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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쉴만한 물가

히틀러 - 유대인 대량학살 이유

by 은총가득 2020. 12. 21.

나치의 반유대주의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요새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며 내세웠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1933년 그가 집권한 후 현실로 입증되었다. 유대인들이 세계 지배를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시온 장로의정서〉는 나치의 손을 거치면서 흥미로운 전설을 벗어나 실제로 위협의 증거로 나타났다. 나치는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의 음모에 관한 루머를 수집했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서유럽의 금권주의정치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 나치는 사회주의와 볼셰비즘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음모세력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은 기독교의 반(反)유대주의로 쉽게 결부되었는데 기독교에서는 유대인을 예수를 죽인 사탄의 추종자로 간주했다. 다른 한편 고비노 등의 인종론자들은 유대인을 열등한 인종이라 폄하했는데, 나치들은 선전을 통해 그들을 독버섯, 기생충, 바이러스, 쥐와 같은 더러운 것으로 대중의 의식 속에 낙인을 찍어 놓았다.

 

1935년 9월 13일 히틀러가 직접 명령하여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이 제정되었다. '독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이 법'에 의하면 독일의 순수한 아리안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과의 혼인은 물론 성관계도 중대한 범죄가 되었다. 일본군과는 달리 독일군의 유럽전쟁에서 비교적 강간 사건이 두드러지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인종차별법이 그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에 따라 유대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 유대인 배우자로 혼인한 사람, 유대인의 혼인관계에서 출생한 자녀, 유대인과의 혼외정사에서 출생한 자녀 등 혼혈아(Mischling)는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소유하는 독일제국의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곧 모든 유대인이 '2등 시민'으로 전락했음을 의미했다.

 

히틀러의 전쟁 준비가 가시화될수록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탄압 조치는 더욱더 가혹해졌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의 첫 단계가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면, 다음 단계의 목표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1938년 초부터 독일 경제계에서 유대인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작업이 개시되었다. 2월에는 경제적 이유에서 반유대주의 경제정책을 전면 도입하는데 반대한 유능한 경제 각료 할마르 샤하트를 경질하고 발터 풍크가 그 자리에 임명되면서 독일 경제계에서 유대인 출신 경제인을 제거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3월에는 모든 유대인의 법인 권리가 박탈당했고, 9월에는 유대인 의사들이 더 이상 아리안 독일인을 치료할 수 없게 했으며, 11월에는 유대인 변호사들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경제 외적인 탄압 조치들이 잇달아 시행되었다. 8월부터는 모든 유대인 남성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미들네임을 사용해야 했고, 다음 해 초에는 모든 유대인 여성들이 '사라'라는 미들네임을 써야 했다. 10월부터는 모든 유대인 여권에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J'자가 찍혔다.

 

이상에서 살펴본 유대인 탄압 정책은 1938년 11월에 일어난 '제국 수정의 밤'이 발생한 이후 유대인 축출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 사건은 한 유대인이 독일의 탄압정책에 항거하여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에 찾아갔다가 독일 대사관 직원을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괴벨스는 유대인 문제에 통제권을 장악하려고 히틀러의 재가를 받아 독일 전역에 걸쳐 유대인 테러를 가하도록 조치했다. 나치당의 돌격대(Sturmabteilung, SA) 대원들을 동원하여 유대인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상점을 파괴함으로써, 거리는 깨어진 상점 유리 조각으로 넘치게 되었다. 수정(水晶)이란 이들 유리 조각을 의미한다.

 

하룻밤 사이에 죽임을 당한 유대인이 91명이었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남성만 모두 3만 명에 달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소요의 죄를 뒤집어씌워 배상금으로 10억 마르크 외에 파괴의 보험 보상금으로 받은 2억 5,000마르크마저 나치에 헌납해야 했다. 그러나 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치는 유대인의 차별 정책에서 축출 정책으로 전환했다. 유대인은 모든 경제활동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유대인 소유 기업들은 아리안 혈통을 지닌 독일인에 귀속되었으며, 유대인 노동자들도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유대인 학살

1939년에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die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말은 처음에는 유대 인의 물리적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히틀러가 주장한 바 있는 독일인의 생존권(Lebensraum)을 동방 지역에 만들기 위해서는 레닌그라드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유대계 독일인을 이주시키고, 이에 맞추어 현지인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하인리히 히믈러는 〈동부 지역 이민족 처리에 관한 몇 가지 구상〉이라는 비밀보고서에서 유대인들을 물리적으로 절멸, 즉 살육하는 것은 '볼셰비키적 방법'이라 비난하고 '비독일적'일 뿐이며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그는 독일인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방 지역의 인구 이동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유대인의 거주 비율이 높은 동방 지역이기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큰 문제가 되었다. 나치는 '마다가스카르 계획(Madagaskar Plan)'을 구상하여 유대인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에 집단으로 강제 이송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독일이 프랑스에 승리한 뒤, 곧 영국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낙관하는 가운데 프랑스로부터 빼앗게 될 마다가스카르에 대규모의 게토, 즉 유대인 집단 거주 구역을 만드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영국 본토 계획이 좌절되자 120척이나 되는 선박을 동원하여 매년 100만 명씩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강제 이송하려던 나치의 야심 찬 계획은 곧바로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작전이 전개되자 동유럽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어떻게 처리하고 독일인의 '생존권'을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난 문제로 대두했다. 그리하여 '최종적 해결'이란 문제는 강제이주에서 물리적 유대인 절멸 계획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방안에 따라 1941년 초여름부터 소련 지역을 중심으로 살인 특무부대(Einsatzgruppen)라고 칭하는 친위대 산하 학살을 전담하는 부대가 투입되었고, 1942년부터는 폴란드 지역에서 여러 곳의 학살을 전문으로 하는 강제수용소가 세워졌다. 이러한 경위로 볼 때 유대인 절멸 계획이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상황의 추이에 의해 전개 발전했다는 주장이 타당한 근거가 있다.

 

'뉘른베르크법'에 통해 유대인이 되는 판단 기준은 제시되었으나, 유대인 절멸 계획을 시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 '반제 호수' 가에서 친위대 산하의 제국 보안국 국장 하이드리히가 주재하는 '반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회의록의 책임을 진 아이히만과 13명의 차관급 인사들이 참석하여, 절멸 대상 유대인에 관한 확인을 주로 토의했다. 회의록에 따르면 절멸 대상 유대인을 모두 1,100만으로 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누락된 유대인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하이드리히는 강제 이송 대상자를 '이 잡듯이' 색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무렵부터는 사람을 죽이는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는데,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유대인 캠프의 소장 헤스가 그 방법들을 시험해 보았다. 총살은 너무 느렸고 사격병들은 귀찮다고 했다. 일산화탄소 역시 비능률적이라 판명되었다. 그리하여 헤스는 500명의 소련 전쟁포로를 실험용 모르모트로 취급하여 취클론-B로 대량살상을 실험해 보았다.

 

이 약재는 I. G. 파르벤의 자회사로 페스트 구제를 위한 제약회사인 데게슈에 의해 제조된 것이다. 헤스는 이 취클론-B의 성능에 만족했다. 그의 친위 조직은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인디게이터'를 제거한 취클론-B를 대량 주문했다. 회사 측에서는 이 약재의 사용처를 짐작했으나 데게슈의 유일한 문제 제기는 '인디게이터'를 넣지 않으면 특허권을 침해당할 우려가 있다는 정도였다.

 

전멸 캠프에 의한 최초의 가스 대량학살은 1942년 3월 벨제크 수용소에서 시작되었다. 이 포로수용소는 하루에 1만 5,000명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 이 방법을 헤스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인간 말살을 위한 가장 위대한 시설이다."라고 자찬했다. 1941년 12월까지 히틀러는 약 870만 명의 유대인을 그의 통치하에 두고 있었는데 종전까지 그들 중 적어도 580만 명을 학살했다.

 

200만 명이 살해된 아우슈비츠에서는 그 과정이 거대한 공장에서 작업하듯이 시행되었다. 유대인 희생자를 실은 열차가 도착하면, 건강한 사람들은 노역소로 보내졌고, 약하고 연약해 보이는 여인과 아이, 노인 등은 곧장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스실로 가는 유대인 행렬을 환송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대인 음악가로 구성된 악단이 클래식 곡을 연주했다. 희생자들은 욕탕이라 지칭된 가스실로 직행했다. 목욕하기 전에 모든 유대인은 소유물을 남기고 옷을 벗었다. 아우슈비츠의 시체로부터 나온 빈약한 소유물들, 즉 산더미처럼 쌓인 가방과 남자 양복과 내의, 여자옷, 아동복 등이 '공식적으로 수거'되어 독일 본국으로 보내어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강제 수용소

ⓒ Ras67/wikipedia | CC BY-SA 3.0

그들은 처음에는 금속기둥의 구멍으로부터 가스가 나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잠시 후에는 인디케이터가 제거된 가스를 그들도 몸으로 느끼고 그 험악한 기둥에서 떨어져 작은 창문이 달린 철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꿈쩍도 않는 철문을 주먹으로 치면서 몸부림치게 된다. 철문 앞에서 서로 할퀴고 치고받으면서 결국은 끈적끈적한 피를 토하면서 피라미드처럼 시체로 쌓이게 된다. 25분 후에는 전기 펌프식 배출기가 가스를 빼내면 거대한 철문이 열리고 유대인 모범수들이 들어간다. 그들이 처음으로 하는 일은 피와 오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서로 엉겨 붙은 시체들을 올가미와 갈고리로 떼어내고, 나치가 전략물자로 간주하고 있는 금이빨과 머리털을 자르는 소름 끼치는 일이 시작된다. 그 후 그 시체들은 들것이나 인력거에 실려 용광로로 옮겨져 태워진 후 분쇄기로 들어가 곱게 갈려진 재가 되어 화물트럭으로 솔라강 하류에 뿌려졌다. 그들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종종 값비싼 가스를 적은 양만 사용했는데, 가끔은 건강한 희생자가 인사불성인 상태로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대에는 직접적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독일 산업계도 가담했다. 친위대는 유대인 노동력을 이들 기업에 제공함으로써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크루프, I. G. 파르벤, 지멘스, 라인메탈, 메서슈미트, 하인켈 등 대기업들도 포로수용소의 노동력을 이용한 대가로 두둑한 현금을 친위대에 주었다. 히믈러는 절충안으로 독일 기업을 죽음의 수용소로 옮겼다. 친위대와 I. G. 파르벤은 아우슈비츠 구내에 인조 고무공장과 염료 센터를 건설하여 긴급한 전략 군수산업을 가동하기도 했다.

 

"노동은 자유로움을 제공한다!"라는 구호를 수용소 문에 크게 내걸고 유대인의 노예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착취했다. I. G. 파르벤은 유대인의 노예 노동력을 최대한 소모하고자 했다. 유대인의 힘을 최대한 추출하여 노동력으로 쓰고, 이용할 힘이 고갈하면 가스실과 용광로에 처리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악한 경영에도 아우슈비츠는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염료나 합성고무의 생산성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들 유대인 수용자들에게는 의학적인 생체실험도 시행되었다. 350명의 친위대 의사들은 수용소 포로를 대상으로 빙사온도(氷死溫度) 실험을 하여 수십 명을 죽였고, 세균 감염증에 유효한 합성 화합법을 실험하기 위해 가스 회저병에 감염시켰으며, X선을 조사하여 불임 조치를 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발진티푸스 백신을 주사한다든가, 뼈 이식 수술을 시험해 본다든가, 바닷물을 마시게 하기도 했다. 히믈러는 괴팍한 취미를 만족하게 하려면 유대인 공산주의자의 해골을 수집하기도 했다.

 

나치의 절멸 계획은 그 거대한 규모에도 은밀히 진행되었다. 히틀러는 공개적인 연설이나 좌담에서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주책없이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에도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 절멸 계획에 관한 한 어떤 명령도 말로 전달했고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엄청난 증오심이 가득했으나 기이하게도 그 증오심은 언제나 추상적이었다. 그는 유대인 절멸 계획이 독일 '문화'에 대한 최대의 봉사라고까지 간주했다.

만약 그가 불행한 희생자들을 개인적으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보았더라면 가스실에서의 대량학살을 과연 용인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는 한 번도 절멸 캠프를 방문한 일이 없었고, 아우슈비츠의 감독자였던 히믈러조차 그곳을 단지 두 번 방문했을 뿐이었다. 나치는 절멸계획을 은밀한 은어로 표현했다. 살인은 친위대의 언어로 '특별조치', '재식민(再植民)', '일반적 수단', '사법부의 권한을 벗어난 주권자의 행동' 등으로 표현했고, 흔히 '동방 이송'이라 표현했다.

 

나치는 절멸 수용소를 극도로 비밀로 했다. 그 때문에 살인공장 주변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밤새워 덜컹거리는 유대인 호송 열차를 보면서 인근에 살고 있던 일반 독일인들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저 저주받은 유대인들 ― 밤에조차 제대로 잠을 자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라고 차디찬 불평을 토로했을 뿐이다.

유대인도 히틀러 초기에는 국외 탈출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환영해 주지는 않았다. 사실상 모든 유럽 정권들이 히틀러가 반유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문제를 건드려 악화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영국은 아랍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밸푸어선언에 의해 유대인에게 약속했던 이주(移住)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했다. 1939년 영국 정부의 백서에 따르면 앞으로 5년간 유대인의 이민을 7만 5,000명으로 제한했다.

 

미국의 루즈벨트도 항상 말로만 유대인에게 동정을 보내었을 뿐 그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데 대해 어떤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국가였다. 단지 영국의 처칠만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유대인의 이주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처칠도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든은 그의 비서가 말한 대로 "아랍인들을 좋아했으며 유대인을 미워했다."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면 제1차 세계대전 후처럼 독일 혁명을 통해 독일의 소비에트 정권이 출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공동성명에서 독일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고 했다.

 

전후 유대인 절멸 캠프에 경악한 연합군, 특히 영국과 미국은 나치의 학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열정을 기울였으나 그것도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들어갔다. 나치 학살을 협조했던 독일의 기업가들은 전후 재판에서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I. G. 파르벤의 인조고무공장 책임자였던 크라우흐는 단지 6년형을 선고받았을 뿐이어서 한 검찰관은 '좀도둑마저 기뻐할 만큼의 가벼운 형벌'이라고 말했다. 그 후 새 연방정부의 전후 보상은 보잘것없었다. 생존한 50만 명의 수용자 중 1만 4,878명만이 몇 년간의 소송 끝에 겨우 1,250달러씩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크루프 회사는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나서야 총 238만 달러를 지급했다. 재벌 프리드리히 프리크는 버티며 보상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972년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 10억 달러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

 


 

나치 유대인 학살 이유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자체 모든물건의 시세가 장난이아니었습니다.

 

오죽하면 돈을 땔깜으로쓰거나

도둑이 수레에실린돈은버리고 수레를 훔쳐갔습니다.

 

독일인은 엄청고생을했고 높은직책이나 돈을만지는 직책에는 유대인들이 자리잡고있었습니다.

당연히 독일인들은 유대인에대한 불만이 크겠지요?

 

독일인의 불만뿐만아니라 히틀러의 일생중에 일자리를 못가진적이있는데 그건 유대인만 뽑아가서 히틀러가 분노해서 그렇다는 설도있습니다.

 

그후 힌덴부르크 독일대통령이죽자 나치 유대인 학살 이유를제공하고 대표하는 히틀러가 총통에오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해야하는이유)

 

히틀러는 대통령에v오른후 군비를 확장하기 시작하고 1939년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전쟁발발후 히틀러는 나치 유대인 학살 이유를 본격적으로 선동하고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우고 유대인들을 학살하기시작합니다.

 

<나치 독일 최대영토>

 

이후 나치독일은 유럽을 차례차례점령한후 유럽의 모든유대인들을 끌어모아 학살하고 강제노동을 시킵니다.

병사들중 일부는 히틀러의 나치 유대인 학살 이유에 세뇌되어서 유대인을 노예보다못하게 대우합니다.

 

<소련군의 대공세>

 

그후 1943년 나치독일은 소련군과의 전투인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함에따라 점점 밀리기 시작합니다.

1944년이 되면서 나치독일은 패전이 거의 확실해졌고 소련군은 점점 나치독일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나치의 점령지로부터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줍니다.

 

이후 독일이 완전히 패할기색보이고 2차세계대전 종전후 적이될소련이 나치독일의 영토를 쫙쫙점령하는걸보고 샘이나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실시합니다.

 

이후 서부연합군에의해 서부에있는 유대인들이 해방되기시작했고 1945년 소련군과 독일군간의 베를린전투를 마지막으로 모든 유대인은 해방되었습니다.

 

 

1938년 11월 9일,

나치, 유대인 학살 시작

 

1차 세계대전 후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의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923년 1월 프랑스레몽 푸앵카레 정권은 벨기에와 함께 군대를 파병하여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독일이 프랑스가 요구한 거액을 보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었다. 이에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는 바이마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이런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점점 그 세력을 키워나갔고 히틀러는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1차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유대인의 배신과 무능으로 돌렸다.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대륙에

팽배해 있었던 반유대주의를 이용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자본을 강제로 흡수하기 위한 면도 있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나치 이전에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기독교도 사이에서

유대인을 색출하고자 검거선풍을 일으켰고, 14세기 후반에 촉발된 폭력적인 박해, 이교도를

비롯한 대규모 인명의 처형, 1492년에 유대인 15만 명을 대량으로 추방한 것, 영국, 프랑스, 독일

제 연방,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의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대대적인 유대인 추방 등은 이미

나치학살 전에 유럽사람들이 유대인을 어떤 시각에서 보고 있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박해는 18,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1931년,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33년 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제국수상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대교 회당 방화, 돌격대의 유대인 상점 습격 등에 이어 1933년 4월 히틀러는

유대계 상점 보이콧 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모든 유대인들이 전문직과 공무원직에서 사퇴할 것을 종용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괴벨스

주도하에 유대인들이 저술한 책들에 대한 분서행위가 독일 전역의 대학가에서 일어났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독일 국적 부여가 제한되기 시작했고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구역도 생겨났다. 더 나아가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법이 시행되면서 모든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결혼이 불법화되었다.

 

마침내 1938년 11월 9일부터 나치의 국민 계몽 선전부장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 ~ 1945년 5월 1일)에 의해 주도된 유대인 학살이 독일 전국토에서 자행됐다. 한 유대인 청년이 7일

밤 파리 소재 독일대사관원을 사살했고 유대인 전체가 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유대인

대박해(Kristallnacht, 혹은 Pogrom이라고 한다.

 

 

1934년 베를린에서 연설하는 괴벨스,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자살하고 6명의 아이들(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독약을 먹여 같이 자살하였다.

 

이미 반쯤 미쳐 날뛰던 나치정권은 이날 밤 전독일의 유대인 교회와 상점, 주택에 불을 지르고

수만 명의 유대인을 체포했다. 4백여 명은 현장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됐다. 경찰집계에 의하면 814채의

상점, 171채의 주택이 파괴됐고 191채의 유대교 교회가 방화됐다. 이 같은 일련의 유대인 박해는 주로

SA대원에 의해 자행됐는데 그들은 이날 밤에만 3만5000여명의 유대인을 체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뿐만 아니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하였고 이를 후세는 Holocaust라 명명했다. 사망자 중 유대인은

약 6백만 명으로 당시 유럽에 거주한 유대인의 2/3에 해당하는 수였다. 유대인에 대한 살해는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 집단 수용소로 이송하였다.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 과로사 하는 경우도

있었고 총살로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독가스를 이용한 대량 학살이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를 학살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 사진들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

 

1942년 우크라이나 비니챠(Vinnitsa) 인근에서 시체를 매장시킬 구덩이를 미리 파 놓고

유대인을 학살

아들을 살리기 위한 모정

유대인 여성을 처형하고 있는 SS여성대원

 

 

 

 

 

 

 


홀로코스트(Holocaust)-나치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히브리어: השואה, 이디시어: חורבן)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어원과 개념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태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2007년 국경(점선) 기준의 강제 수용소 위치 지도.

전국가적 동조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배경 사상과 규모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 정작 실행은 매우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는 것을 꼽았다.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

 

집단 학살 수용소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 아돌프 히틀러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

 

생체 의학 실험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발달과 실행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법적 탄압과 이주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드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

 

크리스탈나흐트(Kristalnacht)(1938)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노벨상하면 유대인이 생각나서(올해 노벨상도 12명 중 6명이 유대인이 수상) 시작한 유대인에 관한 책읽기로 요즈음 큰 보람과 재미를 느끼고 있다.

그중의 한권이 송충기 교수의 저서『나치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이다.

그동안 나치의 만행에 대해 어정쩡하게만 알고 있어 궁금증이 많았었는데 속 풀리는 앎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송 교수의 저서 등에서 발췌 요약한 내용을 올려본다.

 

1.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주변 국가들과 비슷한 정도였지 홀로코스트를 저지를 만큼 유독 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반유대주의 망령을 일으켜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례없는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나치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독일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은 19세기 후반 국가 통일과 산업화를 이룩했지만 이는 이웃 나라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뒤늦은 편이었다.

독일은 1870년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의 지휘 하에 이웃 나라에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를 대가로 한 것이어서 보수적 세력이 주도한 국가 통일 때문에 자유주의 세력은 분열되었고, 이후 독일에서 자유주의는 더디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독일은 경제 성장에서만 놀라운 성취를 이룩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독일은 당시 가장 발전한 산업 국가였던 영국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러나 낡은 정치구조는 결국 독일이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고 말았으며,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리며 민주국가로 발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더욱이 패전 국가가 되면서 독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패전국 독일은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제시한 조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황제가 퇴위하고 급조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뒤늦은 민주주의 발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속빈 강정에 불과하였다.

패전국으로서 체결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에게 무거운 배상금과 함께 그동안 차지했던 식민지 등 여러 영토를 상실하게 하였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해줄 세력을 찾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나치였으며, 동시에 패전에 대한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유대인이었다.

당시 독일 전체 인구에서 유대인의 비율은 1%도 채 안 되는 50만 명을 상회하는 정도였으나, 유대인들은 출판이나 언론계, 예술 및 전문직, 무역, 금융업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1933년 통계에 따르면, 의사들 가운데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1%, 법률가는 16%였다.

 

유럽에서 인종주의는 19세기 말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에도 인종차별주의가 널리 퍼져 유대인들이 그 희생자가 되었다. 즉 한 번 유대인의 피가 섞이면 그 누구도 유대인처럼 타락하고, 이기적이 되며, 기생충과 같은 생활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벌레나 세균을 보듯이 대했다. 히틀러 자신도 자기 가문에 유대인의 피가 섞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했다고 전해진다.

 

2. 나치당과 히틀러

 

나치(NAZI), 즉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SDAP, 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의 히틀러는 원래 오스트리아인으로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우연히 독일 남부 뮌헨에 머물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주저하지 않고 참전하여 공훈도 세우고 부상도 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오스트리아에서 별다른 기회를 찾지 못했던 청년 히틀러는 나치에 가담하면서 일약 유명한 선동가로 정치권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당시 그가 대중을 끌어 모으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 중에 하나가 반유대주의였다. 히틀러는 패전으로 충격 받은 독일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이념으로 반유대주의가 안성맞춤으로 생각하고 이를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터지기 이전까지 독일에서 나치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물론 반유대주의가 횡행했지만 아직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경제를 미증유의 상태로 몰아넣은 대공황이 발생하자 상황이 급변하고 정치적 상황도 돌변했다.

1930년 선거에서 나치당은 엄청난 득표를 얻어 제2당이 되고 1932년 선거에서 나치는 제1당이 되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와해를 시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1933년 1월 히틀러는 수상에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반유대주의 강령을 내세우며 등장한 나치당이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3. 나치 치하의 반유대주의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지만 실제로 내각 구성을 보면 나치당은 불과 세 사람이 포함되었을 뿐이고 다수는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이러한 내외부의 적들을 몰아내고 나치 지지자들을 계속 결속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대중의 동원이 필요 했으며, 이들 대중을 모으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이용한 것이 바로 반유대주의였다.

 

당시 반유대주의는 우생학에 의한 ‘과학’으로 미화하여 착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즉, 반유대주의는 우생학이란 과학으로 단단히 외피를 두를 수 있게 되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게르만민족은 보다 고등한 인종으로 영광된 진화의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 이 이유만으로도 유대인종은 게르만민족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그걸 못했을 때는 혼합 결혼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다 고등한 진화 단계의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자연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청년 시절 히틀러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진화론을 나치 사상의 중심 강령 중 하나로 삼아, 여기에 우생학까지 덧붙여 그들의 주장을 합리화했다. 찰스 다윈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나치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했다. 유대인 상점과 기업 제품의 불매운동을 시작으로 공무원 임용에 관한 새로운 법을 제정해 비(非)아리안 족 태생, 곧 유대인 등을 공무원직에서 추방했다.

1933년 5월에는 주요 유대인 작가들과 나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작가들의 책을 시청 앞 광장에서 소각하였다.

유대인 작가 가운데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투홀스키, 하이네, 트로츠키 등의 유대계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1934년 연말까지 유대인 출신 변호사 가운데 70%, 법무사 가운데 60%가 일자리를 잃었다. 의료계에서는 1935년까지 유대인 출신 의사의 절반 이상이, 그리고 이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유대인 의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유대인 출신의 과학자, 예술가, 언론인, 작가 등 수천 명도 이러한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해외로 떠났으며 그 중에는 미국을 떠난 아인슈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편지를 썼고, 물리학자 오토 프리쉬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소위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으며, 무소리니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온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부인이 유대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나치는 1935년 소위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만들었다. 이 법률에 따르면 혈통적으로 유대인을 ‘순혈 유대인’, ‘제1혼혈 유대인’, ‘제2혼혈 유대인’ 등 세 부류로 나누었다. 조부모 및 외조부모, 곧 네 명 가운데 몇 명이 유대인인가에 따라서, 그리고 본인이 유대인과 결혼했는지, 혹은 유대교를 믿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그 분류가 달라졌다. 유대인 사이의 이러한 구분이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생사를 가늠하는 문제가 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약간 완화되었지만 일시적 조치였으며, 1938년 새로운 법령으로 유대인들의 모든 재산은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면서 유대인 재산에 대한 체계적인 소유권 박탈과 몰수 조치가 뒤따랐다. 이러한 조치로 그때까지 독일에 머물고 있던 유대인들도 이민 행렬의 막차를 타고자 했으며, 1년이 약간 넘는 기간 동안 유대인 약 12만 명이 거의 빈손으로 독일을 떠났다.

 

4.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유대인들의 게토와 강제수용소 생활

 

나치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다음 해에는 체코를 점령함으로써 동부 진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히틀러가 주변 국가를 잇달아 수중에 넣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들은 독일의 침략을 경계했지만 혹시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돌발 상황으로 인해 세계전쟁이 벌어질까 두려워 히틀러의 침략 정책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조바심 속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연합국의 이러한 ‘유화정책’은 오히려 히틀러의 야심을 자극하여 독일은 연합국 경고에도 불구하고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제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던 연합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6세기부터 유대인들은 비유대인들과 격리된 이른바 게토(Ghetto)를 형성하여 거주하였는데 나치는 1939년 말부터 폴란드 전역에 특별한 거주 공간으로 게토를 조성했고, 이어 다른 점령 지역에서도 게토를 만들어 혈통 상 유대인인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거주하도록 했다.

실제로 게토에서 유대인 생활은 인간 이하의 삶이였으며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은 바르샤바 게토였다.

이렇듯 가혹한 상황에서도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문화 조직을 만들어서 유대교의 전통과 가치를 함양하고, 연주회, 세미나, 문화의 밤,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했다.

이러한 활동은 한편으로 가혹한 현실을 공동으로 이겨내기 위한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이 ‘인간 이하의 종족’이라는 나치의 선전에 맞대응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강제수용소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933년 나치가 집권하던 때부터였다. 이때의 강제수용소는 유대인을 수용했던 곳이 아니라 주로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가두는 곳으로 주로 나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때 세워진 수용소로 가장 유명한 곳이 뮌헨 근처에 있는 다하우(Dachau) 수용소로 나중에 점령지역에 강제수용소를 건립할 때 모델이 되었다.

게토에서 생활하던 유대인들은 1938년 유대인 박해 때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긴 했지만 홀로코스트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무렵인 1942년부터 대거 이송 하기 시작했다.

게토에 거주시켜 사회로부터 유대인을 격리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나치는 독일이 점령한 지역에 대규모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독일에 살던 유대인을 수감시킬 계획을 세웠다. 점령지역 여러 곳에 수용소를 세웠으며 그중의 하나가 그 악명 높은 폴란드 남부에 세워진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다.

 

5. 홀로코스트

 

나치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나치가 소련을 침공한 1941년 6월 이후로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한 나치 지도부의 준비 작업에서 그 정황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명령, 곧 유대인을 말살하라고 하는 명확하고 구체적 공식 문건은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나치가 1941년 중반부터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홀로코스트를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계속 극단적으로 흘러왔으며, 더욱이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반유대주의에 심리적, 법률적 면죄부까지 제공했다. 즉 반유대주의는 죄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치가 유대인 말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죄악까지 저지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게다가 거기에는 나치뿐만 아니라 많은 평범한 독일인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그때까지의 과정과 상황을 감안하면 몇 가지 논리적인 추론을 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대인을 게토나 수용소에 가두어 놓는 방법이 나치가 볼 때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으며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토나 수용소가 나치에게는 여전히 골칫덩이였으며, 특히 전쟁이 벌어지면서 나치는 독일 국적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상대해야 했다.

둘째, 나치의 선전·선동으로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의 혐오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나치 치하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마치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애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독일이 점령한 국가 즉 폴란드 사람이나 서구 유럽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인 조치가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셋째, 전쟁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치뿐만 아니라 많은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소리 없이 처형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한 것이다.

 

흔히 가스실의 학살은 ‘산업적 학살’이라 부른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방법은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대량 생산하는 것과 같았다는 의미다.

초기의 유대인 살해는 우발적이고 개별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계획적, 조직적으로 변하고 공장화 되었다.

나치는 강제수용소에 가스를 주입시킬 가스실, 시체를 소각할 화장시설 등을 기획하여 ‘살인공장’으로 만들었다. 아예 새로운 강제수용소를 지으면서 가스실과 소각장을 만든 곳도 있고, 아우슈비츠처럼 기존의 수용소에 이러한 시설을 덧붙여 짓기도 했다.

이제 강제수용소는 학살 수용소가 된 것이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는 하루에 최대 9000명을 살해할 수 있었으며 1941년 6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아우슈비츠에서만 약 100만 명이 살해당했다. 강제수용소에서 가스로 사망한 유대인은 거의 300만에 달했다.

 

6) 누구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할까?

 

그렇다면 누가 이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물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당원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에게 학살 죄를 적용하여 사법적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울 법적인 근거가 약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억압한 법률적 근거가 있는 조치라고 주장했고, 당시 외국인이었던 연합국이 독일의 내정 문제에 간여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연합군이 찾아낸 법률적인 근거는 ‘전쟁 범죄와 반인륜 죄’였다. 전쟁 범죄는 국제법상 이미 존재하던 것이지만 ‘반인륜 법’은 전후 새로 만들어진 법으로서, 한 국가가 자국 국민에게 가한 통치 행위라도 그것이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에 속할 경우에는 이를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법률적 근거로 연합국은 전후 나치 지도자를 체포하여 법정에 세웠으며, 이것이 독일 남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국제 전범재판이었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진주하기 이전에 자살했기 때문에 제외되고, 당시 나치의 제2인자로 불리던 괴링을 비롯한 나치 지도자 24명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들 가운데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괴링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자살했고 나머지는 사형 당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독일 점령지 전역에서 자행한 많은 범죄들에 대해 책임 소재가 있다고 판단된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재판정에 섰다. 연합군이 점령했던 서독 지역에서만도 대략 6000여 명이 재판을 받았고 약 700여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소련이 점령한 동독 지역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단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르헨티나로 도망간 유대인 대량학살의 실무 책임자인 독일 5S 출신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1960년 체포되어 1961~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공개 제판을 통하여 전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이와 같이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지도자 몇몇이 주도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수많은 협력자와 방관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떤 학자는 독일인 가운데서 최고 100만 명이 홀로코스트가 집행되는데 직접 관여했다고 말한다. 또한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방관하고 허용한 대다수 독일인들이 그 간접적인 협력자들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다수 독일 국민들이 나치 정부의 말만 믿고서 정책에 동조하고 협력했던 것이다.

기독교나 가톨릭도 그 예외가 아니다. 특히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스 12세는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들 독일인 이외에도 많은 주변국, 심지어 연합군 사람들까지도 홀로코스트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했다. 폴란드는 나치에 침공을 당했고 많은 사람이 피해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내심 그것을 반기기까지 했던 사람도 많았다.

연합국도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방관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 사실을 알고도 곧바로 유대인을 구출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7) 독일의 사과와 홀로코스의 기억

 

독일은 스스로가 아니라 전후 연합국에 의한 나치 청산이 주도되면서 독일인들은 과거를 망각하기를 원했다. 국제적으로도 미국과 소련의 냉전관계는 계속되었고, 연합국이 독일에게 권력을 이양하자 독일인들은 나치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시작했다. 전후에 독일인 다수는 여전히 나치 집권 당시를 좋은 시절로 기억했으며, 나치의 목적은 좋았지만 수단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변호하려고 하였다. 또한 서독 정부 초기에는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나치 당원 출신의 고위 관리들이 행정부에 속속 복귀했다.

 

그렇지만 서독 초기 아데나워 정부는 전후 배상 문제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서독은 이스라엘 정부에 배상하기 시작했고, 이후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비롯한 나치 희생자 전반에 대한 배상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진정으로 나치를 청산하고 홀로코스트에 대해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과거 청산에 새로운 동력이 생겼다. 나치에 협력했던 앞선 세대가 물러가고 나치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등장했는데 이들은 전후 민주주의 교육과 시민 의식 속에서 성장한 세대였다. 이들은 미진했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보완하여 나치 범죄자를 찾아내 처벌하기 시작했다.

또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앴다.

서독 수상이었던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어 사죄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고, 이어 바이체커 대통령이 1985년 종전 4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에 대한 성찰을 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서독은 이후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전하여 이제는 과거청산에 모범적인 국가로 발돋움했다.

아직도 독일의 과거청산은 여전히 현재형이지만, 청산 작업에 근본적으로 반대하거나 혹은 이제 충분하니 그만하자는 목소리 역시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여전히 과거 나치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그러한 태도는 유럽을 통합하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든 것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이 야만적인 해위도 끝이 나고, 평화롭고 평온한 세상이 다시 찾아온다고 믿는다. 그때까지 나의 꿈들은 간직하고 있어야만 한다. 내가 가진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날이 꼭 올 것이다.”

어린 소녀가 용기 있게 간직했던 이 희망과 꿈은 우리가 참혹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않을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 에 참석하고 있는 반기문 유엔총장은 어제(11월 18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였다. 그는 인류는 대학살의 참극을 잊거나 부정해선 안된다며 방명록에 "모든이가 평등과 존엄성을 보장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적었다.

 

위의 글은 아래의 책에서 발췌하여 엮은 것입니다.

1) 나치는 왜 유대인을 학살했을까? / 송충기 / 민음인

2) 인문학은 밥이다 / 김경집

<가져온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