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ὴ καὶ ὁ πατήρ μου ὁ γεωργός ἐστιν.
2πᾶν κλῆμα ἐν ἐμοὶ μὴ φέρον καρπὸν αἴρει αὐτό, καὶ πᾶν τὸ καρπὸν φέρον καθαίρει αὐτὸ ἵνα καρπὸν πλείονα φέρῃ.
3ἤδη ὑμεῖς καθαροί ἐστε διὰ τὸν λόγον ὃν λελάληκα ὑμῖν·
4μείνατε ἐν ἐμοί, κἀγὼ ἐν ὑμῖν. καθὼς τὸ κλῆμα οὐ δύναται καρπὸν φέρειν ἀφ’ ἑαυτοῦ ἐὰν μὴ μένῃ ἐν τῇ ἀμπέλῳ, οὕτως οὐδὲ ὑμεῖς ἐὰν μὴ ἐν ἐμοὶ μένητε.
5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ὑμεῖς τὰ κλήματα. ὁ μένων ἐν ἐμοὶ κἀγὼ ἐν αὐτῷ οὗτος φέρει καρπὸν πολύν, ὅτι χωρὶς ἐμοῦ οὐ δύνασθε ποιεῖν οὐδέν.
6ἐὰν μή τις μένῃ ἐν ἐμοί, ἐβλήθη ἔξω ὡς τὸ κλῆμα καὶ ἐξηράνθη καὶ συνάγουσιν αὐτὰ καὶ εἰς τὸ πῦρ βάλλουσιν καὶ καίεται.
7ἐὰν μείνητε ἐν ἐμοὶ καὶ τὰ ῥήματά μου ἐν ὑμῖν μείνῃ, ὃ ἐὰν θέλητε αἰτήσασθε, καὶ γενήσεται ὑμῖν.
나는 참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ὴ καὶ ὁ πατήρ μου ὁ γεωργός ἐστιν.
예수는 1절에서 “자신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선언하신다(15:1). 하나님은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농부이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ajlhqinh)이라는 단어이다. ‘참되다’(ajlhqinω)는 형용사는 예레미야 2:21을 반영한 것으로 유대교의 교훈을 대체하는 분이다(4:23; 6:32). 불트만은 예수는 ‘포도나무’라고 주장하는 다른 것들과 대조된다는 점에서 참(ajlhqinhv) 포도나무라고 보았다. 비슬리-머레이는 “참”(ajlhqinh)이란 단어는 형용사로서 그림자에 반대되는 실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포도와 가지의 비유(요15:1-17)의 핵심은 기독론적인 교회론이며 그리스도와 교회가 바로 참 이스라엘, 참 포도나무라고 주장한다. 포도원의 상징인 이스라엘(마 20:1-16; 21:33-46; 막 12:1-12; 눅 20:9-19)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이라는 것이다.
브라운은 예수가 자신은 ‘참’ 포도나무라고 말한 것은 거짓 포도나무에 대조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온 “참”(ajlhqinh) 생명의 근원임에 대한 강조라고 보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포도나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포도나무라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마카비시대 이래 동전들과 도자기류에 자주 새겨지던 형상이고, 요세푸스는 큰 금으로 만든 포도나무가 헤롯성전 지성소 입구에 놓여 졌다고 이야기 한다(Ant. 15. 395)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로서 포도나무가 사용된 것은 구약 이 외에도 유대교 문서(제2 바룩서 39:7; 집회서 24:17)와 그 전승은 유대교에서 계속된다. 즉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말하는 정교한 풍유적 묘사가 Lev, Rab, 36(133a)에서 발견되며(Str-B 2:563-64에서 번각된), 비슬리-머리, 529.
예수가 자신은 ‘참 포도나무’라는 선언한다. 여기서 “참”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보아야 한다. 나아가 요한 교회공동체의 시대에 회당과의 관계에서도 관련 지어 볼수 있다. 회당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많은 곳에서 예언한 참 메시아인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했다. 이 비유의 중심은 “예수 안에 거하는 것(mevnw)”이지만, 농부이신 아버지의 역할도 부각된다.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경작하는 농부로서 열매를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요한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안에 붙어있는 가지로서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며 농부이신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을 것을 천명한다.
브라운은 “참”이란 위에 속한 것으로부터 아래로 속한 것을 구분하는 요한의 이원론적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차적으로 거짓 포도나무를 암시하고 있는데, “참”(ajlhqinh)에 내포된 대조는 하늘과 땅뿐 아니라 신약과 구약(혹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대조라는 것이다. R. E. Brown, JohnⅡ. 1325.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πᾶν κλῆμα ἐν ἐμοὶ μὴ φέρον καρπὸν αἴρει αὐτό, καὶ πᾶν τὸ καρπὸν φέρον καθαίρει αὐτὸ ἵνα καρπὸν πλείονα φέρῃ.
포도나무 가지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 맺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단지 그를 믿는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과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하여 버리신다(cf. 마 3:10). 그 다음은 남아있는 가지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과실을 맺는 것이 농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의 존재의 목적이 과실을 맺기 때문에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는 것은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농부의 필수 작업일 것이다. 그러면 과실을 맺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농부이신 하나님이 제거하실 대상은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이며, “내게 있어”(ejn ejmoi;)라는 어구를 볼 때 배교하는 세력일 것으로 볼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지속적으로 배교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제거하다. 깨끗게 하다”의 뜻을 지닌 단어 ‘아이레이’(ai[rei)와 ‘카다이레이’(kaqaivrei)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아이레이(ai[rei)는 “치우다, 제거하다”, 본문에서 “제하다”를 의미한다면, 카다이레이(kaqaivrei, 3) 일차적으로 종교적 의미에서 자주 “정결케하다”를 의미한다. 뿐만아니라 땅에서 부터의 잡초를 “제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차이점은 ‘아이레이’(ai[rei)는 죽은 가지를 제거하는 것을, ‘카다이레이’(kaqaivrei)는 살아있는 가지로부터 쓸모없는 가지를 떼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가 불필요한 가지를 “제하시며” 살아있는 가지를 “쳐서 깨끗하게 하신다”, 혹은 그가 죽은 가지를 “베어내시며” 살아있는 가지의 쓸모없는 부분을 “베어내어 깨끗하게 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농부이신 아버지(ὁ πατήρ ὁ γεωργόςἐστιν.) 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들을 제하심을 통해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농부가 살아 있으나 열매 맺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가지를 제거하는 이유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열매를 맺음을 통해 아버지는 영광을 받으신다(15:8; 15:16). 따라서 저자는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음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권면하고 있다.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ἤδη ὑμεῖς καθαροί ἐστε διὰ τὸν λόγον ὃν λελάληκα ὑμῖν·
농부는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깨끗게 하다’(kaqaivrei)는 형용사는 ‘깨끗하게 하다’(kaqaivrei)는 동사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의 성장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깨끗하게 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이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하셨다(13:10).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서 이미 “내가 일러준 말로”(lovgon o}n lelavlhka) 정화의 과정에 들어갔다고(13:10) 말씀한다. 하지만 “내가 일러준 말”은 예수의 어떤 말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수의 말은 계명을 의미한고 할 수 있다. 또 예수의 말은 예수가 전한 구원의 메시지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5:24). 여기서 후자가 더 타당하다고 볼수 있다. 예수의 말(lovgon)도 그의 모든 행동처럼(5:19)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7:16; 8:26; 28; 12:49)이다. 예수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는 요한 신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깨끗하여졌다”(kaqaivrei)는 의미에 대해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깨끗하여졌다'는 의미라고 보았다. 3절은 4-5절로 전환하는 역할로서 그들이 만일 깨끗해졌다면, 예수 안에 거하는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농부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깨끗하여졌다”(kaqaroiv)는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4-11절의 예수의 발 씻김 사건을 통해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깨끗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연관이 있다. 그것은 발씻김(예수의 죽음의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 안에 지속적인 머물며 예수를 통해 깨끗함을 받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 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14:23-2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μείνατε ἐν ἐμοί, κἀγὼ ἐν ὑμῖν. καθὼς τὸ κλῆμα οὐ δύναται καρπὸν φέρειν ἀφ’ ἑαυτοῦ ἐὰν μὴ μένῃ ἐν τῇ ἀμπέλῳ, οὕτως οὐδὲ ὑμεῖς ἐὰν μὴ ἐν ἐμοὶ μένητε.
예수는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진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실을 맺는 원리를 제시한다.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4). 여기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meivnate ejn ejmoiv, kajgw; ejn uJmi'n)는 말씀은 포도나무와 가지비유(15:1-17)의 핵심적인 사상이라 할수 있다.
예수 안에 거하는 목적은 과실을 맺기 위함이다. 과실을 맺는다는 사상은 15:2과 관련 있다. 예수는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ejn ejmoi; mevnhte)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제자들은 반드시 예수 안에 거함을 통해서만 열매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천명한다. 예수 안에 거하는(mevnw) 것은 믿음으로 그와 연합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예수 안에 거하고(mevnw) 예수는 신자 안에 거하는 ‘상호거함’(mevnw)의 원리이다. 포도나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만일 예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가지를 말라 죽게 된다. 신자공동체는 이제 예수 안에 거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너희 안에”(kajgw; ejn uJmi'n)라는 말씀은 조건문인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meivnate ejn ejmoiv, kajgw; ejn uJmi'n)의 귀결절로 간주된다. 만일 그들이 믿음을 통하여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러(mevnw) 있다면, 예수는 사랑과 열매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 거하실(mevnw) 것이다. 이것이 4절과 5절에서 열매 맺기 위해 예수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 구절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 되지 않았다. 예수 안에 거하는 방법은 곧 예수가 거하시는 요한 교회공동체에 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ὑμεῖς τὰ κλήματα. ὁ μένων ἐν ἐμοὶ κἀγὼ ἐν αὐτῷ οὗτος φέρει καρπὸν πολύν, ὅτι χωρὶς ἐμοῦ οὐ δύνασθε ποιεῖν οὐδέν.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신적 기원을 계시해주는 7개의 ‘에고 에이미’ 문형 중에서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ὑμεῖς τὰ κλήματα.)
5절은 4절에 대한 부정적 진술을 긍정적으로 언어로 전환한다. 예수는 그 안에 거하는(mevnin)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말씀한다. 앞 절의 말씀을 반복하여 진술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예수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는 -이다”(ἐγώ εἰμι) 진술을 통해 묘사한다. 여기서 강조 인칭대명사(나는/너희는)의 대구적 사용을 통해 가지로서 제자들의 정체성이 강조된다.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서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로 표현한다. “저가 내안에 내가 저안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의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14:10-11, 20).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의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기반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다. 모든 가지는 수액을 얻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요한의 중심사상인 ‘내주(內住, mevnw)- 예수께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의존적 관계-의 주제를 이곳보다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한 곳은 없다. 1절에 나타난 “나는 - 포도나무요”(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문형이 다시 나타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ὑμεῖς τὰ κλήματα.는 문형은 나무와 가지로서 그리스도와의 친밀함과 유대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mevnw) 과실을 많이 맺게 되지만, 반대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따라서 그리스도와 떨어져서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되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mevnw) “많은 열매”가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떠나는 것(cwri;)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예수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단호한 선언처럼 신자 개인과 교회는 예수를 떠나서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인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저자는 예수 안에 온전히 거하며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 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6ἐὰν μή τις μένῃ ἐν ἐμοί, ἐβλήθη ἔξω ὡς τὸ κλῆμα καὶ ἐξηράνθη καὶ συνάγουσιν αὐτὰ καὶ εἰς τὸ πῦρ βάλλουσιν καὶ καίεται
예수는 이제 과실을 맺지 아니함으로 버려지는 가지들의 운명, 즉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사람이 만일 내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져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15:6). “밖에 버리우다”(ejblhvqh e[xwἐ)는 표현은 이 세상 임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할 때에도 사용하였다(12:31). 말라진 가지들의 운명은 사람들이 주어 다가 불(pu'r)에 던져 살라짐을 당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불(pu'r)은 구약성서에서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예레미야도 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표현했다(렘 5:14).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백성들인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가지를 꺾는다”는 말로 표현했다(렘 5:10-11).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 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렘 5:14). 그러나 요한 사상에서 불은 유대교의 대중적인 사상이나 지옥이나 지옥불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마 13:40 참조).
예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함으로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가지와 같이 결국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의 상징인 포도원을 짓밟히고 버려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에스겔 15:4-7에 의하면 포도나무는 땔감으로 사용되기 위해 불(pu'r)에 던져졌고(70인 역, 겔 15:4; 요 15:2), 19:12에서는 포도나무의 줄기가 말라 불(pu'r)에 탔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들에 대한 심판은 요한의 미래적 종말론적 표현이다. 요한 교회공동체의 제자(신자)들은 반드시 예수 안에 거하여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요한 교회공동체 안에 온전히 거하며 열매 맺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7.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ἐὰν μείνητε ἐν ἐμοὶ καὶ τὰ ῥήματά μου ἐν ὑμῖν μείνῃ, ὃ ἐὰν θέλητε αἰτήσασθε, καὶ γενήσεται ὑμῖν
6절에서 예수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자에 대한 경고와 함께 7절에서는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로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는 기도응답의 약속을 제시한다. 여기서는 4절의 예수가 제자들 안에 거하는 것 대신, 그의 말(τὰ ῥήματά)이 그들 안에 거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예수의 ‘말’(τὰ ῥήματά)이 그들 안에 ‘거한다’(mevnw)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 자를 신뢰하며 그의 말씀을 간직하고 실천하고자 헌신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말씀’(τὰ ῥήματά )이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성령과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6:63). 예수의 ‘말’이란 아버지께 들은 것이며(8:26), 또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이다(12:49). 예수의 말을 믿는 것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할 때, 예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이 기도할 때 응답이 주어질 것이다. 5-6절은 머물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선택 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예수 안에 머문 자에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결과는 긍정적인 면으로 발전된다.
한편, 예수 안에 ‘거한다’(mevnw)는 것은 ‘내 주한다’는 의미로 예수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예수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며, 예수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한다(7절과 10절). 예수 안에 거하며(mevnw)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간구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며, 그들은 구하는 바들을 아버지께 항상 응답받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7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지속적인 머무름에 한 강조와 그의 기도들이 응답될 것이 약속한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결론>
이와같이 예수는 “에고 - 에이미 "Ἐγώ εἰμι "문형을 통해 자신은 참 포도나무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ὴ 라고 선언한다. 본래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가 참 포도나무시다. 예수를 참 포도나무로 묘사한 것은 주로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소명을 실패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라 할수 있다. 이제 참된 이스라엘은 예수에게로 옮겨진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농부로 소개하면서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농부의 목적은 포도나무가 많은 열매를 맺게 는 것이다. 농부는 열매를 잘 맺도록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여 깨끗게 하고 나머지 가지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주신다. 이 비유를 통해 요한은 제자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예수 안에, 나아가 공동체 안에 물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농부의 돌봄을 받아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듯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의 돌보심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깊은 유대관계는 ‘거하다’(mevnw)라는 말을 통해 강조하는데, 특히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15:4-10). 요한복음에서 ‘거하다’(mevnw)라는 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너희는 내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한다” μείνατε ἐν ἐμοί, κἀγὼ ἐν ὑμῖν 는 상호 내주에 대한 묘사이다. 이 관계는 바로 우리의 믿음의 핵심이며,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지속적으로 생명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는 방법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그 안의 곧 말씀 안에 거할 때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기도 응답에 대해 약속하신다. μείνατε ἐν ἐμοί, κἀγὼ ἐν ὑμῖν. καθὼς τὸ κλῆμα οὐ δύναται καρπὸν φέρειν ἀφ’ ἑαυτοῦ ἐὰν μὴ μένῃ ἐν τῇ ἀμπέλῳ, οὕτως οὐδὲ ὑμεῖς ἐὰν μὴ ἐν ἐμοὶ μένητε. 예수 안에 머무는 것이 곧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저자는 예수와 교회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열매를 맺고 기도의 응답을 위해 교회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며 예수 안에, 곧 그의 말씀 안에 거해야 된다는 것이다(15:7). <필자의 논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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