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연표
Augustus B.C 30 - A.D 14, Tiberius A.D 14 - 37, Caligula A.D 37 - 41, Claudius A.D 41 - 54, Nero A.D 54 - 68 (Galba, Otho, Vitellius, 68 - 69) Vespasian A.D 68 - 79, Titus A.D 79 - 81, Domitian A.D 81 - 96, Nerva A.D 96 - 97, Trajan A.D 97 - 117, 117-138 Hadrian : 하드리아누스, 138-161 Antoninus Pius : 안토니우스 피우스, 161-180 Marcus Aurelius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당시 버가모는 소아시아 지역 수도였고 아크로폴리스(왕국)안에는 여러개의 신전(제우스, 디오니소스 등)과 함께 트라얀 로마 황제 신전이 있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로마명은 옥타비안)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주후 30-40년 사이에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습니다. 트라얀 황제의 신당은 주후 98년에서 117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세베투스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서 주후 193-211년 사이에 건축이 되어졌습니다. 하드리안 황제 때 완공한이 신전은 지형상 깍아진 V자 형의 절벽사이에 걸쳐 짓게 되었다. 따라서 지형을 평평히 고르기 위해 신전 앞부분에 축대를 쌓을 수 밖에 없었다. 주위의 다른 건축물들이 회색이나 분홍의 대리석을 사용한 반면 이 신전은 선명한 흰 대리석을 사용함으로써 산 밑의 평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신전의 3면은 모두 기둥으로 둘러싼 화랑이 있었으며 신전의 안쪽 마당에는 제단이 세워져 있고 제단의 양쪽 끝에는 황제의 조각을 세워 놓았으나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
쿠레테스 도로 북쪽 끝에 위치한 12m 높이의 이 우물은 102~114년에 트라이안 황제에게 바쳐졌다. 우물 중앙 받침대 위에는 트라이안 황제의 동상이 있었고 그 발목으로부터 물이 흘러 나오게 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받침대와 오른발 한쪽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여러 황실가족의 동상이 발굴되어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하드리안(Hadrian) 신전은 크레테스 도로상에서 가장 눈길을 끈다. 목욕탕 옆의 하드리안 신전은 위대한 건축물의 본보기이다. 138년경에 지어져 하드리안 황제에게 바쳐졌으며, 고린도 양식의 신전은 정면에 독특한 부조물과 장식이 되어 있다. 건물의 현관입구에 4개의 기둥이 남아 있는데 중앙의 2개 기둥은 아치를 이루고 있다. 현관을 들어서 안쪽 정면의 박공 머리 위에는 메두사를 닮은 여성의 모습이 나뭇잎과 함께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 왼쪽부터 아테나신, 셀레나신, 아폴로신, 에베소의 창시자 안드로클로스, 헤랄데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버지, 데오도시우스 황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 데오도시우스의 아내와 아들이 차례로 부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치문에는 행운의 여신 니케의 조각상이 있고 그 뒤 반원형에는 메두사의 조각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의 통치기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공격적인 대외확장정책을 편 직후에 해당되며, 로마제국의 평화적 통합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북방 야만족으로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일명 하드리아누스의 벽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으로서도 중요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방방곳곳을 순례한 여행자로, 또 그리스문화의 애호가로서도 잘 알려져있다. 로마황제로서는 처음으로 턱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철학자적 풍모 또는 그리스식 스타일에 대한 그의 추종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드리아누스의 스타일은 로마제국 전역에 유행했다. 로마에서 발견되었으나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흉상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린 황제의 영웅적인 나신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아한 머리칼과 수염 처리는 주로 조각끌로 처리되었다. 새겨진 홍채와 패인 눈동자 등의 눈 처리형식은, 초상 조각상에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형식이다.
로마시대, 2세기, 빌라 몬타르도, 이탈리아 , 그리스산 대리석, 높이 61 , 대영박물관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년)의 통치기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공격적인 대외확장정책을 편 직후에 해당되며, 로마제국의 평화적 통합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북방 야만족으로부터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일명 하드리아누스의 벽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군사적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의 상징으로서도 중요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방방곳곳을 순례한 여행자로, 또 그리스문화의 애호가로서도 잘 알려져있다. 로마황제로서는 처음으로 턱수염을 길렀는데, 이는 철학자적 풍모 또는 그리스식 스타일에 대한 그의 추종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드리아누스의 스타일은 로마제국 전역에 유행했다. 로마에서 발견되었으나 그리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흉상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린 황제의 영웅적인 나신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아한 머리칼과 수염 처리는 주로 조각끌로 처리되었다. 새겨진 홍채와 패인 눈동자 등의 눈 처리형식은, 초상 조각상에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도입된 형식이다.
AD29년에 세워진 에베소 최초의 디베리우스 황제 숭배 신전이다. 이후 트라얀, 하드리안, 도미티안 신전들이 세워져 에베소가 로마 황제 숭배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 도미티안 황제 숭배신전
도미티안은 사도 요한을 황제 숭배를 거부한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한 황제이다. 당시 로마 황제 숭배는 로마가 식민지 국가들을 통치하기 위한 종교 정책으로 시행된 것으로 로마 황제들은 자신을 신격화 시켜 숭배토록 하였다. 이에 불응 할 경우 황제숭배 증명서가 없어 불이익과 함께 때로 죽기도 하였다. 이로인해 서머나 폴리캅 감독 등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다.
역사상 에페소는 4차례의 네오코로스(Neokoros)가 될 자격을 얻었다. 네오코로스가 된다는 것은 황제의 신전에 파수꾼이 된다는 것으로 다른 도시들이 모두 부러워 할만한 특권이었다. 에페소는 처음으로 도미티안(81∼96년)에 대한 신전의 파수꾼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의 한 하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에페스인들은 어렵게 얻은 네오코로스의 권리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아버지 베스파시안(Vespasian)을 신으로 모셔 이 신전을 그에게 바쳤다. 도미티안 황제는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한 후 파트모스(밧모섬)로 유배 시켰던 황제이다. 요한은 그가 암살 당한 후 요한은 에페소로 돌아 올수 있었다. 이 도미티안 신전에서 발굴된 도미티안 황제의 조각상이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도미티안 신전은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써 뱀들이 서로 꼬여 있는 모양의 지팡이) 부조물로 장식된 2개의 동상 받침대 앞에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제정을 수립한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의 본명이다.
원래 카이사르(시저)의 조카뻘 되는데 옥타비아누스의 재능을 알아본 카이사르가 그를 양자로 데려다 삼았다. 또 카이사르는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를 붙여주면서까지 후계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적당하게 성장하면 후계자로 삼으려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일파에게 암살을 당한다. 브루투스 일파는 카이사르의 심복이던 안토니우스에게 쫓겨나고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 누구나 안토니우스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목된다. 결국 카이사르 부하 중에 가장 지위가 높았던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2차 삼두정치를 만들게 된다. 처음엔 율리우스 카이사르파, 즉 옥타비아누스와 그를 돕는다는 명목의 안토니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등의 세력과 다투게된다.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파가 승리하고, 얼마 안 있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전쟁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왕조는 끝이 남과 동시에 헬레니즘 문화가 끝이 난다. 또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에서 속주가 된다. 그 후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를 위해 선정을 펼치나 결국 마지막엔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다 이루지 못하고 죽게된다.
포롬 로마노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는 10개의 원기둥이 있는 신전이다. 안토니우스 황제가 황후 파스티나의 죽음을 애도하여 141년에 세웠다.
로마의 평화 시대를 이룩한 5현제(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로마 제국의 영토는 최고에 달했고,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문화가 발달했다.
Vespasian 사원은 폼페이에서 로마제국의 예식에 대한 중요성을 반영하듯이 포럼의 가장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의 성상 안치소는 건물의 중앙에서 뒤쪽 높이 세워지 플랫폼에 위치해 있다.이사원의 그 제단은 성당입구 밖에 있다. Vespasian의 사원의 제단이며 흰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로마제국의 전통적은 신전의식 행사였다.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Titus Flavius, 9.11.17?~79.6.24]
로마의 황제(재위 69~79)이다. 사비니 리에티 출신. 트라키아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39년 프라이토르(법무관), 51년 콘술(집정관)이 되었다. 66년 말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황제 네로가 파견한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현지에 가서 잇달아 전과를 올렸다. 네로가 죽은 뒤 혼란 속에서, 69년 동방의 여러 군단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발칸지방 여러 군단도 지지를 표명하였다. 우선 부하를 로마로 진군시키고, 유대 반란 뒤처리를 아들 티투스에게 맡겼다. 한편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의 황제 즉위 승인을 받았다. 중후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국가의 위신회복과 내란의 손해복구에 힘썼다. 71년 유대 반란의 평정귀환식을 가졌다. 한편 재정의 정리 ·개선을 꾀하며, 신전 ·플라비우스투기장(鬪技場: 콜로세움)을 건설하고, 정복한 지방의 로마화를 추진, 제국의 재건에 성공하였다. 죽은 뒤 두 아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가 차례로 황제가 되어, 플라비우스왕조를 이룩하였다.
[출처] 성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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