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의 산책

구약성서이해 (Understanding to the Old Testament)

by 은총가득 2020. 9. 23.

구약성서이해 (Understanding to the Old Testament)


1. 대 예언서에서 예언자별로 사상과 특징
1. 이사야
이사야서가 유명한 것은 그 예언의 분량 때문만이 아니다. 예언에 담겨져 있는 국내의 사회적인 문제, 던 나아가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국제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남은 자’ 사상과 메시아 사상,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성경이 66권이듯이 66장으로 되어 있고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이듯이 전반부가 39장, 후반부가 27장으로 되어 있다.


1) 사회비판 (1-5장)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고, 신학적으로는 남 왕국 전승, 즉 다윗전승을 따랐으나웃시야의 통치 말기에 사회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유대사회의 모습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고 사회를 부패하게 만드는 지도자들의 범죄를 날카롭게 책망한다. 사회적인 범죄가 구체적으로 지적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사치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인들의 장식품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2) 하나님 칭호
이사야가 많이 쓰는 하나님 칭호는 '만군의 주'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다.
(1) 만군의 주: '만군의 주' (야 웨 체바오트)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주 만군의 주' (3장 1절), '만군의 하나님이신 주' (3장 15절)라는 조금 변형된 형태가 나타난다. 이 '만군의 주'라는 칭호는 원래 북 왕국 전승에 속한 것으로, 실로 지역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만군의 주'는 온 세상에 미치는 주님의 권능을 의미한다. 구약전체 중에서 가장 발전 된 유일신관이다.
(2)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사야는 독특한 표현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경험했다. 그가 성전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스랍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시다" (6장 3절).
이사야는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경험했고, 이것이 그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6장을 보면, 이사야는 심판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사야는 심판 예언만을 선포하지는 않는다. 이사야서에는 구원예언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가 6장에서 받은 임무가 심판예언의 선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4) 남은 자 사상
이사야서 6장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남은 자 사상'이다.
하나님은 잔혹한 심판의 말씀을 하고 나서, 거룩한 씨인 그루터기는 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남은 자' 사상이라고 한다. 이 남은 자 사상이 이사야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이라고 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5)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사야가 활동하던 때는 국제정세의 격변기였고, 국제정세의 변화는 유대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사야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야는 유대가 강대국들을 의존하지 말 것을 역설했으며,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반 앗시리아운동에 끼어들지 말기를 권고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앗시리아와 같은 강대국들도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13-23장에 기록된 이방심판예언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6) 구원하시는 하나님
(1) 메시야 사상: 이사야의 메시야대망사상은 7장 14절 이하에 처음 나타난다. 그 메시야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리고 9장에도 메시야가 언급된다.
(2)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영화: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이 종말에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인 영화는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나라들을 하나님이 심판한 다음에 온다 (34장). 35장에도 이스라엘이 종말에 누리게 될 영화가 언급된다.

* 구속사의 핵
1) 여호와의 줄기(사4:2-6)
풍성한 결실의 땅에 대한 언약/ 남은자의 보증/ 남은 자들의 거룩/ 백성들의 도덕적 정화/ 시온에서 백성과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 등이다.
2) 임마누엘: 이새의 줄기- 싹-가지
3) 기초의 돌:시험의 돌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한다.
4) 야훼의 종
야훼종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실현 될 것을 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2.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이다. 예레미야는 범죄한 조국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촉구했던 예언자이다
1) 파토스의 하나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받은 첫 번째 사명은 심판선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도 다른 예언자들처럼, 유다와 이방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에서 우리가 먼저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모습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독특하게 발견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호세아서에서 발견되어진다. 바로 [파토스의 하나님]이다. [파토스] (pathos)는 깊은 감정적인 표출을 말한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우러나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나 정말로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 마음속에서 샘솟듯이 우러나오는 기쁨, 이런 것들을 파토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슬픔과 분노, 기쁨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파토스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나님 모습이다.


2) 에브라임신학
예레미야는 북 왕국 신학전승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서에서 북 왕국 전승, 즉 에브라임의 신학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2 -6장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에브라임전승의 핵심인 출애굽전승, 계약전승이 나온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북 왕국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30장과 31장 1-22절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예언이다. 예레미야는 이처럼 호세아의 신학을 따라서, 북 왕국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기울이며, 하나님이 북 왕국을 분명히 다시 구원하실 것이고, 번영케 할 것이고, 북 왕국과 남 왕국을 통일시키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3) 새 언약
예레미야서 1장 10절을 보면, 예레미야의 두 번째 사명은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며, 이것이 예레미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예레미야의 구원예언은 31장 31-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새언약'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회개에서 구속으로'에서 더 설명이 될 것이다.)


4) 회개에서 구속으로-예레미야사상의 변천
요시야 시대는 예레미야가 구속의 결정적인 요건이 되는 회개의 가능성을 믿고 또 그 실현을 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도 체험했던 때이다. 두번 째 시기는 597-587년으로, 예레미야가 인간의 회개의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이다. 그리고 세번째 시기는 유다의 함락 이후로, 예레미야는 구속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하고,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속되는 [새 계약]을 이야기한다.


5) 친 바벨론 사상
예레미야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친바벨론 노선을 취했다. 그리고 유다가 친바벨론 노선을 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주장은 예레미야서 27-29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당시 정치, 종교지도자들은 친애굽 노선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보여온 예레미야는 그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예레미야는 당시의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역사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예레미야의 신관
야훼를
1) 생수의 근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살려주심 창조하심을 말한다.
2) 토기장이 비유: 하나님은 자유인격자로서 절대주권을 말한다.
3) 이스라엘은 남편: 야훼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 에스겔
우리는 이제 대 예언서의 마지막 인물인 에스겔 ('에스겔' 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이다 에스겔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참 특이한 예언자이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 사람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흥미를 느낀다. 정신병리학자들이나 외계인연구자들, 신묵시주의자들도 에스겔에게 관심을 가진다. 아마도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많은 예언자들 가운데서 가장 독특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한 어휘와 문체: 에스겔은 독특한 어휘들을 많이 사용한다. '주의 영광', '주의 영', '주의 손' (8 장 3, 4절, 11장 1절, 22-24절)이라는 어휘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에스겔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성전과 제사와 관련된 어휘들도 나온다.


1) 새로운 공동체
당시 유다인들은 그들이 과연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유다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선조들이 범한 죄를 후손들이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리다'는 속담이 있었다. (18장 1절). 이 속담은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예레미야서 31장 29-30절). 당시에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같은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이 때로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지만, 죄로 인해서 심판받은 상황에서는 이런 사상이 그들에게 벗어버릴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와서, 그들이 극복해내기 어려운 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과거에 선조들이 범한 죄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에스겔로서는 이 신학을 바꾸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새로운 신학은 비록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 그들마저도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그들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4장 20절).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은 악인이 심판받고 죽는 것을 결코 원치 않고, 악인이 회개하고 살 길을 찾는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구절들에서 에스겔이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에스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인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는 개인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예언자였다. 에스겔이 이 구절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시대든지 새로운 결단을 하면, 그들은 과거의 운명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2) 용서 이후의 회개
회개에서 구원으로 전통적인 회개와 용서 사상을 넘어서고 있는 새로운 신학이라는 것이다. 에스겔의 이 사상은 회개는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하나님의 구원/용서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전제조건이 아니고 결과이며, 또 인간의 책임도 아니다. 회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포로기에는 이스라엘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포기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보았다. 에스겔서 37장에 마른 뼈 사건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죽은지 오래되어서 하얗게 마른 뼈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겠는가? 하얗게 마른 뼈들은 구원과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마른 뼈들은 생기를 얻고 살아서 다시 사람들이 되었다. 회개를 통한 구원과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었다. 에스겔서 36장과 37장은 하나님의 용서 이후에 나타나는 인간의 회개를 말한다. 이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가망성이 없어보이던 포로기 동안에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한 위대한 신학이었 다.

4. 다니엘
다니엘서는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책이다. 다니엘은 3개의 큰 제국을 거쳐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다니엘 선지의 생애와 관련된 역사적인 배경과 그 시대의 세력을 알려주고 있다. 3개의 큰 왕국 메데 파사- 희랍-로마의 흥망성쇠와 세상의 열국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국 도래를 예언한다.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환경에서 자기 백성을 지킬 수 있다. 열국에게 하나님의 우월성을 보여주며 역사의 주관자로 나태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핍박의 때가 될지라도 메시아는 올 것이며 영원한 왕국은 확립되어 그 왕국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주권을 펼쳐진다.
1) 천사 사상
천사가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여러나라 보호자 역할을 하며 미가엘은 이스라엘은 돕는 천사이다.
2) 인자사상
인자 같은 이는 전통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 주장을 하고 있다. 인자 같은 이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로 연결짓어 메시아 왕국과 구속 받은 백성인 메시아 왕국의 백성의 성도를 의미한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속으로 계약적인 축복을 받는다.
3) 부활사상
구약에는 부활사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다니엘서는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단12:2-3) 부활하는 자의 보상이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치는 것이라는 내용 속에 다니엘은 악인과 의인이 다 같이 부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4)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은 영존하며 지상의 왕국은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의 힘으로 땅에서 결국은 옮겨 갈 것이며 미래에 이루어진다. 이 나라는 하나님 백성에게 주어지며 망하지 않고 영원히 설 것이며 유대인에게 올 것이다.

2. 소예언서에서 예언자별로 사상과 특징

1. 호세아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3대 악
(1)우상숭배 : 하나님의 도덕적인 명령을 어기고 다산과 풍요의 신 바알을 섬겼다.
(2) 계약파괴 :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는 것이 죄이며 그 죄가 언약을 깨뜨린다.
(3) 종교지도자들의 부패 : 멸망을 독촉한다.

사상
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부부지간: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묘사한다. 호세아 당시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종교에 물들어 있었다. 가나안의 제의에는 [성창제도]라는게 있었다. 그래서 그 종교를 받아들였을 때, 이스라엘은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 호세아는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서, 아세라가 야웨의 부인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야웨의 부인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펼쳤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거의 이단적인 생각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백성으로 묘사하는 것과 남편과 아내로 묘사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음행''간음'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정했을 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음행과 간음일 수 밖에 없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행복했던 결혼초기로 본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스라엘 이 범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국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재결합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호세아서 2장 14-23절)

2) .계약사상: 호세아는 범죄한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통일을 이룩하여, 한 통치자를 세우고, 땅에서 번성할 것이다. 그렇다. 이스르엘의 날이 크게 번창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심어서, 나의 백성으로 키우고, 로루하마를 사랑하여 루하마가 되게 할 것이다. 로암미에게 ' 이제는 너는 암미다!'하고 내가 말하면, 그가 나에게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호세아서 2장 23절. 예레미야서 32장 36-41절도 보라.)

3) 여호와를 아는 지식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나님을 아는 무지에서 출발 한 것이며 무지의 결과로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율법도 준행하지 않아 정치적과 사회적으로 죄를 짓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2. 요엘
1) 재난의 날: 메뚜기 재앙- 인생의 모든 고뇌는 죄의 결과로 보았다.
여호와의 날’로 일컫는 재난의 날을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로 참담하며 그 파급영역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호와의 날에 재난 경보. 쉴새없이 불어대는 나팔소리와 호각소리는 재난이 얼마나 다급한지 나타내고 마치 에덴 같았던 곳이 불에 타서 황무지로 변하고 아무도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재난을 일으키는 것들이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갖고 정예부대처럼 일사분란하게 들판과 성읍을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본문에서는 인간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묵시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메뚜기 떼가 온 세상을 뒤덮은 이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상황.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결코 응시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냉철함. 메뚜기떼에 대한 침착하고 집요한 관찰. 그리고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상상력. 이것은 본문을 우리에게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철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는 신앙적 훈련을 요구한다.
2) 회개의 날1-회개촉구
둘째로 느끼는 것은 재난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지금이야말로 회개할 시간임을 깨닫는다. 얼마나 철저히 회개해야 하는지 그는 안다. 회개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신들이 책임진다는 것이다. 끔찍한 대재난을 겪으면서,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신들이 마땅히 져야할 책임을 생각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범죄→심판(재난)]→[회개→구원]’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범죄→심판(재난)]은 실제로는 [심판(재난)→범죄]이다. 범죄로 인해서 재난이 일어났다기 보다, 일어난 재난을 보면서, 거기서 그들의 책임을 통감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체험하면서 회개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관을 갖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애굽에 내린 메뚜기 재난 속에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이번 메뚜기 재난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3) 공동체 의식 회개의 날2-두 번째 나팔소리
세째로 이스라엘은 결코 나뉠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렇기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 무슨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자기 죄를 회개한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재난에 대해 그들 모두가 책임질 것과 아울러 모두가 참여하는 철저한 회개를 요구한다.
4) 희망-재난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
네째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그들은 한 공동체로서 재난에 대한 책임도 함께 나누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함께 나눈다. 그 끔찍한 재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그 종말론적이고 묵시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미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준다.

3. 아모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태평성대를 구가 할 때에 예언활동을 하였다.
1)죄를 고발하고 재앙을 선포; 주변국의 민족들을 공격:
그들의 죄악으로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 이스라엘에게도 심판 선포하였다. 나라 안에 부정과 탐욕이 성행하였고 하나님의 인식이 무감각하여져 농부로서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아모스는 준엄하게 백성을 꾸짖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
2) 이스라엘의 예배을 거부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약 백성들이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야기되는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인내하시는 분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언제까지나 죄를 방치해 두지 않으신다. 형식적인 제사, 자고, 독선, 기만, 물질만능주의, 탐욕, 등 이스라엘 죄악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높이 쌓여 갔다.
3) 야훼와 이스라엘의 결혼 동맹체(7:8; 8:2)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남김없이 깨트려 버렸다.
4)선택사상을 비판(3:2; 6:1-7); 출애굽은 이스라엘에게만 행한 것이 아님; 이스라엘은 다른 족속과 다를 바 없다(우주적인 신학 9: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선민이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는 그릇된 풍조가 만연하였다.
5)이스라엘은 순종의 의무를 거역; 야훼의 날에 있을 멸망만이 남아 있다(5:18-20)
6) 회개는 단지 구원의 가능성만을 내포한다(5:15), 그러나 회개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셔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개혁자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어 그들의 처한 운명을 경고하도록 하였고 그러나 그들은 아모스의 호소에 외면하여 정해진 심판의 과정이 돌이킬 수 없다.

오바댜
오바댜는 스스로의 교만에 속고 있는 에돔을 책망하며 여호와의 심판이 있다. 이스라엘의 형제인 에돔은 특히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다의 곤경을 고소하다는 듯이 기뻐하며 이스라엘을 강탈하고 생존자를 적에게 넘겨주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질책 받고 있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날에 형세가 뒤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시온은 거룩하여지며 에돔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나
요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았던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시키려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연현상들과 역사적 사건들 모두들 조정하시는 주관자로 묘사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닌 온 민족들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의 사랑은 보편적인 진리를 요나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큰 적이었던 앗수르(앗시리아)제국 시대로 요나가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이야기다. 확실히 이 책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긍휼과 사랑을 가지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 책에서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벌하시는 진노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침공한 백성들일지라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다.

미가
유다의 미가는 주전 8세기 후반의 선지자 중 하나로 이사야, 호세아와 동시대인이었다. 미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했던 것처럼 유다에 다가오는 똑같은 멸망을 예언했다. 미가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가장 큰 범죄자들로 보았고 그들을 공정히 책망했다. 미가서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지적하고 이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 할 것이며 심판 뒤에 하나님은 다시 왕국을 회복시킬 것이며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아 회복시키신다. 그의 예언의 초점은 열방에서 남은 자 그리고 왕에게로 점진적으로 좁혀진다.

나훔
나훔은 주전 612년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뻐하며 이 예언을 썼다. 이 사건은 악한 적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자유를 의미했다. 나훔은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사람이었으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였다. 나훔서 전반에 걸쳐 하나님은 절대 주권이시다. 곧 하나님께서는 대적인 앗수르 제국을 징벌을 집행할 것이며 하나님의 선민 위에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나훔서는 온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념하는 신년 축제의식을 위해 지어졌다.

하박국
하박국은 나훔과 비슷한 시기, 즉 주전 7세기 말에 살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이유를 말씀해주시기를 요구한 첫 예언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미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악명 높은 사람을 볼 때 믿음으로 싸운다.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여 역사의 주재자가 되신다.

스바냐
스바냐는 유다의 예언자로서 요시아왕의 종교 개혁과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 직전인 주전 7세기에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를 지적하면서 다른 예언자들처럼 유다와 다른 나라들의 우상 숭배에 대한 징벌을 선포했다. 스바냐의 사역은 심판과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방민족과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 올 것이며 이 때 즉각적인 회개를 하며 멈출 수는 있으나 유다는 이것을 거절한다. 하지만 스바냐는 소망의 메시지로 끝을 맺고 있는 바 하나님의 심판이 격렬하게 보여도 여호와의 날에 유다와 민족들은 깨끗하여 질 것이다.

학개
이 책은 주로 유다 총독과 대제사장에게 말하고 있다. 구약성경 중 오바댜에 이어 짧은 책이지만 간결하고 야무진 설교로 쓰여져 있다. 이 책은 남은 자들은 수고에 따라 보상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기 이전에 성전을 완성하는 것이 최우선책이라는 것을 알고 성전을 짓는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맡기신 일들을 순종 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그들 가운데 임한다. 또 스룹바벨은 바사(페르시아)의 다리오(다리우스)왕 치하의 유다 총독이었고,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룹바벨을 약속된 메시아로 생각했다. 학개서에 있는 메시아 대망 사상은 성전과 스룹바벨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스가랴
스가랴는 환상과 그 해석을 말하고 있다. 감람나무 가지와 기름 발리운 두 사람은 스가랴의 강한 메시아 대망 사상과 제사장적 해석을 결합한 환상이다. 처음의 여덟 장은 주전 520-518년의 것이나, 기다리는 메시아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언의 수집은 연대를 매기지 않았다. 스가랴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 할 것을 확언하고 있다. 메시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온 땅을 통치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계획은 진행되어진다. 어려움이 닥칠 대 유대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신다. 스가랴는 백성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온전히 의지하도록 영적인 각성을 촉구한다.

말라기
말라기서는 성전을 재건한 후인 주전 5세기에 쓰여졌다. 말라기의 주요 관심은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에 대한 신실함을 새롭게 할 것을 항의한 후,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를 엘리야라고 말하면서 말라기는 미래에 대해 말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정치적, 경제적, 자연적인 혜택에 까지 불만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관계 근거를 두고 신실하심을 설교하였다. 하나님의 옛 칭호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야 한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겼던 의로운 자들은 보전된다.

3. 시편에 대하여 아는 대로 서술하시오(pp. 214~215).
1) 하나님의 전제
시편 기자들은 그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서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으로 마친다.
2) 하나님의 속성
인자/ 구원하시는 업적에 근거항ㄴ것이다.
선하심/ 행복된 일을 의미한다.
성실/ 진리와 같은 말로 계약관계에 기본적인 요소이다.
3) 하나님의 행위
창조/ 신관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유일신 사상과 하나님의 왕권사상도 결국은 창조주 사상이다.
4) 시편과 인간
인간의 연약성/ 하나님의 의존적인 관계
죄된 인간의 모습/ 개인적인 죄와 윤리적인 죄를 강조하면서 어떻게 참회하였음을 본다.
5자연이해
시인들의 사상은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이며 그 존재 의의도 하나님을 계시하는 곳이다. 자연현상은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있고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다. 피조물인 자연도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되지만 찬양을 나타내주는 주체이기도 하다. 모든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양하기 위하여 있는 존재이다.
6) 시편의 그리스도
시편은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으며 고난과 죽음의 전반적인 것을 묘사하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정당한 근거를 시편에서 두고 있다.
예언적인 의무/ 제장장적인 의무/ 왕적의무/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의 부활/ 메시아적 재림
시편을 정당성을 두고 기독론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공적이거나 시적인 예배 때에 사용된 노래의 묶음이라 할 수 있다. 또 때때로 그것은 주전 415년부터 주전 약 20년까지 지속했던 "제 2성전의 찬송가 책"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다윗 시대 이후 500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 수집된 찬송시와 기도의 노래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최초부터 기독교예배에서 사용되었다. .


1) 저자별 분류

다윗의 시: 제 1권과 2권의 대부분(시 3-41, 51-17편)과 시편138-145편,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다른 열편의 시에도 히브리어 표제로 "다윗의"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아삽의 시: 시편 50편과 시편 73-83편
고라 자손의 시: 시편 42-49, 84-85, 87-88편
순례자의 시("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편 120-134편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시: 시편 104-106, 111=117, 135, 146,-150편


2) 내용별 분류

탄식시(구원을 청하는 기도: 시 13, 22, 40, 55, 59, 62, 90, 126, 130편)는 개인에 의한 탄식시와 예배하는 공동체 전체의 탄식시로 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호소와 어떤 고통과 환난에 대한 묘사, 도움을 간청하는 애원, 신뢰의 표현,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겠다는 맹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결백함을 주장하거나 죄를 고백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때로는 종속 유형인 신뢰의 시(시 23, 27, 49, 91, 121편)와 회개의 시(시51편)에서처럼 한 가지 요소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때도 있다.

찬송시(시 8, 19, 24, 34, 40, 65, 67, 95, 96, 98, 103, 145, 148, 150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거나, 그분의 품성을 높이거나, 또는 그 분의 왕권을 찬양하고, 그분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는 노래이다. 그 마지막 요소에 초점을 맞추고 노래한 시들을 감사의 시(시100, 107, 116, 118, 136편)라고 한다. 찬송과 감사의 시는 한 개인의 노래이거나 아니면 민족 공동체의 노래로 보여진다. 그 시들은 서두부터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되거나, 다른 대상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권하고 있다.

제왕의 시(시 2, 72, 8, 110편)는 하나님과 왕과의 관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한 왕이라든지, 왕이 곧 최고의 성직자라든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나 혹은 왕을 위한 기도들과 관련되어 있다.

지혜시(시 1, 34편)는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므로 때때로 "교훈시"라고 불린다. 다른 지혜서에서도 지혜시들은 간결한 금언시를 빌려 현명하고 실제적인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때때로 신앙상의 외혹이나 고통의 문제와 격렬히 싸우는 내용도 있다. 지혜시들은 하나님께보다는 오히려 듣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계시된 율법과 이스라엘에 약속하여 주신 하나님에의 예배를 소중히 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순례자의 시(시 15, 24편)는 성전에 들어가고자 했던 순례자들에 의해 불려졌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성소에 들어갈 만한 지에 관한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해 온당한 예배를 위해 갖추어야 할 필요한 자격을 제시한 답이 포함되어 있다.

제 1 권-시편-1-41편
제 2 권-시편 42-72편
제 3 권-시편 73-8편
제 4 권-시편 90-106편
제 5 권-시편 107-150편

4. 다섯 두루마리에서 각책별로 특징을 서술하시오(pp. 218~223).
전도서

"전도서"라는 단어는 "전도자"(공도 번역 성경의 "설교자")와 관련되어 있다. 전도서에는 이 세상의 삶이란 헛되다고 하는 한 가지의 기본적인 주제가 나타나 있다. 구약의 위대한 지혜 문학서 중 세 번째 작품인 전도서는 인생이 더없이 때문에 지혜를 구할 것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유대인의가을축제인 장막절에 읽혀지고 있다. 저자는 모든 인생이 일시적이며 목적이 없다는 인간적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하나님께서 비록 인간들에게 자신의 목적을 드러내 놓으시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을 관리하고 계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가서

순수한 인간의 사랑과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한 이 연가집은 솔로몬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에 포함되게 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룻기

이 책은 사사 시대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사사기 다음에 나온다. 문학적으로 인종과 민족의
한계선을 넘어선 사랑과 충성의 단편소설이다. 룻기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과 가장 위대한 후손인 예수님의 선조가 된 모압 여인을 찬양하고 있다.

에스더

이 책은 포로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국 땅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여전히 하
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알리고 그래서 하나님께 눈을 돌리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진다


5. 다니엘서.
다니엘서의 수신자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가나안 땅을 준다는 열조의 언약과 율법을 지키면 가나안 땅에 거하나 범하면 유대인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나라에 의하여 열국에 흩어지는 저주를 받는 율법의 언약을 받았다. 그러므로 열조의 언약은 율법의 언약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열조의 언약은 영원하고 율법의 저주는 끝이 있어 율법의 저주는 열조의 언약을 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열조의 언약은 율법의 언약이 끝날 때까지 중단된다. 따라서 율법의 저주가 끝나면 열조의 언약은 회복되어 유대인은 고토로 돌아온다. 이 열조의 언약과 같이 율법의 저주의 영향을 받는 것이 다윗이 받은 언약이다. 곧 다윗이 받은 언약도 율법의 저주로 중단되었다가 율법의 저주가 끝나면 회복되며 회복되는 다윗의 언약에 의하여 오시는 왕이 메시야이다.
율법의 저주 때 하나님은 유대인이 시기할 자와 분노를 격발할 자를 세우신다. (신 32:21)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는 유대인이 시기할 자와 분노를 격발할 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선지자들의 글은 유대인이 율법의 저주로 열국에 흩어졌다가 회복되는 열조의 언약에 의하여 고토로 돌아와서 회복되는 다윗의 언약에 의하여 오시는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특징은 유대인의 분노를 격발케할 나라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은 2장에서는 신상으로 7장의 네 짐승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2장의 금,은,놋,철과 7장의 네 짐승인 사자와 곰과 표범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넷째 짐승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신상의 발의 진흙과 철은 7장의 넷째 짐승의 열 뿔과 작은 뿔과 같은 것이다. 네 짐승은 네 나라를 상징하며 그 나라의 이름은 사자는 바벨론, 곰은 바사, 표범은 헬라이나 넷째 나라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 알지 못하는 나라는 유대인이 율법의 저주 때 알지 못하던 나라에 의하여 열국에 흩어지는 그 알지 못하던 나라가 된다. 역사에 의하면 이 알지 못하는 나라는 로마이다. 이 로마는 유대인을 열국에 흩은 것이다. 그리고 이 알지 못하는 넷째 짐승의 열 뿔과 작은 뿔은 2장의 신상의 계시에 의하여 넷째 나라가 분열된 나라들이다. 곧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것을 말한다. 열 뿔의 나라는 동서 로마 중 다시 분열된 서로마로 서구를 상징하나 작은 뿔은 동로마를 상징한다.
작은 뿔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유대인을 괴롭히기 위하여 때와 법을 변개 한다. 그러므로 세 때 반은 동로마를 알게 하는 강력한 열쇠 말이다. 이 정한 때가 지나면 인자가 오신다.

다니엘서 8장은 이 정한 때 끝을 알려주는 계시로서 (단 8:19) 수양과 수염소로 계시하고 있다. 곧 7장의 네 짐승은 8장에서는 두 짐승으로 축소하여 네 짐승의 머리를 두 짐승의 뿔로 계시하고 있다. 곧 수 양의 두 뿔은 중동의 나라인 바벨론과 메대 바사를 수 염소는 헬라와 로마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7장의 인자는 8장에서는 만왕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8장은 11장에서 설명하여 준다. 11장에서 수양은 중동의 나라로 남방의 나라니 남방 왕으로 수 염소는 유럽의 나라로 북방의 나라이니 북방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11장은 두 짐승의 뿔의 순서에 의하여 진행된다. 첫째 남방 왕은 (단 11:5) 수양의 첫째 뿔로 바벨론이며 둘째 남방 왕은 (단 11:7) 수양의 둘째 뿔로 메대 바사이며 첫째 북방 왕은 (단 11:13) 수염소의 큰 뿔로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이며 둘째 북방 왕은 (단 11:20) 수염소의 큰 뿔이 꺾이고 나온 네 뿔 곧 네 나라 중 로마에 조공을 바치기 위하여 토색한 시리아이며 셋째 북방 왕은 수 염소의 작은 뿔로 로마이다.

이 로마는 열 뿔과 작은 뿔로 나누어지고 작은 뿔이 세 때 반의 권세를 가졌다. 세 때 반은 북방 왕이 남방에서 돌아간 작정된 기한 곧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이 세워진 때를 시작으로 하는 정한 때이다. 이 정한 때는 세 때 반 외에 1290일과 1335일이 있디. (단 12:11-12)

세 때 반이 동로마와 관련된 정한 때이니 로마는 동로마 때 중동에서 물러가게 된다. 동로마는 사라센 제국의 배들이 깃딤으로 집결하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키르기아 앞 바다에서 해전을 벌였은나 대폐하여 물러가고 말았다. (A. D 655) 이 사라센 제국과 싸우든 동로마의 황제 헤라쿨레이우스는 로마교를 이용하여 회교를 대항하려 했으나 유대인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이우스는 유대인의 종을 근절하여했다. 곧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이었다. 그러나 이 세 때 반의 모습은 다니엘서 세밀한 예언이 없다. 세 때 반은 계시록에 용과 짐승과 새끼 양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한 때 세 때 반의 마지막 때는 남방의 왕 곧 수양인 중동의 나라가 북방 왕인 유럽을 지름으로 전쟁이 일어나고 남방 왕은 폐하여 중동은 북방 왕의 시대가 된다. 이 전쟁은 제 1차 세계 대전이다.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중동의 오스만 터어키는 폐망하고 중동은 유럽의 수중에 들어걌다. (A. D1917) 이 때에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은 영국의 수중에 들어가고 영국은 영화로운 땅과 바다사이 곧 유대인과 아랍 사이에 장막 궁전인 위임 통치기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영국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예루살렘에서 물러가고 말았다. 곧 천사장 미가엘의 도움으로 유대인은 나라를 얻은 것이다. (단 12:1) 정한 때와 역사를 대조하면 세 때 반은 제 1차 세계 대전이요 1290일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되며 1335일에 정한 때가 끝난다. 그러나 1335일로 예언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계시록에 의하면 정한 때는 여섯째 나팔에 속한다.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이를 때 다윗의 언약이 회복되며 메시야가 오신다.

다.

‘설교를 위한 성경연구(구약편)

본장은 선택된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도와 사회 규범에 대한 규례이다. 이러한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행해야 할 것들이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증거 해 준다.

이스라엘 자손...이르라 - 본장에 언급 되어 있는 규례와 범도를 지켜야 할 대상은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 그 대상은 구약 당시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다. 그러나 이 규례는 반드시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즉 오늘날의 성도들은 본 규례 속에 내포 되어 있는 근본 정신을 바로 깨달아 삶의 전 영역에서 이를 실천해야 한다.
너희는 거룩하라...너희 하나님이 거룩함 이니라 - '거룩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되다', 분리되다'란 뜻으로, 모든 죄악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부터 구별되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 속성상 거룩한 분으로 죄악된 모든 것과는 본질적으로 분리된 절대 순결하신 분이다. 따라서 언약의 백성 역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부정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각종 정결법을 제정 하셨고,또한 정결법의 준수를 통해 외적 정결 상태에서 내적이고 영적인 정결의 상태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44 주석을 참조하라.


부모를 경외하고 - 십계명 중 제 5계 명인 '부모 공경'에 대한 규례이다(출 20:12) 실로 부모 공경은 대인(對人) 계명의 근간으로서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계명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단순한 행동 규범, 곧 윤리적 차원을 넘어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여 세우신 종교적 규범이기에 곧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요일 4:20). 이처럼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과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서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것으로 진정 부모공경이야 말로 이 땅에서 성도의 가장 근본되는 의무라 할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20:1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유대인들의 교육 지침서에는 다음과 갈은 내용이 있다. 즉 먼저 랍비가 질문을 한다. "자녀가 마땅히 부모에 대하여 가져야 할 공경이란 어떠한 것이뇨?" 그러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한다. "그것은 곧 부모님의 뜻을 거스리거나 부모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요. 또한 부모님의 말씀에 반박하거나 그 허물을 들추어 내는 것도 아니며, 살아계실 때는 물론이요 돝아가셨을 때도 부모님의 존함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대신 '제 부친'(모친) 혹은 '어르신'(당신-존칭어로 쓰이는 제 삼인칭 대명사)으로 부르는 것이며, 또한 물질적으로도 성심껏 보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 p. 518).
(주);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 십계명 중 제 3계명에 대한 규례이다(출 20:8-11).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에 창조하시고 제 7일째 되는 날 쉬신 것에 그 기원을 두는 규례로서, 지역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영속적인 효력을 갖는 여호와 종교의 독특한 제도이다(창 2:1-3;출 16:23-30). 그러므로 성도들은 안식일 규례를 통하여 그 속에 담긴 휴식과 창조 및 완성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진정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고 되새기는 뜻 깊은 날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출 20:8-11의 주석 부분을 참조하라.
(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 18:2 주석 참조


헛 것을 위하지 말며 - 헛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릴'(*)은 '아무 것도아닌'(nothing)이란 '알'(*)에서 유래한 말로 '무가치한 것'(no value thing ofnought)즉 우상(idol)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상의 속성을 잘 드러낸 말이다. 그런데 한편 오늘날 이 '헛 것'은 비단 우상 숭배 뿐만 아니라 돈, 권력, 성적 쾌락 등 신앙적인 삶을 방해하는 반신앙적인 모든 것을 지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나'(*)는 '향하다', '대면하여 서다'란 뜻으로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섬기기 위해 얼굴을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상(神像)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 십계명 중 제 2계명이 대한 규례로서, 숭배의 목적으로 그 어떤 형상물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출20:4-6 주석 부분을 참조하라.

가증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픽굴'(*)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다'(stink), '악취를 내다'(fetid), '혐오할 만한 것'(abominable thing)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비록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 드리는 기쁨의 제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규례를 거스릴 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 악취만 풍기는 쓸데없는 제사가 되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 규례가 시행되는 초창기부터 제사의 근본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결코 그 '제물'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암시한다(삼상 15:22;사1:11-17).


이 부분은 사회적 기득권을 갖지 못한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자 보호 규정이다. 이 규정은 율법의 2대 정신, 곧 자비와 공의의 정신 중 하나님의 자비하신 속성이 잘 드러난 부분으로서, 이방 민족의 법전에 대한 이스라엘 율법의 탁월성을 웅변적으로 증거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범죄한 당신의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가운데서도 결코 자비의 손길을 멈추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공의로서 그 위(位)가 견고히 세워지도록 하시고(잠25:6) 하나님의 통치의 보좌의 기초를 이루시나(시 97:2;잠 16:12), 그 가운데서도 곤고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밭 모퉁이까지...줍지 말며 - 히브리인들은 추수할 때 율법에 의해서 밭 모퉁이에 있는 곡물 및 땅에 여기 저기 떨어진 낟알을 줍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것은 자기 기업을 갖지 못한 가난한 자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키 위한 것으로 안식년, 희년 제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이웃 사랑의 대표적인 실천 규범이다. 유대 랍비들은 구체적으로 밭 모퉁이를 그 밭 전체 면적의 1/60로 규정하였다고 한다(MatthewHenry). 한편 구약 성경에서 이러한 명령이 구체적으로 시행된 실례로는 룻의 경우를 들 수 있다(룻 2:2,3).
포도원 열매를 따지 말며 - '포도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럼'(*)은 일반적으로는 포도밭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나 때로는 올리브(감람) 재배 단지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삿 15:5). 이처럼 가난한 자에 대한 보호 규정은 곡식 뿐만 아니라 과일에도 적용되었는데, 율법은 과일을 막대기로 딸 때 그 막대기가 닿지 않는 곳의 열매까지도 모두 따기 위해 나뭇가지를 흔들고 살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Keil). 한편 보충 내용은 병행 문구인 신 24:19-22 부분의 주석을 참조하라.

도적질 하지 말며 - 십계명 중 제 8계명에 해당되는 규례로서, 곧 타인의 재권산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금지 규정이다. 이와 같이 규정은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률로 인간 사이에 참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형성키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출 20:15 주석을 참조하라.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 거짓말은 아담과 가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출발된 것으로서 그 속성상 우리의 삶과 긴밀히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거짓이 사단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요 8:44), 거짓말하는 자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시 101:7;잠 12:22; 21:6;골 3:9). 한편 본절에서는 도적질과 거짓말을 같은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두 계명은 모두 인간이 모든 일에 정직해야 하며 남을 속이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 둘째, 두 계명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성설과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엡 4:25, 28).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 본절은 거짓 맹세에 대한 금지 규례이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절대 초월적 존재로서 그 이름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과 축복을 주는 복된 이름이다(요 17:11,12). 따라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이 거룩하신 이름으로 가변적인 인간의 의지를 다짐하는 것은 경솔하기 그지없는 행위이다(마 5:33-37). 더욱이 거짓 맹세는 인간 사이의 신의를 저버리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범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不敬罪)가 된다 (출 20:7).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 여기서 '욕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랄'(*)은 '구멍을 뚫다'(bore) '깨다'(break), '상처를 내다'(wound), '흠집을 내다'(stain)등의 뜻이다. 곧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오용함으로써 그 이름에 상처를 내고 흠집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름은 그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그 인격을 욕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불경스런 범죄였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 '압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솨크'(*)는'내리 누르다', '위반하다', '착취하다' 등의 뜻으로서, 곧 무력이나 권력 따위의 부정한 수단을 동원하여 사회적인 약자나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 율법은 이것을 엄히 금하고 있는데, 이처럼 타인에 대한 압제를 금지하는 본 규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 바 인권의 존귀성을 깨닫게 되는 동시에 아울러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교훈받게 된다(출 23:9;잠14:31).
늑탈하지 말며 - '늑탈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잘'(*)은 '가죽을 벗기다'(strip), '뜯어내다'(pluck)란 뜻으로 곧 폭력이나 권력등을 이용하여 타인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는 행위, 또는 남을 등쳐 먹는 가혹한 수탈 행위를 지칭한 것이다. 물론 이 규례는 단순히 개인적인 수탈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구조악으로 말미암은 집단적인 수탈 및 착취 행위에까지 적용된다.
품군의 삯 - 품군의 일당은 그와 그의 가족이 하루를 함께 살아갈 최저 생계비이다. 따라서 품군은 하루의 해가 지면 그날의 품삯을 애가 타게 기다리게 된다. 그런데 만일 사회적 강자인 고용주가 이러한 사실을 가볍게 여겨 쉽사리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滯拂)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생명줄을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사용주는 품군의 이러한 사정을 깊이 인식하여 지불의 의무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신15:18;말3:5;약5:4). 이것이 바로 모세 율법의 정신인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신분적, 경제적인 약자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약자에 대해서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 곧 듣지 못한다고 하여, 따라서 자기가 하는 말에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어 책임질 일이 없다 하여 귀먹은 자에게 함부로 화를 낸다든지, 혹은 욕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 본 규례를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이것은 소경 앞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유대 랍비들은, 설마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는 것과 같은 그러한 야만적인 행위를 누가 하겠느냐란 생각에서, 본절의 뜻을 상징적으로 풀이했다. 즉 마치 자기 앞에 놓인 장애물을 못보는 소경처럼, 쉽사리 어떤 꾀임에 넘어가는 어리숙한 사람들을 자기 목적상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 p, 502). 여하튼 병자들의 신체적 약점을 이용해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행위는 그들 역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결국 비웃고 모독하는 결과가 되어 율법의 혹독한 심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신 27:18;욥 29:15;마 9:28).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 출 23:3 주석 참조.
두호하지 말고 - '두호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르'(*)는 (...의 얼굴을) '선호하다'란 뜻으로서, 곧 재판 전 어느 특정인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그를 유리하게 해주겠다는 마음을 미리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 공의로 사람을 재판 할지며 - 즉 공정한 재판에의 명령이다(출 23:1-9;신16:18-20). 재판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그리고 사회와 사회 간의 옳고 그름, 정(正),부정을 밝히 드러내는 사법 행위로, 공정한 판결을 그 생명으로 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오직 공의만이 판결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구현되어야 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재판시의 공의가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다.


구약성서에서의 쉼 이해

최 종 진 (서울신학대학교 교수/구약학)

 

스트레스 속의 현대인

 

오늘 우리는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학적으로, 변화가 있는 곳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위험”과 “위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체 내부의 기능은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주어진 변화(스트레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대처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미묘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더욱 지나치면 ‘변태’나 ‘변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암세포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 내적 요인에 의해 내 몸의 정상 세포가 스스로 규제할 수 없는 암세포로 변화된 것이라 한다.

 

쉼의 필요

이런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는 쉼을 원하게 한다. 성서도 인간을 쉼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마 11:29). 하나님도 창조라는 엄청난 변화에서 쉼을 필요로 하셨다. 그래서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3). 그 쉼이 인간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아 그 날을 안식일로 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사실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바쁘고 피곤하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에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이기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현대인은 계속 바쁘다. 그는 자기가 자는 동안에도, 더욱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세상일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쉼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창 2:2-3).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잘 쉴 줄 아셨던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쉬신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쉼은 일(창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쉼을 배워야 한다. 이 날의 하나님의 쉼은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함께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

 

쉼의 오해(誤解)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안식을,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은 것과 관련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래방이나, 디스코테크를 찾아 시간을 소리로 채우고, 취하도록 마시거나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시내산 아래서는 요란스런 반동이 일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며 쉬고 있던 모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여유로웠던 것처럼 각자의 고된 일터에서 쉼의 얼굴로 사람들에게 여유를 보이며 쉼을 나누어주는 얼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여유와 쉼에서 우리는 온유와 안식을 얻게 된다. 여유를 잃은 현대인은 성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쉼을 찾아야 한다. 안식일을 찾아야 한다.

 

구약의 시간 이해

구약종교는 시간의 성화(聖化)에 목표를 둔 시간의 종교이다. 공간적 인식에는 시간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며 동질적(同質的)이지만 구약성서는 시간의 다양한 특성을 지각하고 있다. 시간은 사건이 포함된 흐름을 말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적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똑같은 두 개의 시간은 없다. 구약은 그래서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애착을 가지며, 거룩한 사건들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날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연결되어 있다. 거룩이란 귀한 단어가 창조 이야기의 끝에 쉼의 내용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 야웨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구약의 창조 기록에는 공간 속의 어느 장소적 대상(특정 지역이나 건물)에 거룩함의 특성을 부여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에 적용되고 있어 의미심장하다. 쉼은 장소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여유와 질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사건과 일 속에서 쉼을 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안식, 쉼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다.

 

구약에서의 쉼의 의미

창조에서의 안식의 의미는 창 2:2-3에 나타난다. 여기에 주동사 4개가 나오고 모든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셨다(????:2절)

2)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2, 3절)

3)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3절)

4)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3절)

 

첫째로, 쉼의 배경과 근거는 일의 완성, 또는 마침과 직결된다.

1번에 사용된 ???은 “완료하다, 완성하다” (complete), “끝내다, 마치다”(finish)의 뜻을 가진 동사 ???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하나님이 안식하게 된 근거는 1장의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간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행위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6일 동안의 구체적 일을 끝마침이 전제되고 있다. 천지 만물을 이루기 위해 하시던 엿샛날까지 일을 다 마침이 결국 참 안식을 가져온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은 어떤 일의 목표를 성취한 다음에 얻어지는 쉼일 때 가능하다. 일이 완수되었을 때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을 말한다. 한편 이 하나님의 휴식은 그 휴식에 인간이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희구하신다(히 3-4). 오늘 자기가 이루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고 거부한 자에게는 진정한 쉼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쉼은 “휴식”과 일로부터의 “분리”와 “재충전”의 뜻을 간직한다.

2번에 “쉬셨다”는 ??? (Kal 3인칭 남성 단수)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1) “노동, 일로부터 쉬다, 땅을 개간하지 않고 놓아두다”로 “쉰다”, “휴식하다”는 의미이며 2) “멈추다, 끝내다, 중단하다”, “자신의 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다”로 자신이 하는 일을 그치고 일단 그 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여 새로운 차원에 머무는 것이며 3) “장래를 위하여 따로 남겨 주다(put away)”, “저축하다”로 내일을 위해 재충전한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창조 사역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의인법적(擬人法的) 표현은 인간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연결선상에서 인간에 쉼을 주시는 성별한 축복의 상징으로, 창조의 완성을 축복으로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안식의 의미는 복됨을 함축한다.

3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렛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는 “몸을 구부리다”(to bend), “무릎을 구부려 찬양하며 숭배, 예배하다”(to adore, to worship by praising on bended knees(시 10:3, 수 24:10), “…을 신성하게 하다”, “신이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다, 축복하다”(to bless), “인사하다”(greet, salute) 등을 의미하는 동사 ???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서 피조의 세계에 풍성한 결실과 번영된 삶을 주셨고 행복과 성공의 시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축복의 활력을 부여하여 인간존재가 풍성케 되는 능력을 새로이 공급하는 날로서 안식일의 쉼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이 인간을 확인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인정하고 대우하여 축복적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하는 안식이다.

 

넷째로, 이 안식일을 거룩케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4번).

구약은 거룩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보다는 누가 거룩하냐를 묻는다. 야웨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께 속한 것이 거룩한 것이다. 안식일이 왜 거룩하냐면 야웨께 속한 날이기에 거룩하다. 이스라엘 땅이 왜 성지(聖地)냐면 하나님께 속해서 거룩한 땅이다. 즉 구별되어 하나님께 성별된 날이기에 안식일이 거룩하다. 이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 참 안식이 되고 복이 되고 참 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 그의 통치권 안에 있어 그의 평강과 희락을 간직할 때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참 쉼을 얻게 된다(시 23).

구약, 혹은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거룩함의 관념이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사물에서 사건들로 서서히 이동되었다. 신성함의 특질은 물체의 알맹이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는 행위와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의한다. 예언자들도 “야웨의 날”을 “하나님의 집”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한다.

 

안식일은 계약의 상징적 물체나 부적들이 불필요하다. 안식일 자체가 계약의 징표요 상징이다. 안식일에 모든 영혼들이 거룩함 속에 부활하는 소생의 활력을 얻는다. 거룩한 시간이 우리 인간에게는 참 안식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날의 시간이 참 쉼으로 표현된다(시 84:10). 선한 한 시간이 일평생의 가치에 대등할 수가 있으며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피함으로써 잃은 것들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순간에 회복 받을 수도 있다.

 

여기의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와 더불어 미래를 위한 재충전의 기회를 의미한다. 이 안식일은 안식년(채무 면제, 종의 해방)으로 그리고 희년(땅 안식, 토지 재분배, 노예 해방, 속죄, 속량)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오직 시간의 성화를 통하여 시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인간의 과업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룩함에 동참하라는 호소를 받게 된다. 심지어 영혼이 시들고 그리하여 꽉 잠긴 목구멍으로부터 단 한 마디의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안식일의 청아하고 안온한 안식은 우리를 가이 없는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여 영원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게 한다.

 

다섯째로, 구약에서 최초의 실제 안식은 광야의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약속된 땅에 들어가 안전한 거처에 머물게 된 하나님 백성이 소유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수 1:15)에서 안식을 나타내는 동사는 “휴식하다”(to rest), “익숙되어 안정되다, 정주하다”(settle down)는 ???의 ???? (Hiphil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형이다. 영적인 차원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육체적으로 곤고하고 피곤한 사막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정착하여 얻는 휴식으로 평안히 거함을 의미한다. 또한 사방의 대적(對敵)을 다 멸하고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안식을 의미하기도 한다(수 23:1, 삼하 7:1, 왕상 5:4). 이는 구속과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주위 환경과 생활의 안정으로 평강의 안락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룻 1:9, 3:1). 가나안 땅에서의 휴식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는 미래의 희망과 축복의 값진 교리로 발전한다(삼하 7:1).

 

여섯째는 계약 공동체적 노동과 휴식의 평등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은 출애굽 사건에 근거한 시내산 계약의 표징으로 그 계약 백성이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계약 백성으로 자기를 확인했다. 할례가 신체상의 계약 표징으로 순간 순간 확인되는 것이었다면 안식일은 시간 속에 나타난 계약 징표로 그날에 계약 공동체는 누구나 일에서 쉬도록 하여 휴식의 평등화를 이루며 계약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이다(신 5:14).

 

일곱째로, 잠의 쉼이 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휴식이 되는 것이 바로 잠이다(욥 3:13). 그래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고 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는 “평안하게 해주다”, “쉬다”(rest), 그리고 “잠자다”, “조용히 있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 의 명사이다. 경쟁 사회에서 바쁘고 수고가 많은 세상살이에서(시 127:1-2)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진정한 쉼이 되는 잠을 주신다는 것이다. 생체에는 여러 리듬이 있어 여러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리듬이 “24시간 순환 리듬” (circadian)이고 이 중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수면 리듬이다. 수면은 안구가 급속히 운동하는 “REM 수면”과 그렇지 않은 “NREM(Non-REM) 수면”이 있다. REM 수면 중 80%에서 꿈을 꾸며, 이 두 가지 수면에서 각각 내분비와 생리 기능이 달라진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 때 자아 붕괴, 환각, 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REM 수면 중에 나타나는 꿈을 못 꾸게 하면 과민성, 피로가 나타난다. 잠은 낮 동안 소모되고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낮 동안의 생존 기능과 본능적 보조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 조절하도록 한다. 더욱이, 인지적 기능으로 낮 동안 학습된 정보를 재정리하여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재학습 및 기억시키게 하는 기능도 한다. 또한 감정 조절 기능으로 불쾌하고 불안한 감정들이 꿈 등을 통해 정화되어 아침이면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잠이 쉼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현대인은 죄책이나 죄로 말미암는 갈등을 고상한 말로 바꿔서 스트레스나 콤플렉스 등의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갈등과 피곤의 깊은 곳으로 추적해 들어 가보면 죄 문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많다(시 38편).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아가 죄가 눈같이, 양털 같이 희어질 때 근본적 참 안식을 얻게 된다(사 1:18).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의 안식의 결과인 “축복”과 “거룩”은 안식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한 주일의 6일간을 우리는 공간적 물체의 압제 아래서 살다가 안식일에는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조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에 동참하고 창조의 결과들로부터 창조의 신비로, 창조의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래서 쉼, 안식을 철저히 지켜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 안에 거룩하게 사는 것이 참 쉼의 지름길이다. 의롭고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구약의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 성경의 지혜서 / 시간 개념  (0) 2020.09.23
소선지서 총론  (0) 2020.09.23
나훔서 - 말라기서  (0) 2020.09.23
가나안 일곱 족속 및 그 영적 의미  (0) 2020.09.18
이사야의 예언 성취 - 새 출애굽  (0) 2020.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