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개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보고하는 전승과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예수의 이야기로서 이 전승의 배경은 팔레스틴 유대교인데 요한복음의 배경은 헬라사상이다. 즉 요한복음은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의 이야기를 보고하므로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복음서 자체의 배경은 헬라사상이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은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가르침을 주로 보고하고, 요한복음은 예수의 유대 땅에서의 사역을 주로 보고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이 두 복음이 자료면에서의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공관복음은 갈릴리 중심이라고 하면 요한복음은 예루살렘 중심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헬레니즘적 배경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교적 배경이다.
1) 헬레니즘적 배경
요한복음에는 플라톤, 스토아, 필로, 영지주의 사상에서 보여지는 구조나 어휘에 있어서 비슷한 점들이 많다. 근본적으로 헬라적 이원론의 사상구조와 어휘가 이 복음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헬라세계 전체의 근본사상인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영과 물질의 세계가 위/아래 세계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는 인자가 인간의 몸을 입고서 하늘에서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영광 가운데 올라간다는 내려옴과 올라감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요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위에서 오는 힘으로 다시 나야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거듭나야한다는 의미는 첫째, 위에서 나야 된다. 둘째, 다시 나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개역 성경은 두 번째 뜻을 따르고 있으나 사실은 첫 번째 의미인 위에서 오는 성령의 힘에 의해 나야한다는 의미가 바른 해석이다. 또한 요6장에서 오병이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위에서 온 떡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하나의 표징(sign)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인자가 위의 세상, 영원한 세계의 진리를 계시해 주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헬라적인 사상 구조에서 예수의 독특한 언어 가운데 하나인 sign이라는 말이 나온다.
요2-12장은 표적(sign)의 책이라고 일컫는데 여기에 7개의 표적이 나온다. 1)가나안 혼인잔치(2장), 2)고관의 신하 아들을 고치심(4장), 3)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장), 4)5000명을 먹이심(6장), 5)물위를 걸으심(6장), 6)소경을 고치심(9장), 7)나사로를 살리심(11장). 이러한 표적들은 윗 세상, 영원의 세계의 진리를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13-20장은 영광의 책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으로, 곧 영광을 드러내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 받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요한의 사상적 배경은 헬라적인 이원론 그리고 그것의 좀 더 대중화된 형태의 영지주의에 근거해서 육을 무시하면서 영혼의 구원을 꾀하며 지식(gnosis)을 강조하는 그런 종교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사상이 기독교 근본신앙에 위배될 때는 그것에 반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2) 유대교적 배경
요한이 보고하는 모든 사건은 유대인 예수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의 갈릴리와 유대 땅에서의 사건들이다. 특히 남부 유대 땅에서의 사건들을 보고한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내에 유대교와의 상호작용이 현저한데, 유대교의 제도, 관습, 신학적 범주, 개념 등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구약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시간적)과 헬라적 이원론(공간적)이 조화되어 나온다. 따라서 요한은 근본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당시 유대교가 오랜 헬라사상의 영향으로 헬라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3) 저자
외적 증거- 2C 이레니우스는 이 복음의 저자를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라고 증거한다. 이레니우스는 요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폴리갑에게서 받은 전승이라고 한다. 폴리갑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폴리갑에 의하면 요한이 그의 말년에 에베소에서 이 복음서를 썼다고 이레니우스는 증거하고 있다.
내적 증거- 요21:24절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헬라어 "카이 호 그라파스 타우타"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즉 이 단어는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데, 첫째, 이것들을 쓴 이, 둘째, 이것들을 쓰도록 한 이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와 같이 번역하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고, 둘째와 같이 번역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의 전승을 넘겨주었고, 그것을 쓴 사람은 그의 제자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안다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쓴 이 또는 이것을 쓰도록 한 이의 제자들이다. 즉 요한 공동체의 지도자일 것이다. 그러면 이 제자가 누구인가? 아마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가 누구일까? 세베대의 아들 요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요한 저작설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인데, 그 이유는 요한이 저자라면 어떻게 그의 기록이 공관복음과 놀라울 정도로 다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공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행하신 성전 청결 사건 때문에 그 주간에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기록된 반면, 요한복음은 어떻게 공관복음 저자들이 전연 알지 못하는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된 계기로 제시할 수 있느냐는 주장이 그 요지이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4)저작 과정
요한복음은 어떤 과정을 거쳐 쓰여졌는가? 요한이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다 기록했을까. Smalley는 요한복음의 3단계 설을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베대의 아들,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인 요한이 에베소에서 오랜 시간 목회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구두로 전승하였다.
둘째,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 공동체의 핵심인들이 요한의 이 전승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요한복음 제1판이다.
셋째, 요한이 죽은 뒤 에베소에서 요한의 공동체가 더 다듬어서 요한복음의 최종판인 제2판을 출판했는데, 이 때 로고스 서사시인 1:1-12절과 21장이 부록으로 덧붙여졌다. 여기에 로고스 서시를 붙인 것은 헬라 사람들과 헬라적으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스맬리의 주장이 옳은 것 같은데, 요21:24을 이것들을 쓰도록 한 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이것을 쓰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즉 요한이 저자이고 쓴 사람은 비서이고 편집인이 되는 것이다.
6) 저작 연대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요9:22, 16:2절을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자로 정죄 되어 출교 당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시점을 출발점으로 잡는다. 출교현상이 나타나는 시점을 요한복음이 쓰여지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 18축복기도문이 있는데, 이것은 가마리엘 2세(바울의 선생)가 제정한 것으로 보는데 가마리엘은 대략 AD 85-100년 사이에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출발점을 85년에 놓는다. 그러면 끝 지점은 어디다 두는가. 조그마한 크기의 파피루스 p52 조각 하나가 나일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요한복음 8장의 일부가 여기에 기록되었다. 이것의 연대를 135년으로 추정하는데, 에베소에서 시작하여 나일강 유역까지 가는데는 1세대 약 30년 정도가 걸린다고 본다. 그러므로 대략 끝 지점을 100년 경으로 잡게 된다. 그러면 요한복음은 85-10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볼 수 있다.
7)기록 목적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책이든 기록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20:30-31절에 나온다. 그런데 31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첫 번째로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사용되었으면 믿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도목적이 되는 것이다. 즉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이 믿는 자가 되도록, 믿음에 도달하도록,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것이다.
둘째로 현재 가정법이다. 이렇게 사용되면 변증목적이고, 교육적인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속적으로 믿어가도록 쓰여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믿으라고, 이단들에 귀 기울이지 말고 다른 종교들에 한 눈 팔지 말고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강화하고, 믿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한복음이 전도목적이냐? 변증목적이냐는 독자들이 요한복음을 묵상하면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전도목적이라면 누구를 전도 대상으로 삼았는가? 교육목적이라면 어떻게 교육하려고 기록하였는가? 이런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요한복음을 묵상하시길 바란다.
요한복음의 구조
1. 서론-1장
1) 서시(1:1-18)
2) 증인들(1:19-51)
2. 본론-2장-20장
1) 표적들의 책(2:1-12:50)
2) 영광의 책(13:1-20:31)
3. 부록-21장
1. 서론-1장
1장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이면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복음서의 주제들과 중요한 사상들이 1장에 요약된 형태로 나타나고 본론인 2-20장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
1) 서시(1:1-18)
요한의 서시는 요한의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찬송가에 근거한 것으로 로고스(말씀)의 존재와 로고스의 세상에 대한 계시를 그리는 것으로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 서시의 본질은 구약 성서와 유대교의 지혜신학 또는 말씀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말의 종교요, 글의 종교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요한식으로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따라서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인 것이다. 그 말씀을 지키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이 어디서 구체적으로 체현되느냐 하면 모세율법, 토라에서 체현되었다고 본다. 요컨대 요한의 서시는 헬라적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로고스와 구원의 활동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헬라 독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영원한 예수와 구원의 사건임을 깨닫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2) 증인들-변증부분(1:19-51)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본론(2-20장)에서 보고하는 예수의 계시가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신앙고백들을 다 모아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신앙고백들인 동시에 예수에 대한 선포들을 미리 다 모아 놓은 것이다. 즉 예수에 대한 증거들을 모아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증인들이 나오는가? 먼저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요한의 제자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의 증인으로 예수에 대한 증인이 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증인들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51절 이하에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 51절이 요한복음 서론 전체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본론에 전개될 프로그램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시겠다고 하시는가?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천사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본론에서 펼쳐질 예수의 계시와 구원활동을 통해서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의 프로그램인 것이다.
2. 본론(2-20장)
본론에서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과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성취하고 완성하는가를 보여준다. 예수가 구약의 예언들과 하나님께서 계시로 마련해 주신 이스라엘의 모든 제도들을 어떻게 완성하는가를 보여준다. 즉 예수의 계시 완성을 보여주고, 거기에 대해 다수의 유대인들이 거부하며, 어떻게 소수의 이스라엘이 신앙을 고백하는가를 보여준다.
본론에 나오는 유대인들이란 야곱-이스라엘의 육신적인 자손들로서 구약 계시를 완성하고 성취한 예수를 마땅히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거부하는 거짓 이스라엘, 그 속에 사악함이 있는 이스라엘로 등장한다. 반면 나다나엘과 같이 예수님께 대해 신앙 고백하는 자들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신다. 즉 유대인들이란 예수를 적대하는 자들이고, 이스라엘이란 예수에게 신앙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해서 진짜 이스라엘인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야곱-이스라엘, 즉 유대인들로 나타내는 육신적인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과 참 이스라엘(나다나엘과 같은), 즉 하나님의 자녀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참 이스라엘의 조상인 인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51절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고하는 것은 본론에서 어떻게 옛 이스라엘을 참 이스라엘로 대치하는가 하는 성취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2-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교를 성취하신다.
가) 가나 혼인잔치(2:1-11): 가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대교는 포도주가 다 떨어져 버려서 흥이 다 깨져버린 생명력이 없는 결혼잔치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새 포도주를 그것도 가장 좋은 포도주를 선사하므로 종말에 메시아적 잔치의 시대를 여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며 기독교가 유대교를 성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 성전 청결 사건(2:13-22): 공관복음에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생애 끝 부분에 나온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께서 체포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처음에 갖다 놓았다. 이는 예수께서 새 성전을 짓는다는 것을 표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옛 성전의 기능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성전의 기능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인데,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제사를 통해서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대속의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원히 완전하게 회복한다는 것이다.
다) 니고데모 이야기(3:1-21):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대표적인 인물이 니고데모였다. 그는 바리새인이고, 그 가운데도 학자였고, 산헤드린 고관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자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도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위에서 오는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로 직진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오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바로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 사마리아 여인(4장): 3장에서 니고데모가 유대교에서 가장 고귀한 자라면 사마리아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타락한 유대교이다. 즉 이방 우상숭배의 유대교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많이 가졌던 여인으로 대변된다. 이런 유대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도 영생의 물을 주시는 자신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2) 5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통해 자신이 생명을 주는 재창조의 역사를 하신다.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완전한 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식일이 먼저인가. 아니면 생명이 먼저인가. 생명이 먼저라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시간 개념인 안식일과 공간 개념인 성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도를 무너뜨리고 안식일에 병자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그런 권세가 계심을 보여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안식이란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다.
(3) 6장은 유월절을 완성하신다.
예수께서 유월절을 완성하심으로 새로운 출애굽을 가져다 주는데, 그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인 사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늘에서 오는 생명의 떡을 가져다주는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4) 7-9장은 초막절을 완성하신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다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을 알게 하므로 영생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곧 영생의 물을 가져다주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론에서는 예수께서 옛 야곱-이스라엘을 조상으로 해서 시작되는 옛 이스라엘 역사를 종결하고, 완성하고, 대치함으로써 새로운 참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1) 표적들의 책(2:1-12:50)
이 부분에는 7개의 예수의 이적들이 예수에 대한 표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이 표적들의 의미를 해설하는 긴 설교들이 부착되어 있다.
(1) 7개의 표적
ㄱ) 2:1-1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듬
ㄴ) 4:46-54: 고관의 아들을 고치심
ㄷ) 5:1-15: 베데스다 우물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
ㄹ) 6:1-15: 오 천명을 먹이심
ㅁ) 6:16-21: 물위를 걸으심
ㅂ) 9장: 소경을 고치심
ㅅ) 11장: 나사로의 부활
(2) 표적들의 구조
ㄱ) 이적을 행함: 이적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인식 기관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는 물리적 현상들이다. 그런데 이 이적들이 물리적 현상으로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윗 세상의 영원한 진리를 표적한다. 다시 말해 이 이적들은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적인 현상들이지만 영원한 의미, 참 의미를 계시해 준다. 그래서 이런 이적들은 실재(reality)를 나타내는 하나의 부호(sign)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실재이다. 즉 이적들은 물질의 세계, 시간의 세계, 모조품, 환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이 이적들이 영원의 세계, 실재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참 진리, 영원한 진리를 계시해 준다.
ㄴ) 청중들의 오해: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사인을 베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항상 청중들이 그 현상의 표적성을 모른다. 이 현상들이 진정으로 계시하고자 하는 리얼리티를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속에, 환상의 세계가 진짜인 줄 아는 환상 속에 있으니까 이 사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의 실재를 깨닫지 못한다. 항상 아랫 세상과 윗 세상의 관점의 차이로 오해가 벌어지는 것이다.
ㄷ) 오해에 대한 해결: 이러한 오해에 대해 예수께서 긴 강해를 통해 참 진리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표적들의 책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수가 표적을 행함-청중들이 오해함-오해에 대한 예수님의 긴 설교.
여기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은 아주 물리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내가 세상의 빛이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자”라는 것이다. 빛은 인식을 가능케 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내가 세상에 빛이다”라고 한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희들로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과 연합되므로 구원이 일어난다(안다는 의미는 관계, 연합을 의미한다).
오병이어의 사건도 물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위에서 온 떡임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다시 한번 연합함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셔야 함을 말한다. 내가 생명의 떡인데 이 떡을 먹으므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한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이 다음과 같은 표적성을 가지고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유대교이다. 원래 유대인들은 메시아 시대를 이렇게 혼인잔치 같은 엄청난 잔치로 그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잔치가 물질적인 것이라면 유한함으로 언젠가는 동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주가 다 떨어진 홍이 깨져버린 생명력이 없는 잔치로 유대교를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떻게 하셨다는 것인가? 새 포도주, 그것도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주는, 즉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잔치를 베푸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표적들의 책은 위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표적들의 주제는 한결 같이 생명, 영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표적의 클라이막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이다. 이 표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참고로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물위를 걸은 표적만이 생명하고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일부 학자(Smalley)들은, 물위를 걸은 표적은 요한의 표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물가를 걸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원어는 물위 또는 물가로 번역해도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7번째 표적이 21장의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사건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 이 복음서의 독특성은 예수님께서 “나는…이다”고 자신을 계시하고 자신이 구원을 가져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이요, 생명(11:25), 이와 같이 I am saying이 5개 나오고, 두 번째 책인 영광의 책에 두 개가 더 나온다. 내가 참포도나무(15:1), 길, 진리, 생명(14:6)이다. 모두 7개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의 문장이 나온다(표적과 동일하다). 그런데 이것은 절대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영생을 가져다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됨,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영광의 책(13:1-20:31)
표적들의 책에서 요한은 예수가 공중에게 한 계시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그 중에서 소수가 이 계시를 받아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데 영광의 책에서는 이런 자들에게만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계시하고 있다. 즉 영광의 책에서는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백성에게만 신앙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표적의 책-공중에게/영광의 책-제자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이 영광의 책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의 하나님께로 돌아감을 십자가의 영광받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십자가의 사건이 영광받음의 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다.
(1) 13-17장
13장 전반부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귀환의 의미를 하나의 드라마로 그리고 있다. 주의 만찬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음은 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 언약의 공동체로 만듬을 드라마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3장 후반부부터 17장까지는 고별 인사이다. 이 고별사를 통해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께로 귀환, 곧 그의 백성으로 떠나감을 설명하고 있다.
(2) 18-20장
여기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리고 있다. 그의 체포, 재판, 십자가에 못박힘, 부활 사건을 그리는데, 이 과정이 그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귀환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과정이 영광의 과정이다. 여기서 3단계 기독론이 사용된다. 즉 태초부터 계시던 선재하신 그리스도가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으로부터 높임 받음을 말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영광 받음이다. 십자가가 그의 영광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자 됨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인류를 위해 그의 아들을 내어주심을 말한다. 다시 말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림은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이란 말이다. 이를 요한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 받는 사건이다. 영광 받는다는 말은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영광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편에서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건이며, 다른 편에서는 아들이 영광 받는 사건이다. 그래서 17장의 예수의 기도에서 아들이 그 스스로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하고 또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를 기도한다(17:1). 그것이 모두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되어 있다.
3 부록(21장)
이것은 나중에 부착된 부분으로서 예수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터득해서 신앙고백하는 교회가 어떻게 선교해야 되는가. 즉 어떻게 세상에 예수를 통한 구원을 선포해야 되는가를 말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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