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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3장 모세와 그리스도(히 3:1-19)

by 은총가득 2020. 5. 13.

 

      모세와 그리스도(히 3:1-19)

 

 

앞에 1장과 2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존재로 창조된 것으로 인식되어 오던 천사와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월등하심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그러나 본장에 와서는 역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입증하고자 하는 목적은 같으나 여기서는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모세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로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최대의 종교적 목표로 알고 살아가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모세는 여전히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따라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와 관련하여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기독교보다 율법준수를 가르치는 유대교는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일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회유와 핍박이 거듭되자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모세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더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유대교보다 기독교가 여호와 신앙을 계승한 진정한 교회임을 변증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논증되고 있는 3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1-6절까지의 전반부와 7절부터 마지막 19절까지 이어진 후반부이다. 그 가운데 여기서는 1절부터 6절에서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그 의미와 구속사적 교훈을 생각해 본다.


  이 부분에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세를 집 맡은 사환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집을 맡은 아들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유대민족들에게 모세가 가장 각별한 인물로 각인 되었던 것은 그가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영도하여 내어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창설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인간가운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전달한 가장 훌륭한 선지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모세에 의해 전달된 그 율법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어 온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 따라서 모세는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제 모세는 선지자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모세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다.


(민 12:6-8)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또 하나님은 모세에 대하여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다고 평가하기도 하셨다(민12:3).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월등한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만 하면 기독교가 당시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유대교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던 것으로 사료 된다. 따라서 모세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하신 그리스도를 입증하고자 함이 3장에 나타난 주요 핵심 진술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1절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깨달음을 촉구하고 있다. 1절에서 ‘깊이 생각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노에사테’(κατανοήσατε)는 깊은 관심을 갖고 자세하게 살피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예수님에 대하여 그렇게 살필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란 표현을 썼다.


  여기서 ‘믿는 도리’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는 좀 더 정확한 의미로 설명하면 ‘고백’이란 뜻으로 이해되는 단어이다. ‘믿는 도리’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의 원형인 ‘호몰로기아’(ὁμολογία)가 ‘인정하다’, ‘시인하다’, ‘고백하다’, ‘공언하다’란 뜻을 가진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이는 ‘시인’이나 ‘공언’, 또는 ‘고백’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좁은 의미에서는 그 시대 교회가 고백하였던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사실에 대한 문제와, 또한 처음 세례를 받을 때 고백했던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문제를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진리에 대한 문제를 함축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는 세례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 세례를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강조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고, 그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요한 사도는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요일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고백했던 그 문제에 대하여 좀 더 각별하게 그리고 집중하여 생각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란 표현을 썼다. 한글 개역성경에 ‘사도’로 번역을 하였는데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질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정한 메시아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인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도 주님은 친히 자신을 가리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바 있고, 요한복음 8장 42절에서는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즉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또 행하신 사역은 주님 스스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신 말씀들이다.

 

본장 2절에서 주님께서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도 이러한 뜻이다. 여기서 세웠다는 말은 ‘임명했다’, 혹은 ‘직무를 맡겼다’란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상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구속을 위해 대제사장의 직무를 맡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과 주의를 요구하면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사실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성도들의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함을 전제로 성도들은 그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마음의 집중이 요구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에 대하여 ‘대제사장’이란 표현을 덧붙였다.

대제사장이란 표현은 2장 17절에서도 언급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이어주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진정한 성도라면 언제나 그들의 중심에는 주님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언제나 주님은 성도들의 현재 의식 속에 신앙의 고백으로 살아 존재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의 교훈은 그들의 현실 세계에서 삶으로 구현되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것을 권유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모세보다 주님의 월등함을 강조한 측면에서는 세 가지로 구분하여 그 논증을 살펴볼 수 있다.

1. 존재론적 측면

  저자는 모세보다 주님께서 존재론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월등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3절에서 비유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3절에서 주님께서 모세보다 영광을 받아야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집과 집을 지은 자로 비유하였다. 즉 집보다 집을 지은 자가 존귀하듯이 주님은 모세보다 더 존재론 적으로 존귀하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옷 보다 옷을 입은 사람이 더 존귀한 것이 아니냐는 뜻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집이란 단순히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을 입은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를 시사하기도 한다. 그렇다는 것은 1절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표현하였고, 2절에서 모세가 충성하기를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이라고 표현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저자가 표현한 ‘하나님의 온 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의 집합체를 가리킨다. 그렇다는 것은 5절과 6절에서 좀 더 선명하게 밝혀진다. 5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하였음을 밝히면서 6절에서는 그리스도 역시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진술하였다. 그리고는 성도들을 향하여 ‘그의 집’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므로 3절에서의 ‘집’이란 사람들이 사는 거주지를 가리킨 것이나 또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성막이나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이는 내면적으로는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기 백성들을 가리킨 표현이고, 1절의 표현으로 설명하면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 즉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3절에서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라고 진술하였다. 이는 곧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주님은 창조주요 모세는 피조물이라는 설명이다. 즉 모세는 주님과의 비교에서 그 높고 낮음을 말할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장에서 저자는 주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 가운데는 모세와 주님을 동등으로 보거나 또는 모세를 더 우월한 위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생전에도 예수님에 대하여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마 16:14) 생각했던 경우들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때에도 주님을 그런 경우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자신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은혜, 즉 육신적인 평안이나 위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핍박이 가중되자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고 더러는 기독교에 대한 배교자로서 타락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비단 그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회 안에는 어느 시대나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왔던 문제들이다. 희망을 가지고 교회를 찾았다가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고, 대부분의 이단들이 교회 안에서 나온다는 것 역시 그렇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깨달음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이 있듯이 주님에 대한 이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는 그야말로 영생의 문제요 영복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저자가 주님과 주님의 교훈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함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2. 능력적 측면

  3절의 표현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진술에서 보면 존재론적인 의미도 있지만 능력적 측면에서도 모세와 주님은 비교할 수 없는 상대란 사실이 좀 더 강하게 시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4절에서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집’은 3절과 5절 6절에서 비유로 말한 ‘집’이 아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해해야할 인간들이 거주하는 집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것은 집 마다 지은 이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성도들을 비유한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되는 것은 그리되면 사람을 창조한 이가 하나님 한 분이 아니라 제각기 지은 신이 다르다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사는 집은 그야말로 그 집을 지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지은 이가 없이 저절로 생겨진 집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언급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저자의 의중은 세상의 모든 만사 만물들이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란 사실을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능력적 측면에서 인간 모세와 주님과는 가히 비교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4절에서는 만물을 지으신 이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데오스’(θεός)다. 그러기에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전후 문맥과 관계없이 이 구절을 삽입된 구절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여기서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본절의 원문을 살펴보면 서두에 ‘왜냐하면’이란 뜻의 ‘가르’(γάρ)로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이 구절을 삽입절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절대적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란 뜻의 ‘가르’는 바로 이 구절이 앞 절의 연장선임을 알려주는 접속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가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주님에 대하여 ‘하나님’이란 표현을 쓴 것일까? 그것은 주님의 신분과 능력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여진다.


  신약성경에 ‘데오스’(θεός)란 단어는 무려 1319회나 나온다. 대부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님께도, 성령께도 사용된 바가 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할 때의 원어가 ‘데오스’다. 또 요한 사도가 요한1서 5장 20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시기 이전 그리스도의 신분을 ‘데오스’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성령에게도 데오스란 단어를 사용한 예가 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기서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할 때 하나님은 데오스란 단어이다. 그런데 이를 성령을 가리킨 표현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이와 관련해서는 언제나 성령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오스’가 오직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으로만 이해를 하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하나님’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여 성부 하나님으로 보아야만 한다는 주장은 옳은 것이 아니다. 1장에서 충분히 설명을 들었던 바와 같이 주님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여기서 갑자가 주님께 ‘데오스’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주님이 곧 창조주요 하나님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그것은 역시 모세와 주님은 그 존재를 초월하여 능력적 측면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임을 부각시키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집을 짓지만 주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아울러 모세는 피조물이고 주님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임을 진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3. 사역적 측면

  저자는 5절과 6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며 모세와 주님의 사역이 그 본질적 측면에서 크게 다름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사환’으로 번연된 단어는 신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된 것으로서 주인의 집을 맡아 관리하는 일꾼을 가리키는 ‘데라폰’(θεράπων)이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자주 이 단어가 나타나는데 모두 ‘몸 종’이나 ‘수행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베드’(עבד)를 번역한 말이다. 데라폰은 ‘데라퓨오’(θεραπεύω)에서 유래하였는데 ‘데라퓨오’는 ‘섬기다’, ‘시중을 들다’,라는 의미 외에도 ‘치료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노예를 가리키는 ‘둘로스’(δοῦλος)와는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 자주 사용된 단어로서는 청지기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환 역시 주인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부리는 일꾼에 불과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아들은 가부장 시대의 가계 계승에 있어서 그 가계의 기업에 상속권을 가진 자이다. 즉 사환을 부리는 주인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환과 아들을 차이는 가히 대조나 비교의 대상의 될 수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사환을 모세로 주님은 아들로 비유한 것이다. 즉 사역적인 측면에서 모세는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주님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비교한 것이다. 이는 그 일하심의 의미나 미치는 영향력 역시 크게 다름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환과 주인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만큼이나 그 일에 임하는 자세와 입장은 물론 그 효력 역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비유한 것이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한 양과 선한 목자의 비유이다. 거기서 주님은 양의 주인이 목자인 경우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삯군인 목자의 경우를 비유하시며 삯군 목자는 이리가 달려들면 양을 두고 도망하지만 선한 목자, 즉 주인이 목자라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환과 아들의 다른 부분이다.


  모세가 택한 백성들을 인도한 훌륭한 인물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인간들과의 비교차원일 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주님과의 비교에서는 그는 삯군의 위치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그의 헌신이나 희생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불러내시고 그 사명을 주셨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나일강에 버려져야만 했던 비극적인 운명에서도 그러하고, 바로에 쫓겨 광야로 도망을 가서 80세가 되도록 양치기로 살아야 했던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은혜주심이 없고 하나님의 불러 주심이 없었다면 그가 무슨 수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겠는가? 또 그가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영도해 내고 광야 40년 동안 백성의 영도자의 사역을 감당한 것도 사실은 그의 능력이 아니었다.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구속사를 계획하시고 시작하신 구원역사의 주체이신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택하신 자기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자기를 드려 희생하신 것이다. 즉 스스로 자기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율법대로 저주의 죽으심을 죽으셨던 것이고, 율법의 입법자이시며 명령자이신 그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33년 동안 그 율법 아래서 그 요구를 온전히 순종하셔야만 하는 희생적 삶을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적 의미에서 역시 모세와 주님과는 하늘과 땅의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주님을 아들로 충성한 것이라 비유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무식이 얼마나 엉뚱한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왜냐하면 깨닫지 못했기에 주님보다 모세를 우월하게 보고, 그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가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행위들이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역시 진리지식과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절대적인 힘이며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진다.

 

 3장 앞부분에서는 모세를 사환으로, 주님은 아들로 비유하여 신분과 능력과 사역적 측면에서 모세보다 그리스도께서 우월하심을 증언하였다. 이어진 7절부터 19절까지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일환으로 모세 시대에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께 진노를 받았던 당시의 사람들을 비유로 들어 교훈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요약하면 셋으로 구분된다.

1. 모세 시대의 실패담

  저자는 주님을 배척하거나 그의 교훈을 무시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선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자 먼저 시편의 내용을 인용하여 모세시대의 실패한 성도들의 삶을 추억한다. 그것이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이다. 이는 시편 95편 7-11까지를 인용한 내용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먼저 시편의 말씀을 성령께서 이르신 말씀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시편 95편 7절과 8절을 본문 8절에서 인용하여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본문 9절부터 11절은 역시 시편 95편 9절부터 11절까지를 인용한 것이다.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결과 가나안 땅에 이르지 못한 결과를 들춰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시편 95편은 신정시(神政詩)로 분류되는 시이다. 신정시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노래한 시,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시는 경륜과 섭리에 대하여 찬양한 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시는 구약시대 성전예배 때에 자주 낭독되었던 ‘감사 예배시’로 알려져 있고, 유대교에서는 오늘날도 안식일 예배 때에 이 시를 낭독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저자가 여기서 이를 인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인용한 시의 예언적 의미

  히브리서 저자는 7절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시편 95편 7절을 인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이란 표현과 ‘그의 음성’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날이란 표현을 바로 주님 당시와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내용이 초림하신 예수님 때를 예언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의 음성’이라고 할 때 ‘그’라고 지목된 인물은 주님을 가리킨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이란 표현 역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바로 그 시기를 가리킨 예언임이 명백하다.
  그것은 문자적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오늘날’로 번역된 ‘세메론’(Σήμερον)은 히브리어 ‘하이옴’(היום)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날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였다. 시편 2편 7절에서는 이 단어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여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바로 그 날을 가리킨 말로 사용되었다. 또 시편 118편 24절에서는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할 때, ‘이날’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된 ‘이날’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날로서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지목한 예언시였다.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신약의 성도들이 예배해야할 새로운 안식일을 지목하는데 사용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시편 95편에서 언급된 ‘오늘날’은 바로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초림하신 때를 가리킨 것임이 명백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할 때, ‘그의 음성’은 역시 주님과 주님의 교훈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오늘날’이 주님께서 오신 그 때를 가리킨 것이라면 ‘그의 음성’은 분명 주님 외에 다른 대상을 말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편 95편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찬양한 ‘신정시’이면서도 메시아의 도래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메시아 예언시’로 분류되는 시이다. 즉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가 주님의 도래를 예언한 메시아 예언시란 사실을 천명하면서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이 시에 예언된 그분이란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2) 광야시대 실패담이 갖는 의미

  저자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란 사실을 입증해 보임과 동시에 광야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추억하고 있다. 그것이 9절부터 11절의 내용이다. 본문 9-11절은 역시 시편 95편 9-11절을 인용한 것이다.
  9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한 사실을 지적한 내용이다. 홍해 바다를 가르시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사건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사,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를 내리셔서 그들을 먹이신 섭리를 포함하여 옷이나 신발이 해어지지 않고 40년을 견디게 하여 주신 특별한 이적 등 당시 보여주신 하나님의 역사는 그야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가히 행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이 불의한 자들에 미혹되어 불평을 일삼거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를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로인하여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모두 광야에서 죽어야만 하는 참담한 인생의 결과를 맞았던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시대 광야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오셨을 때에 메시아의 표적으로 보여주신 수많은 능력과 기사를 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밝혀주시기 위해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셨다. 벙어리의 입을 열어주시기도 하셨고, 봉사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도 하셨다.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걸으시며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고, 오병이어로 이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12광주리나 남는 역사를 비롯하여,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역사까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역시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행하실 수 없는 역사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마음이 강퍅하여 주님을 영접치 않았고 오히려 주님을 이단 괴수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이다.
  저자가 모세 시대 광야의 실패담을 추억하였던 것은 바로 예수님 시대 주님을 대적했던 사람들과 그들을 연계시키고자 함이 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저자가 메시아 예언시였던 시편 95편을 인용하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메시아가 오면 그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그의 말씀을 따르고 섬길 것 까지도 예언하여 주셨는데, 당시 유대교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배척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 수신자들에 대한 권면

  시편 95편의 인용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셨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강퍅함을 지적한 저자는 12절부터 14절까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복음을 굳게 붙잡고 시련을 이겨 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12절에서는 성도들에게 불신의 마음이 악한 것임을 지적한 후 그런 마음으로 살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을 경고하였다. 13절은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강퍅케 됨을 경고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진 14절은 처음 믿었을 때 확신한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붙잡고 인내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케 될 것이란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는 부분이다. 권면의 핵심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1) 악의 정의

  저자는 12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떨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였다. 즉 악행을 지적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이란 표현을 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규정하는 악의 정의가 하나님과 그의 뜻을 믿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으로 번역된 ‘아피스티아스’(ἀπιστίας)는 신실하고 믿을만한 것을 뜻하는 ‘피스토스’(πιστός)와 부정어 ‘아’(ἀ)가 합성된 ‘아피스티아’(ἀπιστία)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신앙’이나 ‘신앙의 결핍’ 등의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악심’으로 번역된 헬라어중 ‘악’에 해당하는 단어는 ‘병든’, ‘타락한’, ‘비열한’, ‘악한’이란 의미를 가진 ‘포네로스’(πονηρός)의 형용사 ‘포네라’(πονηρὰ)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연관된 히브리어 ‘라아’(רע)는 특히 인간의 심령과 관련된 의미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즉 성경에서 정의하고 있는 악의 근본은 세상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14장 23절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무엇보다 중심을 두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그 핵심 메시지가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맴돌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기에 거짓말 하거나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생각하면서 주일 성수나 십일조를 행치 않는 문제 등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로도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에서 보면 윤리 도덕적 문제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하지 못한 행위들을 더욱더 큰 죄요 악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윤리 도덕적 문제는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성도는 윤리 도덕적 기준을 넘어 하나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의요 차원 높은 선행이기 때문이다.

  2) 마음이 강퍅케 되는 원인

  악이 불신에서 오는 것이라면 사람의 마음이 강퍅케 되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13절에서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라고 권면한 말씀에 담긴 의미이다.
  여기서 ‘강퍅’으로 번역된 단어는 ‘스클레륀데’(σκληρυνθῇ)다. 본래 이 단어는 ‘굳은’, ‘거친’, ‘뻣뻣한’이란 의미를 가진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에서 유래한 동사로서 ‘굳어지다’, ‘완악해지다’, ‘완고해지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 어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는 ‘카솨’(קשה)와 ‘하자크’(חזק)가 있다. 그중 ‘카솨’는 고삐를 잡고 가는 주인을 거역하는 황소를 연상케 하는 단어이고, ‘하자크’ 역시 ‘카솨’와 동의어로 이 동사가 애굽의 바로왕에게 가장 많이 쓰였다(출 7:13; 9:35; 10:20). 한마디로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하여 마음을 닫은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완고한 마음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은 그 마음이 죄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울왕이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던 것이 권력욕에 미혹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 뜻 인줄 알면서도 그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원인이 바로 죄에 미혹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세상 것이나 육신의 것에 미혹되었기에 순종하고자 하지만 순종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이나 세상 것에 미혹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항상 살펴야 하고, 이런 것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사는 삶에 열과 성의를 다해야만 한다. 하나님 외에 세상 것, 육신의 문제에 미혹됨이 곧 마음의 강퍅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믿음의 목적

  저자는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처음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때 가졌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 믿음을 인내로 지켜 나가면 그 결과 주님의 영광에 동참케 될 것이란 뜻이다. 즉 어려움이 있고 또 핍박도 있지만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켜내면 그 결과는 영생의 복으로 이어질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서 저자가 믿음의 결과에 대하여 육신의 위로나 세상의 복과 연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함을 이야기한 것은 믿음의 목적이 육신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것에 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이 추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온통 육신의 복과 세상 것을 목적으로 한 신앙생활은 근본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들은 주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이방인들의 행하는 샤머니즘(shamanism)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믿음은 그 목적을 하늘의 것, 영생에 두는 것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의 믿음 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을 나열하면서 이렇게 진술하기도 하였다.


(히 11:15, 16)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즉 믿음의 목적은 오직 하늘의 것, 영생의 복에 있다는 말씀이다.

3. 모세 시대 실패의 재인용

  저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것을 주의 할 것을 권면한 다음 다시 15절부터는 앞에서 언급했던 시편 95편을 재인용하면서 중복하여 불신앙적인 행태에 대하여 경계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16절에서는 모세를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자들이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왔던 자들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40년 동안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에게 임하였음을 지적한 후, 18절에서는 그 진노의 결과에 대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천명하신 하나님말씀을 보도하였다.
  18절의 내용은 시편 95편 11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시편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천명한 내용인데 시편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로 변형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 즉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에 대하여 19절에서 믿지 아니함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말씀에서 생각해 보게 되는 구속사적 교훈은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육신적인 고통에 대한 이해

  시편 95편에서 지적된 강퍅의 문제는 므리바에서와 맛사에서(시 95:8) 일어났던 사건을 예로 들었다. 이는 모두 물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하였던 사건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에 나왔기에 당해야만 했던 어려움이며 고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애굽에 있었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백성들의 원망은 더욱더 컸고, 따라서 끊임없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좇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되면 육신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좀 더 안위와 평안, 부요와 풍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애굽에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가중되니 불평과 원망의 사건들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길은 앞에서도 생각해 보았던 것처럼 세상 것이나 육신을 위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성도들이 필히 알아야 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육신적 고통이나 환란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기에 벌어지는 현상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오히려 이는 믿음의 연단과 하늘에서의 더 큰 상급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섭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그 시대를 살았던 성도들에게  그렇게 권면한 바가 있다.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은 더 큰 복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고난은 실패나 저주가 아니라 심히 더 큰 축복이란 확고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게 된다.

  2) 하나님을 거역하는 주체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역사란 의미

  저자는 16절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한 자들에 대하여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고 하였다. 이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격노케 한 자들이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아니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시 모세를 따라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세례를 의미하고(고전 10:2), 광야생활은 교회생활을 상징한 모형적 계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당시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하여 일어난 사건은 모세를 따라나선 광야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 광야교회 안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당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역 현상이 유대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교도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보다 오히려 유대교가 역사적으로 더 전통이 있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열심이었기에 더욱더 경건하고 옳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났던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어 광야까지 따라 나온 자들이 아니었느냐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여 다 교회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곧 유대교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따른다 하여 모두 참 성도는 아니며, 교회라 하여 모두 교회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교회를 더 세심하게 따지고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원인은 믿음이 없기 때문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19절에서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모든 불평과 불순종의 원인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시 유대교가 예수님을 이단 괴수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이기도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바울 사도는 이렇게 진술한 바가 있다.
(롬 10:1-3)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려 함에 특별한 열심히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지식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지식을 가리킨다. 그들이 열심이 있으나 진리에 이르지 못한 것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진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긴다하여 모두 교회는 아니며, 믿는 것 같으나 믿음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본장에서 깨닫게 되는 교훈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오늘 우리 시대에 더욱더 극심한 현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말세에는 더욱더 교회가 이방인들의 차지가 될 것을 성경이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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