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 교회의 문제, 그 해결의 열쇠
배경.
저자: 사도바울
기록연대: AD 55년경 (바울의 3차 선교여행시 에베소에 체류하는 중)
고린도.
고대 코린토스 (Ancient Korinthos)
<그림1>
그리스 중남부의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위치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스파르타 다음으로 강대한 폴리스였음.
BC700년경 세워진 도시 (Commercial centre를 목적으로 세워짐)
BC146년 로마장군 뭄미우스 (Lucius Mummius)에 의해 파괴됨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코린토스에서 그리스의 아카이아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이 때부터 로마의 속주가 됨)
약 100년후인 BC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됨. (참고, BC44년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던 해임)
이후 AD521년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기 시작,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됨.
태양신을 숭배하는 아폴로신전, 옥타비아 신전, 오데온 대극장, 페이레네 샘과 글리우케 샘, 상가, 그리고 사도바울이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해 재판을 받던 자리인 비마 (Bema) 터 등이 남아있다.
<그림2. 아폴로신전>
아폴로 신전 터 - 도리아양식 기둥
<그림3. 옥타비아신전>
옥타비아 신전 터 - 코린트양식 기둥
<그림4. 오데온>
오데온 극장 터
<그림5. 비마>
비마 (Bema)
시시포스 (Sisyphus)
<그림6.시시포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 코린토스를 건설한 왕.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시프스의 신화"로 많이 알려진 내용.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짐.
시시포스는 꾀가 많은 것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욕심이 많고 속이기를 좋아했다. 여객과 방랑자를 살해하기도 했다.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그를 데리러 오자 오히려 타나토스를 잡아 족쇄를 채워 한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다. 결국 전쟁의 신 아레스가 와서 타나토스를 구출하고 시시포스를 데려갔다.
하지만 시시포스는 죽기 전 꾀를 내어 아내에게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아내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이승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코린토스에 가서는 저승에 돌아오기를 거부해, 나중에 헤르메스가 억지로 돌려보냈다.
그는 저승에서 벌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했다.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밀어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오디세이아, xi. 593-600). 그가 이 벌을 받은 정확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혹자는 그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알린 벌이라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여행하는 이들을 살해한 벌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
<그림7. 그리스 기둥의 건축양식>
코린트양식: 기둥이 가늘고 기둥 머리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기둥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조각하였고 화려하게 보인다. 아테네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과 코린토스의 옥타비아 신전 기둥에 남아있다.
도리아양식: 도리아 (도리스)인들이 창안한 고대 그리스의 건축양식. 기둥이 굵고 간결하며 장중해서 남성미가 느껴진다. 아테네의 파르테논신전과 코린토스의 아폴론 신전이 대표적이다.
이오니아양식: 아나톨리아 서쪽에 살던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인들이 만든 양식. BC6세기부터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곳곳에 사용되었다. 도리아식에 비해 기둥이 높고 가는 편이며 우아함이 느껴진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에렉테이온 신전이 대표적이다.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일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정벌한 후, 코린토스에 머물 때, 당시 코린토스에는 유명한 괴짜 철학자가 있었다. 당시 모든 사회인사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찾아와 인사를 했는데, 이 괴짜 철학자는 찾아오지를 않았다. 이에 호기심많은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이 철학자를 찾아갔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일화.
<그림8.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양지 바른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오."
"저는 디오게네스, 개 입니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를 '개'라고 지칭함, 후에 견유학파라고 불림)
"짐이 두렵지 않소?"
"대왕께서는 선한 자 입니까?"
"그렇소."
"그렇다면 뭣 때문에 선한 자를 두려워 하겠습니까?"
이에 알렉산드로스가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라고 하니, 디오게네스는 "햇빛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대답했다. 무례한 저 자를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부하들이 나서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퇴폐한 도시국가 코린토스 - 이에 대한 고린도전서의 이야기
바울당시이 코린토스는 (AD 50년대 초) 헬레니즘 문화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고, 화려한 대도시였다. 그리고 이 지역을 지배한 사상은 에피큐로스 학파의 사상들, 즉 쾌락주의였다. 인간에게 쾌락을 보장할 때만 그것이 진리라는 사상이 이 지역, 그리스전역을 지배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일했다. 철학도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인생의 깊은 곳을 성찰하기 보다는 언어의 유희, 사변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 했던 시대다. 그래서 이때의 철학자들을 소피스트 (말쟁이, 괴변가들)이라 불렸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상에 반해서 계속 인생의 참의미를 찾기 위해 주장하다 독배를 마시게 된다. 바울역시 늘 이 사상과 치열하게 싸웠다.
코린토스인들의 생활은 지극히 문란했다. 넘치는 풍요 덕분이었다. 심지어 'korinthiazesthai'(코린토스인들처럼 산다)는 동사가 만들어졌다. 헬라사회에서 ‘술에 취하여 방탕하게 산다’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단어가 여성에게 사용될 때는 창녀(hateirein)를, 남성에게 사용될 때는 포주(mastropeuein)를 의미하기까지 했다. 당시 코린토스는 인간의 생명을 소모품처럼 여겨 낙태, 영아유기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살육하는 경기도 즐기기도 했다.
특히 아프로디테 신전 (로마에서는 비너스 신전)에는 1,000여명이 넘는 여사제가 있었다. 아프로디테 신전에서의 예배란 신전 창년들인 그 미녀 사제들과 함께 진탕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코린토스는 그리스의 가장 큰 항구였기 때문에 항상 선원들이 들끓었고, 아프로디테 신전은 늘 예배자들로 넘쳐났다. 심지어 고린도교회 신자들조차도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프로디테 신전에 들려 여사제외 쾌락을 즐기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년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고전 6:15-16)"
여기서 16절에 나오는 '창녀'란 바로 옥타비아 신전의 여사제를 가리킨다.
그런데 쾌락주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정의를 세우고 인권을 옹호하고, 엄정하게 시비를 가려야할 법정에까지 만연했다. 당시의 재판은 아고라 (광장)라는데서 행해졌는데 다툼을 벌이는 양측이 각각 변호사를 한 사람씩 선임하고, 방청객 중에서 배심원을 선정했다. 기록에 의하면 20명, 40명, 100명, 어떤 경우는 최대 6000명까지도 동원했다고 하는 예가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방청객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서로 열띤 응원전을 벌였는데, 그것 더 이상 재판이 아니라 무슨 게임과도 같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재판장은 방청객들이 더 환호하고 열광하는 쪽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문화 속으로 바울이 기독교를 들고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가 분열되었고 서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내용이 고린도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코린토스 지역의 재판은 더이상 온전한 재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곳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며 다투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면 세상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리를 가르기 보다는 교회가 서로 분열하고 다투는 것 자체에 흥미를 느꼈을 것이고, 하나의 게임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쓰인 것이 바로 고린도 전서의 6장 1절-8절 내용이다.
코린토스 운하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 이오니아 해의 코린토스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이어주고 있다. 길이 6.3Km, 폭 21.3M, 깊이 8M의 비교적 소규모 운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돌아가는 것에 비해 이오니아 해에서 에게 해까지 약 700Km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그만큼 소요시간도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
이 운하의 건설을 처음 시도한 것은 네로 황제. 유대인 포로들을 이용해 약 700M 구간을 10-30M깊이로 굴착했다. 하지만 네로황제가 죽게되면서 이 공사는 중단되었다.
현재이 코린토스 운하는 1893년 7월에 완공되었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자 그리스 정부가 이 운하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게 된 것. 프랑스 사업가로부터 투자를 받아 진행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의 파나마 운하가 실패로 끝나고 주관하던 회사가 파산하면서 이 사업역시 중단. 1882년 다시 공사가 재게되어 11년만에 완공이 된 것. 그러나 폭이 너무 좁아 대형손박이 드나들 수가 없고, 6-70M에 달하는 깊은 계곡처럼 만들어졌기에 운하사이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코린토스 만과 사로니코스만의 조수간만의 시간차로 인해 운하의 유속이 빨라 선주들이 운하 이용을 꺼렸다.
고대 그리스의 주요 상업도시중 한 곳, 특히 우상숭배가 팽배했고,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으며, 철학적으로는 언어의 미학, 언어의 유희라고 멋지게 표현하겠지만, 사실상 '말장난 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소피스트'이 주로 활동하던 곳.
특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시기이며 고린도전서가 쓰일 때인 AD 50년대 초반무렵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당시 고린도교회를 세웠다) 은 헬레니즘 문화가 절정을 이룰 때였다. 바울은 AD 49년무렵 혹은 AD 50년 경, 2차 선교여행중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2년여간 체류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때 사도바울의 평생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다.
헬레니즘 문화의 절정기를 한마디로 표현한다고 하면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는 이와같은 쾌락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을 염두에 두고 쓰인 글임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당시만 해도 쾌락주의에 반하는 사회적 운동도 일어나고 있었다. 소위 스토아학파로 불리는 사상가들로 형성된 금욕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또한 고린도서를 비롯 바울의 철학에서 드러나듯 기독교는 금욕주의만도 절대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볼로.
특히 고린도전서 1장에 등장하는 아볼로는, 사실 우리에게 그리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아볼로가 곳곳에 등장한다. 사도행전 18장-19장에 몇번 등장하였다. 그리고 디도서에도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아볼로는 고린도교회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되어 고린도교회 파벌중 하나의 계파가 된다. "아볼로파, 사도바울파,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성경공부를 한 후,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 고린도교회에 가서 목회를 했던 인물이다.
고린도서의 성경에서의 시대적 위치.
고린도전서에 대한 대략적인 학습을 하기 전 참고하기 좋게 신약전서들의 연대적 순서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본서를 비롯 신약성서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바울서신들의 연대적 순서를 확인하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주된 내용.
고린도교회에 있어 그리스도인 윤리의 문제들을 단락별로 연결되어져 있다. 고린도전서는 그리스도인 신앙 인격의 거룩성이 계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사회가 그랬듯이 많은 것을 가진 교회였다. 모든 면에서 부유했다. 그런데 그 풍성함이 오히려 고린도교회의 올무가 되어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를 생각한다면 "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가르침은 "교회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의 모습에는 본질과 현실이 너무도 다른 때가 많다. 비단 교회뿐 아니라 신앙인인 우리 각자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각자 각자가 또한 일개의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 내용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을 닮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세상을 닮아 있을 때가 더 많다.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우리 신앙인들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따를 때가 많이 있다. 아마도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교회의 과제일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바로 이런 내용을 바울의 철학과 신학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이다.
교회는 본질에 있어서 완전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순결해야 하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세상보다 훨씬 더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세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들.
경제적 부요함의 고린도교회는 무엇보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사람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 즉 윤리적 문제들을 다 가진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교회내 파벌이 있었다. 사실 오늘날도 이것은 항상 문제가 되고 있다. 또한 교회내 부자와 가난한 자와의 갈등이 있었다. 계급간 불화 - 이것 역시 인류 역사에 있어 늘 있어오는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은사의 문제도 있었다. 각각의 은사는 서로 협력할 때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하지만 서로 우위에 서려는 경쟁이 될 때 문제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은사란 다른 은사와 협력하지 못하면 차라리 없는 것이 많다고 강조한다. 세대간 갈등도 있었다. 경험세대 (예수님을 경험했던 세대)와 비경험 세대간 갈등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모든 문제는 '하나의 문제'라고 말한다. 바로 '사랑의 문제'라고 말한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고, 소유하고 있는 바를 아름답게 사용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도 복이 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런 것을 정확히 이해시키고자 고린도전서 13장, 한 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한다.
주제.
신학적으로, 문맥적으로, 혹은 신학자들이나 목사님들은 어떻게 표현하실 지 모르겠지만, 내가 스스로 고린도전서의 주제를 생각해 보았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참 사랑의 회복"이다.
고린도전서의 구성.
<출처: 로뎀나무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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