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cension
영지주의
1.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논란
-역사적 사건인가, 상징인가
여타 종교에서는 출생과 죽음의 순환만이 거듭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먼 과거의 한 순간에 그 순환이 역행하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과 상징적인 해석이 제시되어 왔다. 초기 기독교는 인간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라는 문자적인 해석을 해왔다. 이는 예수의 측근(제자들)들이 실제 인간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육체는 부패하고 영혼이 계속해서 살아 있다라고 주장했다면, 동시대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이치에 닿는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기존의 정통파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도 육체적 부활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정립됐다. 다른 한편으로, 부활을 부인하지 않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거부하는 해석이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한다.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이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를 만나다기보다 영적 수준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만남은 꿈속에서, 무아경 속에서, 환상 속에서, 또는 영적인 깨달음의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
정통파는 이런 영지주의자들의 해석에 대해 이단으로 단언했다. 그렇다면 왜 정통파는 부활을 단어의 뜻 그대로 해석하게 되었을까? 신약성서에 실린 이야기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부활한 예수에 대한 도마의 확인은 문자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반대로 엠마오로 가는 제자 앞에 예수는 이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야기,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예수의 몸을 만지려 할 때 만지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면, 왜 2세기경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고 다른 시각은 이단이라 배척했을까? 이 문제는 교리적인 관점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육체적 부활의 교리가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여러 교회 위에 군림하려 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2세기부터 이 교리는 주교들이 사도를 계승함을 입증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오늘날 교황의 권위의 기초가 되었다.
부활에 대한 주장은 일부 제자들(특히 베드로)에 의해 주장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은 이후 베드로는 지도자이자 대변자로서 공동체를 이끌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공동체가 인정했던 유일한 권위자, 즉 부활하여 말하고 있는 예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권위는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과 그의 사후 170년 동안 주교, 사제, 부제의 3계급 제도로 발전한 세계적 조직 간의 연결고리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주장이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부활을 처음 목도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베드로로부터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전통파 교회는, 베드로는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 말하며 교회의 정당한 지도자로 주장한다. 2세기부터 정통파 교회에서는,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실제 권위를 부여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됐다. 실제적으로 ‘모든 권위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겪은 열두 제자로부터 나오며, 앞으로 누구도 다시는 그러한 경험을 할 수 없으리라’는 이론은 공동체의 정치적 구조에 있어 엄청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거의 2천 년 동안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오직 사도들만이 절대적인 종교적 권위를 지니며, 사도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주교와 사제만이 적법한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에 대해 영지주의자들은 거부를 했다.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부활이 과거에 일어난 특정한 사건이 아닌 그리스도의 존재를 오늘날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를 상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보는 바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 제자들은 영적 진리를 실제 사건으로 착각했다고 본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마리아 복음서>의 저자는, 부활한 모습이 꿈이나 무아경 속에 나타나는 환상이라 해석하고 있다. 영지주의 관련 자료를 보면 그리스도의 존재를 경험하는 사람은 주로 공포, 경외, 비탄, 환희와 같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게 된다고 나온다. 영지주의자들은 환상을 통해 영적 직관을 얻게 되고 다시 이를 통해 현실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경험을 존중하고, 심지어 경외하기까지 했다. 부활을 깨달음의 순간으로 본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역사 속의 예수”와 연관된 과거의 사건보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현재 접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심을 보였다.
영지주의자들은 내적 환상을 통해 “주님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의 권위가 열두 제자 혹은 그 계승자들의 권위와 동일하거나 아니면 이를 능가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통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다수”에 전수했던 공개적 대중적 가르침에만 의존하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여기에 더하여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비밀” 가르침까지 전수한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일부 제자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예수의 심원한 가르침을 비밀로 간직하였고, 이를 자신의 영적 성숙함을 입증한 자, 그리하여 영지, 즉 비전되는 지식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특정인들에게만 은밀히 전승했다고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영지주의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특정 제자들 앞에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환상을 통해 그들에게 신의 신비를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부여했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에 실린 복음서는 구성이 예수의 전기를 출생부터 죽음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반면 영지주의적 글은 그리스도의 영혼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는 부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빌립에게 보내는 베드로의 서한>에는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 묘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에서는 예수는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음은 물론 이에 “육신”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는 빛 속에서 말을 하는 빛나는 존재로 등장하거나, 다양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꾼다. <빌립복음서>도 같은 맥락이다.
특정 문헌을 특정 사도와 연관시키는 것 역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마리아 복음서>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남녀상열지사를 암시함으로써 그들이 영적 교류를 이루었음을 주장한다. <도마복음서>와 <경쟁자 도마복음서>(예수의 “쌍둥이 형제”가 썼다고 되어 있다) 등의 제목은 “독자인 당신도 예수의 쌍둥이 형제이다.”라는 뜻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도마처럼 예수가 자신의 “쌍둥이”이며 “또 하나의 영적 자아”임을 깨닫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독창적으로 고안해낸 이야기가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의 표징이 된다고 여겼다. 스승의 말을 곧이곧대로 되풀이하는 사람은 미숙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화, 시, 의식, 그리스도와의 “대화”, 계시,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환상에 대한 설명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들만의 통찰력, 즉 자신들만의 “영지”를 표현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 사도들의 본래 가르침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영지주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즉 바울,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부활에 있어 열두 제자들은 “영지”를 부여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마리아 복음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보다 훨씬 탁월한 통찰력과 환상을 부여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베드로 묵시록>에는 깊은 무아경에 빠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존재를 경험하고 이를 통해 영적 통찰력을 얻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야고보외경>에는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를 선택하여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바를 이야기해 준다. 이 이야기 속에서 영지주의 내에서 전승되는 비밀 전통의 우월성을 역설하고, 영지주의 교사들이 오로지 “평범한” 전통만을 전수할 수 있는 사제나 주교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초기 전통은 불완전하여, 스스로의 영적 경험, 즉 “영지”에 의존하여 전통을 수정하고 변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영지”를 부여 받은 사람은 모든 교회의 가르침을 뛰어넘으며 교회의 계급적 권위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개개인의 경험만이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 기준을 제공하며, 간접적으로 전달된 증언과 전통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육체적 부활이라는 개념을 비웃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육신을 비하하고, 육체적 행위(성행위 등)가 “영적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육신 “안”에 머문다고 믿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혹은 힌두교나 불교 전통)을 신봉했다. 마치 사람이 육신을 도구로 활용하나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육신과 분리된 존재인 듯 말이다.
2.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주교”
-유일신교의 정치학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사도신경은 본래 이단자 마르치온(140년경)의 추종자들을 정통파 교회로부터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정통파 옹호자들은 영지주의자라는 또 하나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들을 “마르치온파”이자 “이원론자들”이라고 주로 공격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창조주 외에 또 하나의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주장했다. <지배자의 본질>을 보면, 신성한 권능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지만, 같은 나그함마디 코덱스에서 발견된 <세상의 기원에 관하여>, <요한외경>, <지배자의 본질>을 통해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형이상학적 이원론, 혹은 심지어 다신교와 유사한 용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레네우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알렉사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일원론적 영지”가 있었다고 밝힌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자료에도 발렌티누스 파 영지주의가(가장 영향력 있고 진보된 형태의 영지주의 가르침이며, 교회에 가장 위협적이었던 영지주의) 이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나와 있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주제는 <삼부 소책자>는 모든 존재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데, 발렌티누스파의 세 번째 문서인 <지식의 해석>에 의하면, 구세주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발렌티누스파가 공개적으로는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지만, 그들만의 집회에서는 하나님의 대중적 이미지(스승, 왕, 주, 창조자, 심판자 등)와 이 이미지가 나타내려고 하는 바, 즉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원으로 인식되는 하나님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이 근원을 “심원”이라 부르고, 그의 추종자들은 이를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주요한 본질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하나님의 형상에 불과한 것을 실재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영지주의자들은 일신교의 수정과 관련된 문제를 통해 이단으로 몰아 교회에서 축출하도록 몰았을까? 이 논쟁을 오로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종교적 질문이 사회적 정치적 쟁점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2세기 후반 정통파는 “하나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동시에 “하나의 주교”가 다스리는 교회 체제를 확립하였다. 영지주자들이 일신교에 수정을 가하는 행위는 아마도 이 체제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이었던 듯하다. 영지주의자들과 정통파가 하나님이 본질에 관해 토론을 벌일 때면, 영적 권위에 대한 곤쟁이 동시에 벌어졌다.
하나님의 법은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는가에 대해 클레멘트의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통치의 권한’을 ‘땅 위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위임한다. 이러한 위임을 받은 지배자들은 주교들, 사제들, 그리고 부제들이라고 답한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고개 숙여’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 신성한 주에게 불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의해 기독교 공동체가 ‘교역자’와 ‘평신도’로 나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교회라는 조직은 우월한 자들과 그에 종속되는 자들이라는 엄격한 체제를 통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렌티누스는 모든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 전통 외에, 바울의 제자인 테우다스로부터 비밀 교리를 전수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비밀 전통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아무 의심 없이 창조자로,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숭배하는 존재가 실은 진정한 하나님의 이미지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정통파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실상 “조물주”로 봐야 한다. 이 “조물주”는 더 고귀한 신적 존재들의 도구 역할을 하는, 그보다 낮은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하고, 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법을 만들어 이를 어기는 자를 심판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조물주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발렌티누스로부터 지식을 전수 받은 자는, 조물주의 권위와 모든 요구 사항을 믿는 소유가 어리석은 짓임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영지”를 얻기 위해서는 신성한 권능의 진정한 근원, 즉 모든 존재의 심원을 알아야 한다. 그 근원을 알게 된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영적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영지라 불리는 이러한 통찰력을 얻은 사람은 누구든 구원이라 불리는 비밀 성사를 받을 준비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영지”를 얻으려 하는 자는 이를 얻기 전까지 조물주를 진정한 하나님으로 착각하여 숭배해왔지만, 구원의 성사를 받고 나면 조물주의 힘으로부터 해방된다. 이 의식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신이 더 이상 조물주의 권위와 심판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초월하는 영역에 속한다고 공포하게 된다.
이는 “그대는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맹목적으로 섬기며 복종하는 조물주만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권위의 영역에서 벗어났으며, 따라서 그대의 권위 역시 벗어났다 할 수 있다!”라고 표현된다. 이는 정통파의 성직자의 권위가 위협받음을 말한다. 영지를 전수받는 자가 조물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구원의식은, 동시에 주교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켰다. “영지”가 주교와 사제의 명에 불복해도 좋다는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은 교계 제도에 반대한 비판자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삼부 소책자>에서는 “성부의 후예”인 영지주의자들과, 조물주의 자손인 영지를 전수받지 못한 사람들을 비교대조하고 있다. 성부의 후예들은 서로 평등한 관계로 결합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며 자발적으로 돕고 산다고 말한다. 영지를 전수받으면, 이는 곧 전 구성원이 조물주의 권능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영지를 전수받은 자들은 모두 입문 의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이라는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교역자와 평신도간 간극을 벌려나가고 있을 때에 그 구별 자체를 거부했다. 구성원들을 계급에 따라 서열을 정해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로 나누는 대신 그들은 엄격한 평등의 원칙을 따랐다. 영지를 전수받은 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동등하게 제비뽑기에 참여하여 “사제”, “주교”, 혹은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집회가 열릴 때마다 제비뽑기를 했기 때문에, 서열이 정해지더라도 그 순간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러한 관례를 통해서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선택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조물주의 수하에 지나지 않은 이레네우스가 무지한 상태에서 자신들을 갖가지 윤리적 구속으로 옭아매려 하였으나 영적으로 충만한 자신들은 그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레네우스는 이 막무가내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방어하기 위해서 “창조주 외에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이단의 가르침을 먼저 없애야 “하나의 보편적 교회” 및 그 교회 주교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레네우스는 교회 내 신성한 권위 및 인간 권위 사이 상관관계를 당연시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하나이면 진실한 교회도 오직 하나다. 또한 공동체에서는 오직 한 사람, 즉 주교만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다. 이에 이레네우스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이 무엇보다 창조주, 아버지, 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오직 하나임을 믿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교리가 성직자 권위의 기본 틀을 제공하였듯, “하나의 하나님”의 교리는 “하나의 주교”를 교회의 군주(“유일한 통치자”)로 두는 정통파 기독교 제도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3.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의 묘사에 삼위일체의 용어를 덧입혔다. 그러나 세 가지 신성한 “위격” 가운데 성부와 성자는 남성적 용어로 묘사되었고, 세 번째인 성령은 정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중성 단어 프뉴마(pneuma)로 표현되었다. 영지주의 자료에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있어 성별을 상징하는 내용이 계속 사용된다. 전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유대교의 전통을 반영하는 기독교의 언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일원론적이고 남성적인 존재로 묘사하지 않고, 대부분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 모두를 아우르는 양성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부 영지주의 집단은 예수로부터 야고보와 막달라 마리아로 이어지는 비밀 전통을 계승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 기도했다. 그러면 하나님 어머니의 특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첫째, 많은 영지주의 집단에서 하나님 어머니가 애초 한 쌍을 이루는 일부였다고 본다. 발렌티누스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묘사가 불가능하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을 양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곧, 양성의 한쪽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심오한 이, 최초의 아버지이고, 나머지 한쪽은 은총, 침묵, 모태, 그리고 “삼라만상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발렌티누스는 그리스어 문법에서 정해 놓은 단어의 성에 따라, 침묵을 여성으로, 아버지를 남성으로 표시하면서, 침묵이 아버지를 적절히 보완하여 온전케 한다고 논증한다. 또한 모태와 같이 침묵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근원의 씨를 받아, 이로부터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를 조화롭게 갖춘 신성한 존재의 발현을 이루어낸다고 설명한다. 영지주의자들 중 일부에서는 신성을 남성적 여성으로, 곧 “남성이자 여성인 위대한 권능”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성이 실제로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기 때문에, 단지 은유일 뿐이라고 주장한 교사도 있다.
둘째, 하나님 어머니는 성령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요한외경>에서는 하나님을 성부, 성모, 성자라고 한다.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리스 용어에 영혼(pneuma)이라는 중성어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은 무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외경>의 저자는 영혼을 뜻하는 여성 히브리 단어(ruah)를 염두에 두고서, 성부 및 성자와 결합하는 여성 “위격”은 성모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히브리 복음서>에서도 예수가 “나의 어머니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마 복음서>에서는 예수는 지상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을 하나님 아버지, 곧 진리의 아버지 및 하나님 어머니, 곧 성령과 대비했다. <빌립복음서>에 따르면, 성령(ruah)은 “많은 이의 어머니”이므로 기독교인이 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얻게 된다. 성령은 성모이자 동정녀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상대자, 즉 배우자인 존재이다. 동정녀는 세상에 내려온 성령을 뜻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므로, 성령은 동정녀로 남는다. 저자는 계속해서 “아담이 두 동정녀로부터, 곧 성령과 동정녀인 흙으로부터 태어났으므로, 그리스도 또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동정녀의 잉태는 삼라만상의 아버지와 성령, 두 신성한 존재의 신비스런 합일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셋째, 영원과 신비의 “침묵” 및 “성령”에 덧붙여, 일부 영지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하나님 어머니의 특징은 “지혜”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지혜는 다수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녀는 모든 피조물을 낳은 “최초의 조물주”임은 물론, 인간을 깨달믕의 경지에 올려놓고 현자로 만든 존재이다. 발렌티누스와 마르쿠스의 추종자들은 통찰력(영지)을 얻기 위해 “신비와 영원의 침묵”, “삼라만상 이전에 존재하는 은총”이자 “결코 멸하지 않는 지혜”인 어머니에게 기도했다. 여타 영지주의자들은 아담과 이브가 그녀로 인해 낙원에서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선 첫째로, 그녀는 그들에게 자의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고, 둘째로 양식을 찾도록 인도해 주었고, 셋째로 그들의 셋째와 넷째 아이, 곧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자면 셋째 아들 셋과 첫째 딸 노레아를 잉태하도록 도와주었다.
신성한 근원을 “양성적 권능”이라 묘사했던 한 문서는 계속해서 “그 권능으로부터 유래한 존재, 즉 하나의 존재인 인간이 그 안에 둘을 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바로 여성을 내포하는 남성적이고도 여성적인 존재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하와를 가리킨다.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창세기 1장 26-27절의 첫 번째 창조 이야기를 자주 인용한다(“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그대로 담은 사람[아담]을 만들자…하나님이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이 부분을 양성 인간의 창조를 뜻한다고 가르쳤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양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와 어머니)의 형상대로 똑같이 만든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 혼재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영지주의 교인들에 따르면, 조물주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그의 어머니인 지혜가 “그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고”,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심어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활용한 생각이 어머니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어리석은 행동을 일삼았다. 그래서 “그가 어리석은데다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조차 무지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선언했다. 영지주의 문헌을 보면, 조물주가 그의 오만함으로 인해 자신보다 우월한 여성 권능으로부터 징벌을 당한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영지주의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묘사할 때 남성적 표현과 여성적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여기에 인간 본성을 나타내는 표현을 덧붙인다. 이들은 동등한 혹은 양성적인 인간의 창조를 암시하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자주 언급한다. 또한 이러한 남녀 사이 평등의 원칙을 공동체의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형성하는데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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