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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25강 분노하는 마음 ③

by 은총가득 2010. 5. 12.

 

 

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25                                              분노하는 마음 ③

 

 

분노하는 마음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

 

  분노는 교회 내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킵니다. 저 개인적으로 분노하는 마음이 교회 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지켜보면서 이 부분에 관한 정리의 필요를 느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억압된 분노는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교회가 되기 쉽습니다.

 

  분노를 억압한다고 해도 다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기회가 오면 약한 곳을 찾아 분노가 튀어 오릅니다. 마치 화산 같습니다. 지반이 약한 곳으로 폭발합니다. 화를 내어도 아무도 시비 걸 수 없는 상황 곧 분노를 인정 받을만한 상황을 만나면 억눌려 있던 분노하는 마음은 폭발합니다. 소위 건수를 만나면 터져 나옵니다. 주로 만만한 사람들을 상대로 터집니다. 아이들이 대표적인 피해자입니다. 아이들이 조금 잘못했을 때, 이건 교육적으로 그냥두면 안된다고 믿고 야단을 칩니다. 문제는 잘못만을 야단하는 게 아니라 내면세계에 눌려있던 화산을 폭발시킵니다. 아이는 야단을 맞으며 생각합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아마 밖에서 속상했던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야단을 맞는 게 아니라 화산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남편이 어쩌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박을 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이건 누가 봐도 건수니까 소리소리 칩니다. “아니 내가 이날이 되도록 어떻게 고생하며 당신위해 살았는데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럴 때는 보통 그동안 눌러 놓았던 친정부모에게 남편이 서운하게 했던 것까지 다 터져 나오는 법입니다.

 

  특히 교회 안은 건수가 잘 잡히는 곳입니다. 교회는 분노가 폭발하기 아주 적합한 장소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교회 안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서로가 솔직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는 서로가 불만이 있으면 술 한 잔 하면서 풉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교회니까 참아야 하고, 눌러야 합니다. 자연히 억압이 생깁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눌려 있었던 것들이 교회 안 여기저기에서 터집니다. 불만 있던 당사자들끼리 터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일날 빠지면 이건 누가 봐도 건수니까 “아니, 집사가 그래가지고 돼? 십계명도 몰라요? 성경말씀도 몰라요?” 건수를 잡은 것입니다.

 

  목회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은 분노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기 쉬운 곳입니다.

목사도 엉뚱한 곳에서 터뜨립니다.  성도가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성경을 들추면서 마구 야단을 칩니다. 성도들은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다가 찢기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설교로 성도를 칩니다. 성도들은 고아와 과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굶주림을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채울 수는 없습니다. 왜 채울 수 없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보이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들이 목사와 사모입니다. 굶주림이 목사와 사모에게로 향합니다. 목사님을 대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만나는 듯이 헌신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굶주림이 있습니다. 목사를 사모하며 굶주림을 채웁니다. 그러나 목사가 항상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를 보면서 시어머니, 가정문제, 수많은 굶주림을 채우려 듭니다. 교회가 작거나 개척시기 때에는 그나마 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내가 잘났니 네가 잘났니 하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리 목사님은 저 사람은 채워주고 나는 몰라라 한다고 야단입니다. “내가 누군데. 헌금도 많이 했는데”생각하며 좌절이 생깁니다. 서운해 합니다.

 

  여기에 더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도 굶주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채워주다 보면 스스로 지칩니다. 목사도 결국 좌절합니다. 좌절은 곧바로 분노를 만듭니다. 분노가 생기면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아, 내가 사람을 미워하다니.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은 신앙을 가로막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죄의식이 있으면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참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참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교회에 가도 은혜가 되지를 않습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죄의식과 굶주림이 뒤범벅이 됩니다. 교회를 떠날 구실을 찾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봉사를 해도 전처럼 재미가 없습니다. 자꾸 교회를 옮겨 다닙니다. 서울 시내에 이러한 신자들이 무지하게 많다고 합니다.

 

  목회라는 현장은 굶주림의 현장입니다. 교회는 분노와 상처의 현장입니다. 굶주림이 크면 클수록 분노와 상처의 강도가 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17:1)

   

  교회는 특수한 집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 문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쉽게 받습니다.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으면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것을!” 하며 후회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하는데 인간인지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보다는 눈앞의 사람에게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입게 되는 상처들. 목사님이나 성도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굶주림 때문입니다. 교회를 옮겨보지만 실족할 뿐입니다.

 

  교회에서의 상처와 분노는 가정에도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성도의 가정보다 목사의 가정이 더 병이 들기 쉽습니다. 목사도 줘야 하고, 사모도 줘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저녁에 두 사람은 지쳐있습니다. 굶주린 상태에 빠집니다. 서로 받기만 바랍니다. 탈진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다툼이 일어나고 목회자의 가정은 병이 듭니다. 가정에서 치유되지 못한 분노를 가지고 강단에 서면 강단은 분노의 강단이 됩니다. 이런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설교는 분명 성경인데 듣고 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을 억누르고 정죄하는 말씀이 되어있습니다. 실제로 목회자나 일반 성도들이 즐겨 쓰는 거룩한 말씀 속에 개인의 분노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참 좋은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죽이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노가 스며 있을 때 말씀을 듣는 자는 죽어갑니다. “아, 그렇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아야지”하면서도 마음만 답답해올 뿐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축 쳐져 있는 사람을 팍팍 팍 살리는 생동감 있는 말씀이 그립습니다. 설교시간에 푹 꺼져 있다가 교회 문만 나서면 생동감이 넘쳐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교회 옆 식당 장사 안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눌린 가슴, 식당에서 먹으며 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치유의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목사도 성도도 굶주림을 하나님에게서 채워 내적 성숙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에 토대하여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치유입니다. 회복과 부흥에 있어서 치유는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입니다. 회복과 부흥은 우리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아픈 이들이 찾아와 회복되어 하나님의 부흥의 때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둘째, 억압된 분노는 위장에 능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이런 위장술로 나타납니다.

분노는 위장술에 능합니다.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사형 : 정죄하고 판단하는 형

  2) 집착형 : 일에 몰두하거나 열심이 특심인 형

  3) 결벽형 :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해야 안심하는 형

  4) 능멸형 : 말씀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멸시하는 형

 

  억압된 분노는 정죄하고, 판단하는 교사형으로 위장을 합니다. 그런가하면 일에 몰두하게 하거나, 열심을 내는 집착형으로 위장을 합니다. 결벽형 곧 완전주의형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는 말씀을 가지고 다른 성도를 멸시하는 능멸형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당신들은 이 정도도 못하느냐? 기도를 그렇게 안 해가지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생각을 말아!” 능멸형은 남을 정죄하고 무시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내용인 즉은 멸시입니다. 이럴 때, 말씀은 생명이 아니라 살인도구가 됩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은 영적 우월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노하는 마음이 치유되지 않으면 성도들은 거짓 신앙체계에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존경했던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너무 엄격하셨습니다. 너무 거룩하다고 여겨졌기에 그 옆에 감히 가지를 못했습니다. 철인이셨습니다. 위대한 모습으로 우뚝 서 계신 그 분 옆에는 아무도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 분은 거룩했을지 모르지만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죽어 갔습니다. “왜 못하느냐?” 야단하시던 그 모습. 지금 생각해보면 격려라기보다는 분노였습니다.

                            

  자신도 남을 실족케 할 수 있다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사명을 주셨는데 도리어 죽여서는 안 됩니다. 개척교회 하나 더 세우는 일보다도 성도 한 사람 실족시키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모두가 굶주린 가슴을 끌어안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무지무지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셋째, 좌절된 분노는 한(恨)을 만듭니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으면 나중에 한이 됩니다. 분노가 망각되었다고 해서 용서된 것이 아닙니다. 잊어버린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아, 난 그 일 다 잊었어!”라고 하지만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란 사건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깊이만큼 용서됩니다. 억압된 만큼 다른 일에서 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사람이나 사건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바울의 고백처럼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대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넷째, 분노는 유전됩니다.

 

  여러분, 보통 누구에게 화를 냅니까? 자기보다 약자에게 화를 냅니다. 그래서 ‘내리 사랑’처럼 ‘내리 분노’가 있습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이 분노도 제일 많이 먹습니다. 사랑도 내려오고 분노와 한도 함께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미워하던 사람을 어머니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자식이 똑같이 미워합니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어도 어머니께서 미워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미워합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미워했으면 아이에게 그 미움이 사랑과 함께 내려갑니다. 아이도 아버지와 원수가 됩니다. 그런 아이들이 커서 결혼하면 대개 남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남편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다섯째, 우리 민족성 안에 분노가 억압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한과 분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계에도 분노의 피가 흘러오고 있습니다. 민족의 한을 끊어야 합니다. 가계에 흐르는 분노의 피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입니다. 사실 우리 민족처럼 착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민족처럼 과격한 민족도 세상에 다시없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우리나라에는 무슨 투사, 무슨 투사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참 많기도 합니다. 외국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들은 매우 정의(?)로운 민족입니다. 연일 데모하는 학생들과 노동자들 뿐이니까요. 독재에 항거하여 싸우지요, 정부의 잘못 때문에 싸우지요, 쓰레기 반입 금지한다고 싸우지요. 외국 T.V 에는 우리들이 데모만 하는 국민으로 보입니다. 정의(?)로운 우리국민들이지만 우리나라처럼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 깊숙이 비리가 뿌리내려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전된 민족의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격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필리핀 사람들을 예로 듭시다. 그들도 우리처럼 수많은 착취와 핍박 속에서 살았던 국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참으로 순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과 악수할 때면 참으로 편하게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악수할 때, 꽉 쥐어야 믿음직한 사람으로 인상을 줍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국민들이 과격한 걸까요? 분노 때문에 그렇습니다. 분노를 감추어야 하니까 반가운 척 하느라고 손을 꽉 쥐며 악수를 합니다. 외국에서는 손을 꽉 쥐면 실례가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를 잘 냅니다. 우리나라 음식은 맵고, 짜고, 뜨겁습니다. 한여름에도 이열치열하면서 불을 삼키며 음식을 먹습니다. “뜨거운 것을 잘 먹어야 잘 산다”고 어른들에게서 배웁니다. “여자는 뜨거운 그릇을 잘 잡아야 잘 산다”고 배웁니다. 배     부르면 젓가락 두들기며 노래 부르고 한바탕 야단이 나야 합니다. 아, 무지무지하게 더운 날일수록 보신탕이 잘 팔리는 나라, 우리나라입니다. 땀 뻘뻘 흘리고 음식을 먹어야 “아, 잘 먹었다. 거 참 시원하다”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술을 마셔도 1차로는 왠지 부족합니다. 2차 3차까지는 가야지 술을 마신 것 같습니다. 요즈음은 3차로는 부족하여 노래방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길거리 아무데나 욱욱! 하며 쏟아냅니다. 좔좔! 아무데서 오줌을 눕니다. 노사갈등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노사하면 원수입니다. 의례 1년에 한번은 우싸우�!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운전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조금 기분 나쁘면 빵빵대야 속이 후련해지는 교통문화, 서울의 시내교통 모습입니다.

 

  민주주의도 필요하고, 개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파괴적인 분노가 문제입니다. 사단이가 우리 민족성 안에다가 분노의 성을 쌓았습니다. 모든 분노의 배후에는 사단이가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사단은 뒤집어 버리는 역사를 좋아합니다. 우리 민족의 파괴적인 분노 때문에 역사의 악순환이 현대사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5공화국은 4공화국을 죽여야 합니다. 6공화국은 5공화국을 죽여야 합니다. 차기정권은 직전의 정권을 죽여야 삽니다. 국민들도 그것을 즐깁니다. 죽여라! 죽여라! 찢어라! 찢어라! 외치는 소리 뒤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가 민족의 분노 속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서로 죽이라고 합니다. 찢으라고 합니다. 모세는 버림받음으로 인한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입니다. 분노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살인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바로의 분노를 사서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 시간 생각해 봅시다. 지금의 남편이 밉다기 보다는 내 삶에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는지. 혹시 물려받은 분노가 있지는 않는지. 유전된 분노가 내 속에 있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말로 용서했는가?

십자가 밑에 나의 분노를 내려놓았는가? 분노의 짐이 십자가 앞에 내려졌는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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