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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5:1-14)

by 은총가득 2020. 7. 9.

 

 

5.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5:1-14)

 

가. 아론의 반차를 좆은 대제사장의 성격(1-4)

 

 1) 대제사장의 본성: 사람(1)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선택된 자여야 한다. 천사들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사람들의 인성과 연약함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대제사장의 직무: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1)

대제사장의 직무는 세상에 속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자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3) 대제사장의 의무: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림(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소제물)과 속죄제사를 드리는 일을 담당하였다.

 

 4) 대제사장의 구비 조건: 연약성(2-3).

대제사장은 타인의 무지와 미혹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식하다'('아그노우신')는 말은 '모르고 죄를 짓는다'는 의미이며, '미혹'('플라노메노이스)은 '잘못 인도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의적으로 짓는 '짐짓 죄'(헤쿠시오스: 히 10;26)와 반대되는 것으로 모르고 짓는 우발적인 죄를 말한다(Robertson). 그리고 '용납 할 수 있다'('메트리오파데인')는 말은 다른 사람을 친절하고 사려 깊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Yarnold, Lane). 대제사장은 무지나 실수로 죄를 범한 자들은 용납하였으나(9:7; 레 4:2,13,22,27; 5:2-4), 고의적으로 범죄한 자는 회중에서 제외시켰다(민 15:30,31). 대제사장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서 범죄할 수 있는 '연약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같이 자기를 위해서도 속죄 제사를 드려야만 했다(3).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은 도덕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했다(출 28:1,2) 그러나 그는 여전히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율법은 대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를 대비해서 속죄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해 놓았다(레 4:3-12;9:7).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회중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속죄제사를 드렸다.

 

 5) 대제사장의 소명: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4)

대제사장의 직분은 사람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직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도 하나님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이후로 그 직분이 세습되었다(출 28:1; 민 3:10;18:1). 아론 집안 외의 사람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될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직접 부르셨다. 대제사장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임명(任命)될 수 있었다.

 

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성격(5-10)

 

  1) 소명: 하나님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부름 받고 세우심을 받았다(5-6)

이제 저자는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아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제사징직은 아론의 대제사장직 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시 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올라올 때와 변화산 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친히 음성으로 인정해 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기 위해 (시 110:4)도 인용하고 있다. (시 110:4) 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는다”(카타 텐 탁신 멜키세덱')는 말은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Morris, Moffatt, Hewitt). 아론계통의 대제사장은 오로지 제사 직무를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인 동시에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2) 연약성을 가지심(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다(2:14-18).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셨으며 인간의 감정이나 어려움을 똑같이 느끼시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본 구절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 중 겟세마네에서 드린 고뇌에 찬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일 것이라고 주장하나(눅 22:39-46, Bruce, Robertson, Hewitt)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어느 특정한 순간에 적용시키기 보다는 그의 대제사장적인 사역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하다(Lane, Maurer, Morris). '올리다‘('프로세넹카스')는 말은 희생 제물을 '바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1절에서 언급된 대제사장의 제사와 평행을 이룬다. 대제사장이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물'은 예수께서 하나님께 올린 '간구와 소원'을 의미한다(Rasco).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그 기도를 열납 하심을 받으셨다. '경외하심'('율라베이아스')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혹자는 '두려움'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기도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Morris). 예수는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끼셨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하셨다. (2) 혹자는 '율라베이아스'가 '잘'에 해당하는 접두사'유'와 '붙들다'는 뜻의 헬라어 '람바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낸다고 한다(Robertson). 이 두 가지 견해는 둘 다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은 (시 22:24)의 '부르짖을 때 들으셨도다'라는 말과 상응된다. 이것의 일례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을 들 때의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라는 예수의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실상 예수의 기도의 목적은 고난의 잔을 옮기는 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으므로(막 14:32-36) 그의 기도는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Boman, Rissi, Maurer). 이 사실을 저자가 본절에서 밝히는 이유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의 제사가 항상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 반면에 예수의 기도는 항상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Lane).

 

 3)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우심(8-9)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순종함을 배우셨다(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는 말('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어진 관용구로서, '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와 '고난받다'의 동사어근 '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다(Lane).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겪는 동일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고난을 통한 주님의 순종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교훈을 준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순종하심을 통해 우리들이 그 발자취를 따라 오게 하시려고 본을 보여 주셨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순종을 윈하시는 지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셋째로 순종하는 사람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셨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주님과 같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넷째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다섯째로 주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한 자격을 구비하게 되셨다(9). 만일 주님께서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지 않으셨다면, 고난 당하는 인간들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한 순종을 통해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합당한 분이 되셨다.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속에서 죽기까지 복종한 것을 본받아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성도들을 말한다. 주님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인성을 체험하심으로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다(10).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탁월한 다른 은혜의 약속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좆은 대제사장(11-14)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독자들이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11). '둔하다'('노드로이')는 말은 '듣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말한다. 수신자들은 예수를 믿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남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어야 한다(12).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말씀(복음)의 기초”에 대해서 남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말씀의 초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기초적인 진리를 말한다. 수신자들은 오래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초적인 지식마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가 없었다. 헬라 윤리학에서는 아직 기초단계에 있는 자들을 '우유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라고 비유했다. 그리고 성숙한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즐기는 어른'에 비유하였다(고전 3:1-3, Williamson). 히브리서 저자는 이 말을 사용하여 수신자들이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 맞는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들을 책망하며 권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젖을 먹는 자'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13). 어린아이('네피오스‘)는 올바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정상적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옳은 것을 분별하는 윤리적인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젖을 먹는 자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의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신자들의 올바른 삶으로서의 '의'를 의미하며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신자들의 '의'가 된다는 측면에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Hughes). 젖을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위해야 하는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을 먹는 사람들은 영적인 지각을 사용함으로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14). '단단한 식물'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말씀으로(7:1-10:18) 초신자들과 같이 어린아이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가리킨다(Lane).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자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장성한 자는 앞에서 언급된 '어린아이'에 비해(고전 3:1; 13:11) 상대적으로 온전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단한 식물'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자를 말한다.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다. '지각'('아이스데테리아')은 도덕적인 분별력을 넘어 영적인 분별 기능을 의미한다(Michel, Morris). '연단을 받는다'는 말('게귐나스메나')는 말은 '훈련하다(귐나조')는 말의 완료 수동 분사로서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상태를 나타낸다.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는 훈련과 진리를 통해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며 그 분별력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여 범죄치 않으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