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ly City of God 하나님의 거룩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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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에서 발견된 고대 예루살렘의 지도. 고대 예루살렘이라봐야 비잔틴 시대의 지도지만 큰 도움이 된다
마다바는 다수의 아름다운 모자이크 벽화 및 바닥들이 발견된 기독교 도시이다. 그리스 정교교회인 세인트 조르지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6세기 시대의 예루살렘 시 지도가 대표적인 모자이크 벽화이다. 마다바 시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10㎞ 지점에는 느보산이 있다. 기독교 구약시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곳이다. 또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샘물이 솟았다고 알려진 모세의 샘에서는 약 3,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물이 샘솟고 있다.마다바의 남쪽에는 카락성이 있는데 12세기 카락 지역의 통치자였던 리노드 대 샤리용 군주가 회교인 대상(caravan)들을 상대로 공격을 가하던 주요 요새였으며, 1187년대 회교군의 유명한 명장인 살라할 딘 장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Ancient Holy land map from Madaba ca. 550 A.D. (Jordan). Jerusalem seen in lower left hand section of larger mosaic floor.
모자이크 교회란 이름이 붙게한 중세의 모자이크지도, 훼손이 심해서 바리케이트를 쳐놓았다.
현존하는 성지 지도 중 가장 오래된 마다바 지도는 요르단 왕국의 마다바(Madaba)에 있는 성 조지 성당 바닥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지도이다. 1894년에 발견된 마다바 지도는 전 세계 성경학자들에게 대단한 관심을 이끌었고 마다바는 요르단에서 ‘모자이크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다바의 Hippolytus홀에 있는 모자이크 바닥 장식(6세기)
마다바의 Hippolytus홀에 있는 모자이크 바닥 장식(6세기)
Map of Jerusalem ca. 17th cent. A.D.
마다바 지도는 6세기 비잔틴 성당 바닥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성지지도를 모자이크로 그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지 지도이며 특별히 비잔틴 시대의 예루살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다바는 인구가 약 6만 명의 요르단 왕국 마다바주의 행정 수도이고 요르단에서 다섯 번째의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며 약 92%가 무슬림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약 6%가 되는데 이곳 마다바는 그리스도신자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도시 이다.
마다바는 요르단 중서부 해발 760m가 넘는 마다바 평원의 옥토 위에 있는 도시로 수도 암만에서 약 30km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도시 마다바는 구약성경에서 ‘메드바’(Medeba)로 언급되고 있는데 요르단 동쪽 고지대에 있는 헤스본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고대 통상로인 ‘왕의 도로’가 지나는 중요한 성읍이었다.
마다바 지도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의도 되었으며 또한 다양한 성지의 장소들을 순례자들이 순례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장소에는 희랍어 ‘지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이사리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260/264경~340경)가 쓴 「지명사전」(Onomastikon)에 나오는 명칭과 일치하고 있다. 지명사전은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지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하면서 알파벳순으로 나열한 목록으로써 성지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이것은 후에 예로니모 성인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막대기로 가리키고 있는 곳은 사해 요르단쪽에 있는 '롯 수도원'
모자이크 지도는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고 북쪽으로 레바논에서 남쪽으로는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나일 강 삼각주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에서 동쪽으로는 요르단 사막까지 성경의 땅을 묘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북쪽 부분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고 남아 있는 부분도 크게 훼손 되었다.
마다바 지도에 나타나는 많은 지명들은 고고학 발굴작업을 통해 그 정확성이 확증되면서 성서지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장소들을 확증할 수 있는 최고의 근거 자료가 되었다.
A reconstruction of the Temple Mount and temple at ca. 1st century A.D.
1세기 성전재건과 성전 마운틴
Modern reconstruction of the 1st century Jewish temple in Jerusalem (destroyed following the 1st Jewish War (66-70 A.D.)
1 차 유대 전쟁 다음 파괴 된 예루살렘 1 세기 유대인 사원의 현대 재구성 ((66-70 주후)
예루살렘 성전 또는 거룩한 성전(히브리어: ??? ?????, 벳 하미크다쉬, 거룩한 집})은 예루살렘의 성전 산(하르 하바이트)에 있었다. 유대교 믿음에 의하면, 하나님/하느님의 "발등상"을 상징한다(히브리어 "쉐키나").
제1성전은 솔로몬 왕이 기원전 10세기인 기원전 957년에 7년 동안 지었다. 고대 유대교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이 성전은 모세의 장막과 실로, 노브, 기브온 장막을 대체한 것이었으며 유대교의 믿음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제1성전은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부숴졌다. 새로운 성전의 건축은 기원전 535년에 시작되었다. 히아투스 후에 기원전 521년경까지 건축이 이루어졌으며, 516년 완성되어 515년 봉헌되었다. 에스라서에 기록되었듯이 키루스 대왕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다리우스 대왕이 보수하였다. 5세기 후 제2성전은 헤로데 대왕에 의해 기원전 20년경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이를 제2성전이라고 한다. 70년 유대 독립 전쟁이 진압될 때에 로마 제국에 의하여 무너졌으며,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서쪽 벽만이 남았다. 성전 바깥의 벽들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슬람 사원인 바위의 돔은 성전 터 위에 7세기 후반부터 서있었으며 알아크사 모스크도 비슷한 시기부터 성전 뜰 자리에 서 있었다.
유대교 종말론은 제3성전에 대한 예언이 있다. 이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며,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보수 유대교에서는 제3성전을 기다리고 있다.
2007년 8월 30일에, 주택단지에 파이프를 설비하다가 제2성전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2007년 10월에 고고학자들이 제1성전 유적을 확인하였다.
Stone found near Temple Mount - "to the trumpeting place", a reference to music or call to worship associated with the Jewish Temple
The Temple Mount
The current configuration of the Temple Mount prominently displaying the al Aqsa mosque - the Dome of the Rock - which sits directly over the former foundations of the Jewish Temple
유대인 사원의 기초 위에 세워진 - 바위의 돔 - 알 아크 사 모스크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고대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터
위에 691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위치는 예루살렘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위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혹은 이스마일[1]을
제물로 바치려 시도한 제단을 의미한다.
무함마드가
여기서 승천했다는 말은 무함마드가 여기서 사망했다는 말이 아니다. 무함마드의 승천 전설 미라지는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의
인도로 승천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고 옛 예언자들과 만나고는 다시
내려왔다는
전설이다. 바위의 돔 자리는 승천의 출발지로 알려져 있다. 이러다보니까 이슬람에선
중요한 성지로 여겨진다.
돔
위에 입힌 금은 요르단
왕가에서 기증한 금이다.
기
들릴이
그린 굿모닝 예루살렘을 보면 이스라엘 유대인 수꼴
극우, 하레디들이
이거 꼴보기 싫으니까 여길 헐고 고대 유대 성전을 새로 지어야 한다고 시위를 벌이는게 심심찮게 나온다. 아예 돔 근처에 큼직한 벽돌과
건축재료들까지 두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에 여길 헐기라도 하면 IS, 탈레반
뺨치는 막장집단 인증은 물론이요, 전세계 이슬람과 전면전을 치뤄야 할 게 뻔하기에 3차 세계 대전 벌어진다고 할 정도. 이러다 보니 이스라엘
정부는 물론 웬만한 우익들도 여길 건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 건축재료들을 이스라엘 군경이 출동하여 강제로 회수해서 돌려주거나 멀리 치우면서 그
와중에 저항하는 극단 우익들에 의하여 과격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전
이스라엘 총리이던 아리엘 샤론이 살아생전 여길 방문하다가 이슬람권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시위하던 팔레스타인
무슬림에 대한 사살은 기본.[2]
샤론은 여길 모독한 게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이스라엘 총리가 여길 헐고자 둘러봤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우방인 터키나
요르단도 항의했을 지경이었고 후원국 미국조차도 자제하라고 할 정도로 외교적으로 곤욕을 치뤄서 그 뒤론 이스라엘 정계에서 가는 걸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는 이곳을 폐쇄하고 무슬림들에게 제한적인 출입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것 역시 무슬림들의 반발이
크다.
이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모스크인 알
악사 모스크[3]는
사우디의
메카,
메디나와
더불어 이슬람 3대 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알 악사 모스크 바로 근방에있는 곳이 통곡의
벽
보물찾기
시리즈
이스라엘편에서는 다윗의 별을 찾으러 혼자 이곳으로 들어가게 된 터키 소년 누리를 주인공 일행이 걱정하자 유대인 소녀 레나가
"이곳은
세
종교가
믿는 한
분의 신이
지켜주는 곳이니까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루살렘에 위치한 옛 성전(聖殿)의 일부이자 유대인의 성지. 과거 요르단 령에 속했지만,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황금빛 바위의 돔은 무하마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역사적 배경
성서에
나오길 솔로몬의
재판으로
유명한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크고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솔로몬 왕이 세웠다고 하는 제1
성전은
수차례 전쟁을 겪으며 파괴된다. 포로시대 이후 느헤미야[1]
당시 제2
성전건축,
이후 약 3, 4백년 후 마카비 시대를 지나 헤롯
대왕으로
알려진 헤로데스 왕이 백성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여 제3
성전을
세우게 된다. (제2성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2]
이후 제3성전은 로마인과 유대인간의 갈등[3]으로
벌어진 유대
전쟁당시
티투스장군[4]에
의해 파괴되었다.[5]
이후 예루살렘과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은 안식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유대인의 디아스포라)
현재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이 제2
성전의
서쪽벽이라 알려져있다. 뿌리를 잃은 유대인들이 그나마 남아있는 성전의 서쪽 벽에 모여 통곡을 하였기에 통곡의
벽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6]
그들의 오랜
숙원은
풀렸지만, 아직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린다.
현재
통곡의 벽은 유대인의 성지이자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지상에 나와 있는 부분은 윗부분이고, 아랫부분은 지하에 묻혀 있으니 가이드를
대동해서 지하도로 내려가보는 것도 좋다.[7]
야외이지만, 유대인의
성지인 만큼 복장 규정을 지켜야 들어갈 수 있다.[8]
사진촬영은 어느정도 허용이 되어있지만, 안되는 날도 있으니 사전에 조사를 하고 가는 것이 좋다. 오늘 날엔 남녀가 따로 입장하도록 분리대가
설치[9]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통곡의 벽 사건[10]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세계적 논란 속에 아랍연맹 및 이집트와 요르단도 유감을 표하면서 섣불리 공사를 하는 행위를 하면 이스라엘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태도로
강압책을 취하였다. 결국 원래 목적대로 상당수 복원 계획은 물건너갔다.
위
항목이 어원이 된 듯하나, 의미는 약간 다르다. 주로 아무리
시도를 해도 도저히 뚫리지 않는
무언가를 별칭하는 데 이용되는 편이다. 넘사벽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데, 넘사벽이 "감히 넘볼 수도 없다"는 이미지가 강하다면 통곡의 벽은 보이는데도 넘지 못하거나 넘기가 너무 힘들다는 데
대한 비통함을 강조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스포츠계에서는
막강한 수비수나 수비진을 가리키는 별명으로도 이따금씩 쓰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네마냐
비디치가
이 별명으로 유명하며 수원
삼성 블루윙즈
소속의 수비수였던 마토의
별명이기도 하다.
월드
오브 탱크
미국의 9티어 구축전차 T95의 별명이기도 한데 시가전에서 건물을 끼고 정면만 드러내고 있으면 305mm라는
안드로메다 수준의 정면떡장으로 인해 엔간해서는 정면을 절대 뚫을 수가 없다.
옆구리 아니면 뒤를 쳐야하는데 정면에서
만나면 자신의 탄은 튕기는데 T95의 탄은 뻥뻥 들어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통곡의 벽. 0.8.4 패치 이후 등장한 영국의 구축전차인 AT-2나 Tortoise에게도 이 별명이 붙었다. 이때는 속칭
'홍곡의
벽'
물론
T95는
정면 한정 305mm의 떡장을 가지고 있어 상대방에게 통곡의 벽을 선사해 줄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T95를 모는 자신 또한 통곡의 벽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속도! 현존하는 월드 오브 탱크 중 가장 느린 시속 13km를 자랑한다!
이 속도가 얼마나 느린지 상상이 안간다면 88야티에서
운전자나 엔진 둘 중 하나가 나갔다고 생각하면 쉽다. 언덕을
내려가는 것은 쉬워도 다시 올라가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똥을 싸야한다.
덕분에 전장이 급전개 되는 기동전 위주라면 느리고 느린 속도 때문에 전장은 커녕 포 1발 쏘지도 못한 채 승리를 볼 수 있기도 해 그 경우
들어오는 경험치가 바닥을 친다.
칸코레의
경우 대형암함
건조가 한몫 하는데,이
녀석들
뽑으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원과 시간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심각한 경우 자원을 탕진한 나머지 대공황에 맞먹는 자원고갈 사태가 일어나거나 이벤트 돌 여력이 없어져 손만 빨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Modern Jerusalem - Dome of the Rock and the Church of the Holy Selplechre
오늘날 예루살렘 - 바위의 돔과 성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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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ils of the 1st Jewish War (66-70 A.D.)
1 차 유대 전쟁의 전리품 (66-70 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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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왕이 죽은 뒤 유대 속주는 로마의 총독에 의해 직할지배를 받았지만, 헤롯 왕의 손자 아그리파 1세의 친로마 노선으로 기원후 41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유대의 통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아그리파 1세가 기원후 44년에 병사하자 다시 유대 속주는 로마의 직할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며 통치자로서 균형을 유지했으나, 다신교 문화인 지중해 세계 안에서 그리스나 에스파냐, 갈리아, 북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대 속주는 일신교라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고, 이들은 일신교를 이유로 동화를 거부하며 로마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폭리가 취해졌고 그로 인해 불만이 높은 상태에서[4] 이교도인 로마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에게 희생제의(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을 지명하자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불만은 39년경에는 칼리굴라 황제 자신이 스스로 신을 자청하며 제국 전역에 자신의 조각상을 성전에 세우게 한 사건을 계기로 터져버렸다. 야훼(하나님)외에는 주(主)가 없다고 믿어온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황제를 우상화하는 로마제국의 종교정책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로마 행정관인 게시우스 플로루스와 로마제국이 임명한 제사장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비리도 로마제국에 대해 극단적인 무력항쟁을 벌이던 열심당의 세력이 커져가게 했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의하면 유대독립전쟁당시 열심당원들은 대제사장들을 집단살해하고, 성전세로 민중들을 수탈한 죄의 증거인 채무 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예루살렘 성전의 착취와 그 배후인 로마제국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전쟁의 발발은 66년 카이사레아에서 지역 시나고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리스인들과의 다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그리스어를 할 줄 하는 로마 주둔군이 중재를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한 대제사장의 아들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에게 기도하는 것과 희생을 바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이어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을 급습하였다는 것이다.
유대 속주의 장관 플로루스가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의 보물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하고, 항의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단행한 데서 비롯된 폭동은 마침내 66년 6월에 로마 세력을 완전히 유대에서 몰아냈다. 로마 수비대는 폭도들을 피해 왕궁으로 달아났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에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으며, 유대 내부의 온건파의 중심이었던 대제사장도 동생과 함께 살해되었다. 유대 북부를 다스리던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름에서 가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퍼져 나가서,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평소 유대에 감정이 좋지 않던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네로 황제는 갈루스의 후임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유대 속주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당시 3개 군단에 6만여 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 구성원을 보면
- 제5군단 : 도나우 강 연안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로 대부분은 발칸 반도 출신.
- 제10군단 : 시리아 주둔군으로 소아시아와 그리스 출신의 보조병이 대다수.
- 제15군단 : 제5군단과 같은 구성.
여기에 유대 북동부의 로마 동맹세력인 아그리파 2세가 데리고 있던 유대인 병사를 비롯해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대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유대 반군과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할 로마군은 각지에서 이동해오는 군단과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느라, 사령관에 임명되고 반년이 지난 67년 5월에야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이 공략하면서 북쪽 해안가에서부터 남쪽으로 예루살렘으로 접근하여 반란을 진압해 들어갔다. 47일에 걸친 공방 끝에 7월 20일, 갈릴리의 요타파타 요새가 함락되었는데(이때 사망자는 4만 명에 포로는 1,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투항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 장로와 병사들은 로마군에 포로로 잡히기보다는 자결하는 쪽을 택했고, 훗날 《유대 전쟁사》를 집필하게 되는 요세푸스를 포함한 두 명만이 자발적으로 로마군에게 나와서 항복했다. 갈릴리 지역을 진압한 로마군은 유대 중앙부로 전선을 옮겨 68년까지는 거의 모든 북부 유대지방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름에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네로 황제의 죽음으로 유대 전쟁은 1년 반 동안 중단된다.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유대 쪽에서는 시설 보강이나 식량 비축 같은 방어 대책에 전념하면서도, 다가오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할 작정인 사람들에게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예루살렘에 오지 말라"고 말리지 않았으며(오히려 예년처럼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 보내라고 장려하기도 했다) '유일신' 여호와가 지켜주는 예루살렘이 '이교도' 로마의 손에 떨어질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69년 7월 이후, 예루살렘 공략은 재개되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방으로 가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했으며, 재개될 유대 전쟁의 모든 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고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유대계)가 그 옆에서 도왔다. 또한 기존의 3개 군단에 앞서 유대에 패하기도 했던 제12군단이 더 추가되고, 아그리파 2세도 직접 참전했다. 한편 예루살렘 안에서는 열심당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결사항전'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잔인한 내전이 반란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열심당과 시카리오이들은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암살하였고 거의 모든 반란군 지도자들이 로마인의 손이 아니라 유대인의 손에 죽었다.
전쟁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 시도가 몇 번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예루살렘은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벼랑 위에 서있는 천연의 요새이고, 이중삼중으로 겹쳐진 성벅 곳곳에 높은 탑과 튼튼한 돌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우뚝 솟아 있으며, 예루살렘 성전도 이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로마군은 공격에 앞서 관례에 따라 '숫양(아리에스)'이 성벽과 부딪치기 전에('숫양'이란 공성무기, 성벽을 깨부술 때 쓰는 추를 가리키는 로마군의 은어이다) 항복한 자는 용서하겠다며 항복을 권고했지만 유대인은 듣지 않았다. 한편 도시 안에서는 공성전에서 평화협상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드높이기 위해 식량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 많은 도시거주인과 군인들이 굶어죽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공략을 위해 영구진지를 도시 주위에 구축하고 성벽높이의 벽을 쌓고 참호를 팠다. 누구든지 도시를 탈출하려고 하면 붙잡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공성전이 끝날 때까지 만 명이 도시 주위를 둘러싸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지휘했다.
70년 8월 10일에 예루살렘 성전이 성 안으로 돌입한 로마군에 의해 불탔으며, 9월 8일에 시내에서의 저항도 수그러들고 20일에 저항은 모두 끝났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약탈당했다.요세푸스에 따르면 예루살렘 공방전 당시 성 안에는 어림잡아 27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지만, 포로로 잡힌 유대인의 수는 유대 전쟁 모든 기간을 통틀어 9만 7천 명이었고, 예루살렘 공방전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무려 110만 명이었다고 한다. 현재 로마에 서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에는 당시 성전에서 메노라와 같은 성물을 약탈하는 로마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사다 항전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도, 예루살렘 서남쪽 30km 지점의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의 마카이로스, 그리고 서쪽에 위치한 마사다의 세 요새에서 급진파들은 항전하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유대 반란 진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ref>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했던 군단 가운데 3게 군단을 시리아와 도나우 강 연안의 원래 주둔지로 돌려보냈는데, 71년 티투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루실리우스 바수스가 사후수습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남은 유대인 저항군의 요새를 차례로 점령하고 사해까지 진출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병사하고 그의 후임으로 플라비우스 실바가 부임했다. 기원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마지막까지 농성하던 이들이 거의 다 자살함으로써 요새가 함락되고 유대 전쟁은 막을 내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시작된 로마의 유대에 대한 관용 노선은 이때를 전후해 크게 바뀌었다. 예루살렘에서 잡힌 포로 가운데 로마에서 열릴 개선식을 위해 젊고 잘생긴 남자만 남기고 17세 이상의 남자 포로 가운데 일부는 이집트로 보내져 노역에 종사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포로는 노예로서 각 속주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검투사가 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었다. 16세 이하의 남녀는 병사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대제사장 제도도 폐지되고, 70인회도 폐지되었으며 여지껏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과 그 보조병을 합쳐 1만 명의 병력이 상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성전 중심의 사두가이파는 몰락했으며, 기존에 유대인들이 해마다 2드라크마씩 성전에 바치던 봉납금은 유대인에게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의무적으로 부과한다는 '유대인세'의 이름으로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으로 보내졌다. 로마가 점령한 유대 지구에 대한 통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유대 북동부: 그 전대로 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가 통치(일종의 유대인 자치구)
- 유대 서부의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항구 도시: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 사이의 중재자로서만 역할
- 예루살렘 및 내륙 지역: 시리아 속주 총독의 부하인 장관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유대 속주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림.
다만 반항하지 않은, 해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게까지 그들의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된 기원후 73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얌니아(예루살렘과 오늘날의 텔아비브 사이에 위치)라는 도시에 유대문화 연구소(랍비 학원)의 설립을 허가했으며,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주민들이 도시의 야외극장을 방문한 티투스에게 유대계 주민들을 안티오키아에서 추방해줄 것을 진정했지만 티투스는 허락하지 않았고, 로마에서 유대계 주민들의 권리를 새겨놓은 청동판을 철거해달라는 요청도 티투스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출저: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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