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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복음이란 무엇인가 / 김세윤 지음

by 은총가득 2011. 4. 9.

 

 


            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 저 자 김세윤

서울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고 싱가폴에 있는 제자훈련센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도에 대해 훈련을 받는 동안 신학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 후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브루스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마쳤다. 그 뒤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하였고, 독일 훔볼트 대학, 싱가폴, 미국 칼빈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 등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저서로는 『바울 복음의 기원』과 『그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의 아들』『예수와 바울』 등이 있다.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를 거쳐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및 총신대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미국 풀러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있으며, 한국교회에 대한 소명에 의해 한인 목회자들을 위한 목회학 박사 과정도 섬기고 있다.

 

 

 

 

▣ Short Summary

 

복음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 핵심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죄를 위한', 곧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그의 부활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두 사건이 함께 우리를 위한 하나의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구성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선포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우리를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구원의 소식, 곧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이 약속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또는 그 한 측면만을 왜곡된 채로 이해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소망과 실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및 윤리를 정립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올바른 제자도의 삶을 살지 못한다. 한국교회는 자기 교회, 자기 교단, 그리고 국내의 복음 사업만 생각하지 말고, 구원사적으로 그리고 문명사적으로 전 세계와 그 안에서 기독교의 현 위치를 살펴보면서, 전 세계적인 선교사명을 더 넓고 깊이 있게 깨닫고 실행해야 한다.

 

 

 

 

▣ 차 례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1장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2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3장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

 

4장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5장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수의 의도

 

6장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7장 예수의 죽음

 

8장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9장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결론과 초대

 

 

 

복음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지음

 

 

 

1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1장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1.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우선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마태복음 판)'라는 말은 고정된 표현으로서는 복음서들에 흔히 나오고, 복음서 용어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문서들에는 종종 등장합니다. 반면, 이 표현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유대문서에도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에 존재하고 있던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고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은 구약과 유대교의 한 중심사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 의와 평화, 자유와 풍요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명사적 표현과 하나님이 “다스리시다.”라는 동사적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따금 ‘그의 나라’라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다니엘 2장과 7장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매우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내용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네 가지 전제들

 

① 창조사상 -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로서 온 우주의 통치자, 곧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후에 하늘을 자신의 거처지로 삼고 땅에 아담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인간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뜻입니다(창1:28).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의 부왕(副王)입니다.

 

 

② 타락사상 -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입니다.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땅을 통치하려 하므로 땅 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아담에게 자기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아담의 자기주장 의지를 충동했습니다(창3:5).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단의 통치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려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용어로 ‘교만’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에게 의존/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이 교만은 아담(인간)이 자신의 창조주에게 등을 돌리는 행위요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였습니다. 신학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덕 입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내재의 자원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습니다(참조 롬1:24, 26, 28).

 

 

인간은 영원하지도 무소부재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이기 때문에 변화에 속박되어 있고, 그러기에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또한 장소의 제약 속에 갇혀 있기에 부자유합니다. 아울러 지혜와 능력이 부족해서 불안하고 모든 문제들 속에 빠집니다. 사랑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 병고, 압제, 빈곤, 갈등, 죽음 등 모든 형태의 고난이 결국 인간의 유한성 곧 결핍성에서 비롯됩니다. 고난은 죽음의 증상입니다. 실존의 모든 형태의 고난은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격리된 결과로 죽음이라는 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죽음의 증상들과 고난이 더 이상 없는 온전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지금의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고 죽음병에 걸린 것이라는 관점에서 말할 때 구원은 단순히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 또는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예 : 요5:21~29). 그러나 성경이 지금 우리의 실존을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는 해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말할 때는 구원을 현재적 삶과 구분하여 ‘영생’이라 합니다(예 : 요5:24).

 

‘영생’이란 원래 히브리어 ‘오는 세대(세상)의 삶’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현대어로 번역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뜻은 단지 시간적으로만 끝없이 길어진 영원한 삶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오는 세대’, 곧 구원의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적(神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하건데, 자만의 삶을 살려고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인간(아담)이 사단의 통치 아래 떨어져 죽음에 처해 있다는 것과 그러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회복되어 사랑의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덕 입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한 전제입니다.

 

 

③ 언약사상 - 하나님나라 선포의 세 번째 배경은 의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구원의 행동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언약사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를 약속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는 언약형식으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고 복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을 위해서였습니까? 선지자 이사야 등이 갈파하듯이,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빛(하나님의 계시)’과 ‘구원’의 전달자로 삼아서 온 인류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도록 하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 : 사42장, 46장, 49장). 이러한 언약관계는 야훼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맏아들)’로, 또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양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사랑하는 ‘신부’라는 여러 가지 그림언어들을 사용하여 표현되었습니다.

 

 

④ 종말사상 - 마지막 전제는 하나님 노릇해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이 드디어 이 세상에 오셔서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는 종말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사단이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살핀 구약과 유대교의 이 네 가지 전제들을 배경으로 이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1. 가까운 장래에 올 하나님 나라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마4:17).”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더 빨리 오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른바

 

‘주기도문(마6:9-13, 눅11:2-4)’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의미심장하게 부른 후에 사실상 세 가지 청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세 청원들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물론 첫 번째 청원입니다. 둘째와 셋째, 곧 일용할 양식의 공급과 죄 용서는 첫째, 즉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결과로 주어지는 복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오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의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주기도문 강해는 바로 이 세 마디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는 먼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죄 용서를 받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마6:14-15).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청원에 대한 주해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등의 삶의 근본적 필요들에 대한 실존적 불안에서 재물을 많이 쌓아 그것으로부터 안녕과 행복을 얻으려는 태도, 곧 맘몬(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를 심각하게 경고합니다. 맘몬이즘은 사단의 통치의 가장 절실한 표현입니다. 예수는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자애로운 창조주 하나님의 아빠 노릇에 의지하는 자세, 하루하루 그날을 위한 양식을 구하는 자세로 살라고 가르칩니다(마6:25-32). 예수는 주기도문에 대한 이러한 강해를 다음과 같이 결론 맺습니다.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도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마6:33).”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역동적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즉 사단의 통치를 대치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옴은 아담적 숙명이 뒤집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용서와 결핍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은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으로써 인간들은 “의인들”이 되고 그들의 사회는 샬롬(화평/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하나님 나라 묘사의 특징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여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것들과 이 세상의 것들을 직접 동일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구체성을 피하여 비유로 말합니다. 예수가 묵시문학의 환상적인 언어와 랍비문학의 물질적 언어를 피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의 신학적인 뜻에 집중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뜻을 존중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할 때 묵시문학적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어떤 물질적 체계로 생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에 불과하지 그것의 실체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비유들의 신학적인 의미에 집중해야지 그것들을 물질적인 것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주로 잔치의 비유, 특히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 묘사했습니다. 잔치는 풍요함, 만족, 기쁨, 사랑 등을 상징합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잔치” 비유로 그리면서 설명하려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 하나님적 생명, 곧 “영생”입니다. 예수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음”의 비유로도 표현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고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

 

․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까운 장래에 오리라고 선포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벌써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음을 또한 강조했습니다. 누가복음 11:14~22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는“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눅11:20).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즉 성령에 힘입어 쫓아냈다고 말합니다(마12:28). 즉 예수는 자신이 초월 하나님의 내재에 작용하시는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고 치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왕국(집안)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해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 침투하여 사단을 “묶었기” 때문이라고 암시합니다. 이것은 예수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은 후 사단과의 첫 대결에서 이기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시험기사: 막1:12~13, 마4:1~11; 눅4:1~13). 예수는 자신의 사역 전 과정을 사단과의 투쟁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를 줄곧 시험하여 아담과 같이 자신의 통치 아래로 떨어뜨리려 한 사단은 드디어 십자가에서 예수에게 자신의 최후의 무기인 죽음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부활시켜서 사단을 이기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전쟁을 결판낸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를 병행시켰습니다. 예수의 치유는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실재가 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 하나님 나라와 치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 우리의 복음 선포에도 항상 치유가 일어나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은 하나님의 치유를 육신의 병고 제거에만 국한해서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육신의 병고 제거뿐만 아니라, 갈등의 제거, 경제적 빈곤의 제거, 정치적 억압의 제거 등과 같이 포괄적으로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고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 샬롬의 상태 속에서 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사랑 그리고 내 몸 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구로 옵니다.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때, 만인의 인권도 보장되고, 사회적/경제적 정의도 일어나고, 평화와 자유도 확대되어 우리의 삶이 건전해지고 또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치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서만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의 힘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생명을 일으키는지(우리의 삶을 ‘치유’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신앙은 오순절 신학과 같이 오로지 질병을 ‘기적적’으로 제거하는 것만 추구하는 나머지 미신화하는 것도 피하고, 전통적 개혁신학과 같이 추상화되고 관념화되어버리는 것도 피할 수 있습니다. 누가 과연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이제는 성령이 더 이상 우리의 심신의 ‘기적적’ 치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누가 감히 성령은 오로지 심신의 영역에서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만, 그리고 ‘기적적으로’만 역사하신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의사의 투약과 수술을 통한 치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일반계시와 일반은총을 통해 심지어 불신자 의사도 사용하십니다.

 

 

 

안식일에 치유하심

 

“왜 예수는 그의 반대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치유를 하려고 하였을까?” 예수는 사단의 통치 이전의 생명의 충만함 가운데서 있었던 태초의 안식을 기념하며 사단의 통치가 종식되는 종말, 곧 새 창조 때 생명의 충만 가운데 있을 안식을 희구하는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이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가 극복되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시작되어 드디어 진정한 안식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곧 종말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통치)가 벌써 시작되어 (질병으로 그 증상을 나타내는) 죽음이 극복되고 생명이 일으켜지게 되었다는 것을 시위하고자 한 것입니다.

 

 

 

3장 하나님 나라는 언제 오는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히 옴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현재에 벌써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출범’과 ‘완성’의 구도로 설명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여,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벌써 ‘출범’한 것입니다.

 

 

 

4장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1. 하나님 나라는 초월에서 은혜로 온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이미 독특한 용어인데, 예수는 그것과 함께 ‘들어가다’와 ‘(상속으로)받다’라는 독특한 동사들을 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함께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이루다’, ‘확장하다’ 등의 동사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언어 사용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고자 한 사실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를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면’, 그것은 인간의 나라이고, 내재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내재적인 것에 무슨 진정한 구원의 힘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만 ‘받는’ 것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월성과 은혜성은 구원의 두 조건들입니다.

 

 


2. 하나님 나라는 초월성과 은혜성이 함의하는 신론

 

이른바 고등 종교들의 신론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도 계열의 신론인 범신론(Pantheism)입니다. 힌두교와 개혁 힌두교로 볼 수 있는 불교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 종교는 신의 초월이 부인되고 내재만 인정됩니다. 이런 범신론과 그에 따른 세계관/인생관을 가진 종교들에 있어 구원론은 영겁의 윤회 고리를 끊고 현상으로서의 존재를 마감하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이러한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일은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즉 자력(自力)구원론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둘째, 이슬람교식 신론은 범신론과 반대로 신의 초월성만 강조하여 내재를 부인하는 신론입니다. 신이 너무나도 거룩하고 위대하기에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론을 이신론(理神論) 또는 부재신론(不在神論)이라 합니다. 이런 신론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관은 세계는 신이 미리 정하여 넣은 규칙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결코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슬람교의 구원론은 완전한 숙명론이든지 아니면 자력 구원론입니다.

 

 

이런 신론들과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은 초월자이시면서 동시에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구원의 통치를 펼치는 신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초월의 힘으로 이 내재의 한계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참 구원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 즉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 존재여야만 하나님은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점진성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지금 실현되어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씨’의 비유들을 통해 그 ‘옴’과 실현되어가는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특별히 겨자씨 비유(막4:40 병행구절들)가 대표적이고, 또 하나는 누룩의 비유(마13:33 병행구절들)입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그리고 점진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이 또는 큰 반죽 덩어리에 감춰진 누룩 같이 조그맣게 시작합니다. 하도 미미해서 믿음의 눈에만 보일락 말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필연적으로 성장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씨 속에 생명이 있기에 아무리 작은 겨자씨도 심기면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듯이, 하나님 나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이므로 아무리 미약하게 시작해도, 아무리 사단적 저항이 있어도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이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고 누룩 같이 점진적으로 반죽 덩이를 변화시켜 갑니다.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연의 확대를 말한다면,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가져오는 질적인 변화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예수는 갈릴리 어부 몇 명을 데리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유대와 로마의 통치자들을 앞세운 사단의 세력의 극단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자라서 주후 313년에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성장하여 20세기까지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부족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불러 모았습니다.

 

 

 

4.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전제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옴 또는 실현을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들로 설명한 것은 당시의 열심당적 혁명 운동과 바리새적 경건주의 운동들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성전(聖戰)을 펼치고, 정치 경제 및 사회적 혁명을 통하여 다윗적 메시아가 통치하는 신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열혈당 또는 열심당(Zealotism)에 반대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정치적 혁명이나 군사적 투쟁으로는 통치자/압제자와 피치자/수난자 사이의 자리만 바꿀 따름이지 통치자-피치자, 착취자-피착취자의 불의한 관계 자체를 해결하지 못함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는 이른바 ‘해방신학’에 동조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 예수는 반면에 바리새인의 소극적 경건주의도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소극적 경건주의로 자신의 몸과 양심이나 깨끗이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통치)의 샬롬이 이루어질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5. 사랑의 이중계명

 

예수는 하나님 나라(통치)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모든 계명들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상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실존에서 “하나님을 혼신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요구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지 사단의 통치를 받을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것인지 사단의 뜻을 좇을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요구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반면 사단은 “네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이 되라.”고, 곧 “네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너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라.”고 유혹하고, 그러기 위해 결국 이웃을 착취하기를 종용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숭배’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우상숭배의 형태는 맘몬숭배, 즉 재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태도입니다(마6:24, 눅16:13). 맘몬이즘에 빠져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했습니다(눅18:24~25). 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께 의존하고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살면, 부는 비교적 공정히 재분배되어 경제적 정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적 정의는 사회적 평화를 낳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는 만인이 만인을 섬기게 하여 골고루 잘 사는,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있는 사회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월에서 ‘오는’ 힘, 곧 하나님의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성령에 힘입어 자기주장의 의지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실현됩니다.

 

 

 

5장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예수의 의도

 

그러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무엇을 이루려 하였습니까?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덕 입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특별한 주장과 가르침, 즉 하나님 나라의 선포,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게 함,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호칭 등은 모두 한결같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통치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분이라는 자기 이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는,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을 상징적으로 상응하는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여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핵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러 모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아빠’라고 부르도록 하여 그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됨의 특권을 누리게 했습니다.

 

둘째, 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로 불러 모은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교회)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았습니다. ‘성전’과 ‘제사’를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윤리적 순종에 그림 언어적으로 적용한 에센파 유대 공동체의 전통 위에 서 계신 것입니다.

 

 

셋째, 예수는 그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자신에게 내려와 권능을 받고 “너는 나의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체험을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아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신탁(삼하7:12-14)과 그것의 중요한 재해석의 전승에 비추어 해석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씨’를 자신의 ‘아들’로 삼아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치케 한 것은 (곧 나단의 신탁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신실히 대행하여 먼저 이스라엘 민족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다윗 왕조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신실히 반영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는 자기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도록 소명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6장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1.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고 새로운 성전을 짓습니까? 첫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이고, 둘째 단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선포를 통해 인간들로 하여금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구원을 빈 말로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나아가 그들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참여할 것(곧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 영생을 얻을 것)을 보증해주고 그 첫 맛을 지금 벌써 체험하도록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했습니다.

 

 


2. 자신의 죽음을 통해

 

최후의 만찬에서 '잔의 말씀'으로 예수는 자신이 이사야 42~53장에 예언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여 속죄 제사로 그리고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속죄 제사와 새 언약의 제사라는 두 개의 범주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죄가 씻어져 의롭게 된(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새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새 언약의 제사)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사건이기에 그것은 종말의 유월절 구원으로서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건인 것인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했음을 깨닫게 되면, 그가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죽음을 어떠한 관계 속에서 보았는가를 알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자신의 죽음의 두 단계들을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 한 것입니다.

 

 

 

 

2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7장 예수의 죽음

 

예수가 다가오는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보았으므로 자연히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그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실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이 상징하는 유대민족의 체제가 더 이상 개선할 수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직면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성전을 무시해버리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세로 죄인들의 용서를 선언하기도 하고(예 : 막2:1~12 병행구절들), 부정한 자들을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예 : 막1:40~45 병행구절들) 등 성전과 제사장 기능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유월절에 성전에 가서 그곳에서 제사드릴 제물을 사고파는 일을 방해하는 시위까지 한 것입니다(막11:15-19 병행구절들).

 

 

사두개인 제사장 무리들은 예수의 성전 시위를 직접적인 구실로 삼아 그를 체포하여 산헤드린 재판에 회부했습니다(막14:53-64 병행구절). 이 재판에서 대제사장은 사무엘하 7:12~14의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 심문했고, 그것에 근거하여 한 두 질문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사실 하나의 질문에 대한 두 표현들일 뿐입니다. 즉 예수가 새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한다면(성전죄목), 그는 분명히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하자 후자 쪽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예수가 수긍하는 답을 하자, 대제사장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참람죄'를 저질렀다하여 사형 언도를 내립니다.

 

 대제사장이 보기엔 빈약한 인간 예수가 메시아 또는 하나님 아들이라 주장한 것(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참람죄가 아니라 성전을 때려 부수겠다고 한 것이 참람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수긍한 것은 곧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부수어버리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이름을 욕되게 한 죄, 곧 참람죄를 범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은 예수를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소했는데 그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 다윗적 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정치범으로 다루도록 고소한 것입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이런 반란자에 대한 벌은 십자가에 달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모세의 법대로 예수를 돌로 쳐 죽이는 사형을 집행한다면 당시 참 선지자는 패역한 백성에 의해 꼭 순교 당한다는 유대 사회에 만연된 사상에 따라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인식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예수를 더욱 추앙하고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게 할 빌미가 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게 함으로써 신명기 21:23에 나무에 매달려 처형된 자는 하나님이 저주를 받은 자로 인식시켜 예수 운동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8장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그런데 예수는 다시 산 자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부활은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을 빚은 사건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은 그의 옮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하나님이 전적으로 옳다고 확인한 것이고, 자신의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라고 한 예수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예수가 대표했던 신이 스스로를 참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이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구원의 사건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의 부활사건은 예수의 신 곧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이며, 그 신이 주장하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정한 구원사이며, 그 신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의 모음인 성경이 참 경전이며, 그러기에 그 속에 담긴 약속들을 성취한 예수의 사건이 참 신의 온 인류를 위한 종말론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부활이라는 독특한 사건은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활동한 한 사람, 이 예수를 통해 초월의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켜 그의 이러한 가르침과 주장을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달았을 때, 어디에 그들의 관심의 초점이 놓이게 되었겠습니까? 두말한 필요도 없이 약속을 성취했다는 후자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사도들의 케뤼그마는 그의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메시야적 사건' 또는 '그리스도적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부활이 증명해주기에 사도들의 선포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한 ‘약속’과 그의 죽음을 통한 그 약속의 ‘성취’,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한 그 성취의 ‘확인’, 이 세 가지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들은 상호간 해석을 도와줍니다.

 

 

 

9장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1. 예수는 우리(죄)를 위해서 죽은 메시아(그리스도)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말이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그리스어가 '크리스토스'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사에서 쓰실 일꾼을 세우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왕들, 제사장들, 또는 선지자들이 모두 '기름부음'받아 하나님의 일꾼들도 쓰임을 받았기에 메시아들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이 이렇게 쓰일 때는 보통명사인데, 이 보통명사가 중간사 시대에는 유대인들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기대가 간절해지면서부터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이루도록 세워질 일꾼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말은 예수가 종말의 구원자란 뜻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받아 누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것의 완성을 받으라고 권고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죽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완성을 아직 기다리는 상태라는 것, 곧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기 위해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하늘의 제단 아래서 당분간 대기하며 쉬고 있는 것으로 그립니다(계 6:9-11).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구원의 “첫 열매”는 그 '영생'에 대한 '보증금'이기에 그 구원의 완성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롬 8:18-39).

 

 

 

 

 

2. 의인이라 선언함/되게 함(Justification)

 

'의인이 되게 함(또는 의인으로 칭함)'은 법정적 그림언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벌을 받아버려서, 우리가 그 복음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 벌 받음의 효력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성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스도의 복음을‘의인으로 칭함’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그에 동조한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이 '의인으로 칭함'의 그림을 단순히 법정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특히 그중 일부는 그것을 단순히 우리 대신 벌 받음이라고 하는 좁은 이해에만 근거하여, 윤리를 구원론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약점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오해의 극단으로 인해 오늘 한국의 엄청난 개신교들의 수와 그들의 '믿음'의 열렬한 시우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윤리가 개인 윤리 면에서나 사회 윤리 면에서 아주 미약하게 나타나는 통탄해 마지않을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 특히 '칭의론'으로 표현되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오해의 근본은 성경에서 '의'는 법정적 개념일 뿐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그리스-로마적 관점에서 단순히 전자로만 이해한 데 있습니다. 성경에서 '의'란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면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에 그 관계는 원만히 지탱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관계에 신실함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관계를 원만히 지탱하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원만함은 화평을 가져오는 데 바로 '샬롬'입니다. 그러나 만약 관계의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참여자들은 '불의'하고, 그 관계는 갈등에 빠지고 맙니다.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불의하였고, 이 '불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는 갈등의 관계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관계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인간을 심판하기만 하고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 노릇을 할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불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보내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대표로 우리의 '불의(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고, 자신을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는 제사로 바치게 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의'의 범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고 말합니다(롬 3:21-2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에 대한 신실하심 또는 사랑하심이란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함'은 가톨릭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대로 우리를 도덕적인 의미로 '의인이 되게 함(즉 변화시킴)'의 뜻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의미로 우리를 '의인되게 함(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인간이 되게 함)'입니다. 사단의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의인됨'은 언어는 달라도 그 본질적 의미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됨(성화됨, 성도됨) 또는 자녀됨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했다는 말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재림 때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진입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곧 '의인'의 상태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구원(의인됨)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의 상태에 머무른다는 것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성령으로 계속 우리를 '의인'의 상태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자신도 위안을 받습니다(롬 8:1-39, 고전1:9, 빌1:6).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로우심/'은혜(perseverance of saints)'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안도함(Gelassenheit)'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석에 서야 함을 늘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의 자세로 '의인'의 삶을 사는 것, 바로 이 두 측면들이 서로 논리적 긴장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간의 논리적 긴장은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긴장의 요소를 풀어버리려고 하다보면 결국 한쪽을 경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자가 없어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후자가 없어서 방종하며 '의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3. 화해시킴(Reconciliation)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일어난 구원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자신에게 '화해시킴'이라는 그림언어로도 설명합니다(롬5:1~11, 고후5:18~21, 엡211:19, 골1:20~22). 이것은 죄인들로서의 인간들을 창조주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켜 갈등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화목 제사로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갈등을 제거하고 화평을 이룬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화해시킴'도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사로 바쳐 그의 '원수들'인 죄인들을 자신에게 화해시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그림 언어를 에베소서 2:11~19에서는 죄인들이 하나님께 화해됨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됨에도 적용합니다. 그리스도의 화목제사는 유대인들이냐 이방인들이냐를 막론하고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서로에게 화해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태어난 교회는 하나님께 화해되고 서로에게 화해된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께 화해됨은 당연히 이웃에게 화해됨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화해'의 구원이 개인들 간에, 사회 공동체 내에서, 민족들 간에, 그리고 온 우주적으로 실재화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동서화해와 남북화해를 도모해야 할 목회적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근본적인 화해가 어찌 정치가들의 협상과 조정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4.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

 

성경에서 '아들'이란 근본적으로 '상속자'를 나타내는 그림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선포는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위임)'받아 행사하는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신약 성경은 이른바 '보냄의 형식'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실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냄의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신적 구원을 이루었다는 뜻이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게 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그의 무한한 부요함을 받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갈4:4-6). 즉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고 그의 신적 삶(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같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얻음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같이 하나님께 대항해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패러독스이고 역설입니다.

 

 

또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실행은 그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은 이른바 '내어줌의 형식'으로 표현합니다(요3:16, 롬8:32, 갈2:20, 요일4:10) 이 형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초월자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시위였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대행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선포를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예수가 주이다.”라는 언어로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롬1:4).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주이다.”라고 선포할 때, 그들은 예수가 그의 생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만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한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 이후 현재도 그 주권을 계속 대행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아니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단을 전보다 더 확실히 압도하는 힘으로 그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뜻한 것입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왕의 우편에 앉음은 옛 근동의 궁중의식에서 왕의 권세를 대행하는 총리의 몫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우편에 높여 그로 하여금 온 우주 위에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습니다(마28:18). 그리하여 생전에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꺾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시위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부활의 능력으로 사단의 잔여세력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를 온전히 실현해가게 된 것입니다(고전15:20~26).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권의 위임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영(성령)의 힘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행2:33, 롬1:4, 계5:6)

 

 

우리가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의 주권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도 내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의 이중 계명의 요구로 그의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께 의지함과 그에 대한 순종이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들이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신앙도 미신입니다. 그런 미신들은 하나님의 통치 또는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가져오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6. 하나의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하여 포괄적으로 선포하기

 

사도 바울의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좀더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의인됨', 하나님과 '화해됨',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됨' 등에 좀더 무게가 실린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와 요한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예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 높임 받으신 분으로서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교회를 통해 그의 구원의 통치를 펼쳐가고 계신다고 선포하는 데 좀더 무게를 싣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는 복음 선포 형식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아들로서 하나님의 최종 계시자이며(히1:1~14),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온전히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육신 하여 우리의 고난의 처지에 오신 분임을 강조합니다.(히2:14~18) 그리고는 그리스도께서 속죄와 새 언약의 제사로 자신을 죽음에 바침으로써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노릇을 하여 옛 성전의 기능을 완성하고 우리의 죄 문제를 단번에 영원히 효과 있게 해결하였으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 들어가게 하였음을 강조합니다(히8~10장)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대제사장 노릇하고 계신다는 것, 곧 우리의 중보자 노릇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계속 남아 짓누르는 죄의식과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와 핍박 등에 시달리며 첫 신앙의 열정을 잃고 괴로워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대 제사장의 현재적 중보에 힘입어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 도움을 얻으며 종말의 영원한 안식을 향해 가는 순례의 길을 신실히 가도록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오로지 '보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시대와 처지를 물론하고 오로지 종교 개혁자들(칼빈!)식으로만, 그러니까 바울의 '의인됨'의 범주로만, 그것도 포괄적으로 옳게 이해된 '의인됨'이 아니라 오직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이해된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보수'한다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무시해버리는 우를 범할 뿐 아니라,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리하여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도들의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포괄적으로, 그러면서도 삶의 정황에 적합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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