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은 어떻게 건설되었을까.
[바벨탑은 과연 실제로 존재했을까]에 이어지는 후반부 [바벨탑은 어떻게 건설되었을까]에 관한 내용입니다. EBE 다큐프라임 [바벨탑 위대한 바빌론]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경에서 흔히 느부가넷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신바빌론 제국의 2대 왕이다. 그는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론을 세웠던 함무라비 대왕의 사후 약 1000년 동안 아시리아에 빼앗겼던 바빌론을 수복한 사람이자 대단한 건설왕이기도 했다. 기원전 605년 바빌론은 드디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다. 주변국을 정복한 그는 바빌론이 세상의 중심임을 알리고 싶어했기에 그에 걸맞는 바벨탑과 같은 상징물들이 필요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바벨탑 건설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자 벽돌을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라는 글귀다. 진흙이나 찰흙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축재료였다. 이 지역에서는 나무나 돌 같은 것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기에 진흙으로 구운 벽돌로 온갖 것들을 지었던 것이다.
바빌론을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이다. 고대의 모든 문명이 그렇듯 바빌론 역시 이 강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곳은 연강수량이 100밀리미터도 안 되는 아주 건조한 땅이어서 물을 주지 않으면 나무 한 그루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땅이다. 하지만 유프라테스강은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주었고 매년 엄청난 양의 토사를 몰고 와 땅을 기름지게 했으며 건축에 필요한 질좋은 흙을 제공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긴 거의 모든 건축물이 흙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에 아치와 같은 기술을 터득할 만큼 흙건축의 전문가였다. 하지만 바벨탑처럼 큰 규모의 탑을 짓자면 엄청난 자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강자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으려면 전쟁보다 손쉬운 방법은 없기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도시건설과 함께 주변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전성기 시절인 기원전 600년대 초반 바빌론의 영토는 북으로는 아르메니아만,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서쪽으로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지나 이집트에까지 이르렀다.
유대인의 비극인 바빌론 유수도 그 결과물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바벨탑 건설은 바빌론 제국의 영광을 선언하는 야심찬 도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벨탑 건설이 애초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세운 계획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신바빌론 제국의 1대 왕) 역시 바벨탑을 건설하고 싶어했다.
고고학자이자 런던대학의 앤드류 조지 교수에 따르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가 시작한 건축을 자신이 끝냈다. 나보폴라사르가 30큐빗, 즉 높이 1.5미터 정도의 탑을 쌓았고 그 위에 신전탑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바벨탑의 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부에 또 다른 탑의 흔적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장 안쪽의 것은 한 면이 65미터, 그 다음 것은 83미터 규모의 탑이었다. 하지만 모두 무너지자 훗날 나보폴라사르는 다시 91미터로 확장한 탑을 건설하려 했으나 15미터만을 올린 채 사망하고 만다.
그것은 대역사였고 최첨단의 기술이 동원됐을 것이다. 건축은 가로세로 30센티미터, 높이 8센티미터의 흙벽돌이 사용됐다. 그들은 이 벽돌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 그 위에 모르타르를 깔고 갈대와 밀짚을 얹었다. 그것은 접착력을 높여서 하중을 흡수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기원전 1500년경에 건설된 아칼쿠프 지구라트에는 지금도 갈대와 밀짚을 넣은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바람에 벽돌이 마모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썩지 않고 남아 있는 갈대는 바로 지붕의 처마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더 획기적인 건축재료로 사용된 것은 석회였다. 이것은 무른 흙을 돌처럼 단단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바빌론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래 수천 년부터 내려오는 흙건축물의 기술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설의 책임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바벨탑을 짓는 데 사용된 벽돌의 개수는 3600개에서 7500만 개 정도였다. 벽돌을 굽는 매케한 연기가 매일 바빌론의 하늘을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년에 걸쳐 가로 세로 높이 각각 91.2미터의 바벨탑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바벨탑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기술적 백미는 맨 꼭대기에 있는 영롱한 푸른색의 신전이다.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그처럼 아름다운 푸른색을 만들어냈을까?
당시 건축방법을 기록해 건물 하단에 매장했던 놓은 이 점토판, 즉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실린더에 담긴 기록에 따르면, 에테멘앙키에 대해 언급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또 다른 기록에는 신전 꼭대기는 짙은 푸른색 타일, 즉 라피스라줄리 벽돌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라피스라줄리 색깔과 같은 짙은 푸른색으로 된 타일이다. 라피스라줄리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나는 짙은 푸른색 돌인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값비싼 보석으로 여겼다.
푸른색은 예로부터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부와 행운을 뜻했다. 때문에 그 어떤 보석보다도 사랑받았던 것이 이 라피스라줄리라 불리는 청금석이다. 하지만 너무 귀했기에 이 거대한 신전탑을 청금석만으로 치장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바벨탑의 주인 마르둑이 거주하는 신전을 평범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또 하나의 놀랄 만한 신기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독일 페르가몬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에는 사자와 황소, 용 같은 수많은 신상들이 부조돼 있다. 그런데 이 신상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이 푸른색 벽이다. 이것은 누가 봐도 불에 구워낸 벽돌, 즉 자기벽돌이다.
지금도 자부심이 강한 이라크의 도공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해 바빌론, 페르시아, 이슬람에 이르는 도자기 역사의 산 증인들이기도 하다. 바빌론 사람들은 이라크에 바빌론 문명 이전에도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수메르 문명 시대에도 유리공예와 도자기 공예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르 문명 시대에도 존재했다. 유리와 도자기 기술은 바빌론 이전부터 존재했고 우르인들에게 전수되었다. 이를 전승하여 발전시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이 바빌론의 자기다.
2600년이 흘렀지만 자기벽은 여전히 바빌론 당시의 색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다. 흔히 토기에서 도기로 넘어오는 과정을 인류문명의 전환점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도공들도 도자기를 굽기 위해 고온을 만들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자기를 만들려면 가마 내 온도를 1200에서 1300도까지 올려야 하고 또 그 상태로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가마를 설계하는 기술도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일들이 현대에도 간단한 일이 아닌데 수천 년 전에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도자기는 흙을 녹여 보석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그래서 흔히 도자예술을 도예예술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에도 만들기 힘든 도자기를, 그것도 나무 한 그루 드문 사막에서 바빌론인들은 어떻게 자기벽돌을 구워낼 수 있었을까? 고고학자 요하힘 마르찬은 “점토를 만든 자기들이 생산되고 가마들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여기에 어떤 에너지원이 됐을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많은 건축 자재와 일상적으로 사용된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수적인데, 개인적으로는 석유가 사용됐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하힘 마르찬은 그 해법을 이라크의 풍부한 석유에서 찾는다. 기원전 1800년부터 사용된 천연 역청 우물이다. 지금도 솟구치는 이 석유를 이용해 바빌론인들이 세계 최초로 도자기라는 세라믹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정(油井)에서 얻은 것은 석유만은 아니었다. 검고 끈적끈적한 이것이 바로 역청이라 불리는 천연 아스팔트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역청을 채취해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다. 처음엔 무르지만 금방 단단해지면서도 접착력이 강해 건축 방수제로는 최고다. 역청을 이용한 방수처리의 역사는 5000년이 넘는다. 기원전 3000년 전에 건설됐다는 우르 지구라트의 하단에 지금도 역청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된 역청은 벽돌 사이에 들어가 모르타르를 대신하기도 했으면 건축 밑면에 칠해져 방수용 아스팔트가 되기도 했다.
비록 사막 위의 도시였지만 바빌론도 홍수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물이 채워진 해자가 도시 주변은 물론 시내 곳곳을 관통했고 가끔 유프라테스 강이 범람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홍수가 나면 아무리 단단한 흙건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하지만 바빌론인들은 이 문제를 역청으로 간단히 해결해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벨탑은 바빌론 어디에 세워졌던 것일까? 그것은 왕궁 옆에 있던 에사길 사원으로부터 약 200미터 떨어진 너른 공터였다. 바빌론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전망좋은 곳이기도 하다.
자기벽돌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전 내부로 들어가면 정중앙에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이 자리잡고 있다. 바빌론인들은 마르둑이 살아 있는 신이라고 믿었기에 한쪽에 침실까지 마련해 놓았다. 그리하여 마르둑은 바빌론의 위대한 신으로 마치 왕이 궁전에 살 듯이 에사길 신전에 살았으며, 아내도 있었고 아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전 안에 자기 방을 가지고 있었고 시중을 드는 보좌신들도 있었다. 에사길 신전 전체가 마치 신의 궁전과 같았다.
세계 방송사상 최초로 입체영상을 통해 복원해 본 기원전 500년대의 바빌론의 아침에 따르면, 매일 동이 트면 특별히 선택받은 사제들이 신전 내부로 들어와서 마르둑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싱싱한 과일들을 제단에 바쳤다. 매일 밤 정결함을 인정받은 여인이 마르둑과 동침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리하여 밤중엔 엄격히 통제됐다. 단, 별자리를 관측하는 천문학자들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바벨탑은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신의 징벌이 아닌 페르시아의 침략에 의해 기원전 482년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그 뒤론 더 이상 복구되지 못했다, 그렇게 사막의 모래바람이 묻혀버린 지 2500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질좋은 벽돌을 캐내 집을 짓는 것은 물론 원형경기장, 댐건설, 도로를 위한 교각과 같은 건설 재료로 사용해 버리고 만다. 그것이 바벨탑의 마지막 운명이었다.
이처럼 바벨탑은 엄연히 실재했던 역사였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한 사람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였다. 그는 바벨탑 외에 역사에 남을 만한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겼는데, 훗날 그리스인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렀던 공중정원이다.<봉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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