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법은 사랑
1. 최고의 법
이 법은 [왕]의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여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에서 예수님은 왕적인 권위로 말씀하신다(마5:43-44).
이 법은 다른 모든 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법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당당하게 나열된 굉장한 미덕들이나, 깊은 신앙, 긴 기도라 할지라도 만일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으면 하나님께 하등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마5:23-24). 이 사랑의 정신이 우리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시험이다.[무디]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밖으로 흘러나오게 하지 않는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서 4:8).
이 법을 순종하는 것이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다."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자비롭지 못한 태도는 마치 [부머랭 2]과 같이 그 사람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또한 이 말씀은 타인에게 대한 무정한 마음이 결국은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생활 분위기에 해독을 끼치듯이 자비로운 마음은 그 생활 분위기를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자신이 스스로 개척한 세계에서 살게되며 하나님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2. 사랑의 의미
예수님께서 권하시고 칭찬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는가? 그저 온순하고 도덕적 뼈대없이 살을 에는 듯한 역풍에 맞설 힘이 없는 선량하게만 보이는 성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正과 邪에 대한 구별을 흐리게 하면서 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관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마13:6)는 무서운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고,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을 깨끗케 하셨던 (마21:19,요2:15)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도덕적 가치에 무관심한 안일한 자비심을 권하시지 않았다. 이것은 기독교적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태만과 무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인 태만과 무관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소한 것을 가지기에는 너무 도량이 넓어서 결코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었다. 또한 남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 보아서 그의 가장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 자신이 어려운 처지를 겪어보아서 이해심이 많으며 그 중심에 큰 소망을 가지고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인내하며 또한 하나님을 아는 전혀 순결한 마음을 뜻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은 그저 좋기만 한 유순한 성격이 뜻하듯이 우리의 비판 기능을 전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참조 요7:24 "공의로 판단하라").예수님께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97:10)는 시편 기자의 권고에 아멘이라고 동의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그의 도덕적 엄격을 제한다면 그 예수님은 신약이 말하는대로의 예수님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나의 하나님께는 불타는 마음을! 이웃에게는 사랑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강철같은 마음을!"이라고 외친 [어거스틴]의 위대한 말처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는 엄격해야 한다.
3.사랑의 필연성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주린 심령들을 만나셨다.[삭개오]의 지친 얼굴이나(눅 19:5) 사마리아 여인의 유창한 말에 (요4:10이하) 나타난, 그리고 목자없는 무리(마9:36)의 지친 표정에 나타난 사랑의 굶주림이 예수님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한 여러가지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신 반면 사랑할 각오가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셨다. 세상의 모든 심령이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예수님에 따르면 교회나 국가나 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원수는 언제나 [사랑의 결핍]이었다. 자아는 바로 적그리스도이다. 이기적인 태도는 그리 흉하지 않은 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바로 육적인 죄와 비교해서 그리 흉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의 사회나 오늘의 사회가 간과하기 죄중 하나이다. 육적인 죄나 마음의 죄를 불문하고 어떤 다른 죄보다도 이 죄에 대한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으시다](계1:14). 여러가지 다른 죄를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실 수 있으나[사랑의 결핍]에 대해서는 참으시지 못한다.
4. 사랑의 방법
진실이 없는 친절이 있을 수 있으며, 방법만 존재하는 사랑도 사랑으로 보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공격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구제할 때에 나팔을 불었다(마6:12).그들의 사랑은 억지 사랑이었고 직업적이며 직무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말을 했다. 비록 의식적인 미덕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가득차 있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사랑은 모조품에 불과했다. 그러한 사랑은 가짜로 들렸다. 그래서 그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그 속에 있는 흠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차라리 전혀 무심해 버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이유다.
진정하는 사랑은 남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6:34,고전13:4).사랑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며 선심을 쓰는체 하는 것이 아니다.다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태도가 결정적으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가르치신 사랑의 행위는 은밀히 행해졌다(마8:23-26), 특별히 [동네 밖으로 그를 끌어내사]라는 말에 주의하라(눅5:14).그의 사랑은 짐짓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여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하신 사랑이었다(마10:21).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형제가 되신 것은 이 세상에서 형제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우셨기 때문이었다. 의무적인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다.
5. 사랑의 어려움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의 법칙]자체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진심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것을 삶에 적용하려고 했을 때 어려움은 일어났다. 언제나 어려움이 시작되는 곳은 여기에서 다 이것에 대해 분명히 알아보자. 우리는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마22:40)에 동의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우리가 신경질을 부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용서에 대해 하신 모든 말씀에 찬동할 수도 있지만 만일 우리가 모모씨가 언젠가 우리를 무시했다거나 우리와 충분히 의논을 하지 않았다거나 우리에 대해 난폭한 말을 했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께 가까워 진 것이 아니다. 최초의 제자들 무리가운데서도 때때로 사랑이 무너지곤 했다. 누가 더 우월한가 하는 문제가 그들을 갈라놓았다(마18:1,막9:34,눅 22:24). 그리고 다툼이 일어났다(마20:21-24).제자들중 누구도 몸을 굽혀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다.(요13:45).자존심과 개인의 권리를 내세우므로 사랑은 그들 마음속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자주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아주 명백하다. 예수님의 태도는 세상의 태도와 정반대의 것이다. 세상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때 여러분의 권리를 위해 일어나서 받은 해와 동등한 보상을 받아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자주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런 태도야말로 근본적인 자주성의 결핍을 뜻한다고 하신다. 이러한 태도는 여러분이 여러분을 해하는 것들을 초월할 만큼 충분히 자주적이 못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여러분은 그것의 노예이지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이것이 [산상보훈]의 가르침이다
(마5:38-48).이것이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신](벧전 2:23,막14:65)그리스도 전생애의 가르침이다. 만일 사랑과 개인적인 자주성이 서로 충분한다면 그 자주성은 거짓된 자주성이다. 또한 우리가 그럴듯 하게 보이는 우리의 자주성과 그리스도의 명령인 사랑중 어느 것에 순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순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투쟁이 시작된다. 또한 이것이 사랑에 따르는 어려움 중 하나이다.
최초의 제자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오늘에 와서도 매우 결실한 또 하나의 다른 어려움은 그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서약하게 한대로 사랑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과연 사람들이 그런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를 동의하고 동시에 그 명령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그 명령의 실현은 용이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 실천을 시작할 의시가 전혀 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먼저 시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사랑으로 대하며 그 다른 한 사람이 그에게 사랑으로 대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풀고 그에 따를지도 모르는 모든 위험을 감수할 각오를 갖는다는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는 사랑을 받는 자가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곧바로 뛰어드는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모험적인 사랑이었다. 우리가 아직 그의 원수였을 때에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5:10)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가 온 세상을 위해 용서를 탄원한 것은 세상이 그를 못박아 죽였던 십자가 위에서였다(눅23;34).이것이 기독교적 모험의 주요 부분이다. 이 세상과 같은 곳에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모험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러한 위험성을 결코 숨기려 하시지 않으셨다(눅21:12). 그는 바로 그 위험성을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도전으로 삼으셨다. 그는 청년에게 있는 모든 정열과 용기가 그 도전에 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그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청년들은 그 도전에 응했고 오늘날에도 응하고 있다. 사랑의 어려움은 또한 사랑의 영광이기도 하다.
6. 사랑의 범위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어느 정도까지 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갈보리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 형제를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을 때(마18:21-22).그가 뜻하신 것은 진정한 사랑은 한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너무 지나친 것을 요구하셨는가? 그의 요구를 지나치게 높은 수준에 두셨는가?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이상적인 것이어서 이 세상과 같이 거친 경쟁적인 세상에서는 실천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복음서는 두 가지 답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인은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기 위해 존재하며(마19:26,막9:23),또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지나친 것을 기대하고 계시며 인간이 미치기에는 불가능한 사랑의 한계가 있다는 비난은 욧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복음서는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기독교가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요구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암시하신 적이 없다(마5:20-48).
그는 말씀하시기를 기독교의 영광은 그 속에 전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내적 충동에 의해 인간으로 하여금 초월하게 하며 인간적으로 가능케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다.[웰즈]가 말한 것처럼 [진리는 갈릴리 사람 예수가 우리의 좁은 마음에 비해 너무나 위대한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랑의 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마16:24). 예수님께서는 솔직히 사랑의 법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때때로 그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당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여, 제가 제 십자가를 졌나이다]라고 말하는 자가 사랑의 법과 일곱번의 일흔번 용서에 대해 지나친 요구라고 불평할 권리는 없다. 이것이 바로 져야 할 십자가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갈보리를 의미했다.[제자는 그 선생보다 나을 수 없는 법이다](마10:24).
7. 사랑의 동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에 대하여는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가 요구하신 것을 이루는 일에는 도움을 주셨다.그가 [사랑의 법]을 세우셨을 때 그는 그것과 함께 그에 필요한 동력을 제공하셨다. 복음서에는 세 가지 중요한 동기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성과 사랑스러움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사랑을 일으키신다. 다른 사람의 초라한 외투나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투,이상한 버릇같은 것은 쉽게 눈에띄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욱 깊이 들어가서 모든 사람이 한왕의 아들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셨다. 그는 멸시받는 배교자 세리에 대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눅19:9)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선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을 여왕에게나 주어질 법한 위엄과 예의로 대하셨다(눅7:37이하). 또한 [삼가 이 어린 소자들 중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아라](마18:10)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생각하신 것은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약한 자와 보호받지 못하는 자, 그리고 연약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가장 강렬한 사랑이 일어나는 때는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모든 얼굴들에서 예수님께서 보셨듯이[하나님의 형상같은 것을 보게 될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 사랑을 창조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께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위해 그 힘을 아낌없이 쓰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갈보리의 수난이 닥쳤을 때 그들은 그가 죽으신 것이 순전히 그들을 사랑하신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아무리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여러분은 그래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 국제평화를 위한 참 동기가 존재한다. 만일 그 자신은 평화를 믿지도 않고,다른 모든 나라들 이전에 그의 조국만을 생각하는 것을 애국심으로 알며 남의 권리를 짓밟게 되더라도 그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음의 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세대에 있어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업을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모여 도덕적으로 벌리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이 사업은 모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지는 명백한 의무이며 그 동기와 추진력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의 영으로 충만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하셨다.일곱번의 일흔번 용서는 베드로와 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발견한 사실은 그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께는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스스로 동료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방법은 희망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감에 따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도록 하였을 때 형제에 대한 사랑이 저절로 일어났다. [카이로]의 [템플 가드너]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말씀과 단 한자 틀리게 표현하기를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다]라고 했다.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도 문제의 핵심이 되는 말이다. 어떤 저명한 독일인이 [괴테]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괴테) 나로 하여금 그의 힘을 사랑하도록 가르친다.]라고 했다. 당신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다. 어찌 당신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못하시겠는가?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그의 힘으로 사랑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8. 사랑의 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 같이 보이는 사랑이 실재에 있어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최초로 증명해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사랑은 무정하고 비판적인, 그리고 남의 흠 찾기를 좋아하는 태도가 얻지 못하는 승리를 획득한다. 부끄럽고 상심한 죄인들에 대한 바리새적인 태도는 그 죄인에 대해 구원할 힘을 과거에도 전혀 갖지 못했으며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태도는 전혀 반대로 작용해서 다만 쓰라림과 낙심의 쇠사슬을 전보다 더욱 튼튼히 조이게 할 뿐이다.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을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한 영혼도 천국으로 끌어 들일 그 세리를 사랑하셨고 그를 사랑하심으로써 그에게 인격과 자존심을 되찾아 주셨다.
또한 겁이 많고 부끄러워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굳세고 강하게 하셨으며 그의 눈에 희망의 빛을 주시고 그를 구원하였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무자비한 비판을 받았더라면 오늘날 성경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같은 베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그와 같은 무서운 실수를 범한 후에라도 그를 계속 사랑하셨으며 (막 16:7,요21:15),그를 무서운 죄의 구렁과 낙망의 진창에서 즉시 건지시고 그의 발을 반석위에 다시 든든히 세우셨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영원한 모본이 되신다. 사랑은 비판보다 나을 뿐 아니라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효과적이다. 사랑은 바로 구원하는 힘이다. 어떤 우화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세상에는 철석과 같이 굳은 물건을 녹이는 유일한 것, 즉 영원히 굳은 반석을 용해시킬 만큼 강한 단하나의 얜체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피다.]이 말에는 우화 이상의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버나드쇼]의 화곡 [성 쟌 다르크]에서 [쟌 다르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만일 불 속을 걸어가야 한다면 나는 그 심장부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걸어 가리라.]이와같이 사랑 역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패배 속에서 승리의 무기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모든 강한 것 보다 더 강하다(고전1:25).
9. 사랑의 보상
사랑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이 요구하는 전부는 계속 더욱 더 사랑하게 해 달라는 것 뿐이다. 상을 받기 위해 기독교의 길을 택한다는 사상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 떨어진 것이다.[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지니라](눅 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있다. 분명히 '사랑없음'은 그 댓가를 받게 된다. 무정하고 비판적인 성격은 그러한 성격을 내보인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 그리고 결국 그 자신이 사랑 없는 사막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발견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바로 그러한 마음이 궁극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왕에게서 그 빚을 탕감받고서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던 종에 관한 위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은 엄숙한 말로 끝을 맺고 있다(마18:23-24)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사랑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교제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 스스로를 제외시킨다.
그러나 만일 [사랑없음]에 대한 보상이 있다고 한다면 사랑에 대한 풍성한 보상 역시 있다.[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눅 19:26)라는 예수님의 흔히 쓰시는 원리는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창조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랑이 재생되며 결국 사랑으로 사는 사람에게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비록 냉수 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어질 때 그 일은 준 자에게 축복으로 보상된다(마10:42). 왜냐하면 주님의 형제들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 대한 선물은 바로 주님 자신에 대한 선물이 되기 때문이다(마25:40). 이 위에 용서의 사랑을 베푸는 것은 바로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위치에 두며 정결케 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영역 속에 살게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6:1214). 그러나 사랑의 정신이 받는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요14:23).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영이 거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한다.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이 그 사람의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거주하시며 그 영혼을
그의 거처로 삼으신다.이와같이 사랑은 영광을 얻게 되며 이러한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
우리는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오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의 형제들이옵니다. 성령이여 비둘기 같이 우리 마음속에 강림하셔서 우리들로 하나같이 되게하소서 우리가 늘 당신만을 향하여 당신과 하나된 것 처럼. 그가 우리에게 형제와 친구가 되어 우리와 하나된 것처럼.
생각해 볼 문제들
1."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은 이와같이 명령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2.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사랑의 동기들로써 어떤 것들을 창조하셨는가?
3."너희가 이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행했으므로" 이 말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답변하겠는가?
4. 사랑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과연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법을 따라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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