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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제 3 장 상징적인 휘장

by 은총가득 2020. 3. 22.


       제 3장 상징적인 휘장

                                   호라티우스 보나르

 

    성막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걸려 있었습니다. 휘장 안에는 언약궤, 긍휼 자리(시은좌 : mercy-seat), 그룹(cherubim)이 있었고, 휘장 밖에는 금으로 만든 분향 단(altar of incense))과 등잔대, 전시하는 빵(shew-bread)을 두는 상(床)과 여호와 앞에 둔 열두 개의 빵이 있었습니다.

     

    성막에는 정확히 세 개의 휘장 또는 앙장(仰帳)(curtains)이 있었습니다.

     

    가장 바깥 휘장은 성막의 입구에 걸렸으며, 항상 옆으로 쳐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여금 원하면 언제든지 놋으로 만든 희생단과 물두멍이 있는 바깥뜰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휘장은 아무 것도 가리거나 숨기지 않았습니다. 휘장은 이스라엘 사람이면 누구나 희생물을 가지고 들어 올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에서 제사장(성직자)들은 성막으로 들어오는 자를 만났으며, 그가 가져온 희생물이 흠이 없는지를 조사했습니다. 왜냐하면 흠이 없는 헌물만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흠이 있는 희생물을 가져온 사람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는 축복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흠이 있는 희생물과 희생물을 가져온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돌아가서 다른 수소 또는 자신의 죄를 짊어질 다른 것을 가져와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휘장은 성소의 입구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휘장은 누구든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걸려 있었지만, 제사장들을 제외하고는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같이 지정되었으니, 제사장(성직자)들은 항상 첫째 성막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하고"(히 9:6). 제사장들은 첫째 성막에서 상을 차렸으며, 등잔대에 불을 붙였고, 금으로 된 분향단에 향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휘장이 제거되고, 출입 제한이 철회되며, 모든 곳을 한 피로 뿌리고, 누구든지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값없이 들어오며, 세 곳이 하나가 되어 희생단, 물두멍, 상(床), 등잔대, 분향단, 궤, 긍휼 자리가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은 한 영광스러운 통일체의 일부로서 함께 가져오는 때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각 부분이 한 완전한 희생물의 한 완전한 그림으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희생적인 진리를 보여주며 분명히 가르치기 위해 잠시 동안 서로 나뉘어져 있지만, 때가 차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잃어버린 낙원으로 다시 들어갈 때 함께 가져올 것입니다.   

     

    세 번째 휘장은 지성소 앞에 걸려 있어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가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가렸으며, 완전한 만남과 교제의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암시했습니다. 그 휘장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사람에게(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세계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안에 계십니다. 지금은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교도 신전에 있는 휘장들은 그 신전의 성소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이 휘장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그 안에 거하시는 분이 장차 자신을 드러내실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들 휘장들은 진리의 선포나 빛의 약속들이 아니라, 단지 우상 숭배의 일부이며, 어둠의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영광을 가린 휘장은 그 영광이 계시될 것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교 사당에서 휘장은 비탄과 절망의 표시이며, 어떠한 빛의 소망도 없으며, 알지 못하는 분은 항상 알지 못하는 채로 있어야 하며, 또한 알지 못하는 분을 알 수 없으며, 접근하지 못하는 분께 접근할 수 없다는 인간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휘장은 빛에 속한 것이지 어둠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덮개였지만, 분명히 계시이기도 했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며, 어디에 계시며, 어떻게 그분께 접근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었습니다.  

     

    휘장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철이나 놋쇠나 은이나 금으로 만든 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휘장은 바느질을 해서 만든 값 싼 것이며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휘장은 경배자가 더 가까이 나아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는 것임을 암시했기 때문입니다. 장막의 특성이 암시하는 바는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시대는 목자의 장막같이 나를 떠나 이동하였고"(사 38:12). 장막 안에 있는 휘장의 특성이 암시하는 바는 값싸며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휘장은 쉽게 거둘 수 있으며, 위급할 때에는 옮길 수 있었습니다. 휘장은 차단 벽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벽이었으며, 필요한 때에는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휘장이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휘장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너는 정교한 솜씨로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휘장 하나를 만들되 그룹들을 수놓아 그것을 만들지니라. 너는 시팀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네 기둥에 그 휘장을 걸고 기둥의 갈고리들은 금으로 만들어 은으로 만든 네 개의 밑받침 위에 둘지니라"(출 26:31,32). 모리아산 성전을 위하여 솔로몬이 만든 휘장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청색과 자주색과 진홍색 실과 고운 아마 실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수놓았고"(역대하 3:14).

     

    성전 휘장은 성막의 휘장보다 모든 면에서 두껍고 당연히 컸던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이 휘장이 높이가 약 20 피트, 폭이 약 20 피트이며, 견고하게 만들어졌고 곱게 짜졌다고 말합니다. 이 휘장은 거두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일년에 한 번만 대제사장(대성직자)이 피와 향을 가지고 긍휼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걷혔습니다. 휘장은 오랫동안 놋쇠나 철보다 더 움직이지 않는 장벽과 같은 무서운 입구에 걸려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이스라엘 사람 중 그 누구도 감히 휘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휘장은 수세기 동안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에 의해 여러 번 찢겨졌지만, 자주 교체되어 휘장과 관련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그 경이로운 교훈을 가르치도록 그곳에 달려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틀림없이 그 휘장에 관한 신비로운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휘장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영광의 이상(異象)을 모두 보여주기를 꺼려하시거나,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신 것처럼 달려 있거나, 단순히 안에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달려있지 않았습니다. 휘장의 천과 위치와 관련한 많은 것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속적인 유대인은 휘장의 사용과 취지를 크게 잘못 판단하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휘장의 사용에 대해 사실과 지극히 동떨어진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역사가 요세프스가 그러한 부류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분별했던 이스라엘 사람은 비록 메시아와 관련하여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보다 더 높고 고상한 어떤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그 휘장에서 영광스러운 어떤 것, 관심을 끌며 동시에 혐오감을 주는 어떤 것, 감추며 동시에 계시하는 어떤 것, 자신과 메시아에 관해 말하는 어떤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성막에 관련한 모든 것과, 특별히 위에 그룹이 달린 것들이 구속자 메시아, 여자의 씨, 발꿈치가 상한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모든 앙장도 거의 동일하게 관련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앙장의 표면에는 동일한 장식물이 수놓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또한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열 개의 앙장으로 만들며 정교한 솜씨로 만든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지니"(출 26:1, 36:8). 어느 곳에서도 그룹의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낙원에 있었고 오랫동안 사라졌던 그 신비스러운 장식물은 이제 성막과 관련해서 재현되었습니다. 주님의 동산이(아마도 홍수 때) 떠내려갔기 때문에, 분명히 그들의 모습이 기억으로 유전되었으며, 이스라엘에게 낯선 자가 아니었지만, 그룹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복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서부터 모세까지 교회는 성소가 없이, 경배드리는 희생단만 있는 방랑자였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룹에 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룹을 다시 복원하도록 가르치셨을 때, 그는 그룹의 특성에 대해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룹들은 이제 바로 메시아를 상징하는 성소에 수놓아져, (이들 그룹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그룹과 메시야는 모두 "하나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성막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던 교회"가 오순절 때의 교회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행 7:38). 그러나 휘장에 관한 옛날 유대인의 생각이 아무리 애매할지라도, 휘장은 매우 특유하고 무언가 중요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분명히 휘장은 성막 기구의 일부이지만, 그들 중 기묘하고 유일무이한 부분이며, 짜임새와 위치와 사용에 있어서 매우 특유하며, 각 색과 실이 상징적이며 소리를 내는 것들로 구성된 걸작품의 일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합니다. 휘장은 여전히 직물로 만든 매우 약한 부분으로서, 후에 성전이 세워졌을 때, 거대한 대리석 벽들과 백향목 기둥들로 둘러 쌓여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건축물의 한 작품과 같이 모든 면에서 위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거대한 기초는 견고한 바위에 끼워 놓여졌고, 성전의 거대한 돌들은 그 자체가 각각 한 개의 벽으로 층층이 쌓여 세워졌습니다. 성전의 문은 단단한 놋쇠로 만들어졌으며, 매우 무거워서 열고 닫는데 20 명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건물이 세워졌다기보다는 마치 산의 일부와 같은 견고한 덩어리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휘장은 아이들의 손으로도 그려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휘장은 혹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것에 대비하여 놋쇠로 된 문이나 화강암 벽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기대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렸습니다. 수많은 견고하고 육중한 것들 가운데 있는 약한 천으로 만든 휘장은 적절한 때에 제거될 수 있는 일시적인 방벽인 일종의 칸막이였습니다. 바깥뜰에 있는 경배자가 바깥 입구에서 성소를 바라보았을 때 걸작품의 면모를 보게 되며, 아마도 지성소로부터 비추어 나오는 영광을 엿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 지성소로 가는 길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으며 휘장에 의해 막혀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많이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닫혔지만, 어느 날 자기보다 앞서 달린 자인 장차 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대성직자)께서 오셔서, 지금은 상징에 의해 어떻게 그분께 나와야 하며 어떻게 경배드려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면전으로 자기를 인도해 주실 때,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세우신 참 성막 안에 있는 긍휼 자리 또는 긍휼 자리보다 더 좋은 곳인 하늘의 왕좌에 들어가 경배를 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추론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휘장입니다! 그 휘장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가렸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의를 통하여 군림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듯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가렸습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자를 위한 의로운 자의 대속에 의해 이 의(義)가 성취될 때까지 하나님은 직접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휘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휘장이 수치와 영광 모두를 가리거나 또는 막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쫓아내지 않고 가까이 계시는 것이 가능했으며, 사람이 소멸당하지 않고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바로 그 휘장입니다!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졌으며,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휘장의 근원은 하나님이었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결한 사람이 화평과 사랑 안에서 서로가 모일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의 거룩이 요구함에 따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을 가리신 것이었습니다.

     

    피가 휘장에 뿌려졌습니다!  비록 "휘장 앞에서"(레 4:6) 라는 표현이 반드시 휘장 위에 뿌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사한 방법으로 행해졌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일곱 번"은 온전하고 완전한 행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피는 주님 앞에 철저히 보여져야 했습니다. 깨뜨려진 율법을 영예롭게 하기 위하여 희생물에서 피를 취하는 것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휘장 안에서 희생물의 피를 취하는 것은 이 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 년에 단 한번 지성소를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긍휼 자리 매우 가까이서 피가 취해졌습니다. 그룹 사이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죄를 속하는 피로부터 울려 나오는 외침을 들으시는 동안 "휘장 앞에서" 피를 취했습니다. 피가 휘장 위에 뿌려졌을까요? 혹자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휘장 가까이의 바닥에 뿌려졌다고 말합니다. 성소의 바닥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습니다. 속죄의 날에 대제사장은 휘장을 걷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 피로 물들어져 있는 문지방 위로 지나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피입니다. 지성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은 속죄의 피가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분명히 피가 휘장 위에 뿌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속죄가 반드시 그 휘장을 찢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아름다운 휘장이 우리 구주의 거룩한 인성을 나타내듯이(히 10:20), 일곱 번씩 되풀이해서 계속 피를 뿌리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요. 제사장이 죄 헌물을 드릴 때마다 휘장은 바닥에 떨어진 피로 다시 젖었습니다. 이는 속죄의 피로 적셔진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 휘장을 통하여, 곧 예수님의 육체를 통하여, 우리를 위해 피땀으로 흠뻑 적셔진 그 몸을 통하여, 휘장이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우리는 피가 뿌려진 긍휼 자리와, 긍휼 자리가 세워진 피가 뿌려진 바닥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가 뿌려진 보도와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과 피가 뿌려진 휘장을 잊지 맙시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이는 사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땀이 큰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던" 겟세마네를 잊지 맙시다. 겟세마네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분의 할례에서 우리는 피가 뿌려진 휘장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손에 요구되었던 피를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임재영 (옮김)

- Horatius Bonar 著 "Rented Veil" 3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