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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성경

그리스도의 채찍질 당하심/ 매장 -카라바조

by 은총가득 2020. 10. 13.

 

채찍질 당하시는 그리스도 카라바조

 

 

 

카라바조(Carvaggio, 1571-1610)는 과격한 성격 탓에

1606528일에 로마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도망자의 신세가 된 그는 16069월부터 16077월까지 나폴리에 몸을 숨겼다.

나폴리는 당시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적으로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한 상태에서도 명작을 남겼다.

나폴리 신흥귀족 가문의 수장이었던 로렌조 데 프란치스(Lorenzo de Franchis)

새로 건축된 산 도메니코 마조레(San Domenico Maggiore) 성당의 가족경당을

장식하기 위해 카라바조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16075, 그는 도망 중인 카라바조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선금으로 290듀카트를 주고 작품계약을 맺었다.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고문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요한복음 191-3절이 그 배경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요한 19,1-3)

 

성경은 짧게 묘사했지만 이 장면은 르네상스 화가들의 단골 주제였다.

 

카라바조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 1485-1547)

1524-35년에 로마 몬토리오의 성 베드로 성당에 그린 같은 제목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구도와 영감을 차용해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도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처럼 주문자의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 작품에서 피옴보의 르네상스 형식주의에서 벗어나

 

등장인물과 배경을 최소화시킨 다음,

어둠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강조하고 있어

매너리즘 화풍의 콘트라포스트 자세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 기둥에 묶어 채찍질하려는 이들의 정지된 몸짓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게 했다.

 

이 그림을 압도하고 있는 예수님의 몸으로 쏟아지는 강한 빛줄기는

고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을 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이므로,

머리에서 약간의 핏방울이 흐를 뿐 아직 예수님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다.

예수님의 가시관 위에 있는 후광은 신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화가의 배려이다.

 

 

그러나 거칠어 보이는 고문하는 두 사람은 난폭하게 예수님의 몸을 비틀고 있다.

왼쪽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왼손으로 예수님의 머리채를 잡고 오른손의 채찍으로 예수님을 매질하려한다.

그의 목덜미와 팔뚝의 근육이 그의 폭력성을 배가시킨다.

 

오른쪽 남자는 밧줄로 예수님의 두 팔을 기둥에 묶으려고 강하게 잡아당기고

자기 오른발을 예수님의 오른발 종아리에 올려놓고 지렛대삼아 힘을 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난폭한 사람들의 거친 손과 발에 의하여 몸이 뒤틀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왼발이 앞으로 휘어져 나오고 있다.

 

예수님의 모습 어디에서도 고통을 초월한 하나님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왼발을 힘겹게 내딛고 있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의 발 앞에 있는 다른 한 남자는 허리를 굽혀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매질할 굵은 채찍을 새롭게 만들고 있고,

짙은 어둠의 배경은 절망적인 예수님의 고통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해준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빛과 어둠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고상한 흑백사진 같다.

 

그는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도 어둠과 한 줄기 빛으로

예술성과 종교의 가치를 모두 충족시키는 명작을 남겼다.

카라바조는 예수님의 고통스럽게 뒤틀린 자세를 통해

인간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을 우리에게 깊이 새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가시관을 씌움

카라바조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그리스도에게 가시관을 씌움>

1638년에 빈첸초 주스티니아니(Vincenzo Giustiniani, 1564-1637)소장품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제작 연도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비엔나 자연사박물관에서조차 1602-04, 혹은 1607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은 1600년대 초반에 그린 것으로 보는 이유는

빛의 사용이 더블린에 있는 <그리스도의 체포> (1603)의 대조되는 빛과 닮았고,

포츠담에 있는 <토마스의 의심> (1603)에서 보이는

부드럽게 흩어지는 빛의 중간 정도가 비슷하며,

고문하는 이들을 대각선 구도로 배치하고

예수님께서 고통을 조용히 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체라시 경당의 <십자가형을 당하는 성 베드로> (1601)와 주제가 같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군사들이 예수님께 십자가를 씌우고 조롱하는 장면으로

마태오복음 27,27-31 ; 마르코복음 15,16-20 ; 요한복음 19,2-3절이 그 배경이다.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

또 그분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마태 27,27-30)

 

카라바조는 이 작품에서도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과

고문을 가하고 있는 세 명의 군사만 그렸다.

빛은 벽을 타고 왼쪽 위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고문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예수님의 옷은 벗겨졌고,

군사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두 개의 갈대를 서로 엇갈리게 하여 예수님의 가시관을 강하게 조이고 있다.

그분은 임금이 왕홀을 손에 들 듯

군사들이 들게 한 갈대를 힘없이 오른손으로 들고 있다.

갈대는 검불 같이 허망한 세상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갈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머리에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광택이 나는 고급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는 그 당시 옷을 입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이제 유다인의 왕 만세.’ 하고 예수님을 조롱할 참이다.

예수님께 대한 조롱은 지금 여기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은 너무나 깨끗하게 빛나고 있다.

채찍질을 당한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세상의 죄악과 폭력으로 그분을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고통과 조롱이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에서도 인물들을 역동적이면서 사실 그대로 묘사했다.

예수님을 학대하는 군사들의 잔인함이 몸서리치게 극적으로 느껴지지만

예수님께서는 인내로 고통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고,

예수님처럼 고통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며,

고통과 기쁨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를 배워야겠다.

예수님을 비추는 빛은 황금 오후의 평온한 햇살처럼

예수님의 뼛속 깊이 풍성히 스며들고

 

그리스도의 매장 카라바조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1602년에 또 하나의 대형제단화를 그린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in Vallicella)에 걸릴 제단화였다.

 

이 성당은 이미 17세기부터 로마 중심부에서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영성을 대표하는 성당이었다.

 

1577년 성 그레고리오 13(Gregorius XIII, 재위 1572-1585) 교황은

1564년에 오라토리오 수도회(Oratorians)를 설립한

필립보 네리 신부(Philip Neri, 1515-1595)에게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을 하사했는데,

그는 옛 성당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새로운 교회라는 뜻의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 성당을 짓고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으로 사용하였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1602년에 또 하나의 대형제단화를 그린다.

이 작품은 <그리스도의 매장>으로

발리첼라의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in Vallicella)에 걸릴 제단화였다.

 

<그리스도의 매장>은 카라바조가 그린 작품 중에서

살아생전부터 극찬을 받았던 대형제단화이고,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방식에 의해서 성화의 구도를 보여준 명작이다.

 

카라바조는 <그리스도의 매장>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평범하고 가난한 로마 시민들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그림을 주문했던 오라토리오 수도회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의 고위성직자들로부터 카라바조의 작품 중 최고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빛과 어둠의 강한 대조로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하고,

사실적인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으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했으며,

그림의 오른쪽 위의 팔을 벌리고 있는 여인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시신에 이르기까지

대각선 방향으로 자연스럽고 결집력 있게 흐르고 있는 훌륭한 구성으로

모든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다.

 

축 늘어져 있는 예수님의 시신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체감을 느끼게 해주고,

맨 아래 구석에 있는 식물은

황폐한 환경에서도 새 생명이 돋아날 수 있는 부활을 암시한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예수님의 시신을 염했던 두툼한 석판 위에 있다.

석판의 날카로운 모퉁이가 보는 이들 쪽을 향하고 있어,

그리스도의 죽음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현재 이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축 늘어진 오른팔의 손가락으로 석판을 가리키고 있어,

당신께서 바로 교회의 머리 돌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이 사건이 제대 위에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제대를 돌로 꾸미거나 적어도 성석을 제대에 놓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돌이고,

그 제대 위에서 십자가의 희생제사가 재현되기 때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고개를 숙인 채

오른손으로 흰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닦으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발을 만지며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 작품에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는데,

그림 전체의 극적인 구성효과를 위해 화가가 전통적인 위치를 변경한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는 얼굴에 주름이 많은 늙은 여인으로 묘사되었는데,

특히 흰색과 검푸른 베일로 된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쳐

예수님의 고통을 끌어안으려는 것과 동시에 온 세상을 포옹하려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성모님 앞쪽에는 사도 요한이 다른 남자와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힘겹게 돌무덤으로 옮기고 있다.

축 늘어져 무거워 보이는 예수님의 시신을 받치고 있는 요한은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를 손가락으로 벌리고 있다.

 

카라바조는 벌어져 있는 상처를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을 옮기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38-40)

 

그래서 어떤 학자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청한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니코데모라고도 한다.

 

아무튼 그들이 누구든 간에 그들은 모두 바리사이 출신 부자로 알려졌지만

카라바조는 겸손을 상징하기 위해 검소하게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고,

그를 움푹 패인 그림자 진 눈가의 주름살과 울퉁불퉁한 거친 다리,

또 시신이 무거워 애써 들고 있는 듯 발에 굵게 솟아오른 힘줄을 지닌 서민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예수님의 두 다리를 들고 관람자들을 애원하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는 깍지 낀 두 팔을 내밀어 관람자들에 예수님의 시신을 맡기면서

이제는 당신들이 예수님의 몸을 모실 차례요.’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출처] 카라바조|작성자 말씀과 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