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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삶의 법칙(삶의 우선순위)

by 은총가득 2020. 4. 5.

 

삶의 법칙(삶의 우선순위)

  왕상 17:8-16, 4:25-26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한 법칙(질서)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무작정 되는대로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혼란만 있을 뿐입니다.

 

왕상 17장에는 엘리야의 갑작스런 등장을 소개합니다.

그를 디셉 사람 엘리야라 말합니다.

디셉 사람이란 의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뢰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의 의미는, ‘내가 섬기는 신은 하나님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내가 섬기는 신은 하나님 여호와뿐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야가 등장하자마자 아합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171절에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의뢰하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보다 바알에게 자신의 모든 문제를 의뢰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경고한 의미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은 진리에 목마른 어두움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합은 자신이 만든 우상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섬기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4:25에는

이스라엘 제 7대왕인 아합왕 시대에 36개월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 년만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가 안 되는데,

삼 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심각한 일이 벌어지겠지요.

 

4:25에 그때 상황을 하늘이 닫히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전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왕 아합은 바알을 섬기던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세벨의 영향을 받은 아합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게 하기보다 바알과 아세라를 더 의지하고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바알을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이라 믿었습니다.

양식을 주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 들어 생명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신이 졸든지, 외출했든지, 아니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가뭄속에서도 내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까마귀로 통하여 먹여주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신은 여호와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자에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먹여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인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먹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만나와 메추라기입니다.

 

16: 12-15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풍요의 신으로 불리는 바알의 본거지였던 시돈에 까지 가뭄으로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시돈은 어떤 곳일까?

시돈노략물’(빼앗는다)이란 뜻으로 함정을 파서 유익을 얻는 곳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이세벨의 부친인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16:31)으로 바알의 본거지입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가뭄의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문제입니다.

 

엘리야는 선지자(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아합왕과 이세벨이 우상숭배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니 죽이려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피신시킵니다.

그곳이 시돈땅 사르밧입니다.

누가 엘리야가 가장 싫어하는 바알의 본거지로 피신하였다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이런 경우를 보고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의 본거지에서 만난 사람이 과부입니다.

사르밧의 한 과부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상을 섬기는 곳에서는 진리가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드리므로 거듭남의 새사람이 됩니다.

 

먼저, 그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과부를 만났을 때, 그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10절에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을까요?

 

12절 중간에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던 것은, 죽기 전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과부가 가지고 있었던 식량은 매우 적은 양이었습니다.

참을 만큼 참아보고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을 때 먹으려고 남겨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이 집안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식사를 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몇 날을 굶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굶어온 상황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견디어보다 더는 아이가 참지 못하여 보채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마지막 남겨둔 식량으로 빵을 구워먹고 죽으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기가 막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을 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구우려고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나무가 많이 필요 없습니다.

두엇을 주워가려고 하는 것을 보니, 빵 하나 굽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한 끼 식량도 안 되는 양입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과부에게 갑자기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무어라 말하는지 보십시오.

13절입니다.

너는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명령이 상식적으로 맞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비상식적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하고 답변하겠습니까?

 

과부는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백성도 아닙니다.

바알의 본거지에 사는 과부입니다.

그자 앞에 엘리야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말씀이 말씀하시기를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에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통에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난데없이 찾아온 낯선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과부에게 가루 한주먹과 기름 몇 방울은

자신과 아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목숨과 바꿀만한 귀한 양식입니다.

전 재산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엘리야에게 먼저 내놓는다는 것은

자신과 아들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부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십시다.

15절입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할렐루야!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작은 떡 하나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드린 것입니다.

아들의 목숨까지 드린 것입니다.

 

여인의 순종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순종입니다.

여인의 희생적인 행동은,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희생입니다.

과부는 왜 이런 행동을 하였을까요?

우상을 섬기는 곳에서는 진리가 없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13-14절을 보시겠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과부는 엘리야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 일에 참여하면 복 준다는 사실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15-16절입니다.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였고,

병에 기름을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과부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아는데

나는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구나!

하는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먼저,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이웃중심, 마지막에 자기중심입니다.

 

엘리야도 과부에게 먼저, ‘나를 위하여

이 말은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그 후에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중심으로 살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여인도 하나님 말씀이라 하니 아멘하며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라 하는데도 왜 아멘이 안 됩니까?

 

13절에 있는 이유이겠지요.

두려워 말고

 

현실이, 미래가 두렵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불신입니다.

그러니 불순종을 하는 것이겠지요.

 

바보암이 안 걸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모자라는 사람을 보면 히죽히죽 웃고 다니지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루에 6억만개의 암세포가 만들어진답니다.

그러나 건강한 세포가 암세포를 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매일 만들어지는 암세포를 건강한 세포가 죽이지 못한다면

그때부터 붙어서 자라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기쁘게,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살면 암이 안 걸린 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암 발생율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가?

삶에 대한 두려움, 걱정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됩니다.

 

4:25-26에 주님은 누구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는지 보십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택함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여 무조건 기적을 체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뭄과 흉년으로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방 땅 사렙다 한 과부에게 하나님은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선순위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드리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록 자신이 다 먹었다 하더라도 계속되는 흉년에 몇 날이 지나면 자신과 아들은 굶어 죽었겠지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흉년을 피하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자신도 살고 아들도 살렸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

죽는 것 같아도 살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이익보고,

망하는 것 같아도 흥하게 됩니다.

 

그러나 장래가 두려워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사는 것 같아도 죽고,

이익 보는 것 같아도 손해 보고,

잘되는 것 같아도 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