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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팍스 로마나 Pax Romana

by 은총가득 2020. 7. 9.

라틴어 단어 Pax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단어이다. 목적격은 'pacem'. 평화의 여신을 뜻하기도 하며 평화의 여신으로서는 그리스 신화의 에이레네 와 동일시되었다. 영어의 'peace'도 이 단어에서 왔다.


일반명사로는 보통 한 제국이나 국가라틴어식 이름이 수식어로 쓰여 '한 국제 세력이 압도적인 힘으로 이룩한 장기간의 평화'라는 의미로 쓰인다.

 

 

역사

수식어가 '라틴어'인 만큼, 당연히 로마에 의한 '팍스 로마나'가 역사학적으로 팍스란 수식어가 가지는 의미의 기원이 된다.

이 팍스 로마나는 로마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 경의 시기를 말하는데,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고도 불리었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18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로마가 혼란해지면서 이 평화는 사라지게 되었지만, 이후에 어느 국가가 강성해지면 스스로 자신들이 가져온 평화를 로마 제국을 본따서 '팍스~'로 명명하거나 후대 역사학자들이 평가를 내리면서 이 수식어를 붙였다. 유럽에서 힘 깨나 썼던 국가들이나 심지어 그들의 후손이 건설한 미국에서조차 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던 독수리를 자국에 대한 상징으로 썼던 것과 같은 이치.

물론 로마 입장에서나 그런 것이다. 게르마니아나 파르티아 등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으며, 로마와 적대적인 진영에 속해있는 사람 혹은 노예들로서는 정말 이가 갈리는 시간이었다. 사실상 이 시기는 '대평화 시기' 보다는 '초강대국 시기'(또는 지역패권국 시기) 가 더욱 맞는 표현.<다음 백과>

 

로마의 평화 시대(팍스 로마나)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약 200년 동안 훌륭한 황제들이 뒤를 이으면서 통치에 힘썼으므로 ‘로마의 평화’ 로 불리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았다. 특히 네르바 황제로부터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이르는, 이른바 5현제 시대(96-180년)는 로마 제국의 절정기로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었으며, 정치적 안정과 함께 문화도 융성하는 등,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 팍스 로마나)' 시대가 다가왔다.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쪽은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서쪽은 대서양 연안까지, 그리고 남쪽은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북쪽은 다뉴브 강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대제국은 그 후 유럽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수도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거미줄처럼 만들어지고, 곳곳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에 따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인도를 비롯한 동남 아시아 나라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남 아시아의 향신료(후추 등)와 중국의 비단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이용되었다.

 

전성기 로마 제국의 영역

 

                                   <트라야누스의 기둥》의 일부

  로마의 5현제 중 두 번째 왕인 트라야누스의 정복활동을 기념하는 기둥으로, 이탈리아 로마에 세워져 있다.'그들은(로마인) 폐허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는 1~2세기 역사가 타키투스의 표현도 곱씹어 볼 만하다.<다음백과>

                                     

로마 제국의 사회 혼란과 국가 중흥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이래 번영을 누리던 로마 제국도 5현제 시대가 끝난 2세기 말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랜 태평 속에서 점차 향락과 사치 풍조가 일어나 로마 사회를 병들게 했으며 정치도 갈수록 문란해졌다. 이를 틈타 군인들이 정치에 관여하여 횡포를 부렸다.
그리하여 약 50년 동안에 30명 가량의 황제가 군대에 의해 태어나고 살해되었다. 이러한 군인 황제 시대(235~285년)를 겪으면서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국방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한편 북방의 게르만 족과 동방의 페르시아(사산 왕조)가 자주 침입하여 로마 제국은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부딪쳤다.

이러한 난국을 수습하고 국가 중흥에 힘쓴 사람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오리엔트식의 강력한 전제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3세기 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 동안 금지되어 온 크리스트교를 공인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전제 정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330년에는 서울을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고쳤다.

이탈리아 콘스탄티노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5년에 건축하였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와 유럽의 인구유전학적 교두보 역할

[서울신문]

아직도 남아있는 고대 로마제국의 도로 - 위키피디아 제공

“Omnes viae Romam ducunt.”(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기원전 8세기 무렵 라틴인이 세운 도시국가인 로마는 급속하게 영토를 확대해 5현제 중 하나인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했던 117년 무렵에는 지중해를 에워싸는 대제국을 완성했다. 제국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한 로마군대는 중장보병이 중심을 이뤘기 때문에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때문에 공병대를 중심으로 로마의 토목기술이 급속히 발전했다. ‘길은 직선이어야 한다’는 대명제 하에 공병대는 1~2m 정도 땅을 판 뒤 위에 모래를 깔고 다진 뒤 30㎝ 정도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돌, 다시 자갈을 깐 뒤 시멘트와 같은 것으로 덮었다. 그 위에 다시 자갈과 모래를 깔고 제일 위쪽에는 크고 평평한 돌을 까는 것으로 도로를 완성했다. 이 도로는 3세기 말 기준으로 총 길이 8만 5000㎞였는데 포로로마노 같은 곳은 지금도 잘 보존돼 있다.

이런 도로를 통해 지중해 주변과 멀리 브리타니아(영국), 게르마니아(독일), 사하라사막,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제국 전체로 물자와 사람이 오갔다. 그런데 고고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이 단순히 길 뿐만 아니라 지중해와 유럽 전체의 유전자도 로마로 들고난 것으로 확인됐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모든 길과 DNA가 로마로 통했던 셈이다.

미국 스탠포드대,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 이탈리아 문화재·활동부, 로마 사피엔자대, 토리노대, 피사대, 사사리 누오로주(州) 고고학·미술·조경부, 로마시 문화유산부, 로마 제3대학, 포지아대, 아일랜드 더블린칼리지대, 오스트리아 비엔나대, 포르투갈 코임브라대, 프랑스 엑스마르세이유대, 바티칸시국 그리스로마 유물부 등 7개국 28개 연구기관으로 구성된 공동연구팀은 고대 많은 유럽의 유전적 혈통들이 당시 로마 제국과 연결돼 있었으며 현재 유럽과 지중해 일대 인구의 유전적 변화 패턴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8일 밝혔다. 이 같은 연구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 8일자에 실렸다.

 

로마 제국 당시 영토 - 위키피디아 제공

1세기를 전후해 고대 로마는 지중해 전역과 현재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영토를 갖고 있는 인구 7000만명의 제국 수도였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는 로마에만 100만명에 이르는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정도의 도시 인구는 1500년 이후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는 유럽에서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당시 로마인들의 유전학적 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이에 연구팀은 로마 제국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로마는 유럽과 지중해 사이의 중요한 문화적, 상업적 교차로였다는 점에 착안해 로마를 중심으로 주변 29개 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1만 2000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127개의 인간 게놈을 추출해 분석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로마의 인구유전학적 변화 - 사이언스 제공

그 결과 선사시대에 크게 두 번의 로마인의 유전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우선 약 1만 2000년~6000년 전까지 로마인들의 유전자는 서유럽의 수렵채집인들과 유사성을 가졌다. 그런데 6000~35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농업중심 경제가 만들어지면서 소(小)아시아라고 불렸던 현재 터키반도 일대에 살았던 아나톨리아인과 유프라테스강 주변에 살았던 이란인 농부들이 유입됐으며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지중해 전역에서 온 사람들과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유전적 교합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기원전 753년 로마가 건국됐을 당시에는 이처럼 근동지역과 서유럽 혈통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후 제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근동,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역에 사는 사람들의 유전자가 섞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나단 프리차드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유전학·진화생물학)는 “이번 연구는 지난 1만 2000년 동안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의 유전학적 역사를 개괄했다는데 의미가 크다”라며 “중부 이탈리아의 유전적 다양성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함께 하고 있으며 유럽과 지중해의 유전적 교두보,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모든 유전자는 로마로 통한다’라는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dmond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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