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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 나치스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이후에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대인이라고 모함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발터 P38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5]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아돌프 히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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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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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기. (지도자 겸 국가수상 상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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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의 지도자 겸 국가수상 | |
히틀러 내각 | |
1934년 8월 2일 ~ 1945년 4월 30일 | |
헤르만 괴링 | |
파울 폰 힌덴부르크 (국가대통령) | |
카를 되니츠 (국가대통령) | |
독일국의 수상 | |
히틀러 내각 | |
1933년 1월 30일 ~ 1945년 4월 30일 |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
프란츠 폰 파펜 | |
쿠르트 폰 슐라이허 | |
요제프 괴벨스 |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 | |
1921년 6월 29일 ~ 1945년 4월 30일 | |
안톤 드렉슬러 | |
마르틴 보어만 | |
독일국의 제3대 육군최고지휘관 | |
1941년 12월 19일 ~ 1945년 4월 30일 | |
프란츠 할더 (1938년 ~ 1942년) 쿠르트 차이츨러 (1942년 ~ 1944년) 아돌프 호이징거 (1944년 ~ 1944년) 하인츠 구데리안 (1944년 ~ 1945년) 한스 크렙스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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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폰 브라우히치 | |
페르디난트 쇠르너 | |
신상정보 | |
1889년 4월 20일(1889-04-20)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브라우나우암인 | |
1945년 4월 30일(1945-04-30) (56세) | |
나치 독일 베를린 총통엄폐호 | |
바이에른 육군 (~ 1919) | |
독일 노동자당 (1920년 ~ 192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21년 ~ 19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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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히틀러 (아버지) 클라라 푈츨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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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브라운 (1945년) | |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 참조 | |
군사 경력 | |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기의 히틀러 (191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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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 1920년 | |
병장 (Gefreiter; 제국군)[4] 정보병 (Verbindungsmann; 국가방위군)[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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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바이에른 예비연대[1][2] 국가방위군 정보국[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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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를 흐르는 인(Inn) 강변의 오스트리아 쪽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6남매 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볼프'라는 별명도 있었다. 세무 공무원이었으나 학력이 낮았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다 한다. 어머니 클라라 푈츨(Klara Pölzl, 1860 ~ 1907)은 그의 외조카이자 후처였는데 병약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폭력에서 찾으려 하기도 한다.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학생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학과 스페인어를 제외하고는 성적은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였지만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상급학교 진학 이후의 학업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출처 필요]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소년 시절[편집]
13세 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아돌프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 Mein Kampf 마인 캄프[*])'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가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5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밑돌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 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 옆에서 누워서 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 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 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비엔나와 뮌헨에서의 생애[편집]
1903년부터 고아연금자로서 살다가, 어머니의 후원으로 1905년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게된다. 1907년 9월부터는 비엔나에서 살다가 1913년 5월에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안타깝게도 히틀러의 이 기간 동안의 삶은 잘 밝혀져 있지 않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삶은 자료가 거의 없다. 그저 구술증거가 전부일 뿐이다.
1907년 비엔나로 여행을 떠나, 비엔나 예술대의 일반 미술학교에서 112명의 후보와 함께 시험을 치르게 된다. 준비해 간 미술화보집으로 79명의 응모자와 함께 2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국 28명만이 최종시험을 합격하게 되고 히틀러는 여기에 들지 못하게 된다. 우선 비엔나에서 살았다. 10월 24일에 가족 중 한 유대인 의사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려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통보한다. 히틀러는 린츠로 다시 가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1907년 12월 21일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사망 후에 점점 더 친척들과 멀어지게 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년시절의 자료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고아연금으로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린 그림과 우표 판매로 더 나아지는 그의 수입은 심지어 교사의 초봉보다 많았다고 한다. 한 지인의 추천서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1908년 가을 예술학교의 두 번째 응모에서 견습기간이 없이 정식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 그 다음에는 직업과 실습을 하는데 거의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히틀러는 두 번째 거절을 한 후에는 점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병역징집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된다.
1909년 7월에 룸메이트인 아우구스트 쿠비첵과 헤어진 후 숙소를 여러번 바꾸게 된다. 그 다음에 얻은 방은 시내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겨우 3주 동안만 방을 얻게 되는데 그 후의 3개월 동안은 그의 거취가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볼 때 그가 그 때 거주자 신고를 안한 것에 대해 노숙자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노숙자 생활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10년 초에 멜데만가에 있는 남자들 기숙사로 옮긴다.
청년 시절[편집]
미술학교 입학 거부와 실직자 생활[편집]
아돌프는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 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 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의 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이런 빈의 분위기로 인해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고,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년기에 그는 종종 언론사에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는데, 이때 자신의 어릴 적 별명이었던 '볼프'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썼다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누구도 그가 볼프라는 이름으로 글을 투고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화가로서의 히틀러[편집]
히틀러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 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다.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작품인데도, 작품성이 아니라 독재자가 그린 그림들이라는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더 관심을 받았다.[1][2][3]
이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을 나치의 잔재로 인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경매에 올리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남긴 작품들을 모두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월 29일에 아돌프 히틀러 작 바다의 야상곡은 슬로바키아에서 온라인 경매에 올라왔는데 한화로 4천7백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는 최초경매가 1천6백만원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3년에 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으로 간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은 것이다. 이유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가 병역을 거부한 것은 몸이 허약해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슬라브족과 유대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스트리아는 그에게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진정한 마음의 조국인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복무 시절[편집]
1923년에 제작된 히틀러의 초상화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받은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독일 육군에 입대하여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작전참모부의 명령을 받았다.
정치 데뷔[편집]
나치당 입당과 지도자 부상[편집]
역사[보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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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요소[보이기] |
방법론[보이기] |
관련 문헌[보이기] |
단체 및 정당[보이기] |
조직[보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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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보이기] |
역사[보이기] •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
상징 및 표어[보이기] |
핵심 요소[보이기] |
관련 문헌[보이기] • 잇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 (1906년) |
영향[보이기] |
관련 조직[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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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보이기] |
주요 인물[보이기] <a href="https://ko.wik |
죽음[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입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다.
아돌프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게재된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호외 (1945년 5월 2일 발행)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그의 향년이 57세였다.
평가와 비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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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독일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경제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나, 그러나 그가 내놓은 실업 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파 지도자들이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단지 그 기획안을 일부 수정하여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논란[편집]
사망 원인과 두개골[편집]
2009년 9월 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미국 코네티컷 대학 고고학자이자 뼈 전문가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는 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 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 측이 '히틀러'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에서 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7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두 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8][9]
생존설[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히틀러는 피신하여 빨라도 1960년대까지는 생존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존설 주장은 다음과 같다.
-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군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군들은 히틀러와 유사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1950년 3월경에 아르헨티나에서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독일의 신문에는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 스탈린이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 제라드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히틀러의 부하의 증언을 토대로 한 주장에 의하면 히틀러는 벙커에서 자살을 위장하기 위해 대역을 살해하고 그 길로 비행기를 타고 아르헨티나의 마르델플라타로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그 길로 안데스 산맥 기슭에 숨어들어간 뒤 1962년 2월 13일까지 천수를 모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는 히틀러를 직접 아르헨티나까지 데려다 준 비행기 조종사의 증언까지 확보한 상태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이에 제라드 윌리엄스는 덧붙여 주장하기를 히틀러의 시체라고 발견된 유골은 히틀러가 아니라 히틀러와 체격이 비슷한 40살 이하의 러시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히틀러가 1945년에 사망한 사실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10]이 주장에 의하면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히틀러 부부는 나치 독일 시절 유대인에게 약탈한 금과 보석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 1971년 사망했다거나, 아르헨티나로 도망가거나 심지어는 지구를 떠나 달로 도주했다는 등의 설들이 있으며, 그의 여러가지 생존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유대인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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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반쪽 유대인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유대인을 증오하게 된 배경에는 학창 시절에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 스승 때문이라는 설과 그의 어머니 클라라가 자신의 주치의인 유대인 의사와 불륜관계를 갖는 장면을 목격하고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증오를 증폭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그 의사는 오히려 히틀러가 죽이지 않은 몇 안되는 유대인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의사는 가난했던 히틀러의 어머니의 치료비를 많이 삭감해주었다. 유대인을 증오하는 성향과는 관계 없이 그가 유대인의 혈통을 일부 물려받았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10년 히틀러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서유럽 사람들에서는 극히 드문 M1B1a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히틀러가 유대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장애인설[편집]
히틀러의 가계는 근친혼이 종종 있었고,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조차도 자신의 누나 요안나의 딸이자 외조카인 클라라 푈츨과 결혼하였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히틀러에게 피부병 있었다는 설, 정신적 장애를 앓았다는 설, 성불구자설 등이 있다. 성불구자 설로는 외형은 정상적이나 성적으로 불구였다는 설과 고환이 한 쪽 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각에는 히틀러는 자신의 신체적 열등감 때문에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여러 여성들에게 요구했고, 자신의 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에게도 요구했으나 그녀는 수치심에 자결했다고 한다.
가족 관계[편집]
히틀러의 공식 결혼 경력은 한 번이었으며, 그 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생아가 한 명 존재했으나 행방은 미상이다. 현재 존재하는 그의 가까운 친족으로는 파울라 히틀러의 자녀들과 미국에 체류 중인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손자 3명, 이복 누나인 앙겔라의 손자 페트로 라우발(조카이자 연인인 겔리 라우발의 조카)이 있다. 그 밖에 형 알로이스 2세의 아들인 윌리엄 패트릭은 아일랜드계 혼혈인이자 영국 출신으로 순혈주의자였던 삼촌을 상당히 싫어했다 한다. 그 때문에 미국 망명 뒤에도 외가의 성을 따라 '윌리엄 패트릭 스튜어트-휴스턴'(William Patrick Stuart-Houston)이라고 개명했다는 것이다.
- 친할머니 : 마리아 쉬클클루버(Maria Schicklgruber, 1795~1847)
- 아버지 :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 1837~1903)
- 누나 : 텔카(Thelka, 1860~?, 아버지 알로이스의 사생아 딸이었다.)
- 어머니 : 프란체스카 히틀러
- 형 : 알로이스 히틀러 2세(Alois Hitler Jr., 1882~1956)
- 형수 : 브리짓 다울링(Bridget Dowling, 1891~1969,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 조카 : 빌헬름 패트릭 히틀러(1911~1987)
- 조카며느리 : 릴리 진 재퀴스(Phyllis Jean-Jacques, 1925~2004)
- 종손 : 알렉스 스튜어트-휴스턴 (?~?)
- 종손 : 브라이안 스튜어트-휴스턴 (?~?)
- 종손 : 하워드 스튜어트-휴스턴(?~1989, 1989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 종손 : 루이스 스튜어트-휴스턴(?~?)
- 헤드비가 히드만(Hedwig Heidemann, 형 알로이스 히틀러 2세의 내연녀)
- 조카 : 하인츠 히틀러(Heinz Hitler, 1920~1942)
- 누나 : 앙겔라 히틀러(Angela Hitler, 1883~1949, 그의 연인이자 조카딸인 겔리 라우발의 생모)
- 매형 : 레오 라우발 1세(Leo Raubal, Sr., 1879~1910, 앙겔라의 첫 남편)
- 외조카 : 레오 라우발 2세(Leo Rudolf Raubal Jr., 1906~1977)
- 외종손 : 페트로 라우발(Peter Raubal, 1931~)
- 외조카딸 : 엘프리데 라우발(Elfriede Raubal, 1910~1993)
- 외조카사위 : 어니스트 호칭거(Ernst Hochegger, 1910~?)
- 외종손 : 하이너 호칭거(Heiner Hochegger, 1945~)
- 외조카 : 레오 라우발 2세(Leo Rudolf Raubal Jr., 1906~1977)
- 매형 : 마르틴 하미트시(Martin Hammitzsch, 1878–1945, 레오 라우발 1세 사후 앙겔라와 재혼)
- 어머니(생모) : 클라라 히틀러(Klara Hitler, 1860~1907), 알로이스 히틀러의 외조카딸. 요안나 히틀러와 요한 푈츨의 딸, 히틀러의 어머니이면서 사촌 누나.
- 형 : 구스타프 히틀러(Gustav Hitler, 1885~1887)
- 누나 : 이다 히틀러(Ida Hitler, 1886~1888)
- 형 : 오토 히틀러(Otto Hitler, 1887~1887)
- 남동생 : 에드문트(Edmund Hitler, 1893~1900)
- 여동생 : 파울라 히틀러(Paula Hitler, 1896~1960)
- 처 : 에바 브라운 히틀러(Eva Anna Paula Hitler, 1912~1945)
- 이름 미상
- 외할아버지 : 요한 푈츨(Johan Wetzzl, ?~?), 히틀러의 외할아버지이자 고모부
- 외할머니 : 요안나 히틀러(1830~1907), 알로이스 히틀러의 누이, 히틀러의 외할머니이면서 고모
- 외조카 : 겔리 라우발(Geli Raubal, 1908~1931), 외조카이자 그의 연인이었다.
- 외증조부 : 로렌초 푈츨(Laurenz Pölzl, 1788~1841)
- 외증조모 : 율리아나 베일리(Juliana Walli, 1797~1831)
- 고종사촌 : 요한나 푈츨(Johanna Pölzl, ?~?) 고종사촌이자 이모
여성 편력[편집]
히틀러의 여성 편력으로는 4, 5명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동성애 기질도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겔리 라우발이 자살하자 당시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성적인 모욕을 주었다, 히틀러가 비정상적인 행위를 강요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겔리 라우발의 자살설로는 히틀러가 겔리를 버리고 에바 브라운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주요 저서[편집]
- 《나의 투쟁》(Mein Kampf)
문화 속의 히틀러[편집]
영화[편집]
같이 보기[편집]
<위키백과>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끔찍한 진실<설민석>
이번에 새로 시작한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1회에서는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는 독일과
홀로코스트 주동자 최악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강의가 펼쳐졌는데요
이에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부터
시작해서 관련 검색어가
실검을 장악했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죠
우선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관련하여
설민석은 독일이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우리 말로 거지가 됐다고 표현 하면 될 정도로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이때 독일에
돈을 빌려준 사람이 유태인이었다고 합니다
돈을 빌려준 후 받으려고 하는 건 당연한 건데
이때 등장한 히틀러가 경제가 망한 이유가
다 유대인 때문이라며 우리 피를 빨아먹고
저들이 없어져야 한다며 선동했죠
그래서 독일 시민들이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요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에
약 7500개의 그들의 상점에 유리창이 깨지고
교회당에 불이 났습니다
이 날 바로 일이 터진 거죠
그는 유태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하고
모든 공직에서 추방했습니다
또한 독일인과의 사랑까지 방해해
5대에 걸쳐 유대인이 있으면
무조건 독일인과 다른 인종으로 나눴죠
이에 독일인 다니엘은
자신이 그 당시 살았다면
아버지가 이스라엘인,
어머니가 독일인 이어서
자신은 혼혈이기에
끌려갔을 거라고 말해 눈길을 끌었죠
이때부터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설민석이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수용소를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재가 되어 굴뚝으로 나가는 거라고 덧붙였죠
처음에는 그들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하고
옷을 번게 한 후 총알로 죽였는데
총알로 죽이는 게 아까워
대량으로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을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밥을 먹이고 줄을 세우고
분류하며 수용하는 것조차
비효율이라고 생각해서
이동식 가스실을 만들었다고 전해
충격을 자아냈죠
이어 다하우 수용소의
충격적인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불에 탄 죽은 시신, 가스실에서 죽은 시신,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시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죠
그리고 설민석이 보여준 앨범 사진은
죽은 유대인들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며
그들을 그냥 화장한 게 아니고
가죽은 전등갓, 지방은 비누,
뼈는 비료로 사용했다고 말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인인 다니엘도 이건 처음 들어본다고 해요
너무 끔찍하니까 수업시간엔
얘기 안해준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또한 그는 대표적인 애견인이었는데
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개의 혈통에 집착했고
동물들마저 순수 혈통을 따졌다고 하네요
그의 마인드는 인종 청소로
지구를 깨끗이 할 거라는 나치당의 신념이
짙게 깔려 있었고 이에 동물들처럼
사람 또한 순수 혈통을 늘리기 위해
특별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바로 순수 혈통 아리아인 수를 늘리기 위해
인간 교배장 레벤스보른을 만든 건데요
더욱 충격적인 건 자신의 선전 능력을 이용해
애국심에 호소해서 여성들의
지원을 받아냈는데 애국심 넘치는
독일 여장교와 먹고 살기 어려운
일반 여성들이 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남자는 무작위로 매일 바꼈고요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당에서 데려가
친위대 가정에 입양되거나
그의 선전 도구로 사용됐죠
뿐만 아니라 독일 여성들의 지원율이
하락하자 일부 여성들을 납치해
집단 강간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데려간 후
조금만 이상이 있거나 질병에 걸리면
죽였다며 그의 혈통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에 대해 꼬집었죠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만 보면
정말 악마가 따로 없는데요
대체 그는 왜 악마가 되었을까요
그가 태어난 곳은 심지어 독일도 아닌
오스트리아 북부 브라우나우였습니다
히틀러는 어린시절 그렇게
아버지의 학대를 받았다는데요
그의 꿈이 화가였는데 아버지가
아이 의견을 묵살하고 실업학교에
강제로 입학시켰죠
그러다 1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두 차례 낙방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직접 그린 엽서를 판매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그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하고
독일로 와서 군인이 됐고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는데요
그는 뮌헨의 맥주집에서 놀라운
첫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그가 총통이 되는데
이 경험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 것이었죠
그가 데뷔 연설을 얼마나 잘했냐면
처음에 관중이 100명이었는데
4개월 뒤에 3000명이 마감됐다고 합니다.
그의 연설 비법은 자극적이고
강한 단어 사용하는 것이었는데요
연극, 뮤지컬 배우들을 보고 배웠다고 해요
또한 무대 장치에 신경을 써
사람이 감성에 빠지는 해질 무렵,
단상을 높이 쌓아서 아래서 위를 바라보게 한 뒤
바그너의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독일 사람들이
최악의 독재자인 그에게 빠진 게 아니라
그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 당시 독일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고
1차 대전에서 졌기 때문에
배상금을 내야 했기 때문인데요
그렇기에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또한
그들에게 정당성이 부여됐으니까요
그 막대한 배상금을 국민들이 갚아야 했고
그래서 독일은 돈을 찍어내기 시작해
화폐량이 증가하면서 가치가 떨어져
물건 가격은 상대적으로 올라가
당시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유럽인들은 빵이 주식이었는데
빵 한 덩이가 800억 마르크까지
올랐으니 말 다했죠
이어 그가 주변 유럽을 차지하고
프랑스 북부까지 차지했다고 하는데요
여기서 끝났으면 역사는 달라졌겠지만
영국을 치지 못하자
불가침의 조약을 어기고 소련을 쳐들어갔고
더구나 동맹국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는 바람에 중립을 지키던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돼 독일의 기세가
꺾였다고 설명했죠
또한 그는 패전이 짙게 드리우자
사랑했던 여자 에바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후 다음날 자살했습니다
먼저 반려견 블론디를 안락사 시킼고
에바브라운은 청산가리 먹여서 죽이고
자신은 권총으로 자살했죠
히틀러는 적에게 잡혀 항복을 하고
굴욕을 당하는 게
너무 치욕스럽고 두렵기에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고
자신의 시신은 소각을 시켜달라고 했는데
친위대가 그를 소각시켜줬다고 하죠
홀로코스트로 흥한 자가
결국 홀로코스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 곱게 죽었네요
[출처] 히틀러 유대인 학살 이유 끔찍한 진실|작성자 이곰인
♣ 홀로코스트 뜻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중 독일이 나치당을 이끈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 정치범 등 1천1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 학살된 인원중 유대인이 6백만 명으로 홀로코스트는 일반적으로 대학살 사건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4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의 세무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죽음은 1945년 4월 30일입니다.
청소년 시절 부모님의 여의고 화가를 희망해 대학시험을 봤으나 두 번 떨어져 건축일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바이른 연대에 지원해 군인이 되었고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입원했을 때 정치가의 꿈을 꾸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뮌헨에는 많은 혁명단체와 당이 활동했습니다.
그는 독일 노동당에 들어가게 되는데 당에서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사회주의를 내걸었습니다.
입당 후 그는 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0년에 당 이름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으로 바꾸는데 이게 나치스라고 합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수입을 올리는 행위를 없앴으며 기업은 국가에 귀속된다는 내용이 나치당 의 의견이었습니다.
세계 대공황이 불어닥친 1932년 독일에 실업자는 45%였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비난했으며 나치당에 눈길이 쏠리기 시작합니다.
나치당은 특히 농민과 중소기업층의 지지를 얻으며 1당으로 됩니다.
1932년 11월 선서 결과 자본가들과 보수세력들도 나치당을 지지합니다.
1933년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수상으로 됩니다.
그는 바로 총선거를 실시해 나치 당 의석을 과반수로 올려놓게 되며 국회에서 내각에 모든 권한을 갖게 됩니다.
대통령 사망 후 그는 수상 겸 대통령이 되며 총통이라 불려지며 독재가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 그의 유대인 학살 이유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의 유대인 학살 배경엔 많은 의견들이 있는데 학살 이유를 한마다로 정의하면 유대인이 독일의 경제와 언론을 장악하고 독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외래 민족이 국가경제를 장악하면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 경제가 매우 안 좋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독일 경제를 장악하고 독일의 경제 부흥에 도움이 되지 않아 그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는 친위대와 국가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동원해 반대파를 모조리 뒤져 가두게 됩니다.
이후 그는 준비해온 전쟁준비로 1939년 이탈리아와 손잡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본도 끼어들어 세 나라가 세계 정복에 꿈을 꾸게 됩니다.
그는 전쟁을 전후로 유대인을 체포한 뒤 강제 수용소에 보냈는데 수용소가 자그마치 900군데 이상이었고
그중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가장 악명이 높았으며 이곳에서 25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게 됩니다.
나치스는 학살 방법으로 생매장, 독가스를 이용했으며 생체실험 도구로 삼는 등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게 됩니다.
독일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다,
히틀러의 독일은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하다 1942년 러시아 패전을 고비로 패함에 징조가 나타나게 됩니다.
미국의 전쟁 참여와 더불어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독일은 패하게 됩니다.
♣ 히틀러의 죽음과 생존설 알아봤습니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들어와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 숨게 됩니다.
탄약이 떨어져 필연적으로 패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히틀러는 14시 30분경 에바 브라운과 함께 서재로 들어갑니다.
15;30분 총소리가 났고 잠시 뒤 부하인 하인츠링게와 보르만이 문을 열게 됩니다.
소파에 널브러진 시체 두구를 발견하게 되고 아내 에바 브라운은 시안화칼륨 캡슐을 먹고 히틀러는 독약과 더불을 권총으로 자살을 하게 됩니다.
시신은 벙커 비상구를 통해 옮겨졌고 구덩이에 넣은 뒤 가솔린을 뿌려 불을 붙이게 됩니다.
바로 양탄자를 가져와 태우면서 16시~18시 30분까지 태워집니다.
이후 5월 1일 라이도에서 히틀러의 사망 소식이 나오게 됩니다.
공식적인 히틀러의 사망 이야기입니다.
위에 이야기는 연합군이 조사해 밝혀진 내용으로 독일군 측 목격자 증언만이 유일합니다.
소련군이 히틀러의 유골을 발견한 건 5월 2일이었는데 미국, 영국, 연합군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 히틀러의 유골이 영성의 것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은 45년 당시에 파다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은 이런 의혹을 뿌려 서방국가들을 혼란스럽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2009년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고고학자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러시아 국가기록 보관소가 보관하던 히틀러의 두개골을
dna 검사를 했는데 이뼈는 40대 미만 여성의 것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두개골은 2000년 러시아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고 밝혔고 이교수는 오랜 기간 러시아 축에 조사를 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한끝에 승인을 받게 됩니다.
결과 발표전 많은 동료 연구진들과 상의했으며 검증도 거쳤다고 합니다.
바로 이 시점부터 히틀러는 여성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유 골이 20대 이상 40대 미만 여성의 유골이라 판명되었는데 히틀러의 사망 나이는 56세였습니다.
♣ 해외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해외 도피설은 유골 검사 전에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소련으로 가서 살았다는 거고 또 하나는 아르헨티나로 가서 농장을 운영했다는 겁니다.
남미는 나치 고위 관리들이 피난처로 많이 간 곳이라고 합니다.
에르 헨티 나는 그 당시 정부라면 히틀러를 받아줬을 가능성이 있으며 목격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고 합니다.
소련 도피설은 그가 전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탈린이 받았다고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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