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가을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가을의 기도 / 이해인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 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언어가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맑고 담백하고 겸손하길 원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맑고 고운 말씨로 기쁨 전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9월의 기도 / 강이슬
언뜻 스치는 한줄기 바람이
홀로 새벽을 깨울 때
텅 빈 가슴 내밀어
서늘한 기운으로 부풀게 하소서
한 여름내 무성했던
짙푸른 상념의 잎사귀들
가을빛 삭힌 단풍이게 하시어
그 빛깔로 내 언어를 채색하소서
숨가쁜 땡볕의 흔적
길게 늘어진 그림자 추슬러
하늘거리는 햇볕 아래
알알이 고개 숙인 열매이게 하소서
저녁 풀벌레 소리
서늘한 여운으로 숲속에 들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
국화꽃 잎 위에 이슬로 내리게 하소서
서러운 지난날의 기억들
해거름 석양이 드리울 제
노을빛 그리움으로 번지어
빈 들녘에 피어나는 연기 되게 하소서
9월의 기도 / 문혜숙
나의 기도가
가을의 향기를 담아내는
국화이게 하소서
살아있는 날들을 위하여
날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한쪽 날개를 베고 자는
고독한 영혼을 감싸도록
따스한 향기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시작이
당신이 계시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길목이게 하소서
세상에 머문 인생을 묶어
당신의 말씀 위에 띄우고
넘치는 기쁨으로 비상하는 새
천상을 나는 날개이게 하소서
나의 믿음이
가슴에 어리는 강물이 되어
수줍게 흐르는 생명이게 하소서
가슴속에 흐르는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마른 뿌리를 적시게 하시고
당신의 그늘 아래 숨쉬게 하옵소서
나의 일생이
당신의 손끝으로 집으시는
맥박으로 뛰게 하소서
나는 당신이 택한 그릇
복음의 사슬로 묶어
엘리야의 산 위에
겸손으로 오르게 하옵소서
가을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녙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녁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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