 오른쪽으로 약간 올라가 있다 (좀 더 높게 그려진 오른쪽 풍경 쪽으로) 양쪽 두 풍경 사이의 불가능한 이행이 인물 속에서 바로 인물의 미소를 통해 실현되었다. (위키백과)
History
Leonardo da Vinci began painting the Mona Lisa in 1503, during the Italian Renaissance and, according to Vasari, "after he had lingered over it four years, left it unfinished...." He is thought to have continued to work on it for three years after he moved to France and to have finished it shortly before he died in 1519.
Leonardo took the painting from Italy to France in 1516 when King François I invited the painter to work at the Clos Lucé near the king's castle in Amboise. Most likely through the heirs of Leonardo's assistant Salai, the king bought the painting for 4,000 écus and kept it at Château Fontainebleau, where it remained until given to Louis XIV. Louis XIV moved the painting to the Palace of Versailles. After the French Revolution,
it was moved to the Louvre. Napoleon I had it moved to his bedroom in the Tuileries Palace; later it was returned to the Louvre. During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 it was moved from the Louvre to a hiding place elsewhere in France.
Mona Lisa was not well known until the mid-19th century when artists of the emerging Symbolist movement began to appreciate it, and associated it with their ideas about feminine mystique. Critic Walter Pater, in his 1867 essay on Leonardo,
expressed this view by describing the figure in the painting as a kind of mythic embodiment of eternal femininity, who is "older than the rocks among which she sits" and who "has been dead many times and learned the secrets of the grave."
The Mona Lisa painting now hangs in the Musée du Louvre in Paris, France.
The painting's increasing fame was further emphasized when it was stolen on August 21, 1911.
At the time, the painting was believed to be lost forever, and it would be two years before the real thief was discovered.
Louvre employee Vincenzo Peruggia stole it. Peruggia was an Italian patriot who believed Leonardo's painting should be returned to Italy for display in an Italian museum.
He was caught when he attempted to sell it to the directors of the Uffizi Gallery in Florence; it was exhibited all over Italy and returned to the Louvre in 1913. Peruggia was hailed for his patriotism in Italy and only served a few months in jail for the crime.
모나리자의 초안 500여년만에 공개
그러나 이후 박물관측과 복원연구팀이 첨단 스캐닝과 3D프로그램을 통해 검증한 결과 정식으로 진품 판정을 내렸고 2001년 이후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착수해 세상에 공개하게 됐다.
또 왼손으로 스케치 된 점과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서명등이 대다수 다빈치 작품의 흔적 및 습관들과 일치한다.
이외에도 왼쪽하단에 다빈치의 작품 초안을 다수 소유하고 있는 수집가의 인장이 찍혀있어 그 신빙성을 더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원래 모나리자 그림에는 기둥이 있었다?
모나리자의 초상을 모티브로 그린 라파엘의 스케치를 보면 기둥이 있었지만 다빈치의 그림에는 기둥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액자 제작자가 그림을 액자의 크기에 맞추기 위해 기둥 부분을 잘라내버렸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Copy of the "Mona Lisa" (Walters gallery, 볼티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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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기아리 전투
1504년, 피렌체 시장인 피에르 소델리니가 시청사 회의식 벽에 전투장면을 그려줄 것을 의로했다.
다빈치와 함께 이 의뢰를 받은 사람은 미켈렌젤로였다. 미켈란젤로는 카시나 전투 벽화를 그렸고 다빈치는 앙기아리 전투 벽화를 그렸다.
르네상스의 두 거장이 같은 곳에서 벽화를 그린것은 참으로 대단한일이였다.
앙기아리 전투는 피렌체와 교황령 연합군이 밀라노군을 무찌른 전투였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다빈치의 새로운 시도는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았다.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대실패였다. [출처] 삼색냥이
앙기아리 전투 / 17세기경
실제로 다빈치가 그린 앙기아리 전투 벽화는 남아있지 않다.
대신 익명의 작가가 모사한 밑그림과 이 밑그림을 바탕으로 후에 루벤스가 모사한 그림이 남아있다.
St Anne and the Virgin
성 안나와 성 모자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1510. Oil on panel. Louvre, Paris. 168 × 112 cm
모나리자의 미소를 성 안나와 성모 마리아로 옮겼다는 '성 안나와 성 모자'
성 안나의 무릎에 마리아가가 앉아서 어린 예수를 안으려하고 있다.
안나는 마리아의 어머니이지만 여기서는 마리아와 동년배의 연령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프로이드는 이 그림을 다 빈치의 동성애를 증명할 수 있는 단서로 보기도 했다.
Detail of the heads of St Anne and the Virgin(left) & Study of the head of St Anne(right)
St. Anne cartoon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and St. John the Baptist). National Gallery, London
1499–1500, Charcoal, black and white chalk on tinted paper, 142 × 105cm
비록 밑그림이었지만 이 작품은 많은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미켈란젤로도 이 그림을 연구했다.
그리고 밑그림을 그린지 10년이 지난 1513년 다빈치는 프랑스로 가서 이 그림에 채색을 했다.
그는 채색을 할때 아기 세례 요한을 빼고 대신 양을 그려넣었다. 양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채색을 했을뿐 완성작이진 않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각과 회화가 완벽히 조화된 작품이라고한다.
평소에도 다빈치는 섬세한 스케치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인체뿐만아니라 옷의 주름에 관련된 스케치도 다수 있으며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생동감 넘치는 의상들을 그려냈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Detail of Child Jesus, Virgin Mary, st John the Baptist
John the Baptist
세례자 요한
다빈치는 여생을 로마와 밀라노를 오가며 보내다 프랑스에 정착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1519년 봄에 프랑수와 1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빈치의 세례자 요한 그림은 관능적이면서도 양성적인 느낌을 가득 담고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다빈치가 남긴 마지막 인물화이기도 하다. [출처] 삼색냥이
St. John the Baptist 1513–1516. Oil on walnut wood. 69 × 57cm. Louvre Paris
중성적인 매력을 표현한 '세례자 요한'
이 그림에서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느니라'라는 말을 표현 하듯이 위를 손으로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신비한 미소를 띄고 있다.
Bacchus
Bacchus 1510–1515. Oil on walnut panel transferred to canvas. 177 × 115cm. Louvre Paris
세례자 요한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포도의 관, 호피 가죽, 지팡이 등이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데생은 그 바위의 묘사 등에서 레오나르도적인 것이 적고, 또 체구나 얼굴의 표현이 딱딱해서
품격있는 레오나르도의 필치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워 많은 학자들이 회의를 가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예술가도 세상사에 참여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여러분야에 관심을 두었다.
이런면에서 볼때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출처] [회화] 르네상스의 거장(2) / 레오나르도 다빈치|작성자 삼색냥이
● 살바토르 문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가운데서도 최근 500년만에 다시 나타나 미술시장을 뒤흔들어놓은 작품으로 2018년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4억5030만달러(약 4791억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모든 미술 시장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살바토르 문디(구세주)
살바토르 문디는 1500년경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의뢰한 작품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500년간 어디에 있었는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요. 다만 1900년대에 당시 영국 컬렉터 프랜시스 쿡이 작품을 사들였고 그의 후손이 1958년 소더비 런던 경매에서 45파운드에 팔았다고 합니다.
500년만에 다시 나타난 살바토르 문디는 작품에 덧칠이 심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웠기에 그의 제자인 볼트라피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2005년 뉴욕의 딜러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약 1만달러에 작품을 사들이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되는데요. 컨소시엄은 다빈치의 작품일 가능성을 염두해 뉴욕의 올드 마스터 보존 처리 전문가 다이앤 모데스티니에게 복원을 의뢰했습니다. 3년이라는 기나긴 복원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전 세계의 전문가에게 컨설팅을 맡겼고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빈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전문가는 스케치를 변형한 흔적이 있고 스푸마토 기법과 곱슬머리의 표현, 세밀한 손가락에서 드러나는 해부학적 지식 등이 전형적인 다빈치 작품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반대편에서는 일부분을 제외한 전반적 작품 수준이 다빈치의 다른 작품에 비할 바가 못되고 다빈치가 부분적으로 손을 댄 스튜디오 작품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작품에 보이는 스푸마토 기법이 다빈치 자신보다는 그의 제자들 스타일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미술사학자이자 레오나르도 연구자인 매슈 랜드루스 교수는 다빈치는 작업에 20~30%만 참여했을 뿐 작품의 상당수는 제자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그린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480년생인 루이니는 16세기 초반 북부 이탈리아에서 이름난 화가인데요. 다빈치의 영향을 깊이 받아 스승의 구성요소, 명암법, 독특한 얼굴형 등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주로 기독교 주제를 그려왔습니다. 특히 이 작품 속 옷 주름과 예수의 얼굴과 겉옷, 크리스털 보주 등에서 루이니의 기법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복원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도 있는데요. 작품 손상이 워낙 심해 대대적인 복원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어떤 부분이 본래 작품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검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주저없이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크리스티는 살바토르 문디를 고전 작품을 내놓는 올드 마스터 세일이 아닌 컨템퍼러리 세일에 포함시켰는데요. 세계의 주요 컬렉터가 컨템퍼러리 세일로 몰려든다는 점을 고려한 탁월한 전략이었습니다. 그 결과 2018년 11월 15일에 열린 경매에서 이 작품은 4억5030만달러(약 4791억원)에 낙찰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미술 시장 역사상 최고 기록입니다.
논란을 안고 지난해 미술시장의 최고가를 기록하며 아랍 왕자에 팔린 살바토르 문디. 이 작품은 경매 직후 아부다비 루브르 미술관이 작품을 전시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지난 9월로 예정됐던 전시행사가 연기된 후 그 행방이 일반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부다비 루브르 미술관이 돌연 전시를 연기한지 몇달이 지난 최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해당 작품의 진위에 큰 의심을 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관련 전시에 살바토르 문디를 전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루브르의 직원들 사이에는 살바토르 문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아닌걸 우린 알고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도 합니다. (출처: 티키타카)
-. WSJ,'살바토르 문디' 실구매자 "사우디 왕세자 맞다" (중앙일보 2017.12.08)
-. 사우디 대사관에서 피살된 카슈끄지 자녀 근황 (2019.04.03 클리앙)
● 코덱스 아틀란티쿠스(Codex Atlanticus)
다빈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머릿속을 스쳐 갔던 모든 생각의 단편들을 메모로 남겼다고 한다. 개인적인 상념에서 우화·철학적 명상·문학·음악·미술·수학·천문학·인체·기계 장치·무기 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아이디어를 빼곡히 기록해 두었다. 무려 1119 페이지에 이르는 다빈치의 그 메모들을 폼페오 레오니가 집대성해서 만든 것이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이다.
다빈치가 연구한 과학의 절정은 이 '코디체 아틀란티코' 에서 나타난다.
이 습작들은 현재 밀라노 암브로시아 도서관에서 소장중이다.
▲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암브로시아나 미술관과 함께 이어져 있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좌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 '코덱스 아틀란티쿠스'가, 저 멀리 중앙에 카라바조의 정물화 '과일바구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Vitruvian Man
Vitruvian Man by Leonardo da Vinci, Galleria dell' Accademia, Venice (1485-90)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또는 인체비례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소묘 작품이다.
고대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쓴 ‘건축 10서(De architectura)' 3장 신전 건축 편에서
‘인체의 건축에 적용되는 비례의 규칙을 신전 건축에 사용해야 한다’고 쓴 대목을 읽고 그렸다고 전해진다.
레오나르도는 비트루비우스의 설명을 그림으로 옮기면서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사람들을 데려다 눈금자를 들이대면서 실측하여 기록하였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원에 붙는다… 정사각형으로도 된다.
사람 키를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잰 길이는 두 팔을 가로 벌린 너비와 같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의 손가락과 손바닥, 발바닥과 머리, 귀와 코의 크기 등을 숫자로 계산하면서
사람 몸을 기하학적 관점에서 수학적으로 계량화하는 고대 사상을 실험하게 되었다.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Marcus Vitruvius Pollio,?-?)
BC 1세기 경에 활약한 고대로마의 기술자, 건축가이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건축십서 De achitectura 》는 10권으로 구성된 일종의 건축학 논문이며,
로마건축의 집대성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저서는 그리스 건축에서 상당부분 영향을 받았는데 규칙적인 비례와 대칭구조, 고전적 형식미를 강조 했다.
그는 마치 새나 벌이 둥지를 짓듯이 건축은 자연의 모방으로 생각해서 건축재료는 자연에서 나와야 하며
인간에게 휴식처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건축구조는 세가지 본질을 반드시 갖추어야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그리고 아름다움 (venustas)이다.
그리스 건축양식을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식으로 분류한 것도 비트루비우스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재조명되는데 1414년 피렌체에서 재발견되어
르네상스 건축가들에 빠르게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며
고대 로마건축 연구 및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영향을 받아 유명한 비트루비우스 해부도를 그렸다.
Disegno di Anatomia Femminile
여성의 해부도
The Principle organs and vascular and Urino-genital systems of a woman. 1512. 47*32.8cm. Royal Library, Windsor Castle
이 여성 해부도는 1480년대부터 그의 생애 동안 열심히 연구한 해부학 연구의 성과의 하나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시체를 해부하는 것을 교회법으로 금지시키고 있던 당시로서는 놀랄 정도로 정확한 각 기관과 각 혈관 계통의 자세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는 특히 여성의 임신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임신과 태아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투시도로서 뿐만 아니라 형태의 아름다움으로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해부도로서의 정확성보다는 도상학적인 세부의 아름다움이 넘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A page from Leonardo's journal showing his study of a foetus in the womb (c. 1510) Royal Library, Windsor Castle
출처: https://kornan.tistory.com/90 [Kornan's Stor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화상. 진위논란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1452년 이탈리아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의 공증인(公證人) 세르 피에르의 사생아였다. 사생아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의사도 약사도 될 수 없었고 대학진학도 불허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로 갔다. 그곳에서 아버지 세르 피에르는 어렸을 적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이던 아들 레오나르도를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는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적자였다면 아버지는 그를 공증인으로 만들거나 의과대학에 진학시켰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사생아 출신이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서 화가는 그나마 나은 직종이었다. 어린 레오나르도는 다른 견습생들과 마찬가지로 바닥 청소나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일 등을 허드렛일을 하면서 그림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천사를 그려 넣었고 스승을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런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공방 스승의 작업을 직접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스승 베로키오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캔버스를 작업실 구석에 밀쳐두었다. 레오나르도는 스승에게 “제가 저 그림을 완성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스승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한 뒤 공방을 떠났다. 레오나르도는 즉시 그리다 만 그림의 귀퉁이에 천사들을 그려 넣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베로키오는 자신이 그리다 만 그림을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보이지 않고 그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완성되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빈 공간에 천사를 그려 넣었고 이로써 캔버스의 구도는 꽉 찼다.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
베로키오는 그 솜씨를 믿을 수 없었다.
“예, 찾으셨습니까?”
“이 천사를 네가 그렸느냐?”
레오나르도는 일이 잘못되었나 싶어 기가 죽었다.
“네. 스승님이 그려도 괜찮다고 하셔서….”
레오나르도는 스승 베로키오의 회화를 뛰어넘는 솜씨를 보여주었다. 스승은 그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내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보거라.”
“뭘 그릴까요?”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그려 보거라.”
피렌체
레오나르도는 단숨에 창밖의 풍경을 그렸다. 베로키오는 어린 제자의 솜씨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로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전념했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
공방 시절 레오나르도는 스승인 베로키오와 보티첼리를 비롯해 유명한 예술가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스승과 선생의 기법을 답습하다가 자신만의 방법을 개발해 나갔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화가 조합에 가입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472년에는 정식 회원이 되었다. 드디어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실력을 더 키우기 위해 스승 베로키오의 조수로 남았다.
그 시절 레오나르도의 그림 실력은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다. 주문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시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처음으로 단독 주문을 받은 그림도 겨우 밑그림만 그린 채 포기했다. 제단화 <동방 박사의 경배> 또한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런 습관은 평생을 따라 다녔다. 그리하여 오늘날 레오나르도가 그린 게 분명하다고 판정된 그림은 스무 점을 넘지 않는다.
1472 ~ 1475년경에 제작된 수태고지(受胎告知).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에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
레오나르도의 그런 습관은 게을러서 그랬다기보다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분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보다 자연의 사물을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데 몰두하였다. 천체의 운행을 연구하고, 풀과 나무, 암석의 특성을 조사했으며 새로운 학설들을 기록하곤 했다.
서른이 된 레오나르도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밀라노는 피렌체 보다 큰 도시로 예술과 과학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스포르차 공작의 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이자, 건축가로 일하며 17년 동안 머물렀다. 그 시절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식물학, 광학, 수력학, 천문학, 해부학 등 온갖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는 웬만한 학자들보다 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밀라노
레오나르도는 관찰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운하를 설계하는가 하면 수력발전기를 고안했으며, 기중기, 다연발 총포 등을 고안했다. 또한 낙하산, 비행기, 헬리콥터, 전차, 잠수함, 증기기관, 온도계, 천체 운행도를 그리고 설계했다. 그 중에는 당시의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레오나르도의 과학 스케치는 거울에 비춰보아야만 해독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좌우를 바꾸어 썼기 때문이었다. 왼손잡이였으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게 편했을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가 가로챌까봐 그랬을 거라고 추정된다.
레오나르도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그렸다. 그것은 당시 의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더 세밀한 것이었다.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30구 이상 시체를 해부했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그 시절, 냄새를 참아가며 시체 각 부위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임산부 뱃속 태아
레오나르도에게 예술행위란 과학적 인식의 실천이었다. 수학은 그의 예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예술가들보다 수학자들과 더 자주 교류했다. 과학자들도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1497년경에 나온 파치올리의 <신성한 비례에 관하여>는 예술가와 학자 사이의 긴밀한 공동작업의 성과물이었다.
그림 속 남자는 양팔을 수평으로 펼치고 있는데 정사각형에 꼭 들어맞는다. 다빈치는 고대의 인체비례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 사람의 육체에 자들 대고 측정했고 그 결과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적은 것이다. 이는 미술작품에 비례와 대칭 등 수학적 원리가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인체비례도
사람을 원과 정사각형 안에 그려 넣은 이것은 레오나르도의 독창적 생각이 아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건축가인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가 처음 제시한 것이다. 그의 저서 ‘건축십서’에 이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몸의 중심은 배꼽이다. 사람을 눕혀 손발을 뻗게 한 뒤 컴퍼스 중심을 배꼽에 두고 원을 그렸을 때 손끝과 발끝이 원에 닿는다. 이런 방법으로 몸이 구현하는 정사각형을 찾을 수 있다.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길이를 재고 그 수를 뻗은 두 손끝과 비교하면, 자를 가지고 그린 정사각형처럼, 너비와 높이가 똑같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인간의 육체를 이상적으로 구현하는 게 하나의 과제였다. 고대 로마의 비트루비우스의 이상적 육체론은 레오나르도에 이르러 정교한 과학으로 탈바꿈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란 미를 창조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란 처음에는 화가의 정신 안에 있고, 그 다음에는 화가의 손에 있다.”
레오나르도의 이러한 태도는, 예술의 근본이 플라톤이 말한 ‘자연 모방론’에 맞지 않는다. 그는 예술가란 사물의 창조자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회화는 신의 피조물을 재창조해내는 작업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는 창조주와 연결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술은 자연에 대한 기계적 모사가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 인식에 기초하여 과학을 동원한 섬세하고 정교한 창조적 작업이다.
모나리자. 1503~1506년경. 판화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성을 천하에 알린 또 하나의 걸작은 <모나리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에 많은 화가들은 형태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윤곽 지을수록 사물의 실재감도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이나 인물의 윤곽선을 될수록 분명하게 그렸다. 그러나 그렇게 그려진 그림은 대상의 생명감을 빼앗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경계가 선이 아닌 명암의 점진적 변화로 표현했다. 명암의 섬세한 변화가 선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애초부터 선을 긋지 않고 명암의 미묘한 변화로 대상을 그렸다. 이것을 스푸마토 기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신비한 얼굴의 비결은 바로 '스푸마토' 기법에 있다. '스푸마토'란 '연기처럼 사라지다'의 이탈리아어 'sfum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최후의 만찬. 1495년 경.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 템페라 벽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에도 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최후의 만찬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절묘한 수학적 구도가 바탕이 원근법과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독특한 명암법이 특징이다.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가야 할 운명의 예수를 가운데 두고, 제자 하나하나의 특징을 잘 살아나 있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성경의 추상적 내용이 비로소 구체적인 역사성을 띤다.
천재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필자 박석근 작가는?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여 중앙대학교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인류史 최고의 천재를 만든건 `결핍과 호기심`
레오나르도 다빈치 / 월터 아이작슨 지음 / 신봉아 옮김 / 아르테 펴냄 / 5만5000원
- 김슬기 기자
- 다빈치의 천재성이 다방면으로 표현된 걸작 `최후의 만찬`.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벽화로 그려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사생아로 태어난 건 행운이었다. 그 자신에게도, 인류에게도. 합법적인 장남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5대째 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공증인이 돼야 했을 것이다. 그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감정기복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치료하기 위해 약물 처방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다빈치는 때때로 실수를 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옆길로 새서 시간만 잡아먹는 수학 문제에 매달리기 일쑤였다. 자신의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겨 두는 일로 악명 높았다. `동방박사의 경배` `황야의 성 히에로니무스` `앙기아리 전투`가 대표적 미완성작이다. 그 결과 오늘날 그가 전부 혹은 주도적으로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은 기껏해야 15점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다빈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천재로 손꼽힌다. 미술뿐 아니라 의학, 해부학, 생물학, 지질학, 물리학 등 분야에서 혁신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기 작가인 월터 아이작슨이 쓴 다빈치 전기가 마침내 한국에 상륙했다.
이 책은 2017년 10월 미국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같은 해 11월 열린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구세주)` 경매는 4억5000만달러라는 기록을 세웠다. 미국에 분 `다빈치 신드롬`에 군불을 지핀 책인 셈이다.
우피치미술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
벤저민 프랭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전 타임지 편집장 아이작슨이 다빈치를 택한 건 그가 이전에 쓴 전기들의 핵심을 가장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어서다. 그 핵심이란 예술, 과학, 인문학,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접점을 찾는 능력이 혁신, 창의성, 천재성의 열쇠라는 것. 500년 전 그가 남긴 7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과 낙서로 채워진 노트가 아이작슨의 출발점이었다. 말라노, 피렌체, 파리, 런던 등으로 가서 노트 원본을 확인했고, 숱한 연구서와 논문을 섭렵한 끝에 이 독창적인 전기를 완성했다. 다빈치는 이탈리아 빈치에서 가난한 16세 고아 카테리나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부유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와 어머니 카테리나의 두 가정 사이에 끼인 채 그는 성장했다.
다행스럽게도 15세기는 `사생아들의 황금기`였다. 사생아라는 지위는 자유분방하고 상상력 넘치는 젊은이들을 해방시켜 창의력이 점차 중요해지던 시기에 그들을 더 창조적으로 바꿔 놓았다. 싫증 잘 내고 산만했던 다빈치도 다행히 가업에서 해방돼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신분 탓에 라틴어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고전과 인문학을 배우는 대신 주산 학교에서 수학을 조금 배운 것 외에는 주로 독학했다. 경험과 실험의 제자가 된 건 그 덕분이다. 자유로운 정신은 그가 전통적 사고에 속박되는 것을 막아줬다. 그 시대는 야망과 재능을 갖춘 이에게 절호의 시기였다. 법률 회계 신용거래 보험이 발달하면서 귀족 지주의 권력은 도시 상인과 은행가에게로 넘어갔고 문자 해독 능력, 산술 능력, 소득이 극적으로 향상됐다. 더 높은 지위를 꿈꾸는 상인 계급의 예술 후원자가 많던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과 인문주의의 요람이 되었다. 1400년대 피렌체보다 창의성을 자극받기 좋은 환경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다빈치는 14세가 되자 아버지의 고객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 교육을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을 위한 묘비를 제작하고 청동상을 만들며 골동품을 관리하는 작업실이었다. 그의 밑에서 표면해부학, 기계학, 소묘 기법 등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비율에도 조화가 있으며 수학은 자연의 붓질임을 배웠다. 이곳에서 그는 스푸마토 기법을 발명했다. 윤곽과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표현해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표현하기 위한 `현대적 기법`이었다.
이 책은 다빈치의 신비로운 베일에 가려졌던 삶을 낱낱이 파헤친다. 재능뿐만 아니라 멋진 외모, 근육질 몸매, 다정한 성격으로 유명했고, 동시대를 살았던 저명한 지식인 수십 명의 편지에서 소중하고 사랑받는 친구로 언급되는 삶. 동시에 동성애자였고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채식주의자가 됐고, 이단적인 종교적 고집을 지녔던 삶. 광장으로 몰려가 토론하고 동료·제자·친구들과 어울리며 함께 작업했던 삶을 다채로운 모습으로 묘사한다. 720쪽에 달하는 두께에도 책장은 소설처럼 빠르게 넘어갔다.
르네상스가 배출한 숱한 천재 중에도 해부를 통해 입술의 미소를 완성한 `모나리자`를 그린 사람은 없었다. 지구에서 달까지 빛의 반사를 설명한 사람도 없었다. 심장의 원리를 알아내려 막 도살한 돼지 심장을 열어본 사람도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모든 창조물과 우리가 그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까지 이해하고자 했던 보편적인 지성인의 전형이었다.
아이작슨에 따르면 다빈치는 역사상 가장 `인간적인` 천재였다. 아이작슨은 "레오나르도에게 `천재`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그를 벼락 맞은 특별한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오히려 그의 가치를 축소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인적인 두뇌를 타고난 게 아니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다시피 했고, 라틴어를 읽거나 복잡한 나눗셈을 할 줄 몰랐다. 호기심이나 치열한 관찰력과 같은 우리가 스스로 향상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천재성이었다는 것이다.
아이작슨은 고백한다. "나는 문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처럼, 현실과 공상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이야말로 그가 가진 창의성의 원천임을 깨달았다. 상상력이 결여된 기술은 척박하다. 레오나르도는 관찰력과 창의력을 결합하는 방법을 알았고, 그 덕분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신가가 되었다."
재미 삼아 첨언하자면 `살바토르 문디`의 진위에 대해 아이작슨은 구체 속에 비친 옷 주름이 왜곡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작 쪽의 손을 들었다. "다빈치는 만능 예술가의 전형으로 미술, 건축, 과학, 의학 등을 모두 잘 알고 있는데, 왜 왼손에 든 구체는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진위 감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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