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옹달샘, 쉴만한 물가

봄을 기다리는 시

by 은총가득 2021. 2. 25.

 

 

+ 봄 편지 / 이 해인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  참 좋은 봄날/ 구종현

실비는 오지요.
꽃밭은 젖지요.
이제 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꽃밭에 심은 옥수수 줄기를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갑니다. 기어가서 마침내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간 것일까요
이제 그만 하는 걸까요. 그쯤에서
알맞게 휘어진 잎사귀 하나
초록빛 꽃 붙들고 앉아
하루 종일 있을 모양입니다.

제 한 몸
잠적하기에는
참 좋은 봄날입니다.

 

 

 

+ 씨앗 하나가 / 문근영

꼼틀 꼼틀 태기가 있었나보다
햇볕의 담금질로 해산할 모양이다
어둠을 꼬박 지새운 길에서
산통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가누고 있다
은하수 같은 꿈을 왈칵왈칵 쏟아 놓고
꽃밭인 듯 가슴 졸인 머리를 빠끔히 내민다
해산의 꿈들이 어둠을 헤엄쳐와
줄줄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탄생
꽃잎 하나 살며시 열고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가슴으로 빨려들 듯 봄이 반짝인다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 봄날 / 조미선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을 푼다

버들강아지
금빛 은빛 햇살 모아
보송보송 하얀 솜털 고른다

새싹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늘어나는 가족 얼굴 익힌다

대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나리 으스스 추운지
햇볕 치맛자락을 끌어다 덮는다

 

 

 

+ 아름다운 곳 / 문정희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 엄원태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러앉은 아낙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들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 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 봄은 / 이희숙

봄은 가까이 더 깊숙이 들어왔다
걸음이 빨라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나는,
꿈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와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는
욕심 없이 건강해질 수 있는 계절이다 봄은
오,
그 누가 첫사랑 같은 설렘 가득한 봄날에
희망으로 가는 통로를
행복으로 가는 첫 계단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집중할 수 없는 순수와 열정은 가라
거짓사랑도 가라

 

 

 

+ 봄날과 시 / 나해철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 봄날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을 푼다

버들강아지
금빛 은빛 햇살 모아
보송보송 하얀 솜털 고른다

새싹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늘어나는 가족 얼굴 익힌다

대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나리 으스스 추운지
햇볕 치맛자락을 끌어다 덮는다

 

* 글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blog.naver.com/godhagaek

 

 

 

'옹달샘, 쉴만한 물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 / 김춘수  (0) 2021.02.25
봄 이미지 2  (0) 2021.02.25
봄 이미지. spring  (0) 2021.02.25
사랑스러운, 너무나 사랑스러운 봄꽃!!  (0) 2021.02.25
봄이 오는 소리  (0) 2021.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