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wish War/Judea Capta types유태인 전쟁
제1차 유대-로마전쟁(第1次 - 戰爭, 영어: 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獨立戰爭, 66년 ~ 73년)은 때때로 위대한 반란(偉大-反亂, 히브리어: ??? ?????, 영어: The Great Revolt)으로 불리는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 지방의 유대인들의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 중에 첫 번째 전쟁을 말한다[2].
이 전쟁은 66년에 발발했는데. 그리스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분쟁에서 시작되었다.[3] 이 전쟁은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유대인 반란의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는 로마 제국의 열 한 번째 황제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훗날 황제가 되었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졌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JUDAEA, Procurators Porcius Festus 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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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이름은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AD 50~54). 본명은 Lucius Domitius Ahenobarbus. AD 37. 12. 15 라티움 안티움~68. 6. 9 로마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AD 54~68 재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붓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방탕하고 사치하며 그리스도교도를 박해하고,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로마 시를 불태운 것으로 악명높다.
Judaea, Herodian Kingdom. Agrippa II, under Vespasian
유대, 헤롯 왕국. 아그리파 II, 베스파시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는 (9년 11월 17일 - 79년 6월 23일), 로마 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이다. 그는 비텔리우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었다
JUDAEA, Judaea Capta. Titus. AD 79-81.
티투스 (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로마 제국의 열 번째 황제이며 아버지는 로마 제국의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이다.
John Hyrcanus I (Yehohanan), 134 - 104 B.C., under the Seleukid King Antiochos VII,
시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이었던 때(BC 135/134~ 104)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BC 134-104년)는 정복사업을 시작하여 갈릴리 하부에서 네겝에 이르고 지중해에서 나바테야에 이르는 소제국을 통치하면서 요단서편과 사마리아(그리심산 성전의 파괴), 에돔을 정복하였다.
유대. Aelia Capitolina, Macrinus. 217-281.
?마크리누스 (165년 - 218년)는 로마 제국의 22대 황제로 황제에 올랐음에도 단 한번도 수도 로마에 들어가지 못한 유일한 황제이다.
원로원 출신이 아닌 최초의 황제로 카라칼라가 217년 파르티아와 싸우다가 장교들에게 암살당하자 재위에 올랐다. 파르티아와 오랫동안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했고 218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포기하고 볼모로 잡고 있던 파르티아 국왕의 어머니와 배상금, 그때까지 손에 넣은 전리품들을 모두 반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군대의 지지를 잃었고 그사이 율리아 마이사의 사주로 시리아 군대가 엘라가발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마크리누스는 군대를 모아 맞섰으나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군대가 모두 엘라가발루스에게 투항했다. 이에 로마로 도주하던 중 비티니아에서 발각되어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출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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