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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및 요한신학

요한복음과 성전파괴

by 은총가득 2020. 4. 4.

    

       요한복음과 성전파괴  /  Andreas J. Kostenberger

                             

 

1. 요한복음과 성전 파괴 연대

 

비르카트 하미님과 달리 AD 70년의 제2성전 파괴는 확실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인 기준점이며,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로 널리 인정되는 AD 80년대와 90년대 초에서 볼 때 분명히 가까운 사건이다.

요한복음이 성전 파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런 사실 자체는 성전 파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요한은 종종 중요한 사건들(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일이나 성만찬 제정 같은)을 언급하지 않는 편을 택하며 오히려 어떤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간접적인 접근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대치(代置) 주제를 근거로 연대가 성전 파괴 이후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이런 추론이 여기서 주장하는 논제에 매력적인 제안이겠지만) 이것 역시 불확실한 지표다. 히브리서도 요한복음과 비슷한 대치 주제를 다루지만 히브리서가 성전 파괴 이전에 기록됐다는 것을 충분히 논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요한복음이 성전이 파괴된 지 십 년이나 이십 년 뒤에 기록되었다는 가장 일반적인 견해를 취할 것이다.

 

2. 성전 파괴의 영향

요한복음은 기원과 대상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에베소의 유대인 개종자 공동체 같은)일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성전 파괴를 요한복음과 관련짓는 데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근 학계가 증명하듯이 유대 민족 국교의 상징인 제2성전의 파괴는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은 참으로 세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약 요한복음의 저술 연대를 1세기말 경으로 추정한다면, 성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한 본문이 성전 파괴와 가까운 시기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알렉산더는 중요한 한 논문에서 “66-74년의 유대 전쟁은 유대교에 존재하던 중앙집권적인 종교 권위를 모두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알렉산더에 따르면 성전 파괴를 둘러싼 사건들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깊은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 유대 전쟁의 패배는 신생 기독교에 적대적이던 권위들을 일소하고, 예견되는 미래에서 예루살렘이 발포하는 포고령에 따라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할위험을 제거함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회의 창을 열어 주었다. 또한 성전 파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대 포교의 기회를 제공했다. 성전 파괴라는 재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할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유대교의 영토적 차원을 덜 강조함은 그리스도인들이 랍비적인 유대교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방 선교의 성공 자체가 이미지 문제를 일으켜 유대인이 볼 때 기독교를 유대교의 운동으로 인식하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기독교가 깨닫게 됐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선교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는다. 대단히 흥미롭게도 알렉산더는 유대 기독교가 진퇴양난에 빠졌다고 설명한다. “이방 교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유대 기독교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그만큼 신뢰성을 잃었을 것이다. 반면에 유대적임을 강조할수록 유대 기독교는 이방 교회들과 관계를 맺기가 그만큼 어려워졌을 것이다.” 랍비주의와 이방 기독교가 점점 멀어짐은 유대 기독교가 양쪽 진영에게 노출되어 비난받기 쉽게만들었다.

 

만약 알렉산더의 재구성이 실제로 거의 정확하다면, 요한복음 저술 당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마틴의 비르카트 하미님가설의 엄격한 방식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유동적이었다. 성전 파괴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완전히 결렬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 선교의 기회, 즉 알렉산더가 확신하듯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사도 요한 같은)이 결코 포기하지 않은 선교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이해는 요한복음 저술 특히 요한복음의 목적과 명백히 관련성이 있다.

 

마틴 굿맨은 제2성전 파괴에 대한 디아스포라의 반응을 다룬 가장 중요한 최근의 연구 가운데 하나에서 알렉산더의 논문이 제공한 정보를 보완했다. 굿맨은 유대 지역 유대인만큼이나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도 성전 파괴는 경악스러웠다고 추정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로마에 살고 있었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보기에 적어도 처음에는 성전 없는 유대교란 상상할 수도 없는것이었다(Ag. Ap. 2.193~198). 따라서 전반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66-70년의 1차 유대 전쟁의 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정당한 가정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소아시아의 거대한 유대인 거주지들이 유대 반란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아마 다수는 아니겠지만)의 후원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거의 무관하거나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1세기 말경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에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인 개종자들 가운데서 강력한 반향을 일으킨 대변동이었다.

 

십중팔구 비르카트 하미님(실제로 어디에서 공포되었든지)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초기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굿맨은 랍비들은 AD 3세기나 그 이후에 이르러서야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가운데서 발언권을 갖게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전 파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첫째로 로마인은 자신들의 승리를 로마제국 전역에 과시했다.” 로마인은 “‘유대가 사로잡혔다’(Judaea capta)고 포고하는 주화들을 만들었으며, AD 76년에는 유대 전쟁의 전리품을 전시해 놓은 평화의 신전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세웠다.

 

둘째로 라틴어 명칭인 이우다이오스’(Ἰουδαιος)에 내재된 모호한 의미는 반란 뒤에 제국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보복을 낳았다. ‘유다에우스라는 용어는 근본적으로 유대에 사는 사람, 즉 유대 거주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또한 사는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 모두에게 반란의 지지자라는 오명을 씌우는 데 이바지했다.

 

셋째로 유대인의 성전세즉 성전 후원을 위해 유대인이 매년 드리는 헌금이 성전 파괴 후에는 로마제국의 세금(fiscus Judaicus, 유대인 세금)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주피터 신전에 헌납되는 세금 수입이 됐다. 도미티아누스(AD 81-96)피스쿠스 유다이쿠스를 엄격하게 거둬들였으며 심지어 유대교 개종자와 유대교 배교자까지도 세금을 내야 했던 것 같은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도 거기에 해당됐을 것이다(Suetonius, Dom. 12.2). 로마제국은 도미티아누스의 후계자인 네르바(AD 96-98)에 이르러서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하기 시작했다(참조, Pliny, Ep.10.96). 요한복음이 저술되던 때에도 성전 잔해는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으며 성전 열망의 소리는 여전히 유대인의 귀에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성전의 상실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과 이 반응들을 요한복음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 성전의 상실에 대한 요한복음을 비롯한 여러 반응

성전 파괴는 유대인 가운데 다양한 대응 전략을 낳았다. 만일 요한복음이 성전 파괴에 대한 반응이라면, 요한복음 자체도 대응 전략의 성격을 띠며 (다른) 유대인들이 채택한 대응 전략에 응답하고 비판하는 것일 수 있다.

 

3.1 성전 상실에 대한 유대인의 대응 전략

유대인이 중앙 성소를 잃어버린 것은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또한 이전의 성전 파괴나 상실 때마다 유대인은 대응 전략 개발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런 필요성이 처음으로 제기된 때는 BC 587/6년 이후의 바벨론 포로 때로 성전이 없던 시대로 묘사되던 시기였다. 흥미롭게도 예루살렘 성전 상실이 대안 역할을 한 것은 새로 나타난 회당이 아니라 여호와의 임재였다. 에스겔 1116절에서 여호와는 내가 잠깐[포로 기간 동안]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고 주장하신다(강조는 저자가 한 것).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임재의 현현 및 솔로몬 성전 이외에도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유지하셨던 관계라는 더 큰 맥락 가운데 성전을 둠으로 성전의 기능을 중요하게 상대화시킨다.

 

유대인은 포로 기간에 성전의 부재에 대처해야만 했을 뿐 아니라 남은 자의 귀환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디아스포라로 남아 성전에서 떠나 살았다.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은 성지 순례를 하고 성전 후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보내는 헌금에 광범위하게 참여함으로 성전의 중심성을 인정했다. 어쨌거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중심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해져서 제2성전시대에 앨러팬타인(상이집트)과 레온토폴리스(하이집트), 사마리아에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하는 성전들이 건립됐다. 그러나 이 성전들은 모두 유대 지역 밖에 있었으며, 따라서 어느 성전도 예루살렘 성소의 명성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유대에 있는 회당들의 경우는 회당이 성전의 지위를 위협하는 일을 피하려고 쉬나고게’(συναγωγή)라고 불렀다(디아스포라 거주지에서는 프로슈케’[προσευχή, 기도처]라고 부름).

 

성전이 없는 공동체의 또 다른 예는 성전 예배가 타락했다는 이유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난 쿰란 언약자들이었다. 쿰란 종파가 다른 유대교 분파보다 일찍 성전 상실에 직면해야 했다는 점에서, 쿰란 종파의 역사는 AD 70년 이후에 유대교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예기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하고 제사장 제도가 타락했기 때문에 쿰란 사람들에게 성전은 상실된것이었다. 쿰란에 대안적인 제사 의식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는 데 반하여 쿰란 언약자들은 자신들을 사실상의 성전으로 보았으며,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중앙 성소에서 이스라엘에게 허락됐던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정결 규례와 기도, 하나님의 율법 연구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쿰란 종파(아마 이전의 사두개파 제사장을 포함하고 있었을)는 종말에 자기들이 회복되어 정화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의식을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유대 고대사AD 70년 이후 제2성전 상실에 대처한 방식들의 흥미로운 일면을 보여 준다. AD 79(성전이 파괴된 지 거의 십 년이 지난 뒤)에 펴낸 유대 전쟁사에서 요세푸스는 투키디데스처럼 자신의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 견해를 표명한다. 요세푸스를 야일의 아들 엘르아살의 연설을 소개하는데, 엘르아살은 성전이 없이는 유대교도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마다사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유대인이라고 주장한다(J.W. 7.341~388). 십삼 년 뒤(AD 92) 유대 고대사를 펴낼 즈음 요세푸스는 자신의 이전 견해가 잘못된 것이었으며 유대교는 성전이 없어도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한복음 저작을 요세푸스의 저서들과 마찬가지로 1세기 말로 볼 경우 요세푸스의 처음 견해와 나중 의견이 변경된 것은 특별히 시사적이다. 요세푸스는 적어도 어떤 유대인들에게는 성전 없는 삶이 언뜻 보기에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기의 충격이 점차 사라지면서 성전의 부재를 극복한 대처 방안들이 나타났다. 또한 초기의 충격이 약해진 다음, 2성전 파괴가 남긴 진공을 채워야 하는 유대인의 필요를 겨냥해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의 변증적인 노력(요한복음 같은)이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4복음서 저자의 접근법은 영원한 해결책, 즉 성전뿐 아니라 전체 유대 절기 근저에 이는 상징(광야의 뱀이나 만나같이 구약에 나타난 다양한 모형론적 기초들은 말할 것도 없고)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을 권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은 주류 유대교(바리새주의 유대교로, 결국 미쉬나와 탈무드를 중심으로 한 랍비주의 유대교가 된)가 선택한 방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3.2 . 성전 파괴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인 요한복음

제임스 던은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더럼-튀빙겐 2차 연구 심포지엄(1989년 개최) 간행물 서문에서 AD 1세기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음을 강조한다. 던은 사도 시대와 사도 이후 시대 사이, 2성전시대 유대교와 랍비주의 유대교 사이 기간[AD 70-132]……중대한 이슈들이 달려 있었고 결정적인 사건들의 방향을 좌우한 중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제2성전의 파괴가 요한복음 저술과 명백한 연관이 있다고 말하면서 요한복음은 유대 민족과 문화의 중심 상징을 폐허가 되게 한 AD 68-70년의 천년왕국 운동 실패에 대한 근본적인 반응으로 규정할 수 있다……대부분의 사람에게 성전의 상실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상실로 여겨졌음이 틀림없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특히 드레이퍼는 유대 종교에 현존하는 요소에 의지함으로 천상의 영역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 경험하는 길을 열려고했던 천년왕국 운동에 대한 내향적 반응이 요한복음이라고 말한다. 드레이퍼가 보기에 요한복음에서 성전 사건을 내러티브의 시작에 재배치한 것은 요한복음의 중심 되는 관심사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되며, 성전은 역사적 중심축역할을 한다. 드레이퍼는 성전 파괴를 예수 운동이 이스라엘의 물리적 회복을 위한 운동에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의 원인은 성전 파괴 자체라기보다 성전을 신속히 복구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드레이퍼의 재구성의 세세한 내용에 다 동의할 수는 없을지라도(특히 요한복음이 성전 파괴에 대한 다소 신비적인 내향적 반응이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 2성전 파괴를 요한복음 저술과 연관시키는 드레이퍼의 주장은 가능성 있는 다른 재구성 이론들의 발판이 된다.

성전 파괴와 요한복음 저술의 연관성을 탐구한 또 다른 학자는 데이비스다. 데이비스는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유대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성전 파괴 이후 시기에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통합과 배제 정책을 써서 유대교 자체의 분열은 물론 이방 종교와 기독교, 영지주의 같은 외부 세력이 유혹을 차단하려 했다. 토라가 중심을 차지하고 랍비주의 학파들 사이의 차이가 최소화됐는데, 이런 과정은 3세기 초에 미쉬나가 성문화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회당이 성전을 대신해 유대교 일치의 상징이 되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요한 당시 유대교는 “AD 70년 이후 유대 민족 가운데 일반적이었던 새로운 정황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있었다. 유대교와 바리새파를 동일시하는 요한복음의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AD 70년 이후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데이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거룩한 장소개념이다. 요한복음의 성소 대치 주제를 논하면서 데이비스는 이 주제 자체를 통렬하게 강조하는 것은 결국 로마에 대한 반란 때문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땅이 황폐하게 된 것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로마와의 전쟁이 유대인에게서 땅과 성전을 빼앗고 성소들을 더럽혔기 때문에, 유대인이 끝없이 상실의 고통을 당하던 때에 요한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무너진 성전을 대신하는 분이라고 지적하는 것은……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요한복음 112절을 요한복음 도입부의 중심축으로 보는 앨런 컬페퍼의 견해가 옳다면(데이비스는 컬페퍼가 옳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호칭(메시아인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이 포기한)에 대한 기독교의 권리 주장에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유대교의 기본 신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거기에 포함시키기 위해 이 명칭을 재정의했다(참조 1:12).

 

드레이퍼와 데이비스처럼 에케하르트 슈테게만도 요한복음이 성전 파괴를 전제한다고 생각한다(참조, 4:23-27). 슈테게만에 따르면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를 성전을 대신하는 분으로 묘사하는 목적은 예수의 메시아 주장에 대한 정치적 해석에서 예수를 멀리 두려는 것이다. 요한에게 예수는 엄밀히 말해 유대인의 왕즉 메시아 표징을 지닌 선지자나 왕위를 주장하는 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인 이스라엘의 임금이다(1:49, 12:14-16, 20:30-31). 슈테게만 역시 성전 척결 단락이 성전 파괴와 예수의 부활을 직접 연결시킨다고 말한다.

앞에 언급한 알렉산더 및 굿맨의 저서와 함께 이런 학자들의 논문은 요한복음 저술과 기독론, 집필의 (변증적) 목적에 결정적인 역사적 배경이 되는 것은 비르카트 하미님이 아니라 제2성전의 파괴라고 보는 역사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더 확고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