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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아모스서에 나타난 남은자 사상

by 은총가득 2020. 8. 29.

Ⅰ.서론

 

  A. 문제 제기

 

  아모스 서는 소선지서에 속하는 작은 책이지만,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 주된 이유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아모스는 성경에 기록을 남긴 선지자들 가운데서 연대적으로 최초에 해당되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모스 서에 대한 연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째, 아모스 서는 뛰어난 문체로 인해서 학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셋째, 아모스 서에 나타난 강한 사회 윤리적인 메시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아모스 서가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모스에 나타난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때문에 아모스는 ‘멸망의 선지자’, 혹은 ‘공의의 선지자’란 단편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켜왔다.1) 이러한 점을 윌리엄S. 라솔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아모스는 전문적인 신학자도 아니며, 아무런 교리적인 내용도 제공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태도에 대한 점들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우        리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위대한 통찰력을 간과해 버리고, 20세기        초기의 학자들처럼 아모스는 사회 정의를 외친 연설가라고 생각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실 정의에 대한 아모스의 외침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다.2)

 

  또한 삐에르 마미도 아모스가 갖고 있는 위대한 사상의 깊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아모스 서는 우리말 성경편집상 소선지서의 세 번째 책이다. 그럴        지라도 시대적으로 보면 선지서 전체 중에서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이 책은 다른 성경에서는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하        고 개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9장 146절이라는 비교적 짧은 양        이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풍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남은        자”라는 주제, 모든 유산 계층(성직자, 귀족 재판관, 상인)에 대한        책망, 예배의 형식주의에 대한 저주, 분명한 회복에 대한 주저 없        는 약속 등이다.3)

 

  따라서 우리는 아모스의 ‘저주와 멸망의 선언’이 ‘회복과 사랑의 징벌’이라는 예언의 내용을 간과한 채 아모스를 단지 ‘멸망의 선지자’란 이미지만을 갖도록 부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제시할 필요를 갖게 된다.

 

  B. 연구의 주안점

 

  본 논문에서는 문제 제기에서 언급하였던 것 처럼, 아모스가 ‘공의의 예언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대변한 사랑의 선지자’란 측면도 부각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의 전개상 아모스가 선포한 예언의 내용보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전제는 아모스가 선포한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이다. 버나드 W. 앤더슨은 아모스의 메시지의 중요한 신학적 전제 가운데 하나를 ‘아모스의 신관’이라고 간파하고 아모스가 선포한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의 신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의 신        이며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뿐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의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무감각(감정의 결여)하여 인          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헬라 고전 철학의 ‘부동        의 동인’과는 달리 아모스의 하나님은 인간에 개입하여 열정적으로        반응하신다.4)

 

  아모스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한다. 그 신탁중 중요한 두 가지 테마가 바로 “징벌”과 “남은 자”이다.5) ‘공의의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상이 바로 ‘징벌’의 의미로써 아모스가 선포한 ‘여호와의 날’이요, 사랑과 언약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위대한 사상은 ‘남은 자’이다.

  따라서 아모스 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여호와의 날’의 개념과 ‘남은 자’ 사상의 개념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선포된다. 이에 본 논문은 아모스가 선포한 ‘남은 자’ 사상과 ‘여호와의 날’에 대한 새로운 의미 그리고 이 두가지 사상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하여 연구의 주안점을 두고 논의하고자 한다.

 

  C.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아모스 서’이다. 특히 아모스 서 중 ‘남은 자’와 ‘여호와의 날’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암5:14~20을 주 본문으로 고찰하며, 이 본문으로부터 확장되어 ‘남은 자’와 ‘여호와의 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된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본 논문은 연구의 목적에 따라 ‘남은 자’ 사상과 ‘여호와의 날’ 사상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개념을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사상의 기원, 발전 및 의미와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을 전제로 하는 성경신학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는 구속사적이고 해석학적인 방법을 중심으로 고찰해야하기 때문이다.6)

  이상과 같은 범위와 방법론으로 필자는 다음과 같이 본 논문을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Ⅱ장에서 아모스 서를 개관하고 본 논문의 주요 본문인 암5:14-20을 구문론적 신학적 방법에 의해 주해했다.7)  Ⅲ장에서는 아모스 서의 ‘남은 자 사상’을 다루었다. 이를 위해 성경에 사용된 ‘남은 자’를 어의(語義)적 분해를 통해 살피고 그 ‘남은 자’사상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다룬 뒤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을 심판 대상과 구원 대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로 아모스 서에 명시된 본문을 중심으로 주석(註釋)적 방법을 통해 언급하였다. Ⅳ장에서는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 사상을 다루었다. 이를 위해 먼저 ‘여호와의 날’의 기원과 배경 및 그 사상의 발전을 다룸으로써 아모스 예언의 배경에 대한 선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Ⅴ장에서는 지금까지 논의한 연구의 핵심 부분으로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과 ‘여호와의 날’ 사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리고 Ⅵ장을 끝으로 결론지었다.

 

 

Ⅱ. 아모스 書 개관 및 암5:14-20 주해

 

 A. 아모스 서 개관

 

  1. 선지자 아모스8) 연구

 

  아모스는 남쪽 유다의 드고아9)에서 온 목자10)이며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이다(암1:1 ; 7:4,15). “그는 자신의 작은 양떼를 따를 때에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11) 그는 사마리아의 몰락(721)이 임박하였다는 것과, 그 후에 예루살렘도 몰락(587)하리라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12)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는 “선지자들의 사상은 그들이 선포하기로 되어 있는 미래사건에 이해 산출된다”13)고 말하면서 “아모스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음”(8:2)을 깨닫는다.”라고 언급하였다.14)

  벨하우젠(Wellhausen)이후15) 많은 학자들이 아모스를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선지자로 看做했으며16) 그의 메시지는 미래의 소망이 없고 철저한 멸망을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모스가 멸망의 선지자란 오해를 받은 것은 다른 선지자들보다 비판적 용어로 다가올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이다.17) 윌리엄 S. 라솔은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이전 세대의 학자들, 그리고 현재의 일부 학자들은 8세기의 선지자들이 ‘심판과 멸망을 외친 선지자들(prophet of doom and gloom)’이었기 때문에 소망에 대한 부분들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또 주장하고 있다. 이 견해는 오늘날은 대체로 배척을 당하고 있다.”18)

  또한 어떤 학자들은 아모스가 다가 올 심판에서의 생존자를 언급하는 구절은 아모스의 글이 아니라는 학자들에 반대하여 그 구절들은 破滅을 강조하는 아모스의 수단이라고 강조한다.19) 즉, 아모스의 예언에는 멸망과 소망이 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아모스 예언의 배경

 

   아모스는 유다 왕 웃시야(주전 779-740)시대, 곧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주전 783-743) 때20)에 선지자21)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북쪽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자의 생활을 했으나 그의 고향은 남쪽 유다에 있는 드고아 였다(1:1).

  당시 사마리아는 예후의 손자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눈부신 치세가였다.22) 여로보암은 레바논과 안티레바논(Antiliban) 사이에 있는 산간 협로 입구의 이스라엘 국경을 재견하였는데, 그곳은 솔로몬 때부터 왕국의 북방경계선이던 하맛(Hamath)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사해까지 이르렀다. 이렇듯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게 된 성과는 다메섹 왕(벤하닷 3세)과 앗수르 왕의 쇠퇴에 크게 힙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는 르신 왕이, 아수르에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23)가 얼마 후에 다시 흥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메섹은 732년에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정복되어 먼저 멸망하였고 사마리아도 721년에 망하였다. 애굽에서는 제23대 리비아(Libya)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8세기 중반이 채 되기도 전에 북왕국은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던 것 같이 보인다. 즉 당시의 번영은 전무후무한 엄청난 것이었다. 이러한 평화와 부유함은 귀족계층의 “안일”과 더불어 불의한 재판 그리고 장사치의 부당한 탐욕과 성직자의 교만을 부채질하게 되었다. 바로 이점들이 아모스로 하여금 분노의 책망을 토하게 하였고 그러한 아모스의 태도는, 아모스가 선지자들 가운데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의 으뜸가는 보호자로, 사회적 부정에 대항하여 선두에서 싸우는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다.

  엄청난 죄 “사마리아의 범죄”,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은 벧엘과 단의 제단이었다. 이방인들의 제사의식이 성행되어졌다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북왕국의 우상숭배의 죄가 나라 전체를 짓눌렀다. 물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는 자를 결코 용납지 않으실 것이었다.24) 이러한 분열의 죄와 정치적 실수는 벧엘과 단의 제단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용서받고 회복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마리아에서 니느웨로 붙잡혀가 유배생활을 하고 나서 100년 후에야 유다의 선한 왕 요시야가 그 제단들을 파괴하게 될 것이었다.

  주전 750년경에 아모스는 사마리아 뿐만 아니라 벧엘에도 머무르게 된다. 그는 임박한 징계를 선포하였다.

 

  B. 암5:14-20 주해

 

   1. 본문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       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       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       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이 여기시리라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       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우리리       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       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 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         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      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       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   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2. 본문주해

 

   a).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ו       חת ןעמל ער־לאו בוט־ושׁרד). ‘구하라’(ושׁרד)는 생각하며        (resort to), 찾으며(seek), 탐구하며(study), 실천하는 것           (practise) 등을 말한다. ‘선’(בוט)은 ‘여호와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b). ‘(그렇게 행한다면), 여호와께서 너희 말과 같이 너희와 함        께 하시리라’(םתרמא רשׁאכ םכתא־־־ הוהי ןכ־יהיו). 원문        은 ןכ־יהיו(and it was so)로 시작되나 한역은 생략했다. 그        뜻은 너희가 앞의 말한 것을 ‘그렇게 행한다면’이다.

   c).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ובנהאו ע־ואנשׂ בו         ט). 이 말씀은 14절을 반복, 더욱 강조하는 말이다.

   d).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טפשׁמ רעשׁב וגיצהו). ‘공의’        (טפשׁמ)는 공정한 재판으로 오는 정의를 말한다.

   e). ‘혹시’(ילוא). 아직도 미확실 한 것, 의심의 여지가 있는 상        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강한 소망을 나타내는 말이다.25)

   f). ‘요셉의 남은 자’(ףסוי תיראשׁ). תיראשׁ는 ‘남다’라는 뜻의 동        사 ראשׁ에서 파생하여 ‘남은 자’란 뜻을 갖는 여성 단수 명        사이다. 이스라엘은 망할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 즉        ‘알갱이(9:9)’를 보존할 것을 약속하셨다.

   g). ‘긍휼히 여기시리라’(ןנהי). ןנהי(Qal, Impf)으로 이 어근의         뜻은, shew favour, be gracious이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        해하면서 남은 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소수의        무리들은 대부분의 무리들이 자기들의 뜻에 동참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백성들이 다 빗나가려고 할지라도 하나        님은 소수의 무리들을 부르셔서 화재를 피하라고 하듯 그들        이 악에서 피하도록 촉구하신다.”26)

   h).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말씀하시기를’(הוהי        רמא־הכ ינדא תואבצ יהל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란 이        칭호는 언약의 백성들의 당하는 모든 전쟁을 이기게 하시며,        모든 애로를 타개해 주시는 만군을 거느리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잡으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이다.

   i).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דפסמ תובחר־רכב). ‘울겠고’        는 ‘흐느낌의 울음’을 말한다.

   j).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ורמאי תוצוח־לכב        ו וה־וה). ‘거리’ תוצוח의 단수 צוח는 집이나 시내 밖을 말        하나 특별히 그 복수형은 흔히 ‘길거리’를 말한다. LXX경은        ὁδί?(ways)라고 번역했고, KJ은 High ways라고 했다.

   k).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לבא־לא רכא יארק). ‘농        부’ רכא는 농사를 업으로 하는 시골 사람을 말한다.

   l).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יהנ יעדוי לא דפסמו).        ‘울음군’ יהנ יעדוי을 JB은 ‘직업적인 울음군’라고 했다. 이        울음군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소리하며 통곡 할 줄을 아는        특별한 기술을 익힌 자들이다.

   m).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דפסמ םימרכ־לכבו). 이 뜻은        모든 기쁨이 슬픔과 통곡으로 변할 것을 의미한다. LXX경        은 ‘포도원’(םימרכ)을 ‘길’(םיכרד)이라고 잘 못 읽었다.

   n).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ףברקב רבע        א־יכ).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

   o).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מיואתמה יוה        הוהי מוי־תא, Ah! They who desire the day of Jehovah!).        한역의 ‘화 있을진저’는 יוה(아하)라고 탄식하는 말이다.27)         보통 이 말은 죽은 자들에 대하여 슬픔을 토로하는 통고이        었다(참조. 왕상13:30).

   p). ‘여호와의 날’(הוהי מוי, The day of JHWH)은 아모스에게        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원수를 이겨주시는 날이 아니라 오히        려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날이다.28) 그러기에 이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의로운 자에게는 생명을 악        한자에게는 멸망을 줌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나타내        는 날29)이 곧 여호와의 날이다.

   q). ‘사모하는 자’(מיואתמה)는 어근, הוא(incline, desire)의Hith,        pt, mpl. 형이다. 갈급한 마음으로 사모하여 따르는 자30)를        말한다.

   r). ‘너희가 어찌하여 그 날을 사모하느뇨’(הוהי מוי כל הז־המ        ל, For what reason to thee the day of JHWH). 직역은 ‘여        호와의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 있느냐?’이다. 원문 הז־המ        (어찌하여)에서 הז는 המל를 강조한다.31)

   s).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רוא־אלו ךשׁה־אוה). 무        서운 재난을 상징하는 말이다(cf. 사5:30, 8:22, 58:8, 렘13:16)

   t).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ינפמ שׁיא ?וני רשׁאכ ירא         ה). רשׁאכ는 as when, 혹은 as if의 듯이다. ‘피하다’(?וני)는        말은 ?ונ(flee, escape)의 impf형이다.

   u). ‘곰을 만나거나’(בדה ועגפו). ‘만나다’(ועגפו)는 עגפ의 pf.         형 waw consec이다. 그 뜻은 meet, encounter, reach등이다.        이 만남은 기쁜 만남이 아니라 그 아랍 어근의 뜻은 고통을        주는 만남을 의미한다.32)

   v). ‘혹 집에 들어 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ודי ףמסו תיבה א        בו ריקה־לע). ‘벽이’란 ריק(wall)는 흔히 ‘담장’을 말하나         집안의 ‘벽’을 말하기도 한다. 벽에 ‘대었다’란 말, ףמסו는         pf. 형이나 waw consecutive이다. ףמס는 lean, lay, rest 등        의 뜻이다.

   w). ‘뱀에게 물림 같도다’(שׁחנה). ‘뱀’이란 말(שׁחנ)는 뱀의 독특        한 그 소리(hiss)에서 왔다고 한다.33)

   x).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ףאח־א        לה רוא־אל הוהי מוי).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ול הגנ־אלו לפאו). ‘캄캄        하여’란 말 לפא(goomy)는 ריא(light)와 동의어이다. 위의         두 구절은 모두 18절의 뜻을 반복 강조한 것이다. 18절과 20        절 사이에 끼어 있는 19절은 빛이 없는 어둠의 환란의 상태        를 묘사한 말이다.

 

   3. 본문설명

 

  본문은 아모스의 세 번째 메시지(5:1-17)와 네 번째 메시지(5:18-27)사이에 있는 것이다. 아모스의 세 번째 메시지(5:1-17)와 네 번째 메시지(5:18-27)는 하나로 뚫고 있는 진리를 조명하기 위해서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각 메시지는 대구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먼저 나온 구절의 주제가 다음에 나오는 구절 속에서 역순으로 반복되고 있다.34)

  대구적인 구조 속에서는 두 번째 혹은 중간의 주제가 반복이 되든지 안되든지 간에 그것들은 전체 메시지의 중심적인 초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아모스의 세 번째 메시지에 있어서 이 중심적인 초점은 능력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맞추어져 있다.

  a. 확실한 심판에 대한 묘사(1-3절)

  b.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함(4-6절)

  c. 법적인 불의에 대한 고발(7절)

  d.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8-9절)

  ć. 법적인 불의에 대한 고발(10-13절)

  ƀ,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함(14-15절)

  á. 확실한 심판에 대한 묘사(16-17절)

  네 번째 메시지의 중심적인 초점은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a. 확실한 심판에 대한 묘사(18-20절)

  b. 종교적인 위선에 대한 고발(21-22절)

  c.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함(23-24절)

  ƀ, 종교적인 위선에 대한 고발(25-26절)

  á. 확실한 심판에 대한 묘사(16-17절)

  이 두 메시지는 모두가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하나의 진리를 드러내 주고 있다. 즉 능력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법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고 종교적인 위선행위를 계속하는 나라 전체를 심판하실 것이나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개별적으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었다.35)

  필자가 주요 본문으로 삼은 암5:14-20절은 위와 같은 대구적인 문장 구조속에서 개인적인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14-15절)과 확실한 심판에 대한 내용(16절-20절)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의 남은 자’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5장 15절은 ‘장례의 애가’36)라 일컬어지는 암5:1-17에 있는 말씀이라 그 의미가 더욱 새롭다. 큰 애도와 애곡의 노래속에 구원의 약속으로 ‘요셉의 남은 자’가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37) E. B. Pusey는 ‘요셉의 남은 자’가 주는 희망적인 메시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대부분이 회개하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에,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기시겠노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요       셉의 남은 자, 곧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가 칠천이나 있었       던 것처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만을(롬11:4,5) 언급하셧던       것이다. 나머지는 강팍케 된 반면, 그들만큼은 회개하였던 자들이        었다. 그 분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조상의 행실을 상기시킬 목적       으로, 에브라임이 아닌, 요셉을 거명하고 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축복은 에브라임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        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다 몰수 되고 말았다.---과연 남은 자만        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38)

 

  곧 이것은 아모스가 ‘멸망만을 선포한 멸망의 선지자’란 주장39)에 대한 중요한 반론이 된다. 필자는 이것을 Ⅲ장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요셉의 남은 자’에 대한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한 자신의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의 표현이라면 ‘확실한 심판’을 언급하는 16-20절에 등장하는 철저한 멸망의 날로써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아모스의 언급은 파격적인 선언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일부의 해석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죽음의 날’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증했다.

 

     그것은 예언자가 의도하는 바를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그들은 예       언자가 자살을 기도하고, 자해하려고 하는 절망에 빠진 사람에 대하       여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을 사모       하는 자에게 화가 있겠다고 한 것은 어떤 치유책도 보이지 않는 것       처럼 목을 매거나 독약을 마심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에게 화       가 있겠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내가 이미 여러       분에게 상기시켰듯이 위선자들을 분기시키고 있는 것이다.40)

 

  아모스가 전통적인 ‘구원의 날로써 여호와의 날’이 아닌 ‘저주의 날로써의 여호와의 날’을 선포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모스의 청중들은 ‘여호와의 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1)

  이 네 번째 메시지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위선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날’이 그들을 높이 고양시키는 날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포로로 잡혀가는 날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아모스 예언을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הוהי מוי)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절은 바로 본문 암5:18-20절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모스가 ‘여호와의 날’ 개념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개념이 이미 모든 백성들의 밈음 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42)

  바로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저주의 날’, ‘심판의 날’이라는 개념보다는 ‘승리의 날’, ‘회복의 날’, ‘구원의 날’이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인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의 날’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운명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호와의 날은 언약으로 약속되었던 ‘황금 시대’를 뜻하였다. 교만한 가운데 그들은 안일함과 우월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최고 민족’으로 불렀을 것이다(6:1).”43)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자는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고 역설하였으며, “이 날의 두려움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말하고, 그 괴로움을 어둠에 비유하였다.”44) 즉 여호와의 날과 관련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그 날을 환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45)

  아모스 서에서는 특별히 저주의 예언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다. 암7:1-8, 8:1-2, 9:1의환상 가운데서 아모스는 여호와가 이스라엘 위에 불행을 가져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물론 인접 적대 국가들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지만 그 예언에 첨가되어 있는 ‘심판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을 훨씬 더 혹독하게 치는 말이다.(암2:6-10).

  저주의 선포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위협으로 요약된다. 바로 이날은 “빛이 아니라 어둠일 것이며”, 북왕국과 그 왕조는 패망할 것이고46), 전쟁47)과 추방48), 지진49)과 떼죽음50)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덮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여호와와 그의 뜻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51)을 보여준다. 암5:15절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고 하므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암9:11-15절에서는 구원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아모스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에 관한 예언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구원의 날에 경건한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과 ‘남은 자’에 대한 신학을 연결하여 그 신학을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가 제시하는 것 처럼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셉의 남은 자’와 ‘여호와의 날’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헛된 외식의 제사와 종교적 위선에 빠져있으면서도 구원의 날을 대망하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에 멸망과 저주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지는 악인의 자그마한 남은 자까지도 모두 멸망하시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을 제 Ⅲ장의 심판대상으로써의 「남은 자」에서 자세히 고찰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의 날’에 임할 구원을 선포하신다. 그 구원은 ‘요셉의 남은 자’에게 임하는 것이다. 또한 이 구원은 혈통적 선민(選民)의 벽을 깨고 ‘이방의 남은 자’를 향한 구원으로 확대 적용된다. 이 위대한 사상이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제 Ⅲ장의 구원대상으로써의 「남은 자」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Ⅲ.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남은 자’에 대한 의식을 고찰 할 필요가 있다. 이에 먼저 ‘남은 자’ 의 어원적 의미를 살피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남은 자’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A. 「남은 자」의 어의적(語義的) 고찰(考察)

 

  구약 성경에서는 ‘남은 자’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용어들이 약 540여회 등장한다. 이들 용어들은 ‘남은 자 사상’의 여러 측면을 제시하고 있으나 결국 이들을 종합하면 ‘남은 자 사상’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 「남은 子」는 종말론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핵심적인 동기이다. 히브리어, 아랍어, 희랍어의 用語들은 「남은 자」 思想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주제는 좀 더 폭 넓은 語義 영역에 속하는 말들에서 나타난다.52)

  특히 舊約 성경에 나타난 「남은 자」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6개의 어근을 통하여 잘 표현되고 있다. 이 6개의 어근은 ראַ?(Sh ar), ת??(p lat), ת??(m lat), ר??(y tar), ך??의 명사형 ךי??(s rid), ר?אָ의 여성명사 תי???(’aharit)이다.

  키텔은 이 어근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53)

  첫째로, ראַ?(Sh ar)은 단순히 남기다, 남겨지다, 남다 등을 의미한다. 둘째로, ת??(p lat)은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피하여 남은 자란 뜻이다. 셋째로, ת??(m lat)은 ת??(p lat)에서 발전한 것이다. 넷째로, ר??(y tar)은 남겨지다, 남다, 남아있다 등으로서 남은 찌꺼기라기 보다는 분량이 충분하여 쓰고 남은 것을 뜻한다. 다섯 번째로, ‘도피한 자’, ‘남은 자’의 의미를 가진 ך??의 명사형 ךי??(s rid)이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ר?אָ의  여성명사 תי???(aharit)로써 뜻은 ‘the last', 'the latter time(신11:12)등이다.

  성경에는 이 6개의 히브리어 어조의 파생어들이 명사로서 또는 분사나 동사로서 각각 540번 사용되었다. 이에 각 어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ראַ?(Sh ar)

 

  이 단어는 구약에서 276회 사용된 가운데 이사야가 그의 ‘남은 자’ 신학에서 12회 걸쳐 즐겨 사용한 단어이다.54) 선택(選擇)과 정화(淨化)의 과정에서 하나님께 충성된 백성으로 보존함 받아 살아 남은 무리를 지시하는데 특히 이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55)

  ראַ?(Sh ar)의 동사 형들은 Qal 형에서 'to remain', Niphal 형에서는 'be left over; beleft behind', Hiphil 형에서는 'to left remain, foleave, to leave behind, to have left, to retain' 등을 의미한다.56)

  語根 ראַ?(Sh ar)의 파생어들은 때에 따라서 「무가치함」57), 「작음」58), 그리고 「무의미함」 또는 「나머지의 완전한 상실」59)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말은 강한 미래 지향적인 면을 나타내는 말로써 그 규모에 관계없이 「남은 자」의 갱생(更生)에 대한 본래적인 가능성을 강조한 말이다.60)

  요약하면 이 용어는 남은 자들이 그 본질은 비록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이외의 존재들이 완전히 멸절되어 사라진 것과 대조적으로 남겨져 보존되어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2. ת??(p lat)

 

  이 단어는 舊約에서 80회 사용되고 있으며, 같은 어족의 여러 가지 셈어들에 나타난다. 특히 이 단어는 戰爭에서 避하여 살아 남은 자들을 말할 때 흔히 사용된다. 이 語根에서 派生된 히브리어 動詞들은 다음과 같은 用例로 使用된다.

  먼저 Qal 형으로 'to slip away', 'escape'(겔7:16), Piel형은 'to escape', 'be delivered', 'to left escape', 'deliver', Hiphil 형은 'to deliver', 'to carry away safely' 등의 의미를 갖는다.61) 또한 명사형 תי??(p lit)은 도망자, 도피자(escaped one fugitive)62)를 나타낸다.

  그런데 실제 이 單語가 人間을 가리킬 때는 주로 ‘도피한 남은 자’(escaped remnant)를 가리켰다. 때때로 열 사람중 한 사람 정도의 救出 또는 전체의 損失이라는 순전히 부정적인 面이 表現되기도 하였다.63)

  그러나 대체로 이스라엘의 ‘도피하여 남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生命과 계속적인 生存에 대한 威脅에서 구출 받는 경험을 했다.64) 또한 이 單語는 하나님의 百姓들 중 일부는 Yahweh의 최후 審判을 면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믿음 있는 異邦人들까지 이 審判에서 救援 받을 수 있다는데 에도 사용되고 있다.65)

  요약하면 이 단어는 남은 자가 극도의 심판의 혼란에서 꺼내져 구출된 측면을 강조한다.

 

 3. ת??(m lat)

 

  이 어근은 ת??(p lat)에서 발전된 용어로서 89회 사용되었고 Qal 형은 사용되지 않았다. Piel 형에는 'to let escape', or 'slip, to deliver'(사31:5)로 사용된다. 또 Niphal형에서는 'to bedeliver oneself', 'escape'로 사용되며, Hithpael로는 'to escape'(욥19:20, 41:11)로 사용되었다.66)

  어떤 문맥들은 안전하게 도피하는 것이 불가능함(사20:6)과, 따라서 전체가 멸망되었음(삿3:29, 렘32:3-4)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맥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창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사망함을 면하라”. 렘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등에서는 도피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며, 왕상1:12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렘51:45 “나의 백성아 너희는 그 중에서 나와 각기 나 여호와의 진노에서 스스로 구원하라” 등에서는 ‘생명이 건져졌다’는 뜻을 가지며 마지막 때에 여호와께서 “도피한 자들”(사49:24-25)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욜2:22), “생명 책에 이름이 적힌 모든 사람들”(단1:21)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곳에 더 많이 쓰이고 있다.67)

   요약하면 실로 인간의 힘으로는 살아날 수 없는 위기에서 안전하게 도피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는 남은 자를 가리킨다.

 

 4. ר??(y tar)

 

  이 어근의 248파생어 형태들 중에서 적어도 110번의 용법이 ‘남은 자’사상을 내포했다.68) 이 낱말은 쓰고 남은 분량을 나타내는 의미로 제물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이 낱말도 ראַ?(Sh ar)와 같은 의미로서 ‘남은 자’를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69)

  ר??(y tar)는 'to remain', 'be left'의 뜻이며 Hiphil형에서는 'to cause to abound', 'to let remain', 'leave', 'to abound', 'excel'(창49:4)로 사용되며 Niphal형은 'to be left', 'remain'등으로 사용된다. 또한 명사형으로는 ‘잔류자’, ‘잔여’, ‘남은 자’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요약하면 이 단어는 ‘남은 자’ 사상에는 멸망의 위기 가운데서도 생존한 자란 기본 의미 외에 이면적으로 이미 주어진 축복의 약속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던 자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70)

 

 5. ךי??(s rid)

   이 단어는 ך??(s rad)71)의 명사형으로 그 의미는 ‘도피한 자’(one left, escape), '남은 자’(remnant)라는 의미를 나타낸다.72) 또한 이 단어는 구약에서 28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가 사용된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수10:20 “--- 그 남은 몇 사람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므로”, 신3:3 “---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등에서 나타난 내용은 전쟁과 관계되어 전쟁의 재난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이 단어는 재앙으로부터 존재하지만 그 생존자들이 결국 멸망당할 때 사용되거나,73) 재산이나 소유물의 ‘남은 것’(욥20:21) 결국 없어진 때와 관련돼서 사용된다.

  요약하면 이 단어는 주로 전쟁의 재난에서 생존한 자를 가리킨다.

 

 6. תי???(’aharit)

 

  이 단어는 ר?אָ(’ har)에서 파생되어진 여성명사이며 주로 쓰이는 의미로는 'the last', 'uttermost part'(시139:9), 'the latter time'74), 'posterity'를 나타낸다. 민수기 24:20에서는 이 단어를 ‘종말’로, 공동번역에서는 ‘결국’으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가 구약에서 명사형으로 쓰일 때는 암4:2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겔23:25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 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등에서 본대로 분명히 ‘남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예를 암9:1, 렘31:17에서 찾아볼 수 있다.75) 따라서 이 단어는 저항할 수 없는 막다른 위기로부터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구약에 사용된 ‘남은 자’의 히브리어 어근 6개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이상에서 ‘남은 자’는 주로 ‘전쟁으로부터 살아 남은 자’, ‘도피한 자’로 나타났는데 이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과 관계되어 그 의미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상의 남은 자에 관련된 어근과 성경 구절의 종합적인 연구는 남은 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해준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가는 선민 가운데서 선민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시려고 남겨 두시는 소수의 사람을 ‘남은 자’(remnant)라고 부른다.”76) 또한 ‘남은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순응하였거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킨 사람들과(왕상 19:17f; 미5:6ff;  비교, 창6:5-8; 7:1,23; 18:17-33; 19:1-29), 내세적인 구원을 받을 ‘인’(stamp)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하나님을 찾거나 선한 것을 찾는 사람들과(암5:4-15), 때로는 멸망당한 대다수에 비할 때 어느모로 보든지 우월한 점이 없는 사람(사1:9)등이다.77)      

 

  이제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운데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B. 「남은 者」사상의 발전

 

  1. 선민의식과 ‘남은 자 사상’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중의 하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이다.78) 즉, “구약의 언약 종교의 핵심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79)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민의식80)이 시작되며 이에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확신했다.81) “따라서 성서 저자들에게는 이 선민 사상이 중심 주제였기 때문에, ---더구나 구약성서의 계약, 사명, 버림, 남은 자, 그리고 회복등과 같은 주제들은 이 선택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이들은 또한 선민 사상을 전제로 한다.”82)이 “선민 사상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의 중요한 주제들은 불가분리 서로 연관되어 있다. 특히 선택-버림-회복의 주제는 구약성서의 역사와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유기적인 뼈대를 형성한다. ---‘남은자’는 버림과 회복 기간동안 여호와의 선택을 보존하는 자들이다.”83)

  윌리엄 S. 라솔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수행해야 할 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남은 자’들의 삶의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곧 그의 계시된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책임을 수반한다는 진리를 드러내 주며, 동시        에 선택에 대한 책임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즉, 야웨는 이스        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특별한 책임을 갖고 계        시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선택이라는 것에 근거해서 특별한        관용을 기대할 수는  없다(암9:7,8).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 높        은 수준의 도덕적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야웨는 야곱의 집을 완전히 멸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84)

  이상의 논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선택받은 백성들이기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실 것이므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남은 자’가 있게 될 것85)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2. ‘남은 자 사상’의 전개

 

  ‘남은 자 사상’은 그 기본 개념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나 역사의 전개에 따라, 각 상황에 따라 그 강조점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그 전체 사상이 보다 심화되어 왔다.  

 

   a) 천지창조-출애굽 시대

 

  전인류의 조상 아담(Adam)은 자신의 선악과 범죄86)로 즉각 심판당해야 했으나 새로운 언약87)의 체결로 심판 유예의 은혜를 입고 구속사에 처음으로 참예한 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남은 자’의 효시로 볼 수 있다.88) 그리고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89)을 대신하여 태어난 셋(Seth)등도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사를 이어갈 자로 예비되었다는 점에서 ‘남은 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90)  그러나 ‘남은 자’ 사상이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역시 온 죄악이 관영하여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던 세상을 물로써 멸망시켰던 대홍수의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을 남기신 사건이었다.91)

   이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택하시어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케 하여 그로 하여금 한 특별한 민족 즉 구약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온 세상 가운데 분리하여 택하사 구약 구속사의 핵심 전개 통로로 삼으신 사건도 크게 보면 ‘남은 자’ 사건이라 할 수 있다.92)

  또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에서도 유황불의 심판 가운데서 롯의 가족을 남기심으로써 긍휼을 나타내셨다.93) 그리고 애굽인들의 이스라엘 남아 학살 정책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더욱 번성케 하신 일,94) 그리고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죄에 오염된 성인 남자들을 모두 죽이시면서도 한 번 선민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민족 자체만큼은 폐하지 않으시고 신세대로 하여금 새 시대의 역사가 진행될 가나안 땅에서의 선민 역사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삼으신 일95) 등은 구속사가 곧 ‘남은 자’를 통해 계속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 사실을 원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b) 가나안 정복-포로 귀환 시대

 

  구약 역사 가운데서 ‘남은 자 사상’ 자체가 본격적으로 계시된 것은 선지자들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물론 가나안 정복 초기부터 여리고 성 전체가 멸망하는 와중에서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사건96)이나 하나님의 백성의 한 지파로서의 베냐민 지파의 생존을 책임질 자로서 ‘남은 자’에 대한 언급 등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97)

  그러나 전역사의 지평에서 각 시대의 심판중에서 ‘남은 자’가 구속사를 계속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밝게 드러난 것은 B.C 8-5세기에 걸쳐, 즉 남북 왕국 시대와 포로기 전.후 시대에 본격 등장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였다. 이는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경우에 두드러졌는데 이 사실을 이사야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야는 그의 아들 중 하나에게 ‘스알야습’이라 이름지었는데 그 뜻은 ‘남은 자가 돌아 오리라’였다.98) 이는 하나님의 심판99)으로 야기된 선민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부터의 귀환을 예언한 것인데 이외에도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을 거듭 예언했다. 즉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도 멸망될 것이나 남겨진 선민 이스라엘의 후예들이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유지되다가 마침내 귀환하고 돌아와 계속하여 구약 구속사를 이어갈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100) 즉 “선지서에는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 살아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약속된 희망은 그 소수의 남은 자들이 보존될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 민족의 핵심적인 사람들이 어떠한 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아서 결국 본토로 돌아가 메시야 시대에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구체화 된 것이다.”101)

  나아가 이사야는 이제 훗날 신약 시대에서는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영역이 확장되어 이방인들도 그들 시대의 ‘남은 자’의 역할을 다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102) 즉 이사야는 ‘남은 자’들을 바벨론에서 귀환할 이스라엘 백성들로 국한 시키지 않고 더불어 메시야 시대에 구원에 동참할 모든 사람으로 그 범위를 확대시킨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은 이사야서를 효시로 하여 예레미야나 미가, 아모스, 스가랴등 다른 선지자들에게서도 거듭 발견된다.103)

 

   C) 신구약 중간시대

 

  B.C 4-1세기에 이르는 당시 이스라엘은 상호 거듭하여 발행한 이방 대제국들의 각축과 압제밑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104) 이러한 오랜 세월 동안의 민족적 수난은 ‘남은 자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여러 유대교 분파들105)은 구약 성경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 내용만을 근거로, 또한 이를 극히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왜곡하여 한 메시야가 와서 여타 민족들을 멸망시키고 자신들 민족을 중심으로 한 지상적 구원을 베풀어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대교(the Judaism) 사상의 골격을 형성하였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당시 일반 유대인들과도 분리되어 경건 생활을 했던 엣세네파(Essenes)106)들은 자신들만이 전세계 및 이스라엘의 멸망시 유일하게 보호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들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준수했기 때문에 그들 자손들만이 장래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반대로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자는 어두음의 자녀로서 비참한 운명에 빠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과거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예언을 행했던 선지자들이 ‘남은 자’를 궁극적으로 세계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시켰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를 일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시킨 폐쇄적 유대교 사상들107)은 이 시기에 집필된 구약 외경들108)에게서 잘 발견된다.

 

   d) 신약 시대

 

  신약 성경은 신구약 중간기를 거치면서 구약 성경 본래의 범우주적 ‘남은 자 사상’을 유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왜곡시킨 소위 유대주의적 오류를 타파하고 순수한 구약 성경의 ‘남은 자 사상’을 계승 심화시키고 있다.

  신약 시대는 그 자신 제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구속 언약의 주체이시며 십자가 대속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집행하실 당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모든 구약이 그 핵심 주제로서 제시하였던 바 대로 성육신 초림하심으로써 개시된 시대이다. 그리하여 이제 초림하신 예수께서 일단 구속 사역을 성취시키시고 이제 새로이 그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을 중심으로 하는 새 언약109) 곧 신약을 예수 자신이 직접 수여해 주심110)으로써 이제는 오직 대종말에 이르러 주의 재림으로 그 새 언약이 최종 실현되기를 대망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강림으로 구속사가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구속사의 전개와 직결된 ‘남은 자 사상’에도 가히 혁명적 발전이 이루어졌다.111)

  ‘남은 자’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발전된 것을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마디로 ‘남은 자(remnant)’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구원의 약속이 전역사를 통하여 성취되어 가는 중에, 그 한쪽 당사자인 인간의 끝없는 패역으로 불가피하게 야기된 각종 심판으로, 급기야 단절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오염과 심판으로부터 분리하여 남겨두신 소수의 의인(義人)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남은 자’ 사상이란 바로 이런 ‘남은 자’들을 통하여 구속사가 마침내 대종말에 이르러 항구적으로 실현되는 그 순간까지 추호의 단절이나 변경없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일직선으로 계속 이어진다는 오묘한 진리를 보여주는 사상이다. 

 

 C. 아모스의 「남은 자」사상

 

  하젤(Gerhard Hasel)112)은, 아모스는 남은 자에 대한 주제를 세 가지 면에서 사용하였다고 간파하였다. 첫째, 모든 이스라엘이 남은 자였다는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3:12 ; 4:1-3 ; 5:3 ; 6:9-10 ; 9:1-4), 둘째로, 종말론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참된 남은 자를 설명하기 위해서(5:4-6, 15), 셋째로, 다윗의 언약의 특혜를 받을 자들인 다른 이웃 민족들과 함께 ‘에돔의 남은 자’를 포함하기 위하여(9:12)등이다.

  아모스서에는 하젤의 주장을 포함하는 내용 외에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와 구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 개념이 공존한다. 이에 먼저 심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를 살펴본 뒤 구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심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

 

   a) 아모스 3: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⑴ ‘여호와께서 (이같이) 가라사대’(הכ הוהי רמא). 원문에는          ‘이같이’(הכ, thus)란 강조의 말이 있으나 한국 번역에는 생         략되어 있다.

    ⑵ ‘목자가 사자 입에서 ---건져냄 같이’(יפמ הערה ליצי רשׁ         אכ יראה). 여기에서 ‘사자’(ירא)는 가장 강한 야생동물의         대표로서 앗수르를 암시하는 말이다. 또 ‘건져내다’의 원문         ליצי의 어근 לצנ은 strip, plunder, rescue, deliver 등의 뜻         이나 Qal 형은 없고, Piel 형 뿐이다.113) 그 중에서도 본문         에 ליצי은 לצנ의 Hiph, Impf 형으로 상당히 강한 말이다.         KJ는 그런뜻을 나타내려 하였음인지 이 말을 ‘taketh out’         라고 했으나, RSV, JB, NEB 등은 rescue로 번역했다.

    ⑶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ןזא־לדב וא מיערכ יתשׁ). 원문         에는 ‘양’이란 말이 없다. 여기에서 두 다리나 귀 조각은 어         떻게 그 상태가 비참한 가를 보여준다. ‘조각’은 특별히 ‘잘         라진 조각’을 의미한다.      

    ⑷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שׁרע קשׁמדבו הטמ תאפב ןומשׁב מיבשׁיה). “이 구절         은 사마리아의 멸망에 있어서 아무리 존귀한 자라 할지라         도 직극히 적은 무리, 즉 걸상 모퉁이에 앉은 적은 수의 사         람들, 혹은 또 다메섹의 값진 비단 방석과 같이 누구나 흔         히 가질 수 없는 그런 곳에 겨우 앉은 극히 적은 무리, 혹         은 한 두 사람 밖에 앉을 수 없는 낙타 등에 앉은 자등등         모두 다 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114)

   ⑸ 본문해설

    본 절의 뜻은 아무리 존귀하고 권세 있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살아 남는 자는 극히 적은 무리일 것을 말한다. 비록 또 그들이    살아 남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비참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아모스가 사용하고 있는 비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구절은 ‘남   은 자’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삐에르   마미(Pierre Mamie)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   이 언급하였다 :

 

     풍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자가 더 신랄한다. 먼저        “두 다리와 귀 조각(3:12)에 관하여 말을 시작해 보자. 이것을       목자가 사자의 입으로부터 건져낼 것이다. 그것은 어떤 더 강       한 힘에 의해서 주인의 가축이 공격당했다는 것을 주인 앞에       서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축은 맹수에 의해       다 잡아 먹히게 되었고 이런 쓸모없는 것외에 남아 있는 것       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가축은 이것 외에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정말 몸체 전체 중에서 지       극히 적은 부분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         다.115)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 대상으로의 ‘남은 자’는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하여 무의미 하며, 이스라엘의   생존에 절대적 위협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아모스는 선포하고 있   는 것이다.

 

   b) 아모스4:1-3(2절을 중심으로)

     이 구절에서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여인들을 책망하며 ‘남은    자’를 언급한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      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      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116).

    ⑴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ושׁדק         ב הוהי ינדא עבשׁנ). calvin은 ושׁדקב를 His sanctury로 번         역했다. 하나님의 성전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신 곳이         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그의 실체를 보이는 것으로 서약하         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⑵ ‘(보라)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מקילע מאב מיי הנה יפ).         한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접속사(יפ that)와 영         탄사 (הנה, lo!)가 있어 다음 계속 되는 문자의 내용을 강         조한다. 특별히 מאב מיי הנה라는 히브리 어법은 임박한          때가 곧 닥쳐오는 긴박함을 경고하며, 보여 주는 말로 흔히         ‘보라 때가 이르리니’ 라고 번역된다.

    ⑶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תונצב מקתא אשׂנו).           ‘갈고리’란 תונצ는 הנצ(hook)의 복수형이다. 다음의 ‘낚시’         와 댓구를 이룬다. ‘사람이---끌어가며’의 원문, אשׂנו는 אשׂ         נ의 piel, pf형이나 waw consecutive이므로 미래형으로 번         역된다. 

    ⑷ ‘낚시로 너희 남은 자를 그리하리라’(הגוד תוריסב ןקתירח         או). ‘너희 남은 자’란, 갈고리로 끌려가고 ‘그 다음부터’ 남         은자(that which come after)를 말한다.

    ⑸ 본문해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고 아   모스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한다. 이 “바산의 암소들아”는 사치하   고 게으른 이스라엘의 여자들을 비유하며, 그 여자들은 가난한 자   들에게서 착취하여 술을 마시며, 연락하였고 게을러서 아무일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장을 시켜 술을 가져오라 하여 마시고 타   락한 모습을 보여준다.117)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남은 자’의 뜻은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혹자는 ‘남은 자’가 사마리아 여인들의 후손   을 가리킨다고도 주장하지만, 문맥의 평행법을 살펴보면, ‘남은     자’는 여전히 사마리아 여인들118)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모스는 사마리아 여인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준다.119) 그러므   로 아모스는 또 다시 미래의 이스라엘의 민족적 생존을 위하여    무의미한 ‘남은 자’를 언급하고 있다.120)

 

   c) 아모스6:9-10  

    이 구절은 아모스 전체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가운   데 하나이다. 본절의 배경은 전염병로 집안의 거주자들이 모두 죽   어나가는 상황이다.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암6:9).

    ⑴ ‘(    ) 한 집에’(דהא תיבב היהו). 한역에는 생략되어 있         으나 원문에는 이 구절 첫마디가, היהו(또 이런 일이 있으         리라)는 말로 시작된다. LXX 경은 και εσται(And it              shall come to pass)라고 번역했다. 다음에 오는 심판의 선언         에 주의를 환기 시키는 강한 서두이다.

    ⑵ ‘남는다 하여도’(ורתוי־מא). ‘남는다’는 말 ורתוי는 רתו           (remain over)의 Niph 형 Impf이다. 한 집에 열 사람이 산         다는 말이 아니라 죽고 남은 자가 비록 열이라 할지라도          그들도 다 죽고 한 사람도 남지 못하리라는 말이다.

    ⑶ 본문해설

     이 구절에서는 한 성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안에    사는 모든 가정들의 멸망을 말한다. 그런데 10명 가운데 생존자가   하나 있더라도(암6:10), 그는 너무 두려워서 감독자들이 죽은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올 때에도 여호와에게 두려움을 없애 달라고 여   호와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유일하게 ‘남은 자’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 따라서 아모스는 여전히 집안에 ‘남은 자’가 있   을 것이란 가능성을 남겨 놓지만, 이 ‘남은 자’가 전적으로 무효하   며 소망이 없음을 강조한다.121)

  

   d) 아모스9:1-4(1절을 중심으로)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      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殺戮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      나도 避하지 못하리라”

    ⑴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רותפכה ך? רמ         איו מיפ סה ושׁעטריו). 여기에서 ‘기둥머리’(רותפכה)를           LXX경은 το ιλαστηριον(속죄소)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LXX경은 그러한 사본에 의한 번역이거나 혹은 시각의 잘         못이었을 것이다.122)

    ⑵ ‘그것으로 부셔져서 우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שׁארב מ         יצבו מלכ). ‘그것으로 부셔져서’의 원문 מיצבו는 עצב(cut         off, break off)의 Imperative, 즉 명령형이다. 직역은 ‘그것         들을 부셔라’!이다. ‘우리의 머리에’는 ‘제단에 모여 나온 그         모든 사람들의 머리 위에’란 말이다.

    ⑶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גוהא ברהב מתירחא         ו). ‘그 남은 자’(מתירחא, after-part of them)는 ‘살아 남은         자’를 말한다. 즉 문맥의 흐름으로 보면 이 ‘남은 자’는 문         지방이 무너질 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를 가리킨다.

    ⑷ 본문해설

    여기에 나오는 책망은 우상숭배에 빠진 행위적인 예배자들에   게 주어지고 있다.123)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이처럼 무서운 심   판을 서포하는 것은 전통적 신앙을 지키지 않은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그 진노하고 너무 엄중하   여 지진으로 제단과 성전이 무너진 후에 겨우 피하여 ‘남은 자’마   저도 칼에 살해될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소를 무너뜨리는 심판 가운데서     도 살아남은 자가 있으면, 그를 그대로 살려 두지 않고 칼로 죽여   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   엘의 범죄 때문에 그들에게 철저한 심판을 행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가 선포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멸의 위협(威脅)은 이스라엘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방나라들을 향한 메시지124)에서도 ‘남은    자’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블레셋에게 주어진 심판125)을 보면, 가   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등 블레셋의 네 도시는 人身賣買의    범죄에 관계되어 있다. 또한 네 도시에 내려질 징벌(懲罰)은 너무   엄중하여 블레셋의 ‘남은 자’가 멸망할 것이라 한다. 아모스는 여   기에서 블레셋의 ‘남은 자’의 멸망, 즉 블레셋 네 도시의 파괴 후   에 겨우 남아 있을 모든 자들의 전멸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블   레셋 범죄에 대한 징벌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범죄에   대한 징벌과 동일하다. 그리고 아모스 전체에서 9:1과 1:8만이 전   멸의 위협으로 ‘남은 자’사상이 사용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126) ‘남은 자’가 심판날 심판을 받기위해 남아 있   는 존재로 사용된 성경의 예는 다음과 같다.

    신3:11절의 “르바임 족 속의 남은 자는 바산왕 옥뿐이었으며    ---”에서 바산왕 옥만이 남아 있는자로써 ‘남은 자’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한 남은 자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멸망받게 될 ‘남은 자’인 것이다.

    수23:12절의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   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에서 여호수와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그 땅에 있던 이방 민족들의 ‘남은 자’와 친근히 하   고 혼인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되리라   는 경고의 말 속에서 ‘이방 민족들의 남은 자’를 언급하고 있다.    이 남은 자는 부정적인 개념을 표현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삼하2:12, 사14:22,30, 16:14절에서도 기브온, 바벨   론, 모압, 블레셋의 ‘남은 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으며, 여로보암   집의 남은 자(왕상14:10),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성읍사람들이 포로   로 잡혀간 후에 예루살렘 성에 남아있던 사람들(왕하25:11), 유다   족속 가운데 사악한 남은 자(겔14:22)등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   남은 자 사상’127)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10:40, 대하2    0:23-24, 렘50:26등도 남은 백성이 진멸할 완전한 파괴의 원칙을   예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남은 자’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생존에   무의미한 경우128)와 ‘남은 자’가 전멸하는 경우129)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는 철저히 멸망만을 선포하는 先知者가 아니다. 심   판의 메시지 가운데서도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 그러므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돌아올 길을 제시하는 것   이 그의 사명이었다. 이제 구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에 대하여   고찰하도록 하겠다.

 

  2. 구원대상으로써의 「남은 자」

 

   a) 먼저 아모스5:1-3의 哀歌130)를 고찰해보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       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       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       느니라”131)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는 첫 번째 말과 군인의    10%가 ‘남은 자’가 된다는 두 번째 말은 외견상 모순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코 모순이 없다. 아모스는 실제적으   로 군사적 재난을 시사하고 있다. 먼저 아모스는 이스라엘 군사의   90%가 損失을 입는 민족의 멸망을 언급하고, 동시에 90%의 손실   은 완전한 멸망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10%   의 ‘남은 자’가 생존할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남은 자’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아모스의 공헌은 최초로 ‘남은 자’가 소수일 것이   란 국면을 밝힌 점이다.132) 아모스는 여기에서도 전체 이스라엘이   전쟁의 날에 ‘남은 자’가 될 것이란 전통적 신앙을 공격하고, 생존   한 ‘남은 자’의 수가 적을 것과 이스라엘은 재난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을   것이지만, 전체 이스라엘이 ‘남은 자’가 아님을 선언한다. 그러나   아모스에게는 거짓된 소망을 깨뜨리는 것보다 더 큰 의도가 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향한 전멸의 위기를 선포하여 잘못된 안보의   식을 바로잡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비참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133)

    그러므로 아모스는 위협적인 애가에 이어서 미래의 소망과 생   명의 길을 제시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   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   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   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   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134)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아모스가 전달자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집’에 고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찾으라’와 ‘살   리라는 두 명령형이 원인과 결과처럼 연결되어 있다.135) 이것은    여호와를 찾는 목적이 바로 생명임을 뜻한다. 따라서 ‘나를 찾으   라 그리하면 살리라’로 시작하여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   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망을 포함하는 아모스5   :4-6(14-15)은 심판의 주제가 집중적인 아모스에서 조금 상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모스 5:14-15이 하나님의 말씀인 5:4-6의 설   명과 해석이란 주장은 이구절이 5:4-6처럼 전달자의 형식으로 시   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b) 아모스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       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       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       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이 여기시리라”

 

    ⑴ 본문해설

    먼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까닭은 그   결과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선을 구하는 목적과 목표가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14절은 4절처럼 구원에 대한 약속의 성격을 지니   고 있다. 그리고 4절에서 ‘나를 찾으라’고 한 여호와의 명령을 14   절에서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로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모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구원이나 생명은 하나님을 경   배하는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동적으로    주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모스가 말하는 ‘善’이란 무엇인가? 15절을 보면 ‘성문   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란 말씀을 덧붙여서 ‘선’의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제안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선’이 바로 일상생   활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일임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은 형식적인 종교의식과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拒絶하신 것이     다.136) 이런 의미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선을 구하지 않는 죄악을 지적한다.137) 결국 아모스가 부   정적인 심판을 하는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돌이키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모스는   철저한 멸망만을 선포한 선지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모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통적 구원의 잘못된 개념을 시정하고, 백성   들의 죄책을 지적하여 회개케 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촉구하   여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여호와와 선을 찾는   데 달려 있으며, 오직 이스라엘이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며 여호와   께 돌아올 때에만 그들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여호와께서도 ‘요셉의 남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138)

    그러면 ‘요셉의 남은 자’(ףסוי תיראשׁ)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   인가? 이 용어는 궁극적으로 창세기45:7에서 ‘하나님이 큰 구원으   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라고 말한 요셉에게 그 기원을 둔    것 같다. 이 구절에서 ‘후손’은 야곱의 종족으로 구성되는 현실적   실체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런 개념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주   변국가들을 파괴할 ‘여호와의 날’이 올 때에 현실적 실체인 전체   이스라엘이 ‘요셉의 남은 자’란 믿음을 지녔을 것이다.139) 그러나   아모스가 사용하고 있는 ‘요셉의 남은 자’란 여호와께 돌아와 생   명을 얻는 실체이기 때문에 아모스 시대의 북쪽 이스라엘이나 재   난에 의하여 10분의 1로 감소된 현재의 실체를 의미할 수 없다.    따라서 ‘요셉의 남은 자’란 결국 미래의 실체일 수 밖에 없다.140)   그러므로 아모스 5:15은 ‘혹시’141)(ילוא ; perhaps, may be)라는    표현으로 선을 구하고 여호와를 찾는 자들만 다가올 심판을 면하   고 ‘요셉의 남은 자’가 될 것임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아모스는   민족적인 실체인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없   음을 명백히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 개   념이기 때문에 ‘요셉의 남은 자’도 종말론적 기대의 실체이며, 전   체 이스라엘과 달리 종말론적 재난에서 남겨질 자이다. 따라서 아   모스로부터 ‘남은 자’개념과 종말론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최초로 발견하게 된다.142)

    한편 아모스 5:14-15은 ‘남은 자 사상’의 2중적 국면인 심판과   구원을 명백히 보여준다. 즉, 오직 ‘남은 자’만 생존할 것이란 심   판적 측면과 확실히 ‘남은 자’가 있을 것이란 구원적 측면을 포함   하고 있다. 또한 ‘남은 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구원에 근거하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만이 ‘남은 자’가 될 수 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옴이 없이 ‘남은 자’가 있을 수 없는 것   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남은 자’에 대한 아모스의 소망은 하나님   의 ‘혹시’와 인간의 반응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c) 아모스9:8-15143)

    마지막으로 아모스 5:4-6, 14-15에 나오는 ‘남은 자’ 사상처럼   종말론적 ‘남은 자’에 대한 소망을 포함한 구절이 아모스의 끝맺   음말(암9:8-15)145)에 나온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   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   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   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   지지 아니하리라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   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8-12)

    ⑴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יניע הנה ה         אטחה הכלממב הוהי ינדא). ‘범죄한 나라’(האטחה הכלממ         ב)는 9장 전체의 내용으로볼 대 선차적으로는 북쪽 이스라         엘 왕국을 말하는 것이나 남방 유다도 배제되어 있지 않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⑵ ‘지면에서 멸하리라’(המדאה ינפ לעמ התא יתדמשׁהו). ‘멸         하리라’(יתדמשׁהו)는 דמשׁ의 Hipf. pf. 1s으로 waw consec         이다. ‘내가 멸하리라’는 하나님의 강한 뜻을 표시한다. 지         면 ‘에서’ 란 말의 전치사 לעמ(from upon)은 לע(upon)보         다 강한 뜻으로, 장소의 이동을 말한다. 지상에서 삭제해          버리고 말살해 버리겠다는 강한 뜻을 보여 준다.

    ⑶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דימשׁא דימשׁה         אל בקעי תיב־תא). ‘멸하리라’(דימשׁא)는 히브리어 원문          앞에 같은 동사의 Infinitive형(דימשׁה)이 겹칠 때는 ‘온전히         멸한다’는 강조의 뜻을 나타낸다.

    ⑷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םיוגה־לכב יתוענ         הו לארשׁי תיב־תא). ‘체질하기’(יתוענהו)는 ‘내가 흔들리          라’(I will cause to shake)는 강한 뜻이다.

    ⑸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רורצ לופי־א         לו ץרא). ‘한 알갱이’란 말, רורצ는 잘 보관된 맑은 ‘수정         체’ 같은 것을 말한다.146)

    ⑹ ‘그 날에’(אוהה מויב). 여기의 ‘그 날’이란 선지자의 마음          속에 항상 새기고 있는 소위 ‘여호와의 날’을 의미한다.

    ⑺ ‘내가 다윗의 무너친 천막을 일으키고’(דיוד תכס־תא םקא         תלפנה). ‘천막’(תכס)은 KJ가 번역한 걱 같은 장막                (tabernacle) 이라기 보다는 B.D.B(p.697)의 사전과 대부분         의 현대역들이 밝힌 바 같은 ‘초막’(booth)을 의미한다. ‘무         너진’의 원문, תלפנה(pt. f)은 לפנ(fall, lie)의 분사형으로서         정관사를 가진 것이다. 

    ⑻ ‘저희로 ---얻게 하리라’(ושׁריי ןעמל). ‘저희’는 누구일까?         “그것은 회복된 다윗 왕국 안에 사는 구속받은 성도들을          의미한다.”147)

    ⑼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םיראשׁ־תא         םהילע ימשׁ ארקנ־רשׁא םיוגה־לכו םודא). ‘에돔의 남은          자’란 에돔에도 ‘구원 받을 자’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에돔의         남은 자를 얻게 한다는 것은 다윗 왕국에 그들도 한 시민         으로 포함될 것을 의미한다. LXX경은 ‘에돔의 남은 자’를         이방의 모든 ‘남은 자들’로 번역했다. 에돔의 남은 자가 마         치 이방에서 구속받은 모든 신자들의 대표자로 된 셈이다.

    ⑽ 본문해설

    W.A.반게메렌 교수는 이 구절에 대하여 Childs의 말을 인용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소망을 말하는 마지막 부분은      (9:11-15) 아모스서의 정경적 기능을 하나의 종말론적 틀로-심판   에서 최후 회복에의 소망으로-확장시킨다.”148) 또한 언약 갱신이   라는 측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남은 자들은 언약 갱신의 혜택을 향유할 것이다. 예언의 끝             맺음말로 소망이 비록 간결하게 진술 되었을지라도, 소망이 있음은        분명하다(9:11-15). 붕괴하는 다윗 왕조(“다윗의 무너진 천막,”           v.11)는 새로운 힘으로 일어서서 축복의 새 시대를 열 것이다. 메        시아 시대의 혜택들은 이스라엘과 열방에 베풀어질 것이다. 이 시        대는 그의 백성의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으로 창조 세계를 흠뻑 축        복하기 위하여 피조물의 변형을 계획한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에         통합되어 있다(vv.13-15).149)

    Chester K. Lehman은 이 부분이 아모스가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언급하면서 다   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그는 다윗의 천막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말하였고, 신약에              의하면 예수께서 주요, 그리스도로서 높아지시고 보좌에 앉으심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12절의 의미는, 특히 히브리 원전과 70인경의        본문을 비교할 때에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주로 70인경을 따라서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 하나님께서        는 다윗의 무너지고 퇴락한 거처를 다시 재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로 주를 찿게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하시        는 주의 말씀이라’(행15:16-18). 70인경은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좇지 않았으며, 우리가 아는 한 히브리어 원문에 다른 변형들이 존        재한다는 증거도 없다. 일부 학자들은 70인경이 아모스가 의도하였        던 잠재적 의미를 좇았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러한 주장이 사실        이라면, 그리고 야고보가 이를 따라서 해석하였다면, 아모스는 모        든 인류들,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를 찾        게 할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으심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신약의 성        취에 의하면,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모든 인류에 가능하        게 되었던 구원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신약이 구약을 해석하            면서, 원래 구약에 표면적으로 나타났던 것보다도 훨씬 더 심오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뛰어난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의 무너        진 장막을 다시 중건하는 이는 모든 인류들이 여호와를 부르고 구        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150)

 

    여기에서도 아모스가 철저히 멸망만을 선포한 선지자151)가 아   님을 알 수 있다. 먼저 8-10절은 종말론적 심판과 ‘남은 자’의 구   원을 명백히 증거한다. 즉 ‘범죄한 나라’152)와 ‘만국’153)과 ‘모든 죄   인’154)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고, ‘남은 자’에게는 하나님   의 은혜로 ‘한 알갱이’155)도 떨어지지 구원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   서 아모스의 ‘남은 자’는 종말론적 실체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13-15절은 종말론적 심판에서 구원받은 ‘남은 자’의 영원한 상태   를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문제는 11절의 ‘그 날에 내가 다윗   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156)와 12절의 ‘에돔의 남은 자’이다.    이 구절은 아모스가 실제적인 의미에서 다윗 왕조의 회복과 에돔   의 정복을 소망한 표현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심판 후   에 완성될 메시야의 왕국이며, ‘에돔의 남은 자’는 이방에서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의 대표라 할 수 있다.157) ‘에돔의 남은 자’는     LXX에 ‘아담의 남은 자’(οι κατα λοιποι των ανδρωπων)로    되어 있다.158) 바로 이것은 이방의 구원까지 의미하는 구원의 ‘남   은 자’를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159)

    사도행전 15:17에 인용된 아모스 9:12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엘리스(O.T.Allis)는 천년 왕국에 대한 견해를 주   장했다. 예컨대 논지는 아모스에 나오는 ‘에돔의 남은 자’의 정복   이란 사도행전에서 이 시대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영적으로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견해가 알프(Alf)와 마이   어(Meyer)의 주석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15:17에 거   의 비슷하게 인용된 칠십인역은 그 이전에 다양한 히브리어 본문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모스 9:12   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그 중에 남은 자들)이 여호와를 찾게 될   때를 예언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까지는 칠십인역이 히브   리어 본문과 다를 때에는 히브리어 본문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해사본이 발굴됨으로써 이 문제에 관해서 새로운 전망   이 비쳐 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칠십인역이 신약성경   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칠십인역 본문이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아모스9:12은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한 약속을 말   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모스는 여기에서도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원의 날이 아니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남은 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심판과 구원이란 ‘남은 자’의 2중적 측   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남은 자’ 사상의 발전적 측면에서 아모스의 공헌은 ‘남   은 자’가 소수일 것이란 점과 ‘남은 자’가 종말론적 실체임을 강조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아모스가 ‘에돔의 남은 자’를 언급   한 것은 ‘남은 자’가 민족적 차원의 공동체가 아니라 민족의 차원   을 초월한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임을 지적하는 것이다.160)

 

  3. 아모스의 ‘남은 자’ 신학 요약

 

  지금까지 아모스가 선포한 ‘남은 자’ 가운데 심판 대상으로서의 ‘남은 자’, 즉 이스라엘의 민족적 생존에 무의미한 경우161)와 ‘남은 자’가 전멸하는 경우162)그리고 구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를 살펴보았다. 이 두부분에 대한 아모스의 ‘남은 자’ 신학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심판 대상으로서의 ‘남은 자’에 대한 것이다.

  아모스 3:2에서 여호와는 아모스를 통하여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이스라엘에게 선언한다. 본절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사실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고 선택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방인보다 결코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즉 아모스는 범죄한 이스라엘이 결코 자신을 하나님의 선택 뒤에 숨길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고 한다(암3:2).163)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선택은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아모스가 3:12 ; 4:1-3 ; 6:9-10 ; 9:1-4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의 미래 생존에 무의미한 ‘남은 자’를 언급하며 ‘임박한 심판’을 강조한 목적은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통적 소망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아모스 시대에 널리 퍼져있던 전통적 신앙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구원의 날이라고 믿는 것이다. 둘째는 열국중에서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에 근거한 영광스러운 미래를 경험 할 ‘남은 자’가 된다고 믿는 것이다. 아모스가 깨뜨리려고 하는 통속적 ‘남은 자’의 개념은 다음의 구절에 암시되어 있다(암3:2, 12 ; 5:3 ; 6:9 ; 9:1, 10). 그러므로 아모스는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남은 자’가 될 것이란 어리석은 소망을 공격하며 그들의 죄악을 지적한 것이다.

  아모스가 외치는 구원 대상으로써의 ‘남은 자’ 신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모스5:14-15의 논의는 ‘남은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한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받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과 심판 이후에 회복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소망을 연결시켜 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 첫째, 이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의 남은 자’라는 개념은 ‘여호와의 날’로 인하여 발생하게될 두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종말론적으로 보아야 하며, 둘째, ‘남은 자’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이다. 셋째, 그 존재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달려있고, 다섯째 아울러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는 자라야 한다.

  아모스9:11-15은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과 ‘남은 자’ 사상이 종말론적 의미로 확대 되었음을 제시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본문은(암9:11-15) 아모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에 의해서 추가되어왔다고 보지만, 아모스의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 본문은 아모스 자신의 메시지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아모스가 범죄한 이스라엘의 종말을 선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절망의 종말을 선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결과로 심판 뒤의 ‘남은 자’들이 다윗의 회복된 왕국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이다.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첫째 아모스에 있어서 회복의 메시지는 심판의 개념과 남은 자의 개념에 뒤따라 올 수 밖에 없는 논리적인 결과이며, 둘째, 이스라엘의 회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되는 것이다. 셋째,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은 영구적이다. 넷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 회복 이후에 오는 축복에 동참할 수 있다. 즉 배타성을 극복하고 누구나 참예할 수 있는 포괄적인 희망을 부여해 준다. 따라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축복에 동참하게 됨을 밝히고 있다.

  W.A.반게메렌 교수는 아모스서의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유와 ‘남은 자’와의 관련성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은혜와 약속이 조건적이기 때문에, 언약관계를 파기하는 것은           여호와에게 자유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황폐케 하는 권능은 부자연        적인 권능이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긍휼을 보이는 데 자유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남은 자를 보존하는 데도 자유하다. 심판을 통        해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재료(“돌멩이”)를 구분하여 겨와 함께 던        져 버리고 알곡만 보존할 것이다(9:8, 9). 그는 남은 자를 깨끗케         하여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이스라엘 자손들을 체질할 것이           다.164)

 

  결론적으로 아모스 서는 종말론적 심판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있을 것이란 소망을 강조하고 에돔의 ‘남은 자’를 언급하여 혈통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소망을 반대한다.

  이제 다음 논의는 이러한 ‘남은 자’에 대한 아모스의 선포가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로 선포되는 ‘여호와의 날’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여호와의 날’의 기원과 배경,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형성되어진 의미 등에 대하여 고찰하고 아모스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Ⅳ.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 사상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165)의 성취를 위하여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나타내는 함축된 단어인 ‘여호와의 날’(הוהי־מוי)166)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 단어는 미래의 예언적 기대 속에서 하나님의 임박한 결정적인 개입을 지칭하는 용어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167)

 

  A. 여호와의 날(הוהי־מוי)의 기원과 배경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의 기원168) 과 배경에 대하여 학자들간에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원과 배경으로 몇 가지가 제기되었다. 첫 번째로, Mowinckel은 ‘여호와의 날’을 당연히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제의역사, 숭배생활 특히 매년 새해에 드렸던 절기 의식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9) 두 번째 견해는 ‘여호와의 날’이 창조기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창조 때에 하나님은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계셨으며, 후에 인간이 타락하였으나 그 순간에도 상황변화의 희망이 제시되었으므로 여호와의 날은 24시간에 한하지 않고, 세계가 창조 될 때처럼 원래의 신선한 모습으로 회복될 거대한 시간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170) 세 번째 견해는 Von Rad와 G. Voss의 주장으로 제기된 것으로 그 배경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견해이다. 즉 그 기원을 성전(聖殿)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승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171) 따라서 본래 ‘여호와의 날’은 엄격히 전쟁의 사건이었으며, 여호와께서 그의 적을 멸정하는 모습이 들어 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이 전쟁에서 결과는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신 결과이다.172) “전쟁의 날은 하나님의 날이며, 이는 적군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를 의미했다.”173) 이 기원에 관한 두 가지의 다른 주장이 최근에 대두되었는데 Fensham은 언약 전승들과 언약 이행의 재앙의 사건들이 ‘여호와의 날’의 원래 전승을 뒷받침해 준다고 주장했으며 Weiss는 신의 현현의 기술이 적당한 사건 배경을 제공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74)

  위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원과 배경에 대한 견해 중에서 Elmer A. Martens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여호와의 날과 관련해서 군사적 용어가 많이 등장하므로 성전(聖殿)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 같다.”175)

  그러나 성경에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을 찾아보면 먼저 ‘노아의 홍수 심판’에서 발견한다. 범죄한 인간은 홍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내용은 창세기 6장 13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176)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바로    ץ? 라는 단어를 보아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알게 되며, ‘여호와의 날’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날에 범죄한 모든 인류에게는 홍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날’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177)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구원의 날’인 것이다.

  다음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로 멸망당한 사건을 통해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19장 29절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멸하실 때’(ת???), ‘엎으실 때’(ף???)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이 심히 중하므로 그들을 유황불로 ‘멸망하시는 날’을 작정178)하셨는데 바로 이 날이 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롯과 그의 가족에게는 ‘구원의 날’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 서 ‘여호와의 날’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출애굽기 12장 4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 ‘유월절의 밤’을 지켰다. 바로 ‘이 밤’이 ‘여호와의 밤’인데 여기서 여호와의 날이란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밤은 택한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밤’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밤인 것이다. 또한 이 밤은 430년간179) 기다렸던 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큰 구원을 얻는 기쁨의 밤이었던 것이다. 애굽의 통곡의 그 밤은 이스라엘에게는 짐승도 그 입을 봉하고 개들도 입을 봉한 고요한 밤이었다.180)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던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밤’이었고, ‘멸망의 밤’인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밤’을 통해 ‘여호와의 날’ 개념을 발견한다.

  사사기 7장에서는 기드온과 그의 군대가 미디안 군대를 빈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가지고 멸절시킨 사건을 통해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을 찾아 본다. 이 사건을 이사야 9장 4절에서는 ‘미디안의 밤’이라 하였다.181) 이 날에 이방 민족 미디안은 ‘멸망 받은 날’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승리의 기쁨을 누린 날’로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B. 「여호와의 날」 사상의 발전

 

  예언서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18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 그 중 7개의 본문은 미래의 역사적, 우주적 사건을 기대하는 것이고,182) 다른 6개의 본문에서183) 기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는 선언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대하는 사건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신념과 절박함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5개의 본문184)에서도 ‘여호와의 날’ 개념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의 경우에 저자들은 과거의 사건을 기술하며 해석하고 있다.185)

  ‘여호와의 날’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핵심 내용으로 대두된 것은 주전 9세기이다. 정규남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전 9세기 선지자들의 중요한 신학적인 개념은 ‘여호와의 날’이다 .--- 이 ‘여호와의 날’은 양면성을 가진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축복을 받고, 반면에 하나님의 원수는 진멸되는 날이다.”186) Walter C. Kaiser도 이 때의 선지자들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그들 예언의 핵심 내용이 ‘여호와의 날’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주전 9세기에는 완전히 확실하진 않지만 요엘과 오바댜가, 8세기에는 이사야가, 7세기에는 스바냐가, 6세기에는 에스겔이 선지자로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으며, 틀림없이 임할 것이라는 점187)을 거듭 강조하며 경고하였다.”188)

  특히 W. C. Kaiser는 요엘과 오바댜서의 신학과 주제가 바로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

 

      요엘과 오바댜의 최종연대는 개의치 않더라도 그들의 신학              은 분명하다. 그것은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다. 여호        와께서 구원과 심판과 같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변        증할 한 날이 도래하는데, 이 날에 그들은 이 모든 일들이 자기들        의 행위에 근거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든 예언자들이 기대하고 또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들        이 소망 중에 기다렸던 것을 완성하실 것이다.189)

  호세아에서도 ‘여호와의 날’ 개념이 잘 나타나 있다. 호세아 2장 18절의 ‘그 날에’는 2:16, 21절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1:11에 이스르엘의 날이 올 것이로다 라고 한 ‘그 날’을 가리킨다. 즉 다시 말하면 결정적인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성취되는 소위 ‘여호와의 날’을 의미한다. 1:1, 2:16, 18, 21절은 ‘구원의 날’로 또 다른 곳에서는(호1:5) 회개하지 않은 자의 심판의 날로 나타나 있다.190)

  말라기의 ‘여호와의 날’ 사상은 말라기 3장 2절에서 범죄한 그들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환란의 날’이요 ‘고통의 날’이지 결코 구원의 날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그 개념을 잘 나타내 준다. 이 말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신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경건한 남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다만 아무런 준비 없이 죄악 중에 있는 불 경건한 자들을 향한 경고의 말이다. 그렇다고 그 날은 그저 파괴를 위한 무서운 심판의 날만은 아니고 오히려 금을 연단하는 것 같이 택한 백성들을 순결케하기 위한 날인 것이다.191)

  이상의 ‘여호와의 날’의 기원과 배경, 그리고 그 사상의 발전에 대하여 고찰한 결과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 날은 전통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구원의 날이며, 종말론적이다192) 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전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구원받은 자의 구원과 속을 완전히 성취하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시9:8, 96:13, 98:9).”193) 또한 이 날은 “하나님께서 친히 새로 시작하실 미래 시대의 서두를 장식하는 날인데, 이 미래의 시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되어 온 역사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여호와의 날이 종말론적인(마지막 때를) 배경으로 이 땅에 임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시하신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더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194)

 

  C.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 신학 요약

 

   Geerhardus Vos는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아모스 5:20에 근거하여 어두움과 빛을 대조하는 것이다. 즉, 두 대조적인 것이 나타나는데 하나가 곧 다른 하나를 이어 나타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일 것이다.---아모스서에서는 악이 전면에 나서서 몰아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195)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구원의 날이 아님을 강조한다. 전통적으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의 날이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그 의미를 충분히 제시하면서 여호와의 날은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려운 날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빛의 날이 아니라 어둠의 날이 될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경험을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난 사람과 집 밖의 위험을 피하였으나 집 안에서 팔을 벽에 기대었다가 뱀에 물린 사람에 비유하였다(암5:18-20). 이스라엘에게 어두움이 깔려 있었다. 아모스가 강조한 것 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여호와께서서 싸움을 의미할 것이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Ⅴ. 아모스의 「남은 자」 사상과「여호와의 날」사상과의  관계

  아모스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한 최초의 사람’ 이었다. 그는 또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선명하게 선포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유다와 열방으로 확장시킨다. 요엘과 같이 아모스 선지자도 ‘여호와의 날’을 어두움과 애통의 날로 묘사하였다. 즉 각 개인이 메시야에 대해 어떤 신앙을 소유하고 있든지간에 관계 없이 메시야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술적으로 모든 악과 잘못을 교정하실 것이라는 통속적인 ‘여호와의 날’의 개념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이 흑암과 애통의 날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모스는 이같은 희망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잘 보여 줌과 동시에 거짓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심판 대상으로서의 ‘남은 자’들을 언급함으로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가 심판 대상이 된 백성들의 ‘남은 자’까지 진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였지만, 그가 제시한 ‘여호와의 날’에는 구원의 요소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하여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되거나 구원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모스가 언급하는 구원대상으로서의 ‘남은 자’들이다.

  아모스 선지자가 외치는 바 사로잡힘의 위협이(4:2-3 ; 5:5, 27 ; 7:11, 17) 임박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의 회복을 약속함으로 남은 자들을 격려하였다(9:13-15 ; 참고, 렘24:6 ; 31:28 ; 42:10). 남은 자 공동체는 그를 찾고, 오직 그만을 그들의 구세주로 인정하며, 선을 행하는 데 지혜롭게 인내하는 자들로 구성된다.”196)

  따라서 아모스서가 밝히는 ‘여호와의 날’은 ‘남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구원의 날이다. 그 날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아니라 ‘에돔의 남은 자’(암9:12)도, 애굽의 ‘남은 자’(사19:21)도 구별이 없다. 만국의 남은 자들이 다 모여 와서(행15:17) 기업을 얻게 하는 날이다(암9:12).

  하나님은 남은 자들이 그의 뜻(“의를 행하는 것”)에 순응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아모스는 남은 자들에게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림으로써 그 시대의 악습(2:1, 2, 6-8 ; 5:12)과 위선적인 행위와 종교적 허례들(5:21-26)을 멀리하도록 촉구하였다. 오직 정의와 공법의 하나님의 왕국을 찾음으로써만 그들은 스스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들에게 임할 심판의 확실성을 말하자만, 한편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남은 자’들에게 소망을 제시하였다. 언약의 백성도 열방과 함께 파괴와 소외의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들로서 다윗 언약을 포함한 언약들의 갱신을 향유할 것이다.

 

Ⅵ. 결론

 

  본 논문은 암5:14-20을 주 본문으로하여 아모스가 선포하는 ‘남은 자’의 의미와 ‘여호와의 날’의 의미를 밝히고 두 사상의 관계를 종합했다. 즉 ‘요셉의 남은 자’는 멸망의 날로 다가서는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자임과 동시에 이방인까지 다윗의 약속으로 포함시키는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 사상임을 Ⅱ장의 주해와 Ⅲ장의 아모스의 「남은 자」사상에서 밝혔다. 또한 ‘여호와의 날’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하나님의 날로써 생존 보장을 받는 ‘남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그 외의 악인들에게는 철저히 멸망의 날로 다가서는 ‘저주의 날’임을 Ⅳ장의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사상과 Ⅴ장의 아모스의 「남은 자」사상과「여호와의 날」사상과의 관계를 통하여 논의했다.   

  결국 우리는 아모스서의 메시지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양면성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기도 하시며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진정 구원하시려는 그 하나님이 한편으로로는 벌을 내리시려는 분이시기도 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양면성이 혹독한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과 그러한 저주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살아 남게 되는 ‘남은 자’로 아모스 선지자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그의 징계는 용서없는 공의의 엄격하고 냉정한 질서를 초월하는 것이다. 징계는 상처 입으신 분의 사랑의 표현에 다를 바 없다. 그는 최후의 외침 속에서 징계 이상의 회개를 호소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거짓된 삶 까닭에 임박한 하나님의 멸망을 선포하였지만 그 선포속에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스라엘의 혈통을 초월한 이방인까지 포함하는-이 맛보게될 구원을 희망적으로 선포하였다.

  결론적으로 아모스서에 나타난 ‘남은 자’와 ‘여호와의 날’은 독립적인 사상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즉 한 뿌리를 두고 있는 것 임을 발견한다. 그 뿌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모스 서에서 선포되는 ‘남은 자’와 ‘여호와의 날’의 관계를 통해 아모스 선지자는 ‘멸망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선포한 ‘희망의 선지자’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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