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요한복음 본문 연구
제1장 요한복음 기초 다지기
1. 구조를 잘 알면 내용을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Ⅰ. 첫 번째 책(1-12장)
요한복음 1장은 나머지 부분과 다르다. 특히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열여덟 절은 나머지 부분과 구별된다. 바로 뒤따르는 (1:19-51)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이야기이다. 2장부터 12장까지는 많은 표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표적의 책’이라고 불린다. 요한복음은 이적(Miracle)이란 말을 쓰지 않고 표적(Sign)이란 말을 사용한다. 주제의 발전에 따라 요한복음 2-12장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2장에서 4장까지인데, 예수님의 권이가 순탄하게 세상을 향하여 드러나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역에 반대하는 세력은 아직 가시화되지 않는다. 두 번째 부분(5-10장)에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적대 세력이 등장하여, 이들과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마침내 10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적극적으로 예견된다. 마지막 부분(11-12장)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절정에 이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Ⅱ . 두 번째 책(13-21장)
첫 번째 책에서 강조한 예수님과 세상의 충돌, 또 이로 인한 갈등의 심화는 예수님께서 죽게 되실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예수님의 죽음을 고난 혹은 비참함으로 보지 않고 영광으로 설명하는 점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영광의 책’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구체적인 뜻을 알고 이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을 사명이라 하며, 우리는 모두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 사명을 이룸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난다. “내가 아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아들이 십자가를 질 결심을 하신 것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이미 세상에 나타났고, 실제로 십자가를 지심을 통해 다시 그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란 하늘의 음성이었다. 두 책을 요약하면 요한복음의 주제가 드러난다. 요한복음은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왕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은 그분의 가르침, 특히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보여 주신 증거 위에 든든히 서서 세상을 향한 새로운 증거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2. 요한복음의 저자
학자들 사이에서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요한복음 자체에는 사도 요한이 저자라는 명시적인 구절이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저자는 세배대의 아들 요한 사도라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로 요한복음을 처음 읽었던 독자들은 누구나 사도 요한이 저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름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로 요한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이미 세워진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두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추론이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요한을 독자가 따라야 할 제자의 모델로 제시하고 싶어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자신의 경험을 보다 객관적으로 소개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애제자의 모습
예수님의 품에 안긴 애제자-요한복음 13:23에서 애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 당시 유대인의 식사법을 보면 왼손으로 머리를 고이고 비스듬히 누워 오른손으로 식사를 했다. 그래서 ‘식탁에 앉다’의 헬라어 의미는 ‘비스듬히 기대어 눕다’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저자가 예수님의 품에 있었음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예수님의 품’이란 표현은 재미있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 이외에 몇 번 더 등장하는데 그 하나가 누가복음16:22-23이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거지가 죽어 천국에 간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 결국 ‘품’은 성도들이 마지막으로 가야 할 곳을 가리킨다. 그 곳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상태다. ‘품’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또 다른 곳은 요한목음1:18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계셨던 곳은 아버지의 품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돌보던 애제자(19:26-27)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고, 아마도 이 말씀 이후에도 모친과 애제자도 예수님의 곁을 떠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애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애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이 세상에 가르쳐 주신 것 중의 하나는 ‘확대 가족’이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한 제자(21:24)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는 예수님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록했다.
3. 저술목적
기독론을 강조하는 복음이다.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예수님에 대한 연구를 ‘기독론’이라고 한다. 이 연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와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중심으로 다룬다.
*영지주의에 반대하여(신학적 이유)
요한복음이 기독론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요한복음의 목적은 이단적 기독론의 도전에 대한 바른 기독론의 정립이라는 주장이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조화롭게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이 씌어질 무렵에 영지주의는 아직 신학적인 틀을 갖추지 못했었다. 역사상 영지주의가 성행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유대교의 도전(변증적 이유)
다른 학자들은 요한의 기독론적 유대교로부터 받아 오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독특한 위치를 강조한 나머지 유대교로부터 유일신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두 신을 믿는 종교로 오해받았기 때문에, ‘성육신’을 강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원천적으로 ‘하나’ 이심을(요1:18) 보여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삶의 현장에 적용되는 책(목회적 이유)
요한복음이 유대교와의 실제적 분리라는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요한의 기독론적 강조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실제이다. 성경이 기록된 정황을 살펴보면, 우리가 가져야 할 말씀 연구의 목적이 뚜렷해진다. 신약성경의 모든 책이 만만치 않은 삶의 현실이라는 외부의 도전에 대한 신앙적 대답으로 기록되었다.
*요한복음 자체에 명시된 목적(20:3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신분),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셨다”(하신일)
*영생을 강조하는 복음서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3:16).
제2장 요한복음 1 장
1.프롤로그(Prologue 1:1-18)
이 땅에 오셔서 임재 하시는 예수님은 ‘계시’와 ‘영광’의 극치다. 이처럼 프롤로그는 예수님의 ‘선재 - 강림 -임재’를 노래하고 있다.
*특별한 시각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지만. 공관복음과는 달리 족보를 사용하지 않으며 탄생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이 아니라, 원래 계시던 곳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한다.
*태초에 계시던 말씀(1:1-3)
요한복음17:5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17:24에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말씀이 처음부처 계셨음을 강조함으로써 이 말씀의 권위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보여 준다.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가 되고 있는가? 이것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의 읽으면서 던져 보아야 하는 질문이다. 말씀은 인격체와 같고 그 속에 거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말씀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말씀은 나를 통째로 변화시켜서 새로운 인격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로고스로 표현한 이유
본문의 로고스/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세상을 창조했던 로고스/말씀의 권위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옴으로써, 이 말씀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말씀이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의 교리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인데, 이들은 가각 다른 분이면서 한 분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란 ‘말씀이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구절의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는 뜻은 “성자 하나님(말씀)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롤로그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역할
그렇다면 세례 요한을 이야기를 프롤로그에 삽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역할인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깨달은 자들은 반드시 그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1:11-13)-요한복음의 주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에 있다고 한다. ‘영접/믿음’이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우리 가운데 거하는 영광(1:14-18)
‘거함’의 헬라어 원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던 때에 ‘장막을 펼치다’라는 의미와 같다. 구약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장막/성막에 임하여 거하시는 모습은 최대의 장관이었고, 최고의 엄숙함이었다.
2. 요한의 증거(1:19-34)
다른 세 복음서도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이 세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늘의 소리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신분을 밝혀 준다.
*핵심적 가르침
증거자의 사명은 사실을 바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길을 곧게 하는 것’이며 ‘광야의 외치는 소리’인 것이다. 이런 담대함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때 생긴다(.33절)
*예수 증거에 ‘미친’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이가 참 세례의 주체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얼마나 철저하게 증거를 위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은 엘리야가 아니다(1:2)
세례요한은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한다. 이 가르침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11:14)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엘리야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유대인들은 엘리야와 같은 인물이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세례 요한에게 질문하는 유대인들은 마음 속으로 그가 엘리야 곧 메시아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이들에 대해 단호히 아니라고 답한 것이다.
3.제자도의 대 원리(1:35-51)
*문맥 살피기
요한복음 1:35-51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으신 방법과 원리를 잘 나타내 주는 제자도의 원리를 보여 준다
*안드레와 같이 온 다른 제자는 누구였을까?
본문에는 안드레와 함께 온 요한의 제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유력한 추측에 의하면, 그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형제 야고보이다. 공관복음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형제가 비슷한 시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경우는 세베대의 아들들 곧 야고보와 요한뿐이다(마5:21)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자가 되는 두 가지 방법
첫째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응답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15:7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 상태를 실재적인 모습으로 제시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좇는 것’이다(43절). 이 말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행동 방식, 사고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나를 좇으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예수님의 모든 면을 따르려고 노력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도에 관한 핵심 주의 핵심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의 핵심 주의 핵심은 ‘함께 거하고’ ‘좇는 것’을 통하여 맺어지는 열매다. 곧 다른 제자를 ‘생산’하는 ‘생명력’ 있는 삶 자체다.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다.
*안드레의 고백과 빌립의 고백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한다. 또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를 우리가 만났다”라고 증거한다. 실제로는 같은 내용의 고백이다.
*시큰둥한 나다나엘(1:46)
사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베드로와 같이 안드레의 청함을 기꺼이 받는 사람도 있지만, 나다나엘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더 많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잘 것 없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실망하는 것은 바른 증거자의 모습이 아니다.
*“와 보라”의 위력(1:46; 1:39; 4:29)
“와 보라”의 뜻을 살펴보면, ‘와’는 지금 있던 삶의 자리를 떠나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요한복음의 ‘보라’는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담긴 하나님의 의미를 깨닫고 ‘믿게 되는 것’까지를 말한다.
*참 이스라엘(1:47)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신다. 야곱의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채서 도망쳤다. 그러나 나중에 ‘이스라엘’이라 칭해 주신다. 간사했던 야곱이 훈련을 통해 신실한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는 주님 안에 ‘거함’과 주님을 ‘좇는’ 훈련을 통해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나다나엘의 고백(1:49)
나다나엘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에서 ‘그리스도’는 메시아란 뜻으로, 요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왕’이란 뜻이다.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나님의 사자들(1:51)
야곱은 집을 떠나 방황 할 때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한다. 그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곳이 벧엘 인데, 이는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약속은 이루어지고 후에 야곱은 벧엘에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창32:12,22). 그런데 지금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 곳, 곧 하나님의 집임을 나타낸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제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이루어짐을 예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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