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 사상
1. 들어가는 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망해야 될 존재이다. 제아무리 성전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자체적으로 거룩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거룩한 존재로서 흠 없는 어린양의 피에 자기 몸을 적셔야만 활동할 수 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뭔가 기대를 걸고 미련을 가지고 살아 갈려고 한다. 그러한 기대나 연민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받아야 될 자로 인식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의 기대나 연민에 대하여, 즉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기대나 욕심을 아예 그 싹부터 짤라버리는 표현이 이사야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 6: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아예 구원 받을까봐 염려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건, 유다건 할 것 없이 다 심판하여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에는 양면성이 나타난다. 그 한 가지가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구원도 어디까지나 심판 속에서 구원이라는 사실이다.
2. 그루터기는 우리들이다?
남은 자에 대하여 구구한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란,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의해서 남겨진 자들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거룩하기 때문에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불로 정화될 자로서 남은 자들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에도 그렇게 하셨지만 현재에도 그렇고 장차 미래에도 여전한 방식으로 되어질 일이다. 사 4: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흔히들 여기에 등장하는 ‘그루터기’를 가리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기 교회라느니, 혹은 자기 교단(재건, 고신, 합동 등)이라는 식으로 끌어다 붙이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고집은 잘못된 구원관에서 나온 것들이다. 자기 자신만은 구원받아야 된다는 사고 방식 때문에 나온 탐욕의 소산인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뜻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가하실 심판은 이미 확정적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킬 수 있는 마음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들 자신의 죄악 가운데 행하도록 내버려두시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겠다는 단호한 구원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 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스알야숩’ 즉 ‘남은 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유다 왕 아하스를 만나게 하였던 것이다.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유다 나라를 공격해 들어온다는 소식에 당황해 하는 유다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 7: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그래서 한 가지 징조를 구하라고 하지만 그는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고 합니다. 굉장히 신앙이 좋은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한 가지 징조를 예언하게 됩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는 아하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유다 나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의 와중에서도 남은 자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을 통하여 계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남은 자란 결국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그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창3:15절에 말씀하신 그 ‘여자의 후손’인 것이다.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열성이나 노력으로 되어지질 않고 하나님의 열심히 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사 37:32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단 4:23 “왕이 보신즉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르기를 그 나무를 베고 멸하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는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들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또 들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며 일곱 때를 단 4: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남은 자란, 성경에서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되는 데에는 분명히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란 바로 전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과 전쟁을 벌이시는데 그 전쟁에서 인간은 폐하고 그 폐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한 사람, 두 사람을 뽑아 내시는데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남은 자인 것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남겨진 자들인 것이다.
3. 용어 해설
1> 구약 성경에서 남은 자
남은 자가 나오는 것은 선지서 에서부터 등장하지만 엄격히 따진다면 남은 자가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타난다.
남은 자란,
shaar(솨아르 7604-5); 부풀다, 남다, 남기다, 나머지, 남은 자, 여분 등의 의미를 지닌다(삿7:3,대상30:6,느1:3,사10:20-22,14:22).
sheerah(쉐어라 7611) ; 나머지(살아남은, 최종의)남은 부분, 빠져왔던, 남겨진, 후손, 남다, 남은 자 등의 의미로서 사용됨.
(사14:30,렘6:9,23:3,24:8,25:20,31:7,40:15,42:15,19,43:5,44:12,14,28,겔11:13,암5:15,9:12,미2:12,5:7-8,7:18,습2:7,3:13)
yathar(야타르 3498-9) : 남기다(사역동사), 보존케 하다, 쳐지다, 남아 있다, 남도록 하다, 남는 것, 남은 자, 남겨두다
(삼하21:2,사30:17렘52:15,미5:3)
sariyd(싸리드 8300) : 생존자, 살아 있는, 남은, 남아있는 (애2:22,욜2:32,옵1:14,18)
acharyth(아하리트 319) : 마지막, 끝, 맨 마지막의, 후손, 남은 자, 찌꺼기, 보상 (겔23:25,암4:2,9:1)
대하 30:6 “보발군들이 왕과 방백들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왕의 명을 좇아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두루 다니며 전하니 일렀으되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저가 너희 남은 자 곧 앗수르 왕의 손에서 벗어난 자에게로”
느 1: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사 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 신약 성경에서 남은 자
로이포이(λοιποι 3062) : 남은 사람들, 남는 자, 잔여, 나머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22:6, 27:49, 롬11:7, 계11:13)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7:49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롬 11:7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 하여졌느니라”
계 11: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 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카탈레임마(καταλειμμα 2640) : 남는 것, 소수, 남은 자
(롬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레임마(λειμμα 3005) : 남아 있는 사람, 남은 것
(롬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페릴레이포(περιλειπω 4035) : 주위에 남아있다, 살아남다, 잔류하다 (살전4:15,17)
살전 4: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의 스알야숩,
사 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사” 즉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성취로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이상에서 살펴 본 바대로 남은 자란, 남은 자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서 남게된 자들이다.
4. 본론
⑴ 구약성경에 나타난 남은 자 개념(the remnant motif)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되는 데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멸망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인간이 짐승만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는 자기의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남은 자가 발생되는 과정 속에는 필연코 ‘찾음’과 ‘버림’의 작업이 병행되어 계속해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남은 자를 발생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가 되시며, 그분에 의해서 세계가 움직이고 있으며, 그 움직이는 방향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자의 원리는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일하셨는데 그 계획이란,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를 만들어 나가시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은 인간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었다. 시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에 반기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추방시키시고 에덴 동산의 동쪽에 문을 만드시고 그곳을 불과 화염검으로 자물쇠를 채워 막아 놓으셨던 것이다.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접근금지 구역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곳에 문이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는 먼저 질서를 잡으시고, 다음으로는 그 질서가 충만해 지기를 바라셨으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일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그것이 역순이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이 충만해지기를 원하시며 그럴 때만이 올바른 질서가 이루어져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화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계획이 실패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대한 선지자들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충만하신 계시의 조명 속에서 드러나고 있으며, 사도 바울에 의해 부연되고 있는 것이다(롬9장-11장).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무산되고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남은 자가 발생되어지고 이렇게 남겨진 자를 통하여 언약은 갱신되어지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의해 남겨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무산되어지지 않고 성취를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의 삶이란, 죄 아래서의 삶이다. 무엇을 하여도 죄 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의 그 목적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남기도록 열심을 내신다. 그 열심의 흔적이 성경에 묻어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과 선택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10대손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 주셨다(창5:21, 6:8, 18).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실 때에도 노아의 8식구만 그 심판에서 남겨 두신 것이다. 그 이유는 노아의 8식구만이 착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사실과 이런 악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것이다(창8:21).
그리고 그 후에 노아의 11대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그의 아들 이삭과 연결되며, 이삭은 또한 그의 아들 야곱과 연결되어진 것이다. 이들 세 사람을 가리켜 믿음의 족장이라고 하는데 이들과 맺은 언약을 가리켜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대표적인 것은 ‘씨’를 주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에게는 씨가 없었다. 그 집안의 모든 여인들은 한결같이 불임 여성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혀서 자녀를 생산하게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증인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인간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후에 모세와도 언약을 맺으시는데 모세 언약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모세도 아브라함 언약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는 것이다.
남은 자의 원리는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이사야서에 ‘남은 자의 사상’이 그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남은 자가 어떻게 형성될 것인가에 대하여 밝혀주고 있는 것이 이사야서에 흐르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은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의 불에 의해 정화된 자들로 구성되어진다. 이렇게 남겨진 자를 가리켜 ‘그루터기’라고 하였으며 이를 곧 ‘거룩한 씨’라고 하였다(사6:13). 그런가하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심판을 통해서 정화되어 나오게될 알곡들이다(사28:23-29, 17:4-6). 이러한 멸망 가운데서 남아서 돌아오게 될 자를 상징하는 자가 바로 이사야의 아들인 스알야숩인 것이다(사7:3). 이 아들과 더불어 아하스 왕과 대립해 있는 이사야 역시 남은 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남은 자는 여호와의 거룩한 심판의 불에 의해서 정화된 자들이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자는 현재 이스라엘이 부정되고 심판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임마누엘 사건이다. 아하스는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신이 정통 다윗의 집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정치적으로는 앗수르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아하스에게 자신이 보고 체험한 하나님은 전혀 다른 하나님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거짓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아하스에 의해서 괴롭힘을 당한다고 하였다(사7:12-13). 고로 아하스는 이사야가 본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버림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보잘것없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를 통하여 남은 자의 세계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거짓된 하나님을 섬기는 아하스와 같이 거짓된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도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 심판 받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이스라엘이 정작 의지하였던 구스나 애굽이 자기들을 심판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 20: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이스라엘에서 남은 자는 버림당함과 새로운 선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남은 자로 구성될 나라는 이스라엘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진다(사55:1-5). 사 11: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여기 이렇게 하여 구성된 나라는 이방인과 이스라엘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게 된다(사56:3-8). 그리고 이들은 여호와에 의해 해방과 자유를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전 것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들어 온 자들이다. 그런데 남은 자가 고난받아야 할 이유는 심판 받고 버려진 자들이 심판을 받는 동안 남은 자, 이스라엘도 고난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들온 자들은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정화되어지기 때문이다. 이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바로 여호와의 종이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그 아기인 것이다. 여호와의 종인 시온은 이 남은 자들의 세계를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사65:17-25). 이 시온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표상이며, 다윗 집의 표상이며 남은 자의 대표인 것이다(사7:14). 아기의 몸으로 오신 남은 자와 그에 의해서 생성된 남은 자는 한결같이 여호와의 진노의 거룩을 체험한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이 요셉은 자신의 사역 즉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에게 미움 받고 애굽으로 팔려 종살이 하는가하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행 등 이러한 생애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남기신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창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도 출애굽 세대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자였으며, 아모스 선지자는 ‘다리나 귀 조각’이 건져냄을 받은 것같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암 3: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이사야 선지자 역시 스알야숩 즉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고 선포하고 있으며 사 7:3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에스겔 선지자도 남은 자들은 완전히 멸절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겔 11:13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또한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과 동일시되는데(겔11:14-21, 렘24:4-10), 그들은 연단을 받으면서 정결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호5:15-6:3, 렘3:12-14). 그리고 남은 자들의 회복에 대한 예언들에 의하여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으로부터 언약 갱신과 새로워지는 남은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따라서 흩어진 남은 자들 역시 다시 모아지고 갱신될 것이다(겔11:17). 이 남은 자들의 회복은 마치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군대로 부활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겔37:1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그들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겔 11:20, 겔 14:11, 겔 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5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36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3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모든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자비가 남은 자들을 통하여 보여지게 될 것이다(미7:18). 열국 가운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인 알곡은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암9:9), 암 9: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 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암 9:15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은 남을 것이고 죽음에서 소생하게 될 것이다(사4:3).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새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모든 영광을 보장해 주신다.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으며(미5:7-9), 땅의 소산을 즐기며(사4:2),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가 되어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사37:31). 비록 이러한 약속들이 포로에서 귀환하는 연약한 남은 자들에게 되풀이 된다 할지라도 그 회복의 완전한 성취는 미래에 되어질 것이다. 사 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6:60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모세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기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은혜와 긍휼 때문이었다. 신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그리고 그들을 낮추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다. 즉 빈 그릇되게 하여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도록 하기 위해 남기신 것이다. 신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 성경에서의 최종적인 언약은 다윗 언약이라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다윗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언약의 흐름을 통하여 굳이 그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12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창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왜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그것도 넷째 아들은 유다를 택하였느냐 하는 것은 저의 글(장자의 개념) 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자로서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다윗은 이 유다 지파에서 태어난 자라는 사실과 여러 지파 가운데서 하필 유다를 택한 것은 인간적으로 나은 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오면서 요셉이 장자로 되었다가, 다시 레위로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유다 지파가 장자 지파로 매김 되는데, 어쩌면 하나의 역할 분담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통하여 혹은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라 사료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로 하여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내어서 그이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자 선택할 때 어떤 기준과 조건하에서 택하였느냐 하면 인간적인 성향이나 외모를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인간적인 면모를 볼 때 가장 약하고 못난이를 가리킵니다(시8:2). 가장 약하고 못난이를 택하는 이유는 어떤 한 인간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기대할 것조차 없는 그런 어린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윗에게 언약하실 때에 이러한 연약함과 못난 부분을 최대한 드러내어서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상한 심령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삼하 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언약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남기시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담긴 아들입니다. 그 아들이 등장하기까지의 택함 받은 자의 삶이란, 상한 심령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이 상한 심령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짤려 진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부와 영광을 마음껏 누렸지만 종국에 가서는 상한 심령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두 동강이 나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후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전쟁과 포로, 잠간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하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또 다시 전쟁을 통하여 심판 받아 포로생활이 연속되어진다. 이러한 심판의 과정에서 남은 자가 돌아오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일이 계속되는가 하면 솔로몬 이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 아들, 그 메시야, 하나님의 형상이 등장하기까지 이러한 모습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언약을 고수하시고 그 언약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셨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 홀로 손수 이루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여호와의 전쟁은 심판과 긍휼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버림과 찾음이 반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버림은 전체적이며, 찾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윗 이후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역할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시104:29-30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새 창조는 죄로 인해 죽어야 했던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는 차원에서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 살림은 잘먹고 잘살도록 하기 위한 살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상대자로서의 회복인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어서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과 용서를 통한 긍휼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행되어지는 인간의 죄에 대한 분명한 심판과 심판 속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긍휼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나타나는 속성으로서 이때 사용되어진 ‘긍휼’은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을 통하여 새 생명을 창조해 내는 여인의 ‘자궁’ 또는 ‘모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미 5:3 “그러므로 진통하는 그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그가 그들을 버려 두실 것이나 그 후에 그의 형제 중에 남은 자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라”(킹 제임스번역)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남은 자가 발생하는 과정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통 즉 고통의 긍휼하심을 통해서만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나라가 있다. 첫째는 유다 나라이며, 둘째는 이스라엘이고, 셋째는 이방나라이다. 이들 세 부류의 나라는 한결같이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나라이다. 유다나 이스라엘은 엄밀하게 따지면 한 나라이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역할자로서 지상에 세우셨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함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방 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징계하는 몽둥이로 사용하신 것이다. 삼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슥 11:7 “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그래서 결국 북쪽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친히 들어서 사용하시는 몽둥이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주전 722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주전586년) 각각 멸망당하게 된 것이다. 인간 나라는 이렇게 인간들의 연약함으로 무너지고 망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즉 언약의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다 나라의 회복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단 4:26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과 멸망 속에서 다시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세상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모습인 여호와의 형상을 남기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을 남기는데 있어서 왜 하필이면 유다 나라이며, 유다 지파인 다윗 가문이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을 파기한 유다나 이스라엘은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 지파 만큼은 예외가 되는 것은, 선지자 모세에게 언급한 내용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대한 책임 이행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 33:7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약속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야곱이 12아들들에게 내린 예언적인 축복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러한 축복도 무조건 내 뱉은 축복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축복이었고,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의 결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에 가담하는 길뿐입니다(왕하16:2).
구약 성경 특히 선지서에서 보여주는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범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벌에 대하여 나타나 있다. 그 한 예로서 아모스 선지서를 통하여 살펴보게 되면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향한 징벌과 그 징벌 속에서의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1장과 2장은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로부터 시작된 심판이 결국은 유다와 이스라엘에까지 최종적으로 심판이 가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쪽 다메섹을 시발로 남쪽의 가사로, 가사에서 두로로, 그리고 에돔과 암몬과 모압으로 이어져서 결국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심판의 불을 통한 열방의 멸망을 선언하고 있다. 마치 지우개로 흑판에 쓰여진 모든 내용들을 지우듯이 또는 낫으로 밀을 베어 넘기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차례차례 멸망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징벌은 피할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3장에서 6장까지는 이스라엘을 초점으로 전개되어 유다에 대한 패망을 선고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자기 스스로 구원받고자 도망친다 할지라도 하늘로나 음부로나, 갈멜산이나 바다 밑바닥까지 또는 포로로 잡려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찾아내어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을 어느 누구도 피하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암9:2-6). 결단코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라는 말씀에 기대를 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암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이러한 기대도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혹시 만군의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면 남은 자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악만 행하는 자들 가운데 혹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 자가 있을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암 9: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일으키기 위함인 것이다. 암 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의 멸망과 포로에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는 그 남은 자 속에 포함되는 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선택은 한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적인 선택이며, 기능적인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무엇을 향한 선택이며, 무엇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심판 받기 위한 남은 자가 있는가하면, 다음으로는 구원받기 위한 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암 4: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로 말미암아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지우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여기서 말하는 ‘요셉의 남은 자’란, 현재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차원에서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심판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초에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올 때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당한 유월절 어린양이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긍휼 하심을 입고 구원받은 자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들을 위해 희생당한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들 속에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심판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심판하고 나면 그만 인데 왜 또 남은 자를 발생시키는가? 그것은 어린양의 희생 정신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남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어린양의 희생의 의미를 아는 자를 남기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기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은 인간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인간들의 취향을 죄라고 고발하는 차원에서 남겨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끝까지 고수하고자 하는 것들을 무너뜨리고 빼앗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정복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심판의 흔적인 자기 상실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기 것에 대한 애착과 보호하고자하는 연민과 소유욕은 하나님의 빼앗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투쟁과 싸움과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어린양의 희생이다. 인간 혈통에 대한 버림과 다시 찾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음 가운데서 찾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심판과 용서라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 가운데서 용서의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오직 선택된 자에 한해서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남은 자는 약속에 의해서 선택된 씨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다윗 언약의 체제를 고수하는데 온갖 정열을 불태운다. 겔 37:25-27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성전과 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단9:16-18) 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공격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총만이 예루살렘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무용지물인 것이다.
또한 선지자들의 계시의 핵심은 인간 핏줄의 허무성을 낱낱이 고발하는 차원에서의 계시 활동이다. 인간 핏줄의 허무성을 드러냄으로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래 하셔야만 하는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 놓는 것이다. 즉 다윗 혈통에 의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건 다윗이건 그들 핏줄에 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곧 오실 메시야에게 기대를 거는 유일한 길임을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피투성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냥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살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피투성이인 우리를 씻기시고 벌거벗은 자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옷을 입혀서 화려하게 치장을 해 주었더니만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엉뚱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니 어찌 심판 받아 마땅치 않겠는가!
겔 16: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 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너를 돌아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7 내가 너로 들의 풀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8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9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 하며 네게 기름을 바르고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띠우고 명주로 덧입히고 11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사슬을 목에 드리우고 12 코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13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14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 바벨론 포로 이후 가나안 땅을 70년간 안식하게 하는 이유
레 26:30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레 26:3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민족이 약속을 배반할 때에는 그 땅이 그들을 토해내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그 대신 약속의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땅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이다.
마음의 법은 성신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새기는 법이다. 이제부터는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신 성신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도록 인도한다기보다는 온전히 지킨 율법을 믿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복은 오직 남은 자에게만 부여되는 복이다.
하나님의 이같은 선택은 인간의 모든 선입견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향으로 등장된다. 그래야만 오직 하나님의 이름되신 그 분 홀로 이루셨다는 사실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사 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위대한 권능을 증언하기 위해 뽑혀 나온 자가 바로 선택된 남은 자인 것이다. 따라서 선택된 남은 자는 개인의 구원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름의 자기계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파멸과 저주 뿐이다. 욥 1: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 된 자는 구원하신 주님만을 증거하고 자랑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씨와 땅과 연관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땅은 노아 언약과 성전과 연관되어 있고, 씨는 다윗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즉 다윗 자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의 성취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싸움과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잃어버림과 되찾음이라는 공식이 세워지는데 잃어버림을 당한 경험과 되찾음의 경험이 있는 자가 바로 선택된 남은 자이다. 이러한 경험이 없는 자는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즉 잃어버림의 의미를 아는 자는 자기 이름에 대하여 그 어떤 기대도 걸지 않는 자이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자이다. 다윗의 고백을 빌리자면 ‘상한 심령’을 가진 자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또한 용서와 긍휼을 입은 자인데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은 성신에 의해 제공되어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시려고 긍휼을 입혀 주시는 것이다.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만 여호와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 마음의 할례
인간은 죄로 인해 썩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율법을 줘도 지키지 못하니까 아예 마음 판에 율법을 새겨두시겠다는 것이다. 렘 9:26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깎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모세의 법은 돌판에 새겨져 있지만 신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새 언약의 법을 마음에 새겨주시는 것이다.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새 신에 의해 굳은 마음은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분의 마음을 심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할례입니다. 즉 상한 심령의 상태이다. 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용서와 자비가 들어 있는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새 언약은 인간의 행함을 용납하지 않고 여호와의 영으로만 가능케 하신 언약이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옛 언약에 나타난 할례는 육체에 행하지만, 새 언약의 할례는 성신을 받아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육체의 할례는 아브라함의 핏줄을 따라 태어난 남자는 다 행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장소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국한되어 있지만 마음의 할례는 선택된 남은 자에 한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 행해지는 장소 또한 ‘순’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에 한해서 세워지는 성전이다. 슥 6:12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예표의 사람 즉 “내 종 순”이다. 슥 3: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표의 사람으로 등장되는 ‘순’이라는 인물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등장된다. 그가 고난받는 이유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선지자적인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따라서 고난받는 종 = ‘순’은 주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메시야의 고난을 기초로 해서 그 분의 신이 성전을 세울 때 영원한 성전이 되는 것이다. 겔 39:29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얼굴을 가리우는 것은 메시야의 고난과 멸시받음을 뜻한다. 하지만 다시는 얼굴을 가리우지 않는 것은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멸시받음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해 영원한 성전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순’으로 등장된 메시야를 멸시하고 고난을 가하는가?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그 장본인들이 바로 주의 집을 향한 열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인간의 힘으로 건물 성전을 세우겠다는 자들이며, 다윗도 여기에 속하며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성전을 지어 바치겠다는 목사나 장로, 교인들이 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종교적인 열성을 가지고 교회를 유지하겠다는 자들이며, 그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의 손에 의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 선택된 이스라엘의 사명
선택된 이스라엘의 사명은 바로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 남은 자들에 대한 비교
먼저 노아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서 홍수 심판에서 남은 자가 되었다.
그리고 롯과 두 딸은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과 불 심판에서 살아 남은 자가 되었다.
다음으로 여호수아 갈렙은 광야 40년 동안 애굽에서 나온 70만 대군 가운데 유일하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이었다. 이들은 출애굽의 증인 및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불신앙 하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멸망당한 증인으로서의 남겨진 자들이었다.
에스라 느헤미야와 스룹바벨과 학개 선지자와 그 외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메데 파사에서 포로 생활 하다가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왜 망했느냐 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남은 자들인 것이다.
⑵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선택된 남은 자
※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남은 자들이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으로서의 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 성에 거하다가 시날과 엘라살과 엘림과 고임의 4개국 연합군과 소돔을 비롯한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과 소알의 연합군과 전쟁에서 소돔 쪽이 패함으로서 롯도 포로로 잡혀갔었는데, 이때 아브라함이 318명의 개인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카 롯을 구해 왔던 것이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또한 애굽에서의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땅 여리고 성에서 살던 기생 라합과 모압에 살던 룻이라는 여인은 모두 여호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온 전리품들인 것이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신약의 성도들은 모두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들이라는 것이다. 그 좋은 증거가 엡 4:8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하신 말씀 속에서 ‘그(예수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로잡힌 자는 우리 성도를 가리킵니다. 누구에게 사로잡혀 있었느냐 하면 죄에게 종노릇하였고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정복하고 여호와 전쟁을 승리로 이끄심으로서 우리를 다시금 사로잡은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남은 자나 신약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의 성도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처럼 ‘한 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져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한 번 선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롬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왕상 19장에 나타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남은 자 사상을 설명하고 있는데,
롬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자기 구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오직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곧 인간적인 어떤 조건, 혈통이나 선한 행위, 종교적인 열성으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만이 남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즉 자기 자신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비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칠천명이라는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칠천명의 이러한 행위는 그 개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남겨진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남은 자란, 자기가 노력하고 애써서 남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남겨진 자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만이 이스라엘에 남겨진 신앙의 최후 보루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그 행위의 주체라고 여겼는데, 이 칠천명은 하나님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서 남겨진 자들인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인간의 훌륭한 점을 드러내기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여 남게 한 그 은혜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어떤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자신은 혹은 자기 교단(특히 재건 교단)이야말로 과거 신사참배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 바쳐서 이겼기 때문에 우리만이 남은 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엘리야의 구원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는 바울의 지적과 같이 인간의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 구원은 참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엘리야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말씀을 온전히 이루고 끝내는 방식이 바로 약속된 ‘씨’를 남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신약 성경에서 선택된 남은 자는 12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구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신하며, 대표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대신하며 대표합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듯이 12제자들 역시 실패하였다는 증거물들인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서 가롯 유다는 스승 되신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죄를 범하였으며,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 극구 만류함으로 인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과 함께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12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다 도망갔던 사실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께 도움이 되지 않고 모두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은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 홀로 이루신 사역인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과 12제자들은 이 씨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약속된 그 씨는 예수님이시며, 성경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남은 자 역시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바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시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씨’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시며, ‘언약의 사자’이시며, ‘주’가 되십니다(말3:1-3).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참조, 마1:1-16)
그리고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남기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십니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왜냐하면 그분 안에 어린양의 희생과 대속의 의미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대속의 실체가 되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한 몸에 받은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약의 씨로서 순종을 성취시켰으며 또한 많은 사람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의로운 수난을 당하신 분이시며, 의로운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제물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분 안에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증거들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아 버림받은 흔적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것이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버림받음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대신 버림당한 것이 차이점인 것이다(사53장). 그런가하면 구약성경에 약속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시다. 요 19: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참고 눅24:44)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실체이며 약속의 씨이며, 여호와 전쟁의 용사이시며, 그 메시야이시며 진정 남은 자임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행함에 기대를 걸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남겨진 자라는 것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새 이스라엘에 포함된 남은 자들은 마지막 날에 메시야의 통치를 받게 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들이 곧 주님의 몸된 교회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남겨진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시며 약속한 그 씨라고 한다면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에 참여할 자들인 것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민족적인 차별이나 혈통적인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신분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남은 자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한해서 몸된 교회인 것이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에 의해 형성된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의 이름의 할 일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는 일이다. 이로 인해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고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다윗 언약에 의해 성취되는 일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5. 마무리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남은 자’에 대하여 살펴 본 결과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자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며, 어느 민족에 국한된 것도 아닐 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어느 교회나 교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하나님에 의해 남겨진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가 참으로 남은 자인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자는 한 개인의 구원이나 행복을 목적으로 남겨진 자가 아니라 나를 남도록 하신 그분의 희생과 긍휼을 알고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임을 아는 자라 할 수 있다. 이런 자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은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자는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에 눈을 고정시키고 사는 자들일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새로운 삶을 사는 자를 의미하는데 엡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여기서 말하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전쟁에 의해서 포로 된 자들임을 아는 삶이다.
즉 우리는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이며 노획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은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날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따라서 남은 자는 우선 주께서 왜 우리를 남기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고후 5:21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받은 내가 목적이 아니라 대신 죽으신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오늘날 선택하여 남겨진 자들의 할 일은 오로지 나를 선택하여 주의 백성 삼으신 그분의 은혜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일 것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한 이런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불쌍히 여김 받은 자들임을 아는 자이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남겨진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고난의 삶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나 이 고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한 증거이며, 하나님의 백성 됨의 증거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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