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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by 은총가득 2020. 7. 29.

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

 

 

구약성서 창세기에 고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건설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전설의 탑인 바벨탑은 하늘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욕망과 도전의 상징으로 여겨져 부정적인 신화로 그려져 왔습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바벨탑 위대한 바빌론]을 통해 이 바벨탑이 고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 그 비밀을 알아보았습니다. 내용이 꽤 긴데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이야기들이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올려봅니다. 전반부는 바벨탑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아본 것입니다.

 

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위대한 바빌론

 

기원전 597년 지중해 연안 예루살렘에 갑자기 수만 명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거대한 투석기까지 준비한 당시로서는 최고의 정예병들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병사들은 높이 12미터의 성벽 위에서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결코 이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인구 9만의 예루살렘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유대인들의 성소인 솔로몬 성전도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난 2600년 동안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수난사의 첫장면이다.

 

이른바 바빌론 유수는 전쟁에 패한 유대 왕 여호아킴을 비롯해 수많은 귀족과 관료들이 바빌론으로 압송돼 간 사건이다. 이때 포로들을 끌고 간 신바빌론의 왕은 성경에 느브갓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수십 일 후 압송돼 간 유대인들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 왕이 건설한 어머어마한 도시를 보고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빌론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건설된 유대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다. 도시를 둘러싼 18미터 높이의 성벽과 신의 상징들로 채워진 성문, 도시 내부를 관통하는 대로와 15만 명의 시민을 품고 있는 크고 작은 주택들, 거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조성된 정원도 있었고 하늘이 닿을 듯 뻗어 있는 거대한 탑도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마천루의 도시가 좋아보일 리 없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최악의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파괴하고 동족을 포로로 끌고 간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벨, 즉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에서 바벨탑은 신에 대적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완성될 수 없는 탑, 징벌받아야 마땅한 탑으로 묘사된다.

 

 

위 그림은 바벨탑의 교훈을 가장 잘 담고 있는 피테르 브뤼헬의 작품이다. 브뤼헬의 작품은 후기 중세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에 묘사된 바벨탑의 전형적인 예다. 물론 작품의 영감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한참 전인 기원전 400년대 이곳을 방문햇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것은 아직도 존재한다. 탑의 높이는 91미터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바벨탑은 중세 유럽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미지의 탑을 찾아 사막을 건너 바빌론이 있다는 오늘날의 이라크로 향했다. 그리고는 각기 자신이 본 것을 바벨탑이라고 전하면서 유럽 예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즉 18세기까지 여행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벽돌탑들을 성서 속의 바벨탑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바벨탑은 실제로 존재했을까? 다큐프라임 제작팀은 이라크 공군의 도움을 받아 그 진실을 추적해 보았는데, 아부다비를 출발한 지 약 30여 분 후 눈앞에 거대한 흙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라크 북부 사마라에 있는 이 탑은 탑 주위로 다섯 번이나 감아올려진 독특한 계단 때문에 흔히 달팽이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높이만 무려 52미터에 달한다. 그러나 이 탑은 바벨탑이 아니다. 지난 9세기 이슬람 압바스 왕조 때 건설된 말위야(Malwiya) 탑, 즉 이슬람 사원탑이다. 그런데도 과거 유럽의 모험가들은 종종 사마라에 있는 이 탑이 바벨탑일 것이라고 주장했고 유럽의 화가들은 그들의 주장과 성경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한때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번성했던 이라크 지역에는 수많은 석탑들이 존재하며 밝혀진 거대한 흙탑만 무려 58개다.

 

 

이곳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근처에 있는 초가잔빌(Choga Zanbil)에 있는 또 하나의 지구라트(Ziggurat)다. 기원전 1200년대에 지어진 엘람왕국의 신전탑니다. 지구라트란 고대 메소포타미어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집>이라는 뜻으로, 즉 하늘에 있는 신의 가르침을 받아내는 아주 성스러운 신전을 의미한다. 때문에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최고의 기술력들이 동원되었다. 아치는 물론 출입을 통제하는문도 설치되고 그 내부에는 건설자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이라크에 있는 58개의 지구라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바그다드 외곽의 아칼쿠프(Aqur Quf) 지구라트는 기원전 1500년경에 건설되었다. 3000년 넘게 비바람에 풍화가 되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높이만도 57미터에 이르는데, 이로 인해 이 탑 역시 사마라에 있는 말위야 탑처럼 유럽인들에게 종종 바벨탑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이라크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박물관장 팔라 알주바위 박사는 “과거에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이 이 아칼쿠프 지구라트가 바벨탑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었다. 그러나 독일 동방학회는 과학적 유적 발굴 이후 정확한 바벨탑의 위치는 우르, 아칼쿠프, 보르시파 지구라트가 아니라 바빌론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바벨탑이 바빌론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로베르트 콜드웨이 박사다. 지하 20미터에 묻혀 있던 바빌론의 역사는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의 제자를 통해 지상으로 올라왔다.

 

 

1899년 이곳에 도착한 콜데바이는 13년 동안 발굴을 했고 바빌론의 성문이었던 이슈타르(Ishtar) 문과 왕궁, 성벽 등을 발굴해 냈다. 그 동안 전설로만 내려오던 바빌론을 실제 역사 속으로 불러낸 것이다. 이곳이 바로 땅속 22미터 속에서 발굴해 낸 이슈타르 문이다. 전쟁의 신 이슈타르 신의 이름을 딴 이 관문은 바빌론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진입로였다.

 

 

당시 청색 벽돌 위에 수많은 신상(神像)들이 새겨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콜데바이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바벨탑만큼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주민들이 땅속에서 끊임없이 벽돌을 채취해 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콜데바이는 이곳이 바벨탑의 자리일 거라고 직감했다. 콜데바이가 바벨탑의 자리라고 확신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제작자들이 기대를 안고 찾아간 그곳은 곳곳에 잡풀만 무성한 작은 웅덩이에 불과했다. 도저히 바벨탑의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곳, 더구나 이곳은 이슈타르 문이나 왕궁이 있는 바빌론 중심지와도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다보자 전혀 달랐다.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건물터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팔라 알주바위 박사는 "독일의 유적발굴단은 제1차 세계대전 초까지 바벨탑이 있던 자리를 발굴했는데 바벨탑의 기단은 네모난 형태의 것으로 확인됐다. 너비와 높이는 각각 91.5미터였다. 이들이 복원한 바벨탑 그림은 실제에 가장 가까웠고 이전의 유럽인들이 그린 그림들과는 매우 달랐다"고 말했다.

 

 

일찍이 그리스의 학자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의 크기에 대해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각각 180큐빗이라고 했다. 이것을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각각 90미터가 된다. 이는 콜데바위가 주장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불과 1.5미터밖에 나지 않는다.

 

 

콜데바이가 자신이 발견한 유물을 가지고 돌아온 독일 베를린 페르가몬박물관 소장고에는 지금도 콜데바이의 발굴 연구기록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온갖 신상들로 채워진 바빌론 이슈타르 문에 대한 각종 기록은 물론 여전히 미스터리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 공중정원, 성벽과 왕궁, 신전을 비롯해 바벨탑에 대한 크기와 모양에 대한 기록도 있다. 위 그림이 콜데바이의 기록을 근거로 복원해 낸 바벨탑이다.

 

 

그런데 바벨탑에 대한 또 다른 근거가 프랑스에 있다. 에사길 타블렛이다. 바벨탑의 상세한 크기가 기록된 이 점토판은 바빌론에 있던 신전 에사길에서 발굴해 낸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교과서였다. 고고학자이자 프랑스 아시리아학회 에르베르 르퀴롤 박사는 “에사길 타블렛은 공식적인 발굴을 통해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도굴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영국학자들이 이것을 봤는데 그 뒤로 다시 사라졌다가 이후 한 프랑스 개인 수집가가 이 타블렛을 수집했고, 1913년 프랑스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해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종이가 없던 바빌론 시대 모든 교과서는 점토판이었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 바벨탑에 대한 크기가 문제로 출제돼 있었다. 그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미터였다. 이로써 콜데바이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발굴지와 헤로도토스의 기록, 그리고 에사길 점토판의 기록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이것이 언제 건설됐으며 정말로 바벨탑인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문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근거가 최근 영국 런던대학의 한 교수로부터 제기되었다. 고고학자인 런던대학 앤드류 조지 교수에 따르면 “15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비석이 있다. 이것의 하단부는 많이 손생돼 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내용이 있고 지금은 노르웨이에 있다. 이 비석은 많이 손생됐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관한 진짜 기록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한다.

 

 

 

 

바벨탑의 의문을 풀어줄 결정적 증거인 이 석비에는 놀랍게도 탑의 모양은 물론 건설시기와 왕의 이름까지 들어 있었다. 폭 25센티미터, 높이 47센티미터의 작은 현무암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문양과 글씨들이 돋을새김으로 빼곡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측 상단에 그려진 그림은 누가 봐도 탑의 문양이고 정면에 나 있는 계단을 비롯하여 모두 7층으로 구성된 석탑임이 분명하다.

 

 

이를 그 동안 에사길 타블렛을 근거로 상상해 본 탑과 비교해 보면 그 형태에서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에 들어 있는 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정체가 역시 그 석비 좌측 상단에 영문으로 짧게 새겨져 있다.

 

 

에 테맨 앙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신 마르득이 거주하는 신전을 의미한다. 에 테멘 앙키는 수메르어이며 바빌론 사람들이 바빌론의 신전탑에 붙인 이름이다. 수메르어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 수메르어가 고급언어였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지쿠라트라고 새겨져 있고 맨 하단에 있는 카 딩기 라키는 수메르어로 바빌루라고 읽는다. 즉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 있던 거대한 신전탑, 즉 바벨탑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 석비에는 바벨탑의 건설자도 우측 상단에 그려져 있다. 바빌론의 왕을 상징하는 원뿔 모양의 왕관을 쓰고 서 있는 이 사람은 바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다. 이 비석을 통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벨탑을 만들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봉리브르>

 

첫째로 벨사살 왕의 역사성

 

다니엘 5장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이 큰 잔치를 베푼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 가들은 벨사살 왕이 과연 역사적으로 실제 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의심해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였으며, 바벨론 왕의 역대 왕들 중에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니엘서 5장에서 만 언급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었으며 바벨론 제국 멸망 당시 그 가 바벨론을 통치한 왕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분명히 증거되었습니다.

 

벨사살이 가공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임을 확증된 것은 1854년 한 영국 영사 가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가 옛 바벨론의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호신 인 ‘달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우르에 세운 신전의 폐허 속에서 몇 개의 조그만 점토 기둥들을 발 굴함으로써 였습니다. 그 기둥들에는 가로 세로 10cm 정도의 정방형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나보니두스와 그의 큰 아들의 건강과 장수를 신께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라 했습니다. 한편 1854년 이후에 벨사살에 대한 바벨론의 문헌들이 더 발견 되었는데, 그 때마다 벨사살의 왕자 또는 왕의 아들로만 언급되었고, ‘왕’으로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비문에서 벨사살이 비록 법적으로 왕위를 계승 받지는 못했지만 그 부친 나보니 두스와 바벨론의 공동 섭정을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의 최고신인 ‘벨’ 또는 ‘말둑’이라 불리우는 신보다 다른 도시 즉 하란과 우르의 수호신인 ‘달의 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괴짜 나보니두스 왕은 BC 555년에 등극한 지 3년이 되던 때부터 실제 통치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맡겨 버리고 바벨론을 떠나 아라비아의 테이마(Teima) 라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그가 바사 왕 고레스 2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실의에 빠져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이런 사실이 다니엘이 어떻게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즉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정식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첫째이고 벨사살 자신은 섭 정왕으로서 둘째 가는 자리에 있었고 따라서 다니엘에게 나라의 셋째 가는 자리를 줄 수 밖에 없 었던 것입니다. 한편 바벨론 제국의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인 BC 539년에 나 보니두스가 바벨론으로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벨사살에게 실제 왕권을 내어 주지 않 았습니다. 다니엘서5장에서 벨사살이 메대바사 연합군에게 죽게 되고 나보니두스 왕은 메대바 사 연합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에 다니엘서의 벨사살이 다니엘이 허구의 인물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 고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록 바벨론 여러 문헌에 벨사살이 법적 인 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고학 자료들은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음을 분명히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기록 의도가 역사적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반대로 역 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성경 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확 증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벨사살의 연회와 하나님 모독사건 (1-4)

 

이제까지 우리는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의 바벨론 왕실에서의 성장 배경, 제 2-4장은 느부갓 네살 왕 통치 당시의 주요 사건들과 왕의 꿈을 통한 간접적인 묵시들을, 그리고 본 제 5장은 느 부갓네살왕이 죽은지(BC 562년) 약 23년 후인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BC550-539년)의 통치 말기에 있었던 신비한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씨를 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느부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느부갓 네살(BC 604-562), 그이 아들 에윌므로닥 (또는 아벨말둑BC 562-560), 에윌므로닥은 살해 됩니다.

 

다음 왕으로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네르갈 사레셀이 왕이 됩니다. 네르갈 사레셀(또는 네 리 글리솔BC 560-556), 다음으로 네르갈 사레셀의 아들 라보로 소알후드(또는 라바시 말둑 BC556)는 왕이 된지 8개월 만에 암살되어 죽고 느부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 두스(BC 556-539년)가 왕이 됩니다. 나보니 두스의 아들이 벨사살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 할아버지입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Nabonidus and Belshazzar, R. P. 도허티, 1929년)이라는 책에서는 벨사살의 어머니는 니토크리스였고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2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할아버지였던 셈입니다.


고대 근동 국가에서 왕들이 잔치를 배설하고 귀족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베푼 연회는 정상적인 연회가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방탕한 것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벨사살이 연회를 열고 있을 당시는 바사와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을 다 점령하고 수도인 바벨론 성을 2년 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벨사 살 자신이 죽게 될 그런 급박한 상황에 잔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생 명과 나라의 존폐가 경각에 달려 있는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온 세상에 드 러내려고 한 듯이 술에 취하고 방탕하는 비 정상적인 대 연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귀인 일천명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합니다. 멸망해 가는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이 정도의 연회를 열 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에 의하면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각양의 좋 은 것들을 엄청나게 쌓아 두었기 때문에 바벨론 성이 포위되더라도 20년은 견딜 수 있었다고 합 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이미 고레스에게 계속 패하여 수도인 바벨론 성까지 밀려 포위되어 있 었습니다. 패전이 거듭되면서 타지에서 바벨론 성으로 도피해 온 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벨론이 마지막까지도 그런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 니라 그 많은 사람들 중 왕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간언하는 자가 전혀 없었을 만큼 바벨론의 상류 층 전체가 패역하고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가 멸망할 시기가 가까울 때에 자연 스럽게 나타나는 말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벨사살이 잔치를 할 때에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로 술을 마시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 것 은 술에 취해 취기로 한 행동이 아니라 벨사살이 불경을 저지른 핵심 원인은 부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증거된 여호와가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자신의 권세가 절대적이며 고레스의 공격으로부터 바벨론을 얼마든지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하기 위 한 지극히 교만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 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4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여기서 금은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이란 바벨론의 온갖 잡신 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이 잡신들을 찬양하며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고성방가하며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는 광란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벨사살과 일천의 귀인들이 이럴 때에 왜 하필이면 하나님 전의 기명들을 가져 오게 해서 술을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고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탄 은 개인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려고 발광을 합니다.

 

셋째로 왕궁 벽에 나타난 신비한 손가락(5-16)


‘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 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그 때에 무리가 술에 취해 성전 기명 모독, 음주, 향락 등 점차 광적인 향락 상태로 고조되어 가던 그들의 악행이 우상숭배로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궁극적 원인이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한 데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의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왕이 얼굴 빛이 변하고 번민하여 넓적다리가 녹는 듯 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칩니다. 세상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촛대 맞는 편 흰 분벽 위에 있는 글을 촛불로 인해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벨사살이 공포에 싸여 소리질러 말하기를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들이 왕 앞에 서자 왕이 말하기를.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주리라." 제일 먼저 불러들인 사람 들은 바벨론 박사들이었습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 이상으로 일정 기 간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건을 예언하였던 다니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벨사살이 어째서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 한 다니엘을 부르지 않았으며 태후의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다니엘의 존재를 기억하게 되었을까 요?


벨사살은 유대 사람을 경멸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권이 바뀌면서 다니엘과 유대인들을 질투 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벨사살 왕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정권 하에서는 다니엘이 실권에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연회에 참석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을 경멸하였고 유대의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왕의 박사들이 다 들어 왔으나 역시 한 사람도 그 글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박 사들이 홀연히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과 공포가 급증했습니다. 연회 에 초대된 귀인들도 혼비백산하여 놀라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그리하여 흥겨움으로 인해 소란 하고 떠들석 하던 분위기는 멈추어지고 연회장은 갑자기 불안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박사들이 그 글을 해석하지 못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동요와 혼란의 상태에 이르렀습 니다. 이 때에 태후가 소란한 연회장에 대해 듣고 연회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 태후는 본래는 연회장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벨사살왕의 왕후들과 빈궁들이 잔치에 참여했다고 했으니 벨사살 왕의 왕비는 아닙니다. 아마도 벨사살의 어머니 왕후일 가능성이 큽니 다. 어머니 태후는 아버지 나보니더스의 아내로서 바벨론 궁에 있지 않고 남편을 따라 테이마 (Teima)에 머물고 있다가 나보니더스가 이 때쯤에는 바벨론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비가 다니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다니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그녀는 느부갓네살의 딸인 나보니더스의 아내요 벨사살의 어머니인 니토그리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후가 이 일로 번민하거나 얼굴이 파래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태후는 다니엘을 불러 글자 를 해석하게 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 람이라고 다니엘을 벨사살 왕에게 소개합니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 때에 있었던 자인데 다 니엘은 신들이 가지는 지혜를 가진 자요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 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벨드사살이라 이름을 가진 이 다니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다니엘의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과 왕의 이름인 벨사살이 비슷하 고 뜻도 비슷합니다. 다니엘은 본래 히브리식의 이름이며, 벨드사살은 궁중 교육 시절에 환관 장으로부터 받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벨드사살이란 뜻은 ‘벨 신이여 그의 생명을 지키소서.’ 이며 벨사살의 뜻은 ‘벨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벨사살이 다니엘을 불렀 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고 묻습니다. 다니엘을 향한 벨사살의 말이 참으로 밉살스럽습니다. 태후의 소개로 불러들인 다 니엘에게 질문하는 벨사살의 태도가 몹시 거만합니다. 지금 벨사살에게 중요한 것은 다니엘의 출신이 아니라 바벨론의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분벽에 쓰인 글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다니엘의 출신을 거론함으로써 은연 중에 포로 출신의 노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 대화에서 밝혀진 것은 벨사살이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2그분의 아들이신 임금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도 겸손해지기는커녕 23오히려 하늘의 대 주재를 거역하시고..’ 22절에서 보여 주듯이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시대에 행하였던 다니엘의 행적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벨사살은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한다는 것은 그 가 다니엘을 얼마나 경원시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은인이요 느부갓 네살이 정신병으로 권좌에서 쫓겨 났을 때에 왕의 자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을 이제 야 만난다는 것은 벨사살이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를 보여 줍니다. 지혜자는 지혜자 를 찾아 가까이 해야합니다.


‘16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

 

넷째로 왕궁 벽에 쓰인 글자를 다니엘이 해석(17-29)

 

‘17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 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제공하겠다 한 상을 마다한 이유로서 세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 은 본래 재물이나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청렴 결백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 자신이 세상 의 재물이나 권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말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로 바벨론은 하루 밤만 지나면 멸망할 것이므로 왕이 주는 상은 하루 밤 만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왕에게 글의 내용을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18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 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에서 다니엘은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병에 걸려 폐위되었다가 하나님의 주 권과 위엄을 알게 된 후 다신 회복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느부갓네살 시대의 융성을 허락하 신 분이 벨사살 왕이 그토록 경멸하는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며 교만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을 폐위시켰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느부갓네살 왕의 행적에 대해 벨사살 왕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그것이 분벽의 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처럼 그 보다 더 교만한 벨사살에 대한 심판도 필연적임을 교훈하기 위해서 입니다. 벨사살은 하늘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성전의 기명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상들을 찬양하면서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가락을 보내 심판을 선언하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 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에서 ‘메네’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그가 세어서 끝나게 했다.’고 다니 엘이 풀이 했듯이 하나님께서 기간을 세어서 바벨론 왕국을 멸망하도록 하였다는 의미인데 메네 메네를 두번 반복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될 것을 보여 줍니다. 데겔은 문자적으로 ‘너는 저울질을 받았다’ 또는 ‘너는 너무 가볍다’라는 뜻입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음으로 페레스 (פְּרֵס)인데 이 단 어의 복수형은 ‘파르신(וּפָרָס)입니다.


이것을 한글 음역에서는 ‘바르신’으로 음역하였는데 그 앞에 ‘그리고’ 또는 ‘그러나’ 라는 뜻을 가 진 접속사 ‘우’가 결합되어 25절에서는 ‘우바르신’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우 바르신’과 28절의 ‘베레스’는 복수와 단수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복수와 단수 사이에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양자는 동일한 단어 로 취급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바르신’은 또한 ‘바사인’이란 뜻도 가지고 있고 ‘나누다, 조각을 내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실과 오묘하게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29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에서 다니엘의 해석이 벨사살 왕 에게 아주 불리했지만 일천명의 귀족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자신의 제안대로 다니엘에게 상금 과 셋째 치리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로 왕궁 벽에 쓰인 글자 예언의 성취(30, 31)

 

‘30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 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성경의 놀라운 예언을 알아보 겠습니다. 바벨론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왔습니다. 최초 바벨론은 니므롯이 창시자 였으며, BC 18세기, BC16세기의 고대 바벨론은 함무라비왕 때 가장 왕성했습니다. 그 이후에 점점 약해져 앗 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멸망은 했지만 일부가 살아남아서BC 626년 나봇폴라살은 갈 대아인을 모아 신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그 아들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 와서 바벨론제국은 강대국 이 됩니다. 바벨론제국의 성은 시날평야의 유브라테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성은 유 브라테스강이 한 가운데로 흘렀고 바벨론성에 도착한 유브라테스강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 흘렀습 니다. 한 줄기는 바벨론성 안으로 흐르고 두 줄기는 바벨론성 주위를 감싸고 돌아서 흐르게 하였습 니다. 이렇게 한 것은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30m인데 이 30m는 10층 건물 높이 입니다. 성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집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120m인데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둘레로는 유브라테스강이 흘렀습 니다. 성벽의 흙은 해자를 판 흙으로 벽돌을 구워 만들었고, 성벽의 벽돌은 콜타르를 사용했습니 다. 성벽 위에는 양쪽에 가옥들이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양편 가옥들 가운데 4두마차가 지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바벨론 성의 규모입니다. 바벨론 도성은 성안의 집들이 3-4층 건물들 이 밀집되도록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난공불락의 바벨론성이 어떻게 해서 무너졌겠습니까?

 

바벨론 성이 어떻게 쉽게 무너졌는가 하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성을 공격하려고 왔는 데 성벽의 높이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주위로 돌아 흐르는 급한 물살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물을 건너다가 자신의 마차를 끄는 말 중에 아주 아끼던 백마(神馬)가 물에 휩 쓸려 죽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고레스가 말하기를 '내가 이 강물로 하여금 '여자들이 무릎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맹세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시켜서 강 양쪽에 180갈래 로 나누어 유브라데스강의 물줄기를 360갈래로 나누었습니다. 이런 고레스의 대단한 고집과 집 념으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성안으로 들어가는 유브라데스의 강줄기가 보인 것 입니다.

그곳으로 군사가 들어가면서 바벨론 성이 힘 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벨사살왕은 적이 성안으로 들 어오는 줄도 모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없다 보니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은 한 순간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무 너뜨릴 것을 성경은 이미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고레스란 이름을 지어주고 고레스의 앞길을 평 탄케 해주겠다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44장 26절~28절에,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 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유브 라데스 강물이 마르리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 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45장 1절~4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 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이렇게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이 페르시아 고레스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할 일들을 예언한 성경은 확실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을 이미 성경은 그 방법을 기록했습니다. 유브라데스 강 물줄기를 막아서 마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을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예언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느부갓네살에게 보이셨던 신상의 꿈을 통한 예언의 일부와 벨사살 과 그 신하들에게 나타난 손가락으로 쓴 글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바벨론 제국 은 완전히 멸망하고 이제 은으로 된 가슴과 팔, 곧 메대 바사 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바벨론을 정복하고 벨사살 왕을 죽인 왕이 바사의 고레스인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메 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레스와 다리오의 관계를 알아 보기 로 하겠습니다. 이 다리오는 역사학자들이 메대 나라의 다섯번째 왕인 카악사레스 2세로 봅니 다. 카악 사레스 2의 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 왕은 슬하에 두 남매 카악사레스와 딸 만데인을 두었는데 만데인을 바사국왕 캄비세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고레스 2세입니다.

 

한편 부왕 캄비세스 시대는 바사국이 메대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레스가 왕이 된 후 에 자신의 외 할아버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그로수스, 앗시리아와 메대 나라의 상당부분까지 정복했습니다. 이때에 카악사레스 2세와 고레스가 연합 할 때는 메대와 바사가 동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메대가 바사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카악사레스 2세의 딸 과 결혼하여 양국 간에 결혼동맹을 맺고 자신 은 계속하여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의 외 삼촌이자 장인인 카악사레스 2세인 다리오를 존중하여 메대-바사 과도 제국의 왕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니엘 5:31의 내용입니다. 그 후 고레스는 2년 후 모든 정복 전쟁을 결론 짓고 정식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 때가 BC 538년이요 그 해에 유다를 고토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