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
빌립보서 3:10-12
지금 이 시대는 가면 갈수록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때 원수 사단 마귀는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게 하여 넘어지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모습을 램브란트의 풍랑 “갈리리 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림을 보며 승리의 원리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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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캔버스유화, 161×129cm,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보스턴>
렘브란트의 이 그림은 예수님을 태운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엄청난 광풍과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신의 힘으로 광풍을 맞서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제자들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 옆에 앉아 예수님만 바라보는 제자들입니다.
삶가운데서 내 힘으로 어찌 할수 없는 거대한 폭풍을 만났을때 나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이 시대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거대한 광풍에 맞서서 내가 어떻게 싸워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문제 보다 크시고, 대적보다 강하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썼던 옥중서신입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4-6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처럼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육체적으로는 7가지를 나열하면서 흠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선민의 증표인 할례에 대한 정의가 바뀝니다.
빌립보서 3:3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완전히 다른 정의 내립니다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할례파이다,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영의 할례를 받고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진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롬 2:28-29).
이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 된 자신의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나에게 유익했던 것, 그 동안 자랑했던 육신적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고(빌 3:7-8) 선언합니다. 사도바울의 삶은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로 말씀하신 땅속에서 보화를 발견한 일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날 품삯을 받고 일하던 일꾼이 땅속에 보화를 발견하자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천국의 비유를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 승리하는 삶의 핵심을 오늘 본문을 통해 풀어 줍니다.
빌립보서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적인 단어들이 다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 부활의 권능, 고난, 죽으심” 사도바울이 이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았다”는 헬라어 단어가 “기노스코” “경험하여 알다”의 뜻입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을 통해 비로소 서로에 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도 아시아로 선교 가려고 했으나 성령님이 갑자기 반대 방향인 유럽으로 가라고 하셔사 모든 것 내려놓고 유럽 마게도니야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갔으니 이전보다 더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잡혀서 죽도록 매를 맞고 손에 착고를 차고 깊은 감옥에 들어갑니다. 인간적으로 이해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은 결코 이해가 아니라는 순종하고 믿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 사도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그 상황에 감옥 안에서 저녁에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흔들이고 옥문이 열리고 손발에 착고가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다 도망간 줄 알고 두려워 벌벌 떠는 간수장이와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주님을 만나 온전히 알았다고 고백하며 부활에 대해 말합니다.
빌립보서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부활이란 단어가 헬라어로 제목인 “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란 단어입니다.
10절에도 “부활”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그 부활은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ς)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말할 때 대부분 10절에 나오는 “아나스타시스”(αναστασις)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반면, 성경 전체를 통털어 본문 11절에만 “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 부활“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는 εξ(전치사 εκ →εξ )와 αναστασις(명사)가 만난 복합명사입니다. 헬라어에는 전치와 명사, 또 전치사와 동사가 만나 복합명사, 또는 복합동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어에서 전치사는 많이 쓰일뿐 아니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단어에 대해 도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3장 |
한국어 |
헬라어 |
사용빈도 |
뜻 |
표현 |
10절 |
부활 |
아나스타시스 (αναστασις ) |
대부분 이 단어 사용 |
완전한 부활 (상태) |
완료형 |
11절 |
부활 |
엑사나스타시스 (εξαναστασις) |
1번 사용 |
부활의 모든 과정 |
현재진행형 |
절 |
|
뜻 |
의미 |
10 |
아나스타시스 (αναστασις ) |
완전한 부활의 완성을 의미한다. |
미래에 일어날 완전한 부활 -완료형 |
11 |
엑사나스타시스 (εξ αναστασις)
|
누워 일어나다, 즉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
현재 삶속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 속에서 겪는 죽음과 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전 과정-현재 진행형 |
우리는 흔히 부활에 대해 말할 때 10절에 나오는 단어(αναστασις)만 생각합니다. 즉 미래에 어느 시점에 있을 완전한 부활만 생각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 부활에 대한 더 큰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즉 “엑사나스타시스”(εξ αναστασις)라는 단어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겪는 죽음과 같은 모든 상황에서
지금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강조하며 이것이 승리하는 삶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삶 속에서의 부활을 얻기 위해 빌립보서 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부활을 얻기 위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14절에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디오코”(διωκω), "뒤쫒다, 달리다, 추구하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διωκω)에 대한 당시 배경을 알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διωκω)는 본래 귀족들은 사냥 경기를 할 때 사용하는 용어였습니다.
사냥 경기의 승자는 더 큰 동물을 잡는 사람입니다.
선수들은 활을 가지고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숲 속에서 사슴을 발견합니다.
이때 사슴을 잡기 위해 활을 당기고 이제 쏘는 것만 남았는데, 갑자기 그 옆을 보니 사슴의 5배 만한 큰 곰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이 경기에서 이기려면 비록 사슴이 아깝지만 더 큰 곰을 잡기 위해 그 사슴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달려간다-디오코”(διωκω)라는 단어 속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즉 더 큰 가치와 유익을 위해 이것보다 더 작은 가치와 이익은 포기하고 달려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 정리하겠습니다.
부활은 미래에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음을 통과하여 완전한 몸을 입고 서는 부활(첫 번째)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매일 매일 삶의 현장 속에서 겪는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죽음과 같은 상황이 우리를 찾아 올수 있습니다. 때때로 한숨이 절로 나오고 어느 때는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과 같은 상황 속에서 자칫 우리의 신앙까지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사망을 철폐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삶 속에 매일 매일 많은 선택의 기로(岐路)에 서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이라는 가장 크고 영원한 것을 붙잡기 위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유익을 주는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눈 앞에 큰 사슴이 있지만 더 큰 곰을 잡기 위해 그 사슴을 포기하고 더 큰 곰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말입니다.부활의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것을 내려놓고 달려가야 합니다.
지금은 바로 부활 신앙이 필요할 때입니다.
바로 “엑사나스타시스(εξαναστασις)” 부활신앙을 통해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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