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4:1-16)
가. 삼가 두려운 태도와 믿음으로 말씀을 받으라(1-2)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인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들을 때에 삼가 두려운 태도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1). 이 약속은 말씀을 듣는 자들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2).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언약을 잘 지키면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들었다(출 19:3-6; 23:20-3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고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도 역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 창조와 안식(3-4)
하나님의 안식은 이미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있었다.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하시던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다(창 2:1-3). 첫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만족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시지 않고 그 일을 다시 완성하려고 하셨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피조물들도 따라야 할 본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6일 동안 자기 일을 힘써 하되, 제 7일에는 쉬라고 명하셨다. 이러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에 성도들이 영원히 누릴 안식의 예표요 보증이었다(습 3;17)(3-4). 이미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 즉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이 미래에 완성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믿음으로 현재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 이스라엘과 안식(5-8)
이 안식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될 때에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다가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시 95:11). 그러나 이 안식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남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사사시대와 사울 왕의 시대가 지난 후)에 다윗은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권하였다(시 95:7(하), 8(상)). 다윗은 안식의 때를 가리켜서 ‘오늘날’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렇게 또 다른 안식의 때를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은 과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안식은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통해서 성취되는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식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 남아 있는 안식(9-10)
만일 여호수아에 의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시 95편) 다시 안식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이다(9). 그러나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은 결코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대적들이 남아 있었으며, 그 안식은 순종할 때에만 허락되는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불순종하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린 안식이 안식의 본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온전한 안식을 예표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여호수아'는 '예수'라는 헬라식 발음을 히브리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처음 '예수'인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둘째 예수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안식으로 인도하셨다(Morris).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수아 이후에도 아직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다”(9)고 말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완전한 영적인 안식과,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
이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쉰다(10).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구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킨다. 이것은 창조 때에 선포된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누리게 된 안식의 시제성은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식'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주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는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것이다.
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11)
신약의 성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불 신앙으로 인해 이 안식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약속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11). '힘쓴다‘('스푸다소멘')는 말은 '재촉하다', '열심히 노력하다'라는 의미로 의지를 나타낸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의지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심을 다해서 이 약속을 붙들려고 해야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순종치 않는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대적들의 큰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마. 말씀을 청종해야 하는 이유(12-13)
*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명력과 역동성이 있다. 그 말씀은 생명력 있는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수행한다.
*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딘 칼이 아닌 예리한 칼 과 같아서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것을 말하며, '찌른다’(디이이크누메노스')는 말은 '꿰뚫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내면까지 들어가서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영적인 모든 질병들을 수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감찰한다'('크리티코스')는 말은 법정 용어로서 ' 판단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판단하며, 그 행위의 깊숙한 동기까지도 판단하여 공의를 시행한다.
* 그러므로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을 피조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동성이 있으 며, 마음과 뜻을 감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피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 므로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마치 벌거벗은 사람과 같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 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두려움을 가지고 믿음으로 화합해야 한다.
바.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14-16)
우리는 창조주 그리스도와 그 말씀 앞에 설 때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말씀을 통해 자기의 모든 죄악상을 보고 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실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외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가리켜 주는 말이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이나 멜기세덱은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웠지만,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운 적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이유는 그가 인류의 모든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을 “승천하신 자”라고 소개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은 이 땅의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하나님 아들 예수”시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은 자기 몸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해 중보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자기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초월성, 그리고 신성은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할“ 근거가 된다. '굳게 잡으라'('크라토멘')는 말은 '단단히 쥐다' 혹은 '들러붙다'의 말로 서 이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을 권고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 하지 않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탁월하시고, 초월하여 계시며, 신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성과, 인간이 지닌 모든 한계성을 체휼하셨다. '체휼하다'('쉼파데사이')는 말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아니하는...아니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동일하게 연약함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완전히 인간성에 참여하셨기 때문이다(2:17,18). 주님께서는 죄에서 떠나 계신 분이시지만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이 말은 예수께서도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이 겪는 모든 어려움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돕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연약성을 이해해야만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인간과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셨기 때문에, 인간들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어려움을 알고 또 능히 도울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16).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하여 자기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만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때를 따라'라는 말은 '적절한 시기'를 의미한다. 불완전하여 수시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기 때문에 때를 따라 적절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때를 아시며,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 시기 적절한 도움을 베풀어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이며 성막 안에 있는 속죄소를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곳에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 곳은 ”시은소“(은혜를 베푸는 장소)라고 불리워졌다. 그러나 본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구약의 성도들은 성소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때에는 대제사장만이 시은소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언제든지 때를 따라 도움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성을 가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이러한 위대한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큰 위로와 힘을 제공해 줄 것이다. < 글: 최영찬>
'히브리서 연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수아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저 안식에 들어가기에 힘쓰라(히4:1~11) (0) | 2020.06.16 |
---|---|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히 4장) (0) | 2020.06.15 |
히브리서 4장 (0) | 2020.06.15 |
히브리서 4장 주석 (0) | 2020.06.15 |
히브리서의 경고 및 권면 및 배경 (0) | 2020.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