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예비하신 어린 양 예수님 (요12장)
글쓴이: 방다니엘 교수(신학박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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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장까지는 요한복음서의 전반부로써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7가지 표적을 중심으로 하는 예수님의 대중적 사역이 끝을 맺는다. 요한복음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한 고난과 죽음을 핵심으로 삼고 전개된다. 따라서 요12:1에는 “유월절”(Passover)이 언급되면서 “유월절 어린양의 행보”에 관심을 집중한다. 요한복음은 첫장부터 끝장까지 “죽음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핵심으로 삼고 전개한다. 세례요한은 대중 앞에 새롭게 나타난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36)라는 증언을 만인에게 전하였다. 어린 양이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죽음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의 고귀하신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죽음을 위한 생애를 사셨다. 그 죽음은 어린 양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어린 양의 피가 필요한 백성을 위한 죽음이다. 그 피가 필요한 백성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과 뽑힌 받은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레17:11)고 하였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반드시 “피”를 의존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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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 제도를 예수님이 성취하신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 핵심선포는 다음과 같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36). 하나님은 흠(죄) 없는 어린 양의 죽음과 피로 사람을 속죄 하며 생명을 살려주시는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흠(죄) 없는 어린 양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야만 하는 속죄제물 이었다. 출애굽기에서는 유월절 어린 양이 희생되었고 레위기에서는 속죄를 위한 어린 양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어린 양의 희생은 장차 오실 예수님(실체)의 모형에 불과하였고 예수님은 영원하신 어린 양으로써 단번에 구약의 제도(모형)를 완성, 성취(fulfill)하셨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은 구약의 예언과 모형이 성취되는 상항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서 선포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예언 성취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면서 “예언의 성취”를 선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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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선포한 “하나님의 어린 양”은 “죽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보내신 속죄 제물이며 희생양이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선 날 밤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swaddling clothes)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a sign)이니라”(눅2:11-12)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 강보에 싸여 뉘어 있는 아기를 보는 것이 무슨 표적(기적, sign)이 된다는 말인가?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강보”라는 것은 “둘둘 두르는 헝겊”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의 몸과 얼굴을 두르는 수의 또는 헝겊”과 같은 것이다. 누가 새 아기에게 수의를 입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태어나는 즉시 “죽음의 수의”를 입으신 것이다. 이것이 표적(기적)이라는 천사의 설명이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첫 순간부터 죽음을 위한 삶을 사신 그러한 분이라는 지적(표적, sig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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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례요한의 사역은 구약의 종결과 신약의 시작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의 사역이며 자기까지의 모든 구약의 사역을 예수님에게 그 사역의 바톤(the baton)을 넘겨드림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완전한 연속성(the perfect continuity)이 있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요1:6)이며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1:15, 30). “먼저”(before, 헬. protos)라는 말은 “첫 번째”(first)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는 나보다 앞서 첫 번째로 계심이라”고 직역하게 된다. 이 말은 요1:1에서 “태초에 계시니라”는 창조 이전의 존재를 나타낸 사도 요한의 증언과 상통한다. 따라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1:36)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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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어린 양”의 중요성을 열거하여 보자.
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선민이 구원을 받는다.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을 유월절 양으로 삼아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살코기는 남김없이 다 먹었다. 피가 발려진 집 안에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다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고 피가 없는 애굽인 집의 모든 장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에서 선민을 이끌어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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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날마다 은총을 입을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어린 양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번제물로 바쳐졌다. 번제물의 희생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어린 양의 피는 성막 앞의 제단 사면에 뿌려졌고 어린 양의 고기는 조각을 내어 제단 위에서 태워졌다. 성도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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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있어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레17:11)고 말씀하셨다. 죄악을 대속하는 어린 양의 피가 하나님 앞에 놓여 질 때 죄인은 죽지 않고 새 생명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죄 없는 피가 흘려졌을 때 대속과 영생의 길이 열리며 영생의 첫 부활로 연결된다. 성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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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여호와 이레) 약속의 성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새 생명의 선물로 받은 것과 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 각자의 죄를 지고 청산하셔서 우리들의 구원과 영생을 완성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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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부터는 유월절을 배경으로 삼고 어린양 예수님이 사람의 속죄를 위하여 당하시는 고난과 죽음을 중심으로 말씀을 대하여야 하며 특별히 예수님은 임박한 죽음을 바라보시면서 말씀을 주고계심을 이해하여야 한다. 요점을 추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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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요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나.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다.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라. (요12:31.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
마. (요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바. (요12:44-50)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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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표적(sign)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셨으나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시기하여”(요11:48) “죽이기로 모의하였다”(요11:53). 이러한 상항 아래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피하여 에브라임 동네에 가까운 빈들(desert)에 가서 머물면서(요11:54) 마지막 유월절을 맞이함과 더불어 “죽음의 때”를 맞이하신다. “때에 관한 핵심사항이 죽음의 때라는 사실”을 요12장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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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헬라인들(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은 “나의 때가 왔다”(요12:23)고 일러주셨다. “그 때는 죽음의 때이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임을 강조하셨다. 영광은 반드시 하나님에게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으시며 영원하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죄의 결과인 죽음을 대신하여 질 수 있다. 하나님(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의 목적은 바로 죽음에 있다.” 이방인들에게 “나의 때가 왔다”고 하신 말씀은 “세계를 향하여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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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광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새 생명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예수님은 귀중한 말씀을 하여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 구절을 NIV에서는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로 기록하고 있다. “한 알의 밀”을 “한 개의 씨앗”으로 기록하였고 “그 한 개의 씨앗이 죽으면” “많은 씨앗들을 맺는다”는 것이다. “씨앗들은 열매들이다.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열매들이다.” “예수님의 영원하고 귀하신 하나의 생명씨앗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로 수많은 생명씨앗들을 만들어 내신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구원하는 어린 양의 죽음과 피(생명)는 곧 한 밀알의 씨인 것이다.” 어 린 양의 죽음과 피가 곧 구원을 이루고 새 생명의 씨앗들(seeds)이 탄생된다.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우리 사람만으로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반드시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결코 “밀알씨앗”(Seed)이 될 수 없다. 반드시 “밀알씨앗”(Seed)로 인하여 밀알씨앗과 함께 “밀알씨앗들”(seeds)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요12:24의 말씀을 하시고 사람들(우리들)에게 “나를 따르라”는 초청의 말씀을 하여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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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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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표적과 초청의 말씀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을 보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요한복음 저자는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두 가지 핵심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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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12:37, 39). 이사야서 6:10에서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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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모든 결단을 인간이 자의로 할 수 있도록 하여주셨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활동한다. 눈을 감은 자는 아무리 찬란한 빛이 비추더라도 볼 수 없게 하셨고 귀를 막은 자는 아무리 신기한 소리가 펼쳐지더라도 들을 수 없게 하셨다. 이러한 현상은 유대인에게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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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러나 유대인의 완고한 배척으로 인하여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오히려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선포하신 구원의 도리는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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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성경말씀은 여러 곳에서 눈 멀고 귀 막힌 백성들의 상항을 누차 강조하고 있다(마13:14-15; 막4:12; 눅8:10; 행28:25-27; 롬11:8). 인간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광채는 변함 없이 비취고 있으나 시한부적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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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의 말씀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언제 어디에서라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오늘날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4:7),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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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12:43). 믿음은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공식적인 고백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의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 행위의 일환이다. 성경에는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과 같은 비공개적 신앙인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믿다가 마지막에 그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초대교회 때는 많은 바리새인들과(행15:5) 제사장들(행6:7)이 예수님의 도를 몰래 받아드렸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한 방안에 얽매여 살았다(행9:22). 그리하여 “자기 생명을 미워하기까지 예수님의 요구를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요12:25). 비공개적인 신앙생활은 양편에 두 다리를 걸쳐놓은 상태의 생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 사이에서 겪는 괴로움이 심하다. 신앙인에게는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확고한 소속의식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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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유대인 반대자들을 피하여 “빈들에 가까이 있는 에브라임에 머무르셨다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베다니라는 마을에 있는 나사로(예수님이 다시 살려주신)의 집에 초청을 받고 방문하신다. 이것은 유월절이 있기 6일 전이다”(요12:1). 여기에서부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일주간의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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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청받은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의 놀라운 헌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매우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 여인의 긴 머리털은 자기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성경은 증언한다(고전11:15). 마리아는 자기가 받을 영광을 모두 예수님에 돌린 신앙의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엄청난 고가의 향유를 일순간에 소모하여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는 그 향유를 팔아서 구제 사업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겠다고 하면서 안타가워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위가 믿음에서 나온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괴롭히지 말라. 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저는 최선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 이 여인의 신앙행위는 복음과 함께 전파되고 기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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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편 16:10. “(여호와께서는) 주의 거룩한 자(=메시아)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cf. 행2:22-28)고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일반인의 장례법을 따라서 죽으신 후에 그 몸에 향유를 부어서는 안 되실 분으로 이미 마리아는 믿고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미리 썩지 않은 몸에 향유를 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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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리아의 특성은 언제나 예수님의 발아래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눅10:38-42; 요11:28-32; 12:3).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하였다. 말씀중심의 신앙은 그녀의 올바른 선택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고 칭찬하셨다. 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에서 경배와 예배를 드리면서 생명의 말씀을 받았고 환난 중에 위로를 받았다. 특기할 사항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취한 결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받고 깨달았으며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한 죽음으로 진행될 것인가를 깨달았고 그 결과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치루는 신앙행위를 감해하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리아로부터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영광과 신뢰와 헌신을 받으신 것이다.
* 요12:27-30에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눈앞에 다가온 고난과 죽음을 보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신 기도와 응답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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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여야만 하는 상항에서 괴로움과 번민에 사로잡혀 있다가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12:27-28).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죽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 우리는 예수님의 괴로워하시는 모습에서 넉넉히 알 수 있다. 사람이 당하는 죽음은 순간적이며 돌이킬 수 없고 아울러 영원한 형벌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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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공포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는 두 가지 필수요건을 보여주셨다. 그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죽음”(12:28)이며, 둘째는 “구원 받을 성도의 영광을 위한 죽음”(12:30)이다. 아버지의 영광과 성도가 받을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때에 영광이 나타나지도록 예수님은 간구하신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므로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만 응답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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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자(the Son of Man) 예수님의 기도에 아버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여 주셨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12:28).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응답은 곧 “예수님의 필수적인 죽음과 직결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응답과 음성이 들려진 때의 기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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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1:11 (세례 받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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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막9:7 (변화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여생의 시작)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3) 요12:28 (성전에서: 예수님의 수난의 시작)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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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12:31-36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전에 메시아의 사명에 관한 말씀을 세 가지 항목으로 가르쳐주셨다.
첫째, 인자의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
둘째,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12:28).
셋째,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12:32,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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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은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을 평소에도 누차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3:14)고 하셨고, 바리새인들에게도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줄 알리라”(요8:28)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도리를 알려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12:32)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에서는 사단에 받을 심판과 온 세상이 받을 구원을 설명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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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의 말씀에서 “인자는 영원한 통치자이며 구원의 메시아이며 심판의 주님으로 이미 예언하였다(시110:4; 시9:6-7; 겔37:25; 단7:14). ”들린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인자는 십자가에 들려야 하는 영광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다. 이사야 52:13에서도 하나님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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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자가 들림으로써 이 세상에는 심판이 이르렀고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쫓겨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단이 하늘로써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눅10:18)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12:10에도 “사단은 쫓겨났다”고 하였고 계20:10에는 “사단이 심판을 받아 영원토록 불 못에 갗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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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자는 들림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끌림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끌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6:44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높이 달리신 십자가를 볼 수 있을 때마다 믿는 자들은 에수님과 함께 영생과 영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들리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악을 해결(청산)하여 주시고 그 영혼들을 당신의 품으로 이끌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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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12:44-50에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사람을 일방적으로 또는 억압적으로 당신에게 이끌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초청의 말씀을 하여주신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은 외치시며”(cried out, 12:44)라고 말씀하신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므로 부르짖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부분에서 주신 초청의 말씀 속에는 복음(gospel)의 요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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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체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12:44-45). 구약시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는 하나님이시며 사람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셨다. 사람은 자기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갔으나 사람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감싸주시는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생애를 사셨다. 제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하며 요구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귀중한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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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예수님은 영광의 본체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12:46). 빛은 공 영광의 광채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 세상의 영광이나 사람의 영광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모두 헛될 뿐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영광의 빛은 세상의 빛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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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과 심판의 표준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12:47).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 우리들이 읽는 성경말씀은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면 구원이요 말씀을 배척하면 심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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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12:49-50).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명령은 영생을 공급하여야 한다는 지상명령이었다.” 영생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이루어진다. 사람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죽음의 효력이 상실되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자기의 몸을 죽음에 내어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여 주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죽음의 세력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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