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신앙
롬 12:14~20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의 차이가 생기면 우리는 현실에 쉽게 타협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도 현실과 차이가 있으면 그 음성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능력을 만져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이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과 현실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신 것입니까? 사실 이 말씀을 지키면 나에게 얼마나 큰 손해가 될까 하고 깊이 생각해보면, 손해는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원수로 생각하면 복수심과 증오에 불타 원수를 갚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원수에게 보복하려고 하면 그도 또한 보복하려고 합니다. 결국 대결로 인한 피해와 소모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원수를 선대하면 하나님이 친히 그 원수를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숯불을 원수의 머리 위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현실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신뢰하고 그것을 극복하면, 그 차이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신의 능력으로, 신의 방법으로, 신의 기적으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때는 손해가 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쉽게 현실과 타협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공백을 메우고 채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득 채워, 차고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차이를 극복한 신앙인입니다. 가뭄과 기근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이제 마지막 먹을 떡을 조금 만들 정도의 가루와 기름만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엘리야가 떡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것을 선지자에게 대접하면 그 과부와 아들은 마지막 생명마저 단축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는 그 마지막 떡을 선지자를 위에 내어줍니다.
현실은 기근으로 인해 주려 죽게 된 상황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현실을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기근이 마칠 때까지 그 과부의 집에는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근 가운데서도 생명을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가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그의 신앙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으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또한 모세는 애굽 군대가 추격하는 가운데 홍해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비록 환경과 현실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 요지부동한 모습으로 신의 개입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결국 애굽 군대는 홍해 속으로 사라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과 해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고, 축복을 만져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현실을 뛰어넘는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1)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서 내 인생을 경영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다보면 어느 때는 육신으로 생각하면 손해가 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려고 하면 현실과 말씀이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만지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못할까요? 현실 속의 돈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에 소록도 나환자촌이 생겨날 때 그들을 대상으로 특수 목회를 시작한 김요석 목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목회 사연에 감동을 받은 한 남자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기도 이 교회를 나와 사역을 돕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병 환자도 아니고 근처 마을에서 농사도 짓고 돼지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나환자촌의 교회를 나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나환자촌에 오가며 병을 옮긴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병을 옮길까봐 그가 교회 가는 것을 막았지만, 그는 신앙은 내 자유다, 간섭하지 말라며 계속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마을 사람들과 그는 관계가 몹시 나빴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돼지 다섯 마리를 몰고 축사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돼지들이 무엇에 놀랐는지 이웃집 채소 밭에 뛰어들어가 밭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웃집 주인이 배상하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는 채소 값이나 물어주면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주인은 돼지 다섯 마리를 다 내놓으라고 우겼습니다. 기가 차서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보는데 동네 사람들도 그가 얼마나 미웠던지 그렇게 배상하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는 목사님한테 달려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돼지들이 뭉갠 밭이래야 몇 평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돼지들을 다 달라니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집사님,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달라면 주라고 했잖아요.”
“목사님, 그래도 이건 너무 하는 게 아닙니까.”
“집사님, 이왕 믿으려면 성경대로 잘 믿어야 합니다.”
그는 결국 목사님의 말씀대로 어미돼지 5마리를 이웃집 주인에게 다 내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를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굶지 않게 하시고 손해 보지도 않게 하십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리고 얼마 후, 빼앗긴 돼지들이 새끼를 낳았는데 돼지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한 마리 당 새끼를 18마리씩이나 낳았습니다. 어미돼지까지 합치면 거의 100마리가 다 됐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저것들이 다 내 것이었는데...’ 그는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지만, 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쯤 지나 가을이 됐을 때 이웃집 주인이 키우던 황소 세 마리가 갑자기 그의 밭에 뛰어 들어와 채소들을 다 짓밟았습니다. 그는 아주 신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역시 자기 백성을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100배 이익을 보게 생겼습니다. 씨를 뿌리면 100배로 거둔다는 말씀이 정말 맞습니다.”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집사님,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손해 볼 때는 봐도 남에게 손해 끼쳐서는 안 됩니다. 적정선에서 양심껏 배상받으세요.”
“아니, 저 사람이 한 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 기독교가 용서의 종교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떡하면 됩니까.”
“그냥 돌려주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절대로 손해 보지 않게 하십니다.” 그는 억울했지만 이번에도 목사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한편, 이웃집 주인은 야단이 났습니다. ‘한 마리만 배상하면 좋겠는데.’
그런데 웬걸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됐네. 내가 예수 믿는 덕에 자네가 복 받았네. 세 마리 다 가져가게. 채소밭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이웃집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양심이 없다고 해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자기 같으면 얼씨구나 하고 황소 세 마리를 다 빼앗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웃집 주인은 고민하다가 자신도 용서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자신이 6개월간 살지게 키웠던 그 돼지들을 다 몰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잠시 맡은 것이니 나도 돌려주겠네.”
“그러면 어미돼지만 돌려주게.”
“아니야, 다 받게.”
결국 그는 이웃이 6개월이나 키워놓은 돼지들을 다 돌려받았습니다.
(렘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2)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내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내 병이 나았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고난 당하심으로 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이론이 아니라 삶이 되도록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어질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만져보고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경험하며 그의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 속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3)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만지고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 편에 서서 뛰어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때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처음으로 뛰어드는 자가 병이 낫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형편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뛰어들 용기가 없습니다. 포기할 믿음이 없습니다. 현실을 뛰어넘을 담대함이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람들의 핍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복음을 전했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행 7:55-58)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하나님 말씀 속으로 뛰어드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일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4)끊임없이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는데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손해가 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시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로다』
그러므로 이루어질 줄 믿고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인내하는 자는 결국 소망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는 결코 기차 칸을 옮겨 다니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는 결코 움직이지 마십시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더 깊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니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결 론>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이 부딪힐 때,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의 능력을 손으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말씀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보고 먹고 만지고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능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르밧 과부, 스데반은 현실과 말씀의 차이를 극복하여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현실을 뛰어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는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주심을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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