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음의 영성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깊이다.
속도를 따라 움직이는 시대 속에서 속도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영혼은 지나치게 빠른 것을 싫어한다.
영혼은 느린 것을 좋아하고, 깊은 것을 좋아한다.
속도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속도는 불안감을 준다.
속도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속도는 우리를 조급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깊음의 세계는 질서가 있다.
안정감이 있다.
평화롭다. 고요하다.
깊음의 세계는 자족의 세계다.
깊음의 세계는 영적인 부요의 세계다.
그런 까닭에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깊음의 영성은 깊은 깨달음을 준다. 깊은 맛을 준다.
고난을 견디는 마음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견뎌야 할 때는 견뎌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견딤이 없이는 내일의 쓰임이 없다.
우리는 견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인생의 승리는 꾸준한 견딤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견딤의 기간이 쓰임의 기간을 결정한다.
새 변화 속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3)
불처럼 역사하시는 성령님
출애굽기 3:1-5
들어가는 말: 성령님은 불처럼 역사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 3:11하)
1. 하나님의 사람은 __광야__ 학교에서 만들어집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 2:15)
“하나님은 광야에서 홀로 있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육의 힘을 빼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목양을 통해 한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인기보다 더 중요한 인격을 연마케 하십니다.”
2. 하나님은 불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2)
1) 성령님의 불을 체험할 때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2) 성령님의 불을 체험할 때 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행 7:34)
3) 성령님의 불을 체험할 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게 됩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 3:5하)
4) 불을 체험할 때 육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큰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불은 어두움을 밝히는 능력입니다.
*불은 정화하는 능력입니다. *불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입니다. *불은 사랑을 불러오는 능력입니다. *불은 눈을 열어주는 능력입니다. *불은 초자연적인 힘을 공급해 주는 능력입니다.
3. 하나님은 일상 훈련에 충실한 사람에게 불을 부어 주십니다.
1) 하나님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2) 하나님은 지루한 훈련을 잘 견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3) 하나님은 일상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에게 불을 부어 주십니다.
4) 하나님은 평범한 것을 사용해서 비범한 일을 이루십니다.
“먼지도 태양 볕이 임하면 빛을 발한다.” 괴테
“하나님은 오래된 떨기나무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십자가에 불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2-3).
자족하는 영성
지금 우리는 어려운 때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 배워야 할 영성은 자족하는 영성입니다. 자족은 스스로 넉넉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넉넉하다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족하기 위해서는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비교하면 자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하면 교만해 지거나 비참해집니다.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만나면 우쭐해지게 되고, 나보다 더 풍족한 사람을 만나면 비참해집니다. 반면에 스스로가 자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족의 영성은 저절로 임하는 영성이 아닙니다. 자족의 영성은 학습하고 훈련하면서 우리에게 형성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빌 4:11). 자족의 영성은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날마다 훈련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살만큼 살았으니까 자족할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J. C. 라일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두 가지는 젊은이의 겸손과 노인의 만족이라는 말은 무서울 정도로 매우 정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의 만족은 당연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라일은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든 어른들 가운데 자족하는 분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할 때 그의 나이가 지긋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옥중에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몬 1:9)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수명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바울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족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통해 자족의 영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자족의 영성은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합니다(빌 3:8).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정말 알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충만이 담겨 있습니다. 토저는 “새신자들에게 가능한 빨리 가르쳐야 할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둘째, 자족의 영성은 욕심을 줄이는 것입니다. 기대를 조금 낮추는 것입니다. 욕망을 제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욕망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욕심이 되고 탐심이 될 때 죄를 짓게 됩니다. 자족의 비밀은 절제에 있습니다.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늘 경계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탐심은 지나친 욕심입니다(골 3:5). 탐심의 비극은 남이 소유한 것을 부러워하다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소중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가운데 마지막 열매는 절제입니다(갈 5:23). 절제는 욕심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욕심을 채움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욕심을 절제함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적게 탐하는 것,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귀히 여기고, 그것을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 자족의 영성입니다.
셋째, 자족의 영성은 적응을 잘하는 것입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빌 4:12, 공동번역).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경을 초월할 줄 알았고, 적응하는 데 탁월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변화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적응력입니다.
넷째, 자족의 영성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알았습니다(롬 8:28). 그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경이로운 손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경이로움 속에 살았고, 경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G. K. 체스터턴은 “감사는 가장 고귀한 생각이다. 감사하는 것이 곧 행복이고, 그 행복은 경이로움을 느낄 때 더 커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눈이 열리면 일상 속에 감추인 경이로움을 보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멈춰 서서 감탄하지 못하고, 경이로움에 황홀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눈은 감겨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눈이 열립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성령 충만을 늘 간구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통해 자족하는 삶을 사시길 빕니다.
씨눈이 자라기 위해서는 껍질이 벗겨져야 한다.
껍질이 벗겨지는 과정은 아프다.
그러나 그 과정을 잘 견뎌내야 씨앗 속에 감춰진 부드러운 생명이 자라게 된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꾸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
회개의 눈물이 필요하다.
회개의 눈물을 통해 딱딱한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 된다.
비둘기처럼 역사하시는 성령님
창세기 8:6-12
들어가는 말: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3:22)
1.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창 8:10-11)
1)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8-9)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 11:7)
2)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3) 하나님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18)
4) 성령님은 새 창조, 새 시작, 새 역사와 함께 하십니다.
2.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1) 성령님의 사랑은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랑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 10:16)
2) 성령님의 사랑은 비둘기처럼 온유한 사랑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3) 성령님의 사랑은 비둘기처럼 화목한 사랑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갈 5:22상)
4) 성령님은 비둘기의 눈빛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1:15)
나가는 말: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또한 감람나무의 기름처럼 역사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
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눅 4:18)
유연함을 추구하는 영성
변화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유연함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 변화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오래된 규칙이 무
너졌습니다. 또한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슨 일이 전개될지 모르는 혼돈 과 불안이 우리 현실
입니다. 《사피엔스》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발 하라리는 “오래된 규칙은 산산조각 나고 새로운 규칙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활동이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당에 모여 예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악수를 하면 안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연해야 합니다.
유연함은 부드러움 입니다. 경직되어 있지 않은 것이 유연함입니다. 유연함이란 고집스럽지 않은 것입니
다. 완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연함이란 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다양하게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유연함은 적응력입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적응을 잘해야 합니다. 적응을 잘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적응
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아야 새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남은
자” 사상이 있습니다(롬 9:27, 11:5). 남은 자란 하나님이 남겨 놓은 자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새 미래를
위해 남겨 놓은 자입니다. 남은 자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유연합니다. 환경에 잘 적응할 줄 압니다. 남은 자들
은 어떤 환경에도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빌 4:11-12).
유연하다는 것은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의 사계절처럼, 변화는 늘 우리 곁에 있
습니다. 유연하다는 것은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을 잘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어
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유연한 자세가 아닙니다. 유연한 자세는 어
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런 일은 내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
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면 직면한 사건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유연하다는 것은 곡선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직선으로 가는 길은 속도가 빠릅니다. 속도가 빠르
다 보면 과속하게 됩니다. 질주하게 됩니다. 브레이크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빠르지만 잘못하
면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직선이나 속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속의 위험을 말씀드리는 것입
니다. 반면에 곡선으로 가는 길은 조금 속도가 느립니다. 길을 가다가 막히면 우회를 하게 됩니다. 필요하면
조금 물러났다가 다시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곡선으로 가는 길이 느려 보이지만 곡선으로 가는 길이 안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요한 목표를 향해 서서히 꾸준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조금 느려 보이지만 기본
에 충실해야 합니다. 거듭 기본을 다지며, 꾸준히 내공을 쌓게 되면 어느 날 임계점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이든 너무 서두르거나 조급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체로 서두르는 사람들이 사기(詐欺)를 잘 당합니
다. 잘 속습니다. 서두르게 만드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서두르게 만드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서두
르게 돈을 투자하라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본 의도를 감추고 서두르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빨리 벌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건전한
투자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투기(投機)를 막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신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농부
의 마음입니다(요 15:1). 농부는 씨앗을 심기 위해 땅을 기경하고, 기경한 후에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을 뿌
린 후에 씨앗이 자라기를 기다립니다. 뜨거운 여름 동안에 인내합니다. 곡식이 무르익고, 과일이 무르익는
가을까지 기다립니다.
유연하다는 것은 힘들 때도 고요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곡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미
소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경을 초월한 주님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8:28). 살포시 미소를 지으면 눈과 입술이 곡
선이 됩니다. 그때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생각이 유연해집니다. 몸도 유연해 집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유연해집니다. 가장 오래 가는 것은 유연한 것입니다.
유연함의 영성은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성육신은 유연함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
간의 몸을 입고 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에 사시던 분이 초라한 구유에 적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박하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
시고 십자가에 적응하실 만큼 겸손하셨습니다. 온유하셨습니다. 유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유연함의 절정은 용서에 있습니다. 유연함의 영성을 추구함으로 예수님
을 닮아가도록 합시다.
새 변화를 위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용기
마태복음 4:17-22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때에
새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1. 예수님은 새 변화를 창조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1) 예수님은 변화를 환영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2) 예수님은 일터의 현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3) 예수님은 거룩한 불만족을 가진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요 1:41-42상)
“거룩한 혁명을 위해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체제에서 ‘거룩한 불만’을 창출해내야 한다.“ (마이클 프로스트 & 엘렌 허쉬,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SFC)
2.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반응할 때 새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0)
1)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시고 부르십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2)
2)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3) 예수님의 부르심은 풍성한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비울 때 풍성해 집니다.”
“나눌 때 풍성해 집니다.”
“버릴 때 풍성해 집니다.”
“베풀 때 풍성해 집니다.”
“움켜쥔 손을 펼 때 풍성해 집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용기는 복된 용기입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마 4:22)
“나는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배를 몰아가야 할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자 메이 알코트, 미국의 소설가 “고기 잡는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연약하고 자주 흔들리던 사람이 반석 같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결핍의식 속에 살았던 사람이 풍부의식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지역적인 사람이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명의 사람이 영원히 존귀케 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미닭처럼 역사하시는 성령님
창세기 1:1-5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성령님과 함께 새 변화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1. 성령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30)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 33:4)
2. 성령님은 어미닭처럼 품어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1) 성령님은 따뜻하게 품으십니다.
2) 성령님은 진동하며 품으십니다.
3) 성령님은 두근거림으로 품으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6-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4)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축복이 됩니다. *혼돈은 질서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14:33상)
*공허는 충만으로 변화됩니다. *흑암은 빛으로 변화됩니다. 나가는 말: 성령님과 함께 다시 시작하십시오.
새 변화를 위해 추구해야 할 능력
사도행전 1:4-8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새 변화를 창조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 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9)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6-8)
2. 성령님은 새 변화를 창조하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1)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 위에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눅 24:49)
첫째, 성령님은 새 시대로 들어가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주는 능력입니다.
셋째, 성령님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넷째, 성령님은 땅끝까지 뻗어 나가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다섯째, 성령님은 좌절된 꿈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행 2:17).
2)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4:17)
첫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하십니다(엡 3:16).
둘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하십니다(갈 5:22-23; 갈 4:19).
셋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고요한 마음을 가꾸게 하십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4)
넷째, 성령님은 우리 안에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 사람을 키우게 하십니다(골 1:28-29).
다섯째, 성령님은 간구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나가는 말: 성령 충만을 늘 갈망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2:3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3).
회복력의 세 가지 비밀
우리는 어느 때보다 회복의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복이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회복력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회복력의 세 가지 비밀을 사도 바울이 전해준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상). 우리가 잘 아는 이 말씀 속에 회복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비밀은 선택에 있습니다.
첫째, 항상 기뻐하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권면합니다. 항상 기쁨을 선택하십시오. 선택은 결과를 낳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선택은 가능합니다. 행복과 기쁨은 다릅니다. 행복은 환경에 의해 결정됩니다. 반면에 기쁨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상)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할 때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환경은 보통 사람들이 볼 때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감옥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가 항상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을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긴 지혜 때문이었습니다. 고난 속에 감추인 보물을 볼 수 있는 통찰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고통을 삶의 한 부분으로 여깁니다,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삶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을 극복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런 까닭에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롬 5:3; 약 1:2-4).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선택하십시오. 따뜻한 미소를 짓도록 하십시오. 얼굴을 찡그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미소로 얼굴을 펴도록 하십시오. 얼굴을 펴게 되면 마음의 주름도 펴집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처럼 웃을 일이 있어 웃는 것이 아닙니다. 웃다보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라고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힘들어 하는 자신을 꼭 껴안아 주는 것입니다. 아파하는 자신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법을 터득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입니다. 호흡이 멈추면 죽습니다. 호흡은 생명의 기운입니다. 기도는 호흡처럼 소중합니다. 그런 까닭에 호흡처럼 기도를 멈추면 안 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절은 죽음입니다. 반면에 연결은 생명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충만한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도관(導管)과 같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초점 맞추기입니다.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면 자꾸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좌절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때 소망을 품게 됩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홍자성은 “오래 엎드린 새가 높게 난다”고 말했습니다. 오래 엎드린 새가 높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오래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높이 비상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할 때 비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바울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범사는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일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범사 감사란 세상에서 말하는 나쁜 일, 힘든 일, 고통 스러운 일 까지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런 일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범사 감사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으신 충만한 삶의 비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롬 8:28). 모든 것을 합력하여 역전의 드라마를 펼쳐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틴 셀리그만은 감사를 통해 많은 사람을 치료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6개월 동안 하루에 3가지씩 감사 내용을 노트에 기록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감사 내용을 기록할 때는 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지를 꼭 쓰게 만들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에 하루에 3가지씩 감사내용을 기록한 사람들은 놀랍게 회복되었습니다. 감사는 치유의 능력입니다. 회복의 능력입니다. 감사는 기적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세 가지 비밀을 실천함으로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빕니다.
내면의 부요를 추구하는 영성
내면의 부요를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 이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기보다 내면의 부요를 추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밀물의 때가 있고 썰물의 때가 있습니다. 부요할 때도 있고 가난할 때도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썰물의 때와 같습니다. 썰물의 때는 조용히 그 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썰물의 때가 지나면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동안 배운 내면의 부요를 추구하는 영성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내면의 부요는 자족하는 데 있습니다.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빌 4:11). 자족하는 법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빌 4:12). 자족의 비결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어려운 환
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족의 비밀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작은 행복, 작은 즐
거움, 소박한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비교를 멈추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자족할 수 없습니다. 잘못비교하면
비참해 집니다. 때로는 교만하게 됩니다. 자족의 비결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 남아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족은 만족입니다. 자족은 충만한 느낌입니다. 자족의 반대는 불만입니다. 불만을 가질 때 불평
하게 되고, 불평할 때 불행하게 됩니다. 자족을 선택하십시오.
둘째, 내면의 부요는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하면 마음이 부요해집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복
과 은혜를 세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이 받은 복을 세워보는 것이지만 질투는 다른 사람의 받은 복을 세워보는 것입니다. 감사가 중
요한 것은 감사가 겸손의 덕을 쌓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
혜로 주어진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영성 훈련 중에 아주 소중한 훈련입니다. 날마다 감사한 일들을 표현하십시오. 감사 노트를 기록
해 보십시오. 감사하게 되면 감격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되면 좋은 점을 보게 됩니다. 감사하게 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감사하게 되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는 좋은 것을 끌어오는 자석과 같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가 감사입니다(엡 5:18-20). 감사
의 비결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데 있습니다.
셋째, 내면의 부요는 단순하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최근에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미니멀 라이프는 작은 것, 단순한 것을 행복의 조건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분들은 쓸모없는 것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쓰지 않는 것은 감사함으로 나누어 줍니다. 너무 큰 것,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단순한 삶을 추구합니다. 여백을 즐기고, 적게 욕망함으로 자족할 줄 압니다. 소유보다 자유를 추구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존재가 넉넉해지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넷째, 내면의 부요는 나눔에 있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인색하게 살아가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절약은 중요하지만 인색한 마음은 불행한 마음입니다. 진정한 부요는 나눔에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져야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나누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핍절합니다. 많이 가졌지만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핍의식 때문입니다. 결핍의식을 갖게 되면 자꾸 쌓게 됩니다. 늘 불안합니다. 자신이 쌓아 둔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경계합니다. 스스로 벽을 쌓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 것을 빼앗아 갈 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눌 줄 아는 사람은 풍부의식을 갖고 삽니다.
풍부의식은 하나님의 풍부하심에서 나온 의식입니다(빌 4:19). 하나님의 부요하심에서 나온 의식입니다(고후 8:9). 또한 풍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움켜쥐는 삶보다는 나눔의 삶이 행복을 불러 옵니다. 나눔의 차원은 다양합니다. 돈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소중하게 배운 것, 깨달은 지혜, 그리고 칭찬을 나누어 주십시오. 무엇보다 복음을 나누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나누어 준 것과 하나님께 드린 것만 천국에 쌓인다고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내면의 부요는 성령 충만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 하나님께 소유된 사람은 진정한 부요 속에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입니다(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충만한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또한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개하고, 간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입니다. 선택할 줄 아는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부요를 선택하는 것이 복된 선택입니다.
마음의 응급조치를 하는 지혜
우리는 자가 격리를 강요받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가 격리는 서로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언컨택트(Uncontact)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접촉을 통해 사랑하고, 접촉을 통해 치유됩니다. 예수님과 접촉한 사람들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사람은 접촉을 통해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느낍니다. 접촉을 통해 교감하고 공감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합니다. 접촉은 우리 기억 속에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가 맛 본 것을 기억하듯, 우리는 접촉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접촉이 금지된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서로 손을 잡아 줄 수가 없습니다. 서로 껴안아 줄 수가 없습니다.
자가 격리의 현실 때문에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코로나 블루란 “코로나 19”와 “우울감”(blue)의 합성어입니다. 코로나 블루란 코로나 때문에 생긴 정서적인 문제를 의미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두려움, 염려, 불안, 분노, 그리고 우울증 등의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쉽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분노가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몸의 건강과 함께 마음의 건강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몸이 다칠 때만 응급조치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다칠 때, 정서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 응급조치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두렵고 불안해질 때 응급조치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떻게 마음의 응급조치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잠시 멈추어 생각하십시오. 잠시 멈춤이 중요합니다. 잠시 멈추고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십시오. 감정은 자주 바뀝니다. 그래서 감정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때로는 실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림자만 보고 너무 놀라는 데 있습니다. 감정을 자세히 바라보면 감정의 실체가 보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의 원인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감정의 문제는 잘못된 기대에서 생깁니다. 비현실적인 생각에서 생깁니다. 잠시 멈추어 감정을 바라보면 감정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좋지 않은 감정을 인식한 후에 그 감정을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생각을 바꾸는 훈련을 하십시오. 감정의 뿌리는 생각에 있습니다. 두려운 생각을 하면 두려운 감정이 생깁니다. 염려하는 생각을 하면 염려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반면에 우리가 믿음의 생각을 품게 되면 담대한 감정이 생깁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감정이 생깁니다. 생각을 선택하고 바꾸는 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자신의 생각은 스스로 선택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는 것처럼, 생각의 채널을 바꾸는 훈련을 하십시오. 생각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암송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 호흡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곧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에게 들어갈 때 생령이 되었습니다(창 2:7). 호흡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님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은 호흡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호흡 기도를 하는 중에 성령님과 교제하십시오. 때로는 긴장을 풀고 심호흡만 몇 번 해도 마음이 차분해 집니다. 감정이 누그러집니다. 분노가 멈춥니다. 그 정도로 호흡이 중요합니다. 운동하는 분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호흡입니다. 호흡을 깊이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십시오.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넷째,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십시오. 하나님께 따뜻한 미소를 선물해 드리십시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 얼굴만 펴지는 것이 아니라 움츠린 마음이 펴집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꼭 껴안아 주십시오. 자신을 껴안아 주면서 괜찮다고 말해주십시오.
조용히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산책을 할 때 좋은 호르몬이 나와 우리 마음을 치유해 줍니다. 제가 드린 처방은 응급처치입니다. 문제가 너무 깊어지면 정신 신경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 가십시오. 또한 훌륭한 크리스천 상담자를 만나 상담을 받으십시오. 필요하다면 약을 처방 받아 복용하십시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정서적인 문제는 제가 알려 드린 응급조치로 해결됩니다. 제가 경험적으로 실험해 본 것입니다. 특별히 짧은 한 절의 성경 말씀을 하루 종일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해 보십시오. 놀라운 평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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