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제사 / 변종길
로마서 12-13장 주해와 적용
로마서 12장부터 새로운 대단원이 펼쳐진다. 로마서 1:18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대한 설명이 11장으로 그 막을 내리고, 12장부터는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서술되고 있다. 물론 앞부분에서도 간간이 성도들의 생활에 대한 권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6:11-13, 19, 8:12-13 등), 본격적인 권면과 교훈은 12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도의 생활 원리(12:1-2)
먼저 로마서 12:1-2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 원리에 대한 대원칙이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서술될 모든 구체적인 윤리들에 대한 총론에 해당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가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1. 사랑의 권면
사도 바울은 먼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은 율법적인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권면’임을 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이나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행하는 ‘감사의 규칙’이다.
여기서 ‘모든 자비하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οἰκτιρμοί)는 히브리어 ‘라하밈’(rachamim)의 번역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복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 헬라어도 복수로 온 것이다. ‘라하밈’은 ‘모태’(womb)를 뜻하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것, 곧 ‘긍휼’(compassion)을 뜻한다. 이는 길에 버려져서 울고 있는 피투성이 아이를 측은히 여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의미한다(겔 16:6-14). 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다.
2. 거룩한 산 제사
그러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드리라’(παραστηναι)는 말은 제의적(祭儀的) 용어이다. 곧 성전에서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제물(祭物)로 바치라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에는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드렸지만, 이제는 우리의 ‘몸’(σωμα)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여기서 ‘몸’이란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과 육을 합한 전 인간을 뜻한다. 이것을 ‘몸’으로 표현한 이유는 이것이 구약 시대의 제물이었던 ‘짐승’에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제사’(祭祀)로 번역된 ‘뒤시아’(θυσία)는 ‘제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물론 ‘제사’를 뜻할 수도 있지만(빌 2:17), 여기서는 우리의 ‘몸’을 ‘뒤시아’(θυσία)로 드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제물’이란 원래 죽여서 드리는 것이다. 죽지 않은 것은 제물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히 9:22).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되려면 우리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인간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바이다(레 18:21; 신 18:10).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한다. 비록 우리 몸이 살아 있기는 하지만, 마치 죽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짐승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곧 내 자신의 고집이나 아집을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룩한’ 제물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정결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는’ 제물이란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εὐάρεστον)이란 말은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이란 뜻이다.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인간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 8:21), 또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니라”(출 29:18, 25, 41; 레 1:9, 13, 17 등)는 표현을 읽게 된다. 마치 하나님께 코가 있어서 향기로운 냄새 맡기를 좋아하시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의미는 그러한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는 것이다. 곧 열납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런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희생 제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여기서 ‘향기로운’(ειὀσμὴν εὐωδία)을 직역하면 ‘향기로운 향으로’(unto sweet-smelling fragrance)가 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냄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한다(고후 2:15-16).
다음에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영적 예배’(λογικὴ λατρεία)란 말은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하여 ‘이성적 예배’(reasonable service)로 번역하였다(KJV, StV, NBG 등; cf. Wilhelmus Brakel, Redelijke Godsdienst, Dordrecht 1700). 그러나 여기서 ‘로기케’란 단어는 ‘이성적’(理性的)이란 뜻이 아니라 베드로전서 2:2의 ‘신령한 젖’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유적인’(figurative), ‘영적인’(spiritual)이란 뜻이다. 곧 신약 시대에 우리가 우리 몸으로 드리는 제사는 구약 시대의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제사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제사란 뜻이다 .
구약에서의 제사가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제사라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은 비유적인, 영적인 의미에서 ‘산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제사를 계승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헌신된 생활이라고 보아야 한다. 곧 날마다 항상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야말로 구약 시대의 제사를 계승한 ‘영적 예배’인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주일 날 오전 예배를 ‘대예배’라 부르면서 그것만이 참된 예배인 줄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신약 시대의 참 예배는 주일 날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드리는 헌신된 삶이다.
3. 변화된 삶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받는다’는 말의 원어는 ‘메타몰포오마이’(μεταμορφόομαι)인데, 이는 근본적인 형태 전환을 의미한다. 곧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삶의 방향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저 구원받았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그저 입과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만 그치고 인생관과 가치관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ἐπίγνωσι)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골 3:10).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독서를 많이 해서 우리의 생각까지 하나님의 생각을 닮아 가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만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믿음과 사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지식과 총명에 있어서 더 풍성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빌 1:9).
성도의 교회 생활(12:3-13)
3절에서 13절까지는 구체적으로 성도의 교회 생활이 어떠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는 단체를 떠나서 혼자서 수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하기를 잘하지만, 교회라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싫어하는 자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교만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절).
여기서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다’(ὑπερφρονέω)는 것은 어떤 신비한, 고차원적 문제에 대한 사변적인 사색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상대방보다 낫다고 여기는 ‘교만한 마음’을 뜻한다(cf. 빌 2:2-4). 그리고 ‘생각한다’(φρονέω)는 단어는 단지 지성적인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가 포함된 넓은 의미에서의 ‘생각’ 또는 ‘마음’을 뜻한다(롬 8:5-7).
이러한 ‘생각’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화평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은데…”, “아무래도 내가 더 잘 알아”라는 생각은 지우려고 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이것은 하루, 이틀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며 1, 2년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고 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한 몸’의 지체임을 말한다(4-5절; 고전 12:1-31; 엡 4:4, 16). 여기서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가 다 같은 ‘직분’(職分)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의 ‘직분’(πραξι)이란 말을 꼭 목사, 장로, 집사와 같은 공적인 직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공적 직분과는 관계없이 실제로 각각 다른 ‘일’(praxis)을 맡아서 하는 ‘기능’이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교회에는 ‘기능의 다양성’, ‘역할의 분담’이 중요한 원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의 다양성은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恩賜)의 다양성에 기인한다(6절). 신약성경에서 ‘은사’(χάρισμα)란 말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가시적인 은사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가리키는 폭 넓은 개념이다(롬 1:11; 고전 7:7; 벧전 4:10 참조). 여기 로마서 12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각자 다양하게 섬기는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재주나 능력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예언’과 ‘섬기는 일’과 ‘가르치는 일’,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을 베푸는 일’이 언급되어 있다(6-8절).
여기서 ‘예언’(προφητεία)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언’은 물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모든 활동을 다 포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좀 특별한 의미에서의 예언, 곧 하나님의 특별 은사 중의 하나로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듯하다(고전 12:10 참조). 이와 관련하여 여기 6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수대로’(κατὰ τὴν ἀναλογίαν τη πίστεω)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Greijdanus, Romeinen, Ⅱ, pp. 547-549 참조). 우리는 이것을 간단히, 3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대로’(μέτρον πίστεω)와 같은 의미로 보고자 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 6절의 ‘믿음’ 앞에 관사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이 ‘믿음’을 객관적인 ‘믿음의 내용’의 의미로 본다(Greijdanus, p. 549). 그래서 예언하는 자는 객관적 신앙의 내용인 신앙 고백이나 성경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여기에 ‘관사’가 있고 없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로마서 3:30에는 믿는 행위로서의 ‘믿음’을 가리킬 때 관사 없이 사용한 것(ἐκ πίστεω)과 관사와 함께 사용한 것(διὰ τη πίστεω)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갑자기 ‘믿음의 내용’ 곧 ‘신앙 고백’이라는 규범을 따라서 예언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어서 나오는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하 구절들에서는 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기능)을 맡은 자가 ‘어떤 태도로’ 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예언을 하는 자’는 자기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면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 될 것이다. 객관적인 ‘신앙의 내용’(신앙 고백 또는 성경)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교의학적인 의미 주입으로 여겨진다.
다음에 9절부터 13절에 나오는 권면들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적용되는 일반적인 권면이다. 사랑이나 형제 우애, 부지런함, 소망, 기도 등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윤리’ 문제이다. 이것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여기서는 특히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입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실 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행함으로 표현되는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요일 3:18). 곧 형제 사랑과 서로 존경하는 것, 어려운 성도들에게 쓸 것을 나눠 주는 것과 손님 대접 등이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형제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히 13:1-2).
이웃과의 관계(12:14-21)
이어서 나오는 14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성도의 생활 중에서 이웃과의 관계, 특히 대하기 어려운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은 원칙적으로는 교회 밖 사람이지만, 가끔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우리를 괴롭히고 대적하는 자가 어려운 이웃이요 우리의 원수이다. 이런 원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이다.
바울은 먼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한다(14절). 이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대하는 대원칙이다(마 5:43-48 참조). 여기서 ‘핍박한다’(διώκω)는 것은 원래 ‘뒤쫓다, 추격하다’의 의미를 가진 말로 끈질기게,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을 뜻한다. 한 번, 두 번 괴롭히는 것 정도야 참을 수 있지만 계속해서,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괴롭힐 때에는 여간해서 참기 어렵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축복한다’(εὐλογέω)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첫걸음이다. 단지 참고 인내하는 것만으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그 사람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말과 행동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바울은 또한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한다(17절). 이것은 14절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의 대원칙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원수 갚는 것을 금하셨다(19절). 다윗은 이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여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삼상 17-31장). 그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만일 그가 자기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았다면, 그도 함께 악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신다(19절; cf. 신 32:35).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고 심판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시는 것은 정당하지만 우리가 직접 악을 갚는 것은 죄가 된다.
그러면서 바울은 잠언의 말씀을 인용한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 잠 25:21-22). 이 구절은 많은 주석가들에게 나해 구절로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아 놓는다’는 것은 여태까지 말한 사랑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여기의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표현을 자선의 행위로 본다(E. J. Masselink). 그러나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이 사랑의 행위인지 징벌의 행위인지는 직접 자기 머리 위에 숯불을 한번 쌓아 보면 알 것이다. 숯불은 아주 화력이 센 뜨거운 불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납을 녹여서 냄비나 양동이를 때울 때 숯불을 사용했다. 그리고 시편에서 ‘숯불’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시 18:8, 12-13; 140:8).
그래서 다른 많은 주석가들은 이 표현을, 원수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게 하여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Origen, Pelagius, Augustine, Cranfield, Ridderbos, Hendriksen, Schlier 등). 곧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면 그 원수가 내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껴 회개하여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해석도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원수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희망 사항이기는 하지만 문맥을 볼 때 거리가 멀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19-20절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에게 아무리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해도 소용이 없을 때를 가정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도,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더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둘째, 이 해석의 난점은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는다’는 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은 맹렬한 진노의 상징이다. 크레이다누스 같은 주석가는 이에 대해 ‘숯불을 자기 머리에 쌓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Romeinen Ⅱ, p. 563), 이 악한 자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에게 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깨달았다면 그런 악한 행동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해석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cf. R. Haldane, Romans, 1958, p. 574). 곧 우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베풀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Chrysostom, Theodoret, Oecumenius, Theophylact, Haldane 등). 물론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사랑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며 친구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숯불이 쌓이게 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곧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으면 또 모르려니와 그렇게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더 악하게 굴면, 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진노를 발하신다는 뜻이다. 즉, 우리의 사랑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그 악한 사람에게 진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은 무고하게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해치지 않았으며, 숱한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선을 베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셔서 사울이 전장에서 엎드러져 죽게 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을 취할 때 제일 걸림이 되는 것은 ‘네가’라는 주어이다. 만일 주어가 ‘하나님’이시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는데, 숯불을 쌓는 주어가 ‘네가’이니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네가’라는 것은 네가 ‘직접’ 그 사람 위에 숯불을 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을 것인데 너는 너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 결과적으로 그러한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숯불을 쌓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너’는 그러한 일에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이처럼 실제의 행위 주체와 문법적 주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로는 마태복음 6:34이 있다. 원문에 의하면 “내일이 스스로를 염려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내일의 모든 일을 염려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론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이다(21절). 어찌 되었든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선이요 사랑이다. 상대방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을 때 그가 당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요 우리의 소관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사랑하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을 베풀어야 한다.
국가에 대한 의무(13:1-7)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의무를 말한다. 곧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다(1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복종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권위들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런 권위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써 하나님께서 악을 벌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해 세우신 기관이라는 사상이 나타난다. 나아가서 국가 또는 관원은 ‘하나님의 사자’(θεου διάκονο)라고 말한다(4절). 이 표현은 ‘하나님의 수종자’ 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해야 정확하다. 6절에서는 또한 ‘하나님의 일꾼’(λειτουγοὶ θεου)이라고도 말한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을 그들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자신은 아마도 자기의 명예욕과 권력욕에서 행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사회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억제하고 선을 도모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과연 국가가 얼마나 선한 일을 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도리어 온갖 압제와 불의를 행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할 것이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경우의 것이며, 정상적인 경우에 국가는 악한 자를 억제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아주 악한 정부 하에서도 도둑을 잡고 살인자를 처벌하는 기본적인 기능은 수행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부가 아니라 도적 집단과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위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은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5절). 여기서 ‘칼’은 공권력을 의미한다. 국가가 교회와 다른 점은 국가는 ‘공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점이다. 즉, 백성을 외적으로 강제하는 물리적 수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부득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그렇게 부득불 복종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인하여’ 복종하라는 것이다. 곧 그들이 선을 위하여 힘쓰는 하나님의 일꾼들임을 생각하고 자원하여 복종하고 협력하라는 뜻이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원리적이고 정상적인 경우이다. 특별한 경우에 우리가 더 이상 국가의 권위에 복종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국가 기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복음 전파를 금할 때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없다(행 4:20).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으며, 그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임금보다도 더 높은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되는 세상 임금의 명령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아주 특별한 경우에 국가의 명령에 더 이상 복종할 수 없을 때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 소위 ‘저항권’ 또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다루는 것인데(이에 대해서는 J. Douma, Politieke Verantwoordeijkheid, Kampen, 1984, pp. 176-203을 보라), 바울은 여기서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나아가서 우리가 국가에 대해 세금을 바치는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질서 유지에 힘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6-7절). 여기에 두 종류의 세금이 언급되어 있는데, 하나는 ‘공세’(貢稅)이고 다른 하나는 ‘국세’(國稅)이다. 이는 로마 제국에서의 세금의 종류를 크게 둘로 나눈 것으로, ‘공세’(φόρο)는 모든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직접세이며 ‘국세’(τέλο)는 관세와 유통세와 같은 간접세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13:8-10)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태까지 바울이 말한 모든 교훈들과 권면들의 핵심은 역시 ‘사랑’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상절).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빚’이라는 빚이 별도로 있는 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부분의 원문을 직역하면 “서로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말라”이다. 여기서 ‘빚지다’(ὀφειλέω)라는 동사는 ‘~할 의무를 지다’(ought to)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뜻은 ‘서로를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곧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일 중요한 의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이니라”(8하절). 여기서 ‘율법을 이루었다’(νόμον πεπλήρωκεν)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의미일까? 신약 시대에는 사랑만 있으면 되고 율법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본문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다 들었느니라’(ἀνακεφαλαιουται)이다. 이는 곧 모든 계명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안에 다 포함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랑은 모든 계명을 ‘포함’하는 포괄적 계명이란 뜻이다. 곧, 사랑은 각각의 계명들을 ‘대체하는’(συβστιτυτινγ) 것이 아니라 ‘포괄하는’(χομπρεηενδινγ)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사랑이 오면 율법이 폐지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포괄하는 사랑을 행함으로 율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곧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도적질하지 아니하고 살인하지 아니하며 간음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계명의 ‘기본 정신’인 동시에 모든 계명을 다 포함하는 ‘포괄 계명’이다.
이것을 10절이 다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란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니 만큼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한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완성’(πλήρωμα)이란 ‘종결’이나 ‘폐지’의 뜻이 아니라 ‘성취, 이룸’의 뜻이다. 곧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란 의미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율법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랑은 모든 계명들을 포함하는 포괄 개념이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랑하라’는 것은 마치 ‘선을 행하라’는 말이나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과 같이 매우 포괄적이어서 선을 위한 구체적인 계명들은 이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란 계명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구체적인 계명들을 배제하거나 대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의 구체적인 실현은 각 계명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각 계명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곧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 하는 것을 각 계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안내를 무시하고 사랑의 내용을 자기 스스로 채우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자율주의(自律主義)이다.
자다가 깰 때(13:11-14)
13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경계의 말을 주고 있다. 곧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이다(11절). 이것은 물론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죄와 방탕의 어둔 밤에서 깨어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당시 로마는 온갖 죄와 악이 가득한 도시였다.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이 만연하고 있었다(13절). 세상적으로는 온갖 부귀영화와 사치를 누리고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밤이었고 각종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이 다 모인 ‘바벨론’이었다(계 18:2 참조).
우리가 영적 밤에서 깨어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이다(11하절). 우리 주님이 언제 오실지, 이 세상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 오실 날이 점점 더 가까워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σωτηρία)이란 온전한 구원, 종국적 구원, 예수님 재림 시에 실현될 영광스런 구원을 뜻한다(롬 8:23; 빌 2:12). 물론 개인의 죽음도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을 입고 영육 간의 완전한 구원이 실현되는 때는 예수님의 재림 때이다. 어느 쪽으로 보든 그날은 점점 더 가까워 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탄식하면 안 된다. 우리는 나이 먹는 것을 슬퍼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을 혼인 잔치가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지고 온갖 시험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우리는 더욱 깨어서 단정한 옷을 입고 신랑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번영과 과학 기술을 자랑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캄캄한 암흑이다. 전기가 없어 캄캄한 것이 아니요, 전등이 없어 어두운 것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온갖 음란과 더러운 것과 속된 것과 가증한 것들이 판치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밤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빠른 통신을 하는가, 얼마나 최신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얼마나 깨끗함이 있으며, 의로움과 거룩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취해야 할 행동은 이런 죄악 된 세상에서 죄에 물들지 않고 순결함을 지키는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곧 음란과 호색과 방탕과 술 취함과 시기와 질투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단정히 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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