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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바울서신과 현대신학

by 은총가득 2021. 1. 14.

바울의 회심과 예루살렘 공회, 1차 전도여행을 배웠다. 1차 전도의 문제점으로 이방인 전도에 대한 주제가 제기되었고 이방인 전도를 어떻게 해야하나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을 해소하기위해 사도공회가 있었다. 사도공회에서 이방인 전도 지침이 마련되었다.

 

유대인들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 우상에게 바쳐진 재물, 음행, 피채 먹는 것 목매어 죽은 것에 대해서 금하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수용했다.

큰 이슈가 되었던 절기나 할례 등 율법문제는 이방인들에게 적용하지 말자라고 결정이 내려졌다. 일단 이방인들이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자라는 바울과 바나바의 안디옥 교회의 지침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지침을 가지고 2,3차 전도여행을 계속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오늘은 2차 전도여행은 바울 사역의 끝과 메시지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겠다.

바울은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바울의 회심에서 선교까지 순교 로마에까지 대략적인 활동을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부족한 부분은 알다시피 바울이 서신을 쓰고 서신 가운데서 보여주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사도행전이 침묵을 많이 지키고 있다. 중요한 부분중 하나가 고린도 교회와의 갈등, 고린도 후서를 보면 격렬했다고 느낌이 오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언급되어있지 않다. 론지네커는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책을 쓰다보니 좀 부족하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을 더 살펴보면서 바울에 대해서 해석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갈라디아 교회와의 갈등문제, 이런 것들이 사도행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도행전 + 바울서신을 총 망라해야 바울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수 있다.

 

예수의 영과 성령을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삼위일체의 개념이 칼케돈 회의에서 5세기에 논의가 있었지만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의 영과 성령은 여기있는 것처럼 구분이 된다고 볼수 있다. 삼위일체에서 성령과 성자가 구분되는 것과 동일하다.

환상을 보면서 마게도냐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꿈을 꾼 것이 왜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게된 근거가 되었나? 과거에 환상을 통해서 깨달은 사례들은 많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간것도 환상이다. 우리가 만약에 바울이 이렇게 동쪽으로 갈려고 했는데 막았을때 갈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볼수 있다. 그렇다면 막는다는 개념은 무엇인가? 계획하고 진전하고자 했을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때에 기도해서 다른 계획을 세울수 있다. 이런 막힌 상황에서 기도해 보니 가야할 방향이 마게도냐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아서 따른 것이다.

 

성령과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학설이 있다. 그러나 엄격히 바울서신을 보면 성령을 확인해 보면 예수님의 영하고 성령하고는 삼위일체에서 성자 성령 성부에서 일체라는 측면이 있지만 또한 삼위라는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시고 난 뒤에 또다른 보혜사를 보낸다고 하셨다. 그래서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것이 낫다.

문화와 종교 충돌부분은 바울이 상당히 일률적으로 충돌위주로 나간 것도 아니고 그 상황에 맞게 따라서 행동했다. 선교방식의 다양성을 적용했다. 주로 아덴설교이야기를 들어보면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나가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우상이 가득한 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우상을 때려부수라는 격분이 아니라 접근할때에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그것을 하나의 꼬투리를 잡아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접근방식이 그 쪽에서 아테네에서 스토아학파라든지, 에피쿠로스 학파라든지하는 철학적 대담을 통해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결실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후에 전도방식을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한 경우가 많다. 에베소 등이 있을수 있다. 아데미우스 신전에서의 사건등으로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바울의 선교원리가 바울자신이 쓴 편지에 들어가 있다. 바울의 선교원리가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 어디냐 하면 고린도 전서 9장에 보면 된다. 선교의 유연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 없는 사람에게 가서는 율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라고 표현하고 있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영혼을 얻는 것이기에 때에 맞게 사용했다. 때로는 그것이 핍박을 많이 불러왔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을 부를때에 바울에게 적용한 말씀이 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서 핍박을 많이 받을 그릇이다라고 정해졌다.

 

우리나라 초기선교사들 사이에도 전도를 위주로 했던 사람들과 의료나 교육을 위주로 했던 사람들과 분란이 좀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만을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두 개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고린도후서 10-13장사이가 눈물의 편지가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고린도 후서는 최소한 2-3개의 편지가 합쳐졌다고 보고 있다. 이 편지가 바로 2장에서 말하는 편지가 아닌가 추정한다. 고린도 교인과 바울간의 교신은 사실 거기서 말하는 것 외에도 편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고린도 교인과 바울간의 교신이 복잡하게 이루어져 오고 있다.

바울서신이라고 해서 바울이 다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집과정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바울의 메시지

예수님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구절은 마태복음 10장에 있다. 이 원리가 당시 이방인 선교든지 국내선교든지 근본적인 지침은 확실하다. 그러나 유동성은 있다. 10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서 단기선교를 보냈다. 제자훈련차원이다. 본격적인 선교는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실시된 것이다. 예수님이 보내신 것은 훈련용이다. 갔다가 왔다. 거기 나와 있는 것이 절대적인 부분으로 적용하기는 비약적이다. 더 큰 예는 바울이 예수님은 자비량을 하지 말고 가서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자비량을 했다. 이게 독특한 혁명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실제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바울이 고전 9장에 나오는데 심지어는 베드로는 누구까지 데리고 다녔나? 자기 와이프까지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바울같은 경우는 결혼도 안했다. 자기가 벌어서 했다고 보면 바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베드로는 받고 다니면서 나와 바나바는 자비량해야하나?!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단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성급하게 접근하면 낭패를 본 경우가 있다. 일단 그 부분이 왜냐하면 이단을 정죄할 때 여러 요건이 있다. 교리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교권적인 측면이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있다. 그러므로 교리적, 윤리적인 측면 교권적 측면에 대해 종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구분들을 위해 교단별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 판단기준을 정해놓아야 한다. 그리고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이신칭의와 성화론이다.

바울의 기독론, 종말론, 교회론, 윤리관을 종합해서 소개했다. 바울신학 요약한뒤에 과연 이런 신학적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교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나? 적용가능한 부분은 무엇인가? 바울 신학의 현실적 적용부분에 대해서 지난 시간 요약했다.

 

지난시간과 연속적으로 하는 문제는 개론적으로 론지네커가 소개했던 각종 신학적인 부분을 본문을 연구함을 통해서 심도깊게 짚어보고자 한다. 주로 바울서신에서 중요한 서신으로 텍스트로 등장하는 것이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이다. 다른 것들도 신학적인 메시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종합적으로 메시지(신학)를 이야기한다 하면 로마서 고린도 전서 갈라디아서를 꼽을수 있다.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를 구체적 텍스트를 잡아서 토의하도록 한다. 이부분은 바울 서신에 대한 석의와 해석(주석)하면서 바울의 신학적 메시지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형성되었나를 발견하고자 한다. 토의시간에는 텍스트를 공부하고 난뒤에 현실에 적용해서 어떤 의미가 있나를 구체적으로 토론해 봤으면 좋겠다.

 

오늘은 로마서 1-4장까지이다.

로마서 이신칭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본다. 칼빈은 믿음과 행함을 조화시킬려고 이해할려고 노력했었다. 처음에 종교개혁의 기치로 이신칭의의 기치를 걸었을때 이신칭의가 로마서와 복음이라는 내용을 너무 축소시켜서 그것을 요약해서 이야기하는 비판이 있었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하고 대치되거나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보면 된다.

 

바울의 분명한 생각은 믿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율법을 세운다는 것이다.(2:13,3:31) 연속적인 입장에서는 믿음이 율법을 세운다. 믿음이 율법의 진수를 결국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율법보다도 더 큰 바운드리를 가지고 있다. 대체로 로마서 해석에서 어려운 점들이 도출되는데 여기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자.

바울이 로마서를 전개해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한구절이나 단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1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지만 2장에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상반되는 것 아니냐 이야기할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 전체를 논리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새로운 진리를 로마서를 통해서 풀어나간다고 본다. 그 방식이 무엇이냐 하면 1:17절에서 믿음으로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풀어나가는 방법은 이제까지 방법은 사람들 전체의 카테고리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라고 할때에 바울은 전 인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보면 된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두가지를 논하면 모든 인간의 이야기를 다 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방인의 특색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수 있다. 신들은 잡신들도 많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할수 있다. 아는 자에게 생긴 문제가 1장에서 모르는 자에게 생긴 문제를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이 일반계시(자연계시)이다. 자연이 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됩니까? 자연은 창조주의 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가 자연을 만들때 창조주의 디자인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서양의 역사를 보면 처음에는 과학자들이 성직자들이 많았다. 성직자들은 자연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알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과 자연을 연구하는 방법이 있다. 성경의 계시는 특별계시이다. 유대인들이 왜 자신의 민족과 다른 이방인들과 엄격하게 구분하느냐하면 이방인은 자연을 통해서 아는 하나님밖에 알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닝믈 아는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진 프라이버시이다. 이것을 1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이 1장에서 일반계시와 양심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방인들도 어렴풋하게나마 하나님을 알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방인들이 그런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각종 범죄에 빠졌다. 이방인의 가장 심각한 범죄는 창조주를 몰라서 피조물을 창조주와 같이 섬기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심각한 범죄는 피조세계를 창조주와 같이 숭배하는 것이다.(가장 심각한 이방인들의 범죄)

피조물 가운데 모든 종교 교주가 다 포함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리는 절대자를 창조주를 섬겨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피조물을 섬기니까? 절대범죄가 되는 것이다.

피조물을 창조주로 섬기니까 생기는 문제는 그 피조물이 섬기는 사람들 원하는대로 피조물(신)을 조정할수 있게 된 것이다. 우상은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대로 절대주를 창조주를 경배할 사람을 마음대로 조정하니까? 나중에는 인간중심이 되는 것이다. 모든 윤리와 위계질서가 깨지니까? 인간이 각종 범죄에 빠지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원화된 세계에서 우리 문제가 뭐냐 바울이 진단하기는 이방인의 문제와 오늘 우리와 관련된 것이 무엇이 있겠나?

그런 후에 2장에서 다루는 것이 율법문제이다. 하나님이 이방인들과 구분해서 율법을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주셨다. 2장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라는 것이다. 율법은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해야 한다. 만약에 그것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 유대인들에게도 문제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3장에서 가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기를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그리고 이 죄인들을 구원하기위한 새로운 방식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다.

 

1-2장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진단하고 모든 인간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가? 진단하고 나서 결론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구원의 공통분모로서 율법도 아니고 자연계시도 아니고 특별계시도 아닌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구원론이다.

 

3-4장은 1-2장과 연결해서 하나의 결론이라고 볼수 있다.

이신칭의, 이신득의, 의인, 칭의, 전가된 의는 다같은 말이다.

칭함을 받는다,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고 의롭다하고의 차이는 무엇인가? 누구를 통해서 누구 때문에 의롭게 된다. 실제로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자격이 없지만 보증을 통해서 남의 판결을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이 내용이 바울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으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래서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원래는 의로운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서 의가 전가된 것이다. 내가 벌어서 넣은 것이 아니라 예수안에 있는 통장의 금액이 내 통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게 된다.

 

문)루터는 바울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으로 한정시켰다. 이유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구원의 차원이라는 것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회심하게 된 개인적인 경험이 극히 개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서양사람들의 구원론은 루터의 경험 때문에 구원을 어떻게 보냐면 끊임없이 내 개인적인 내면적인 죄와의 투쟁과 갈등으로 본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 된 이유도 어떻게 불의한 인간이 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구원받을수 있느냐 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가 컸다. 이것을 극복하기위해 루터는 로마에서 갖가지 수행을 그는 했다. 당시 중세교회는 행함, 미사, 성사를 행하고 종교적으로 금욕과 극기를 통해서 죄를 극복할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런데 루터는 경험을 해보아도 자기속의 죄의식을 극복할수 없었다는 것이다. 루터가 죄의식을 극복하게 된 동기가 바로 로마서를 공부하면서이다. 결국 이런 극행이나 훈련이나 영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1:26-27절의 구절이 루터에게는 획기적인 내용이 된 것이다.

 

루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이 한 개인의 구원에 포커스가 많이 맞추어져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말하는 구원과 차이가 있다고 최근에 많이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보다 전체인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유대인, 이방인) 유대인 이방인 카테고리 속에서 저들이 전체적으로 믿음 구원에 이르게 될수 있나를 다루었지만 루터는 개인적인 미시적인 관계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바울은 받은 사명이 뭐냐? 이방인 선교사다.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의 대열에 들어갈수 있나? 유대인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만 이방인이 구원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신칭의도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이 있다. 미시적인 측면은 우리속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고 거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나?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루터교나 개신교가 극복해야할 구원에 대한 개념은 개인주의로만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전체적인 큰 흐름속에서 이방인을 구원하는 개념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지금의 구원관이 일개 한 개인의 죄의식을 극복하고 구원받을수 있는가?에 너무 집착해 있지 않나하는 것이다.

문)율법이 왜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나? 율법이 왜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나? 갈라디아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왜 율법을 줄 필요가 있느냐? 왜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이유가 뭐냐?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질문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율법자체가 완전한 것은 아니되 일정한 시기까지 율법이 한정된 역할을 감당한다고 본다. 결국 율법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있기 때문에 구원의 고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나 유대인들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깨달은 자들도 다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만약에 사실 예수님을 믿고 그들이 회개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면 기독교내에서 탁월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지금 엄청난 기독교인데 바울시대의 핵심세력들인 유대인들이 그대로 기독교에 남아있었다면 기독교 핵심은 유대인이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 밥그릇을 못찾아먹고 있는 안타까운 꼴이다.

 

문)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 구원에 대해서 전가되어 이전되어진 구원이다. 우리 스스로의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전가시키는 통로가 바로 믿음이다. 구속의 핵심적인 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졌는데 이 구원을 믿을때에 그것이 믿을때에 그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다. 어째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그 믿음대로 믿을때에 그 구원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이냐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로마서 4장에서 이야기한다. 믿음이 뭐냐? 이 질문에 대비해서 바울이 기록한 것이 로마서 4장이다. 그 믿음의 본이 아브라함이다.

 

 

구원론의 원리를 1-4장까지 설명을 하고 오늘부터는 구원받은 후의 구원받은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성화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가 어떤 은혜를 얻을수 있나(성화)를 5-8장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남에게 즐거워하라고 말할 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기뻐하라고 말한 것을 보면 분명히 비결이 있다.

 

성화는 sanctification 이다. participation(참여)이다. 참여/또는 성화는 oldage(구세대)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를 이해하기위해서 그 당시의 사고의 체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구시대에서는 어둠의 세력 3총사는 죄와 사망, 율법이다. 바울의 논리를 정확하게 따라가기위해서는 구도를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을 구시대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열렸다. 구세대는 구세대를 지배하는 3개의 세계가 있었다. 죄의 세계, 사망의 세계, 율법의 세계였다. 이 아래 사는 사람들을 지배했던 힘이었다. 요것이 서로 3총사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떻게 어둠의 세력이 연계해서 지배세력을 확장 유지하는가?

 

제일 처음이 율법이다. 율법이 사람에게 정죄 또는 고소를 하기 시작한다. ‘니가 이런 죄를 짓지 않았나?’ 율법이 정죄해서 죄를 불러온다. 죄의식을 가지게 한다. 죄의식을 느끼게 된 다음에 우리는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사망을 받아야 한다. 이런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권에서 우리가 구세대에서 살고 있다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러한 구세대로부터 해방이 됨으로서 새로운 세대가 열렸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대신에 은혜와 복음이 오게 된 것이다. 사망대신에 영생, 죄대신에 속죄함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건으로 인해 열어진 세계다.

 

그래서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둠의 3총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가 5장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이다. 사망의 심판에서 해방을 누리자. 죄에서 해방, 율법에서 해방되자는 것이 5-7장까지다.

구원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은혜가 죄와 사망과 율법으로부터 해방됨으로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환난중에도 기뻐할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세대로 들어가서 해방을 받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세계가 완전하게 속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왜곡당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고통을 당할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뻐하느냐 하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세대에 속하지 않고 새로운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환난과 고통이 이세상에 있어도 우리가 기뻐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환난과 고통이 끝이 없고 영원한 환난과 고통인데 반해 지금 새세대에서는 환난과 고통은 극복될 환난과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육신적, 정신적 고통이 있을지 몰라도 영적인 기쁨과 은혜를 누릴수 있지 않겠느냐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시대에 또다른 비유는 옛세대는 종의 신분이었지만 새세대는 자녀의 신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죄론을 누가 신학적으로 확립을 했나? 어거스틴이 원죄사상을 정교하게 체계화시켰는데... 여기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원죄가 태아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원죄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구약을 읽어보게 되면 두가지 사상이 병존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창세기의 사상을 가지고 원죄사상을 주장하지 않고 있다. 아담이 범죄했으면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는데 왜 자식의 이가 시냐? 아버지가 포도를 먹었으니 아버지 이가 신 것으로 끝나자. 정통 유대교에서는 원죄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5장에서 바울이 원래 의도했던 것은 아담의 현실과 그리스도의 현실을 대비시키고자 했다.

칭의를 입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했을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죄와 사망과 율법에서 해방된 새로운 존재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16절에서 보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성서신학자는 원죄사상을 가지고 조직신학처럼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와 사망 율법에서 종노릇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죄와 사망 율법이 지배했기 때문에 그 시대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도 죄와 사망과 율법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이다.

 

조금더 질문을 유추해 본다면 이것은 이사람들을 죄를 물려받았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죄에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예수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예수님의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때부터 소경된자가 부모의 죄냐 자기 자신의 죄냐? 질문한 것이 있다. 예수님은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 죄도 아니라고 이야기하셨다.

바울이 논리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스스로 질문을 해가면서 거기에 따른 답을 행하면서 5장에서 나열해 가고 있다. 그 중요한 질문 3가지가 있다.

 

첫째, 죄가 충만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질문으로 인해 그러면 어떤 질문이 있었나? 은혜를 더 받을려도 죄를 더 지어야 하나?

둘째,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어떻게 해서 죄와 사망과 연계가 되어버린 것인가? 어떻게 사탄이 준 율법이 아닌데... 어떻게 이것이 죄냐? 율법이 어찌 선한 것이 사망을 가져올수 있느냐? 율법은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한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어떻게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 죄와 사망을 불러오느냐 묻고 있다. 7장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율법은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기능도 있고 죄를 전개하는 기능도 있고 죄를 유발하는 기능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8장 성령장이다.

바울의 신학에서 이신칭의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요즘에서는 바울 신학에서 핵심되는 것이 성령론으로 돌아서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로마서 8장이 굉장히 중요한 장으로 부각되고 있다. 8장에서 특히 종전의 전통적인 성령에 대해서 이해하는 모습과는 다른 성령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다. 성령께서 탄식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고난에 참여하신다. 피조물의 고난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여러 가지 기능중에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약함에 대한 성령의 참여, 우리와 동행하시는 부분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성령론이 바울신학에서 부각되는 이유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바울이 던진 질문중 ‘너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항상 싸워왔던 율법의 행위냐 믿음이냐를 가지고 이신칭의에 대해서 이야기 많이 했는데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이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 일단 성령받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어디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느냐? 율법을 열심히 해서냐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다.

 

율법의 행위냐 믿음이냐의 질문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 성령을 받았느냐하는 전제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부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이 이제까지 조직신학에서 이신칭의라 했지만 이신칭의나 율법의 행위냐에 대한 것도 따지고 보면 성령을 받은 방편을 가지고 겉다리만 잡고 논란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8장에서 성령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1-4장에서 이신칭의, 5-8장에서는 해방을 이야기했다. 해방된 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성령안에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 해방된 것만 가지고는 죄와 사망과 율법의 해방만을 가지고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볼수 없고 온전한 새시대의 삶을 살기위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8장에서 성령으로 끝나는 것이 많이 나온다. 1-8장을 하나의 긴 단락으로 보는데 8장 마지막이 성령을 받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의 최종적인 판단이 바로 성령안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에 대한 좀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바울을 연구하면서 성령을 연구해 보는 것도 좋다.

 

칼빈도 성경을 읽는 사람중의 한 사람일뿐이다. 성경에서는 엄격하게 이중 예정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제자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이중 예정론은 예정론을 이야기하면서 오늘 성경본문을 볼때에 성경본문에서 예정론의 중요한 본문인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이야기했는데 이중 예정론에 대해서는 없다.

예정이 있기 전에 예지가 있다. 만약에 예지가 없이 예정을 하는 것하고 예지가 있고 예정을 하는 것하고 차이가 뭐냐? 예지가 없으면 하나님이 너무 독선적이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 8장을 읽어보면 예정론 전에 예지론을 먼저 언급하고 있다. 예지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다 아신다는 전제가 있은 후에 예정이라는 것이다.

9장부터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5-8장의 전체주제는 구원받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 성화를 이야기했다. 구원받은 사람의 주된 은혜가 심판으로부터 심판, 죄와 율법으로부터 해방, 성령안에서의 삶을 누리게 된다. 최종적으로 성령론을 이야기하고 8장에서 성령안에서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그 사랑에서 떼어놓을수 없다라고 1-8장을 종결을 짓고 있다.

8장에서 확신있게 이야기했는데 한순간 9장으로 넘어오면 로마서의 논조가 굉장히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8장에서의 확신이 9장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고뇌하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8장과 9장은 주제를 보게 되면 상당히 동떨어진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9장이 연결되어 있는데 구원의 확신을 이야기했을때 거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결국, 하나님안에서 선택을 받고 구원을 입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나하는 질문이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안에서 있었는데 지금 저들은 왜 저런 모습인가? 저들은 어떻게 되나? 저들은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까지 가버렸나? 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이런 측면에서 보면 주제가 상당히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나를 찾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문을 닫아놓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강권적 능력을 행사하기보다는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피조물의 기본적인 진리는 창조주가 계시고 피조물이 있다. 인간이나 피조세계를 살펴보게 되면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자유의지도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떨어져 나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10:3절이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자기 의를 추구했던 것이 문제다. 표면적으로 보면 율법을 지키는데 주된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위해서 율법을 행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본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 같은데 심층적인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자기의 의를 세울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그런 행위와 동기를 받아들이시겠는가? 하나님 자신의 원래 의를 주장하시겠는가? 원래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를 세울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계속 나타내는 콜링을 선지자를 통해서 보내셨고, 예수님의 경우도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다. 회개의 세례는 자기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데로 돌아서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것은 자기의를 주장할때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돌이키실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를 추구해서 자기의 의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실때에 하나님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약속된 소수에 대해 유효하다(바울자신을 위시해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11장은 결론적인 내용입니다.

구원사는 하나님의 예정적인 주권적인 구원의 히스토리가 있는데 그 구원의 히스토리는 바울이 계속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피조된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충분한 것들을 고려해 가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다. 바울의 사역하는 순서는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해서 이방인 사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다. 결국 바울이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사역을 하는 20-30년 기간동안 완강하게 메시지를 거부할때에 그때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이 완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수 있겠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한결같이 유대인들과 같이 계속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중에서 믿는 사람이 없었다면 거기서 기독교는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바울이 사역하고 체험하고 경험한 후에 계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런 로마서 말씀이고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는 측량할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깨달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거절한 메시지를 이방인들중에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받아들였을때에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바울이 예감을 한 것이다. 이방인들 중에서 메시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는 유대인 전체를 이야기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1세기 이야기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을 많이 보지만 2세기초부터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사라지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데살로니가에서부터 바울서신들에 다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게 역사적으로보면 유대인들에게 많이 받았다. 유대인들 일이 고리대금업이라는 좋지 않은 일을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9-11장의 내용이 이제까지 구원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거시적인 입장에서 로마서를 새롭게 읽어야하는데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경륜,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 내용이 예정론, 구원사의 텍스트이다.

이제까지 교회가 루터의 영향으로 인해 구원을 개인에 국한시켜서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거시적인 입장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즉 전 우주적인 맥락을 잊어버렸다. 미시적인 측면에서 한 개인의 영혼에 대한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여기서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이루어나가시는 경륜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결론 부분에 보면 특히 끝부분을 좋아하는 분이 있다. 칼빈이다. 지금도 어디서는 칼빈외에 이야기하면 좋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 11장까지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이 비록 성민으로 택함을 입었지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막을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국한시키지 않고 자신의 구원사역을 이방인을 통해서 이루어나가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신 유대인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바울의 비전이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1948년에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웠고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마 보수적인 진영에서는 유대인들이 세운 나라를 종말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사실 대단한 일이다. 2000년을 유랑하다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만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이 결코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위의 이야기를 1948년 이전에 했다면 믿기가 어렵지만 그러나 지금은 믿을수 있다. 이스라엘이 기원후 70년에 망해서 200년을 방황하다가 1948년에 나라가 생겼다. 하나님의 관심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게 되면 바울이 예언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언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나? 현재 형편으로 보면 정말 어렵다는 느낌을 받는다. 1978년에 이스라엘이 법을 만들었는데 기독교로 개종금지법을 만들었다. 위반을 하면 징역 5년, 실형 몇 년하고 정해버렸다. 이것을 보면 정말 바울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계시와 비전을 믿는 것은 11장 33절에 나온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가 이유이다.

 

12장에 보게되면 공동체가 어떤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1-8장까지를 중시했다. 그러나 진보적인 교단에서는 9-11장이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라 하고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12장부터는 등한시 되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시대에 이것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갑지 않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기독교인의 윤리수준이 너무 낮아졌다는 것이다. 기독교, 비기독교인이 윤리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사회에서 보고 있다. 12-16장까지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원수를 갚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직접 갚지 말라.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

이런 예수님의 증거로 인해 열심당은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예수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반발심리로 로마에 대항했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2000년이나 유리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 윤리의 핵심은 기독교가 오늘 이 구절을 통해서 반성해야하는 부분은 한국 기독교가 서구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서구의 신학이 깔려있어서 문제가 있다. 서구 신학은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적인 신학이 들어왔다. 콘스탄틴부터 마이너리티에서 지배계급으로 변화되면서 권력하고 결탁하는 상황으로 돌아가버려서 기독교가 원래 성경에서 제시했던 내용들을 많이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왕권에 대한 도전이자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구 기독교내지 서구 신학에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구 기독교의 눈은 상류계층에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런 시각은 조금은 바꾸어져야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정치경제문화사회 시련기에 기독교가 성장했고 그러한 암울한 때에 훨씬 하나님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시간내에 빨리 받아들인 사례가 없다.

13장은 논란이 많은 장이다. 이 장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당시 기독교가 마이너리티로서 소수집단으로서 쉽게 대사회적, 대국가적 관계에서 선교하기위해서는 가장 본질적인 선교와 신앙양심을 해치지 않는한 질서가 필요하고 국가의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이다.

같은 성경이라도 핍박이 심각해진 시기에는 거기서 알다시피 ‘그리스도를 예배할 것이냐 황제를 예배할 것이냐’ 하고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강조할때에는 국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 로마제국의 핍박이 적은시기여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능력한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실천하기 어려운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주어진 것은 아닌가? 이것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수 있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에서 말하는 사랑의 핵심을 깨달았다고 한다. 율법의 마침은 사랑이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새로운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자 그리스도인의 핵심적인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간주하고 연결해준다는 자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부모님과 자식간의 관계로 본다면 이웃간의 관계를 형제자매의 관계로 표현하면 사랑의 관계, 즉 율법의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내가 무엇을 해주고 해주고 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먼저는 사랑은 행위보다 기본적인 있어야 한다. 뒤에 따르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령으로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열리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성령도 지시하신다. 단순히 에너지가 아닌 인격체이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열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형제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형제의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사랑했다. 죄만 미워할뿐이다.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질책을 했지만 사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취하신 방식은 자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고통을 받는 쪽을 택하신 것이다. 가상칠언중에서 7마디 말씀을 하신 것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죄를 미워하는 것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고통적인 순간에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14장-16장

사랑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쉽지않은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 현실적으로 어렵다. 바울은 어떻게 할 것을 행위의 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나?

믿음이 강하면 쉽게 하기 쉬운 것이 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 시원찮은 이야기하면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판단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는 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진짜 판단자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함부로 판단, 비판하지 말라. 주님이 부르신 사람이기에 너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교회가 너무 종속적으로 되어 있어서 조직원리가 너무 강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바울이 위로를 주는 이야기가 있다. 12장 3절에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상당히 너그러운 잣대를 제시하고 있다. 고런 것도 하나의 원리이다. 생각해 보기에서 목회자들의 동역자들의 관계는 우리 교회가 좀더 노력해야할 부분이다. 오늘날 옛날과 달리 담임목사님들이 부목사님들을 너무 혹독하게 부려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부목사들이 여유가 있었는데 너무 각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 현실이 옛날과 차이가 나지만... 그러다보니 동역자들의 의식이 많이 약화되는 것이 부정적인 현실이다. 상하지시관계가 팽배해지고 있다. 큰 교회도 동역자 개념으로 잘하는데도 있다.

그런데 바울이 분명히 이야기하는 점은 로마서 16장에서 말하듯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도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팀사역자였다. 동역자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고린도전서 1-4장

4장에 보게되면 디모데를 일단 먼저 보내고 주게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방문 자체는 지금 2차 전도여행때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3차 전도여행때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다. 그 이전이나 그 후에 공식적으로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거의 디모데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편지가 몇 번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바울이 다른 지역에 사역이 바빠서 고린도 교회에 자주 방문하지를 못했다. 2차 방문때 1년 6개월을 지냈으니까? 자주 방문하지를 못한 것으로 본다.

 

교회내에서의 지도자의 문제 때문에 분당이 생긴 것이다. 교회에서 분쟁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도자 관계로 생기는 분쟁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의 직접적인 문제다. 현대교회와 고린도교회 차이점과 공통된 점은 무엇인가?

먼저 차이점은 뭐냐? 사도로서 신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부분이다. 게바는 사도다. 바울의 사도권은 논쟁이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이 확고하게 자신을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9장 4-5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똑같은 계열속에 넣고 있다. 우리도 게바와 같은 계열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논쟁이 되는 부분은 아볼로냐 게바냐 그리스도냐 바울이냐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와 지금의 사역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뭐냐?

 

고린도에 가면 바울 기념교회의 초대목사는 바울, 2대는 아볼로로 적어놓았다. 내려온 목사 대를 보면 5십 몇 대가 되어있다. 여기에 보면 일대 이대가 있는데 오늘날 교회와 다른 점은 거기에 상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그 교회에 책임자를 두는 형식이었다. 왜 아볼로, 게바, 바울파가 생겼느냐? 베드로도 방문하고 그 교회에서 설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가족을 끌고 다니면서 때로는 보조를 받으면서 설교선교를 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아마, 적은 교회는 에베소나 고린도나 큰 교회는 베드로가 다니면서 설교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파가 생긴 것이다.

 

바울이 권면해서 아볼로는 고린도교회 지도하면서 설교를 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바울은 한 곳에 머물면서 선교하지 않고 돌아다녔다는 것이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다 좋은 데 파당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생길수 있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지도자 중심으로 파당이 생기는 경우, 어떤 위계질서가 서있으니까? 원목, 부목하고는 별로 없다. 부목들간의 경쟁은 심하다. 심각하게 파당이 되는 것은 담임목사가 없는 상황에서다. 지금은 담임목사가 중심을 잡고 있어서 파당이 불가능하다.

이민교회는 담임목사 간에도 치열하다. 부목사들이 끌고간 일이 비일비재하다. 너무 세상적인 편파심, 세속적인 이속관계로 파당을 만드는 경우들이 참으로 많다. 지금은 교회들이 정비되어서 지금은 좀 덜하지만 지도자들의 인식을 똑바로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이런 교육을 하기가 좀 쑥스러운 경향이 있다.

분열이 생기는 이유는 사역자들의 분명한 정체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다. 달란트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역자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은 성숙하지 못한 영적인 교만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사역자는 아무리 차이가 있어도 공통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역자 자신들이 교인들을 충분히 교육시켜야 한다.

 

4장 끝에 보면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는 자기가 개척했으니까 조금은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내세우는 경향은 있지만 그러나 자기가 궁극적인 신앙의 대상이 될수 없다는 사실을 앞 구절에서 많이 강조했다. 자기도 아볼로도 게바도 다 종에 불과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후에 그 다음에 4장에 들어가면 사역자들은 사역자로서 당연히 존경을 해 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역자의 의무나 권리를 4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을 맡긴 자로서의 충성이 요구되고 본이나 권리는 있다는 것을 쭉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에 사실 사역자는 다른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역자로서의 확고한 의지는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 지도자관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 지도자로서 하나님게 받은 바 달란트는 있는데 그러나 그 지도자를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처럼 따라서 교회를 분파시키는 것은 위험하다고 언급한다. 자기 이름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많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이다. 자기가 교주처럼 나서는 것은 과거부터 항상 있어왔다. 이런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5-7장

5장에서 영적 교만부분, 계모와 같이 산다. 영적 교만과 어떻게 관계가 있나? 바울이 이방인들도 잘 행하지 않은 범죄를 저질렀던 부분과 또한 이런 죄를 지은 자가 버젓이 교회에 묵과하고 있나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관련된 신학적 문제는 영지주의에 대해서 이 사람이 영지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다. 영적은 것을 중요시하고 육적인 것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육 이원론이 영지주의에서의 핵심사상인데 인간을 영육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이것이 오늘날 어떤 분파와도 비슷한 경향을 띠는데 만약에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때 그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에 영이 거룩하고 육적인 것이 죄악된 것이라면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은 영적으로 거룩한 것인데 이것이 육적인 것에 갇혀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 많은 고뇌를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고 죄를 짓는 이유는 신성한 영이 죄악된 육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라들이 잘 하는 구호가 ‘소마 세마’라는 구호다. 소마는 육이라는 뜻이다. 세마는 감옥이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기 때문에 고통이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소위 플라톤적인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진 헬라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그들은 복음을 듣고서 그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육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영혼만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지주의를 신봉하면 두가지 윤리적인 자세가 생긴다. 첫째는 육체는 원래 죄악된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마음대로 굴려도 된다. 영혼이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육체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육체를 가지고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안티 노미니즘이다. 탈 율법, 윤리를 초월한 사고방식이다.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위해 그런 제안을 하는데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다른 사람들이 할수 없는 짓을 자기는 과감하게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의 본질을 윤리적인 그 자체도 문제지만 복음이나 본질에 대한 왜곡이 상당히 문제다. 육체를 상당히 억압하는 주의가 금욕주의로 나가든지 아니면 방탕주의로 나가든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탕주의가 영적인 교만하고 관련이 있는 것이다. 윤리를 부인하는 영적인 교만이 바로 안티노미니즘주의자들이다. 초월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기괴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교주들을 보라. 고린도 전서 후서 눈물의 편지가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지 않나 보고 있다. 영적인 교만 뒤에 신학적인 어떤 확신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인 부분은 초월할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파는 한번 구원받아버리면 그 뒤는 예배를 안드려도 상관없다고 본다. 그 뒤 생활은 어떻게 하던 상관이 없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계속 성화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구원파는 한번 구원받으면 기도도 예배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문제제기)

첫째는 고린도서를 공부를 하면 항구도시다. 수호신이 비너스, 아프로디테다. 고린도 신전에 여자사제들이 엄청 많았다. 돈이 없으면 몸을 팔고 해서 고린도 도시가 성적으로 문란했다. 흔히 당시하는 말이 ‘고린도 가자’라는 말은 여자집에 가자라는 것과 같다.

옛날 습관들은 신앙을 받아들여도 잘 버리지 못해서 이런 근본적인 습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심각한 문제는 법정가는 문제다. 교인들의 자존심이 너무나 낮아진 상태다. 법정에 가는 것은 교인들이 반성해야하는 부분이다. 사회에서 교회를 보고 무슨 말을 하겠느냐? 형제끼리 재산싸움하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세 번째는 독신으로 사는 문제다. 오늘날 현대인들보다도 더 진보된 성윤리를 바울은 가지고 있었다. 경상도 사고방식이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보수적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이야기하기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배우자의 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윤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설령 니가 원하지 않더라도 아내나 남편이 원하면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들한테 해당될텐데... 특별히 새벽기도, 특별기도등 종교쪽으로 거룩한 일을 할려고 해도 미리 상대방의 허락을 받고 하라. 분방을 하더라도 미리 상대방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이야기한다.

독신문제다. 꼭 결혼을 해야하나? 아내를 즐겁게할까? 주님을 즐겁게할까? 갈등이 심각하지 않나? 바울은 자기처럼 지내라고 말한다.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 은사를 살릴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린도 소개

이오니아해와 지중해를 잇는 고린도

세계의 문명이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흘러갔다. 바닷가 근처는 문명이 꽃을 피웠다. 고린도라는 말은 서양의 건축양식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이것은 고린도 신전 건축양식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나중에 신전뿐만 아니라 일반 건축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흔히 기독교의 성서에서 말하는 고린도를 말한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고린도를 방문할까? 그리스의 고린도와 겐그리아로 떠나자.

펠로폰네스 반도 입구에 위치한 도시다. 이 운하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잇는 운하이다. 이오니아해는 고린도의 중심해이다. 그리스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중심지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1년 6개월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다. 사도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사도바울과 아볼로가 초기 목회자들이다. 사랑장인 고린도 전서 13장이 새겨져 있다.

현대 고린도에서 5km정도를 달려가면 옛날 고린도시가 있다. 거기에는 아폴로 신전터가 있다. 원형극장, 시장등이 형성된 고린도가 있다. 관심을 갖고 찾아간 곳이 바로 한 석판에 에라스도라는 석판이 새겨져있다. 이 석판 발견으로 인해 역사적인 인물이 현존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에라스도는 바울을 도왔던 자다.

코린트 양식을 갖춘 신전 기둥양식이 밋밋하다. 아칸서스 잎을 으용해 만들어진 기원전 4세기이후에 펴졌다.

기원전 7세기에는 도리스 양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아폴로 신전에 사용되었다.

이곳에 발견된 유물중에는 성배와 촛대모양이 있는 기둥이다. 수탉모양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때에 울었던 것으로 새겨져 있다. 고린도에서 재판이 열리던 곳이 유명하다.

 

고대 고린도시는 항구도시로서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다.

고린도에서 건너편으로 가게되면 겐그레아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고린도가 유럽에서 오는 항구라면 이 겐그레아는 소아시아로 가는 항구이다. 겐그리아의 대부분 도시가 물속에 잠겨있다. 이곳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고린도와 겐그레아를 흐르는 운하였다. 운하가 생기기전에만 해도 로마에서 고린도에서 오면 딱딱한 바위를 따라서 고린도에서 겐그레아로 옮겼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운하를 파서 손쉽게 옮기고 있다. 사실은 이 고린트 운하는 어려운 작업을 했다. 이것은 네로황제때부터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 뒤에 1893년까지 완공을 못보다가 300km이상되는 거리에서 6.3km가 되던 운하의 거리로 단축시켰다.

커다란 배를 시동이 끄고 작은 배가 운하를 건너기위해 끌고간다. 폭은 23m 물길은 6.3m이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배가 큰 배를 끌고 지나가서 운하를 지난후에 큰배가 시동을 킨다.

 

8-10장 우상의 제물

1. 성도 혹은 목회자 음주문제?

어느 측은 마실수 있다고 고견을 제시. 구세군 안된다. 먹고 마셔도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은 교회 공통체에 덕을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문제의 차원에서 한 것이다.

당시 고린도시의 문화적 배경은 제사밥 문제가 심각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배려하는 입장에서 자유를 주장해서 약한 자가 시험에 드는 경우가 심각한 주제였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통해서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이 드러나므로 강한 자가 좀 절제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다.

2.바울과 바나바는 화해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별도 사역을 했다. 지금 9장에서 바울이 바나바를 거론하는 이유는 사역방식이 실제 바울하고 바나바는 유사했다는 것이다. 자비량 선교를 했다는 이야기를 하기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게바라든지, 예루살렘의 선교사들은 보수를 받는 쪽으로 지원을 받는 쪽으로 했다면 바울은 선교를 바나바와 같은 방식으로 선교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11-14장 우상과 예배문제

11장에서 머리에 쓰는 문제가 나온다. 오늘날 교회에서 바울에 머리에 쓰라그랬는데. 왜 쓰지않나? 문화적인 차이다.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문화적인 차이인지 아닌지, 흔히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성경의 무오류성,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배경을 어떻게 이해하나?

전체적인 바울 서신에서의 분위기가 11장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14장 여자는 잠잠하라

 

천막짓기와 사도직

고린도교회에서의 한 단면을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본문에 대해서 질문해 보라.

고린도전서 9장1-19절을 보고 이야기하자.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15절에 우리말 번역에 ‘죽을찌언정,,, ’ 아마 이것은 논쟁을 하면서 격정적인 느낌을 받는 부분이다.

목회자 봉급을 정할때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나? 아마 교육자나 목회자가 보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어색하다. 특히 이것이 옛날에는 결정을 하면 되었는데 요즘은 제직회 나가고 해서 문제가 있다.

바울이 9장에서 이 문제를 거론할때도 상당히 힘들었던 것을 발견할수 있다. 일단 자신이 받을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지마 받지 않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봉급 받을수 있는 권한이 몇가지인가?

첫째, 7절을 보게되면 일반사람들이 상식적인 관습에 따라서 자비량 군인하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조금이라도 받지 자기 돈 넣어가면서 군대생활하는 사람은 없다. 일반적인 예로 보더라도 선교사로서 할때에 받을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언급

둘째, 9절에 모세의 율법을 들었다.

셋째, 주님이 말씀하셨다.(전도대를 파송하면서 받을 것을 이야기했다.마태복음 10장을 보라.) 신발두벌가지고 가지 말고 옷도 두벌가지 말고 지팡이도 가지고 가지 말라. 복음전하는 자들은 복음전하는 것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을 값없이 전하느냐?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나?

첫째, 복음을 전하면서 보수문제가 장애가 되지 않게하기위해서이다.

둘째, 당연히 내가 쓸수 있는 권한을 참음으로 인해서 내가 오히려 자랑이 있게 하기위해서

셋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부득불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실도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

넷째, 바울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달리 특별한 이러한 자비량을 하는 이유를 적어놓고 있다.

그 주로 내용이 오늘 발표한 호커의 책에 나와 있다.

종전에는 히브리 랍비들의 방법을 통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호커는 철학자들의 삶의 방식을예를 들면서 그 철학자 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이 4가지 방법외에 다른 방법은 뭐가 있나? 지원 및 펀드를 모아서 선교하면 된다. 바울의 경우에는 선교할때에 제일 도움을 많이 준 교회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로서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된 바울의 선교헌금을 한 교회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문제중에서 이런 선교비 문제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처럼 초대교회에 상황이 안되어 있을때에 다른 방법이 뭐가 있나? 복음을 전하는데 가족에게서 받는다는 개념은 어떤가? 바울같은 경우도 미자립이라할지라도 그 교회에서 받을수 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전파에 장애가 되면 안받겠다는 것이다. 자기가 일하는 방법이다. 자기가 일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어서 한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되었나? 벌어서 하면 고린도교회편에서 바울을 존경하고 칭찬해야하는데 왜 문제거리로 만들었나?

 

호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중의 배경은 랍비들은 천한 직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랍비전통에 비추어보면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행동했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호크는 헬라전통은 철학자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방식 4가지가 있었다. 강의후에 강사료를 받는 것과 가정집에 입주해서 하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걸과 근로는 철학자들의 전통에서는 예외적이고 수치스런 행동이었던 것이다. 바울이 그러니까?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세계에서 근로한 것이 아니라 헬라세계에서 근로했던 것이다. 그러면 헬라세계에서 근로한 것에 대해서 문화가 어떤 것이냐하면 철학자들은 근로가 상당히 힘들고 수치스런 것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노예와 종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이 근로를 했을때 느낌은 바울은 원래 비천한 신분은 아니었다. 헬라어를 하고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중산층 이상이 된 신분이었다. 하지만 바울이 한 것은 하층 계층의 일이었기 때문에 고리도 교인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5장 바울의 천막짓기와 사회적 계층문제

바울의 직업이 고린도교인들에게 걸림이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해결했나? 일을 하는 것을 그만두고 교회에서 주는 것을 받으면서 일을 할수 있다. 문제가 되었을때에 바울은 일을 그만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바울이 한 방법은 무엇이냐?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시켰다. 고린도 전서 9장이 바로 변명이다. 해명이다. 자신의 일이 고통스럽지만, 교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후서는 교인들을 설득하기위한 글이다.

이런 문제가 오늘날도 계속 부닥치고 있다. 바울의 경우에 여기서 사회적인 계층에서 결론적으로 간단히 이야기하면 바울이 굉장히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생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계에 대한 문제가 하도 생기다보니 12사도의 지침인 ‘디다케’를 보면 선교사에 대한 생계비 지침이 나온다. 가는 기간동안 양식이상을 지원요청하는 것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소한의 비용만을 청구하게 했다.

현대교회와 바울의 상황이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고, 그런 부분들을 교수나 영향력있는 입장에 있는 분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얻을 것은 바울의 선교열정이다. 교인들을 향한 열정이 일반사람들보다는 강렬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낮추었던부분은 바로 예수에서 모델을 찾을수 있다. 바울의 삶이 고통인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갔던 그 고통에 빗대어서 행했다고 보면 된다.

 

 

바울의 천막짓기 6장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영적인 성숙을 위해 도움이 된다. 어느 선까지 필요한가? 시간을 정해놓을 것인가? 일의 양을 가지고 하는 것이 필요한가? 일을 하는 것이 현장감이 있어서 영성이 더 뛰어난가?

한계는 교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선을 그어주는데 교인들이 차서 흘러나오는데가 되면 너무 늦다. 그 전에 눈빛을 보고 알아야 한다.

사회복지가 필요하나 지나치게 가버리면 교회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집사들은 공양하라는 것을 기억하라. 목회자의 중심은 말씀과 기도에 두고 사회복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바울이 그러면 이 한계를 극복했을까?의 질문에서 바울이 텐트메이킹을 한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을 하면서 전도를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업을 할면서 생계도 벌고 전도도 할수 있었다. 고객하고 대화하는 중에 전도를 했던 것이다. 일은 하나의 매개체이다. 일반 노동하고의 차이점이다. 농사만 지으면 다른 사람과 접촉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생업도 되고 하면서 다른 사람과 접촉이 가능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전도의 빌미를 위해 그것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예가 군부시절에 소위 산업선교요원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현장에 가서 노동만 한 것이 아니라 노동하면서 현장 자체를 선교 현장으로 삼았다. 이것이 클리어하게 구분이 안되는 것이 좀 있을 뿐이다.

바울이 개척교회를 하면서 작업장 선교를 하고 개척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지금 많은 목회자들은 본 교회가 있고 노동하고 있는데 그 기준은 가급적 노동을 하면서 선교할수 있는 장이면 더 효과가 있다고 본다. 바울의 경우는 현장 선교를 하면서 작업장이 선교지로 사용되어질수 있도록 했다.

 

철학자들도 랍비들고 견해가 갈리는데 철학자들은(견유학파, 스토아학파, 스코라테스 학파들) 일을 하면서 철학을 해야한다라고 주장했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들은 언제 일하고 철학하느냐하면서 말하고 있다. 옛날에 랍비들도 힐렐이나 몇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깊이 헤아리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반대였다.

요즘 목회현장에서의 경험은 대부분 일을 안하고 목회 전념하기를 원한다.

신학적인 교육이 현장과 많은 괴리가 있다고 미국 신학교에서 많이 느끼고 있다. 우리도 현장에서 개척문제도 계속 어려워지면 목회자가 전적으로 교회보조만을 의지해서 목회를 해야하는 것은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행했던 이중직에 대한 것도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같은 경우도 산상설교, 평지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종교기관같은 곳에서는 다 쫓겨나서 할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지로 산지로 바다로 간 것이다. 낭만이 아니라 쫓겨나서 한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아직 제도가 생기기전의 이야기이다. 조직과 제도에 대한 이야기는 후기에 생긴 것이다. 조직 제도가 발전적인 형태냐 퇴보적인 형태냐가 논란이 되어 왔다. 바울도 은사문제를 다룰때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현상을 다룬 최종적인 현상을 다룬 모든 것에 대해서 적당하게 질서있게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은사도 지나치게 따르면 은사를 잃어버린다. 공동체에 예언이 덕을 끼친다. 방언은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이지만 공동체에 덕을 끼치는 것이 바로 예언이다.

 

바울이 사도권을 강조한 이유는 내가 이것을 파괴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기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은사는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초대교회가 은사중심의 교회가 많았다. 그러나 은사를 통제할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 했다.

사도권은 충실히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사도라고 본다. 오늘날 이런 원칙을 가지고 볼때에 노회나 대회나 조직이 공동체를 궁극적으로 세우기위한 것이지 파괴하기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회마다 분위기가 다 다르다. 괜히 애먹이고 하는 노회도 있다. 노회가서 시험드는 것도 있다. 이런 문제는 심각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부터 갈라디아서부분은 다루지 못했지만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가 부활하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충실하게 투쟁하면서 지키려고 했다.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같은 동역자끼리도 갈등이 많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인들과 목회자들간에도 갈등이 심했다. 그러므로 갈등은 분명히 있다. 갈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갈등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바라보면서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고린도 교인들, 갈라디아 교인들하고 바울은 갈등이 많았다. 거짓사도와 진짜 사도와도 싸웠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갈등이 있는데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갈등이 흔히 쉽게 하는 말로 기회도 될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일부 교회는 떨어져 나가고 일부 교회는 변질되고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초대교회에 일어났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현장에서 선교하고 전하는 목회자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목회가 갈등의 연속이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를 보여주고 있느냐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갈등을 줄일려고 하는 관점으로 썼지만 그래도 갈등요소가 많이 나온다. 즉 갈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울서신에 들어가보면 심각할 정도로 갈등이 많다.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갈라디아 교회다.  <작성자 빛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