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의 직분(히 5:1-10)
본장은 앞선 4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큰 대제사장이란 선언적 전제를 하였던 것에 이어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자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5장 1부터 7장 28절까지 기사의 일련 부분이다. 내용을 좀 더 세분하면 1절부터 4절까지는 대제사장의 자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부분이고, 5절부터 10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격조건을 완전히 구비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논증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주목해야할 할 부분 역시 둘로 구분된다.
1. 일반 제사장의 신분과 관련된 보도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일반 제사장의 신분에 대하여 크게 세 가지을 지목하였다.
1) 사람이었다는 것
이에 대하여 1절에서 “대제사장 마다 사람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라고 보도하였다. 여기서 ‘대제사장 마다’란 언급은 모든 대제사장들을 총괄할 표현이다. 즉 아론이나 레위계통의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람 가운데서 취하였다는 말은 대제사장은 필히 사람이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부분이다. 대제사장이 필히 사람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2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사정이나 허물, 연약함 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사람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대제사장은 반드시 사람 중에서 선택 되어야만 했다는 진술이다.
이러한 저자의 진술은 천사숭배를 하였던 유대인들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천사를 하나님과 인간과의 최고의 중보자로 생각하고 천사를 숭배했던 유대인들의 사상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이러한 표현은 천사가 사람의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보여 진다. 한 마디로 천사는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의 사정을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속죄를 위한 중보자 역시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즉 중보의 가장 우선되는 원칙이 인간의 사정을 잘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천사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사실 중보의 직무를 맡은 자가 그 중보를 해야 할 존재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보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비유하면 어느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그 사건이나 상황을 모르고서는 변호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천사는 우리와 같은 육신은 가지고 있지 않는 영적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과 같은 다양한 속성의 감정이나 여러 형태의 인격적 기능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으니 이성간의 사랑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자식을 낳을 수 없을 테니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갖는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과 가족 간에 느끼는 공동체적인 끈끈한 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천사들은 반사적으로 그만큼 죄에 대한 미혹은 줄어들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그렇지만 인간이 느끼는 인격적 세계와 천사가 느끼는 인격적 세계의 차이가 심히 클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제일 원칙은 그들의 연약함이나 사정을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천사는 안 된다는 것이고, 오직 인간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불완전한 자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 자가 인간이어야 함을 언급한 저자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스스로도 연약한 자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하여 5절 하반절에서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느니라’라고 보도하였고, 3절에서는 자기도 연약하기에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음을 보도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대표언약 아래 있기에 아담의 실패로 인한 죄와 죄책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5장 14절에서 율법이 없는 시대를 살았던 아담 이후 모세까지의 인생들도 그들 위에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여서 대제사장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에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인간의 속죄를 위한 온전한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백성들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지만 자기도 연약하여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려야만 하는 정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드린 속죄제는 해마다 번복하여 드려야만 했던 것이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저자는 4절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관련하여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란 표현을 하였다. 즉 누구나 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는 직무가 아니란 뜻이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가 누구이든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제사장직을 허락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그 제단은 저주를 받게 되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 직분만큼은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있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명에 의해서만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그러하였다. 출애굽기 28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을 불러 세우고 그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도록 명령하셨음을 보여준다. 그로인하여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아론의 계열에서만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광야에서 같은 레위 계통이었던 고라가 다른 유명한 족장들 250명과 함께 제사장직에 대해 도전을 하고 나섰던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케 되었는데 그것 역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제사장 직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직분이란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 직분에 대하여 ‘존귀’란 말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존귀’로 번역된 ‘티멘’(τιμήν)은 ‘존귀한 자리’, 혹은 ‘존경할 만한 직위’를 가리키는 ‘티메’(τιμή)의 목적격 단수 명사이다. 본래 ‘티메’는 사람의 직위나 부요 또는 인격 등과 같은 위엄이나 특권을 가리킨 단어로서 당시 사회에서 일반사람들에 비해 탁원한 위치와 누림을 평가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단어가 일반 시민들에게는 잘 사용되지 않았고 특히 노예들에게는 사용될 수 없는 단어였다. 대제사장직에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 직분의 영광이나 영예스러움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귀는 비단 제사장 직분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맡기신 직분은 모두가 다 존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직분이 존귀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부와 권세를 누일 수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임명한 직분이기에 존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따라서 제사장의 직분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맡겨진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심히 존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영생의 상급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높은 직위 보다는 낮고 천한 직위가 더 존귀한 직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천국의 상급은 섬김을 받는 위치보다는 섬기는 자에게 더 큰 상급이 주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라는 같은 레위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반면에 자기들은 기껏해야 성전에서 허드렛일 같은 것만을 도맡아 하였기에 불만을 토하고 아론과 모세를 대항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천국의 상급적 측면에서 보면 그 직무가 결코 가볍다거나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바르게만 감당하였다면 상급의 원리에서 볼 때 훨씬 더 복된 직무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심히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낮은 직임, 남들이 하기를 꺼려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란 사실이다. 하늘의 상급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에게 더 큰 영광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는 까닭이다.
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근거에 대하여서도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스스로 영예를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되어졌다는 것
저자는 5절에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였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앞의 내용과 연계하고자 한 접속사이다. 인간 제사장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한다고 하였다. 그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변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저자는 시편 2편 7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시편 2편은 저자미상의 시이다. 그런데 시편에 수록된 총 7편의 메시아 예언시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메시아 예언시이다. 대부분의 예언시가 그렇듯이 그 내용은 다윗 언약에 근거하여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보내주실 것을 언약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상황과 형태의 면모를 예언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서 시편 2편은 다윗왕가에 대하여 부당히 도전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며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은 신본주의적인 정통성과 권위에 정당성을 진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는 다윗의 위를 계승하는 왕들의 즉위식 때 그들의 왕권이 다윗 언약에 근거한 신적 권위를 지닌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왕권을 위임받은 자로서의 의무를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낭송된 시이다.
다윗의 왕위에 대하여 가장 못 마땅하게 생각한 자들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이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를 거두었기에 주변국들에서는 그가 눈에 가시처럼 거슬리는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주변국들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다윗의 왕위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사울 왕을 들 수 있고, 그에 빌붙어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또 압살롬의 난을 만나 왕궁을 비우고 피신을 할 때 다윗의 행로를 가로막고 저주를 퍼 부었던 베냐민 지파 시므이와, 압살롬의 난이 진압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자기들은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다며 다윗의 왕위를 비토(veto)했던 베냐민지파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생각할 수 있다(삼하 20:1).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다윗의 왕권이 신적 권위를 갖는 것임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는 메시아 예언시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편에서 지적되고 있는 악한 자들은 다름 아닌 그 시대 바리새인들과 그들을 추종하며 극렬히 주님을 대항하였던 유대인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대제사장임을 증거하고자 이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즉 주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 것이 아니며, 이처럼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분으로서 그분의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에 의한 신적 권위를 가질 뿐만이 아니라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보다 더욱더 우월하신 제자장이란 측면에서 시편 2편 가운데서도 7절을 인용하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랐다는 것
주님의 대제사장직분이 신적권위를 가진 것임을 증거한 저자는 이어서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임을 6절에서 밝히고 있다.
6절은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이 시는 다윗이 쓴 시로서 총 7편의 메시아 예언시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예언시이다. 그리고 이는 메시아 예언시 가운데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영원한 왕과 제사장으로 오실 메시아의 통치와 심판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시이다. 그러기에 이 시는 주님께서도 누가복음 20장 43절에서 인용하셨고, 사도행전 2장 35절에서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인용하셨던 110편 1절을 동일하게 인용하기도 하였다. 즉 주님께서 메시아란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베드로가 이 시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1절이 아니라 4절을 인용하였다. 시편 110편 가운데 1절부터 3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왕권을 가지시고 오실 것이란 사실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4절은 메시아는 왕권만이 아니라 대제사장직도 겸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노래한 부분으로서 그러나 메시아는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임을 노래한 부분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서 단 한 번 언급된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북방 4대 연합국을 물리치고 포로로 잡혀간 롯을 구해왔을 때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성경학자들이나 주석가들 가운데 멜기세덱에 대하여 실존 인물로 이해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은, 본서 7장 3절에서도 밝혀주고 있듯이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라고 할 때 ‘방불’로 번역된 ‘압호모이오메노스’(ἀφωμοιωμένος)는 ‘원형을 닮았다’, ‘비슷하거나 유사하게 만들어 졌다’는 뜻에서 ‘복사’, ‘복제’란 의미로 이해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임을 말하면서 특별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인간 제사장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임은 인간 제사장들과 같이 허물이 있어서 자기를 위해 먼저 속죄제를 드려야만 했던 것과 갖지 않다는 사실과 함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시어 영광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그 직임이 영원한 것이란 사실을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는 짐승을 잡아 속죄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기 몸을 친히 속죄 제물로 드림으로 이제는 더 이상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강조하기 위함에 목적이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는 것은 그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성도들의 영원한 중보자란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
이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3가지 차원에서 주님의 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1) 사랑의 절정
저자는 7절에서 주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보도하였다. 이 통곡의 기도에 대해서는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과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겟세마네 기도를 인용한 것으로 이해하였고,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전 인류의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야 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주님은 말할 수 없는 인간적 고통과 번민을 안고 성부께 울며 기도하고 간구하고 소원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한 통곡과 눈물은 겟세마네 기도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인간적 고뇌와 갈등을 느껴 본문의 표현과 같이 심하게 통곡하며 눈물을 쏟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주님은 인성을 입으셨으나 죄가 없으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겟세마네 기도를 보면 흘린 땀이 피와 같이 되었다는 표현은 있지만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하였다는 징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저자가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 주님을 따라다닌 제자가 아니었고, 그는 스스로 제자들을 통해서 주님에 대한 증거를 들었음을 1장에서 진술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공생애를 기록한 사복음서에는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경우를 딱 두 차례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누가복음 19장 41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우신 경우이고, 다른 한 번은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나타난다. 이때는 마리아가 자신의 오라비였던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슬피 울자 유대인들이 덩달아 울었음을 밝혀주고 있고, 이를 보신 주님께서 심령에 통분이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사복음서가 주님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사복음서에 기록된 행적 외에 어떤 행적에서 눈물을 흘리신 경우가 있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하더라도 주님의 울음이 십자가의 죽음 외에 또 다른 육신적 번뇌로 흘리신 눈물로 이해해선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인성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함이 히브리서 기자의 의도는 분명하나 그러나 이는 오히려 우리를 위한 사랑의 절정에 대한 의미에서 주님의 인성을 연관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2) 육신의 고난
8절에서 저자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기에 고난을 당하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 주님의 고난은 육신을 입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숨 막히는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주님은 본래 시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신이시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 육체 안에 갇히셨으니 얼마나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고난이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고난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면서 배고프심을 경험하시기도 하셨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는 과정은 인간이 육신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가운데는 가장 절정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주님은 육신을 가지셨기에 그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즉 주님의 죗값의 형벌을 당신의 육체를 통해서 고스란히 다 받으셨다는 사실과 함께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주님은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온전한 순종
저자는 8절에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배웠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을 어떤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있었지만 순종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유희(言語遊戱)이다. 즉 고난이 있었지만 그 고난을 받아들이고 순종을 체험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심령의 순전함과 간절함으로, 그리고 고난을 이겨내신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대제사장직분을 감당하신 것이며, 그러기에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신 공생에 30년의 인생은 결과적으로 온전하고도 완전한 의의 승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왜 인간이셔야 만이 했고, 주님께서 왜 죄인이 받는 형벌을 몸소 받으셔야 했는가는 바로 우리를 위하심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이다. 때문에 결코 주님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차원에서 12절에서는 말씀의 초보에도 이르지 못한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적하고 있다. 한 마디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한심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 유대교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자기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한심한 경우들이 교회 안에 난립되어 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사도행전 4장 12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로는 더욱더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자기의 행위로 할 수 있는 문제라면 다른 이의 힘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섬기는 이유, 우리가 주님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기 때문인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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