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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의 안식 - 4장 중심으로

by 은총가득 2020. 6. 16.


들어가는 말

안식이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 약 180번 정도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제4계명의 안식일과 관련해서 사용된다. 신약에서는 주로 복음서에서 많이 등장하며 그 다음으로는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을 유대인의 율법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안식을 죽어서 천국에서 취하는 휴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안식과 죽음은 종종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도 죽음을 영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표현하는데 여기서 영면(永眠)은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휴식이라는 의미보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새로운 활동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에 관해서 가장 자세히 설명하는 곳이 히브리서 4장이다. 히브리서 4:1~11에는 “안식”(katavpausi"카타파우시스)이라는 단어가 모두 11번 등장한다. 단지 2절과 7절만을 제외하고 매 절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1번 이상씩 사용되고 있다.1 그러면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히브리서는 안식에 관해 다음과 같은 3가지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안식이란 무엇인가? 둘째,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셋째,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안식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서에는 안식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다. ‘가나안 안식’(Canaan Rest, 3:11, 18), ‘창조의 안식’(Creation Rest, 4:3), ‘제칠일 안식’(Sabbath Rest, 4:4, 9), ‘천상적 안식’(Heavenly Rest)이 그것이다.2 히브리서 3장에서는 안식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히브리서 3:7~11에서 시편 95:7b~11을 길게 인용한 후에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안식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원래 시편 95편은 시편 기자가 당시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과거 출애굽 시대에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조상들의 불신앙을 답습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메시지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시편을 인용하여 1세기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불신앙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다시 사용한다. 광야의 출애굽 백성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출애굽 백성들이 지향했던 가나안 안식 외에 그리스도인이 들어가야 할 또 다른 안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저자는 3장에서 출애굽 백성들의 불신을 경고의 메시지로 소개한 후에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안식은 과거 이스라엘이 들어갔던 가나안 안식과 어떻게 다른가? 우선 안식의 개념을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안식을 ‘장소적 개념’(rest as a place)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안식을 ‘상태의 개념’(rest as a condi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출애굽 백성들이 지향했던 가나안 안식은 안식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안식이란, 가나안이란 특정한 장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나안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였다. 물론 가나안이 안식의 장소라고 해서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쉬기만 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도 애굽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농사를 하고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해야 하는 힘든 일들을 계속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제 애굽에서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들에게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주었으며 땀 흘려 일한 결과도 이제 자신들이 스스로 즐기고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가나안의 안식이 기본적으로 장소적인 개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무조건 안식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살아갈 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주변의 이방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그들은 더 이상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참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통치와 뜻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황 혹은 상태가 될 때 그들이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가나안의 안식이 기본적으로 장소적인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식을 어떤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나안은 단지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택된 장소라는 측면에서 그곳이 안식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가나안의 안식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안식은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저자는 히브리서 4장에서 안식을 가나안의 안식과는 다소 다르게 설명한다. 먼저 1절에서 우리에게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함으로써 가나안 안식과 다른 새로운 안식이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8~9절에는 더욱 분명하게 가나안 안식과는 다른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말한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들어갈 안식은 어떤 것인가? 3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한 후 4절에서 창세기 2:2를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 후 쉬셨던 창조의 안식에 대해서 소개한다. 그리고 9절에서는 이 안식을 가리켜 “제칠일 안식”(Sabbath-rest)이라고 표현한다. 개역개정의 9절에서는 그냥 “안식할 때”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신구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제칠일 안식’(sabbatismov" “a Sabbath-day rest”)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저자는 4장에서 시편 95편의 가나안 안식과 창세기 2:2의 ‘제칠일 안식’을 서로 연결하여 설명한다. 즉 저자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던 가나안의 안식을 창조의 안식이라는 관점에서 재정의하면서 독자들에게 안식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제칠일 안식’은 안식을 장소적인 관점보다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때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어떤 장소로 들어간다는 표현이 아니라 어떤 상태 혹은 조건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안식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물론 안식을 상태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고 해도 장소적인 관점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안식에 관한 장소적인 개념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시편 132:14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시온을 여호와의 영원한 안식의 장소(resting place)로 묘사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지상적 예루살렘이 아닌 천상적 예루살렘을 안식의 장소로 이해한다. 히브리서 12:22~24는 독자들이 이제 막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안식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안식을 장소라는 관점과 동시에 상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한다. 장소적인 관점에서 제칠일 안식을 이해하면 그것은 천상적인 성전 혹은 천상적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히 6:20; 10:1; 12:22~24; 13:14). 반면에 안식을 어떤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안식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현실적인 세상에서부터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히 4:3). 출애굽 백성들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히 4:2).

그런데 저자는 여호수아가 광야의 제2세대를 인도해 들어갔던 가나안 안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다고 말한다(히 4:8). 저자는 시편 95편의 증거를 통해서 가나안 안식이 아닌 다른 한 완전한 안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 그런즉 안식할 때가(제칠일 안식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7~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야 할 참된 안식은 ‘제칠일 안식’이다. 제칠일 안식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안식의 궁극적인 원형은 하나님의 안식에서 찾을 수 있다.3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서 가나안 안식과 그리스도인의 안식을 모형론적으로 서로 비교한다. 가나안의 안식은 제칠일 안식을 지향하며 그것을 예비적으로 보여 주는 모형이다(히 8:5; 10:1).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이 성취되는 것은 가나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안식의 원형)
→ 가나안의 안식(모형론적 성취): 여호수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 제칠일 안식(종말론적 성취): 예수, 지상에서 천상적 예루살렘으로

이 두 안식의 모형론적인 관계는 여호수아와 예수라는 이름의 비교에서 잘 드러난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발음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 jIhsou'")이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안식도 예수(즉 여호수아)에 의해서 주어졌으며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도 예수(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저자는 ‘제칠일 안식’(sabbatismov")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가나안 안식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인 안식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종말론적인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은 미래에 나타날 실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때부터 이미 항상 존재해 왔던 현재적인 실재라고 말한다(히 4:3). 단지 인간은 지금까지 불순종으로 인해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광야의 백성들이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듯이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라고 말하고 있다(히 4:1, 11).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그러면 안식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저자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한다. 안식에는 믿음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가나안의 안식이나 제칠일 안식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광야의 백성들이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그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데 히브리서 3:19에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앞에 있는 18절에서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순종하지 아니함과 믿지 아니함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서에서는 흔히 이신칭의 논쟁에서 따지듯이 믿음과 행위를 서로 다른 것이라고 구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믿음과 순종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반대로 믿지 아니함과 순종하지 아니함도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광야의 백성들의 불신앙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다. “하나님을 시험함”, “마음을 강퍅하게 함”, “마음이 미혹됨”, “믿지 않는 악심”, “하나님을 격노케 함”, “범죄함”, “순종치 아니함”, “믿지 아니함” 등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은 광야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던 그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며 그 결과로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광야의 40년을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이 고난과 어려움 당할 때마다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공급하시고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적으로 자신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당장 눈앞에 닥친 고난만 생각하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했다. 이처럼 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다.

광야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비롯한 온갖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 그들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믿고 인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시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으며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보고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다(민 14장).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불신과 반역적인 행위가 어떤 것이었는지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사람들은 결단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을 것이라고 맹세하여 말씀하셨다(민 14:21~24).

히브리서 3장에서 저자는 “오늘”이란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로 오늘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매일매일 말씀하신다. 광야에서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로 오늘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저자는 4장에서 그리스도인들도 광야의 백성들과 동일한 상황에 있다고 간주한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복음을 들은 자들이다. 그러나 만약 광야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오늘”이라는 시간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은 복음을 듣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시간이다.

저자가 “오늘”이라는 시간을 강조하는 이유는 광야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1세기 당시의 독자들도 날마다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여러 종류의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었다. 독자들이 처했던 역사적 정황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여러 번에 걸쳐서 독자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싸웠으며, 비방과 조롱을 받고, 갇히기도 했으며, 심지어 피 흘리는 싸움까지 각오해야 했다(히 2:18; 10:32~36; 12:4). 그리스도인들도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오늘이라고 불리는 하루하루를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백성들의 불순종을 결코 답습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과 핍박과 비방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히 10:39).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간다고 할 때 이 믿음은 매우 실천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매일의 핍박과 유혹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삶에 관한 문제이며 순종을 위한 피 흘리는 투쟁이다(히 12:3~4). 믿음은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거나 교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고난을 견디는 인내이며 핍박과 유혹을 극복하고 복음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과 행동이다. 불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고난과 핍박이 두려워서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큰 은혜를 배신하는 반역과 같은 것이다(히 6:4~6).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실천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고 강조한다.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그러면 종말론적인 제칠일 안식에는 언제 들어갈 수 있는가? 히브리서 4:1에서는 안식이 약속으로 남아 있으므로 미래에 들어갈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곧 이어 3절에서는 이미 믿는 우리는 지금 저 안식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실 4:1~11에는 안식이 미래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이라는 설명이 함께 뒤섞여 있다. 안식을 미래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는 1절과 더불어 5절, 9절, 11절에 등장한다. 반면에 안식을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3절, 10절이다. 특히 10절은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안식은 미래에 들어갈 약속으로 남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안식은 현재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실재인가? 이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안식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실재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에 3절에서 현재 시제로 사용된 “들어가다”(eijsevrcomai)라는 동사가 미래적 개념을 나타내는 현재 시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것을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sure of entering) 라는 뜻으로써 현재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미래에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강의적 용법이라고 설명한다.4

둘째, 현재 시제를 사실적인 현재로 이해하면서 안식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안식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평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대주의적 경향이 강한 학자들은 이와 유사하게 안식을 현재적 지상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안식이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천년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5

셋째, 안식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적인 실재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실재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링컨(Lincoln)은 히브리서의 안식을 종말론의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 yet)의 관점에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실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4:3의 현재 시제를 미래적 의미의 현재 시제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며 이것을 진정한 현재 시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 바레트(Barrett) 역시 하나님의 안식은 현재적이고 동시에 미래적이므로 인간은 그 안식에 들어가며 또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안식이 현재적인 이유는 3:1에서 독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이미 나누어 가졌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6:5에서 독자들이 내세의 능력(the power of the coming age)을 이미 맛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독자들이 이미 하나님의 안식을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7

그러면 히브리서의 안식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우리는 앞에서 안식을 상태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과 장소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두 가지 이해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안식을 상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죄로부터의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갈 때 얻을 수 있는 안식이다. 마태복음 11:28에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즉 안식하게) 하리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때 현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안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인 사역을 통해서 죄로 인해 사탄에게 사로잡혀 죽음을 두려워하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히 2:14~15; 3:1).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독자들이 이미 천상적인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과 같은 것이다. 히브리서 12:22에는 독자들이 이미 천상적 예루살렘에 “도착했다”(proselhluvqate)라는 현재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설명한다. 반면에 13:14에서는 “영구한 도성”, 즉 천상적 예루살렘이 이 세상에는 없고 장차 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12:22에서 우리가 이미 천상적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것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서 의롭게 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현재적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13:14에서는 장소적 의미에서 영구한 도성은 현재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식도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안식의 장소인 하늘의 예루살렘은 분명히 미래에 들어갈 장소이지만 그 장소에서 누릴 안식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틀에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완전한 안식을 누릴 장소는 하늘에 있는 도성이며 그곳에는 미래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 안식을 이 세상에서 미리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현재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자는 약속으로 남아 있는 미래의 안식에 들어갈 보장이 없다.

설교를 위한 가이드

1. 안식이란 무엇인가?
안식은 단순히 아무런 활동도 없는 정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행위라는 것을 설명하라. 그리고 참된 안식이 가만히 있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임을 설명하여 성도들에게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동기를 부여하라.

2.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안식에 들어가는 실천적인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여 순종이 있는 믿음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히브리서의 이러한 믿음이 바울 서신에서 강조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설명하여 믿음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라. 바울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를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인간의 행위를 비판했던 것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휴머니즘적 선행이나 유대인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3. 안식에 언제 들어가는가?
참된 믿음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라. 삭개오가 복음을 듣고 재산의 1/4을 나누어 주고도 기뻐한 것이나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기뻐하여 찬송한 것은 모두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식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의 순종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 6절에는 안식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대신 5절의 안식을 선행사로 가지는 인칭대명사 aujthvn이 사용되고 있다.
2. ‘천상적 안식’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천상적 예루살렘을 안식의 장소로 이해한다. “하늘의 부르심”(heavenly calling, 3:1), “하늘의 것”(heavenly things, 9:23), “하늘에 있는 본향”(heavenly one, 11:16), “천상적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 12:22) 등은 모두 천상적인 안식 혹은 예수께서 이미 우리를 앞서서 들어가신 안식의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3. Harold W. Attridge, “Let Us Strive to Enter that Rest: The Logic of Hebrews 4:1~11,” Harvard Theological Review 73:1~2 (1980): 279~288.
4. Paul Ellingworth,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93), 246; Craig R. Koester, Hebrews (New York: Doubleday, 2001), 270 이하;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1990), 109 이하; David A. DeSilva, Perseverance in Gratitude: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Grand Rapids: Eerdmans, 200), 163.
5. Walter Kaiser, “The Promise Theme and the Theology of Rest,” Bib Sac 130 (1973): 135~150; Stanley Toussaint, “The Eschatology of the Warning Passages in the Book of Hebrews,” GTJ 3 (1982): 67~80.
6. A. T. Lincoln, “Sabbath, Rest, and Eschatology in the New Testament,” in D. A. Carson, ed.,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205~217.
7. C. K. Barrett, “The Eschatology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W. D. Davies and D. Daube, eds., The Background of the New Testament and Its Eschat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4), 363~393, esp. 372.
                 < 목회와 신학- 손기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