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하심(Provocation)
'진노, 분노, 분한' 등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죄악을 반대하심을 선포하는 성경적인 용어들이다.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원래 자발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피조물들의 죄악 때문에 부득이하게 유발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를 격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사랑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그의 자비를 거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사 28:21; 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러한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않음 = 역자 주). 이에 대해서는 다드(C. H. Dodd)가 다음과 같이 잘 관찰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사람의 죄악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사람의 선행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 때문이다".
한편 Fichtner와 Staehlin은 각각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샅샅이 연구하여 '진노란 비인격적인 징벌로서 추상적인 율법이 자동적이며 인과 응보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합당한 논증이 아니다. 즉, 구약성경에서 진노란 죄악을 적극적으로 징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주관적이며 자유로우신 의지의 표현이며, 신약성경에서도 진노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반응이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께서는 죄악을 보실 때 그것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반드시 처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가장 인격적인 방법으로 그의 분노를 나타내신다. "나 여호와가 반드시 보응하리라"(겔 :8,9)와 요 3:36; 롬 1:18; 엡 5:6; 골 3:6; 계 19:15; 11:18; 14:10; 16:19; 6:16; 롬 9:22과 같은 신약성경 구절들에는 진노가 특별히 '하나님의 진노, 그의 진노, 당신의 진노, 혹은 어린양의 진노'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악한 자들을 그 더러움과 부끄러운 정욕과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기도 하는데, 이것은 진노하시는 날과 '심판' 때에 그것들을 형벌하시기 위함이다(롬 1:18-2:6).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1:7-9에서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처벌하시는 주 예수님의 행동을 붓으로 그리듯이 아주 인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란 어떤 분노심이나 미워하는 감정이라기 보다는 악을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실제로 이 세상과 내세에 하나님이 죄악을 심판하시는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형벌 속에서는 악한 성읍이나 민족에게 독한 질병이나 사망이나 추방이나 파멸을 내리시는 것고, 마음을 완악케 하는 것과, 우상 숭배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단절시켜 버리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벌들은 내세까지도 계속되는데, 예수님께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지옥에 던져 넣는 영원한 형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진노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죄악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시고,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영원히 정죄하실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신 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적과 경이로 가득 찬 복스러운 계시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실제로 잘 이해한 사람은 그의 극진하신 자비하심에 압도될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 54:7-10이나 ASV의 시편 30:5에는 "그의 진노하심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구절들에 있어서 '자비'가 우세한 단어이듯이 신약성경의 궁극적인 단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것들을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하는 길이 신. 구약 성경에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다. 사람의 미약한 노력으로써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 죄 용서함과 새롭게 하심을 얻으라고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르아살과 예레미야와 같은 그의 종들이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신다(용납하신다). 그리고 그 자신이 친히 그의 진노가 돌이켜질 수 있는 제사 제도를 마련하셨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고 회개하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시다(살전1:9,10). 이처럼 우리가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의 죽으심으로써 화목될 때, 우리는 그의 살으심으로써(생명으로써)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롬 5:9,10). 따라서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가장 무서운 단어는 '어린양'의 진노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시고 자신이 친히 그 형벌을 담당하셨던 분이시다.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4:1-16)
a.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1-13
b. 대제사장 그리스도 14-16
제 4 장
a.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1-13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안식은 창조 사역이래 그의 백성들에게 계속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비록 여호수아는 모세가 들어가지 못한 가나안 땅으로 백성을 인도했지만, 그 역시 안식을 줄 수는 없었다(8).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는 여호수아 보다 우월하시다.
v.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두려워할지니 Fobhqw'men 포베도멘, fear"는 헬라어 본문에서 첫머리에 위치하여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이것은 본서의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시사한다. 모든 사람들이 방심하지 않고 하나님말씀에 보다 민감한 태도를 지닐 것을 요구하는 저자의 목회자적 관심을 나타낸다(11절; 3:12).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안식 katavpausin 카타파우신, rest”은 출애굽 세대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다(신12:9-10).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 사이에서 이 안식의 개념은 주로 회당에서의 가르침과 토론을 통해 형성된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시95:11의 '내 안식'은 본절에서 종말론적인 의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의 안식을 의미한다(요 14:1-4). 한편 “약속 ejpaggeliva" 에팡겔리아스, a promise”이라 함은 '안식'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 출애굽한 제1세대는 죽었으나 제2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측면에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저자는 지역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약속의 성취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안식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행되지 않았으나 그 약속은 변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계속되어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었다(1:14; 6:12,17; 9:15).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본절은 “있을까 함이라 dokh'/ 도케, should seem”은 '판단하다', '가정하다'의 뜻으로 해석하는 차이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1)혹자는 수신자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로 해석한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비록 안식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약속을 상실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v.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복음 전함을 eujhggelismevnoi 유엥겔리스메노이, us was the gospel”을 '좋은 소식을 전파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조'의 완료 수동형이다. 하나님의 좋은 소식은 가데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복된 소식을 전해들었다(출 19:3-6; 23:20-33). 이와 동일하게 당시 수신자들도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즉 안식에 대한 약속은 동일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전혀 유익하지 못했다. “화합지 sugkekramevno" 슁케케라스메노스, being mixed with” 하는 헬라어에 대한 독법은 두 가지이다. (1) “말씀 로고스”과 연결되어서 단수인 '슁케케라스메노스'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말씀과 이를 들은 자들의 믿음과 화합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2) “저희 에케이누스”와 연결되어서 복수인 '슁케케라스메누스'로 읽는다. 이 경우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자 즉 여호수아와 갈렙과 믿음으로 화합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다. 두 가지 경우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상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믿음 pivstei 피스테이, faith”은 본서에서 '순종'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3:18,19). 따라서 '믿음'은 정적인 신앙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동적이며 실천적인 신앙임을 시사한다.
v.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믿는 우리들 we who have believed'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있다. “들어가는도다 eijsercovmeqa 에이세르코메다, do enter”는 '에이세르코마이'의 현재 중간태이다. 이 단어를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에이세르코메다'가 현재형으로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미래에 보장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현재이나 그 완성은 미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의 완성이 미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안식 katavpausivn rest”은 시 95:11의 “내 안식 my rest”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안식'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즐기시는 안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절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즐기시는 안식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참하게 됨을 시사한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이 구절은 시 95:11의 인용이다(3: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 받은 하나님의 안식 즉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길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결과이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것이지 결코 안식이 폐지되었거나 혹은 안식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완성되어 있었다. 세상 창조 때 완성된 하나님의 안식은 창 2:2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안식이 창세 이후로 지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모든 이가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v.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 저자는 본절에서 창 2:2을 인용하면서(출 20:11; 31:17) “어디 이렇게 pou ou{tw" 푸 후토스, in a certain place of the seventh day in this way”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당시 성경에 장, 절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경 어느 곳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저자는 창2:1-3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의 안식을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자신이 행하신 일의 완성과 만족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쉬셨다 God rested'는 것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에 들어가셨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섭리 가운데 인간을 구속하시고 유지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을 행하신다(요 5:17). 본절에서 저자가 인용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미래에 인간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창조 이래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v.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또 다시 pavlin 팔린, again”는 앞에서 인용한 문구에 다른 인용구를 첨가시킬 때 저자가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 방법이다(1:5; 2:13; 10:30). 본절은 3절에서 인용한 시95:11의 반복으로서 저자는 이 반복된 인용을 통해서 창조 이후에 취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받은 인간에게 약속된 안식'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안식에 대한 약속의 특성을 설명하여 수신자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본절에서는 시95:11a에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가 생략되어 있다.
v.6 본절은 앞에서 진술한 내용의 요약이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남아 있거니와 ajpoleivpetai 아폴레이페타이, it remains”는 '뒤에 남겨두다'라는 의미로(9절) 설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유효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다(3:7).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본절은 3:16-18과 4:2에 대한 요약이다.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 to whom it was first preached'이란 시 95:8-11에서 언급된 출애굽 세대를 가리킨다(민 13:26; 14:9). 출애굽 세대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11, 12;21-23). '순종치 아니함'이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을 시사한다(11절; 3:10; 롬 11:30).
v.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 “오랜 후에 meta; tosou'ton crovnon 메타 토수톤 크로논, after such a long time”는 광야 시대 이후부터 다윗의 때에 이르는 시기를 가리킨다. 한편'다윗의 글에'는 인용문인 시 95편의 저자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윗의 글에'라는 표현은 맛소라 본문(Massoretic text)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70인역에는 시 95편의 제목으로 '아이노스 오데스 토 다우에이드'(다윗의 찬양)이라고 기록되어 다윗이 지은 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혹자는 70인역을 따라 '다윗의 글에'라는 구절이 틀림없이 다윗이 쓴 시편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의 저자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 본절은 시 95:7b, 8a의 인용으로 그 초점은 '오늘날'에 있다. '오늘날'이라 함은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효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절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현재에도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권면한다.
v.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안식'의 개념은 가나안 땅의 정착을 의미했다(신 3:20; 12:9; 25:19; 수 1:13). 그래서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진 후에는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난다(수 21:44; 22:4). 그러나 본절에서는 구약의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에 들어감'이라는 전통적인 안식과 시 95편에서의 '내 안식'사이에 차이점이 발생한다. 전통적인 안식의 개념인 가나안에서의 정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에 대한 성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실체인 다른 안식을 상징한다.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시 95편에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대한 상징으로서 진정한 안식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 한편 “여호수아 jIhsou'" 예수스 Jesus”라는 명칭은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관 관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서 처음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나 나중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심을 암시한다.
v.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본절은 앞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결론으로 6a절과 구조적으로 병행을 이룬다. 결국 본절은 6절에서 내려진 결론을 다시 반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안식 sabbatismo;" 삽바티스모스, a rest”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혹자는 이것이 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역적이며 세상적인 의미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혹자는 '삽바티스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그곳에 정착해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할 수 있으나(신 25:19), 근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영적인 의미의 완전한 안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3)혹자는 이것이 미래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안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삽바티스모스'를 '축하한다'라는 뜻의 동사 '삽바티제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안식'이라는 의미보다 미래에 누릴 '안식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 세 가지 중 (1)의 견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종말론적 의미로서의 영적인 안식을 강조하는 본서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타당치 않으며 그외 나머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따라서 '삽바티스모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서(마 11:28-30) 그 안식이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나타낸다.
v.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로 해석한다(KJV, LB). (2)혹자는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한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장의 전후 문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들어간 eijselqei'n 에이셀돈, to enter”은 부정 과거 분사이나 일반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형으로 나타난다(for whoever enters God's rest, RSV, NIV).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하늘나라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안식을 누리고 있으나 아직 완전한 안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완전한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v.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힘쓸지니 spoudavswmen 스푸다소, Let us labour”는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3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6절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암시한다(3:17,18). 이스라엘의 불순종 행위는 현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가져다 주는 모델이다. 여기서 “본 uJpodeivgmati 휘포데이그마티, example”은 '본보기', '복사본'을 뜻하는 것으로 저자는 본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한 것을 경계로 삼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을 권면한다.
v.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is living and powerful'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 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mavcairan 마카이란, sword”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 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 1:29) 등의 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yuch'" kai; pneuvmato"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soul and spirit”, “관절과 골수 aJrmw'n te kai; muelw'n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 the joints and marrow”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 '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 한편 “찔러 dii>knouvmeno" 디이이크누메노스, piercing”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감찰하나니 kritiko;" 크리티코스, is a discerner ”는 법정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 95:11).
v.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 5:17; 갈 6:15)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ajfanh;" 아파네스, that is not manifest'는 본문에만 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a'아 와 '보이다 jfainw 파이노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 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사실이었다.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pro;" o}n hJmi'n lovgo"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 to whom we must give account”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 한편 “드러나느니라 tetrachlismevna 테트라켈리스메나, opened”는 “목을 뒤로 젖히다 trachlw" 트라켈로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 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b. 대제사장 그리스도 14-16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적 사역(4:14-10:)에 대한 도입부로서 그리스도가 구약의 레위 제사장들과는 구별되는 ‘큰 대제사장’ 임을 강조하고 있다. 2:17-3:1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분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셨으므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다 아신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피난처와 요새가 되실 수 있다.
v.14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큰 대제사장 ajrciereva mevgan 아르키에레아 메간, a great High Priest”으로 지칭하고 있다. '큰 대제사장'은 '대제사장'에 '큰'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으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우월함을 나타낸다.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 예수의 우월성은 '승천하신 자'라는 초월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승천하신 자 dielhluqovta tou;" oujranouv" 디엘렐뤼도타 투스 우라누스 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에서 '디엘렐뤼도타'는 '...통하여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디에르코마이'의 완료 능동태 분사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뜻보다는 하늘을 통과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지고(至高)한곳으로 가셨음을 뜻한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시므로 그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사역의 탁월성을 소유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Jesus the Son of God'는 예수께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성을 소유하셨음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유한성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행위와 약속이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앞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더 나아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근거가 된다. 여기서 “믿는 도리 oJmologiva" 호몰로기아스, our profession”는 '고백'을 뜻하는 말인데 이 고백의 내용은 당시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익히 알고 있는 공식화된 고백으로 본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킨다. 한편 “굳게 잡을지어다 kratw'men 크라토멘, let us hold fast”는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뜻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권고이다.
v.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 '연약함'은 죄의 유혹에 대한 인간의 연약성뿐만 이니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한편 “체휼하지 sumpaqh'sai 쉼파데사이, with the feeling”는 '함께 수난 당하다'라는 의미의 '쉼파스코'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정하다'(to sympathize, NIV)라는 의미이다. '쉼파데사이'는 단순히 감정을 공유한다는 의미로서의 '동정'(同情)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행위를 내포한다(10:34; 13:23; 4 Macc 4:25).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체휼하시는 예수'에 대한 강조는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공감하시는 분으로서 능히 인간을 도우실 수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이것은 예수께서도 인간과 똑같이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인간과 같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죄가 없으시니라'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두 가지 견해가 나타난다. (1)혹자는 본문의 내용 즉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점을 부인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본장에서 대제사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자신의 죄를 사함 받기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것처럼(5:3), 예수도 대제사장으로서 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해야 함을 알고 모델이 되셨다'(5:8)고 주장한다. (2)혹자는 본문의 표현 그대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범죄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에서 언급된 “모든 일에 한결같이 kata oJmoiovthta 카드 호모이오테타, in all points tempted as we are”는 '같은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동일성 보다는 유사성 내지는 구별성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인간이셨으나 인간과는 달리 흠이 없으시며(9:14) 지상의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대제사장과 같이 자신의 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는 분이었다(7:27). 따라서 본절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인간들처럼 시험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극복하심으로 범죄하지 않으셨으며 시험을 인간과 동일하게 받으심으로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낱낱이 아심을 나타낸다.
v.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 “때를 따라 eu[kairon 유카이론, time of need”는 '좋은' 혹은 “옳게 eu[ 유”와 “시기 [kairos 카이로스”가 합쳐진 합성어로서 '적절한 시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본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를 아실 뿐만 아니라 시기 적절하게 베풀어주심을 나타낸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보좌 qrovnw, 드로노, throne”는 '왕의 보좌'를 뜻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나 '그리스도의 보좌'(1:3,8)를 나타낸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 사용되었다. 이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현존해 계시는 장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상징적 장소인 성막 안의 속죄소와 연관된다(9:5; 출 25:21). 대제사장들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에 나아갈 수 있었으며 속죄의 행위가 받아들여졌을 때 지성소 안에 있는 그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소(施恩所)가 되었다(9:5; 레 16:2-34).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더 이상 모세가 전해준 율법적인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우편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대제사장으로 좌정해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joy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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