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나타난 εγω ειμι 계시의 주석적 고찰
1.“나는 ---- 이다”는 말씀들에 관하여
요한복음의 중요한 특징주의 하나는, 예수께서 그의 인격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말하기 위해서 강조형을 사용하여 “나는 --- 이다”(εγω ειμι)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선 “나는---이다”라는 것은 기독론적인 의미가 있다. 또 이것은 예수께서 의식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이 말에는 헬라어의 강조구문이 나타난다
. “나는 --- 이다”라는 코이네 헬라어(신약성서가 쓰여진 헬라어 형태)의 통상적인 방식은 “에이미(ειμι)”다. 강조하기 위해서는 일인칭 대명사인 “에고(εγω)”를 덧불일수 있다. “
에고”를 덧불일 경우 문자적 의미는 “내자신은 --- 이다.”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특수한 구문이 대명사를 단순히 강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표현할 때 강조의 종류는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수용되어 왔었다. 예를들자면 십계명에서 “너는 --- 하지 말라”는 형태로 일상적으로 인용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나 글에서 그렇게 많이 사용되지 않은 형태이며 다만 하나님의 말씀들에만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학자들간에는 이러한 종류의 언어가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예수의 인격을 지시해 주는 중요한 점이라는데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가 있다. 그 구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다만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와 같은 서술어를 가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마22:32, 출3:6의 인용)라고 했다고한다. 이 구약성경의 용법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그 표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마태는 엄숙하고 또한 신적인 말인 “나는 그리스도라”(마24:5)고 주장하는 자들의 표현을 보여주며, 두 번이나 제자들이 “내니이까?”(마26:22,25)라고 묻는 것을 보여준다.
마가는 “나는 -- 이다”(막13:6)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표현을 보여주지만, 두 번이나 예수의 입을 빌어 그러한 말을 한다. 한 번은 그가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나아올 때이고(막6:50), 다른 하나는 산헤드린 앞에서 그가 그의 메시야 됨을 확언할때이다.(막14:62). 세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과 관련된 언어가 사용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누가는 스가랴와 가브리엘의 입에서(눅1:18,19),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눅21:8)에게서 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산헤드린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눅22:70)고 인용하며 부활 현현에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는 말씀을 인용한다. 다시 왜 이러한 방식의 말들이 예수에 의해서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복음서 이외에서 그 말은 다만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바울의 회심시 그의 환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나는 예수라”는 말씀이 세 번 읽는다.(행9:5, 22:8, 26:15) 한 번은 베드로가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되며(행10:21), 한 번은 세례요한이 그가 “나는 --- 이다”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하며, 또 다른 한 번은 그의 청중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행26:29) 바라는 바울의 엄숙한 선언에서 사용된다.
계시록에서 그 표현은 네 번 나타나는데 모든 경우에 그 말은 아버지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이다.(계1:8,17 ; 2:23 ; 22:16) 이러한 간단한 개관은 이 표현이 신약성경에서 이따금씩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일상적인 인생들의 삶에서 사용될수도 있지만 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 이다”는 하늘 아버지나 아들의 말에서 나타난다. 구약성경의 용법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신성에 대한 연상은 신약으로 나아갈때에 역시 놓칠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요한복음으로 돌아가면 두 부류의 말씀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한 부류는 “나는 선한 목자라”와 같이 예수께서 “나는 --- 이다”에 서술어를 첨가시킨 경우이고, 다른 한부류는 “나는 --- 이다”가 그자체로 나타나는 경우이다. 레오하르트 고펠트는(Leonhard Goppelt)는 예수께서 마가복음 14:62에서 “나는 --- 이다”를 사용하신 것을 주목하면서 계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공식의 의미는 이 용법과 대조된다. 그것들에서 ‘나는---이다’는
예수를 이미알려진 그 어떤 존재와도 일치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가까이할 수도 없는 그 어떤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고 말한다. 특히 로버트 카이사르는 “요한복음서 기자는 신비스런 ‘나는 --- 이다’라는 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기능적 동등성을 강조하는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문제에 관한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것을 말한다.
2.“나는 ---- 이다”의 주석적 고찰
(1) 나는(εγω ειμι) 생명의 떡이다.(6:35)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따르는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물으며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엑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라는 문맥에 놓여 있다.
예수님께서는 두가지 오류를 지적하신다. 하늘로부터 떡을 준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더 나아가서 하늘로부터의 참 떡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6:33)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떡에 대해 요구하였고, 옛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 이다”는 말에 그는 “내게 오는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는 말씀을 하신다. 다시말해 앞구절에서의 잘못을 수정한다. 생명의 양식은 예수가 제공해주는 일용품이 아니다. 그가 바로 생명의 양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배고파서 먹거나 또 먹고나면 다시 배고프고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은 직접적이며 분명한 선언이다. 그리스도는 참 떡이시오, 하나님의 떡이요, 영생의 떡이시다. 이 삼중의 표현은 첫째는 그 성격, 둘째는 그 기원, 셋째는 그 결과를 말하고 있다. 또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은 생명을 주는 떡이다라는 것이나 이그나티우스의 말처럼 “죽지않도록 불멸의 약을 준다”(Ephesian, 20,2)는 것도 부적절하다. 이것은 곧 예수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수단은 인격적이며,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소유되어야 한다. 또 이 말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기도하지만 유지하게도 하는 이라는 뜻이다. 원어의 문장형식에 따르면 예수께서 자기를 이생명의 떡과 완전히 동일시 하셨다.(생명의 της ζωης는 질적 속격으로서 어떤 유의 생명을 말할뿐 아니라 영적,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즉 그와의 친밀한 연합을 통해서, 육신을 위한 떡이 신체에 동화되는 것과 같이 그를 영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 본문은 두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하나는 우리가 생명을 어디에서 구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다음은 우리가 그 생명을 어떻게 소유할수 있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는 만나와 일용할 양식이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런 비유를 쓰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의 말씀은 직설적인 연설보다도 무지한 자들을 감동시키는 데 더 적절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영양 공급을 위하여 떡을 먹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비밀스런 능력으로 음식이 없이 우리몸에 영양을 공급하시는 경우보다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은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몸과 영혼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분명히 인식시켜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자기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고 말슴하신 것보다 더욱 더 깊이 우리마음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조적으로 본다면 32절이 오로지 神만이 하늘의 떡을 제공한다고 말하고 33절이 신의 떡은 계시자라는 것을 첨가했다면, 47f절은 ‘내가 곧 그이다’로 마무리했다. 원칙적으로 타당한 것이 예수자신에게서 역사적으로 실현된것이다.
“떡”에 있는 정관사는(“일종의 떡”〈a bread〉이나 단순히 ‘떡’이아니라 “그 떡”〈the bread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술부의 명사는 대개 정관사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정관사가 주어(그 주어가 인칭대명사이거나 고유 명사이거나 간에)나 술어와 함께 나타나면 둘다 한정되어서 동일한 것으로 취급될수 있으며 교환될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동일시가 중요하다. 만일 거기에 정관사가 없다면 우리는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을것이며, 따라서 예수는 다른것들 중 “하나의 생명의 떡”이 될 것이다. 그 정관사는 오직 예수만이 생명의 떡이심을 의미한다.
(2)나는(εγω ειμι) 세상의 빛이다.(8:12)
빛은 이 복음서의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고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다른경우에 그는 앞의 경우와는 단지 강조형이 아니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표현인 “나는 세상의 빛이라”(9:5)고 말한다. 이것은 처음의 예처럼 강조형은 아닐지라도 동일한 의미를 전해준다고 할 수 있다. 앞선 강화(7:37-52)에서 자신을 “생수”로 나타내신 주님은 여기서 “세상의 빛”으로 선언하신다. 그는 본성적으로 참 빛이시었고 이 빛이 세상에 내려오사, 세상의 빛이되신 것이다. “세상의 빛”이라는 성구의 배경은 요한이 초대그리스도교 전승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그의 말을 정식화하는데 있어서 헬라종교와, 지혜와 율법에 대한 유다사상에 영향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세상의 빛”은 우주론적인 차원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본질적으로 구속론적 기능이 무엇인가를 서술하는 것이다. 예수는 다음의 단어들이 보여주듯이 빛의 조명자이다. 그가 빛을 던져줌은 그것을 말로 지적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7:37,38에 따라 자기를, 목마른자를 위한 생수로 나타내신 그가 여기서는 자기를(8:12)흑암에 앉은 사람들을 위한 빛으로 계시하셨다. 그는 너무 부요하시고 영광스러우시므로 단 한 개의 이름으로는 그를 서술할수 없으며 단 한 개의 은유만으로는 그의 크심을 공평하게 서술, 평가할 수 없다. 그는 생명이요, 빛이시오, 떡이요, 생수이신 것이다. ...
.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일곱 개의 εγω ειμι중 두 번째이다. 이경우에도 주어와 술부는 서로 바꿀수 있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오, 세상의 빛은 예수이신 것이다. 그 자신이 곧 이빛이신 것이다. 그는-그외의 다른사람들은 아무도 아니다.-이 빛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화로운 속성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게 비쳐나오는 것은 그 안에서 그를 통해서 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나타내신 것은 죄짐을 지고 심판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한 인류, 온갖 양태의 인류(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노예, 남녀, 빈부귀천, 자유자나 노예를 막론하고)가운데서 그가 영적인 문제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원한 구원에 관한 사람들의 조명의 근원으로서 나타나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그의 말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죄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복음과 영속하는 평안을 선언하신다.
요한은 본문의 말을 정확히 언제 예수께서 이 말들을 하셨는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전에서 가르치실때에 연보궤 앞에서”(8:20)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다. 7장의 사건에서 장막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기 때문에, 초막절이 “세상의 빛”말씀의 배경이라는 것은 타당성이 있는 추론이다. 특히 제등행사가 그 절기의 중요한 양상이었음에 그렇다. 만일 예수께서 그 절기 직후에 말슴하셔서 조명이 없었을때였다면 “세상의 빛”과 예루살렘 성의 어둠사이의 대조는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 말씀은 출애굽 기간의 불기둥에 의해서 비춰졌던 빛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세상의 빛”은 언제 그 말씀이 행해졌던지 간에 매우 풍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상적인 표현이다.
(3)나는(εγω ειμι) 양의 문이다.(10:7,9)
양과 목자에 대한 생생한 그림언어로 표현하시는데(10:7,9), 첫 번째는 “양의 문”으로 언급하시고 두 번째에는 단순히 “문”으로 언급하신다. 그장은 양우리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된다. 거기에서 양은 안전을 누리며, 문을 통해서 출입한다. 목자는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데 그것은 그 장 후반부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내포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문으로서뿐만아니라 목자로서 그 자신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그를 담을 넘는 도둑이나 강도들과 대조적으로 문으로 들어갈수 있는 권리를 가지신 목자로서 보므로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이해할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보므로 전혀 다른 또하나의 진리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는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그 자신이 “양들”이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되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문이지 “하나의” 문이 아니시다. 거기에는 문에 대한 독특한 어떤 것이 있다.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양우리는 오직 하나의 문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가는길이 그를 통해서, 오직 그만 통해서라고 말씀하고 계신것이다. 그는 그문이시다. 그가 그 사상을 다시 반복하실때에 그는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그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시지 않지만(그것은 여기에서 1회 사용되는 것보다 공관복음서에서 더욱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우
리는 반드시 그것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것다(참조,10절). “구원받음”이란 개념과 “영생”을 소유함이란 개념은 3:16,17에서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유사한 연결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더욱 (안전을 위해서) 드어가며 (꼴을 위해서)나오는 것에 대한 언급으로 말해지며, 목장을 찾음으로 더욱 설명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한번 배태적인 구원이라는 개념을 만난다. 배타적이라는 것은 오직 한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들어갈수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인류를 위한 오직 한문만이 있다면 예수에 대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할수 있다.그리고 이것도 다른 εγω ειμι 문장과 같이 예수의 신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이 기본 개념은 이중으로 적용되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양의(to)문이신가, 아니면 그가 양을 위한(for)문이신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이 나올 것이다. 8절에서 예수는 양의 문으로 나타나고 있고 9절에서는 양을 위한 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만이 문이요, 항상 문이다. 그는 참목자를위한 문이다. 동시에 그는 참된 모든 양을 위한 문이시다. 그는 목자에 대하여 양의 문이시다. 문은 안으로 인도하기도 하며, 밖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즉 문은 목자로 하여금 안에 있는 자기 양에게 접근할수있게 한다. 문은 양에게 우리는 접근할수 있게하며, 밖에 있는 초장으로 접근하게 한다. 특히 Barret 은 7절과 9절의 관계를 서로 불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것과 하나의 자료가 또다른 자료를 보충한것이라고 말할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 담론을 묶는 유일한 통일성은 그리스도론적인 것이다. 예수는 양과목자의 상이암시하는 모든 형용사구를 자신과 결부시키고 있기때문이다.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또한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을 찾는 이들은 헛된 방황을 하고 있을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한가지 문만 열려있고 다른 문은 모두 닫혀 있기 때문이다.”
(4)나는(εγω ειμι) 선한 목자다.(10:11,14)
문에대한 대화에 이어서 예수께서는 “나는 선한목자라”(10:11)고 말씀하신다. “선한”(Kalos)이란 단어가 선함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학자는 우리가 그것을 “아름다운”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한다.(참고 리유(Rieu), “나는 목자요, 아름다운 목자라”). 윌리암 템플은 이러한 의미로 보며 물론 이러한 번역이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선한’이라는 단어는 선함의 도덕적 정직이나 그엄격함을 나타낸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소위사람들이 도달하여야 할 선을 행하는것이며, 그것이 실제적으로 청렴이 될 수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재의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올바를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선한목자의 매력에 있다. 그의 제자들이 어느 경우든지 간에 예수께서는 도덕적으로 선한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목자이시다.
구조에 있어서도 앞절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내용과 확대된 것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나는 선한목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11절의 반복이다. 14절에서는 그 내용이 더욱더 강조되는 것이 들어난다. 예수는-그리고 오로지 그만이-선한 목자이시다. 여기서 예수는 영원한 실재데 대한 일시적인 인간적 모형들과 대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에 대한 태도가 예수자신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던 사람들(도둑, 강도, 삯꾼)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한목자가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주목할만하다. 목자는 그의 양들을 위해서 살지, 그들을 위해서 죽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양들을 푸른 초장과 물가 인도하며 야수들을 방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비록 양들이 많은 세대를 통하여 인류의 필요들을 공급하였을지라도 특히나 약한 짐승이며 마초를 먹어대는데 있어서 그리좋은 짐승은 아니다. 목자의 임무가 쉬운일이 아니며 그 양무리를 돌보는 자를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할수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양을 위해서 죽는 것은 매우 드문일이며 매우 비극적인 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목자들 사이에서 드물고 비극적인 것이 선한 목자의 특징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10:11) 이것은 모든 자들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신적으로 작정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는 또하나의 방법이다. 양은 무력한 동물이다. 그리고 죄인들도 그들의 구원을 가지고 오기에 무력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선한목자가 그의 생명을 버리므로 양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 복음서의 심장부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양들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에는 목자의 죽음이 포함된다.
(5)나는 (εγω ειμι)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본문은 주어와 술어를 다시 서로 바꾸어 사용할수 있는 구문이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부활이요, 생명, 이것은 예수이다. 부활과 생명은 주님에게 뿌리를 박고 있다. 순서를 주목하자. 첫째가 부활이요, 그 다음이 생명이다. 부활은 불멸의 생명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부활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충만한 복된 생명이요, 그의 속성은 전지요, 지혜요, 전능이다. 이런까닭에 그는 동시에 신자들의 영화로운 부활과 그들의 영생의 원인이요, 원천이요, 샘이시다.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살 것이다. 이부활에 대해서 그것이 일어나는 때가 오는데 ,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라고 말해진다.(5:25) 이것은 사람의 아들인 예수의 현존에 비추어 볼때만 사실이다. 이 주제가 여기서 다시 계속된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를 떠나서는 부활과 생명이 있을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있는곳에 부활과 생명도 반드시 있다. 예수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가운데 현존하는 영원한 생명의 실현체이다.
또 지금까지의 모든 “나는 --- 이다.”라는 예수의 말씀들은 특별히 그의 제자들에게 말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말해진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말씀들은 예수께 그들 자신을 복종시키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그녀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후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 마르다는 거기에 대하여 “마지막 날의 부활”을 언급하므로 반응한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나는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11:23-26) 예수께서는 단지 부활과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이시며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완전히 그가 말씀하신대로 생명을 주시는 일에 속하며, 그 자신을 생명과 동일시 한다. 예수께서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그토록 결정적인 죽음이 그에게는 장애물이 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그가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생명의 특성이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 것 임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말씀들을 다시 살아날 나사로의 죽음의 문맥에서 말씀하신다. 요한은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정복하는 예수의 권세의 빛 아래에서 그것들을 보도록 의도한다. 그는 가장 위대하시고 죽음보다 놀랄만큼 탁월하신 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종국은 우리 모두가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할수잇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가 잠시동안 죽음을 피할수 있을지 모르지만 죽음이 마지막이 아닌 주님에 대해서 기록한다. 그는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에게 길을 비키는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신적권세의 표현을 위한 또다른 기회였다.
(6)나는(εγω ειμι)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그 길, 그 진리, 그 생명이 술부로 되어있으면서 그 앞에 정관사(the)가 선행하고 있다. “나는 길이다”, 예수님은 다만 길을 보여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길이시다. 그가 길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새로운 생명의 길로 현현하심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할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무한하신 속성을 가지셨으므로 그의 모든 속성에서 하나님과 동등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사랑하시는 분 (또는 사랑을 베푸시는)이 아니라 그도 사랑하시는분이시다. 사랑 그자체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가 하심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이르는 그 길이다. 즉 모든 신적 축복이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내려온다. 둘째는, 그는 또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다. 진리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구속적 계시의 신뢰할만한 근원이시므로 진리그 자체이시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듯이 그 진리도 생명의 진리이시다.
그런데 이 진리를 하늘의 지혜의 구원하는 빛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명과 모든 영적 축복의 본질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제1장의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것이다.”하는 말씀과 같이 이 본질을 그림자와 상징에 대조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존 칼빈은 이 ‘진리’를 신앙의 완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길’리 신앙의 시작이자 초보적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는 세단계를 주장한다. 처음, 중간, 그리고 나중이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시작하고, 그분과 더불어 계속하며, 그분안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 진리, 생명의 세 단계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세 개의 명사 모두가 그것들의 완전한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중의 두 개는 실제적인 형용사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모팻(Moffatt)은 “나는 진리되고 생명있는 길이다.”로 번역하며, 모을(Moule)은 “나는 (그)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가 더 나은 번역에 대해서 의심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에 대해 세가지로 확언하신다.
예수님이 길이다고 하는 것은 그가 밀의의 전달자처럼 신직관으 위한 수단들로서교시들과 계시들을 전달했다는 의미에서 ‘길’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자신이 곧 목표라는 의미에서 길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이며 생명”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진리”임은 곧 계시된 신의 현실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 그 생명이다.”는 예수님이 여기에서 우리의 몸에 생기를 주는 호흡이나 성령을 말씀하심이 아니다. 그가 영혼이나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이 아니라 사망에 반대되는 생명을 생각하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런 속성이 하나님 아들안에 거한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소유된 자들에게 생명을 주며 그도 그 원천이 되신다.
예수는 모든 진리와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곧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이 된다. 진리와 생명은 각기 이 복음서의 첫째부분과 둘째부분의 특징적인 주제들이다. “생명”:1-12장에서 32회, 13-21장에서는 4회 나온다. “진리”:1-12장에서 13회, 13-21장에서는 12회 나온다.
진리와 생명은 명사이지 형용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가 그 길이다.”인 것 같이 그는 그 진리와 그 생명이다. 물론 본 문맥이 그 길이라는 개념을 더 중요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 의미는 이렇다. “나는 그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 길이다.” 예수님께서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구속적 진리를 계시하거나 아버지와 교제를 낳게 하는 생명의 씨앗을 나누어 주시고 곧 바로 그는 그 길로서(주권적 은혜로 선택받은) 그들을 아버지께로 인도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이어서 말씀하신다. 본문에서의 생명은 요한복음에서의 생명을 대변한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며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예수님 자신에게로 들리우게 하는 영적인 생동감의 원리로 서술되어있다.
(7)나는(εγω ειμι) 참 포도나무다.(15:1,5)
다락방 설교에서 두 번씩이나 예수께서는 그가 포도나무이시라고 하신다. 첫 번째의 경우에서 그는 “난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며,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두 번째의 경우는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신자들과의 연결성을 강조하시며, 이어서 구세주와 구원받은 자들 사이의 상호내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15:5) 구약성경에 보면 포도나무라는 그림언어로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예: 시80:8-16, 렘2:21, 겔15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그리스도께서 “참” 포도나무이시라는 개념을 불신앙의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헨드릭슨은 그의 요한복주석에서 포도나무는 가지와 함께 설명되어야 하며 포도나무의 긴밀한 단일성과 결합성, 그리고 유기적인 긴밀성 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가지는 포도나무와 결합해야하며 그포도나무에서 공급받는 생명을 누리고 도덕적이요, 신비적이며, 영적인 결합은 사랑에 기초해야함을 강조한다.
블트만은 이에 대해 이 담론은 포도나무를 이 열매에 관련시켜서도, 그것이 제공하는 술에 관련시켜서도 않된다고 말하며, 포도나무는 오히려 생명의힘이 흘러나오는 성장과 성숙을 위한 힘을 주며 고갈을 면케하는 줄기를 가진 나무로서 파악하는 것이 그 이해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리므로 포도나무는 곧 생명의 나무이다. “생명의 물”, “생명의 떡”, “생명의 빛”과 마찬가지로 “생명의 포도나무”라고도 할수있음을 말한다. 특히 G. R. Beasley-Murray는 W.B.C에서 “나는”이라는 말은 복음의 말이라고 주장한다. 즉 나는 포도나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레온모리스는 포도나무는 원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일을 해주셨을지라도 그들은 그 사명대로 사는데 실패했고 그들의 열매는 생산해 내야하는 그 그림 언어를 지키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실패한 포도나무가 되는 그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그안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실행되는 참 포도나무를 보게된다.
John. Calvin은 주석을 통해 ,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 “내가 정말로 그 포도나무다. 그러므로 다른곳에서 힘을 찾으려 하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이다. 쓸만한 열매는 나외에 다른무엇을 통해서도 맺어질수 없다”라고 말한다.
* 한 신학도의 석사(Th.M)논문 "εγω ειμι" 에 대한 연구"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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