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마 18:18-20)
믿는 자가 예수님의 능력과 임재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18-20절)
교회 안에서 이 구절을 최소한 한 부분이라도 인용하는 것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내가 은사 주의의 교회 안에 있을 때, 마태복음 18장 18-20절의 말씀은 거의 매 기도시간이나 설교 강단에서 자주 인용되곤 했었다. 사실, 나는 본문 자체에 대한 강해 없이 이렇게 많이 인용되는 다른 구절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주기적으로 악한 영들을 이 땅에서 매고 천사들의 군대를 하늘에서 푼다. 그리고 항상 우리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되새긴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님도 같이 있다고.
우리 교회(은사 주의 교회)는 마태복음 18장 18-20절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로부터 아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사실, 이 구절은 자칭 영적 전쟁의 전문가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특별히 강조하는 설교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쪼개지고 나뉘어서 수많은 교리의 입장이나 적용에 사용돼왔다.
예로, 번영 설교자인 베니 힌(Beeny Hinn)은 마태복음 18장 18절을 초자연적인 능력과 천국의 권위에 대한 말씀으로 강조한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의 행동이 하늘에서의 행동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하나님 자녀의 기도가 하늘, 곧 천국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은 한다는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이 땅에서 매인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 푸는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천사들을 풀고 악한 영들을 매니 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이것보다는 약간 덜 스펙터클 하지만 상당히 비슷한 해석학을 사용한 릭 워렌 (Rick Warren) 목사의 19절 20절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많은 사람이 단지 자기들 스스로만 기도하기 때문에 놓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은,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그룹 기도에는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필요한 공급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혜택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18-20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하는 기도의 힘입니다.”
조이스 마이어(Joyce Meyer)는 베니 힌과 같은 Word Faith 운동에서 활동하는 설교자이다. 또한, 각종 크리스천 TV 매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하지만 그녀의 사역은 대체적으로 매일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오는 문제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들에 집중한다. 그녀는 실제로 마태복음 18장 20절은 결혼 상담을 위한 구절로 사용한다.
“성경은 서로 간에 합의한 것에는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결혼 생활과 기도 생활에서 능력 얻기를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 어떻게 서로 맞지 않는 커플을 맞게 할까? 서로 간의 일치와 화합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생각을 멈출 때 일어나게 됩니다. 이기심은 내 안에 있는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열쇠는 겸손한 자세로 그 사람들의 필요를 어떻게 채울 수 있는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비로소 주님 앞에서 서로간의 의견을 일치시킬 수 있고 화합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자, 오늘 여러분의 배우자와 서로 같이 화합과 일치를 추구하도록 함께 결정하세요. 그리고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이 구절이 결혼 문제에 관한 조언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쭉 보아온 이런 해석들이 정말 마태복음 18장 18-20절 말씀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인가? 이들은 원작자가 의도한 진정한 의미를 겉돌고 있는 것인가? 혹은 완전히 요점을 놓쳐 버린 것일까? 궁극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 이 본문의 구절이 영적인 전쟁, 그룹 기도, 연합하는 결혼 생활, 이런 것들과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가?
지난번 시리즈에서도 계속 이야기했듯이, 첫 번째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그 구절의 문맥이다. 이 구절을 둘러싼 동일한 문맥의 구절들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이를 살펴보자면, 앞서 나오는 구절 또한 질문으로 많이 등장하는 구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장 15-17절)
우리가 이 본문을 읽었을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영적 전쟁이나 결혼생활에서의 연합, 그리고 당신의 기도 모임을 풍성하게 해주는 말씀은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로, 15절에서 17절은 명확하게 교회의 권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이고 풀고, 그다음 구절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이 모든 예수님의 지침은 교회의 권징이라는 것이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마태복음 18장 18-20절의 의미는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 대한 일로 모였을 때, 천국이 그들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문맥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얼마나 많은 인기 있는 해석들이 문맥과 떨어져서 잘못 해석됐는지 설명한다 :
“18절, 19절에서 예수님의 약속은 교회 역사 가운에서 심각하게 잘못 해석되어 왔다. 많은 은사 주의자들을 마태복음 7장 7절 그리고 21장 22절들과 같이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축복과 특권들을 주신다고 잘못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문맥에 비추어 보거나, 이 당시 통상적인 랍비들의 표현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고 문맥의 일반적인 문법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의지 때문에 좌지우지된다고 가르치시는 게 아님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천국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고 명령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약속은 그분의 백성들이 그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순종에 힘을 더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에서 교회의 권징에 대한 지침들에 대하여 이어서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한 축복이나 특권을 간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가 성도의 죄를 용서할 궁극적인 권한이 있다고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교회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권징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이고 푸는 것이 영적인 영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맥아더 목사는 잘못된 해석을 신중하게 꼬집는다:
“랍비들이 때때로 하늘에서 매이거나 하늘에서 풀리는 행동이나 원리를 말하는 목적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금지되었는지 허용되었는지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에 기초해서 죄들이 용서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선언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그 사람의 죄들이 이제는 풀렸고, 즉 용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용서를 위한 하나님이 기록하신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분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만일, 반면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교회는 그 사람에게 같은 확신을 가지고 그의 죄는 매였고, 즉 용서 받지 못했다고 선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하신 죄의 용서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의 권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하신 구절이다. 18-20절의 말씀은 그분의 지침이 더욱더 확장되어, 이제는 교회의 권징에 책임이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마어마한 천국의 지지를 받는다고 알려 주고 있다. 존 맥아더가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분의 백성들에게 확증하신다. 그들이 교회의 성결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예수님께서 직접 같이 일하시겠다고 말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권징을 확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다시 한번 더 확정해 주셨다. 이 구절을 소수가 모인 예배나 기도 모임에 적용하는 것은 교회 권징에 대해서 말씀하는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지않을 때, 또는 심지어 감옥에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 다른 성도와 수백 킬로 떨어져 있을 때도 함께 하신다.
본문은 교회의 권징의 과정에서 두세 사람 증인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은 그분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신령한 뜻과 성품에 따라 구하고 일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증인들은 주님을 대신해서 그들의 형제자매의 회개나 혹은 회개치 않는 죄를 확증하는 신실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모일 때는, 분명히 그분의 능력과 권위 아래 스스로 교회 안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성결의 사역에 참여해야 하며, 천국의 확증과 믿는 자들 간의 교제가 동반되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 명시된 성경적인 교회 권징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바로 다음 구절인 18장 18-20절의 말씀과 불협화음을 내는 잘못된 해석들과 적용들을 허용하게 된다. 말씀의 원래 문맥과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은 온갖 종류의 거짓된 교리를 낳는 빌미가 된다.
말씀 해석은 우리 실제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지닌다. 우리는 모두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했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디모데후서 2장 15절)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마18:18-20) - 기도에 관한 본문이 아님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는 기도에 관한 본문이 많이 있습니다만, 기도에 대해 알려져 있는 본문 중에는 기도에 관한 본문이 아닌 것들도 꽤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본문이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한’ 것을 ‘기도한’ 것으로 쉽게 대치시켜 버리는 본문과, 여기 이 본문 즉,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주로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많이 사용됩니다. 이 기도의 확신은 “여러분이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 주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본문은 전혀 기도에 관한 본문이 아닙니다.
먼저 선입견을 벗기 위해 간단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기도’라는 말을 찾을 수 있습니까? 두 세 사람이 모였을 때 그것을 ‘기도회’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 내용이 두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 본문에는 ‘기도’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19절에 ‘구하면’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구하면’ 이라는 말이 ‘기도하면’ 이라는 의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냥 ‘그렇다’ 라고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구한다’는 말이 ‘기도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논의의 중심은 아닙니다. ‘기도하면’이라는 단어가 있느냐 없느냐가 본 글의 중심 사안은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기도하면’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 본문이 기도에 관한 본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선입견을 벗기 위한 간단한 질문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까? 언제나 그렇듯, 성경의 본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앞뒤를 읽어야 합니다. 문맥을 파악하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언제나 잘못된 해석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문맥에서 이 구절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씌어진 것일까요?
일단 이 본문의 바로 앞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15-17절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15-17절은 유명한 권징의 절차에 관한 본문입니다. 이 사실만을 고려사항에 넣더라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권징본문과 기도에 대한 본문이 붙어 있는가?” 성경은 항상 파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속해서 앞으로 더 나아가 보십시다. 권징절차에 관한 본문의 앞에는 어떤 본문이 나타나 있습니까? 12절부터 14절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잃은 양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섭니다(잃은 양 비유가 불신자의 전도에 관한 본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으로 다루겠습니다).
다시 더 앞으로 나아가면 어떤 내용이 나타납니까? 그 앞부분에는 “소자에 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앞 즉, 18장의 시작부분에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본문들이 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입니까?
대답은 “그렇습니다” 입니다.
18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절)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하지 않으시고, 한 어린아이를 불러 앞에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3절) 어린이 주일에 자주 사용되는 이 말씀은 어린이를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천국백성이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린이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4절), “또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바로 나를 영접하는 자다”(5절)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며, 그 낮춘다는 것은 작고 연약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한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는 자”라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천국백성된 자라면 결코! 교회 안에서 ‘작은 자’, 즉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업수이 여길 수 없다는 점을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천국백성된 자들은 소자를 존중하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이은 말씀은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다”(6절), “그러므로 너희는 누군가를 실족치 않게 하도록 주의하라”(7절)
이 말씀의 결론이 바로 10절입니다.
“삼가 이 소자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여기에서 이 소자들이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저희의 전사들이 하늘에서 아버지를 뵈옵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다음에 “잃은 양 비유"(12절)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문맥 안에서 볼 때, 잃은 양 비유는 무엇을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잃은 양 비유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한 소자라도 업신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잃은 양 비유가 불신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약한 자들을 향한 것이라는 점은 잃은 양 비유의 결론인 14절이 10절과 같다는 점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4절.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교회 안의 한 소자라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권징 본문이 이 다음에 나오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4절이 “소자를 잃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고 한 말씀이고, 곧 이은 15절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시작하는 권징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 권징의 정신은 첫 번째 구절인 15절에서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에서 볼 수 있듯이, 형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권징이야기를 왜 하고 계신 것입니까?
15절 이하의 권징이 바로 14절의 말씀 “한 소자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시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그에게 가서 “권고를 해야만” 그 형제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고, 권징은 “한 소자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에 대해 권고하기를 싫어합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그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가 만약 자신의 아들, 딸, 혹은 형제, 부모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냥 죽음의 길로 가도록 버려두겠습니까? 하나님을 저버리고 죄의 길로 탐닉하는 것을 가만 보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데, 그것을 보고 “프라이버시의 문제니까...”라고 가만히 두겠습니까?
권징은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권징본문은 “소자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 권징의 절차가 15-17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그래도 듣지 않거든 ‘증인을 데리고 가서’ 말마다 증참케 하라,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 그래도 듣지 않거든 ‘출교하라’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권징을 잃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형제 사랑이 식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간의 인간관계로서의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공동체, 언약백성의 공동체로서의 “죄를 이기는 공동체”인 교회로서의 참 모습을 교회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권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권징에 대한 말씀의 뒤에 오늘 본문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본문을 파편적으로 떼서 읽지 않고, 앞에서부터 문맥을 따라 읽은 여러분은 이 본문이 기도에 관한 본문으로 보이십니까? 여기서 땅에서 매고 푸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뜬금없이 갑자기 기도에 관한 교훈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권징 본문 뒤에 나오기 때문에 이 ‘매고 푸는 권세’는 ‘권징’에 관한 것입니다. 즉! 이 땅에서 교회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권징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하늘에서도 그에 해당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권징을 행하라고 하셨는데, 정작 교회가 죄를 짓고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을 향해 권징을 행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도 “비록 땅에서는 그렇게 했지만, 하늘에서 나는 그 사람을 받아주겠다”라고 한다면, 땅에서의 권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제정한 권징에 힘을 실어주시는 것입니다. “권징은 내가 제정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씀을 따라서 땅에서 권징을 행한다면, 내가 하늘에서도 그것을 시행하겠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표현이요, 약속입니다.
따라서 뒤이어 따라나오는 말씀도 모두 이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1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것 역시 무엇에 관한 말씀이겠습니까? ‘너희 중에 두 사람’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냥 사람 두명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모인 곳’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는 이 땅의 교회입니다.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은 무엇을 말합니까? 땅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대행하는, 대신 집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이것은 특별히 권징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19절의 말씀은 무엇에 대한 약속입니까? “너희가 땅에서 권징을 행한다면, 내가 이루게 하리라”
그러므로 20절의 말씀은 이렇게 땅에 있는 교회에 하늘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정권위임의 의지표현이요 약속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즉 두 세 사람으로 형성된 이 땅의 교회에는 “내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일은 곧! 내가 하는 일과 같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이것인 것입니다.
이 본문에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에 관한 교훈을 주려면 다른 본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권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본문의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는 말씀이 권징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는 함께 안 계신단 말이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겠지요. 그러나 이 본문의 의미는 권징에 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의미도 밝히 드러나고, 그 의미를 따라서 정확하게 말씀의 내용을 시행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하늘의 문,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있는 교회로 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무시한다면, 그래서 이것을 그냥 “모여서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난다”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에 주신 놀라운 권세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무나 잘못된 합심(合心) 기도들(마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예수님의 공수표(空手票)?
교인 중에 암 환자가 생기면 전교인이 모여 치유를 위해 합심해서 기도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차도도 없이 죽어버리면 참 실망되고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사람은 어차피 죽기 마련이니까 하나님이 때가 되어 데리고가셨나보다 체념한다. 또 직장에서 해고되어 끼니도 못 이을 정도로 사정이 딱한 교인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그러면 본문의 예수님의 약속은 공수표인지, 단지 기도에 열심을 내라고 독려하는 차원에서만 말씀하신 것인지 의심이 든다. 분명히 두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 않는가?(20절) 두세 사람이 아니라 전 교인이 모였다. 또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어주겠다고 했지(18절) 않는가?
예수님은 거짓을 말하실 분이 아니다. 오직 진리만 말씀하신다. 아니 당신이 바로 진리다. 그런 의심과 실망이 생기는 까닭이 우리가 기도를 간절히 하지 않아서거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본문만 따로 떼어서 해석하고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도 13-17절만 따로 떼어 보면 교회 내의 범죄자를 객관 공평하게 처리하는 방안을 말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출교시키라는 냉혹한 의미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앞뒤 문맥의 일관된 주제와 연결하면 그 해석과 적용이 달라졌다. 교회 내에서는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절대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세 번의 치리절차만으로 끝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라도 끝까지 찾아가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서 전교인이 나서서 설득시키라는 뜻이 되었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본문만 따로 보면 예수님이 합심 기도의 중요성과 그 능력에 관해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러나 문맥에 연결시키면 지난주처럼 신자들이 반드시 교회로 모여야 할 이유와 또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을 강조한 말씀이 된다.
‘무엇이든지’가 all이 아니다.
본문의 ‘무엇이든지’가 영어로 all, 혹은 everything의 뜻이 아니다. 아주 위급하고 엄청난 일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설마 이런 일까지 기도응답이 될까 기대도 않던 그런 일일지라도, 바로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전혀 예상은 물론 상상치도 못했던 모습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부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일을 너희가 지레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큰일이라도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all의 의미라면 교회 안에 힘든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한다. 병원에서 포기한 말기 암 환자들이 교회에 나오면 기도로 다 나아야 한다. 또 그러면 이 세상에 예수 믿지 않을 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본문에서의 ‘무엇이든지’는 기도하는 내용이나 일의 종류를 의미하기보다는, 한 가지 일이라도 그 진행되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으로 봐야 한다. 범죄한 형제를 찾아가 일대일로 대면할 때나, 두세 사람이 가서 증참할 때나, 전 교인이 나서서 설득할 때나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기도에 관한 말씀을 시작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더 강조하려는 뜻이다. 지금껏 이야기 한 내용이 정말로 중요한 진리이니까 잘 따르라고 새삼 당부하는 것이다.
새로운 주제로 바꾸려면 ‘그러나’ 혹은 ‘그것보다는’ 같은 접속사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부터 갑자기 ‘진실로’라고 강조하는 법은 거의 없다. 예수님이 주제를 바꾸려면 먼저 18절에서 합심기도를 설명한 후에, 19절에서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또 20절에서 “진실로 다시 이르노니”라고 재차 강조하는 형태가 되어야 자연적인 흐름이다.
예수님이 사용한 땅에서 매고 땅에서 푼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관습적 어법(語法)이었다. 당시의 유대교 랍비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먼저 강경파인 샴마이파는 율법의 계명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해서 하나라도 어기면 출교 시켜버렸는데 매는 것에 해당된다. 반면에 온건파인,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속했던, 힐렐파는 융통성을 발휘해서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계명을 어겨도 회개하면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계속 남아 있도록 허용했는데, 그 일이 바로 푸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와 연결하여 보충 설명하려는 뜻이었다.
본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그 때에”(21절)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 물었다. 그로선 예수님 말씀의 초점이 합심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교회 내에서 서로 용서하라는 데에 있다고 이해했다는 뜻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합심기도를 강조한 것으로 베드로가 받아들였다면 그의 반응은 달라져야 한다. 예컨대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일도 합심해서 기도하면 가능하느냐고 물었어야 한다. 그가 가족과 재산과 생업을 완전히 뒤로 한 채 삼 년 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오직 로마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새 세상을 꿈꿨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절실하게 소망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부터 기도하기 마련이지 않는가? 아니면 최소한도 이 대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문제 즉, 천국에서 크지는 일도 합심으로 기도하면 되는지 궁금해 했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합심기도의 중요성
물론 실제 신앙생활에선 예수님 말씀의 ‘무엇이든지’를 all의 의미로 해석 적용해도 된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합심기도의 중요성과 그 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예컨대 두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갈망하고 또 그분의 뜻을 알기를 소원한다면 함께 하지 않고 서로 떨어져서 기도해도 어떤 문제에 대해 동일한 응답을 받는다.
합심기도는 공통관심사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을 갖고 기도하게 된다. 아무래도 자신의 개인적 정욕, 이해타산, 죄성이 개입될 소지가 없거나 적어진다. 또 함께 기도함으로써 성경적 지식이 많고 영적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의 지도를 받으며 선한 영향을 얻을 수 있다. 함께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하는 신자들만의 특권이다. 세상의 어떤 고난, 상처, 죄악, 흑암의 세력에도 당당히 싸워 이길 수 있는 최고로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본문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감당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라는 뜻이다. 두세 사람이 기도하려고 함께 모인다는 것이 교회로 모인다는 뜻이지 않는가? 그런 모임에 장소, 조직, 체계와 상관없이 주님은 함께 하시므로 바로 그 모임이 교회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께 드린 봉헌사(奉獻辭)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이 무엇인가? 당신의 이름을 두신 이곳에서 무슨 일이든 기도하면 응답해달라는 간구였다. 심지어 적국에 포로로 잡혀 갔어도 “전(殿)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왕상8:48) 하늘에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달라고 간구했다. 봉헌사 전부가 성전에서 기도하면 응답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거룩한 성전을 장사치와 환전상이 더럽혔을 때에 예수님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막11:17) 야단치며 쫓아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성도의 기도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신자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임하지 않는다.
합심 기도에 대한 오류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은혜롭고 능력 있는 합심 기도를 함에 작금 몇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합심(合心)은 문자 그대로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기도하는 내용이 단순히 선하다고 해서 무조건 합심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교회 건물을 신축하거나 새로운 사역을 시행할 때에, 엄밀히 말하면 사역(ministry)이 아니라 사업(business)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교인들 중에는 심중에 반대하는 자들도 많다. 그럼 담임목사의 명으로 함께 모여 합심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합심기도는 아닌 것이다.
합심은 진정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말 누구나 공감하는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고는 이뤄지지 않을 일임을 절감해서, 또는 어떤 이를 기도해주지 않고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고 위급한 마음이 절로 들어서 목사가 기도하자고 말하기 전에 성도들이 먼저 한 사람씩 기도하려고 교회로 모이는 그런 기도다.
만약에 그런 기도 제목이 아니거나, 모두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을 두고 합심기도를 하기 전에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부터 해야 한다.
합심이 되는 데에 온전한 자신이 없으니까 말로는 합심기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합력(合力) 기도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마음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힘만 합하는 기도다. 새벽기도나 특별기도회에 출석인원이 많아지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그 응답이 보장되고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모일 수 있는 최소의 단위를 말한 것이다. 아무리 적은 모임에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주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동원 가능한 최대의 집단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다. 교회나 목사로선 가능한 많은 신자가 모여서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 아주 선한 일이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가능성은 분명 더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모여서 기도하는 것보다 교회의 성도들이 진정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더 원하신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합력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된다고 여기는 것은 기도를 응답이라는 결과만 얻으려는 수단으로 전락된다. A라는 input을 넣으면 반드시 (a)라는 output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함께 모여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된다거나 더 잘 된다고 여기면 실상은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짓이 된다. 자기들 기도하는 대로 하나님이 응답한다면 자기가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그분은 신자의 종이 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방울로 쏟아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기도를 거부한 꼴이 되었다. 과연 우리가 새벽기도나 특별기도회에 예수님 같은 열정과 갈급함으로 기도하는가? 그러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합심(합력?)해서 기도하면 응답이 된다고 여기는, 심지어 그렇게 가르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매사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하는 자세로 사는 것과 기도는 만사형통의 수단이 된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신앙이다.
누구와 합심해야 하는가?
겟세마네 예수님의 기도에서 보듯이 기도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지도록 자신의 뜻과 계획을 수정해 나가는 작업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합심이란 기도자들 사이에서보다는, 기독자 개인이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도 바로 문맥에서 말하는 주제와 연결해서 살폈기 때문이다. 따로 떼어서만 보면 거의 알지 못한다. 이미 말한 대로 예수님은 “진실로 이르노니”라고 앞의 설명과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20절에서 함께 모이는 신자의 숫자를 두세 명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더니 큰 이적이 생겼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에 더 쉽게 항복할 것 아닌가?
실제로 신자들마저 오순절에 베드로의 한 번 설교로 남자 어른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건이 역사상 최고의 부흥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난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반면에 같은 사도행전의 기록인데도, 바울의 수건만 덮어도 병이 나은 자가 받았을 은혜에는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바울의 신령한 능력에만 신경 쓰지 그 사람이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에 얼마나 크게 놀라며 감격했지 않겠는가? 오순절에 회심한 사람들과 그 사람이 받은 은혜를 개적으로 비교하면 절대 못하지 않다. 아니 훨씬 더 컸을 수 있다.
신자들은 그저 이왕이면 많은 이들이 모여 기도하면 좋다고 여긴다.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하니 가능한 영성이 높아 보이는 사람과 함께 기도하려 든다. 집사나 장로는 물론 부교역자들마저 안중에 없고 어떡하든 담임 목사에게 기도 받으려 하지 않는가?
우연찮게 성경에도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권면이 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長老)들을 청할 것이요.”(약5:14) 그러나 그들의 영성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그 큰 기적들을 일으킨 엘리야마저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약5:17)이라고 했다. 특정한 자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이 맡은 직분이나 위치 때문에 기도 응답을 더 잘해주신다는 법은 없다. 누가 되었던 예수를 믿는 신자들끼리라면 진심으로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두세 사람이 모이라고 말한 것은 의도적으로 16절에서 죄지은 자를 찾아가 증참하는 사람의 숫자와 일치시킨 것이다. 찾아가는 사람과 범죄한 자의 마음이 일치할 리는 없다. 찾아가는 사람끼리 먼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지은 자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그를 회개시켜야 한다는 근본 목적은 동일하나 통상적으로 서로 아주 다른 마음을 지녔다. 장로나 목사님은 가능한 용서하여서 교회에 남게 하고 싶다. 반면에 피해자는 그런 사람을 교회에 계속 나오게 한다면 목사나 교회에 실망하고 더 이상 교회에 나오고 싶지 않게 된다. 충분히 납득될 만한 보상과 사죄를 하지 않는 한 용서할 마음도 없다. 그러니까 피해자를 포함해 증참할 두세 사람까지 온전히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그것도 주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그 안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무엇을 합심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피해자가 먼저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찾아가라고 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이라도 끝까지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마음과 합하여서 그 죄인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못 견디는 고통이 재물과 권력의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과 인격이 훼손되고 멸시받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그런 고통을 지닌 자가 오히려 그런 잘못을 범한 자를 용서해주려 가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 사람의 자존심과 인격을 살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가? 사실은 지금 죄지은 형제를 찾아가는 모두가, 피해자도 포함해서 이전에는 똑 같은, 아니 더 큰 잘못을 범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세상에서 대우 받으려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능한 많이 쌓을 목적만으로 인생을 살았다. 물론 돈에 환장했거나, 돈만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있어야만 멸시를 당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역으로 따지면 자기가 그런 것을 더 많이 쌓게 되면 다른 이가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모멸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모두 예수 전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높아지면 속으로 쾌감과 만족을 느꼈지 않는가?
그러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진리를 깨닫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자 이전에 그랬던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이자 자기 인생의 처참한 실패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피해자, 목사, 장로들도 동일하게 예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양들이었다. 지금 찾아가는 가해자보다 더 죄에 찌들었을 수 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은혜를 더 받으려고 죄에 더 거(居)할 수는 없다(롬6:1).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를 더 지은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더 주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를 더 편애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회개치 않을 만큼 더 완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 지은 형제에게 찾아가서 증참할 말이 무엇인가? “당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시오. 진정으로 회개하면 이번만 용서하고 출교 시키지 않겠소. 피해자도 지금 그럴 용의를 갖고 찾아 왔으며, 또 아무도 모르게 왔으니 회개하면 교회에도 절대로 비밀로 지키겠소.”라고 할 참인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합니다. 나는 더했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은연중에 온갖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이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소망이 없으며 저부터 그러합니다. 우리는 물론 형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형제의 지난 잘못을 용서합니다. 아니 이미 완전히 잊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완전히 제 등 뒤로 던져버렸습니다. 저와 우리를 싫어하거나 미워해도 좋습니다. 저희들이 진실로 염려하는 것은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져 실족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사랑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에게는 그만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형제에게 풍성히 베풀어져서 형제가 바로 일어서길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진심으로 바라기는 교회와 교인들에게보다 예수님께 먼저 돌아오십시오.”
진정을 담은 이런 권면과 함께 찾아간 자들이 진짜로 합심하여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면 어찌 돌아서지 않겠는가? 얼마나 힘을 합해 뜨겁게 기도하는지, 정말로 공정하고도 은밀한 절차를 거쳤는지 여부는 회개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성도들의 진심이 형제를 변화시킨다. 진심이란 바로 진리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드러난 구원의 진리가 잃어버린 양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찾아간 자들과 가해자들 모두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아질 때에 합심 기도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바로 그럴 때에 교회에서 쫓아내어야 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자도 변화된다. 자기 의와 자존심이 아무리 세어도, 복음의 진리에 무지해서 완악한 심성을 가졌어도, 평생 남의 말은 듣지 않는 황소 같은 고집이 있어도, 바뀐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만큼 완악하고 흉악한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두세 사람이 합심해 기도하는 곳에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렇게 두세 사람만이라도 예수님의 마음과 합해 기도하면 전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 전에 혹은 교회가 치리절차를 시행가지 전에 이미 바뀐다는 것이다.
신자가 서야할 위치
야고보서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장로를 청해 기도하라는 것이 그들이 영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고 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성정이 같은 자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에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다시 자세히 보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5:16) 또 그것이 의인의 간구이며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지 않는가? 합심기도를 하기 전에 서로 죄를 고하라고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는 자세로 서야 한다. 처음 예수 믿었던 바로 그 은혜가 지금 그 자리에 임하길 소원해야 한다.
본문은 어떤 위급한 일만 생겨도 합력해 기도만 하면 응답된다는 약속이 아니다. 특별히 담임 목사가 시행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으면 무조건 특별기도회로 모이라고 독려하는 근거 구절이 될 수는 더더욱 없다. 참 용서는 절대적으로 참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 화해도 온전한 진심이 전해져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죄 중에 있던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해가 바로 그랬지 않는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까지 먼저 오셔서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나의 모든 죄 값, 고통, 수치, 업신여김까지 십자가에 다 감당하시고 죽으셨지 않는가? 부활하신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그랬듯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그 사랑을 부어주시어 하나님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엎드리게 만드셨지 않는가?
교회는 바로 그런 일을 주님 대신에 하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주님의 그 긍휼한 마음을 갖고 먼저 찾아가야 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 죄 지은 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억울한 상처를 입었어도, 그래서 원수같이 미운 마음이 들었어도 찾아가 주님의 심정으로 진정으로 용서해야 한다. 무엇보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대로 먼저 자기 죄를 고해야 한다. 그 동안 형제를 내가 너무 미워했던 죄를 회개하니 저부터 용서해달라고 말이다. 형제의 형편과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제가 잘못했다고 말이다.
세상 모든 것에 실패하고 완전한 절망에 빠진 자가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밤중에 길거리를 헤매다 우연히 십자가 네온싸인이 달린 교회 앞을 지나게 된다. 또 문이 열려 있기에 혼자 들어가 기도하다가 삶의 소망을 다시 찾고 자살을 그만 두었다는 간증이 종종 있지 않는가? 두세 사람이 모이지 않았어도, 심지어 불신자인데도 예수님은 절망한 자의 곁에 함께 하신다. 솔로몬의 봉헌처럼 성전에 가지 않고 먼 타국에서의 기도도 주님은 응답하신다.
그러나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합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역사한다. 먼저 서로 죄부터 고하고 기도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힘을 합한다고 합심기도가 아니며 또 역사가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단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오셨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야 할 자를 만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사방이 완전히 다 막혀 쓰려져 있는 자들, 모두가 업신여기고 부모마저 포기한 자들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직 신자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말도 같은 뜻이다. 신자 모두가 하나님에겐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자라는 것이다. 어떤 기막힌 웅덩이에 빠진 자라도 마지막 구원의 산성이자 피난처는 하나님이시기에 신자 스스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분처럼 마지막으로 만날 자라고 여겨야 한다. 신자가 그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지 않고 외면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으며 어쩌면 당장 자살할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역으로 신자를 만나는 누구에게라도 바로 그 신자가 마지막으로 찾아갈 수 있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형제와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일들을 실토하며 의논하고 기도 받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18:21,22) 주님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려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삼진 아웃의 법칙
세상 법정에는 야구의 규칙을 빌려서 삼진아웃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같은 죄를 연속해서 범하면 세 번째는 몇 배의 중형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도 삼 세 번까지는 용서해도 그 이상 넘어가면 절대 용서 못하고 아예 상종도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잘못을 세 번이나 참아주는 것도 피해자로선 참으로 대단한 인내요 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르는 남이라면 당장 물적 정신적 피해보상부터 요구할 것이며 그런 보상이 없다면 원수가 될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심하면 살인까지 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위층 사람이면 이웃인데도 그러합니다. 설령 피해 보상을 받아도 그것으로 끝이지 그들 사이에 어떤 인간적 교류도 생성되지 않고 다시 생판 남으로 돌아갑니다.
이는 어느 세대 어느 나라에나 동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세태가 그렇게 무정 잔혹하게 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성정은 항상 동일하기에 항상 있어온 일입니다. 요컨대 세 번이 인간이 남의 잘못을, 그것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웃에게 용서해줄 수 있는 일반적인 한계인 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주 자신 있게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신자로써 책임을 다하는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알다시피 일곱을 유대인들은 완전한 숫자로 여기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도달하지 않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베드로는 참으로 우리와, 특별히 성질 급하고 감정적인 한국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고 여겨집니다. 때로는 귀엽고 우리 대신 주님께 물어보고는 야단까지 대신 맞아주니 고마울 정도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 아주 놀라운 답을 주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완전 숫자 7 하나로 족할 줄 알았는데, 주님은 (7X10)X7=490번으로 완전 숫자를 세 번, 그것도 곱하여서 대답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회수를 듣자 틀림없이 베드로의 코는 납작해졌을 것이며 함께 있던 제자들도 한참 동안 멍해졌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490번까지 용서하고 491번째는 큰 벌을 주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매일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490번까지 용서를 못합니다. 베드로처럼 7번까지는 될지언정 그것을 넘어가면 아예 포기하고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식이라도 교도소를 490번 들락거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용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 된 의무로 사식과 영치금이나 넣어주고 치울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끼리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490번까지 용서했다가 491번째에 용서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고 따지고 보면 용서를 안 한 것이 됩니다. 어떤 면에선 처음부터 벌이라도 주었으면 회개할 기회가 더 빨라졌을 수 있습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회개할 기회가 늦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그의 머리에 더 쌓게 만든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께 지은 죄와 인간에게 지은 죄
주님의 대답은 사실상 인간으로서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용서입니다. 거기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차원마저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어서 천국에 관해서 어떤 임금이 종들과 회계하는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3-35절) 그 비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주었더니 그 자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도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임금이 그 자를 다시 잡아다가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며,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에 맞먹습니다. 일만 달란트면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일백 달란트의 빚에 비하면 60만 배나 큰 빚입니다. 그것을 365일로 나누면 16만년이 넘고 80평생으로 치면 이천 번을 살아야만 겨우 갚을 돈입니다. 한마디로 일만 달란트는 인간으로선 영원히 갚을 수 없고 갚으려는 꿈도 아예 꿀 수 없는 금액입니다
주님은 그만한 빚을 탕감해준 임금이 바로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아 구원 얻은 것은 인간이 평생을 갚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 비유와 연결시키면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첫째로 베드로와 그에게 죄를 범하는 형제는 똑같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으나 십자가 은혜로 탕감 받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 안에서 형제들끼리 범하는 죄는 서로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것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예 무시해도 되며 용서해줄 것도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길가다 서로 어깨가 잘못 스친 정도의 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만난 형제끼리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도덕적 종교적 의미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베드로의 질문 의도처럼 신자니까 일반인보다 더 용서해야 한다는, 세 번은 물론 일곱 번도 훨씬 넘어서 아주 많이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끝까지 용서하려면 제가 이미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그 사람이 행한 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을 끝까지 받아들이려면 나부터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가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나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위의 계산대로 하자면 80번을 죽었다 살아도 못 갚을 죄였다고 철저히 고백 회개해야 합니다.
그 위에 다른 모든 신자들도 똑같이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백 데나리온도 안 된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잘못을 범하면 외적 모습은 분명 죄이지만 만약에 다 같은 사형수끼리라면 전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나부터 너무나 죄 많고 불쌍한 자이고 저도 그러하며 내가 더 그러하므로 네가 몇 번 나에게 잘못을 범해도 다 같이 불쌍한 자들끼리 문제 삼을 것이 없다는 인식이 확고하게 들어야 합니다. 문제 삼아봐야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서로가 아니 나부터 너무나 부끄럽고 비겁하고 완악해질 뿐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 은혜로 무상으로 용서해준 뜻에 비추면 큰 죄악이 된다고 절감해야 합니다.
실제로도 진정으로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면 그 사람 자체를 불쌍히 여기므로 그가 행한 일 한두 가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비유컨대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가 똥오줌을 싼다면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더 보살펴 주는 것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도 기저귀에 똥오줌을 싼다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주님의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들끼리는 아예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는 사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오직 사랑으로만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성도들끼리 용서 받아야만 할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삼 세 번이라도 범하면 서로 형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역으로 따지면 같은 신자에게 동일한 잘못을 일곱 번이나 범했다는 뜻인데 그 사람은 형제는커녕 심지어 신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
그런 맥락에서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의 형제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할 때만 해도 성령이 간섭하기 전으로 아직은 예수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형제들도 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단순히 유대 동족만 형제라고 호칭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인 그가 말하는 형제에는 당연히 바리새 사두개인처럼 예수님을 거역 대적하는 자들도 포함됩니다. 요즘으로 치면 불신자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질문은 불신자가 신자에게 여러 번 죄를 범해놓고 피해 보상은커녕 사죄도 않을 때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심지어 비방 멸시 핍박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해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고 그 전에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신자도 불신자의 잘못에 대해 똑같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의 소명이자 행할 바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끼리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죄를 범해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갈 동안에는 반드시 서로 돕는 자로서 오직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그러지 못해도 신자라면 최소한 그들에게 용서받아야 할 일은 아예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불신자가 잘못하면 불신자의 행위를 용서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 자체를 끝까지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수십 배의 결실을 맺는 성육신의 원리로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그것을 탕감 받는 일이 더 급하지 너희끼리 일백 데나리온 빚 가지고 아웅다웅 다투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큰 빚을 단지 먼저 탕감 받은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 신자가 행할 일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아직도 그 큰 빚을 탕감 받지 못한 자에게 주님을 소개해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일을 제대로 하려면 서로 용서 자체가 필요 없는 사이가 되는 것,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로선 신자로써 정말로 궁금했었고 또 정말로 용서를 잘하는 의로운 신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에는 잘하고 못하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려면 용서만 하면 되는 것이지 491번째에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안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그의 질문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고 엄밀히 말하면 신자에겐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이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따지자면 아무리 극악한 불신자라도 또 그런 자가 아무리 핍박해도 490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선 선뜻 이해하기 힘든 아래와 같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의로운 행위를 해야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다른 이의 과실을 끝까지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임금과 종이 회계하는 이 비유의 결론으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http://whyjesusonly.com/gloryok/34029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까?
(마18:21-25)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인격적인 공격, 악한 말들과 뒤에서 귓속말들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여호와가 어떻게 하실가를 생각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어떤 성도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피해를 당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성도로서 올바른 삶이나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한다면 어떠한 피해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본문을 통해 몇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도는 여호와로부터 용서 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다른 성도의 허물을 용서해야하는 첫째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와 여호와의 한량없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우리를 여호와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천국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과 같다. 일만 달란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무거운 죄 값을 모두 갚아 주셨다.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다. 그저 여호와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것이다.(엡 2:8).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죄수 중에서도 괴수(魁首) 라고 고백하였다.(딤전 1:15). 이것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죄가 없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우리는 쉴새없이 많은 죄를 짓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께서 어떠한 죄라도 모두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본문에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을 안 왕이 그의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만나자 갚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 동관이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으나 그 종은 동관을 감옥에 가두었다. 이 때 그 소식을 들은 왕은 탕감해 준 것을 취소하고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우리가 여호와께 엄청난 죄를 용서함 받고도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죄 값을 도로 받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저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못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시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고 말씀 하셨다. 성도는 남을 용서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용서는 성도들에게 부과된 여호와의 절대적인 명령으로서 꼭 실천해야 한다.
3. 용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데 힘을 쏟으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해 주셨으며(요 8:1-11),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에게 용서를 베풀어 낙원에 있을 복을 허락하셨고(눅 22:43), 정죄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던 분이시다.(눅 23;34).
성도들이 추구해야 되는 목표가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 하지 않는 사람은 평화의 왕(사 9:6) 예수님을 닮을 수가 없다. 용서하기를 힘쓰는 자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될까? 그것은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여호와께서 무조건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사실 우리들은 입과 건성으로는 형제들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기도 하고 위로도 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을 통해서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용서는 위선적이거나 겉으로만 화해가 아닌 온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하겠다. - 그랜드종합주석 마태복음 18장 pp490-491
(마18:15-17)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란?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마16:15-16) 그러자 주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보증하셨습니다(마16:18). 이어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는데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19절) 주님이 교회에 부여한 권능과 특별히 기도로 실현되는 역사가 실로 엄청나지 않습니까?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땅에서 무엇이든 기도하면 하늘에서 듣고 다 이뤄주신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매일 새벽마다 열정적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 과연 주님이 약속하신 그 권능과 역사를 실현해 보이고 있습니까? 솔직히 아무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주님 약속대로 되었다는 증언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사역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 아닙니까?
상기의 마18:15-17은 교회 안에 죄를 범하는 형제를 어떻게 치리해야 할지에 관한 주님의 명료한 가르침입니다. 처음에는 그 형제가 창피하지 않도록 한 명이 비밀리에 찾아가 권면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두 사람 증인을 데리고 가서 설득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교회 전체가 나서서 권하고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당시에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간주해 유대사회에서 격리시켰기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교회에서 출교시키라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교회가 죄 중에 있는 교인을 순서를 밟아서 냉정하고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지침 같습니다. 죄인에게 몇 번 공식적으로 권고하다가 별로 고칠 생각이 없으면 아예 사탄에게 넘겨주라고 단언하신 것 같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라고 약속하신 당신의 뜻과 상충되어 보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합심 기도를 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큰 역사에 관한 아주 좋은 예입니다. 교회가 행할 권능의 참 모습을 이만큼 정확하게 가르치는 말씀도 없습니다. 주님이 본문에 이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재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8-20)
흔히 15-17절은 교회 치리에 관한 지침이고, 이어지는 18-20절은 합심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따로 떼어서 이해하고 치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둘은 반드시 연결해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은 정미하고 완전합니다. 죄인을 치리하는 첫 단계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만남이고 둘째 단계는 두세 사람이 함께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사람의 숫자를 두 번에 걸쳐 의도적으로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19절), 뒤에는 “두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처음에는 단순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만 약속했지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절에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으므로 땅에서 매고 푸는 일이 바로 교회가 행할 합심기도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죄인을 치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므로 연결해서 부연 설명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도들끼리 기도한 후에 치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에서 특별히 또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말씀은 15절의 첫 부분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개역성경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죄로 인해서 피해본 사람이 먼저 찾아가 권고하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이나 흠정역 등은 분명히 “네 형제가 네게 범죄하거든”이라고 그 뜻을 명료하게 밝혔습니다.
요컨대 가해자가 전혀 뉘우칠 기색조차 없을 때에 피해자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해 형제를 얻을 목적으로 먼저 찾아가서 먼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의 열쇠가 기도인데 음부를 이기려면 죽음을 극복해야합니다. 또 그러려면 성도들은 오직 상대의 생명과 영혼을 살리는 사랑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땅에서 무엇이든 매고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 그대로 들어주신다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새벽기도로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건물의 신축확장, 사업 번창, 질병퇴치 같은 교회 목사 성도들의 사적인 탐욕이 아닙니다. 또 반드시 교회로 나와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해야만 사탄을 묶어서 훼방 못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안팎의 형제들이 죄를 범하면 그 피해를 입은 자가 먼저 가해자를 찾아가 사랑으로 품고 용서하는 기도가 바로 땅에서 묶고 풀어야 할 ‘무엇’입니다. 그것도 피해자와 가해자 두 당사자만의, 아니면 진정으로 동일한 긍휼을 품은 두세 성도의 기도만으로도 죽어가던 생명이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함께 기도할 정도라면 찾아간 성도들의, 특별히 피해자의 긍휼한 마음의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성령이 역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상기 본문이 정작 말하는 바는 음부를 이기는 천국열쇠가 실은 합심기도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합심기도는 최하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는데 피해자가 찾아가 가해자와 함께 기도해야 가능합니다. 그전에 먼저 찾아가 용서해야하고, 그전에 먼저 사랑으로 품어주는 긍휼이 있어야 하고, 그 긍휼을 가해자가 순전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완전히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부 교인이 때로는 죄로 넘어지더라도 두세 성도들만의 사랑으로 섬기는 기도로 그 성도가 예수 생명 안에서 새롭게 되고 더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예수님이 비로소 새로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성전도 동일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할 때에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더라도 회개하고 성전에 나와, 심지어 성전으로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여달라는 간구만 했습니다.(왕상8:31-53)
역대하에선 한 마디로 줄여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예수님은 조금 더 발전시켜 성도들끼리 서로 용서 사랑하고 함께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경제적 이권만 다투는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환전상과 장사치들의 상을 뒤엎고 크게 야단치며 쫓아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그런 꾸중을 듣지 않을 교회가 얼마나 될까 따져보면 참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뿐입니다.
오늘날 과연 이런 사역에 전념하는 교회가 있을까요? 주님의 약속을 실현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나마 신앙양심이 남아 있다고 주님이 인정해주실까요? 무엇보다 교회가 예수 십자가 복음조차 순전하게 전하지 않는데 주님이 약속하신 권능이 실현될까요? 아니 천국열쇠의 뜻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는 오직 예수 십자가뿐이어야만 합니다. 그분만이 교회 사역의 알파요 오메가요, 성도들 모임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단순히 두세 사람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교회는 죄인을 십자가 복음으로 거듭나게 해야 하고, 그렇게 용서 받은 죄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모습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쉽게 말해 다른 죄인을, 그것도 “네 형제가 네게 범죄하거든” 그 가해자를 피해자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어주어야만 합니다. 합심 기도 이전에 바로 예수 십자가 복음이, 또 성도가 복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천국 열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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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7번씩 70번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기독교 인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그 중 제일 어려운 두가지는 사랑과 용서 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중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 <마태복음 18:22>
나에게 잘못을 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인것 같습니다. 특히 살기가 각박해진 요즘 세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작은 실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해 질문을 하며, 자신에게 잘못한 누군가를 7번 용서하면 충분한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7번이나 용서를 하려는 자신을 기특히 여기며 예수님의 칭찬을 바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시는데, 그것은 7번이 아니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억지로라도 용서하면 될까?
예전에 어느 집회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설교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말씀을 전하시는 훌륭한 목사님이셨는데, 그 분은 용서에 대해 설교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라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겉으로만 용서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가식이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학교가기 싫은데 억지로 학교에 갔다고 그것을 가식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굉장히 논리적이었고, 정말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잠이 많고 게으른 편이여서 (혹은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에 학교가는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이 정말 싫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싫지만 학교에 간다고 그것을 가식이라고 얘기하지는 않죠. 너무나도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나고 그 말씀을 더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자기 형제에게 그들의 범법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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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던 기독교인이 아니던 많은 분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의를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봉사를 통해서, 혹은 성금을 내서, 자신이 나쁜 놈이 아니며 사회를 밝게 만들려고 하는 선한 구성원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또 신을 믿는 종교인이라면 내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멋진 종교인임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던 당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은 그런면에서 완벽한 종교인들 이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여 절약한 돈으로 구제를 하고, 또 자기 번돈을 헌금하고, 율법이 요구한 바를 정확하게 지키려고 하고, 심지어 다른 집에 놀러가도 그 집에서 나오는 음식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음식이 아닐까봐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비춰지자 그들의 행위 뒤에 감춰진 외식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부터 하는 용서는 불가능해요
우리에겐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사랑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방황하는 청소년이라도 사랑하는 친구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돈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없애 버렸다면, 예를들어 나의 아들을 죽였다면,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냥 용서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터 용서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 간단하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는 그것이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나 행위를 보는 분이 아니시고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내가 어떤 여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한마디 안했더라도 내 마음이 그 여자와 간음을 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이미 그 여자와 실제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겉으로는 용서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어떠한 복수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더라도 나의 마음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7번씩 70번이라도 즉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하고 계속적으로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기독교인들
예수님은 이 명령 바로 다음에 한 예화를 주십니다.
어떤 왕 앞에 10,000 달란트(약 4.7조원)빚진 자가 끌려 왔는데, 그가 갚을 것이 없자 그의 주인이 그의 아내와 자녀와 가진것을 다 팔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000 달란트 빚진 자는 엎드려져 다 갚겠다고 빌고 주인은 빚진 사람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10,000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 빚진 자기의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고 빚을 못갚자, 감옥에 가둡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자신이 받은 용서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종을 형벌 주는 사람들에게 넘겼다는 비유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죄보다 내가 더 커다란 죄를 저질렀으며 내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용서보다 내가 더 커다란 용서를 받았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얘기하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으로 인해 어떤 은혜를 입었고 얼마나 커다란 죄를 용서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용서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자기가 받은 용서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50만원 주고 어제 산 스마트 폰을 떨어뜨려 부서 뜨렸습니다. 그렇다면 대 부분의 사람들은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 하겠죠? 그런데 만약 1년 전에 내가 그 사람의 3000만원 짜리 차를 사고 내어 폐차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용서했다면, 50만원 짜리 스마트 폰을 부쉈다고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정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3000만원 짜리 피해를 입히고 용서를 받고나서 50만원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은혜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나의 성적, 나의 돈, 나의 행복, 나의 명예, 나의 소원, 나의 꿈 나의... 나의.... 나의....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날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뜻도 알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지만 말이죠.
우리가 얼마를 가지면 부자라고 생각할까요? 주위에 아는 사람들 중에 돈을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의 재산이 얼마정도 되나요? 1,000억원 이상 갖고 있는 사람 찾기 힘들죠? 아마 여러분에게 1,000억원이 주어지면 떵떵 거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에 삼성, 현대, LG 등 10대 대기업 회장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들 앞에서 여러분이 부자라고 떵떵 거리면서 돈자랑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재산 얘기만 나오면 부끄러워 제발 내 재산에 대해 묻지 말았으면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대기업 회장들이 빌게이츠 같은 세계적인 부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면?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들도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아주 더러운 죄인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나름 착한 인생을 살고 계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 정도 살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테레사 수녀라도 예수님 앞에 서면 그의 선하심에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될 것이고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을 이뤄낼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였고 율법에 있는 의에 관하여는 흠이 없는 자로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6 & 8>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디모데 전서 1:15>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율법을 흠이 없이 지켰다고 스스로 얘기를 하지만 그 모든 자신의 의를 배설물 즉 똥처럼 생각을 하며 죽기전에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는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자신을 죄인중에 최고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아가면 알아 갈 수록 인간 기준의 의로운 행위가 얼마나 초라한 것이며, 자신은 예수님을 도저히 닮을수 없는 죄인 중의 최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의 도덕 기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점점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 기준은 참 높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마음으로 미워하는 사람없이 한평생을 살 수 있으며, 다른 이성을 마음으로 간음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나는 수도 없이 질투하며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싶어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나는 나의 주인인 하나님을 배신하고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해 살아 왔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 세상 선악의 기준인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그 은혜를 이해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우리의 행위를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에 용서를 못하는 것임을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느니라...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요한 일서 2:9 & 12>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더욱 더 알기 힘쓰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알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네가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 <호세아 4:6>
여호와를 알자. 우리가 여호와를 아는 데 전력하자. 날마다 새벽이 오듯이 주도 틀림없이 오실 것이다. 소나기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주께서 오실 것이다. <호세아 6:3> http://fingerofthomas.org.
용서의 복음
(마18:21-35)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입니다. 세계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만이 용서하시는 신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를 약탕에 넣어 끓여 한 방울 떨어뜨리면 “용서”하고 떨어질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용서요 복음의 내용이 용서이며,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입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마쳐지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땅에 생이 마감되고 천국 문이 열려질 때에 용서의 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또 다른 용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다 쫓겨 난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한 가지 계획하신 일이 있습니다. 용서의 드라마를 이 땅에 펼쳐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1막은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2막은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용서의 복음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3막은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 될 냉대와 멸시와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감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어주신 것입니다. 용서 드라마 제4막은 예수님은 용서를 완성하시기 위해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용서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교회의 강단은 용서의 선포장이요 목사는 용서의 대언자요 교회는 용서를 파는 슈퍼마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올 때마다 용서를 사 가지고 가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알림장이요 십자가는 용서의 영수증이요 성령은 용서의 전파자요 선교는 용서의 전달식입니다.
존 브로크만이라는 사람이 쓴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성인 110명이 선정한 위대한 발명품 121가지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운데 관심을 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우개입니다.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데생이나 스케치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많은 작곡이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과거를 지워주는 용서의 지우개가 없었다고 한다면 성경의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베드로도 바울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5개의 예수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네 번째 설교입니다. 이 네 번째 설교는 교회생활에 관련된 설교인데 오늘 말씀은 교회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용서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21절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어디까지 얼마만큼 용서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상상 밖이었습니다. 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이 말은 70 더하기 7도 되고, 70 곱하기 7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은 이러한 숫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용서의 횟수 제한을 철폐하고 계십니다. 무제한적인 용서, 이것이 천국의 용서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실천해야 될 용서의 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지금 용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 계십니다. 용서의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하고 공동체로 돌아오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이방인이든 창녀든 세리든 어떤 죄인이라도 교회 공동체는 그들을 용납하여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용서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큼 진정한 용서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할 만큼 용서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될 고통을 한 몸에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자신에게 못질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용서를 선언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평소 선포하셨던 용서의 메시지의 실천의 자리이고, 용서의 절정이며, 용서를 완성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 땅에는 용서받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실 용서는 사람이 실천하기가 힘든 덕목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움은 사탄의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사탄의 영향권에 있습니다. 용서는 내 힘으로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생활을 위한 설교입니다. 특히 세상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용서가 아니라 천국윤리로서의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국의 모델입니다. 교회를 통해 천국의 윤리인 용서가 소개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천국의 용서윤리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3~25절입니다. “천국은 그 종과 결산하려 했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어떤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으라는 명을 받고 임금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실 일만 달란트라는 빚은 인간이 갚을 수 있는 빚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다 팔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영적인 파산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임금 앞에 엎드려서 조금만 참아 주시면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그러나 애걸로 갚아지는 분량이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종교나 도덕이나 선행으로 갚기가 불가능합니다.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래서 주인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한순간에 빚을 탕감해 주고 날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고 기뻐하며 나오던 이 사람이 길거리에서 자기 돈 떼어 먹고 도망간 친구를 만납니다. 멱살 잡고 빚 갚으라고 소리치자 친구는 조금만 말미를 달라고 빕니다. 그러나 결국은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게 내 모습이요 너의 모습일 수 잇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일만 달란트 분량의 엄청난 죄, 모두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서 받은 상처, 미움, 손해, 분노는 일백 데나리온에 불과한데, 그것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태산처럼 느껴지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준 것은 티끌처럼 느껴지는 게 죄악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용서의 자비는 얼마나 큰 것인데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내가 받은 손해만 기억하고 살아가는 게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면 내가 용서하게 되면 내 인격과 자존심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또 용서할 수 없다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못된 인간을 용서하면 사회질서가 파괴된다. 저런 인간이 용서받고 세상에 버젓이 살아간다면 세상의 정의는 누가 세우나?’ 라며 자기가 처단하겠다고 덤빕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너에게 심판의 권세를 준 적 없다. 공의는 내가 세우는 것이지 너에게 맡긴 적이 없다. 한때 나와 원수 되었던 너를 용서하고 내 자녀 삼지 않았니?’우리는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용서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너를 용서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용서윤리입니다. 에베소서 4:32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3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내가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도 너를 용서해야 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너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 죄를 담당해 주셨듯이 때로는 내 자존심이 도려내어 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천국의 용서윤리입니다. 용서의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너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았을 때 엎드려 조금만 참아주면 반드시 갚겠다고 쩔쩔 매고 있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인 앞에서 당황하며 쩔쩔매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던 자화상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확신이 먼저 서야 하고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큰 은혜의 수혜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내가 누구보다도 큰 용서를 받았다는 감사가 용서의 핵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를 아십니까?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1달란트는 1만 데나리온입니다. 1만 달란트는 1억 데나리온입니다. 일꾼 1천명이 274년을 벌어서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1만 달란트가 됩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다는 것은 과장법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상 과제였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배신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마귀의 땅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죄 값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입니까? 이 세상에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하나님께 갚을 길이 없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받았습니다. 내가 용서받은 그 용서의 덩어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덩어리가 아닙니다. 그 용서의 신비는 우리의 지혜로 능히 깨달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일만 달란트가 가지고 있는 양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억울하다고요? 아프다고요? 분통이 터진다고요? 하나님께서 받은 용서의 덩어리를 생각헤 보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천국의 용서윤리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조건적인 저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이 자지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주인이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32~34절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내가 너에게 탕감해 준 것은 네가 다른 사람들을 탕감해 주어야 된다는 조건을 붙여서 탕감해 준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네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건을 걸어 용서할 수 없다면, 이제는 그것이 조건으로 바뀌어져서 용서가 저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을 왜 몰랐더냐?’ 무조건적인 용서가 조건적인 저주로 바뀌어 지게 된다는 지혜를 본문이 말해 줍니다.
24절에 나오는 “결산”이란 단어는 마태가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마태가 “결산”이란 단어를 쓸 때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장면을 연상하고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큰 사역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큰 봉사의 흔적과 헌신했던 열매들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둘째, 나는 내게 아픔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게 부담을 주었던 모든 사람을 용서했다. 내게 손해를 끼쳤던 모든 사람을 나는 용서했다. 하나님 앞에 용서의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게 건강이 필요해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게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네게 치료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 제게 친구가 필요해요.” “아니다. 진정 네게 필요한 것은 현재 있는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 친구로부터 용서받는 것이다.” 발이 없다면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맹인에게 안경이 소용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가 교육을 받으면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 돈을 벌면 악한 영향을 남길 뿐입니다. 용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친구를 얻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유와 변명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했습니다. 용서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다음 주일부터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설교 끝나고 집에 가서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용서해야 합니다. Now and here!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 마음속에 생각나는 얼굴들을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속에 용서의 설교를 준비하며 “하나님 아버지, 이 설교가 내 입술의 설교가 아니라 내 삶의 설교가 되게 하시고, 내 인격의 설교가 되게 하시며, 내 신앙고백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두 가지를 묵상했습니다. ① 나는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인가? “아멘” 한 후에 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② 내 마음속에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누구인가? 정말 내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 설교를 하는 것인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시인 에무센의 글 한 토막을 읽으므로 오늘 설교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기 한 마리 잡겠다고 온 집을 태우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잔혹비유(마18:34)
어느 이야기의 후반부다.
순금으로 된 구두를 들고 왕자가 신부감을 찾아온다. 큰 딸이 먼저 신발을 신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계모가 칼을 주면서 왕비가 되면 걸을 일이 없으니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큰 딸은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신발을 신는다. 그러나 두 마리 비둘기가 거짓을 폭로해서 실패한다. 이번에는 둘째 딸이 계모의 말을 듣고 발뒤꿈치를 자르고 신발을 신었지만, 역시 비둘기 때문에 실패한다. 결국 왕자가 신부감을 찾아서 결혼하는데, 결혼식 날 두 비둘기가 두 딸의 눈알을 쪼아서 두 언니는 평생 장님으로 살게 된다.
낯이 익은가? 그렇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후반부다. 그런데 이야기가 좀 당황스럽다. 우리가 잘 아는 그런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다. 피가 철철 흐르고, 무서운 복수가 난무한다. 어떻게 된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는 본래 민간에 떠돌던 민담을 각색해서 어린이용으로 만든 것이고, 그 원작을 추적해보았더니, 입에 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이야기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동화의 원작인 민담을 잔혹동화(殘酷童話)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름답기만 하던 동화도 그 밑바닥을 들추었더니 전혀 다른 모습의 이야기가 나오듯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도 한 꺼풀 벗겨보면 그동안 우리가 친숙하게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그렇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할 구절은 18장 34절 단 한 구절이다. 먼저 우리말로 된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해보자.
개역개정 |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
새번역 |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
공동번역 |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
가톨릭성경 |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
200주년 신약성서 |
그의 주인은 진노하여, 빚진 것을 모두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
현대어성경 |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
우리말 성경 중에서 눈에 띄는 번역은 가톨릭 성경의 “고문 형리”이다. 옥졸이나 형무소 관리, 형리는 같은 의미이다. 사실 고문 형리라는 말은 없다. 가톨릭 성경 번역자가 고문이라는 말과 형리라는 말을 합쳐서 만들어낸 말이다. 옥졸이나 형리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꼭 “고문”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했을까? 왜 그랬을까?
마태복음 18장 34절의 헬라어 원문은 이렇다.
Matthew 18:34 καὶ ὀργισθεὶς ὁ κύριος αὐτοῦ παρέδωκεν αὐτὸν τοῖς βασανισταῖς ἕως οὗ ἀποδῷ πᾶν τὸ ὀφειλόμενον.
그리고 문제가 되는 단어는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이다. 이 단어를 영어성경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대체로 영어성경은 네 가지 표현으로 이 단어를 번역하고 있다.
1. tormentors(ASV, ERV, KJV, DBY, ETH, GNV, KJG, PNT, WEB)
2. torturers(NJB, NAS, DRA, GWN, MGI, MRD, NAB, NAU, NKJ)
3. jailer(ESV, RSV, CSV, CJV, NIRV, TNT)
4. to torture, to be tortured(NET, NIV, NRS, NLT, TNIV)
1번은 괴롭히는 사람,
2번은 고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3번은 간수라는 뜻이다.
4번은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를 동사로 표현한 것인데, 죄수를 고문당하도록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사실 1번과 2번은 딱히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여튼 영어성경에서는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이 단어를 고문이라는 뜻과 연결해서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학자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먼저 주석들을 찾아보았다. 도날드 헤그너(Word Biblical Commentary), 크레이그 블롬버그(New American Commentary), 에두아르트 슈바이처(국제성서주석), 마이클 윌킨슨(NIV 적용주석)은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를 분명히 “고문”과 연결해서 해석하고 있었다. 비록 고문이 이스라엘에서는 율법을 통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 때문에 당혹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이 학자들은 주변 나라들에서는 고문이 흔한 것이었고, 이 구절이 고문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비유 연구로 유명한 요아킴 예레미야스는 그의 책 「예수의 비유」(p.174-175)에서 이렇게 말한다.
“재판을 통해 빚진 자를 징역형에 처하는 것은 유대법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가 처벌을 서술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그의 청중들에게 잔혹한 것으로 느껴질 비유대적인 법률처리를 이용하여 (수장에 의한 처형: 막 9:42 공관, 아내들의 매도: 마 18:25, 고문: 마 18:34도 같은 것이다), 심판의 무서움을 특히 인상적으로 표현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좀 더 정확한 판단을 위해 몇 가지 신학사전의 도움을 받았다. 먼저 헬라어-영어 사전인 바우어 사전(BDAG, 3판)을 찾아보았다.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 항목을 보니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간수, 죄수를 고문하라는 명령을 받은, 포악한 간수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마18:34은 무자비한 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TDNT(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은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가 본래 “검사관”(tester)이라는 의미이지만, 신약성경에는 이런 의미로는 사용되는 경우는 없고, 마18:34절에서 단 한번 “고문관”(tormentor)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EDNT(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도 마찬가지로 “고문관”(torturer)으로 설명한다.
이런 사전들을 보면 성경의 용례 외에 다른 헬라문헌에 나오는 용례들을 소개해준다. 이번에는 그 용례들을 한번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이 사전들이 제시한 용례에는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라는 단어에 국한되지 않고, 같은 어근을 가진 다른 명사형이나 동사형이 포함된다.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Speeches 37.40, 42, 그리고 필로(Philo)의 Spec. Leg. 4, 82(Special Laws, IV, 82), Omn. Prob. Lib. 108(Good Person, 108), In Flacc. 96(Flaccus, 96), 폴리캅의 순교, 2:3, 베드로 묵시록 8, 22절을 하나씩 찾아서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이 모든 출처들은 한결같이 엄청난 육체적 고통 혹은 끔찍한 고문을 보여주고 있었다. 달리 해석할 여지는 없어보였다.
좀 자세하게 살피느라 복잡한 길을 돌아온 느낌이다. 자, 그렇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를 반영한다면, 마18장 34절의 βασανιστής(바사니스테스)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가만히 감옥을 지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옥졸이나, 간수는 좀 부적절해 보인다. 형리(刑吏)라는 말 속에 “형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역시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를 “고문 기술자”라고 번역하기도 애매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 근현대사에서 “고문 기술자”가 주는 뉘앙스가 아주 부정적이기 때문에 이 비유의 맥락과 맞지 않아 보인다. 아마 가톨릭성경의 번역자도 이런 고민 때문에 “고문 형리”라는 단어를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닌가 한다.
여튼 번역은 그렇다 치고, 이제 이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이 남았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을 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갚도록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형벌을 받도록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석하고 설교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듯하다.
이 비유는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22:13)는 말씀보다 훨씬 더 강한 심판을 말한다. 그만큼 죄용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주기도문의 간구가 이 비유에 꼭 들어맞는다. 어떤 분들은 주기도문의 이 기도를 조건부 용서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 18장의 이 비유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산상수훈이 절대로 실천 윤리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진정한 용서는 사람을 깨뜨립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용서함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산상수훈 강해」, p. 542)
우리는 이 비유 앞에서 우리가 용서의 훈련도 부족할뿐더러, 그리스도께서 주신 용서의 가치도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비유의 표현이 강렬한 것은, 그만큼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그리고 간절한 소리로 용서를 배우라고, 용서를 실천하라고 외치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http://blog.daum.net/goodsamaritan2/52d
영혼을 지키는 6가지의 길(마18:7-10)
< 마술봉을 찾는 신앙 >
지난 3월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펜실바니아의 웨스트 이스톤(West Easton) 지역에 살고 있는 조앤 잰스키(Joanne Zansky)라고 하는 한 여성이 피치스 밀러(Peaches Miller)라고 하는 점술사에게 갔습니다. 그때 밀러는 자기가 만든 마술봉을 사면 각종 저주가 풀린다고 해서, 잰스키는 1800불(200만원)을 주고 그 마술봉을 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카를 위해 마술봉을 하나 더 샀고, 다시 얼마 후에 죽은 어머니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마술봉을 하나 더 샀습니다.
세 번째 마술봉을 산 후에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잰스키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여동생은 즉시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언론에 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밀러를 잡아넣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밀러가 법을 어긴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잰스키가 상식의 법칙을 어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잰스키를 "참 어리석다! 어떻게 그런 말에 속나?"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게 속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속습니까? 자기 속에 있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3가지만 버리면 사기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확천금, 불로소득, 만사형통'입니다. 이 3가지의 아비가 기복주의이고, 기복주의의 반대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마술봉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과 고집, 우리의 욕심과 의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려고 하는 삶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에 진정한 축복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라고 하는 신학자는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를 예수님을 '죄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sin)'로 알기보다는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준 구세주(Savior from hell)'로 아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지옥은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죄는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는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죄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내어드릴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것보다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죄와 유혹으로부터 영혼을 지키는 길 >
오늘 본문에는 "실족케 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남을 넘어지게 한다"는 말인데, 더 정확한 의미로는 "남에게 죄를 짓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4가지 무기가 나옵니다. 그 4가지 무기를 잘 지키면 우리는 남의 영혼도 지킬 수 있고, 나의 영혼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8절에는 손과 발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9절에는 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10절에는 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4가지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을 각종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이 6가지를 잘 지켜야 합니다.
1. 눈을 지켜야 합니다.
눈은 영혼의 창문입니다. 음식은 입으로 들어오지만 죄는 대개 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장 약화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눈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가장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왜 하와가 사단의 꾀임에 넘어갔습니까? 사단의 달콤한 말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은 선악과를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1900년대 평양에 이승은 목사님이라고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에 은혜를 받아 교회로 가니까 기생집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생 연합회에서 이 목사님을 넘어뜨리기로 작정하고 최고로 예쁜 기생을 뽑아 교회로 파송했습니다.
이 기생은 사명을 받고 장기 작전을 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출석하고 최선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름다운 신앙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이 기생은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날 밤, 이 목사님은 기생의 유혹에 넘어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번 죄를 짓고 나니 점차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동시에 설교는 점차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사실이 들통나서 목사님은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후 그분은 평양 서문 밖의 안경점 주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지금도 미인계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추어진 마귀의 전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어떤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 마귀의 작전을 눈치채고, 마귀는 미워하되 원수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자기 입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항상 "내가 이런 말을 조심해야지"라고 다짐해보지만, 어느새 그 말이 나와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절망을 심어주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거짓말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아내 하나는 잘 얻었어!" 하는 말과 물건을 비싸게 산 친구에게 "물건 잘 샀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남이 물건을 사면 꼭 그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얘기를 해서 남의 기분을 망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남이 물건을 비싸게 샀다고 하는 말도 "당신 어리석다"고 업신여기는 말입니다. 이미 산 물건입니다. 그의 기분을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어도 "잘 샀다!"고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어 한 마디라도 남을 배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할 때에는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말하지만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혀놓고 나는 뒤끝이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말을 하고 나서 집에 가서는 "내가 참을 걸!"하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의 마음을 뒤집는 데에는 1초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는 데에는 1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1초만 참으면 되는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오랜 고통의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항상 온유한 신사와 숙녀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란 뜻을 가진 헬라어 프라우스는 '열이 내린 상태'를 뜻합니다. 열이 오른 사람에게 의사 선생님이 약을 먹인 후에 열이 내리면 쓰는 말이 "프라우스"라는 말입니다. "열이 내렸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불은 받아야 하지만 열은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열 받지 말고 항상 온유한 입술이 되도록 지켜야 합니다.
3. 귀를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말은 물에 떨어진 잉크와 같습니다. 한번 잘못된 말을 들으면 영혼에 쫙 퍼져서 다시 맑게 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인생의 수많은 고난은 대개 말 한 마디 잘못 들어서 생긴 영혼의 질병을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나아가는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도 잘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우리 영혼도 좋아지고, 나쁜 말을 들으면 우리의 영혼도 나빠집니다. 영혼의 건강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지금 우리 영혼을 오염시키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가지 예로, 요새 영성을 강조하는 어떤 분의 말을 들어보면 '기독교 영성'과 '기독교 윤리'가 아주 반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성과 윤리는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영성을 강조하면서 윤리를 무시하는 영적 허영심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성과 윤리는 결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구원은 순간적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요새는 말씀 듣는 사람의 90% 이상이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매일 구원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더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2절은 "초보 신앙을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씀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삶'에 관한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하지만 사실 진정한 축복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능력과 기적에 관한 말씀도 많이 듣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능력과 기적도 삶의 변화라는 전제 속에서 대부분 주어지고, 그리고 능력과 기적 후에는 다시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기적이고, 축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관한 도전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은 우리의 평생 과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교는 자연히 '삶에 대한 도전'을 하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윤리성을 띌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이단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윤리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며 믿음과 윤리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과 기적이 상관이 있는 것 이상으로 믿음과 윤리는 더 상관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상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상식의 기반 위에 '상식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상식 자체를 무시하는 비상식과 몰상식은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허영심입니다.
영적 허영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대가가 따릅니다. 그 첫 번째 징계가 '순수하고 물들지 않은 성도와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영적 허영을 가진 사람은 꼭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길로 갑니다. 자신은 더 깊은 영성을 찾아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공동체를 위해서 도려내야 하는 환부로 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믿음은 몰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이란 양식 있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인 삶의 자세인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식이 요구하는 기준'보다 더 소중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상식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설교에는 '성도답게'를 도전하는 말씀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를 도전하는 말씀을 '도덕적인 설교, 윤리적인 설교'라고 비하시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영성! 영성!" 하며 내용과 실체와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말을 하면서 영적 허영심에 젖은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도 죽고, 남의 영혼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처럼 애매 모호한 말 한 마디가 영혼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듣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유혹자의 말은 독약과도 같습니다. 그런 말은 아예 듣지 말아야 합니다. 상식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이고, 정의를 내세워 비판하는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영성을 내세워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말에 영적 교만과 우월의식이 느껴지거든 속히 귀를 닫고 다리 아래 물처럼 그 말을 떠내려보내야 할 것입니다.
4.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귀를 잘 지켜도 유혹자의 말을 듣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즉 어떤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면 바로 그 비판에 쏠리지 말고, 먼저 "나는 옳고 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만과 180도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지금 신앙에 심각한 위기가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첫 사랑에 빠진 분들을 보면 예배도 새벽예배까지 100% 참석하고, 기도도 매일 2시간 이상 하고,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에 교만한 마음이 싹터서 "왜 교회 중직이라는 분들이 저렇게 기도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절대 버려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우리의 어떤 헌신도 무효로 만들어버립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인생에서 실패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자존심의 장벽이고, 자존심의 장벽보다 더 무서운 장벽이 교만의 장벽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자존심의 장벽을 넘고,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교만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5. 손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고 삽니다. 그 손을 펼 수 있어야 우리의 영혼이 복된 영혼이 됩니다. 축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은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많이 받았지만 손을 펴는데 인색한 삶은 결코 축복 받은 삶이 아닙니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좋은 일에 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항상 남을 돕고 살겠다는 구제의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미래에 돈을 벌어서 돕겠다"고 하기 전에 현재의 처지에서 힘써 손을 펴야 합니다. 도울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제가 주는 사람에게는 간증거리가 될 수 있어도 받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통해 어떤 집사님이 쓴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집이 없는 착한 할머니 10분을 식구처럼 모시고 사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대로 저는 지금 10분의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저의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펴는 손이 크고 통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영혼에는 죄와 저주의 이끼가 끼는 법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몽고의 임준호 선교사님이 성경학교 공사를 하는데 약 3만 불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계속해서 목찬수 군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지금 백혈병이 재발되어 다시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치료비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현재까지 약 400만원 가까이 도움을 드렸지만 전체 치료비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있기를 바랍니다.< 후원계좌 : 신한은행 642-12-079560 이승연(요삼일육선교회) >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소년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바쳐서 생겼습니다. 그 기적 후에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35). 예수님은 떡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 떡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천국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예수님이 떡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떡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 손의 떡을 나눠주고, 내 몸을 떡으로 삼아 나눠줄 때 무엇인가 기적은 시작될 것입니다.
6. 발을 지켜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고, 들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들어선 후에 발을 빼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컴퓨터 게임도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 힘듭니다. 모든 죄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저는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저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한번 거기에 빠진 사람은 그 재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맛은 모르는 것이 약입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마약을 하면 쾌락이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압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마약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마약을 맞고 그 쾌락을 맛보면 그 다음에는 마약을 끊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고, 결국 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에 빠집니까? "그 정도쯤이야! 한번쯤이야!"라고 생각하고 죄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술 좋아하는 분들은 항상 "딱 한잔만!" 하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딱 한번만!"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둘째 딸 한나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가 참을성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신발에 흙이 들어가는 것만은 조금만 들어가도 얼마나 짜증을 내는지 모릅니다. 걸음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행군할 때 제일 행군을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군화에 이물질이 들어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조그만 죄가 우리 인생 행로에 제일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 작은 죄 때문에 기도가 막히고, 축복이 막힙니다. 자신의 작은 죄 때문에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작은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죄의 유혹이 많은 이 시대에 오늘 말씀드린 6가지를 잘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영혼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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