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14-26)
여기 2장의 후반부에서 야고보 사도는 자기들의 마음의 성향이나 삶의 진노는 그들이 고백하고 있는 거룩한 종교와 일치되지 않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공허한 신앙 고백만을 하면서 마치 그 고백이 자기들을 구원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과오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근거 위에 그들의 희망을 걸고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믿음만으로가 아니고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강조하여 증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Ⅰ. 이 구절에서 발생하는 큰 문제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을 어떻게 서로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인들과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상과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써, 그는 자주 강조하여 말하기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Amicae scripturarum lites, utinam et nostrae
─ 즉 성서에는 서로 다르게 보이면서도 이 부분과 저 부분이 아주 잘 일치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견해의 차이가 이처럼 쉽게 화해될 수 있다면 정말로 훌륭한 일일 것이다. 박스터는 말하기를, 다름 아닌 바울의 서신이 의미한 분명한 뜻과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야고보가 화해되기에 큰 난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신앙 지상 주의자들이 주장하고 나선 일반적 견해가 박스터의 말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고, 지식 있는 사람들이 야고보 사도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생각해 낸 방법들이 많이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만을 살펴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1.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말할때에, 그는 야고보가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행위를 말하고는 있으나, 또다른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인간들이 복음의 믿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모세의 율법에 복종하기 위하여 행한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를 한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로마서 10장의 앞부분에 분명하게 선언되어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복음에 복종하는 행위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는 건전한 믿음에서 생겨나는 적합하고 필요한 결과들과 열매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우리를 구원하고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에 대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그 확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반대되는 복음 이전의 율법의 어떠한 행위로써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복음에 대한 믿음을 확장시키려 하고 있고, 야고보는 믿음에서 연유되는 참되고 필수적인 결과와 믿음의 역사함을 보여 줌으로써 마찬가지로 복음을 믿는 믿음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바울은 야고보가 주장한 것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주장되고 제안된 선행에 대한 전혀 다른 사용법에 대하여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자기 행위의 공적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의 공적은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야고보는 믿음을 외치면서 그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텅빈 공허한 고백만 하면서 그 고백이 자신을 충분히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러한 고백과 함께 선행의 필요성과 그 놀라운 중요성을 또한 알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한 조항을 다른 조항과 충돌시켜 그 일부분을 파괴해서는 안 되고, 또한 율법과 복음을 맞부딪쳐서 서로가 부서지게 해서도 안 된다. 복음을 외침으로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함으로 복음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은 모두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하여 나아가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서 생겨지는 열매가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바울이 말하는 의인은 야고보가 말하는 의인과 좀 다르다. 바울의 의인은 우리들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입는 것을 의미하고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의로와지는 것이다. "네 행실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야고보는 말하였는데, 이는 네 행실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의 믿음이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순전히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선행으로 인하여 인간들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임을 알게 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믿음을 설명할 때에, 그것을 "믿음의 역사"라고 하거나 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살전 1:3; 갈 5:6; 딛 3:8 그 밖의 많은 구절들)이라고 한 것을 야고보는 옳게 인정하고, 그것을 확고하게 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4. 의인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의인의 시작에 대한 것이고 야고보의 설명은 그 완성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써 뿐이지만, 마지막 날에 우리의 의인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선행이 뒤따라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마 25:34)라고 주께서 말씀하실 것이다.
Ⅱ. 이 구절들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것들과 상충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이제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이 탁월한 구절들에서 특별히 더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도록 하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으며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하자.
(1)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참된 유익이 없을 것이다. 공허한 신앙 고백이 때로는 유익하게 보이며, 진실로 선한 사람들이 호감을 얻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수유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이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은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를 판단하여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되는 것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은 마지막 날에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정죄됨과 파괴됨만을 가중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2) 어느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말과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는 말은 서로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다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기 때문에 야고보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본문의 의도는, 행함이 없는 주장이나 공론, 찬동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따라서 본문은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입으로만 자기의 믿음을 자랑하지만, 이는 자기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며,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빈약한 상태에 있는가를 속이는 일이다.
2. 사랑과 자선이 실제적인 원리이듯이 믿음도 실제적인 원리라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운다. 따라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나 믿음은 모두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인간은 자선의 행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무척 바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믿음에 합당하고 필요한 열매도 없이 믿음이 있는 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판단하게 될 것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5-17절). 이와 같이 빈 말만 가득한 사랑이 당신이나 가난한 형제에게 무슨 유익을 줄 것인가? 당신은 이렇게 텅빈 말만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가? 당신은 사랑과 자비로움에 있어서 자신의 행위 없이도 할 바를 다 한 것처럼 여겼듯이 믿음의 고백에 있어서도 경건과 순종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17절). 우리는 텅빈 말로만의 믿음의 고백을 하기가 쉬우며, 또 그 고백만으로도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조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값싸고 손쉽게 믿을 수 있는 종교로써, 이러한 고백이 우리를 천국에까지 충분히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또한 자기들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거짓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증한 것이며 이 둘은 모두 참된 경건성에 대하여 죽은 상태에 있다. 당신들이 죽은 몸과 공허한 영혼 또는 공허한 마음과 행동 속에서 즐거워하며 만족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도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 만족하고 계셔야 할 것이다.
3. 우리는 행함이 없이 믿음 그 자체만을 자랑하는 믿음과 행함으로 증거된 믿음을 서로 비교해 보고 살펴봄으로써 이 비교가 우리 마음속에 주는 어떤 영향을 얻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여기서 받는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자만하는 위선자와 변론한다고 가정해 보라. "너는 믿음을 고백하고 네가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러한 자랑거리가 없으나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는 행함이 있다. 이제 네가 할 수 있거든 행함이 없이 고백한 네 믿음의 증거를 내게 보이라. 그러면 나도 나의 믿음에서 연유된 행함을 너에게 보여 줌으로써 나의 믿음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거해 보이겠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들에게 자기 자신들과 타인들을 판단할 때 하나의 본보기로 삼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이러한 증거를 따라서 심판하시리라는 것이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의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 20:12) 그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자만한 사람으로든지, 아니면 경건과 자비의 행위로 자기의 믿음을 증거하는 자로서든지, 어느 형태로든 드러날 것이다.
4. 여기서 우리는 헛된 공통적인 믿음과 지식에 지나지 않는 믿음은 사탄의 믿음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주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야고보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여 선택한 믿음의 예는 모든 종교의 첫 번째 되는 원칙이다. "네가 무신론자들에 대하여 반대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며, 또한 우상 숭배자들에 대항하여 한 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면 잘하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옳다. 그러나 네가 이런 상태에 머물러서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속 내세운다면, 이것은 네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믿고 떨기 때문이다(19절).
만일 네가 신조와 그에 대한 어떤 공론들을 단순히 동의함으로써 만족해 한다면 마귀들로 역시 그렇게 한다. 마귀들의 믿음과 지식이 단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떨게 만드는 데만 보탬이 되는 것과 같이 너의 공허한 믿음과 지식도 그러하리라." 떤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인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나쁜 결과로 씌어졌고, 사탄의 믿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사탄이 떠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다만 미움과 적대심에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우리의 신조를 되뇌이는 일만으로는 결국 우리가 사탄으로부터 구별되지 못하므로, 우리는 다만 복음이 지시하는 대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사탄이 하지 않는 것들이며 할수도 없는 것들이다.
5. 우리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은 현재에서 심판 받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간주되어야 할 것을 배운다. "아아 허탈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절). a;nqrwpe kene. - 즉 허탈한 사람으로 Raca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같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그 말은 한 개인에게 씌어지거나 분노의 결과로써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에서 사용될 의미는 선행은 하지 않고 믿음만을 자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대한 염오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고 비열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영적인 생활을 증명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위의 공허함 때문만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길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허한 믿음이 고백만을 하는 신자들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
6. 우리는 여기서 의로운 믿음이란 행함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두 예로부터 배우게 된다.
(1) 첫 번째 예는 믿음의 조상이며 유대인들이 특별히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의롭게 됨의 으뜸가는 예로써 아브라함을 들 수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 바울은 또한편 이렇게도 말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 두 가지 견해는 히브리서 11장을 살펴 볼 때에 그 조화를 찾을 수 있는데 즉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들은 둘 다 야고보가 말하는 선행들을 동반한 믿음들이었으며 또한 의롭게 하며 구원하는 믿음과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한 일로써 그가 진실로 믿었다고 증명되었다. 이러한 행실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건 속에 들리어졌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창 22:16, 1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라고 기록되었다.
이 구절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구약성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구약 성서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23절)는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 이러한 행동이 뒤따르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거룩한 하나님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 특별한 사랑과 친교의 관계를 가지게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어지고 그렇게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가장 큰 영광이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사랑과 우정의 관계에 들어가서 되고) 믿음으로만은 아닌 것이다(24절). 즉 공허한 주장이나 고백 그리고 복종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선행이 뒤따르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위에서 야고보가 주장하는 바를 좀 더 보충 설명하기 위한 설명과 예증 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기록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에서 많은 유익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아브라함이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의 믿음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지지 아니한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만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2]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함이란 자기 부인의 행함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에 대한 행함이어야 하고(아브라함이 그의 독자를 제물로 바친 것처럼) 우리의 육신과 혈기를 만족케 하거나 우리의 흥미를 돋구는 행함, 그리고 우리 자신이 상상하거나 궁리해서 만들어낸 결과여서는 안 된다.
[3] 하나님을 위하여 경건하게 목표로 삼고 성실하게 결심하는 일은 마치 실제로 수행되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용납되어진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비록 실제로 아들을 희생 제물로 각을 뜨지는 않았으나, 그는 그의 아들을 드린 것과 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과 결심 속에서 전부 수행되어진 일이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완전히 수행되고 완성된 제사로써 받아들이셨다.
[4] 마치 믿음의 진리가 믿음으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고,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완전에 이르도록 성장시킨다.
[5] 이같은 믿음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벗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참으로 믿는 영혼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안락하고 즐거우며 기쁜 일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뜻과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며, 그리고 상호간의 만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믿는 자들을 기뻐하시며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그들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
(2) 행위를 통하여 그 자신의 믿음이 의롭게 되고 또 우리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있는 두 번째 예는 라합의 경우이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5절) 전자 아브라함의 예는 그 일생동안 훌륭한 믿음으로 유명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후자인 라합의 경우는 믿음이 아주 보잘 것 없고, 한결 저속한 수준에 속하여 있으며 죄인이라고 지적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는 가장 강한 믿음이나 가장 보잘 것 없는 믿음이나 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이는 의로 여겨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주석자들은 본문에서의 기생이라는 말이 라합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해석하고 또다른 주석자들은 단순한 호스테스이거나 아니면 정탐꾼들이 숨어들 수 있었던 주막을 지키고 있는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라합의 사람됨이 수치스럽게 알려져 있었던 것은 대단한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가 묘사된 것은 가장 악한 사람일지라도 이같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행위가 없을 때에 그의 믿음은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신실한 믿음으로 증명된 것은 그 생명의 위험 가운데서도 정탐꾼들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길로 그들을 나가게 하여 준 행위로써이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살펴 보자.
[1] 죄인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는 믿음이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다.
[2] 실천하는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게 되고 이로 인하여 그의 자비와 은총을 얻게 된다.
[3] 큰 죄를 용서받을 때, 거기에는 마땅히 자기를 부인하는 위대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 라합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익을 자기 나라의 안전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겨야 했다. 라합의 이전에 지녔던 지식들을 버려져야 하고 이제까지 걸어온 삶의 방식은 전부 포기되어져야만 하며 의롭다 여김을 받기 이전에 자기 믿음의 표시가 되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라합이 의롭게 된 후에라도 그녀는 자신이 지녔던 이전의 특성들을 기억해야만 하는데, 이는 불명예를 들추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풍부하신 은혜와 자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비록 그녀는 의로와졌으나, 여전히 기생 라합이라고 불리운다.
7. 이제 야고보는 전체적으로 통털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영혼(Spirit)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이 말씀은 다르게도 읽혀지는데, 어떤 이는 "숨이 끊어진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라고 읽는다. 그리고 그들은 호흡이 생명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이듯이 행함은 믿음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라고 한다. 또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읽는다. "혼(soul)이 없는 육신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또한 죽은 것이라." 그들은 혼이 떠난 몸이 아무런 행동도 없고 아름다움도 지니지 못한 단지 몸서리쳐지는 시체일 뿐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공허한 신앙 고백은 아무 소용없이 다만 몸서리쳐지는 불쾌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행동들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선행들을 뿌리와 원칙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되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서 되어지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용납 받을 것을 목적하여 이루어짐으로 선한 행실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2) 가장 그럴 듯한 믿음의 고백이라도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이것은 초록색의 잎새가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의 뿌리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은 뿌리요, 선행은 열매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다 소유하여야 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한편이 없이 어느 한편만을 가지고도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믿음과 행동을 함께 지닐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언제까지나 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오직 믿음인가? 아니면 행위 구원인가?
(약 2장 14-26)
1. 마르틴 루터의 입장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칭의 개념을 이해한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루터는 야고보서를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봅니다.
2. 유대 랍비의 입장
유대 랍비들은 신앙과 행위, 신앙과 순종, 율법과 행위, 순종과 공로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의 통일체였습니다. 따라서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출신 기독신자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칭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행위 문제에 있어 설명이 달라졌습니다.
3. 사도 바울의 입장과 야고보서의 입장
1) 사도 바울의 입장
사도 바울은 유대출신 신자들을 유대 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분명하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다(롬 1: 17; 롬 4: 2-3). 유대 출신신자들에게 행위는 유대 율법(특별히 할례 의식)을 지키는 것이므로 행위와 믿음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면 인간은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롬 4:2).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롬 4:2).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 일입니다(롬 4:4).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기에 이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을 신자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었으며(롬 1:5)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진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2) 사도 야고보의 입장
사도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행위를 강조하나 이것이 야고보가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행위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는 아브라함처럼(약 2:21) 당연히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는(약 2:14) 점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형제자매의 궁핍을 보고 반응하는 믿음입니다(약 2:15-17). 즉 <신앙 없는 행위(행위 구원)>가 아니라 <신앙 있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즉 야고보는 신앙과 행위를 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앙과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성도라면 구원 받은 자답게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함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일시적 회심이나 죽은 믿음이 아님을 보이라는 거지요.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믿음(우리 성경에 <믿음>이라고 했으나 실은 <아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의미에 더 맞음)은 귀신들조차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2:19). 귀신들조차 알고 믿고 떠는 그런 믿음은 참 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귀신들조차 잘 아는 그런 믿음조차 없는 자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 믿듯 예수 믿는 한국인들 참 많습니다. 이런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예수님 동생 사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3) 두 사도 사이의 진정한 입장 차이는 없다
따라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사도 바울의 입장과 믿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과 순종과 신뢰의 행함(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믿음의 행함)이 따라온다고 본 야고보, 이들 사도 두 사람이 이해한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있어 사실 본질적 차이나 모순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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