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8~21 묵상 –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람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제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고 또 보고 있습니다.
무신론을 믿는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지금의 우리가 생명이 살기에 너무나도 희박한 확률을 뚫고 우연과 우연과 우연을 거쳐서 생겨났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이런 세상이 만들어질 유이한 방법은 전능하신 창조주가 계시거나 보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무한한 다중 우주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 저를 포함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수많은 증인들을 보고 있으면서 그리고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단 한번도 다중 우주를 관찰하거나 그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스스럼 없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세상에 바퀴벌레를 만들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뛰어난 과학자들도 바퀴벌레는 커녕 그 보다 훨씬 더 단순한 형태의 바이러스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이 우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지적인 능력은 우연이라는 과정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빠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능력으로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연이란 과정은 가장 복잡한 형태의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피조물들을 통해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등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댈 수 없으며 하나님은 정당하게 자신의 진노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나타나 벌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해서 피조물들을 통해 즉 우주와 별들과 생명체와 우리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없을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또 우리의 영혼에도 하나님을 새겨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신심이라는 것을 갖게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와 민족들은 신을 찾습니다. 그 신이 누구인지는 모를수도 있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인지하지 못할수는 있으나 적어도 물질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존재는 인식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정한수를 떠 놓고 하늘을 보며 기도하기도 하고 축구를 보면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게 해달라고 빌기도 하고 로또를 사면서 누군가에게 당첨을 구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고 그 사람의 명복을 빕니다.
아는 분께 들은 얘기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꿈에서 절벽에서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에 맞닥뜨렸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분명히 자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머리를 통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과 능력과 영광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거부한 것은 인간입니다.
노아를 살린 방주와 침례 - 예수 그리스도인 방주와 침례 -구약과 예수 그리스도
지금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듣기 힘들지만, 학창시절 제가 종교 수업을 들을적만해도 노아의 홍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노아의 방주 문이 닫히는데 그 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 빨리 들어가야 살 수 있다는 말, 오늘날로 얘기하면 예수님을 믿어야한다는 말은 (당시 생각에) 헛소리 였죠. 하지만 감사하게도 지금 저는 그 방주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다라고 하면 멋진 해변, 아름다운 경치, 로맨틱하고 즐거운 곳으로 생각하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바다는 죽음,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바다 끝에는 엄청난 폭포가 있어서 그 곳을 통해 죽은 사람들이 사후 세계로 간다고 생각하여, 뗏목에 죽은 사람을 태워 장사 지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바다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갈릴리 바다 (호수) 를 건너면서 폭풍이나 풍랑을 만나는 등 많은 사건들을 겪었으며, 요한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는 시험, 심판, 저주가 있지 않을 거라고 하는 것이지요.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원인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원인은 창세기 6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즉 명성 있는 자들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2~6:5>
당시의 사람들은 힘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사람들의 심리가 드디어 발현이 되는 시기였죠.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하여 지어진 인간들이 자신의 능력과 성공과 발전을 힘 삼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은 악이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이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죽이고 빼앗아야 나에게 힘이 생깁니다. 지금의 세상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인구는 70억이지만 120억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산됩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 수억명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이 땅에 저주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저주일 뿐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심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폭력이 땅에 가득하더라. 하나님께서 땅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부패하였더라. 이는 땅 위에서 모든 육체가 자기의 길을 부패시켰기 때문이라. <창세기 6:11~6:12>
지금도 똑같은 심판의 행위들을 쌓고 있는 우리들
사람들은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선이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악인것 처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역시 성경과는 동떨어진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하셨던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는 시스템입니다.
하루에 약 40명이 여러 이유로 자살을 합니다. 그 중 많은 수가 직접적인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하며 간접적으로도 다 연관이 되어 있죠. 대기업이 현금을 쌓아두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 곧 엄청난 경제 공황이 올 것이고 그 때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자들, 명성있는 자들이 되었고 또 더 강력하게 되고 싶을 뿐이고, 사람들은 그것을 열망하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서 내적인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하고 있고, 티비 인터넷 심지어는 신문에도 매일 나오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들의 음란함을 보고 즐깁니다. 그리고 악한 상상을 합니다.
정치권은 어떤가요? 나라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선거의 공약과는 아무 관계 없이, 뒤로는 자신의 더러운 이득을 위해 뇌물을 받고 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뇌물을 바칩니다. 권모술수와 비열한 네게티브 만이 존재하는 곳이 정치권이며, 그것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곳이 동일합니다.
그게 심판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인간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하셨는데 오직 노아를 살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노아를 살리신 이유는 노아의 선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창세기 6:8~9>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완전하고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의인이기에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살리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홍수 심판이 끝나고 노아는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잠이드는 부끄러운 일을 행합니다. 이는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죠. 그가 완전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함이지 노아의 행위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어쨋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시고 노아는 120년간 산 위에서 방주를 만듭니다. 아마 수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미친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방주를 완성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이 두 마리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이레가 지나서 땅 위에 홍수의 물들이 임하니라. <창세기 7:9~10>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고 7일 후에 홍수가 시작된 이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바로 홍수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7일이 지나고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7일은 창조의 싸이클입니다. 성경은 숫자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데 7은 완전수 입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일주일을 삽니다. 그러면 8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시작 혹은 안식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나타내고 그 역사의 끝에 심판이 있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 심판에는 두 가지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스스로 살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방주안에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있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의미는 안식 입니다.
노아의 생애에서 육백 번째 해 둘째 달 곧 그 달 십칠일 바로 그 날에 큰 깊음의 모든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리며 비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 위에 쏟아졌더라. <창세기 7:11~12>
이제 40일간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화산등의 깊음의 샘들이 터집니다. 엄청난 지진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의 해수면이 점점 위로 올라왔을 것입니다. 이 저주의 바다 즉 심판의 바다에 닿는 사람들은 죽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 대신 방주가 물에 빠져서 죽고 그 안에 타 있는 자들이 살아나는 이야기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 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가야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지만 구원을 얻는다고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요한 복음 15: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로마서 8:1>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6~3:2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20~21>
침례가 의미하는 것
침례의 의미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로마서 6:3~5>
침례의 의미는 예수님과의 연합이며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함께 죽어야만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침례는 할례에서 왔는데 할례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나의 몸에 새기는 약속의 표시 입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가 얘기하는 복음과 바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힘과 성공과 정욕과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찬 이 세상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곧 예수님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심판 가운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로 들어오십시오.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 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를 살린 갈대 상자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언약궤
모세를 살린 갈대상자 노아의 방주 그리고 언약궤 – 구약의 예수
노아의 방주가 어떻게 예수님을 예표하는지 설명 드렸습니다.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 (תֵּבָה) 영어로는 Ark라고 합니다. 이 방주는 직육면체의 나무 상자인데, 구약에서 이 테바가 한번 더 등장합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테바)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애굽기 2:3>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테바)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세기 6:14>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 들어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후 요셉을 알지 못했던 즉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히브리인들을 경계한 새로운 왕은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를 살린 갈대 상자 즉 예수 그리스도
이때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의 부모는 차마 이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3개월간 숨겨서 키우다가 역청으로 칠해진 갈대 상자(테바)에 아이를 태워 강가 갈대 사이에 띄워 살립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 처럼 빠져 죽어야 할 아이인데, 갈대 상자 즉 테바에 의해 살아남게 된 것이죠.
이 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선택을 받은 자가 살아 남을 의미하죠.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갈대 상자에 탄 자는 살아나 건저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모세라고 지어지고, 모세라는 의미는 ‘건져내다’ 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그녀가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가 그녀의 아들이 되니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고 이르되, 내가 그를 물 속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10>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시어 나를 잡으시고, 깊은 물 속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시편 18:16>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9:15>
또 다른 Ark – Ark of Covenant와 은혜
그런데 이 Ark라는 의미의 단어가 구약에 다시 한번 등장 합니다.
또 너는 그 휘장을 걸쇠들 밑에 달고 증언 궤를 거기로 휘장 안에 들여 놓을지니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언 궤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고 <출애굽기 26:33~34>
증언궤, 증거궤, 법궤, 언약궤로 번역되는 Ark of Covenant 입니다.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룹이라고 불리는 천사의 모양이 있는 법궤의 뚜껑을 시은좌 (Mercy Seat)이라고 합니다. 이 곳은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죠.
시은좌 아래 즉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 <히브리서 9:4>
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들의 그릇된 반응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죄”인 거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 죄를 없애버리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 위에는 그룹이란 천사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죄를 내려다 보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제사장들은 1년에 한번씩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하였는데, 언약궤에 피가 덮이면 죄를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은 그 죄를 보지 않고, 어린 양의 피만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분명히 죄는 존재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피를 보시고 넘어가시는 것이며 그것이 구속의 원리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죄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방주 안에 타야, 궤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집트의 재앙을 기록한 이집트인이 쓴 출애굽기 – 패턴 오브 에비던스 4
이집트의 신들에게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
모세가 살던 당시 파라오는 절대 권력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로써, 그에 맞서 대항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었을 것 입니다. 과거 파라오를 피해 도망했던 모세 역시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다시 나아가라고 명하시자, 파라오가 어찌 자신의 얘기를 듣겠냐고 하나님께 반문하며 계속해서 그 명령을 거절하려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에게 그 분의 계획, 즉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것임을 말씀하셨고, 결국 모세는 아론과 함께 파라오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파라오가 너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이집트 위에 얹고 큰 심판들을 통해 내 군대 곧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리라. <출애굽기 7:4>
파라오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였고, 하나님은 계획대로 하나씩 하나씩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십니다.
이 10가지 재앙은 그냥 이집트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내린 재앙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들 그리고 히브리 노예들에게도 파라오는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우주의 질서, 나일 강, 일출, 땅의 비옥함을 주관한다고 믿었죠. 하나님은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세상에게 누가 진짜 신인지, 누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창조주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 입니다.
내가 이 밤에 이집트 땅을 두루 지나가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또 이집트의 모든 신에게 심판을 집행하리라. 나는 주니라. <출애굽기 12:12>
그래서 나일강을 피로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태양에 대한 재앙까지 9개의 재앙을 통해 파라오에게는 이를 주관할 어떠한 능력도 권한도 없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준비하십니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라고 믿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장자부터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죽임으로 파라오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도 주관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백성이 그 재앙을 피할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과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고고학자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가지를 명하셨는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잡은 양과 염소를 그달 14일에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영원히 주를 위한 명절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유월절을 지킵니다. 만약 출애굽이 사실이 아니였다면, 하나님의 구원이 있지 않았다면,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은 언제, 무엇때문에 시작이 된 것일까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출애굽을 빼고는 유월절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핑켈스타인은 출애굽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며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얘기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맨 처음 글에 소개해드렸던 가장 영향력 있는 랍비인 데이빗 월피같은 경우 그가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게 된데에는 핑켈스타인의 연구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얘기합니다. 데이빗 월피는 ‘토라’ 즉 모세 5경은 팩트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소설처럼 의미를 담은 책이라며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그런 의견에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집트에 재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권능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주신 유월절 사건이 실제가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말로 내 죄를 사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에 역사처럼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 역사인지의 여부는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이외에 출애굽을 묘사한 역사 기록을 찾아서
그렇다면 출애굽기가 기록한 10가지 재앙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는 것일까요?
마호니는 이집트인의 입장에서 출애굽을 기록했다고 여겨지는 한 문서를 찾기 위해 네덜란드의 라이덴 박물관을 찾습니다.
이푸워의 파피루스로 잘 알려진 이집트 현자의 경고 (Admonition of Egyptian sage)라는 이 문서는 계속되는 재앙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의 관장인 마틴 레이븐은 이 문서를 설명하며 중앙 권력이 무너질 때 이집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주 생생하게 기록한 문서라고 평가합니다.
우리는 이푸워의 파피루스에서 성경의 출애굽에 등장하는 재앙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이집트는 물이 땅에 떨어짐과 같이 무너진다!
그리고 땅에 물을 부은 자는 전능자에게 비참하게 붙잡힌다!
강은 피이다! 그 물을 마시면 너의 인간성을 잃어 버린다!
그리고 그 물로 인해 갈증을 느낀다!
보리의 풍부함이 떠나갔고, 식량의 공급이 부족해졌다!
폭풍의 어둠 속으로 피하던 귀족들이 굶주리고 고통받는다.
보라! 역병이 땅을 쓸어버린다! 피가 모든 곳에 있다.
죽음에 모자람이 없고, 그의 형제를 묻는 자들이 모든 곳에
있다! 이번 슬픔에 있는 내가 비통하구나!
모든 곳에 울음이 있다. 애가와 함께 섞여 있구나!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하시나이다. 보소서, 내가 내 손의 막대기로 강에 있는 물들을 치면 그것들이 피로 변하며 <출애굽기 7:17>
아마와 보리가 상하였으니 이는 보리는 이삭이 패었고 아마는 꼬투리가 나왔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9:31>
그것들이 지면을 덮어서 아무도 능히 땅을 보지 못하리라. 메뚜기들이 네게 남아 있는 것 즉 우박을 피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또 들에서 너를 위해 자라는 모든 나무를 먹고 <출애굽기 10:5>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의 처음 난 것 즉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처음 난 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처음 난 자까지 다 치시고 또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들과 온 이집트 사람들이 일어나고 이집트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더라. <출애굽기 12:29~30>
믿지 않는 자들이 이푸워의 파피루스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가 성경의 정확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근거입니다.
마틴 레이븐은 신이 노하여 이집트를 벌했다는 내용을 포함, 성경과 놀랍게도 유사함을 인정하면서도, 이 파피루스와 출애굽기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합니다. 그는 이 문서가 이푸워가 직접 목격한 것을 기록한 것 처럼 보이려 했지만, 이 내용이 너무 비현실적이여서 그럴리 없다고 반론합니다. 그는 이푸워가 상상한 것이거나 다른 책에서 영감을 얻어서 쓴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 마틴 레이븐 뿐 아니라 수많은 고고학, 역사학자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프로페셔널한 역사학자들의 말을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결론을 냈는지를 보셨으면 합니다.
영향력있는 이집트 학자였던 고 매리암 릭타인은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단정짓습니다. 왜 그런 결론을 지었을까요? 매리암 릭타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집트 현자의 경고에 설명된 혼돈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며 그러므로 역사적일 수 없다. 한쪽에서 땅은 전적인 결핍을 당했다고 얘기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가난한 자가 멋진 옷을 입음으로 부자가 된다고 묘사 된다. 자기 주인의 소유였던 것을 가져감으로…”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가장 전율을 느꼈던 장면이 여기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게되는 이유가, 성경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얼마나 정확하고 사실인지 알려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는다. 노예들이 찾아 내는대로 가져간다.
금, 청금석, 은, 터키옥이 여자 노예들의 목에 걸린다.
이제 백성의 귀에 고하여 모든 남녀가 각각 자기 이웃에게 은 보석과 금 보석을 빌리게 하라, 하시니라. 주께서 이집트 사람들의 눈앞에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또 이집트 땅에서 그 사람 모세를 파라오의 신하들의 눈앞과 백성의 눈앞에서 심히 위대한 자가 되게 하셨더라. <출애굽기 11:2~3>
출애굽이 람세스 2세 시대에 일어났다는 관념으로 인해 모든 증거들을 부정함
이런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마틴 레이븐은 여전히 이푸워의 파피루스와 출애굽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역시 람세스 였습니다. 마틴 레이븐은 출애굽이 신왕국 시대인 람세스 2세때 있었어야했다는 역사학자들의 관념에 갇혀서 중왕국 시대의 문학적 특징을 갖고 있는 이푸워의 파피루스가 출애굽과 관련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반 고고학계가 겪고있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람세스 2세 시대에 출애굽이 있었어야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출애굽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람세스 2세 시대에서만 찾으려고하니, 당연히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고, 증거를 찾을 수 없으니 출애굽이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단정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이빗 월피 같은 유명한 랍비들 역시 말씀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지식을 더 신뢰하면서 급기야 말씀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50년간 성경이 믿을 수 없는 책이며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모든 책과 TV 프로그램, 다큐멘터리들은 모두 이 단 한가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하여 거짓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실처럼 얘기해오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모든 증거들이 다른 시대에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패턴 오브 에비던스’ 영화나, 제 글들을 보신 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정착이나 출애굽에 대한 완벽에 가까운 증거들이 람세스 시대가 아니라 이푸워의 기록이 쓰여진 중왕국 시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즉 이푸워의 기록이 엄청나게 많은 셈족이 이집트의 삼각주 아바리스 지역에 살던 유일한 시기에 쓰여졌다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이 람세스의 시대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람세스 2세가 죽고 얼마 후 그의 아들인 메르넵타가 세운 유명한 메르넵타 돌기둥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있는 한 국가로 등장합니다.
이 돌기둥에는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들이 황폐해졌으며 그 씨가 더이상 없다! 며 이미 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음을 기록합니다. 즉 이는 광야에 떠돌고 있는 어떤 민족에 대한 기록이 아니며, 람세스나 메르넵타의 시대에 출애굽했다면 있어서는 안되는 기록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베를린 받침대라고 불리는 한 기념비에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 기념비의 추정 연대는 대략 기원전 1,360년이며 이는 출애굽이 신왕국 시대에 있었다는 주장을 기각시킵니다.
아바리스에서 발견된 비정상 적으로 매장 된 시신들
아바리스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는 출애굽에 대한 더욱더 확실한 증거들을 제공해줍니다.
굉장히 특이한 일인데,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을 파다가 다수의 구덩이를 발견했고, 그 안에는 시신들이 있었는데, 정상적으로 매장된게 아니라 던져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일반적인 매장품도 없고 어떤 시신들은 포개져 있기도 했습니다. 맨프레드 비텍은 이것이 전염병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전염을 막기 위해 급박하게 매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요. 그리고 갑자기 이 지역에 살던 셈족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던 도시를 버리고 떠나버립니다.
셈족 사람들의 급작스런 이주 흔적
아바리스 뿐 아니라 카훈 이라는 지역에도 똑같이 셈족의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는 고고학적 발견이 이뤄집니다.
고고학자들은 성벽이 있던 커다란 셈족의 정착지를 발견하고 이곳에서도 노예 문서들을 발견합니다. 이 문서들은 카훈의 셈족 거주자들의 물건이 사막의 모래에 의해 묻히기 전에 그들이 살았던 바로 그 장소, 카훈의 길가와 집들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토대로 이집트 학자 로살리 데이빗 교수는 이 동네의 버려짐은 급작스럽고 계획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고 얘기합니다.
신이 이집트인을 벌하셨다는 또 다른 역사 기록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는 13대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두디모세 왕의 시대에 신이 이집트인을 벌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록이 특이한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야할 “신들” 이라는 복수형 대신 단수로 기록했다는 점 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 벌로 인해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들이 북쪽에서 쳐들어와서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않은채 땅을 정복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기를 힉소스 시대라고 부릅니다. 의문점은 당시에 엄청난 권력과 국력, 특히 군대를 갖고 있던 이집트가 왜 제대로 된 싸움도 없이 무력하게 땅을 내주었어야 했냐는 것 입니다.
이는 출애굽기에 있었던 재앙들과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의 군대를 그 안에 수장시켰다는 성경 기록을 믿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1,000년 동안 유일하게 있었던 이집트의 몰락과 그 시점이 맞닿아 있습니다.
데이빗 롤은 이에 대해 우리가 이집트 사회의 붕괴를 볼 때, 바로 거기서 모세와 출애굽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출애굽의 분명한 증거들을 볼 수 있습니다.
패턴 오브 에비던스 5편에서 계속됩니다.
성경의 출애굽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입증하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는 영화 ‘패턴 오브 에비던스’를 보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영화를 구입하실 수 있는 공식사이트와 한글 자막 파일을 링크로 드립니다. 이미 많은 분들께서 이 영화를 보시고, 감동적이고 전율이 돋았다는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저 역시 그 감상평에 동의하며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패턴 오브 에비던스 - 영화 파일 구입 웹사이트. Posted by Fingerofthomas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애굽기 19:5>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3>
지금 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이지만, 예전부터 그랬던것은 아니였습니다. 오히려 고대 근동지역의 가장 약한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신으로 여겨졌죠.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 아닌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써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자신의 소유라고 허풍떠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의 줄거리를 보면, 세상의 창조, 인간의 타락, 아브라함을 선택하며 시작된 인간의 구원 계획, 이스라엘 민족과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 구원,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짐으로 말미암은 세상의 끌의 순서로 흘러갑니다.
만약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였다면 그것은 허풍에 불과하고 오늘날 우리는 그런 신이 있었다는 것조차도 또 그 신이 자신을 온 세상의 창조주이며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베풀것이라 약속했던것 조차도 알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약속들을 하나도 어김없이 지키고 계시며 이제 그 마지막 약속들을 하나 하나 성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믿게 하겠다 라는 계획은 아브라함에게 먼저 말씀을 하시고 또 구약을 통해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아마 이스라엘 민족들 마저도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렇게 좋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기도 이전 구약시대때부터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성경의 말씀들
내가 보건대 아브라함은 분명히 크고 강력한 민족이 되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안에서 복을 받으리니 <창세기 18:18>
참으로 모든 왕들이 그(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며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리이다… 그의 이름은 영원토록 지속되며 해와 같이 오랫동안 계속해서 있으리이다. 사람들이 그(그리스도)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들이 그를 복되다 하리이다. <시편 72:11 & 17>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0>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 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82:8>
그러시면 주의 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주의 구원이 모든 나라들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시편 67:2>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의 눈 앞에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으니,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이사야 52:10>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경배를 받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
구약시대 때 성경이 모든 민족에게 구원이 전파 된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마치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 단군 신이 온 세상의 신이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우리나라에 왠만한 관심이 있지 않다면 단군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모든 외국사람들이 그 이름을 알고 온 세상의 창조주로 인정할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에 너무나도 극단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얼마 전부터 구약 성경을 당시 공통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이 생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고는 역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함을 명하시고, 또 온세상에 전해지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마 28:19>
오직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너희를 때릴 것이요, 너희가 나로 인하여 치리자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 그들에게 증언하리라. 그러나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것이다. <마가복음 13:9~10>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았나니 <로마서 1:5>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로마서 16:26>
십자가 형을 당한 죄인을 믿는 이상한 종교
그리고 얼마 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드디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예수 믿는자들을 이단이라며 돌로 쳐 죽이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며 이방인의 사도의 역할을 맡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치며 수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폭발적으로 부흥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반역자로써 십자가 형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개념으로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지존파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인데도, 역사는 기독교의 폭발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언가 이득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자들은 마가복음 13장 말씀처럼 공회에 넘겨지고, 핍박받고, 순교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크리스챤들은 점점 늘어났고, 자신의 이 세상 안위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제 복음은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민족에게 전해졌습니다. 1989년만 해도 전 세계 총 24,000개의 민족 중 13,000개의 민족에게만 복음이 전해졌지만 그 이후 선교에 많은 노력을 한 결과 2011년 통계에 의하면 이 세상에 모두 24,000개의 민족 중에 23,000개의 민족에 복음이 들어간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1,000개의 민족은 복음이 들어가기 너무나도 힘든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 교를 믿는 민족들 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예전에는 선교사들이 그 땅에 거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나라에서 선교사들을 계속해서 추방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는 커녕 들어 갈수도 없는 땅, 계속해서 추방 당하는 곳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선택 받은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영상처럼 선교 보고에 의하면 중동 땅에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한 사람들의 3분의 1정도는 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는 질문에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즉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선택한 마지막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고 그때에는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이 예수를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를 놓고 심판을 하시게 됩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 에게 증언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 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아브라함의 시대에, 다윗의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 분이 전능하셔서 자기의 계획을 섬세하게 이루어 나가신다라는 가정을 제외 했을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즉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창조주며 구원자로 모든 민족 에게 인정 받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에도 크리스챤들은 모진 핍박을 견뎌내야 했으며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수 많은 선교사들의 피가 흘려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우리가 전혀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심지어 북한 땅에도 지금 20만에서 40만정도의 그리스도 인이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었다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 거의 모든 민족 에게 경배 받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커녕 이스라엘 민족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어야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왜 이 세상이 고통과 저주속에 있는지 이 세상은 허무한 곳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빠져 나올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우리의 고통이 무엇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엑기스를 정리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것! 성경이 말하고 있는것!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고 있는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립니다.
1 창조
성경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성경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 즉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을 만드셨음을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완벽했으며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어떠한 흠도 없었고, 어떠한 저주도 없었으며, 그 저주로 인한 죽음도 없었던 하나님 스스로 보시기에 아주 좋은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과 교제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죄가 없었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교제가 가능했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에덴 동산과 이 세상의 모든 별들, 강과 바다, 동물들, 식물과 그 열매들은 인간을 위해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습니다.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골로새서 1:16>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그분께서 <히브리서 2:10a>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4:10>
인간은 이 세상의 왕이었고,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만은 먹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실과를 먹을 때, 반드시 죽게 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2 타락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고 있을 때, 뱀 곧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 먹게 하셨어?”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다 못먹게 하셨는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못먹게 하는 이유는 너희의 눈이 열려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러는거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에 왕이 되게 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었고, 아담도 함께 먹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 이었습니다. 이 땅의 왕인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삶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소유였던 그들의 삶을 그들이 훔쳤습니다.
범죄의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스스로의 수고로 살아남았어야 했으며,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죽음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2>
또한 이 세상 역시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땅에 저주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고통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일어난 일 이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로마서 8:22>
그 어떤 저주 보다도 끔찍한 저주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 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죄가 있는 우리들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끊어졌고,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반역자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히 등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 <로마서 5:10>
타락 이전에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 합니다. 이제는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죄를 넣지 않아도 우리 안에 죄가 생겨 하나님도 알아 볼 수 없고, 함께 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의 기준 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만드신 이 세상의 법이 아닌 인간의 자의적인 선악 기준을 통해 법을 정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죄가 있으면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적으로 규정하고 대놓고 반란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유토피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에녹 성을 쌓은 가인, 바벨탑을 쌓은 니므롯, 공산주의 체제를 다진 스탈린,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자는 민주주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자본주의 까지 어떠한 방법과 시스템도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저주받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천국을 만들어 보려 했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3 십자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인간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것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인간의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란을 일으킨 모든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값을 대신 받겠다고 나선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린 것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의지가 아니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을 내린 것은 빌라도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 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복음 15:34>
반역자가 달리는 ‘십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달리는 나무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로 인해 교제할 수 없었던 하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과 교제할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둘 사이를 연결한 것은 그 둘을 갈라 놓았던 벽을 허문 것은 십자가 사랑 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에베소서 2:14>
이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믿음을 얻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 2:20>
나는 이제 죄와 상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 1서 3:5~6>
4 부활
하지만 우리의 구원 이전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예수님께서 세상의 저주인 죽음 곧 사망을 이길 수 있으시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도 죽음을 이겨내실 수 있으신가의 여부 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실 수 없었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실 능력이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다면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도 생명으로 나아올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지 못하신 것이 되어 여전히 우리의 죄를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헛된 믿음을 가진 이 세상에서도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 <고린도전서 15:17~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3일째 되는 날, 예수님의 시신을 보러 갔던 여인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천사들이 남아 있어, 그 여인들에게 소식을 전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일어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5~6>
그러므로 부활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커다란 승리의 증거 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묶인바 되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5 재림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리치셨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상대명령을 내리고 우리의 거처를 준비하러 다시 올라 가셨습니다. 그 명령은 성령을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 입니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7>
예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잊어버리고 비웃을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재림을 조롱할 때 다시 오실 것 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지 않은 사람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죄로 인해 받는 마땅한 고통으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 입니다.
이르되,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모든 것이 창조의 시작 이후 에 있던 것 같이 그대로 계속되느니라, 하리니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베드로후서 3:5~6>
또 무게가 각각 일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나와 사람들 위에 떨어지매 사람들이 우박의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것의 재앙이 지극히 컸기 때문이더라. <요한 계시록 16:21>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완벽하게 처음 창조하셨던 대로 다시 돌아갈 것 입니다. 모든 만물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회복 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로마서 8:19>
Posted by Fingerof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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