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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창

사랑이 이끄는 삶

by 은총가득 2020. 3. 19.



               

                              




                   사랑이 이끄는 삶 <눅 10:25-37>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율법학자는 자랑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율법학자는 레위기 19장 18절과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인정하시면서 권면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영생할 것이다.” 그러자 이 신율법자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나그네가 가진 것과 입은 옷을 빼앗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도망갔다. 때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당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강도당한 자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강도당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 난 곳을 포도주로 소독하고 기름을 발라 헝겊으로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돌봐주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데나리온 두 닢을 꺼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당부하기를,

“이 사람이 기동할 수 있을 때까지 돌봐 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소.”라고 말하고 여관을 떠났다."


 여기까지 말씀한 다음 예수님이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율법학자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던 말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마태복음 22장 40절에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으뜸이란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사람들은 대개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거나 비즈니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호주머니에는 반드시 돈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노리는 강도들이 곳곳에 매복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차례 강도의 위험(고후 11:26)을 겪었다고 말한 것을 보아서 이 당시 강도의 출몰은 흔한 일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강도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살인강도짓을 하는 가장 비열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로 강도만난사람이 나오는데, 이 불운한 여행자는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피를 흘리며, 거의 죽게 된 상태로 길가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인물은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강도만난 자들 돕지 아니한 것은 율법을 어기지 아니하려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21장 1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했고,

민수기 19장 11절에서는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베푸는 일보다는 그저 안식일에는 꼼짝 않고 지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사랑을 베풀고 병든 자들을 고쳐주는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자를 돕지 아니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들이

강도만난 자의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본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그것을 겪고 있는 당사자나 그들 조상들의 죗값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네 번째 등장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혼혈족이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이 사람들에게서 무슨 가치 있는 일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는 대단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고정관념과 인습을 깨버린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그들이 경멸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에게 사랑을 베푼 진정한 이웃으로 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참으로 옳은 일인지,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밭을 사는 참으로 가치를 아는 사람, 또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전 재산을 투자하여 그 진주를 사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돕지 않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율법의 참 정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가르친 가장 중요한 정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일을 했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21:1)는 것과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동안 부정하다(민 19:11-13)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잘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으뜸이 되는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율법을 어긴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고 힐난하셨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고, 밖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악하다고 하시면서 율법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점들을 여러 차례 바로 잡으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613개의 율법조문과 39개의 안식일법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문자적으로 메어 살았지, 정작 그 율법들의 정신을 바로 깨우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람에게 하 는   것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된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사람에게 악하게 행한 것은 곧 하나님에게 악하게 행한 것이 되며, 사람에게 베푼 선행은 곧 하나님께 베푼 선행이 됩니다. 판단의 잣대는 우리가 사랑이 이끄는 삶을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톨스토이도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글에서

가난하지만 착한 구두수선공 마르틴이 추운 어느 겨울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세 차례 돌본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것이었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톨스토이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는 마태복음 25: 40, 45절에 주목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또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말하기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사랑이고, 인간에게 주어지지 아니한 것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내일의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 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 하지 말라.” 또는 “~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신 말씀들의 핵심, 그 가운데서도 특히 5장 38-39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와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신 핵심도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15장 12절에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장 17절에는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에서 보듯이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이지만,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은 더 큰 죄가 됩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이 던지는 질문은, “누가 그 불행당한 자를 도왔는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율법대로 살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사랑에 이끌리는 삶을 살았는가?” 입니다.<yyd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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