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님(손동희권사)
손양원 목사는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비가 없어서 낮엔 신문배달, 우유배달, 만두장사를 해서 야간학교를 다녔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결혼 후엔 평양신학을 마치고 나병환자 수용소인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1939년, 7월). 이 나환자들은 가지 각색의 끔찍한 모습들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이들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손양원은 「기도시」를 쓰셨습니다.
위의 첫머리만 적겠습니다.
“오, 주님! 이들을 사랑하되 내 부모 형제 처자식들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당한 자들이옵고 부모 형제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그래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
세월이 흐르면서 나환자들과 손양원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이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 39세 - 신사 참배 반대로 일경에 끌려갔습니다.
만 5년 동안 갖은 고난 끝에 하나님께서 8․15해방이란 선물을 주셔서 끝내 해방과 함께 출옥했습니다.
그리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가족은 옛날에 살았던 애양원 사택으로 되돌아와서 그간 신사참배 때문에 못 갔던 학교도 다닐 수 있어서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 행복은 절정을 이루었지만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큰 폭풍이 문 앞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누가 그것을 알았으랴!
1948, 10, 19일 내가 순천 매산 여중 1학년 때 (16세) 이 날에 뜻밖에 공산 게릴라들이 여수, 순천에서 대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여수, 순천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꼭 1주일 만에 끝냈습니다.
1주일 동안 여수 순천 두 지역에서 사망자 숫자는 (전남 보건 후생국에서 발표한 숫자) 3천 4, 5백명이었습니다.
이 때 내 두 오빠 (동인 오빠 25세, 동신 오빠 19세)는 꽃다운 나이에 같은 동료 친구들에게 끌려가서 한 날 한 시에 총살 순교당하고 말았습니다(1948, 10, 21일).
뜻밖의 두 오빠 죽음이 온통 울음바다를 이룬 것은 두 말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두 오빠 장례식을 마치고 1주일 쯤 지났습니다. 동인, 동신을 죽인 놈을 잡았습니다.
그 놈은 큰 오빠 같은 학교 학생 강철민 (가명)으로 밝혀졌습니다.
난 이 소문을 들었을 때, 두 오빠 죽인 놈을 내 손으로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는 두 오빠 죽인 강철민을 사형대에서 빼내어 양아들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펄펄 뛰며 “아버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예수를 못 믿습니까? 아버지는 왜 항상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 하고 적극 반대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날 설득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1, 2 계명 지키기 위해 과거에 감옥에서 고생했고 너희들까지 고생을 시켰는데 강철민 그 학생을 안 잡았으면 모르되 일단 그 학생을 잡았단 말 듣고는 이대로 모른 척할 없구나.
1, 2 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 아니냐?
내 어찌 1, 2계명은 순종하면서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큰 모순이랴? ‘
원수를 사랑하라’ 는 명령을 내가 만일 안 지킬 것 같으면 과거 5년 간 감옥살이 헛일이었고, 너희들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 시킨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넘어질 수 없구나! ....”
하시는데 손 목사는 이 세상 그 누구의 말보다 하나님 말씀 한 마디면 그것으로 끝내 버리는 분이시었습니다.
결국 난 아버지께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오빠 죽인 강철민은 사형 직전에 구출됐고 손 목사는 그를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시켜 독실한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두 오빠 순교 후 2년 뒤, 1950년 6․25가 또 터졌습니다. 공산군들은 물밀듯이 남침해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친구들 (목사) 이 몰려 와서 피난 가자고 했으나, 아버지는 거절하셨습니다.
이 때 피난 가지 않으면 죽는 것은 귀정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난국에 가장 급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양 먹이는 목자가 내 양떼 신앙을 지켜야지 더구나 몸도 성치 않는 나환자를 버리고 나 혼자 살자고 어디로 피난 가겠나.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
라고 하시면서 끝내 피난 가지 않았습니다.
9월 13일 공산당들은 애양원에 들이 닥쳤습니다.
아버지는 강단 뒤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낚아채 갔습니다.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미국 놈 스파이, 미국 놈 앞잡이, 공산당을 악선전 했다면서 물매를 맞고 9월 28일 이들은 후퇴하면서 아버지를 끌고 여수 밑의 미평, 큰 과수원 속에 끌고 가서 총살했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48세의 한 많은 생을 순교의 재물로 마감했습니다.
지금 세 무덤은 (큰 오빠, 작은 오빠, 아버지 ․ 어머니) 애양원 동도섬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흙 속에 들어간 씨앗은 그 씨가 반드시 죽어야만 그 결실의 열매가 100배 혹은 천 배가 된다고 했습니다.
두 오빠와 아버지는 떠났지만 그들 시체 안에는 한 알의 씨앗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많은 열매가 맺혀 수 없는 영혼들을 깨우치는
「믿음의 표본」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을 저는 뒤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이 세상일에 매이지 않고 ‘고대가’를 지어서 부르면서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그리고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스승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습니다.
“고난은 최고의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이런 시를 써서 보냈습니다.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매개가 됐지만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의 영화가 된 까닭입니다.”
아버지 손양원 목사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는 욥의 고난과 인내를 추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설교 원고지 위에 적혀져있는 메모의 글 ● |
(첫째) 하나님의 지능을 의지하고 나의 지(知)를 믿지 말 것. (둘째) 주님을 나타내지 않고, 나를 나타낼까 삼가 조심할 것. (셋째) 성경원리를 잘 모르고 내 지식대로 거짓말하지 않게 할 것. (넷째) 간증 시에 침소봉대하여 거짓말되지 않게 할 것. (다섯째) 나도 못 행하는 것을 남에게 무거운 짐 지우게 말 것. (여섯째) 내 말 한마디 말에 청중 생명의 생사가 좌우됨을 깊이 인식하고, 말 조심하고, 충성을 다할 것. (일곱째) 이 한 시간, 성경말씀 한 마디에, 인간의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
(여덟째) 음식과 물질에도 크게 주의할 것.
(2) 배를 위해, 입맛에 취해 먹지 말고 일하기 위해 먹으라. (2) 물질이나 선물에는 하등의 관심을 두지 말라.(아 멘)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 손동희 권사 - |
손동희 권사는 아버지 손양원 목사의 신앙을 어떤 문제가 막 부딪히면 고난을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자 신앙의 필수조건이라고 여기며, 그 고난을 하나님 아버지의 바지 가랑이를 붙들고 기도함으로 이겨내는 신앙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신앙은 손양원 목사가 총 다섯 개의 감옥을 이동다니며, 투옥되었었는데, 특히 청주구금소에서 독립투사들과 애국청년들을 만나면서 더욱 견고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감옥은 처참했다. 밤 12시만 되면 독립투사들을 끌어내어 동지들이 어디 있는지를 밝히라며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타서 코로 입으로 그 물을 넣고, 전기고문을 하고 해도 그들은 일부러 말을 안하려고 스스로 혀를 깨물어 그 혀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말하지 않고 버텼다.
손양원 목사는 이들의 혀 깨무는 장면을 목격 저들도 국가를 위해 이리 하는데 우리 주님을 위해 한 목숨 바칠 수 없겠는가라는 생각에 그 다음부터 이 세상에서 아무 무서울 게 없어졌다.
감옥에서 손 목사는 함께 있는 자들을 보기만 하면, 눈만 뜨면 전도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전도를 하니 일본 사람들은 얼마나 손 목사가 얄밉고 시끄러웠던지 결국 그는 독방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말을 안 듣는 사람에게는 반식판이라고 일종의 벌로 이전 배식량의 절반가량으로 식사를 주었는데, 이 때 손 목사는 숨만 간신히 쉴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눈이 점점 멀 정도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여보, 여보, 점점 눈이 멀어가오...
또 영하 10도의 추운 겨울, 그 감옥에서 얼마나 부들부들 떨었는지... 온 몸이 굳어지는 것은 물론, 양손 양발이 또 얼고 또 얼어 동상에 걸려 살이 진무르고 완전히 사경을 헤메게 된 손 목사는 검사, 판사 앞에 갈 때도 들 것에 실려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난과 어려움에 쉽게 굽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 고난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신앙을 보여줘 이 감동적인 신앙은 기독신문의 내용에 실려졌다.
빈 방을 홀로 지켜 성삼이 함께 하니 온갖 고난이여, 다 오라. 주님을 체험하리라.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지혜는 타락의 길이 되었으나 욥의 인내는 더 큰 교훈을 주노니 연단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지상에서의 고난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고난의 뒤는 위로와 기쁨이 다음 차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의 고난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손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손동희 권사의 집에서는 손 권사의 두 오빠에게 군대입대 명령장이 왔다. 그 당시는 군대에 가면 매일 아침마다 신사참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대거부는 곧 사형이었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은 이 문제를 놓고 금식기도에 들어가고, 금식기도 마지막 날, 모든 식구들은 똑같은 기도응답을 받았다.
일곱 식구가 흩어져 가정에 해체되면 큰 오빠 군대 문제가 해결된다
결국 손 권사 가정은 할아버지는 만주 하얼빈의 작은 아버지 집에 막내와 큰 오빠는 남해의 깊은 산골, 작은 산속에서 움막을 치고 거지생활을 나와 동생은 고아원으로 흩어졌다.
흩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린 가정예배에서 모든 식구들이 얼마나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었는지 예배를 제대로 잘 드리지 못했다고 손 권사는 그 때를 회상한다.
손 권사는 고아원에서 엄마, 아빠, 오빠 생각에 밤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리움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나중에 그 그리움이 미움과 원망, 또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까지 이르렀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길래 사랑하는 아버지는 감옥에서 고생을 해야 하고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가? 왜 아버지는 별난 예수를 믿어서, 별난 예수 믿으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고아원에 온 지 1년이 지난 후,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늘 진 곳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둘러앉아 대낮에 예배를 드리는데 보통 때와 달리 울고 불고 할렐루야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드리면서 그날처럼 요란스럽게 예배를 드린 날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 요란하던 예배는 8월 15일 해방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드려졌던 예배였다.
이제 해방되어서 너희 아버님이 감옥에서 나오신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손 권사는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신형이라는 선고를 받은 이상, 아버지가 죽어서야만 감옥 밖을 나올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이 땅에서 아버지는 다 잊어버리고 살아야 겠다 결심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타난다는 소식은 마치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기적의 소식으로 들렸다.
이 때 일본인들은 독립투사들이 일본인들에게 보복할 것을 예상해서 독립투사들을 해방 이틀 후인 17일 대량학살하려 했는데, 해방날짜는 15일로 이것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해방과 동시에 손양원 목사는 출소해 고아원에 어린 자식들을 찾아왔다. 고아원을 찾은 손 목사의 모습을 회상하는 손권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는 말로 당시의 비참한 모습을 표현했다.
거지 중에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초라한 아버지였지만 손 권사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아버지였던가.
어디보자. 얼마나 그 동안 고생했냐?
손 목사는 두 자식들을 끌어안고 울고 또 두 자식은 아버지를 따라 울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었다. 이제 더 이상 고아원에서 살 필요가 없게 되고 쫓겨 다닐 필요가 없게 된 손양원 목사 가정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못다녔던 학교를 다니게 되고 행복한 가정생활과 애양원 사역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삶을 볼 때, '하나님이 어디있냐'고 원망했었지만 나중에 많은 세월이 흘러간 후에 되돌아 보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점 찍어놓고 믿음이 표본을 이 땅에 세우시려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이 아버님을 단련시키고 이길 힘을 주시고 그래서 오늘날 손양원 목사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씨가 반드시 죽어야만 백 배, 천 배 열매를 맺는 것인데, 두 오빠와 아버지는 죽었지만 죽지 않으셨고 그 거룩한 씨는 지금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오늘날 수많은 영혼을 깨우고 있습니다
손 권사가 증거한 손양원 목사와 그의 아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이들의 순교정신이 우리들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의 역사에 영원히 썩어지지 않을 부활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역사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손동이 저)
손양원 목사님 일생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종일 씨가 개신교 장로인 독실한 개신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은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고, 결국 손양원 목사는 중동학교에서 키워가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손 목사의 최종 학력은 중동학교 입학(1919년 4월)과 자퇴(1920년 4월 3일)로 기록되고 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개신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 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을 하며 수차례 손 목사에게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는 전염되지 않았는데 이에 손 목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평양의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온 기도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다는 이야기로 아내 정양순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신앙을 바꿔보려고 했는데, 불교관련 책을 강제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일본인 스님을 불러서 그가 불교신자로 바뀌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와의 종교 담론을 하던 그 스님은 전도가 끝까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손 목사의 반론에 할말도 없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 목사의 뺨을 때리고 만다. 하지만 손 목사는 오히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아예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바람에 감방 간수들이 끌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출소한 뒤 최초로 설교자로 참여한 예배에서는 설교를 시작하려다가, 그때까지도 버젓이 예배실에 놓여있던 신토 신상을 보고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바닥에 던져 박살내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좌익학생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이를 용서하고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
안재선 씨의 처형이 격분한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설교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부탁했는데, 당연히 손동희 씨는 자신의 친오빠들을 죽인 살인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한 가족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하고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고 한다.그렇게 목숨을 건진 안재선 씨는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따랐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기독교 목사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 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안타깝게도 이때는 인천에서 한창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고 서울이 수복된 때였기에, 만약 이로부터 단 이틀만 더 버텼으면 그도 무사히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다. 이때 북한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젖먹던 힘으로 손에 묶인 밧줄을 기적적으로 풀고 정신없이 뛰어서 탈출하여 다행히 살아남은 김창수 잠깐만라는 생존자가 있었고 그는 세상에 손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알렸다.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 장례의 상주를 맡은 안재선 씨가 가장 슬퍼했다.
손 목사는 안재선 씨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데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을 참회하며 살았고, 197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신도로 사역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손 목사의 아들들을 살해한 것을 참회했다.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신학교에 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현재도 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인 손동길 씨를 작은아버지로 모시면서 함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으며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인 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위키>
"손양원 목사님께서 베푸신 사랑"은 말로다 표현할수 없는 숙연함을 갖게 한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존귀하신 분이다. 그분의 피맺힌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지난번 여수 엑스포에 가서 목도할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훌륭한 분이 계셨다니.... 그분이 베푸신 지극하고 숭고하고 위대한 사랑 앞에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개를 떨굴수 밖에 없고......어떤 말로도 표현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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