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걸작품 -스페인 성가족 성당
2019년 여름방학 - 로마서 행적을 좇아 - 바울이 그토록 가고자 했던 로마교회를 전초기지 삼아 복음을 전파하고자 열망했던 서바나( 스페인)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녀 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천재 건축가 - 안토니오 가우디의 최대 걸작품 - 성가족 성당"이다. 그의 건축물의 특징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마 어마한 규모와 섬세함과 탁월한 색상들!! 동서 남북에 따라 다른 색상 사용.한마디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넘어 경악 그 자체이다!! 가히 말로 다 표현할수 없다. 감탄에 감탄이다. 그때를 회상하며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다시 한번 사진으로나마 보고자 한다. 기회가 되면 다시한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여기에 올려진 사진과 글은 다른 분의 것이다.
성가족교회(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는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1883년 3월 19일, 성 요셉 축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아직까지 공사가 진행 중이다. 나머지 부분은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고, 교회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사진은 성가족성당 앞 연못에서 본 모습이다.
탑의 모양은 옥수수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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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 감독을 맡았지만 생전에 완공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성당은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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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건설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작업이 무척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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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는 죽기 전에 ‘이 작품의 주인(하나님)이 서두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비록 미완성 작품일지라도, 가우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건축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원래는 가우디의 스승이 건축을 맡았으나,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으면서 계획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체가 완성될 경우 교회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60m이며,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돔의 높이는 170m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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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규모와 아름다운 곡선, 섬세하게 조각된 내부가 인상적이다.

▼ 이제 감탄과 경외심이 복받쳐 입을 다물 수조차 없었던 성가족성당의 면면을 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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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탄생의 파사드뿐이다.- 정문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 모습이다. 예수님과 성가족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들이 조각되어 있다.
▼ 이 파사다드는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한 것이다. 나머지 두 개의 파사드는 수난과 영광의 파사드이다. 수난의 파사드는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파사드는 아직 착공도 되지 않았다.


▼ 섬세하면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각들을 보고 그 누가 놀라지 않을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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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한다.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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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석재인데, 가우디가 죽은 뒤 1952년까지는 작업이 중단되었다. 1953년부터 건축을 재개하였으나, 돌이 부족하여 그 뒤에는 석재 대신 인조 석재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 이제 성당 내부로 들어가 본다. 놀라움과 찬탄의 순간들을 맞으러...

▼ 가우디의 건축의 특징 중 하나가 자연친화적인 것인데
여기 보이는 기둥들도 나무기둥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의 둥근 천장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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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차 있다.






▼ 이 모든 작품들이 가우디의 머리속에서 창출되었다니 그저 한 인간의 능력의 한계가 끝이 없을성 싶다.

▼ 이 현란한 작품들에 대하여 그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가슴으로 느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내부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린 채로 이번에는 후문으로 나왔다.
1976년에 완성된 수난의 파사드이다. 이곳 역시 눈과 귀가 제 기능을 상실해버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수가 수난을 겪었던 모든 이야기들이 조각작품으로 새겨져 있다.











▼ 이 사진은 가우디가 성당을 지으면서 실제로 만들었다는 축소모형이다. 이렇게 축소모형을 만들고 그에 따라 실제 성당건물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 조각들도 저렇게 기하학적 모양을 하고 있다.



▼ 밖에는 아직도 건축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지만 결코 서둘지 않는다.


▼ 살아생전 가우디의 모습이다. 백발의 수염이 경외스럽기만 하다.

▼ 성가족성당 건축의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 관람객들을 경악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건축모형이다.
가우디는 건축을 하기 전에 정확한 수평을 잡기 위하여 이렇게 축소모형에 일일이 추를 매달아 정교하게 실험을 하여 한치의 오차도 없게하였다고 한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 아래 문양들도 가우디가 일일이 도안을 했다한다.










▼ 아직도 공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 못다한 이야기들 :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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