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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아르박삿 : 구속사의 족보를 계승하다/ 엘람, 벨렉

by 은총가득 2021. 2. 2.

아르박삿 : 구속사의 족보를 계승하다

 

<아르박삿>: ארפכשׁד '아르파크솨드(Arpachshad)' - (뜻) "영역(boundary)"

1) 노아의 손자, 셈의 셋째 아들 2) 35세에 셀라를 낳고 403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음

3) 438년 향수(아담 이후 1658년 출생, 2096년 죽음)

4) 노아와는 348년 동시대 살았고, 아브라함 148세까지 이삭 48세까지 동시대 살았다

 

노아의 아들 셈은 홍수 후에 자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다(창 10:22).

그중 아르박삿은 셋째아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섯 아들을 열거하면서 첫 아들이 아닌 셋째 아르박삿을 통해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 10장 족보 속에는 아르박삿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어지는 이유에 대해 아무런 답이 없다. 하지만 이후로 엘람과 앗수르 민족이 성경에서 선민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 살펴보면 그들이 언약의 주류에서 밀려난 이유를 알 수 있다.

 

1. 셈의 맏아들(엘람)과 둘째(앗수르) 아들이 구속사의 족보를 잇지 못하는 이유?

 

(1) 엘람 : עילמ (Elam) - (뜻) "높은 곳"

1) 셈의 장자 2) 엘람족속의 시조

 

 

 

 

엘람은 '오르다, 높다'에서 유래되어 "높은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엘람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티그리스(힛데겔) 강을 경계로 가장 우측에 있던 페르시아만과 카스피해 사이의 높은 산악 지대에 거주하였던 엘람 족속의 조상으로, 지정학적인 조건상 수메르, 바벨론, 앗수르, 메대와 바사 등 인근 메소포타미아 여러 나라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렀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 오기 위해 가병 318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울 때 적군 네 나라 가운데 주동했던 나라가 엘람(엘람 왕:그돌라오멜)이었다.

 

엘람은 활 쏘는데 으뜸가던 호전적이고 정복력이 강한 민족이었으며, 앗수르가 선민 유다를 침략할 때 군사를 지원하여 예루살렘 멸망을 돕기도 하였다.

성경에서도 활쏘는 자들의 땅으로 묘사되고 있다(사 22:6; 렘 49:35).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하는 나라 중 하나로 엘람을 꼽았고(렘 25:25), 에스겔은 엘람을 그 무덤 위에 애가가 슬피 불려질 나라라고 했으며(겔 32:16, 24), 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방해했던 족속이 엘람이었다(스 4:1-9). 이렇듯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엘람에 하나님이 직접 재앙과 진노를 쏟고 칼을 보내어 진멸하시고, 왕과 족장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렘 49:36-38, 겔 32:24-25).

엘람은 BC 645년경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으며, 앗수르는 엘람인들을 사마리아 지방으로 추방하여 그곳에 살도록 하였다(스 4:9).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자 엘람은 메대와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였고(사 21:2), 그 후에는 바사(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엘람은 멸망했으나 엘람의 수도였던 수산은 바사 제국의 수도가 되어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었다(에 1:2).

당시 엘람 지역은 현재 이란 남서부의 고원지대 쿠지스탄 지방이다.

 

(2) 앗수르: אשׁור (Asshur) - <뜻> "번성한 곳"

 

 

 

 

셈의 둘째 아들인 앗수르는 '번영하다, 기쁘다'에서 유래되어 "선성한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의미대로 앗수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진 정책을 추진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고대의 초강국을 건설하였다. 앗수르의 세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기원 전 9세기~7세기로 수도는 '앗수르'였으며, 산헤립 시대(주전 705/704-681년)에는 수도가 '니느웨'였다.

 

앗수르 족속은 니므롯에게 정복 당한 이후 셈의 신앙을 계승하지 못하고 함의 자손과 마찬가지로 호전적인 민족으로 선민을 괴롭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창10:11에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함의 손자 니므롯으로(창10:6-8), 그가 셈 족의 앗수르 나라를 정복한 것을 보여준다.

당시 니므롯은 세상의 처음 용사였고(창10:8), 여호와 앞에서(대항하여) 용감한 사냥꾼(창10:9)으로, 큰 성을 네개나 건설할 만큼 막강한 통치력을 가진 영웅이었다. 그는 '반역자'라는 이름의 뜻대로 노아로 부터 이어진 하나님 신앙을 배반하고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단 편에 선 자였다.

 

선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호세아 왕 때에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 왕에 의해 멸망 당하였다(주전722년, 왕하 17:1-6, 18:9-12).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 사람들이 아예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와 선민과 섞여 살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빠른 속도로 타락해 갔다(왕하 17:27-33).

 

또한 북조 이스라엘을 삼켰던 앗수르는 남조 유다까지 함락시키기 위해 히스기야 왕 때에 산헤립 왕이 18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였다가 하나님이 치심으로 모두 송장이 되었던 적도 있다(황하18:13-19:37).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가리켜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고 하셨고(사10:5),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한 앗수르는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사 10:12-16, 14:24-25).

 

이처럼 앗수르는 본래 셈 족이었으나 니므롯 일당과 섞여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갔고 어느새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 민족이 되어신앙에서 아주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노선이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중심으로 이어져 간 것은 우연이 아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2. 신앙의 영역을 확보하고 진실을 지켜낸 아르박삿

 

아르박삿은 셈이 100세, 즉 홍수 후 2년째 되던 해에 낳은 아들이다(창11:10).

셈은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을 직접 목도하고, 그 가운데 구원 받은 여덟 명 중 한 사람으로 아버지 노아로부터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전수받은 믿음의 사람으로, 아버지 노아의 벌거벗은 수치를 덮어주는 신중하고 겸손한 인물이었다.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아버지 노아의 축복을 받은 셈은 셋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아르박삿이라고 지었다. 아르박삿의 '영역'이란 뜻 속에는 아들을 통해 믿음의 영역, 곧 구속사적 발판이 마련되기를 바라는 셈의 간절한 기대가 스며 있음알 알 수 있다. 이러한 셈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믿음의 아들 아르박삿과 그의 후손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메시아 족보의 구속사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천하를 장악한 사냥꾼 니므롯이 홍수 이후에 기록된 모든 점토판들을 폐기하고 가나안이 지어낸 거짓 이야기들을 보급하고 있을 때 그 혼란의 광풍 속에서 인류사의 진실을 간직해온 족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셈 집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의 가문이었다. 그들은 니므롯의 난폭한 파괴와 가나안의 번뜩이는 정보망 속에서 오직 그 진실의 기록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왔고, 모세 때에 이르러서 그 구전의 기록들은 문서로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손에까지 들어온 '창세기'이다. 성경 외에 인류가 물려받은 모든 역사적 기록들은 그 대부분이 엄청난 거짓말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가 수십만, 수백만년이 되었다는 엉터리 가설에서 부터 인류가 처음부터 육식을 했으며 나중에 채식을 했다는 거짓말과 원시적인 무속이 진화하여 유대교와 같은 종교가 나타났다는 악의적인 날조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기억을 없애버리기 위한 온갖 패역적인 음모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안뜻 보기에 논리적인 듯하고 그럴싸해 보이는 역사적인 기록들은 조금만 정신 차려서 들여다보면 금방 그 속에 뒤섞여 있는 모순과 불합리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서양사도 동양사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아니 사실은 이러한 논리적 모순들을 인위적으로 감추기 위해서 역사학자들이 일부러 서양사와 동양사를 갈라놓았다. 그러므로 이 두 개의 역사를 독립해 보면 그 사이에 가려진 비밀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아르박삿의 가문에서 인류사의 진실을 지켜내었기 때문에 거짓의 역사로 인류를 속이려 했던 사탄의 계획은 완전범죄가 되지 못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사단이 구속의 역사를 방해하고 가로막으려 해도 사단은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구별하여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우리가 속해 있는 민족과 지역과 교회와 가정,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제일 주의의 믿음의 영역을 굳건히 하기 위해 기도하며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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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손자요, 셈의 아들인

아르박삿 (창11:10)

그 이름은 영역(領域)-

곧 갈대아인의 땅-이라는 뜻이라.

 

아르박삿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 이후

그의 아비 셈이

메사와 스발 동편 땅에 머무를 때

그의 셋째아들로 태어났으나 창10:22

그의 형들이 홍수나기 전에 죽었으므로

그 가계(家系)를 잇는 자 되었더라.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노아의 증손자요, 그의 아들인

셀라를 낳았으며 (창11:12_

육십 오세에

그의 손자요, 셀라의 아들인

에벨을 보았으며 (창11:14)

구십 구세에

그의 증손자요, 에벨의 아들인

벨렉을 보았으며 (창11:16)

벨렉이 태어나던 해

세상이 나뉘는 기이한 일을 (창10:25)

그의 조부 노아와 함께 눈으로 보았더라.

 

아르박삿은

시날 평지에 있을 때 (창11:2)

사람들이 바벨탑 쌓는 광경을 보았으며 (창11:3-4)

하나님께서 민족을 흩으시므로 (창11:8-9)

그 조부 노아와 함께

동방 메소포타미아로 이주(移住)하여

거기 정착하였더라.

 

또 아르박삿은

백 이십 구세에

그의 4대손이요, 벨렉의 아들인

르우를 보았으며 (창11:18)

백 육십 일세에

그의 5대손이요, 르우의 아들인

스룩을 보았으며 (창11:20)

백 구십 일세에

그의 6대손이요, 스룩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조부인

나홀을 보았으며 (창11:22)

이백 이십세에

그의 7대손이요, 나홀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비인

데라를 보았으며 (창11:24)

이백 구십세에

그의 8대손이요, 데라의 아들인

아브라함을 보았더라. (창11:26)

 

또 아르박삿은

삼백 팔세에

그의 증손자 벨렉의 죽음을 보았으며 (창11:19)

삼백 십세에

그의 6대손이요, 아브라함의 조부인

나홀의 죽음을 보았으며 (창11:25)

삼백 삼십 육세에

그의 5대손 르우의 죽음을 보았으며 (창11:21)

삼백 오십세에

그의 조부 노아의 죽음을 보았더라. (창9:29)

 

또 아르박삿은

삼백 육십 일세에

그의 5대손 스룩의 죽음을 보았으며 (창11:23)

삼백 육십 이세에

그의 7대손 데라가 아브라함과 함께

그곳 갈대아 땅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더라.

 

또 아르박삿은

삼백 구십세에

그의 8대손 아브라함이

가나안땅 그랄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으나 (창21:3)

멀어서 소식을 듣지 못하였더라.

 

또 아르박삿은

사백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그의 부친 셈의 죽음을 보았으며 (창11:11)

아르박삿은 그로부터 3년 후인

사백 삼세에 죽었으니 (창11:13)

아브라함의 나이 백 십 삼세 때라.

 

성경의 기록대로 계산하면

아르박삿으로부터 예수까지는

오십 이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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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박삿의 인물도 구속사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아르박삿 (아르파케샤드 775) 약하다, 버리다

 

♣ 명제 : 아르박삿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 목적 : 구원받은 백성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죄를 담당했기에 가능하다.

 

창 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셈이 아르박삿을 낳았는데 중요한 것은 셈은 5명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중에서 아르박삿을 뽑아서 구속사의 반열에 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아들로 태어났지만 육적 계보로 흘러가는 자들이 있고 영적 계보에 오르는 아들이 있습니다.

창 10: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셈은 이렇게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르박삿만 선택받게 된 것입니다. 구속사의 계보에 들어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원을 얻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다른 형제는 뽑지 않고 왜 나를 뽑았냐고 투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엘람’은 엘람 5867) 엘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알람 5956) 숨기다, 깨닫지 못하다, 간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엘람은 셈의 장자입니다. 이름 속에 나오는 뜻처럼 이 사람은 마음이 간사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복음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람에게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숨기시고 가르쳐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육적계보 속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지 못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복음을 보여주셔야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아수르 804) 앗수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샤르 833) 번영하다, 똑바로 가다, 복을 받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셈의 아들 앗수르는 앗시리아 제국의 조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 사람은 앗수르 제국이 번창하고 외형적으로 복을 받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 앞으로 똑바로 가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요나서에 나오는 것처럼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진정 회개하지 못한 민족이었습니다. 또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침략하여 나라를 빼앗고 이스라엘 민족들과 이방민족들의 피가 섞이게 하는 혼혈 정책을 폈던 민족이 앗수르 민족입니다. 이런 자들도 하나님 앞에 선택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루드 3865) 다툼, 투쟁,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다투며 시기하며 투쟁하는 자들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영적 계보인 구속사의 반열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뽑지 않으시고 육적 계보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딤전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누구든지 다른 비 복음을 좋아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교만하여져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부패하여져서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진리를 따르는 척하는 자들이 다투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진리의 복음을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람’은 아람 758) 아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르몬 759) 높여지다, 요새, 왕궁, 이라는 뜻입니다.

 

아람이라는 인물은 이름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왕국을 세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인간을 높이는 교주처럼 높이는 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도 놋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도 영적계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 반열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르박삿’은 (아르파케샤드 775) 아르박삿,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라파 7503) 약하여지다, 늘어뜨리다, 버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르박삿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가장 약한 자로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자신의 몸이 죽어 축 늘어져 있었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분입니다.

 

마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소리를 질러 하나님께 외치고 있습니다. 그 외침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르박삿도 이렇게 버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르박삿의 삶은 약하여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셈의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아르박삿을 선택하셔서 구속사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르박삿보다 더 외모가 뛰어날지라도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미련하고 연약한 나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미련하고 천한 자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잘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르박삿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학벌을 보지 않으시고 명예와 지력과 재력을 보지 않으시고 나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아르박삿이 연약하여 주님만을 따라간 것처럼 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족보에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족보를 파헤쳐보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벨이라는 인물은 히브리인의 시조가 되면서 강을 건너온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옮겨주신 분입니다.

 

 

에벨 (에베르 5677) 저쪽 넘어 지역

 

♣ 명제 : 에벨은 강을 건너 자를 의미하듯이 아무 죄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 목적 : 구원받은 백성들은 죄를 넘어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다.

 

창 11: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셀라는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셀라가 아들을 낳았는데 에벨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에벨도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에벨은 430년을 살았는데 그의 아들 때부터는 수명이 반으로 죽어 들게 됩니다. 벨렉은 209년을 살게 됩니다. 여기에는 죄와 연관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의 수명이 줄어든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시 55:23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기자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되고 피를 흘리게 되며 속이는 자들은 인생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주를 의지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수명이 짧아지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벨과 벨렉 사이에 200년의 수명이 차이가 나는 것은 에벨은 죄악 된 세상에서 빠져나왔고 벨렉은 죄악 된 곳에서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벨렉 시대에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셈의 계보에 들어간 자들도 함께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벨’은 (에베르 5677) 에벨,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바르 5674) 건너다, 범죄 하다, 거역하다, 끌어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에벨이라는 인물은 메소포타미아의 유브라데 강을 건너온 사람입니다. 에벨은 죄악 된 도시에서 벗어나 강을 건너 범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곳으로부터 빠져나온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벨도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죄악 된 곳에서 죄지은 자들을 끌어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는데 동참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국을 만든 사람이 바로 에벨입니다. 에벨은 지금의 ‘알레포’ 라는 지역에 에블라 왕국을 만들어 죄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만의 나라를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인물입니다. 에블라 왕국의 조상입니다. 에벨과 히브리 사람의 아브라함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창 14: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여기에서 보면 아브람은 히브리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브람은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 (이브리 5680) 히브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바르 5674)에서 유래되었으며 에벨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강을 건너온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강은 건너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땅으로 온 사람입니다. 죄악 된 장소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강을 건너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으로 온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에벨이 죄악 된 장소에서 강을 건너온 자로서 죄와 분리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 27: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손에 넘겨지시고 빌라도의 재판 석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그의 부인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는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꿈에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은 사람에게’는 δικαιο?(디카이오스 1342) 의로운, 무죄한, 공의로운, 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죄가 있다고 넘겨주었지만 예수님의 죄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무죄한 분이며 모든 일을 공의롭게 처리하시고 의로운 자라는 것을 이방인인 빌라도의 아내가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무죄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치며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에벨이 죄악 된 곳에서 강을 건너온 자처럼 예수님께서도 모든 죄에서 상관없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 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빌라도는 법정에서 선포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 죄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인 너희들에게 알게 하려고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를 빌라도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아무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죄악 된 몸이 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모든 죄를 끊어주셨으니 이제는 에벨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악의 자리에 가지 말고 서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시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잘라버리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벨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에벨과 같이 죄악이 있는 곳에서 강을 건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추악하고 더러운 바벨탑을 쌓는 곳에서 빨리 빠져나와 에벨과 같은 자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주님의 은혜에 영광을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 인물들이 족보에 기록된 것은 그냥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인물들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름에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름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자녀 이름을 지을 때 함부로 짓지 않습니다. 심사숙고하여 이름을 짓게 됩니다. 앞날의 미래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자녀가 평생 써야 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벨렉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벨렉은 선과 악을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성경에 나와있는 인물들을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유심히 읽고 연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벨렉 (펠레그 6389) 나눔

 

♣ 명제 : 벨렉은 선과 악을 나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이다.

♣ 목적 :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나뉘어져 의로운 자가 되었다.

 

창11: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에벨은 강을 건너 죄악 된 곳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을 섬기는 왕국을 만든 사람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에벨이 아들을 낳았는데 벨렉을 낳았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이 끝이 나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로 노아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셈 계통의 아들들이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육적인 계보의 아들들도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내려오는데 세상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가 벨렉 때에 와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벨렉의 이름 속에 나누겠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벨렉’은 (펠레그 6389) 벨렉,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팔라그 6385) 쪼개다, 나누다, 구분되다, 분할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에벨은 이미 강을 건너 알레포 지역으로 넘어가 에블라 왕국을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아직 죄악 된 장소에 남아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세상의 아들들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셈의 계통의 사람들도 동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창10: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는 벨렉이고 또 하나는 욕단입니다. 벨렉을 낳고 나서 세상이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 성도들과 세상의 사람들이 나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벨렉의 이름 속에 쪼개고 나눈다는 의미가 있듯이 벨렉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과 의인들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시고 나누어 분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벨렉을 통하여 바벨탑을 쌓는 자들과 이곳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11: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벨렉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언어가 하나이므로 서로 말이 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는데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께 반역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모여서 성과 탑을 쌓았는데 하나님께 배반하기 위해서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세상의 믿지 않는 백성들은 다시 물로 심판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을 인간의 힘으로 높이 쌓아서 하나님이 물로 심판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성 위로 올라가면 심판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이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시고 나누어 버리신 것입니다.

 

‘바벨’은 바벨 894) 바벨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발랄 1101) 혼잡하게 하다, 섞이다, 혼합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을 모두 혼잡하게 하시고 거짓된 것으로 섞인 것들을 나누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시는 것이 벨렉 때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벨렉은 이 세상의 거짓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며 배반하는 자들에게서 분리하시고 구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해 주는 인물입니다.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귈 수 있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죄악의 자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에서 의인으로 구분하여 주셨습니다.

 

살전5: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주님께서는 나를 빛의 아들로 구분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낮의 아들로 살게 하시고 어둠에 속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벨렉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구분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악의 자리에 가서는 안 됩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구분되었으니 벨렉의 삶처럼 세상으로부터 구분되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에서 벨렉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빨리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바벨탑을 쌓는데 자신의 지식을 쌓고 능력을 쌓아서 하나님이 없다고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과 악을 가르셔서 빛 가운데로 나를 인도하여 주셨으니 이제는 주님만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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